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예수

(막 1:34, 개역)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일찍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이 난동을 부린 바 있다.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자 많은 곳에서 귀신들이 쫓겨났다. 그리고 귀신들은 예수님을 증거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런 귀신들의 증거를 받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오히려 귀신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증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것과 증거하는 것이 불행할 수 있다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를 만나게 된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렇게 외쳐야 된다고 배운다.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러한 외침도 허락 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음을 말이다.

만약, 제자들이었다면. 그리스도를 쫓는 자들이며, 섬기는 자들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알고, 자신을 증거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그렇게 했을 때 예수님은 매우 불쾌해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사실은 무엇이든지 어떤 목적과 동기로 행하느냐의 문제가 모든 행위의 선악의 유무를 결정하는 기본 토대가 된다는 사실이다.

귀신들을 예수님을 혐오하고 증오함으로써 예수님을 알았고, 증거했다. 그들이 아는 예수님은 자신들을 심판하고, 영원히 정죄할 지옥의 심판자였다. 귀신들은 지옥의 심판자로써의 예수님을 증거했다. 그들의 적으로써 예수님을 알았고, 소개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아는 것과 증거를 거부했다.

예수님을 내 구세주로 알고 증거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큰 은혜이며, 특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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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10-12-24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가 아는 예수..죽음의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평안함을 주신 분
그 어떤 고난을 당해도 그 고통조차 이길 수 있는 소망을 주신 분
감사합니다.
 

믿음의 비전_2010.12.19

(룻 1:12-14)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13]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유대출신의 나오미란 여인은 유대지방의 흉년을 피해 모압지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비극을 맞이한다. 우리는 이미 나오미와 그 일가족이 흉년이란 상황에서 모압으로 이주한 것이 어리석은 판단이란 것을 안다. 흉년의 시기 그들은 유대땅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모압으로 이주함으로써 그들은 두 아들조차 이방 여인과 결혼시켜는 잘못을 더하고 말았다.

 이제 그녀는 징계를 받고 다시 유대로 돌아가려고 하던 참이다. 그러면서 과부로 남겨진 두 며느리에게 진심어린 권면을 한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돌이켜 다시 유대로 가려고 한다. 얘들아, 이제 너희는 남편도 잃었다. 나와 함께 가봐야 너희에게 남편을 낳아줄 수도, 없어줄 수도 없다. 솔직히 나는 아무 비전이 없단다. 그러니 아직 젊은 너희는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살 수 있도록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그곳에서 다시 남편도 얻고, 앞날을 준비하렴’

나오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나오미는 현실적 상황을 충분히 인정하고 하여튼간 두 며느리에게 정직하게 새로운 삶의 비전을 찾아갈 것을 권했다. 진심으로 나오미에게는 그 어떤 현실적 비전도 없었다. 그녀는 홀몸으로 되돌아갈 형편이었다. 두 며느리는 펑펑 울었다. 그러나 결국 오르바는 되돌아가기로 맘먹었다. 진실로 이제 나오미를 쫓아가서는 별다른 삶의 새로운 비전은 전혀 없는 것이었다. 오르바는 삶의 새 비전을 얻기 위해 되돌아 간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보이는 비전을 쫓아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룻은 달랐다.    


(룻 1:17, 개역)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이 아무 비전이 없는 나오미를 쫓은 이유는 무엇일까? 룻은 여호와 신앙을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나오미가 여호와의 징계를 받음을 보았음에도 룻은 그 속에서 여호와께서 참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임을 발견했고, 자신의 믿음의 대상이자 신앙의 비전을 삼았다.  


언제든지 믿음은 드러나 보이는 현상을 뛰어넘어 숨은 진리와 가치를 바라보고 인내하며, 세상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원천이다. 오르바는 ‘세상의 비전’을 따라간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믿음의 통찰이란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객관적으로 나오미의 권면이 옳은 권면임을 알고, 세상의 비전을 회복하고자 되돌아갈 것을 선택했다. 반면, 룻은 ‘믿음의 비전’을 따라간 사람이다. 객관적인 현실은 분명 그녀에게 어떠한 세속적 삶의 비전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믿음의 통찰이 있었기 때문에 믿음의 비전을 선택하고, 세상의 비전을 버렸던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유대에 도착한 룻은 역시나 전혀 세상적 비전이 없는 일상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부유한 지주의 보리밭에 들어가 이미 추수가 끝난 뒤 버려진 이삭을 줍는 것이었다. 또한, 젊은 과부인 그녀에게 좋은 새 남편을 얻을 수 있다는 가망성은 사실상 거의 전무했다. 그러나 믿음의 비전을 따라간 그녀에게 하나님은 보아스를 주셨다. 이로써 하나님은 전혀 현실적 가망성이 없던 룻의 상황을 완전히 바꾸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품어야 할 비전은 '믿음의 비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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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10-12-20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룻1:16)룻이 가로되....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의 묵상을 읽으면서 군대를 전역할 시기가 생각이 난다.그때 당시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전역을 하고 서울로 올라가 고시원에서 세상적 꿈을 위해 공부를 할지..김해로 내려가서 학교를 복학할지..믿음이 약한 그 당시에는 정말 고민이 많이 되었고 룻기를 읽으면서 나의 상황과 똑같은걸 느꼈다. 오르바의 길을 택할것인가? 룻의 길을 택할것인가?
나오미의 하나님을 룻은 볼 수 있었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만들고 싶었던 룻의 심정을 보면서..나도 나오미의 하나님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인도한 형제님이 정말 나오미 같았다. 그 형제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나는 룻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선택은 했지만 확신못햇다. 그러나 결과는 성경대로 였다. 나는 보아스(김해교회)를 만났다. 나오미의 하나님을 나는 만났고 현재까지 은혜아래서 자라고 있다. 앞으로 나에게 룻의 선택을 요하는 상황들이 많이 있을것이다. 그때 생각하자!! 세상의 비전이 아닌 믿음의 비전을.

BH,G 2010-12-20 23:45   좋아요 0 | URL
멋진 간증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매력

(막 1:32-33, 개역)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권세 있는 설교와 더러운 귀신을 내보내는 이적을 통해 일약 예수님은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와 이적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그 후 예수님을 찾는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갈릴리 온 사방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밤마다 예수님의 거처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의도와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과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요? 예수님은 분명 병 고침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중점적으로 행하는 일종의 주술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보다 큰 대의는 ‘가르치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가르침보다 예수님의 주술적 능력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주객전도’였습니다.

언젠가 TV에서 어느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의 수업 흥미와 집중력 유발을 위해 마술을 시연하고 있는 모습을 방영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모습에서 선생님이나 아이들 모두 학습목표에 학습에 중점을 두기 보다 마술을 즐기는 것이 더 흥미로운 것일 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마술사가 되었다는 것이 더 큰 이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나 학생들이나 본질의 문제를 왜곡해 환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적이나 병 고침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일들 조차 그의 사역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자 부수적인 부분이기에 실행하셨고, 용납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면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라는 신념에 더 많이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다 고귀하고 고상한 가치와 의미를 얻지 못한 채 보조적인 가치를 주된 가치로 삼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대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을 배우고자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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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10-12-18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수님의 매력을 오해한 유대인들...
사람과 사람이 부딪혀 살아가면서도 그의 매력을 오해할경우가 있는것 같네요.
저 또한 형제 자매님들의 매력을 오해하지말고..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 (권세있는가르침)를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수종할 수 있는가

(막 1:30-31, 개역)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베드로의 장모님은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이 열병으로 그녀는 예수님이 친히 방문하였음에도 전혀 침상에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건강한 사람이라면 방문한 손님을 환대하며 맞아들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심지어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그녀는 조금도 꿈쩍하지 않고 침상에 그대로 누워 열병으로 혹사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그녀의 침상으로 나아가 그의 손을 잡으며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가서는 것과 그녀와 접촉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말씀으로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보다 친밀하고 애정 어린 모습으로 그녀의 가냘픈 손을 꼭 쥐고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녀는 일순간 열병이 떠나고 깨끗이 나아버렸습니다. 그 즉시 그녀는 마땅히 해야 할 손님에 대한 예우이자 예수님을 수종하는 일을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수종할 수 있습니까? 바로 죄의 병으로부터 치유 받은 영혼들입니다. 죄인들이 예수님을 수종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죄의 병으로 말미암아 꿈쩍도 하지 못한 채 침상에 누워 있는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수종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병을 고침 받고, 영혼이 건강하게 된 사람이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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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10-12-1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침상에서 일어나서 수종하는일을 고민하는
저의 모습을 반성해봅니다..이건 예우가 아니겠죠? ^^
어서 일어나서 예우를 갖추어야겠습니다.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막 1:21-24, 개역)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시작되면서 두드러지게 표출된 두 가지의 반응을 살펴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동안, 청중은 죽은 둣이 고요했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눈빛은 반짝였습니다.

말씀이 끝날 무렵이었을까요? 청중들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가히 감탄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들의 감탄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저 분의 말씀은 마치 권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와 울부 짓는 것 같구나!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감동과 중압감이야!’ 즉각적으로 그들은 지금까지 서기관들에게 배운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감동과 감탄에 빠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권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죽은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적 권위와 권세가 버려진 마른 낙엽처럼 날려갈 뿐이었습니다.

한편, 또 다른 일각에선 전혀 의외의 반응이 연출되었습니다. 어떤 귀신 들린 사람이 갑자기 소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주 분노했지만, 겨우 자신을 가다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명을 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노려보며 소리쳤습니다. ‘나사렛 예수님,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멸하기 위해 이제 오신 것입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관통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선포에 경악했습니다. 드디어 창세에 예고된 그 일이 실현되고 있는 찰나였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닫아놓은 천국의 문이 열리는 울림이었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영원한 형벌이 예고되는 심판의 전주곡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은 그 권세 있는 말씀 앞에 눌림과 동시에 응어리진 공포와 분노를 토해내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말 속에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 외침을 다시 들어봅시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것은 분노의 고함입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어느 소매치기범이 헐레벌떡 뛰어 와서는 나를 붙잡습니다. 칼을 들이밀며 인질을 삼아 위기를 모면하려고 발버퉁칩니다. 우리는 소리칩니다. ‘왜 이러세요! 왜 나 한테 이러는 거요!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라고 나한테 이러는 거요!’ 우리는 기겁합니다. 한 시라도 이 사람과 붙어 있고 싶지 않습니다. 상황은 공포스럽고 이 불쾌한 인간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길 소망할 뿐입니다. 바로 귀신에게 있어 에수님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절규가 무엇이라 묻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저는 바로 이 외침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자, 생명의 문입니다. 그 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은 멸망입니다. 예수님과 상관해야 할 것인데 예수님과 상관 되는 것에 기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상관 되는 것을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정을 하고, 쏘아 붙입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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