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고용_2011.06.24

(요 1:6-8, 개역)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일명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 일컬어지는 증거자 요한. 그에 대한 소개는 매우 독특하다. 그는 위대한 분을 증거 하기 위해 특별히 고용된 사람이었다. 법정에 서면 반드시 증인이 출석하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큰 이가 없어 스스로에게 맹세하고 호언장담하시지만 사람은 너무나 거짓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변호는 인정되지 않는다. 반드시 제3자의 증거가 요구된다.

악한 어둠의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셨다. 빛을 비추고 그 빛의 생명으로 죽은 영혼을 깨우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 아무도 그 빛의 증거를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빛의 생명력을 위해 증거자를 고용하셨다.

우리는 이 증거자 요한의 위대함을 익히 잘 안다. 그는 정말 헌신적인, 매력적인 증거자였다. 그는 저 광야에서 소리 질렀다. 철저히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자신은 쇠하여졌다. 그는 마치 외판원처럼 중심가에서 외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본질과 속성, 아름다움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광야에서 외쳤다. 얼마나 충실한 증거자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한계는 있고, 부족은 있으니!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나 세례 요한 모두 그 육적생명의 유한성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이후로는 누가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인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시 고용하셔야만 한다. 다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인 났으니 이름은 ○○라’

그의 임무는 요한에게 주어졌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빛을 증거 하는 일, 이로써 모든 사람이 빛을 믿도록 하는 일. 그러므로 그것은 불변하는 임무라 불리워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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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딤의 공포_2011.06.22

올 여름 전국을 강타할 초특급 스릴러~ ‘더딤의 공포’ 흐흐흐~

(출 32:1, 개역)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있다면 주저 없이 그것은 ‘기다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다림’과 ‘인내’만큼 우리를 가장 시험하는 것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 현재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보랏빛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지라도 지금 현 상태가 어느 정도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없다면 상황은 불투명해진다.

더딤의 공포. 그 공포를 경험한 유명한 사람이 있다. 바로 사울이다. 블레셋과의 전투상황에서 사울은 사무엘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간절한 기다림의 때 사무엘은 모두를 실망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험이 도래했다. 백성들은 혼란 속에 요동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블레셋 군대는 믹마스에 까지 진을 치고 모여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울은 어떤 대안이든 세워야했고,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는 그 자신이 나서서라도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뒤늦게 나타난 사무엘은 한 치의 주저함 없이 사울에게 망령되다고 호통 쳤다.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든다. 참 뻔뻔한 사무엘! 약속기한에 늦게 도착해서 일을 그르치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무엘의 손을 들어주시니...

우리에게 기다림이란 마치 이와 같은 이치이지 않은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막 제사를 드리고 나면 그 사무엘이 나타나기를 몇 번이었던고!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기다림이라 하는 것이 결코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시내산 아래 도착한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모세는 그저 불친절했다. 기약도 없이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는 그저 내려올 생각을 않으니 백성들도 지칠만 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엄습해오는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애굽에서부터 그 열가지 재앙과 바다를 가르는 하나님의 이적과 맛나와... 그 이적의 대언자였던 리더 모세가 감감무소식이니 이 낯선 광야에서 리더를 잃은 그들의 불안과 공포는 결코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새 그들은 하나님보다 모세를 더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인도하여 낸 모세’에 대해 그들이 외치는 말을 들어보자. 그들은 ‘우리를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부르짖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보다 어느새 모세를 더 의지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계시되지 않았다. 모세를 통해 말씀해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모세는 더욱 실존적인 존재였다.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치일 것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묻는 동시에 믿음에 앞선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그러다보면 잠잠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귀기울이기 보다 즉시로 사람의 말과 의견을 더 들으려고 할 때도 있다.

아무쪼록 모세의 부재는 그들에게 불안감을 증폭시켰으며, 모세의 기약 없는 불친절한 부재는 그들의 공포심에 불을 붙였다. 더디옴. 그것만큼 그들을 요동치게 만드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더딤의 공포이다.

우리역시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보다 더 위대하지 않다. 더 믿음 위에 서 있지 않다. 이스라엘의 모습은 곧 우리 믿음의 연약함을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도우심, 내 소망에 대한 반응이 더디다는 것으로부터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기약 없는 불친절한 기다림에 우리는 거의 기쁨을 잃어버릴 때도 있다. 기다리는 것만큼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도 별로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얼마나 자주 얼마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기다림에 대해 훈련하시는지!

이스라엘이 모세의 부재로부터 오는 공포를 다스릴 인간적인 목적에서 고안해낸 방법이 금송아지였다. 빈자리는 무엇인가 채워야만 하나보다. 하나님께서 더디 행하실 때 우리는 무엇을 고안하고 있었는가. 인간적인 목적과 방편으로 만들어낸 나의 불행한 금송아지들이 지금도 있진 않은가. 그러므로 그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는 날 모두 갈아서 마셔야만 할 고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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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평강에 대한 이 말씀은 어떤 때는 마치 책망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평강에 대해 움츠러들고 두려울 때도 있다. 그리고 감사하라는 것까지.

초대교회시대 아직은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다. 바울의 서신들은 완성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한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론도 다양했다. 많은 이단학설이 교회를 흔들기도 했다.

바울은 서신을 통해 오늘날 우리 믿음의 본질과 기준에 대한 명확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성도들의 다양한 자질과 덕목을 가르쳐주었다. 평강과 감사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서신의 초반부 인사에서도 항상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은혜와 평강은 그토록 현실을 사는 성도에게 필수불가결한 삶의 요소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다. 그리스도는 최초 죄의 공포와 두려움에 있는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으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삶의 은혜와 평이 되어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늘 은혜와 평강 가운데 머물지 못함을 발견한다.

사실 두려워한다. 사실 공포에 떤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어느새 세상의 원리와 방식 아래 지배당하며, 발버둥치곤 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의 방식을 놓을 때 마치 세상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뒤틀린다. 그리스도의 평강 안에 있을 때라면 고난 중에도 슬픔 중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인내한다.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없었지만 주안에 강권할 때 믿음의 배 위에 탔고, 적어도 표류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도 없이 많은 화살과 세파들이 이 평강을 깨부숴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나는 베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캄캄한 밤 바다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물위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우려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위를 정녕 걷고 있었다. 그러나! 바람이 문제였다.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이 베드로의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그는 순간 현실의 불가능에 눈을 떴다. ‘나는 물위를 걸을 수 없어! 내가 어떻게 물위를 걷겠다는 거지? 위험천만의 일이야! 도무지 예수님께까지 가진 못하겠군!’ 그러므로 평강은 깨졌고, 공포가 그를 지배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내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바로 그것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바람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바라보았다.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세상의 법칙과 원리 위에 나는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용기를 다 잡는다. 기운을 내본다. 하나님을 믿어본다. 약속들을 기억해본다. 고난 뒤에 승리한 성경 속 인물들의 삶을 통해 위로를 삼아본다. 아, 그러나! 그러나! 비록 그러할지라도 저 미친 바람이 멈추질 않는다. 바다보다도 더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은 저 바람이 나의 모든 용기마저 불어 버린다. 공포와 두려움에 즉시 사로잡힌다. 평강은 깨지고 어느새 앞에 계신 그리스도를 내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검은 밤하늘이 보인다. 휘갈기는 바람의 소리가 보인다. 차가운 물아래로 젖어간다.

기억하자. 사실 우리 모두는 물위를 걷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렇다. 바울은 그것의 중요성을 알고 강조한다. 그것이 없이 기쁨은 없고, 오래 참음과 인내도 없다. 평강을 소유하는 것 이상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평강으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 가운데 있어야 한다. 깊이 있는 기도와 간구, 성령 안에서의 의뢰, 말씀의 깊이 있는 탐구.

그러나 바람은 여전히 불며, 종종 그리스도를 놓쳐버림으로 바람에 휩쓸려 다시 세상의 원리와 방식에 사로잡힌다. 이루지 못한 꿈, 좌절했던 쓰라린 기억들. 거절 당했던 자비들. 유령 같은 망상들이 내 마음을 주장한다. 용기를 잃는다. 낙심해 본다. 푸념해 본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평강’은 그 자체로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지. 또한, 그것이 얼마나 쉽게 지켜지지 못하는지 느끼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 평강 아래서 그리스도인의 원리와 방식으로 만족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나는 세상의 원리와 지배를 의식하며 공포와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채로 살 것인가. 어쩌면 그 모든 것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소심한 그리스도인은 아닌가.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충만하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이 충만하다고 하는데 어째서 ‘오직 예수’가 아닐 때는 그토록 많은가.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앞세워 놓고 그 뒤에서 세상의 원리를 지으려 할까?

나는 바울이 정녕 행복한 사람이었음을 확신한다. 그는 정말 평강에 대해 주장할 권리가 있었다. 그는 오직 위에 것을 찾으라고 외칠 수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채웠다. 다른 것은 그저 배설물일 뿐. 그러므로 그는 은혜와 평강으로 항상 가득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자. 그리스도께서 나로 저 물위로 걷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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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부류의 출현_2011.02

(살전 5:4-8, 개역)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주의 날’은 모든 이에게 일어날 공통의 사건이지만 이 날에 대한 반응은 크게 엇갈리게 될 것이다. 형제들이란 의미 안에는 ‘빛, 낮, 근신, 믿음, 사랑, 구원, 소망’ 모든 용어가 함축되어진다. 그들은 그냥 사람들이 아니라 형제들로서 ‘빛의 아들’, ‘낮의 아들’로 대변된다. 그들이 맞이할 ‘주의 날’은 환희와 기쁨이다. 그들에게 도적같이 임하는 날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낮에 속하였고 깨어 있음으로써 그날의 임재를 알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밤에 속하여 잠들어 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을 알지 못하며 그들에게는 도적같이 임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들은 자고 있기 때문에 인식하지도 감각하지도 못한다.

크게 두 부류가 있다. 낮에 속하여 깨어서 인식하고 반응하는 무리들. 그들은 지각을 사용해 대처하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밤에 속하면 근신하지 못한다. 자고 있으므로 무방비 상태이며, 언제든지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단 깨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낮에 속한 자들은 모두 안전한가. 그들은 최상인가? 사도는 그들에게 또다른 필요와 의무를 첨언한다.

형제들! 그들은 이미 자격을 갖추었다. 그들은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자들에게는 ‘그들만의 의무’를 요구한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에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 오직 깨어 근신하라!

낮은 빛의 시간이며, 깨어 활동하는 시간이다. 형제들은 이미 낮에 속하였고, 빛 아래 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위험의 요소는 존재한다. 누군가는 반드시 낮에도 잠을 잔다. 다시 말해, 이는 ‘제 3 부류의 출현’이다. 낮에 속한 자들의 위험이란 바로 이것이다.

사도가 유독 ‘오직 깨어 근신하라’고 거듭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낮을 맞았고 한 번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해 아래서 숙면하는 이들이 있다. 오전을 성실히 보냈지만 오후에는 식곤증을 이기지 못해 졸음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신앙의 오전과 오후에도 깨어 있어야 한다.

낮에 자는 게으름뱅이에게 사도가 던지는 논리는 ‘자는 자는 밤에 자고, 취하는 자는 밤에 취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째서 낮에 자고, 낮에 취하는가.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실제로 낮에 자고, 취하는 자들이 공공연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단순히 낮에 속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낮에는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함’을 기억(근신)하라고 한다.

자는 자들에게는 별다른 의무가 요구되지 않는다. 자는 자들은 의지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의무는 요구되지 않는다.

깨어 있음은 영광이요, 기쁨이며, 면류관이다. 그러나 의무가 요구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성실히 일하고, 낮잠은 금물이며, 술취함으로 허비해서는 안 된다. 깨어 있음 자체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주하고, 피곤하며,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깨어 있기에, 낮이기에 어쩔 수 없이 책임과 요구, 질서가 필요하다.

따라서, 사도는 형제들에게 특별히 권면한다. 낮에 속하였음에도 그 의무를 다 하지 못할 수 있음을 두려워하라고. ‘제 3의 부류’가 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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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사랑해_2011.06.12.

(아가1: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Today's subject : ‘제 눈의 안경!’ →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조건부일까?

언젠가 누군가 내게 말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 일반남성의 프로필을 넣으면 40점이 나온다고. 학벌, 연봉, 예금율, 자산 등등 그 모든 것을 환산하여 조건부 사랑을 제공하는 세대.

그러나 그럼에도... 가끔 사랑에 대한 이슈를 전해 듣는다.

일흔의 할머니와 젊은 청년의 사랑, 불구자와 미모의 여인의 사랑, 가난한 시인과 성공한 아나운서의 사랑, 병든 아내와 남편의 사랑. 때론 오빠와 여동생의 사랑(?) 에헴~

검지만 아름답다. 게달의 장막에 불과하지만 마치 솔로몬의 휘장같다. 실상은 그런거다.
완벽한 남자, 완벽한 여자 그러나 외로운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정말 조건이 좋은 사람을 사랑할까? 사랑할 수 있을까? 나도 그런 줄 알았지만 사실 나부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아이러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것일까?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만도 않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아이러니다.

신앙 < 육신 (넹?? 헐~~)

‘육신적인 조건이 신앙적인 조건을 결코 앞서지 않는다!’
오브코오스~ 나는 분명히 동의한다. 그런데 그 평범한 사실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매우 놀라운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육신적인 것보다 신앙적인 것에 더 매력을 느낀다. 더 끌린다. 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접어두고 사람과 사람으로서 나를 반응시키는 단, 한 두 가지로부터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돌아서기도 한다. 많은 것들이 필요치 않다. 그저 한 두 가지일 뿐. 신앙적인 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육신적인 조건이라 칭하는 것들의 문제도 딱히 아니다.

ex.) 이쁘고 멋지고 신앙 별로다 → 매력 없다. (그럼)
이쁘고 멋지고 신앙도 괜찮다 → 물론, 괜찮죠. 근데...

그러므로 그것은 검으나 아름다우며, 게달의 장막에 불과하지만 솔로몬의 휘장과 같다. 결국 ‘제 눈의 안경’인거다.
어쩌면 신앙도 아니고, 육신적인 조건도 아니다. 오히려 내 기질이 정답일지 모른다.
그런데 기질과 신앙적 요구가 상존하기 때문에 기질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이방인보다 더 어려운 것 아닌가. 그러나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우리 모두 공범일뿐.

오쇼 라즈니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신부감으로 완벽한 여자를 찾아 나선 남자가 있었다. 전국방방곡곡 다니며 완벽녀를 찾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 남자는 늙은이가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솔로였다. 그때 또 한 명의 늙은 친구가 물었다. ‘여지껏 완벽한 여자를 찾지 못한 겐가?’ 그러자 그 남자가 말했다. ‘아니, 딱 한 번 그토록 찾던 완벽한 여자를 만났지.’ 친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그럼, 왜 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나?’ 남자가 말했다. ‘아니, 글쎄 그 여자도 완벽한 남자를 찾고 있더군.’

우리가 믿음 안에서 누구든지 흔쾌히 용납하고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 한들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면 신앙생활은 그저 쉬운 것 일뿐. 오늘 내가 너를 비난하고, 내일 내가 나를 비난하게 되는 것.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러므로 외적인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죄가 되는 것일까? 아름다움이 잘못인가? 아름다움이 싫은가? 아름다움에 끌리는 건 정당한 본성이다. 논쟁의 요지는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

이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다양한 현상에 대해 더 이상 비평하지 말자. 그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다른 사람이 내게 호감을 갖는 유무의 다양한 현상에 대해 더 이상 비평하지 말자. 우리 모두는 자유롭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이 있는 법이죠.’ 그것이 누구에게나 최선의 위안.

여지껏 직접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그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더 어려워진 건 언제부턴가 그 말이 내게도 소중한 의미가 있음을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으나 아름다운 그녀를 만난다면, 비록 게달의 장막이지만 그저 내게는 솔로몬의 휘장 같은 그녀를 만난다면 나 역시 보통의 사랑하는 모든 이들처럼 말하게 될 것이다.

‘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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