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평강에 대한 이 말씀은 어떤 때는 마치 책망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평강에 대해 움츠러들고 두려울 때도 있다. 그리고 감사하라는 것까지.
초대교회시대 아직은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다. 바울의 서신들은 완성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한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론도 다양했다. 많은 이단학설이 교회를 흔들기도 했다.
바울은 서신을 통해 오늘날 우리 믿음의 본질과 기준에 대한 명확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성도들의 다양한 자질과 덕목을 가르쳐주었다. 평강과 감사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서신의 초반부 인사에서도 항상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은혜와 평강은 그토록 현실을 사는 성도에게 필수불가결한 삶의 요소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다. 그리스도는 최초 죄의 공포와 두려움에 있는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으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삶의 은혜와 평이 되어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늘 은혜와 평강 가운데 머물지 못함을 발견한다.
사실 두려워한다. 사실 공포에 떤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어느새 세상의 원리와 방식 아래 지배당하며, 발버둥치곤 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의 방식을 놓을 때 마치 세상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뒤틀린다. 그리스도의 평강 안에 있을 때라면 고난 중에도 슬픔 중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인내한다.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없었지만 주안에 강권할 때 믿음의 배 위에 탔고, 적어도 표류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도 없이 많은 화살과 세파들이 이 평강을 깨부숴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나는 베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캄캄한 밤 바다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물위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우려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위를 정녕 걷고 있었다. 그러나! 바람이 문제였다.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이 베드로의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그는 순간 현실의 불가능에 눈을 떴다. ‘나는 물위를 걸을 수 없어! 내가 어떻게 물위를 걷겠다는 거지? 위험천만의 일이야! 도무지 예수님께까지 가진 못하겠군!’ 그러므로 평강은 깨졌고, 공포가 그를 지배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내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바로 그것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바람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바라보았다.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세상의 법칙과 원리 위에 나는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용기를 다 잡는다. 기운을 내본다. 하나님을 믿어본다. 약속들을 기억해본다. 고난 뒤에 승리한 성경 속 인물들의 삶을 통해 위로를 삼아본다. 아, 그러나! 그러나! 비록 그러할지라도 저 미친 바람이 멈추질 않는다. 바다보다도 더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은 저 바람이 나의 모든 용기마저 불어 버린다. 공포와 두려움에 즉시 사로잡힌다. 평강은 깨지고 어느새 앞에 계신 그리스도를 내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검은 밤하늘이 보인다. 휘갈기는 바람의 소리가 보인다. 차가운 물아래로 젖어간다.
기억하자. 사실 우리 모두는 물위를 걷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렇다. 바울은 그것의 중요성을 알고 강조한다. 그것이 없이 기쁨은 없고, 오래 참음과 인내도 없다. 평강을 소유하는 것 이상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평강으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 가운데 있어야 한다. 깊이 있는 기도와 간구, 성령 안에서의 의뢰, 말씀의 깊이 있는 탐구.
그러나 바람은 여전히 불며, 종종 그리스도를 놓쳐버림으로 바람에 휩쓸려 다시 세상의 원리와 방식에 사로잡힌다. 이루지 못한 꿈, 좌절했던 쓰라린 기억들. 거절 당했던 자비들. 유령 같은 망상들이 내 마음을 주장한다. 용기를 잃는다. 낙심해 본다. 푸념해 본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평강’은 그 자체로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지. 또한, 그것이 얼마나 쉽게 지켜지지 못하는지 느끼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 평강 아래서 그리스도인의 원리와 방식으로 만족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나는 세상의 원리와 지배를 의식하며 공포와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채로 살 것인가. 어쩌면 그 모든 것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소심한 그리스도인은 아닌가.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충만하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이 충만하다고 하는데 어째서 ‘오직 예수’가 아닐 때는 그토록 많은가.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앞세워 놓고 그 뒤에서 세상의 원리를 지으려 할까?
나는 바울이 정녕 행복한 사람이었음을 확신한다. 그는 정말 평강에 대해 주장할 권리가 있었다. 그는 오직 위에 것을 찾으라고 외칠 수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채웠다. 다른 것은 그저 배설물일 뿐. 그러므로 그는 은혜와 평강으로 항상 가득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자. 그리스도께서 나로 저 물위로 걷게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