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겨자씨 믿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 (마17:20)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앗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언뜻 이 말씀을 듣고 보면 우리에게 아주 적은 믿음 하나만 있어도 우리가 믿음의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겨자씨만큼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17:23)

곧 이어지는 말씀에서 믿음 없이 심히 근심했다는 제자들을 보게 됩니다. 심히 근심케 한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죽임을 당하고’ 그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겠지만 결국 다시 살아날 것이란 부활의 희망을 얘기했습니다. 부활, 그들이 듣기만 들었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부활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오직 ‘죽임을 당하고’ 그 한 마디만 크게 들렸던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병신과 이방인들은 믿음의 치료를 받으며 칭찬을 받지만 제자들은 항상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믿음이 적다는 책망을 받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봅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이방인들 보다 더 두려워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믿지 못하는 모습을 가르쳐주는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우리도 종종 고난 뒤에 영광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후에 주실 영광보다는 당장 겪을 고난이란 말만 크게 들리고, 고난을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약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더 강조되는 것은 ‘살아나리라’란 소망의 말씀이겠지요.

겨자씨만한 믿음.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앗이지만 심어서 나무가 되면 심히 커서 새들이 깃들인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겨자씨 믿음은 단지 적은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말씀이기보다 심었을 때 크게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이 담겨있는 믿음. 그것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작은 믿음이지만 그 안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고, 인내하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큰 잠재력을 가진 믿음 말이죠.

교사의 봉사를 하면서도 우리의 부족함과 약함을 생각할 때 너무나 두렵고 망설여질 때가 많지만 우리 마음에 심어두어야 할 믿음이 이 겨자씨 믿음이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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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기심

(창 29:31)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라헬은 언니 레아보다 아름다웠고, 다방면에서 훨씬 뛰어났다. 그러므로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했다. 차별받는 레아에게 이는 늘 마음 한 켠에 있는 무거운 슬픔이었다. 레아도 남편의 우선적인 사랑을 받고 싶었다.

하나님은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덜 사랑받음) 레아의 태를 먼저 열어 주셨다. 레아는 평생 6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라헬은 레아가 6명의 자녀를 생산하는 동안 단 한 명의 자녀도 생산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라헬은 고통스러워했고, 레아를 질투하기도 했고, 야곱에게 떼를 쓰기도 했다. 
 

이 내용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어느 부분에 있어 우리는 레아 같기도 하고, 라헬 같기도 하다. 그러나 누가 레아이며, 누가 라헬인지 골라보고 싶진 않다. 우리는 누구나 우선적으로 사랑받고 싶다.

오히려 다만, 라헬을 생각해보고 싶다. 라헬은 결과적으로 요셉을 출산하면서 상대적으로 많은 자녀를 생산한 레아보다 퀄리티 면에서 승리한 것 같다.(물론, 레아의 아들 유다로부터 예수님은 나셨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적잖히 고통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레아만큼 이었을까? 사실 라헬의 결핍은 그것 하나였다. 그러나 레아는 어떠했나?

하나님은 레아의 태를 먼저 여시고 그녀에게 많은 자녀를 주심으로써 상대적으로 동생 라헬에게서 느끼는 자격지심을 위로해주셨다. 어떤 면에서는 라헬과의 불균형에 있어 밸런스를 맞춰주시는 것 같다. 아무튼...

모든 것이 다 완전한 것만이 미덕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라헬은 적어도 언니 레아에게 지나치게 이기적이었다. 라헬은 레아의 슬픔을 헤아려줄 줄 알아야 했다. 질투해선 안 된다. 언제든지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보다 나은 것만을 차지하려는 일련의 이기심을 절제해야 한다. 오히려 잘 갖춘 사람일수록 결핍을 경험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많은 것을 누리는 라헬에게는 무자함을 통해 결핍을 경험하게 하시면서 동시에 부족한 레아를 향해서는 한 가지라도 동생보다 낫게 하심으로써 그녀를 위로하고, 배려해주고 계시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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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있는 자들의 위험.

1. 미리암과 아론의 위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12:2)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하자 미리암과 아론이 반발했다. 모세의 최측근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신들도 주장할 수 있고, 존중받아야 할 필요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모세에 대한 구별된 생각을 잊어버리고 동등 된 위치에서 판단하려 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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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험대에 오른 명단

바란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나안 땅을 탐지 하게 하되 그 종족의 각 지파 중에서 족장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민13:2)

족장들 역시 모세와 비교적 최측근의 인물들이었다. ‘르우벤 지파 삼무아, 시므온 지파 사밧, 유다 지파 갈렙…’ 하나님께서 지명해주신 이름들이다. 영광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 그 명단은 시험대 위에 오른 명단이었다. 가나안 정탐을 다녀온 12족장 가운데 2명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은 불신앙으로 재앙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민14:37)

3. 나는 목사님과 비교적 측근에 있다. 커뮤니케이션 할 일이 많다. 내 이름은 시험대 위에 오른 명단이다. 유초등부 안에 내 측근에 계신 교사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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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시거늘_2011.1.29.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저주를 각오한 희생과 배려로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된다. 일찍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소망했던 그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얻은 이후 실제적인 축복을 받음으로 일단락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야곱에게 돌아온 것은 고난과 외로움의 여정이었다.

형 에서의 칼을 피해 하란으로 향했다. 낯선 땅에서 돌 배게를 베고 누웠다. 라반 밑에서 14년을 노동했다. 축복받은 야곱의 인생은 오히려 매우 험란했다. 말년에 야곱은 바로왕 앞에서 말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일백삼십 년의 세월, 험악한 세월이 바로 축복을 받은 야곱의 인생 단면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축복은 무모요, 거짓일까?

여기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 도피하던 길에서 받은 하나님과의 첫 대면과 계시가 기록되어 있다.

(창 28:15-16, 개역)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은 아셨다. 비록 그가 축복을 받았지만 그 길은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며, 그것이야 말로 축복받은 자들이 가야할 길이란 것을. 그래서 하나님은 일찌감치 그를 일깨우셨다. 비록, 언약을 받았으나 그 길의 여정이 험악함을 인하여 낙심치 않길 바랐다. 약속하셨다.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나는 네 앞길을 인도하는 영원한 하나님임을.’ 또한, 쓸쓸히 누워있는 야곱에게 알게 하셨다. 바로 지금 이곳에 내가 너와 함께 있노라고.

축복의 길, 은혜의 길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호위호식의 평안을 누리는 길이 아니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풍파의 길이며, 시련의 길이며, 외롭고 고독한 길이다. 그것은 종종 험악한 세월에 비교될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떠나심과 버리심이 아닌 복의 길이다.

예수님은 어떠하셨는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 하나님의 음성이 울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다!’ 그러나 곧바로 예수님이 가셨던 길은 광야이며, 40일을 금식하는 가운데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다.

그리스도인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멸망의 죄인이 구원의 은혜, 의인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 다음은 성령은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가신다. 우리는 정든 보호처를 떠나 야곱처럼 낯선 땅에서 돌배게를 베고 누워 외로움에 치를 떤다. 그리고 토로한다. ‘정말 이건 아니야. 난 지금 너무 힘들군. 정말 난 이렇게 밖에 안 되는 건가. 은혜를 입지 못하는군. 하나님을 느낄 수가 없어!’

야곱은 잠을 깼다. 우리도 고난의 길에서 종종 잠이 든다. 우리는 지쳐있고, 낙심해있다. 우리는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나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지금 네가 걷는 그 모든 길이 네가 받은 축복으로 말미암아 가야될 길이라고. 물론, 네가 힘들다는 건 안단다. 그러나 말이다. 나는 너를 축복하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단다. 그것은 너를 향한 나의 계획이 다 이루어지기 전까지 너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란다. 그렇지 않고서는 처음부터 너를 축복의 길로 인도하지 않았을 거란다. 그것이 바로 나의 신실함이란다. 나의 신실함에 대해서는 나 역시 어찌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러니 축복의 사람 너 야곱아, 이제 실망의 잠에게 깨어나렴. 내가 지금 바로 네 곁에 있거늘 네가 알지 못하는구나’

우리가 진정 위로를 받는 순간은 험란한 여정이 편해질 때보다 늘 변함없이 약속의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심을 깨어 발견하게 되는 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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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할 기회_2010.01.16

(히 12:17, 개역)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인에게 회개란 것은 마치 한 잔의 물처럼 시원하다. 우리는 여전히, 늘 허물지고 연약하며 온전히 행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므로 회개란 것은 우리가 다시금 하나님의 긍휼을 맛볼 수 있는 매우 신기한 묘책이다. 나의 잘못으로 앞뒤 하늘까지 꽉 막혔을 때라도 오직 단 하나 ‘회개’란 방편을 통해 다시금 나아갈 길을 되찾게 된다.

그런데 여기, 에서에 대한 증언을 통해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그의 기막힌 사연을 전해 듣는다.에서, 그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째서 그는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까? 하나님은 불공평하신가? 하나님은 이토록 잔인하신가?

그러나 이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에서에게 회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원천적으로 에서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서가 회개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에서는 육신적으로 장자로 출생하여 장자권을 부여받았을 뿐, 사실상 그는 전혀 장자답지 못했으며 오히려 장자권을 경홀히 여기고 있었다. 사실 그는 사냥꾼으로써는 충분한 자격을 갖췄지만 믿음의 가정에서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야할 장자로써는 그 자질과 책임감을 조금도 소유하지 못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는 단지 태에서 먼저 났기에 일방적으로 장자권을 부여받았을 뿐이다.

잠언 11장 22절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했다. 돼지코에 금고리가 전혀 어울리지 않듯 에서에게 장자란 신분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 에서의 치명적인 결함은 ‘신중함의 결여’이며, 동시에 ‘영적무지’였다. 그의 영적무지와 무능함을 관통해볼 때 사실상 그는 거의 ‘無靈者’(영이 없는 사람)같이 보여진다.

에서의 장자권이 단순히 육신의 장자권에 불과했다면 하나님은 굳이 그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양도하도록 하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 장자권은 믿음의 가정에서 믿음의 계보를 잇는 영적인 의미가 부여된 장자권이었음으로 하나님은 바로 이 ‘영적인 장자권’을 통찰하지 못하는 에서의 영적 무지함을 알고 계셨고, 그의 장자권을 영적인 사람 야곱에게 양도하게 하셨다.

한편, 야곱은 에서가 받은 장자권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조부 아브라함으로부터 아버지 이삭을 거쳐 후대까지 전해질 ‘영적 장자권’임을 관통해봤던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형 에서의 영적 무지를 보면서 ‘저 장자권은 오히려 내 것이 되어야 된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장자권이 주는 육적 풍요로 말미암아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탐낸 것이라면 그는 한낱 탐욕주의자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육신적인 장자권을 탐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영적인 장자권을 탐냈고, 그것을 볼 줄 아는 영적 통찰력을 갖추고 있었다. 즉, 그는 진정으로 자격을 갖췄던 것이다.

자, 이제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 에서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에서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다. 에서도 얼마든지 회개할 수 있었다. 그가 장자권을 뺏기는 그 찰나가 오기 전까지 그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은 기회를 충분히 주셨다. 그러나 문제는 에서의 태도와 삶의 방향, 그의 목적의식이 지닌 문제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에서는 완전한 사냥꾼이 되는 것 외에 영적인 그 어떤 것에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오랜 시간 장자권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단 한 번의 기막힌 순간으로부터 말미암게 될 것임을 조금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찰나가 지난 뒤에서야 에서는 결핍을 발견했으며, 차츰 그 결핍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결핍이며, 무마할 수 없는 공허라는 현실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으며, 이제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이미 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걸 알게 된 순간 에서는 지금껏 강한 남자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었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대성통곡해 보았지만 회개할 기회는 이미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회개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우리가 누릴 행복과 기쁨을 빼앗아 가시는 잔인한 분이 아니시다. 언제든지 문제는 우리의 영적 무지이며, 우리가 영적으로 무지할 때, 언제든지 이미 받은 은혜를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다라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은혜를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어서 영적 통찰을 갖지 못하게 되면 우리 역시 회개할 시기와 기회조차 놓쳐버리게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회개할 수 있을 때 회개하는 것이며, 우리가 불순종으로 구부러뜨린 불찰에 대해서는 기회를 잃어버리기 전 실제적인 행위의 돌이킴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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