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만나기 위해_2011.06.28.
 

(출 25:8, 개역)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출 25:22, 개역)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만남이란 말은 그 자체로 뭔가 모르게 아름답고 기대감을 지닌다. 세상에 많은 만남이 있다. 부모와 자식의 만남, 스승과 제자의 만남, 남편과 아내의 만남, 친구의 만남 또는 어떤 계기나 사물, 현상과의 만남까지 다양하다. 사람은 늘 새로운 만남을 통해 살아간다. 그러므로 만남은 기대감을 준다. 좋은 만남에 대한 동경과 꿈이 있다. 특히, 남녀의 만남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영원한 관심사이며, 가장 감정을 동하게 만드는 만남일 것이다.
 

그리고 이 만남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에게 있어서도 만남은 존재한다. 다만, 남자와 여자가 서로 상대를 찾는 것에 비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서 비롯된 만남이다. 사람은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으며 빛을 비추더라도 깨닫지 못하는 어둠에 불과했다. 악마의 손에 이끄려 마법의 성에 들어가 잠든 공주처럼 인간의 영적무지란 그토록 깊은 숙면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사랑과 열망을 가지고 인간들을 만나기 위해 오셔야만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완전하신 빛, 완전한 선, 완전한 거룩의 하나님에게 있어 죄라는 마법에 걸린 인간, 죄의 독에 감염된 인간은 만남 그자체로 저주스러운 결말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에 불과했다. 이 얼마나 서글픈 사실인가. 하나님은 그토록 인간을 만나고 싶어 하시지만 오히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인간의 편에서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통로라니!
 

마치 빛이 아무리 어둠을 만나고 싶어도 이 빛이 어둠을 만나러 가기만 하면 어둠은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은 어둠을 만날 수 없고, 만나려는 시도자체가 어둠을 죽여 버리는 결과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이와 같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기를 얼마나 갈망하시는지! 어째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가. 바로, 죄인을 만나려는 하나님의 강렬한 열망에서부터 그 사랑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 중에 거할 수 있도록 성소를 짓되 곧, 나를 위해 만들어달라고 말이다. 기어이 인간 안에 거하시고, 사람과 만나기 위해 간청하시는 하나님의 애처로운 음성을 듣는 것만 같다. 너희를 만나고 싶어 하는 나의 간절함을 위해 곧, 나를 위해 만들어달라셨다. 이유는 단 하나. 함께 거하고 싶다는 열망.
 

하나님과 인간은 바로 대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을 마련하셨다. 성소. 바로 그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그리고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 곳. 그러므로 이 성막은 그 자체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게 되는 유일한 중보의 존재였다.

분단된 우리나라는 북한측과 남한측의 만남을 종종 판문점에서 가진다. 이 판문점은 분리된 남북한을 연결해주는 중보처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막을 그 중보로 삼아 인간과 만나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을 이루시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 성막은 그 자체로 완전한 중보되신 그리스도의 모형 그 자체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셨다.
 

성막 안 지성소. 그 가장 은밀하고 가장 깊은 성결의 장소에서 하나님은 속죄소에 뿌려진 피와 더불어 인간과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셨다. 그렇다. 죄의 씻음. 죄의 용서. 인간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단절시킨 그 결정적인 죄의 허물을 벗겨내는 거룩한 모습. 그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크신 은혜를 베푸심과 더불어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주셨던 것이다. 우리를 허물진 채로 만나지 않으셨다. 우리를 허물진 채로 저주하며 만나려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통해 자신이 사랑임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신다.
 

하나님은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셨는가. 얼마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셨는가. 우리의 죄를 탓하기보다 우리를 우리 죄를 따라 혐오하고 앙갚음하기 보다. 그 허물을 사하시면서 까지 열렬히 우리를 사랑 안에서 만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러므로 성막은 그 자체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은혜의 증거이며, 참된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가장 완벽한 실현이었다.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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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스러운 하나님의 영광_2011.06.27.

(출 24:17, 개역)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하나님은 영광이시다. 우리는 영광 중에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영화로운가. 모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 위에 강림하신 하나님과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의 눈에는 맹렬한 불 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불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종 심판의 모습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불과 유황이 쏟아졌다. 세상의 끝은 불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지옥의 자식들은 세세토록 불 가운데 고난받는다.

여호와의 영광이 어째서 저 무서운 불 심판으로 보여졌던 것일까? 하나님은 십계명을 전수하기 위해 시내산에 임하셨다. 그 십계명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도구이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죄인들이었다. 죄의 종. 하나님을 원망하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의 종.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오히려 맹렬한 불 같이 공포스럽게 보여졌다.

누가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다.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영혼들.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죄인들은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공포스러운 심판의 불처럼 다가올 뿐이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들이 영광의 광채로 빛나는 모세의 얼굴을 두려워하면서 수건으로 가려야만 했던 것처럼.

아모스 선지자는 말한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암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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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애純粹愛_2011.06.26.

순수[純粹] [명사]
1.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
2.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


세월은 연륜을 만들어준다. 연륜은 사람을 더 지혜롭게 해준다. 어려움을 많이 겪어본 사람일수록 실제로 더 지혜롭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세월이 만들어준 연륜이라는 자리에는 사라져가는 것도 있다. 그것은 바로 순수!

어린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는 아름답다. 통통한 볼 살에 티 없고 부드러운 아기 피부. 쉽게 글썽거리는 눈망울까지. 어른들에게는 능숙함과 숙련된 능력과 지혜가 있다. 그러나 아이의 그 순수함은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나 보다.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자신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그 순수에 대한 추억과 동경을 아이에게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도 연륜이 있다. 아무리 나이 많은 어른일지라도 신앙에는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부터 시작한다. 작은 것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하루 한 장 성경을 읽지 못한 것에서도 크게 상심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구원을 의심하기도 하는 모습들. 그러나 그 모든 모습들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수해 보인다. 나를 추억하게 해준다.

대학시절 종종 침체에 빠지곤 했다. 몇 달간 성경도 제대로 안 읽고 낙심해 있었다. 그리고 동계수련회가 다가오자 그래도 1독은 하겠다고 성경을 읽어 내려갔다. 눈은 읽으나 마음에는 담겨지지 않는 허무함. 동계수련회 가는 버스 안에서까지 읽고 읽어 광주교회 도착 직전 1독을 했다. 그리고 생활상담을 했다. 성경을 잘 안 읽었노라고. 여기 오면서 차에서까지 읽어서 겨우 1독을 했노라고. 정말 내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인지 의심이 간다고 말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문제였고, 근심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순수했고, 해맑았다. 구원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가신 지금 오히려 나는 더 무성의하다.

힘든 여건과 고난 속에서도 영혼을 향한 순수한 갈망과 복음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명에 대해 감각되고, 깨어있는 순수한 형제, 자매님들의 간증을 듣는다. 다른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복음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책임감을 느끼는 참된 분들. 그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광야 같은 마음에 시원한 바람처럼 느껴진다. 내가 정말 사랑해야 될 사람들은 바로 당신!

주님을 위해 울었던 기억들.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영혼에 대한 책임감이 무거워 고뇌했던 시간들. 그러나 세월이 어린 아이를 어른으로 바꾸어 놓았다. 관심사가 새로워졌고, 이제 순진하지만은 않은. 여리지만은 않은. 견고해진 영혼, 단단해진 맷집, 깊어진 묵상, 더 다양해진 경험, 넓어진 말씀의 지식.

그리고 함께 늘어났던 변명들. 친숙함이 만들어 준 경멸들... 인간적인 연민과 아쉬움들. 세상의 바다에 나가 세파와 싸우는 동안 어느새 욕망의 산을 오르는 자신의 뒷모습.

그러므로 누군가에게는 순수함이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신앙의 원리가 육적인 원리 위에 변화무쌍하게 서야 할 지금이다. 때때로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순수함 이상으로 너무나 육적인 원리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모습을 볼 때라면 서글퍼진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형제, 자매란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존귀한 우리들인데 우리는 얼마나 육적인 조건으로 인해 형제, 자매를 존중해주지 못하고, 사랑해주지 못했는지. 신앙은 육적인 조건 뒤에 서서 너무 뒤쳐진 것만 아니면 되는 것처럼 비춰질 때라면 내가 배운 그리스도에 대해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렇게 말씀을 사모하고, 자주 영적교훈을 받고, 성실히 봉사하고, 그토록 지식과 묵상은 깊어져가면서도 실상은 위선에 더 익숙해져 가는 모습을 발견할 때라면 두려워진다. 그러나 형제, 자매는 육적인 조건이 있어서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아름다운 이유, 그들이 귀히 여겨져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했기 때문이란 사실.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인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이 그리스도의 원리이길 기도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나의 방법이 순수함이길 소망한다. 그러므로 오늘 나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순수애純粹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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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고용_2011.06.24

(요 1:6-8, 개역)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일명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 일컬어지는 증거자 요한. 그에 대한 소개는 매우 독특하다. 그는 위대한 분을 증거 하기 위해 특별히 고용된 사람이었다. 법정에 서면 반드시 증인이 출석하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큰 이가 없어 스스로에게 맹세하고 호언장담하시지만 사람은 너무나 거짓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변호는 인정되지 않는다. 반드시 제3자의 증거가 요구된다.

악한 어둠의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셨다. 빛을 비추고 그 빛의 생명으로 죽은 영혼을 깨우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 아무도 그 빛의 증거를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빛의 생명력을 위해 증거자를 고용하셨다.

우리는 이 증거자 요한의 위대함을 익히 잘 안다. 그는 정말 헌신적인, 매력적인 증거자였다. 그는 저 광야에서 소리 질렀다. 철저히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자신은 쇠하여졌다. 그는 마치 외판원처럼 중심가에서 외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본질과 속성, 아름다움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광야에서 외쳤다. 얼마나 충실한 증거자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한계는 있고, 부족은 있으니!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나 세례 요한 모두 그 육적생명의 유한성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이후로는 누가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인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시 고용하셔야만 한다. 다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인 났으니 이름은 ○○라’

그의 임무는 요한에게 주어졌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빛을 증거 하는 일, 이로써 모든 사람이 빛을 믿도록 하는 일. 그러므로 그것은 불변하는 임무라 불리워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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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딤의 공포_2011.06.22

올 여름 전국을 강타할 초특급 스릴러~ ‘더딤의 공포’ 흐흐흐~

(출 32:1, 개역)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있다면 주저 없이 그것은 ‘기다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다림’과 ‘인내’만큼 우리를 가장 시험하는 것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 현재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보랏빛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지라도 지금 현 상태가 어느 정도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없다면 상황은 불투명해진다.

더딤의 공포. 그 공포를 경험한 유명한 사람이 있다. 바로 사울이다. 블레셋과의 전투상황에서 사울은 사무엘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간절한 기다림의 때 사무엘은 모두를 실망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험이 도래했다. 백성들은 혼란 속에 요동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블레셋 군대는 믹마스에 까지 진을 치고 모여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울은 어떤 대안이든 세워야했고,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는 그 자신이 나서서라도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뒤늦게 나타난 사무엘은 한 치의 주저함 없이 사울에게 망령되다고 호통 쳤다.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든다. 참 뻔뻔한 사무엘! 약속기한에 늦게 도착해서 일을 그르치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무엘의 손을 들어주시니...

우리에게 기다림이란 마치 이와 같은 이치이지 않은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막 제사를 드리고 나면 그 사무엘이 나타나기를 몇 번이었던고!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기다림이라 하는 것이 결코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시내산 아래 도착한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모세는 그저 불친절했다. 기약도 없이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는 그저 내려올 생각을 않으니 백성들도 지칠만 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엄습해오는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애굽에서부터 그 열가지 재앙과 바다를 가르는 하나님의 이적과 맛나와... 그 이적의 대언자였던 리더 모세가 감감무소식이니 이 낯선 광야에서 리더를 잃은 그들의 불안과 공포는 결코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새 그들은 하나님보다 모세를 더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인도하여 낸 모세’에 대해 그들이 외치는 말을 들어보자. 그들은 ‘우리를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부르짖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보다 어느새 모세를 더 의지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계시되지 않았다. 모세를 통해 말씀해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모세는 더욱 실존적인 존재였다.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치일 것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묻는 동시에 믿음에 앞선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그러다보면 잠잠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귀기울이기 보다 즉시로 사람의 말과 의견을 더 들으려고 할 때도 있다.

아무쪼록 모세의 부재는 그들에게 불안감을 증폭시켰으며, 모세의 기약 없는 불친절한 부재는 그들의 공포심에 불을 붙였다. 더디옴. 그것만큼 그들을 요동치게 만드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더딤의 공포이다.

우리역시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보다 더 위대하지 않다. 더 믿음 위에 서 있지 않다. 이스라엘의 모습은 곧 우리 믿음의 연약함을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도우심, 내 소망에 대한 반응이 더디다는 것으로부터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기약 없는 불친절한 기다림에 우리는 거의 기쁨을 잃어버릴 때도 있다. 기다리는 것만큼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도 별로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얼마나 자주 얼마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기다림에 대해 훈련하시는지!

이스라엘이 모세의 부재로부터 오는 공포를 다스릴 인간적인 목적에서 고안해낸 방법이 금송아지였다. 빈자리는 무엇인가 채워야만 하나보다. 하나님께서 더디 행하실 때 우리는 무엇을 고안하고 있었는가. 인간적인 목적과 방편으로 만들어낸 나의 불행한 금송아지들이 지금도 있진 않은가. 그러므로 그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는 날 모두 갈아서 마셔야만 할 고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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