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앞에 가면 낫는다.

(막 2:2-5, 개역)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재차 가버나움을 방문하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병고치는 일이 아니라 말씀의 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장 본질적인 사역이자, 예수님이 원하신 일은 말씀의 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한켠에선 놀라운 이벤트가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리고 가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아무튼 그 중풍병자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아마 병색이 꽤 짙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중풍병자의 가족이나 일가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 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다 놓아야겠다고 맘먹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상적인 통로로는 도저히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근의 집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고, 다시 그 옥상에서 옆집으로 넘어가면서 기어코 예수님이 머무신 집 지붕 위에까지 당도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선택은 더 이상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단 하나, 지붕을 뜯어서 구멍을 내고 그 안으로 줄을 달아내려 예수님의 면전에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보고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예, 정말 그건 기막힌 믿음이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 예수님을 경외하는 믿음? 글쎄요. 그런 차원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의 완전한 믿음은 오직 이것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 앞에 내려놓으면 이 중풍병자가 낫는다.’라는 것입니다. 예,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들었고, 예수님이 낫게 해주실 것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풍병자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병고침이 아니라 죄사함이었습니다. 영혼의 고침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병고치심을 믿는 믿음’을 보심과 동시에 우선 필요한 믿음, 먼저 고쳐야 할 병은 영혼의 병임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물론, 예수님은 그 몸의 병까지도 치료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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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 이야기_2010.12.30

(잠 17:19, 개역)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얼마 전 한참 어린 자매님과 이메일로 교제를 나눈 적이 있다. 자매님은 나를 위한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매우 조심스러워 하고 한편으론 자신의 행동에 대해 걱정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오히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 조언을 해주는 것은 나에게 더욱 좋은 일이다.

세상에서 언제부턴가 ‘열린경영’이란 말이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그룹 총수들이 앞다투어 직원들의 게시판에 글을 남기고 언제든지 자기에게 메일을 넣어달라고 이메일 계정을 개방해둔다. 직급의 수직관계가 주는 부자연스러움과 권위를 벗고 동일한 위치에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도 더더욱 그러하다. 부장교사? 그건 교회학교 안에서 봉사를 위한 하나의 질서 차원에서 주어진 것일 뿐 계급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어느 교사에게든지 ‘교제를 한다.’라는 대원칙 앞에서 우리 서로는 그저 형제요, 자매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게 조언과 권면을 해주는 어린 자매님이 좋다. 누군가는 후환을 두려워해서 말하길 꺼린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런 건 싫다. ‘어른’이란 개념, ‘부장’이란 개념. 그런 것이 교제를 막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것은 ‘저는 당신의 복수가 두렵군요.’, ‘저는 당신을 불편하게 생각해요.’란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문턱을 낮추어 놓고 누구든지 가벼운 마음으로 넘어 들어와 교제할 수 있었음 좋겠다. 그것이 나를 안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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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11-01-04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형제자매님들이 불편해하지 않고 편하게 나에게 교제를 청한다?!
정말 기쁜일이네요..
 

  

원칙의 파괴자_2011.1.1

(요 8:3-11, 개역)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간음하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 현장에서 발각되었고,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운명은 돌에 쳐 죽임을 당하는 율법의 형벌뿐이었다. 분명, 그녀는 새파랗게 질렸을 것이다. 반라의 몸에 가녀린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모세의 율법’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했을 만큼 유대인들의 근본적인 정신 사상이자, 정체성 그 자체였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고정관념’이기도 했다. 우리가 유대인을 비난할 수만 없는 것이 그것이 그들이 배운 사고방식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마치, 부모를 구타하는 것은 ‘패륜’이라고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돌덩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들이 손에 쥔 돌덩이. 그것은 ‘정죄’였다. 누군가를 정죄하기 위해, 누군가를 심판하기 위해 손에 든 것.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에게도 던져야 할 돌덩이를 남을 향해 들고 있는 꼴 있었다.

아, 너무나 견고하고 높은 저 ‘모세의 율법’. 누가 감히 도전할 자 있으랴!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세운 율법에 도전했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일이자, 일종의 ‘민족적 패륜’과도 같아 보였다.

‘모세의 율법’이 정죄한 여자. 마땅히 돌로 쳐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방도를 생각할 수 없는 여자. 그 여자를 향해 예수님께서 폭탄 선언을 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그것은 완전히, 전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대원칙의 파괴’였다. 유대인의 민족정신의 파괴자,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

훗날 요한은 예수님의 이 파괴적인 행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변론해준다.

(요 13:34, 개역)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렇다. 그것은 익히 없었던 새로운 계명, 새로운 율법이었다. 돌로 쳐 죽이는 법이 아닌 사랑 안에서 긍휼과 용서의 법이었다. ‘모세의 율법’을 들어 죄인들이 죄인을 정죄할 때, 죄 없으신 예수님은 죄인을 향해 ‘사랑의 계명’을 들어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다.

교회.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새 계명이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은 얼마나 어려운지. 교회 안에서 상처받고, 갈등할 때 우리는 ‘주님 보고 신앙생활 해야지요.’ 라고 위로한다. 그러나 때로는 나 자신부터 반성하게 된다. 형제, 자매의 뺨을 때리면서 ‘주님만 보고 신앙생활 해야지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은 원칙을 파괴했다. 무엇인가? 원리와 원칙 그 모든 것 위에 가장 첫째 되는 원칙이 바로 ‘사랑과 긍휼’이라는 것을 말씀해주고 계시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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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이 격동될 때

(막 1:45, 개역)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예수님께서 병고치는 은사와 사역으로 갈릴리를 두로 다니실 때 한 문둥병자가 친히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나아 왔음에도 유독 이 한 명의 문둥병자를 클로즈업해서 다루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예수님의 치료를 받은 후 특별한 지시를 받았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병고치는 사역으로 인해 지나치게 주목 받는 것과 사람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어 더 분주해지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문둥병자를 고쳐줌과 동시에 그에게 잠잠히 모세에게 병 나은 것을 증거하고, 어디가서 내 도움으로 나았다고 굳이 소문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예수님의 소문은 허다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문둥병자는 ‘예, 그렇게 하고 말구요’라고 대답했을 것이고,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정작 병이 낫고 나니까 동네로 돌아가 자신이 낫은 경위를 샅샅이 전파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병 나은 경위를 물었고, 그는 흥분에 도취되어 아낌없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탁은 알았지만 주의 깊게 유념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흥분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곤란을 겪은 사람은 다름아닌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더욱 드러내어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나섰습니다.

아무튼 이 문둥병자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비록 예수님의 부탁을 지키지 못했지만 그것이 단순히 범죄의 문제로 귀결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문둥병자가 약속은 했지만 그가 받은 은혜와 회복이 너무나 크고 감동적이고, 그 마음을 격동시키는 흥분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는 사건의 경위를 샅샅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우리가 이런 문둥병자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누구든지 그 마음이 격동되고 흥분될 때는 말할 수밖에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이 문둥병자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교훈받을까요? 우리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크다한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지 말라고 해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이 격동될 때 우리는 언제는 말하게 되고 맙니다.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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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그곳에만 계시지 않는다

(막 1:36-39, 개역)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예수님의 병고치는 사역과 은사는 실로 많은 사람에게 이슈였다. 그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었고, 실제적인 은혜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더구나 당시의 의술을 고려할 때 얼마나 많은 병자들이 있었을까?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미명에 병자들은 이미 병고침을 얻고자 미명에 나아왔다. 급기야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 제자들은 습관적으로 예수님의 기도처로 나아갔을 것이다. 추측컨대 미명에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습관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온 제자들은 공손히 예수님께 많은 병자들이 이 미명에 이미 찾아와 문 앞에 용신해 있음을 알렸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얼른 내려와 그들을 맞이해 주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새벽 예수님은 전혀 의외의 발언을 하셨다. ‘아니다. 오늘부터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야 한다. 그곳에도 병자들이 얼마든지 있으며, 나는 그곳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의 일대기에 보면 허준이 마을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갈 길을 미루고, 그 마을에 더 남아 의술을 펼침으로써 인간애를 보여준 사실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다. 오히려 예수님은 다른 인간애를 보여주신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이 자기 마을에 오래 더 남아 있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이기심일 뿐이었다. 병자들은 사방 어디에든 지천으로 널려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두에게 필요했으며, 예수님은 모두의 그리스도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본분과 자신의 사역이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고 특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야 말로 모두를 위한 인간애였으며, 공평한 처사였다.

우리 역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은혜를 줄 수 있고, 영향력을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만 향하고 머물기 보다 더 넓게, 더 많은 곳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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