믿음의 비전_2010.12.19
(룻 1:12-14)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13]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유대출신의 나오미란 여인은 유대지방의 흉년을 피해 모압지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비극을 맞이한다. 우리는 이미 나오미와 그 일가족이 흉년이란 상황에서 모압으로 이주한 것이 어리석은 판단이란 것을 안다. 흉년의 시기 그들은 유대땅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모압으로 이주함으로써 그들은 두 아들조차 이방 여인과 결혼시켜는 잘못을 더하고 말았다.
이제 그녀는 징계를 받고 다시 유대로 돌아가려고 하던 참이다. 그러면서 과부로 남겨진 두 며느리에게 진심어린 권면을 한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돌이켜 다시 유대로 가려고 한다. 얘들아, 이제 너희는 남편도 잃었다. 나와 함께 가봐야 너희에게 남편을 낳아줄 수도, 없어줄 수도 없다. 솔직히 나는 아무 비전이 없단다. 그러니 아직 젊은 너희는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살 수 있도록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그곳에서 다시 남편도 얻고, 앞날을 준비하렴’
나오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나오미는 현실적 상황을 충분히 인정하고 하여튼간 두 며느리에게 정직하게 새로운 삶의 비전을 찾아갈 것을 권했다. 진심으로 나오미에게는 그 어떤 현실적 비전도 없었다. 그녀는 홀몸으로 되돌아갈 형편이었다. 두 며느리는 펑펑 울었다. 그러나 결국 오르바는 되돌아가기로 맘먹었다. 진실로 이제 나오미를 쫓아가서는 별다른 삶의 새로운 비전은 전혀 없는 것이었다. 오르바는 삶의 새 비전을 얻기 위해 되돌아 간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보이는 비전을 쫓아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룻은 달랐다.
(룻 1:17, 개역)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이 아무 비전이 없는 나오미를 쫓은 이유는 무엇일까? 룻은 여호와 신앙을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나오미가 여호와의 징계를 받음을 보았음에도 룻은 그 속에서 여호와께서 참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임을 발견했고, 자신의 믿음의 대상이자 신앙의 비전을 삼았다.
언제든지 믿음은 드러나 보이는 현상을 뛰어넘어 숨은 진리와 가치를 바라보고 인내하며, 세상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원천이다. 오르바는 ‘세상의 비전’을 따라간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믿음의 통찰이란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객관적으로 나오미의 권면이 옳은 권면임을 알고, 세상의 비전을 회복하고자 되돌아갈 것을 선택했다. 반면, 룻은 ‘믿음의 비전’을 따라간 사람이다. 객관적인 현실은 분명 그녀에게 어떠한 세속적 삶의 비전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믿음의 통찰이 있었기 때문에 믿음의 비전을 선택하고, 세상의 비전을 버렸던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유대에 도착한 룻은 역시나 전혀 세상적 비전이 없는 일상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부유한 지주의 보리밭에 들어가 이미 추수가 끝난 뒤 버려진 이삭을 줍는 것이었다. 또한, 젊은 과부인 그녀에게 좋은 새 남편을 얻을 수 있다는 가망성은 사실상 거의 전무했다. 그러나 믿음의 비전을 따라간 그녀에게 하나님은 보아스를 주셨다. 이로써 하나님은 전혀 현실적 가망성이 없던 룻의 상황을 완전히 바꾸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품어야 할 비전은 '믿음의 비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