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계시거늘_2011.1.29.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저주를 각오한 희생과 배려로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된다. 일찍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소망했던 그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얻은 이후 실제적인 축복을 받음으로 일단락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야곱에게 돌아온 것은 고난과 외로움의 여정이었다.
형 에서의 칼을 피해 하란으로 향했다. 낯선 땅에서 돌 배게를 베고 누웠다. 라반 밑에서 14년을 노동했다. 축복받은 야곱의 인생은 오히려 매우 험란했다. 말년에 야곱은 바로왕 앞에서 말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일백삼십 년의 세월, 험악한 세월이 바로 축복을 받은 야곱의 인생 단면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축복은 무모요, 거짓일까?
여기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 도피하던 길에서 받은 하나님과의 첫 대면과 계시가 기록되어 있다.
(창 28:15-16, 개역)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은 아셨다. 비록 그가 축복을 받았지만 그 길은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며, 그것이야 말로 축복받은 자들이 가야할 길이란 것을. 그래서 하나님은 일찌감치 그를 일깨우셨다. 비록, 언약을 받았으나 그 길의 여정이 험악함을 인하여 낙심치 않길 바랐다. 약속하셨다.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나는 네 앞길을 인도하는 영원한 하나님임을.’ 또한, 쓸쓸히 누워있는 야곱에게 알게 하셨다. 바로 지금 이곳에 내가 너와 함께 있노라고.
축복의 길, 은혜의 길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호위호식의 평안을 누리는 길이 아니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풍파의 길이며, 시련의 길이며, 외롭고 고독한 길이다. 그것은 종종 험악한 세월에 비교될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떠나심과 버리심이 아닌 복의 길이다.
예수님은 어떠하셨는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 하나님의 음성이 울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다!’ 그러나 곧바로 예수님이 가셨던 길은 광야이며, 40일을 금식하는 가운데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다.
그리스도인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멸망의 죄인이 구원의 은혜, 의인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 다음은 성령은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가신다. 우리는 정든 보호처를 떠나 야곱처럼 낯선 땅에서 돌배게를 베고 누워 외로움에 치를 떤다. 그리고 토로한다. ‘정말 이건 아니야. 난 지금 너무 힘들군. 정말 난 이렇게 밖에 안 되는 건가. 은혜를 입지 못하는군. 하나님을 느낄 수가 없어!’
야곱은 잠을 깼다. 우리도 고난의 길에서 종종 잠이 든다. 우리는 지쳐있고, 낙심해있다. 우리는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나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지금 네가 걷는 그 모든 길이 네가 받은 축복으로 말미암아 가야될 길이라고. 물론, 네가 힘들다는 건 안단다. 그러나 말이다. 나는 너를 축복하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단다. 그것은 너를 향한 나의 계획이 다 이루어지기 전까지 너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란다. 그렇지 않고서는 처음부터 너를 축복의 길로 인도하지 않았을 거란다. 그것이 바로 나의 신실함이란다. 나의 신실함에 대해서는 나 역시 어찌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러니 축복의 사람 너 야곱아, 이제 실망의 잠에게 깨어나렴. 내가 지금 바로 네 곁에 있거늘 네가 알지 못하는구나’
우리가 진정 위로를 받는 순간은 험란한 여정이 편해질 때보다 늘 변함없이 약속의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심을 깨어 발견하게 되는 그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