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습이 필요할 때_2011.01.10.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면 일정한 진도가 진행됐음에도 그 다음 레벨로 나아가지 못하고 테스트를 통해 다시 진도를 복습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대개가 흔히 말하는 ‘일자진도’로 나가기보다 크고 작은 복습을 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우리 신앙에서도 하나님은 종종 ‘복습’을 시키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선하신 목적에서 연단과 고난, 징계가 있다. 우리는 그 시련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심히 낮아지고 가난한 심령이 된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고 다시 꽃이 피고, 날개를 달고 상승기류를 타면 우리는 어느새 다시 교만해지고, 버렸던 자존심을 재차 움켜쥔다. 정말 다 순종할 수 있었을 것만 같았음에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냐, 그런 것 까진 아닐 거야.’ 라며 불순종의 변명과 핑계를 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에도 ‘복습’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이나 고난, 징계를 통과하게 하시면서 충분히 낮아지게 하신다. 그리고 다시 회복시키신다. 그런 후 우리에게 마치 ‘너 연단 잘 통과했니? 징계 잘 통과했니?’라고 물으시듯 테스트를 주신다.

(창 22:1, 개역)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험난했다. 한 때는 아비멜렉왕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기도 했다. 롯과 헤어지기도 했고, 롯을 구하고자 병사들을 대동해 쫓아가기도 했다. 그는 많은 연단과 고난을 통과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그 모든 과정을 거친 후 말년의 안식을 취할 때 하나님은 이삭을 바치라는 요구를 해왔다. 그것이 테스트인 것이다. 그가 거쳐 온 모든 훈련을 통해 그가 정말 배워야 했던 것은 전적인 순종과 믿음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연단과 고난 중에 있을 때 테스트 받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보자. 누구든지 고난 중에는 가난하다. 그땐 다 순종할 수 있을 것처럼 가난해져있다. 그럴 때의 테스트는 온전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훈련이 끝난 뒤 테스트 하신다.

우리가 자주 복습을 하는 이유는 바로 고난과 징계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모든 환경이 내게 우호적이라고 느껴지면서 다시 오만방자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테스트가 남았다는 것을 망각한 채 고난 끝, 징계 끝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러나 끝은 곧 테스트가 올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원리를 기억하지 않을 때 테스트에서 실패하고, 복습을 자초한다. 그러나 복습은 더 힘들 것이다.

다윗은 10년을 도피했다. 그 고난 뒤 왕이 되었던 다윗이지만 어느새 나태와 안일에 빠져 밧세바를 범하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복습의 길로 접어들었다.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더 깊은 상처와 고통이 뒤따랐다. 아들들 사이에서 칼부림으로 살인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아끼는 아들의 반역으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것은 이전보다 더 깊은 상처와 고통의 복습이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분명 그 뒤부터 그는 다시 복습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과 순종으로 근신한 채 불필요한 복습, 지나친 복습을 거치지 말고 믿음의 단계를 더 뛰어올라가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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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 쉬울까?

(막 2:9-10, 개역)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를 향해 죄 사함을 선포했을 때, 그곳에 머물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행태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는 것임에도 인간 예수님은 거의 망각에 빠진 것처럼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의 마음에 큰 문제가 일어남을 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 것과 병을 치료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 글쎄요. 정말 어느 것이 쉬운 것일까요? 정말, 어느 하나는 쉽긴 쉬운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가 훨씬, 100배는 쉽다라는 것입니다. 어째서일까요? 중풍병자는 병을 낫고자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병을 낫게 해주는 사람은 이미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의술을 펼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예수님보다 훨씬 이전부터 무당이나 박수들이 병 고치는 이적도 행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일은 이슈이긴 했지만 전혀 새로운 사건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병은 귀신들도 고칩니다.

이에 반해, 죄 사함은 어떻습니까? 서기관들이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적 죽음과 고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서기관들의 문제제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속에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하실 일과 예수님의 실체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어째서 문제를 제기하느냐? 병 고치는 것과 죄를 사하는 것 중 뭐가 더 쉽겠느냐? 병 고치는 일은 나만 하는 일이 아니다. 귀신들도 병은 고치며, 의사들도 병은 고치는 것이다. 나는 단순히 그런 병 고치는 일을 위해 온 무당이나 의사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죄를 사하기 위해 왔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며, 오직 나의 순종과 고난의 희생을 감수한 죽음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너희가 알아야 될 것은 바로 내가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이 땅에 왔다는 사실이다. 나는 단순히 저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는, 어느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도 있는 그런 일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위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내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말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마음에 문제를 품지도, 나로 하여금 참람하다 말하지도 말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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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앞에 가면 낫는다.

(막 2:2-5, 개역)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재차 가버나움을 방문하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병고치는 일이 아니라 말씀의 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장 본질적인 사역이자, 예수님이 원하신 일은 말씀의 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한켠에선 놀라운 이벤트가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리고 가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아무튼 그 중풍병자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아마 병색이 꽤 짙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중풍병자의 가족이나 일가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 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다 놓아야겠다고 맘먹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상적인 통로로는 도저히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근의 집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고, 다시 그 옥상에서 옆집으로 넘어가면서 기어코 예수님이 머무신 집 지붕 위에까지 당도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선택은 더 이상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단 하나, 지붕을 뜯어서 구멍을 내고 그 안으로 줄을 달아내려 예수님의 면전에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보고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예, 정말 그건 기막힌 믿음이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 예수님을 경외하는 믿음? 글쎄요. 그런 차원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의 완전한 믿음은 오직 이것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 앞에 내려놓으면 이 중풍병자가 낫는다.’라는 것입니다. 예,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들었고, 예수님이 낫게 해주실 것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풍병자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병고침이 아니라 죄사함이었습니다. 영혼의 고침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병고치심을 믿는 믿음’을 보심과 동시에 우선 필요한 믿음, 먼저 고쳐야 할 병은 영혼의 병임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물론, 예수님은 그 몸의 병까지도 치료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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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 이야기_2010.12.30

(잠 17:19, 개역)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얼마 전 한참 어린 자매님과 이메일로 교제를 나눈 적이 있다. 자매님은 나를 위한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매우 조심스러워 하고 한편으론 자신의 행동에 대해 걱정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오히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 조언을 해주는 것은 나에게 더욱 좋은 일이다.

세상에서 언제부턴가 ‘열린경영’이란 말이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그룹 총수들이 앞다투어 직원들의 게시판에 글을 남기고 언제든지 자기에게 메일을 넣어달라고 이메일 계정을 개방해둔다. 직급의 수직관계가 주는 부자연스러움과 권위를 벗고 동일한 위치에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도 더더욱 그러하다. 부장교사? 그건 교회학교 안에서 봉사를 위한 하나의 질서 차원에서 주어진 것일 뿐 계급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어느 교사에게든지 ‘교제를 한다.’라는 대원칙 앞에서 우리 서로는 그저 형제요, 자매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게 조언과 권면을 해주는 어린 자매님이 좋다. 누군가는 후환을 두려워해서 말하길 꺼린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런 건 싫다. ‘어른’이란 개념, ‘부장’이란 개념. 그런 것이 교제를 막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것은 ‘저는 당신의 복수가 두렵군요.’, ‘저는 당신을 불편하게 생각해요.’란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문턱을 낮추어 놓고 누구든지 가벼운 마음으로 넘어 들어와 교제할 수 있었음 좋겠다. 그것이 나를 안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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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11-01-04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형제자매님들이 불편해하지 않고 편하게 나에게 교제를 청한다?!
정말 기쁜일이네요..
 

  

원칙의 파괴자_2011.1.1

(요 8:3-11, 개역)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간음하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 현장에서 발각되었고,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운명은 돌에 쳐 죽임을 당하는 율법의 형벌뿐이었다. 분명, 그녀는 새파랗게 질렸을 것이다. 반라의 몸에 가녀린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모세의 율법’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했을 만큼 유대인들의 근본적인 정신 사상이자, 정체성 그 자체였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고정관념’이기도 했다. 우리가 유대인을 비난할 수만 없는 것이 그것이 그들이 배운 사고방식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마치, 부모를 구타하는 것은 ‘패륜’이라고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돌덩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들이 손에 쥔 돌덩이. 그것은 ‘정죄’였다. 누군가를 정죄하기 위해, 누군가를 심판하기 위해 손에 든 것.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에게도 던져야 할 돌덩이를 남을 향해 들고 있는 꼴 있었다.

아, 너무나 견고하고 높은 저 ‘모세의 율법’. 누가 감히 도전할 자 있으랴!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세운 율법에 도전했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일이자, 일종의 ‘민족적 패륜’과도 같아 보였다.

‘모세의 율법’이 정죄한 여자. 마땅히 돌로 쳐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방도를 생각할 수 없는 여자. 그 여자를 향해 예수님께서 폭탄 선언을 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그것은 완전히, 전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대원칙의 파괴’였다. 유대인의 민족정신의 파괴자,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

훗날 요한은 예수님의 이 파괴적인 행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변론해준다.

(요 13:34, 개역)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렇다. 그것은 익히 없었던 새로운 계명, 새로운 율법이었다. 돌로 쳐 죽이는 법이 아닌 사랑 안에서 긍휼과 용서의 법이었다. ‘모세의 율법’을 들어 죄인들이 죄인을 정죄할 때, 죄 없으신 예수님은 죄인을 향해 ‘사랑의 계명’을 들어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다.

교회.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새 계명이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은 얼마나 어려운지. 교회 안에서 상처받고, 갈등할 때 우리는 ‘주님 보고 신앙생활 해야지요.’ 라고 위로한다. 그러나 때로는 나 자신부터 반성하게 된다. 형제, 자매의 뺨을 때리면서 ‘주님만 보고 신앙생활 해야지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은 원칙을 파괴했다. 무엇인가? 원리와 원칙 그 모든 것 위에 가장 첫째 되는 원칙이 바로 ‘사랑과 긍휼’이라는 것을 말씀해주고 계시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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