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평강에 대한 이 말씀은 어떤 때는 마치 책망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평강에 대해 움츠러들고 두려울 때도 있다. 그리고 감사하라는 것까지.

초대교회시대 아직은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다. 바울의 서신들은 완성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한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론도 다양했다. 많은 이단학설이 교회를 흔들기도 했다.

바울은 서신을 통해 오늘날 우리 믿음의 본질과 기준에 대한 명확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성도들의 다양한 자질과 덕목을 가르쳐주었다. 평강과 감사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서신의 초반부 인사에서도 항상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은혜와 평강은 그토록 현실을 사는 성도에게 필수불가결한 삶의 요소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다. 그리스도는 최초 죄의 공포와 두려움에 있는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으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삶의 은혜와 평이 되어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늘 은혜와 평강 가운데 머물지 못함을 발견한다.

사실 두려워한다. 사실 공포에 떤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어느새 세상의 원리와 방식 아래 지배당하며, 발버둥치곤 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의 방식을 놓을 때 마치 세상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뒤틀린다. 그리스도의 평강 안에 있을 때라면 고난 중에도 슬픔 중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인내한다.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없었지만 주안에 강권할 때 믿음의 배 위에 탔고, 적어도 표류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도 없이 많은 화살과 세파들이 이 평강을 깨부숴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나는 베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캄캄한 밤 바다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물위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우려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위를 정녕 걷고 있었다. 그러나! 바람이 문제였다.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이 베드로의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그는 순간 현실의 불가능에 눈을 떴다. ‘나는 물위를 걸을 수 없어! 내가 어떻게 물위를 걷겠다는 거지? 위험천만의 일이야! 도무지 예수님께까지 가진 못하겠군!’ 그러므로 평강은 깨졌고, 공포가 그를 지배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내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바로 그것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바람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바라보았다.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세상의 법칙과 원리 위에 나는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용기를 다 잡는다. 기운을 내본다. 하나님을 믿어본다. 약속들을 기억해본다. 고난 뒤에 승리한 성경 속 인물들의 삶을 통해 위로를 삼아본다. 아, 그러나! 그러나! 비록 그러할지라도 저 미친 바람이 멈추질 않는다. 바다보다도 더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은 저 바람이 나의 모든 용기마저 불어 버린다. 공포와 두려움에 즉시 사로잡힌다. 평강은 깨지고 어느새 앞에 계신 그리스도를 내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검은 밤하늘이 보인다. 휘갈기는 바람의 소리가 보인다. 차가운 물아래로 젖어간다.

기억하자. 사실 우리 모두는 물위를 걷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렇다. 바울은 그것의 중요성을 알고 강조한다. 그것이 없이 기쁨은 없고, 오래 참음과 인내도 없다. 평강을 소유하는 것 이상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평강으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 가운데 있어야 한다. 깊이 있는 기도와 간구, 성령 안에서의 의뢰, 말씀의 깊이 있는 탐구.

그러나 바람은 여전히 불며, 종종 그리스도를 놓쳐버림으로 바람에 휩쓸려 다시 세상의 원리와 방식에 사로잡힌다. 이루지 못한 꿈, 좌절했던 쓰라린 기억들. 거절 당했던 자비들. 유령 같은 망상들이 내 마음을 주장한다. 용기를 잃는다. 낙심해 본다. 푸념해 본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평강’은 그 자체로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지. 또한, 그것이 얼마나 쉽게 지켜지지 못하는지 느끼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 평강 아래서 그리스도인의 원리와 방식으로 만족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나는 세상의 원리와 지배를 의식하며 공포와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채로 살 것인가. 어쩌면 그 모든 것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소심한 그리스도인은 아닌가.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충만하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이 충만하다고 하는데 어째서 ‘오직 예수’가 아닐 때는 그토록 많은가.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앞세워 놓고 그 뒤에서 세상의 원리를 지으려 할까?

나는 바울이 정녕 행복한 사람이었음을 확신한다. 그는 정말 평강에 대해 주장할 권리가 있었다. 그는 오직 위에 것을 찾으라고 외칠 수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채웠다. 다른 것은 그저 배설물일 뿐. 그러므로 그는 은혜와 평강으로 항상 가득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자. 그리스도께서 나로 저 물위로 걷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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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부류의 출현_2011.02

(살전 5:4-8, 개역)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주의 날’은 모든 이에게 일어날 공통의 사건이지만 이 날에 대한 반응은 크게 엇갈리게 될 것이다. 형제들이란 의미 안에는 ‘빛, 낮, 근신, 믿음, 사랑, 구원, 소망’ 모든 용어가 함축되어진다. 그들은 그냥 사람들이 아니라 형제들로서 ‘빛의 아들’, ‘낮의 아들’로 대변된다. 그들이 맞이할 ‘주의 날’은 환희와 기쁨이다. 그들에게 도적같이 임하는 날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낮에 속하였고 깨어 있음으로써 그날의 임재를 알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밤에 속하여 잠들어 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을 알지 못하며 그들에게는 도적같이 임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들은 자고 있기 때문에 인식하지도 감각하지도 못한다.

크게 두 부류가 있다. 낮에 속하여 깨어서 인식하고 반응하는 무리들. 그들은 지각을 사용해 대처하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밤에 속하면 근신하지 못한다. 자고 있으므로 무방비 상태이며, 언제든지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단 깨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낮에 속한 자들은 모두 안전한가. 그들은 최상인가? 사도는 그들에게 또다른 필요와 의무를 첨언한다.

형제들! 그들은 이미 자격을 갖추었다. 그들은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자들에게는 ‘그들만의 의무’를 요구한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에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 오직 깨어 근신하라!

낮은 빛의 시간이며, 깨어 활동하는 시간이다. 형제들은 이미 낮에 속하였고, 빛 아래 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위험의 요소는 존재한다. 누군가는 반드시 낮에도 잠을 잔다. 다시 말해, 이는 ‘제 3 부류의 출현’이다. 낮에 속한 자들의 위험이란 바로 이것이다.

사도가 유독 ‘오직 깨어 근신하라’고 거듭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낮을 맞았고 한 번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해 아래서 숙면하는 이들이 있다. 오전을 성실히 보냈지만 오후에는 식곤증을 이기지 못해 졸음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신앙의 오전과 오후에도 깨어 있어야 한다.

낮에 자는 게으름뱅이에게 사도가 던지는 논리는 ‘자는 자는 밤에 자고, 취하는 자는 밤에 취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째서 낮에 자고, 낮에 취하는가.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실제로 낮에 자고, 취하는 자들이 공공연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단순히 낮에 속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낮에는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함’을 기억(근신)하라고 한다.

자는 자들에게는 별다른 의무가 요구되지 않는다. 자는 자들은 의지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의무는 요구되지 않는다.

깨어 있음은 영광이요, 기쁨이며, 면류관이다. 그러나 의무가 요구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성실히 일하고, 낮잠은 금물이며, 술취함으로 허비해서는 안 된다. 깨어 있음 자체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주하고, 피곤하며,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깨어 있기에, 낮이기에 어쩔 수 없이 책임과 요구, 질서가 필요하다.

따라서, 사도는 형제들에게 특별히 권면한다. 낮에 속하였음에도 그 의무를 다 하지 못할 수 있음을 두려워하라고. ‘제 3의 부류’가 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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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사랑해_2011.06.12.

(아가1: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Today's subject : ‘제 눈의 안경!’ →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조건부일까?

언젠가 누군가 내게 말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 일반남성의 프로필을 넣으면 40점이 나온다고. 학벌, 연봉, 예금율, 자산 등등 그 모든 것을 환산하여 조건부 사랑을 제공하는 세대.

그러나 그럼에도... 가끔 사랑에 대한 이슈를 전해 듣는다.

일흔의 할머니와 젊은 청년의 사랑, 불구자와 미모의 여인의 사랑, 가난한 시인과 성공한 아나운서의 사랑, 병든 아내와 남편의 사랑. 때론 오빠와 여동생의 사랑(?) 에헴~

검지만 아름답다. 게달의 장막에 불과하지만 마치 솔로몬의 휘장같다. 실상은 그런거다.
완벽한 남자, 완벽한 여자 그러나 외로운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정말 조건이 좋은 사람을 사랑할까? 사랑할 수 있을까? 나도 그런 줄 알았지만 사실 나부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아이러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것일까?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만도 않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아이러니다.

신앙 < 육신 (넹?? 헐~~)

‘육신적인 조건이 신앙적인 조건을 결코 앞서지 않는다!’
오브코오스~ 나는 분명히 동의한다. 그런데 그 평범한 사실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매우 놀라운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육신적인 것보다 신앙적인 것에 더 매력을 느낀다. 더 끌린다. 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접어두고 사람과 사람으로서 나를 반응시키는 단, 한 두 가지로부터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돌아서기도 한다. 많은 것들이 필요치 않다. 그저 한 두 가지일 뿐. 신앙적인 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육신적인 조건이라 칭하는 것들의 문제도 딱히 아니다.

ex.) 이쁘고 멋지고 신앙 별로다 → 매력 없다. (그럼)
이쁘고 멋지고 신앙도 괜찮다 → 물론, 괜찮죠. 근데...

그러므로 그것은 검으나 아름다우며, 게달의 장막에 불과하지만 솔로몬의 휘장과 같다. 결국 ‘제 눈의 안경’인거다.
어쩌면 신앙도 아니고, 육신적인 조건도 아니다. 오히려 내 기질이 정답일지 모른다.
그런데 기질과 신앙적 요구가 상존하기 때문에 기질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이방인보다 더 어려운 것 아닌가. 그러나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우리 모두 공범일뿐.

오쇼 라즈니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신부감으로 완벽한 여자를 찾아 나선 남자가 있었다. 전국방방곡곡 다니며 완벽녀를 찾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 남자는 늙은이가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솔로였다. 그때 또 한 명의 늙은 친구가 물었다. ‘여지껏 완벽한 여자를 찾지 못한 겐가?’ 그러자 그 남자가 말했다. ‘아니, 딱 한 번 그토록 찾던 완벽한 여자를 만났지.’ 친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그럼, 왜 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나?’ 남자가 말했다. ‘아니, 글쎄 그 여자도 완벽한 남자를 찾고 있더군.’

우리가 믿음 안에서 누구든지 흔쾌히 용납하고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 한들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면 신앙생활은 그저 쉬운 것 일뿐. 오늘 내가 너를 비난하고, 내일 내가 나를 비난하게 되는 것.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러므로 외적인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죄가 되는 것일까? 아름다움이 잘못인가? 아름다움이 싫은가? 아름다움에 끌리는 건 정당한 본성이다. 논쟁의 요지는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

이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다양한 현상에 대해 더 이상 비평하지 말자. 그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다른 사람이 내게 호감을 갖는 유무의 다양한 현상에 대해 더 이상 비평하지 말자. 우리 모두는 자유롭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이 있는 법이죠.’ 그것이 누구에게나 최선의 위안.

여지껏 직접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그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더 어려워진 건 언제부턴가 그 말이 내게도 소중한 의미가 있음을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으나 아름다운 그녀를 만난다면, 비록 게달의 장막이지만 그저 내게는 솔로몬의 휘장 같은 그녀를 만난다면 나 역시 보통의 사랑하는 모든 이들처럼 말하게 될 것이다.

‘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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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경배_2011.06.05.

(출 20:23, 개역)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시내산 위에 강림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십계명을 전수해 주신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부탁은 이와 같은 것이다.

‘너희는 지금 무형의 하나님을 음성을 통해 만나느니라. 나는 무형이니라. 그러니 부디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해 유형의 하나님을 빗어 만들지 말아라.’

우리는 실물의 존재이다. 사실 인간에게 실존이란 실물에 거의 가까운 의미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믿고 확신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강한 의심과 거부반응을 일으키곤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 실물의 인간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무형이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게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며, 불만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섬기고 싶은 신(神)은 실물하는 신(神)일 때 더욱 좋은 법이다.

역시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욕망을 통찰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무형의 존재로 만족하지 않고, 유형의 존재로 재창조해 낼 것을 알고 계셨으며 그것을 경계시키셨다.

특별히 여기서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시도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정의 내리신다. 다시 말해, 인간이 무형의 하나님을 유형화 시켜서 경배하는 의도와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 자신을 위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무엇을 통찰할 수 있을까?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유형화 시켜서 경배하였음을 증언한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금송아지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겼다. 그들은 진정 하나님을 섬겼다. 여호와를 섬기는 예식을 전적으로 뒤집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갈망하는 하나님의 무형을 유형화 시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토록 문제가 되는 것일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방법론이 잘못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들은 그들의 기질에 유리하고 부합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을 선택함으로써 무형의 하나님을 섬기는 본질적인 방식을 거부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방법을 불편하지만 수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적인 편리의 방법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란 의미이다.

이 사실은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경적인 방법과 원리들을 끊임없이 교훈 받는다. 그러나 수없이 그 방법들과 부딪히며 논쟁하며, 다툼으로 소모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따름이다. 시내산에서 음성으로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오늘 내 손안에 놓여진 성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너의 이기적인 원리에 부합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말고, 고난에 참예하며 희생하며 너 자신을 굴복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이다. 본연의 하나님을 섬기라고, 거짓의 유형화 된 하나님으로 만들어 섬기려 하지 말라고 말이다.

나는 내 앞에 있는 하나의 기괴한 현상을 발견한다. 탁자 위엔 대가리가 박살난 금송아지가 놓여있고, 방 주위엔 파편과 동강이 난 수많은 금송아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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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_2011.05.29.

요즘 교사모임 때 ‘영적침체’란 주제에 대해 교사들과 묵상을 나누고 있다. 이 주제가 가지는 가치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이란 것이며 또한, 이 슬럼프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도다운 삶의 매력과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침체되는 원인과 이유의 다양성은 탐색해볼수록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지만 분명 하나의 공통된 요소를 찾을 수는 있다. 불만족.

문득 오늘 이 주제는 왜 의미 있는 것일까?

대개 어떤 문제란 것을 갖고서 상담을 요청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현재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과 상태, 환경과 조건에 대해 전적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야기되는 갈등과 고민 때문이다.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방향과 방법에 대한 분명한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지와 우유부단함 때문에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또 누구는 그릇된 결정 때문에 근심한다. 또 한편에선 보다 더 주님을 잘 섬기고 싶은, 더 완전해지고 싶은 자신의 갈망을 이룰 수 없는 상태에 대해 불만족한다. 어찌 되었든 그 모든 것은 만족스럽지 못하며, 그러므로 그 불만족은 근심을 야기시키고 우리는 침체되어 간다.

선한 갈망이든 그릇된 욕망이든 선악의 유무를 막론하고 우리가 만족할 수 없을 때 우리가 한결같이 근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의 만족은 무엇일까? 정직하게 말해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이기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기심을 채울 수 없다면 우리는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증거한다. 더불어 우리는 ‘주님’의 존재를 가장 비중 있게 인정한다. 그러나 솔직한 나의 고민은 이것이다. 나는 정말 주님을 인정하고 싶은 걸까?

이번 주 청년회 묵상이 로마서 4장18-21절 말씀이다. 그 묵상조차 지금 내가 말하는 주제의 한 맥락에 재료를 제공해준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고 의심치 않고 견고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확신했다고, 그것이 ‘의’로 여김을 입었다고.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의 과거를 너무나 잘 안다. 기근을 피해 약속한 땅을 떠났고, 두 번 씩이나 아내를 부인했으며, 처음 이삭을 약속받았을 때 그가 하나님께 했던 말은 ‘이스마엘이나 살게 해주소서.’ 바로 그것이었음을.

아브라함의 확신, 아브라함의 완전한 믿음 그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믿음의 깊은 실패와 좌절을 맛봤다. 그가 자기나 사라나 그 육체의 소망이 끊어짐을 알고 이삭의 출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처음 회의적이었을 때, 그러나 정녕 그 이삭을 껴안았을 때 받았을 충격, 그 깊은 회개와 각성은 어떤 것이었을까? 바로, 그것을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이 바뀔 때 믿음이 약하여지고 만다. 우리는 만족하지 못한다. 불만족스럽다. 확신하지 못한다. 의심한다. 그러므로 견고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다. 영광은 실추된다. 의로 여기심을 입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아브라함의 그 믿음. 그것은 그냥 하늘로부터 던져준 믿음이 아니란 것. 그가 그 모리아 산에서 조금도 두려움 없이 나아가 이삭의 머리 위에 칼을 드리울 수 있을 만큼 믿음의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믿음의 훈련 없이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할 것이다.

‘훈련 받은 믿음의 진수!’

그리고 우리가 다룰 문제도 바로 여기서 발견된다. 견고한 믿음은 우리가 꿈꾸는 갈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훈련?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에 부합되지 않는다. 훈련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우리를 근심에 빠트리는 것이며, 종종 우리가 침체되는 이유조차 되기까지 한다.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익히 생각해 본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훈련을 싫어한다. 우리는 이기심을 이루길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싶어하느냐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고백한다. 때때로 나는 차라리 내 삶의 주인이 나였으면 싶다고. 미안하지만 이것이 나의 정직이다.

주님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욕망과 이기심을 포기해야 된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굴복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굴복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인정해야 된다고 말할 뿐이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정답을 말해줄 자격이 부족해 보인다.

이제 우리는 결론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근심과 침체의 근원적인 이유 중 하나는 분명 불만족이다. 그리고 그 불만족의 동기는 또한, 굴복하지 못함이다. 우리는 바울이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는 십자가 외에는 모두 배설물로 여겨졌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그 많은 환란과 곤혹스런 환경 속에서도 기뻐했던 이유가 이상하고 되물을 필요가 없다. 바울의 고백은 정직했다.

다만, 우리의 마지막 남은 고민은 우리의 만족 역시 굴복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제쯤 굴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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