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your summer_2011.07.03.


(레 8:7-9, 개역) 『[7] 아론에게 속옷을 입히며 띠를 띠우고 겉옷을 입히며 에봇을 더하고 에봇의 기묘하게 짠 띠를 띠워서 에봇을 몸에 매고 [8] 흉패를 붙이고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고 [9]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 전면에 금패를 붙이니 곧 거룩한 관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


일주일간의 제사장 위임식이 거행되었다. 사상 최초의 초대 대제사장직에는 레위지파 아론이 선임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며,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 향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내렸다. 거룩한 직분에 부르심을 받은 아름다운 아론.

그러나 그에게도 뼈아픈 실패와 아픔의 과거가 있었으니... 그는 모세가 시내산 위에 올라가 40주야를 머무는 동안 그 산 아래서 동요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송아지 우상을 각을 떠서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 모세는 아론의 그러한 무책임한 행동을 놓고 모든 백성들을 조롱거리가 되게 했다고 책망했다.

홍해를 지나 광야로 나온 그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애굽의 우상과 권세 아래에서 빠져나온 그들에게 첫 우상숭배의 치명적 오점을 남긴 그 중심에 아론의 비겁함과 무책임이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 이 거룩한 제사장 위임식의 날 아론은 가장 거룩한 기름을 부음 받으며 가장 거룩한 회막의 봉사에 쓰임 받기 위한 모든 자격을 갖췄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실패는 영원한 실패가 될 수 있는가. 현재의 초라함이 영원한 초라함이 될 수 있는가. 한 번 정죄는 영원한 정죄가 될 수 있는가. 아무것도 우리를 구속하지 못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이 아니라면 말이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다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나아갈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제 삼, 제 사 기회를 주신다. 지나치게 낙심하지 마라. 오히려 늘 허물을 덮으시고 풍성한 은혜를 다시 베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그저 감사하며 기다리자.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이신다 말씀하셨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앞이 보이지 않는 침체와 실패와 패배 속을 거닐 때라 할지라도 기억하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믿는 것. 겸손히 기다리는 것.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묵상하는 것. 그것이 최선의 방책이며, 늘 언제나 하나님은 다시 내게 거룩한 기름을 부어주시기 위해 예비하신 그 날이 예정되어 있음을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주의 제자는 지나치게 낙심하지 않으며, 영원히 침체되어 있지 않으며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일곱 번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겨울이 유독 지독하고 길어질지라도 그 겨울의 끝에는 봄이 오고, 다시 싹이 돋고, 소생하며 푸르름이 기지개를 편다. 우리의 겨울이 너무 길다고 하나님께 토로할 때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말씀해주신다.

‘난 너의 여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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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을 얻으시기 위해_2011.07.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장자가 죽는 재앙으로 인해 바로는 겨우 그 마음을 항복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잠시. 바로는 불타오르는 증오와 복수심을 갖고 그의 최정예 부대를 정렬시키고 이스라엘의 뒤를 쫓는다. 이제 아주 자신의 생명을 걸고 서라도 여호와와 맞짱 뜨기 위해서 말이다.

항복한 줄만 알았던 바로의 대반격에 이스라엘 민족은 심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전쟁할 수 있는 그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그들은 노예에서 이제 막 탈출하는 피난민에 불과했다. 최정예 부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극도로 흥분했고 심히 두려워 부르짖었다. 한편, 민감해진 그들은 모세를 향해 막말을 하며 대들었다. 맹비난했다. 기껏 광야에서 우리를 죽게 만들려고 끌어낸 것이냐며. 차라리 애굽사람을 섬기는게 낫지 않았겠느냐며.

성난 그들에게 모세가 엄중히 말했다. 지금껏 본 이적으로 부족하냐고. 두려워도 말고, 들레지도 말고 불안과 공포를 잠재우고 그 사나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서 다만 여호와께서 무엇을 어떻게 행하시는지 지켜 보라고 말이다. 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용사되신 하나님께서 애굽의 군대를 어떻게 이기시는지 지켜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구원의 문이 열렸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하더라고 솔직히 바다가 갈라질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익히 아무도 생각해보지 못한 상상해보지 못한 하나님만의 방법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입이 딱 벌어졌다.

또, 그리고 애굽의 성난 군대가 예상대로 바다까지 뒤쫓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 갈라진 바다는 다시 합쳐졌으며 애굽의 모든 군대는 그 물 아래 수장되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의 피비린내 나는 핍박자 바로는 운명을 달리했으며, 그들을 그토록 두렵게했던 최정예 부대는 칼 한 번 휘두르지 못한 채 바다 아래 묻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영광의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현상과 반응 속에서 나 자신의 안락과 평안, 나의 영광과 만족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에 너무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당장 내 뒤에 쫓아오는 바로의 군대를 바라보면서 으르렁거린다. 하나님을 원망한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 따위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광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실패한다. 그러므로 원망한다. 그러므로 불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일하실 뿐. 우리의 이기심으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우리 삶의 모든 일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됨에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

육신적으로 좋고 안락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라면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만족인가. 나의 영광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인가.

직장, 결혼, 사회적 평판, 차, 경제력... 모든 소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되는 것인지를 고려하는 정직함. 그것이 우리를 닫혀진 홍해 앞에서도 들레지 않게 하는 비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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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만나기 위해_2011.06.28.
 

(출 25:8, 개역)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출 25:22, 개역)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만남이란 말은 그 자체로 뭔가 모르게 아름답고 기대감을 지닌다. 세상에 많은 만남이 있다. 부모와 자식의 만남, 스승과 제자의 만남, 남편과 아내의 만남, 친구의 만남 또는 어떤 계기나 사물, 현상과의 만남까지 다양하다. 사람은 늘 새로운 만남을 통해 살아간다. 그러므로 만남은 기대감을 준다. 좋은 만남에 대한 동경과 꿈이 있다. 특히, 남녀의 만남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영원한 관심사이며, 가장 감정을 동하게 만드는 만남일 것이다.
 

그리고 이 만남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에게 있어서도 만남은 존재한다. 다만, 남자와 여자가 서로 상대를 찾는 것에 비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서 비롯된 만남이다. 사람은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으며 빛을 비추더라도 깨닫지 못하는 어둠에 불과했다. 악마의 손에 이끄려 마법의 성에 들어가 잠든 공주처럼 인간의 영적무지란 그토록 깊은 숙면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사랑과 열망을 가지고 인간들을 만나기 위해 오셔야만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완전하신 빛, 완전한 선, 완전한 거룩의 하나님에게 있어 죄라는 마법에 걸린 인간, 죄의 독에 감염된 인간은 만남 그자체로 저주스러운 결말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에 불과했다. 이 얼마나 서글픈 사실인가. 하나님은 그토록 인간을 만나고 싶어 하시지만 오히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인간의 편에서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통로라니!
 

마치 빛이 아무리 어둠을 만나고 싶어도 이 빛이 어둠을 만나러 가기만 하면 어둠은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은 어둠을 만날 수 없고, 만나려는 시도자체가 어둠을 죽여 버리는 결과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이와 같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기를 얼마나 갈망하시는지! 어째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가. 바로, 죄인을 만나려는 하나님의 강렬한 열망에서부터 그 사랑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 중에 거할 수 있도록 성소를 짓되 곧, 나를 위해 만들어달라고 말이다. 기어이 인간 안에 거하시고, 사람과 만나기 위해 간청하시는 하나님의 애처로운 음성을 듣는 것만 같다. 너희를 만나고 싶어 하는 나의 간절함을 위해 곧, 나를 위해 만들어달라셨다. 이유는 단 하나. 함께 거하고 싶다는 열망.
 

하나님과 인간은 바로 대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을 마련하셨다. 성소. 바로 그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그리고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 곳. 그러므로 이 성막은 그 자체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게 되는 유일한 중보의 존재였다.

분단된 우리나라는 북한측과 남한측의 만남을 종종 판문점에서 가진다. 이 판문점은 분리된 남북한을 연결해주는 중보처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막을 그 중보로 삼아 인간과 만나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을 이루시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 성막은 그 자체로 완전한 중보되신 그리스도의 모형 그 자체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셨다.
 

성막 안 지성소. 그 가장 은밀하고 가장 깊은 성결의 장소에서 하나님은 속죄소에 뿌려진 피와 더불어 인간과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셨다. 그렇다. 죄의 씻음. 죄의 용서. 인간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단절시킨 그 결정적인 죄의 허물을 벗겨내는 거룩한 모습. 그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크신 은혜를 베푸심과 더불어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주셨던 것이다. 우리를 허물진 채로 만나지 않으셨다. 우리를 허물진 채로 저주하며 만나려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통해 자신이 사랑임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신다.
 

하나님은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셨는가. 얼마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셨는가. 우리의 죄를 탓하기보다 우리를 우리 죄를 따라 혐오하고 앙갚음하기 보다. 그 허물을 사하시면서 까지 열렬히 우리를 사랑 안에서 만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러므로 성막은 그 자체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은혜의 증거이며, 참된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가장 완벽한 실현이었다.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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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스러운 하나님의 영광_2011.06.27.

(출 24:17, 개역)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하나님은 영광이시다. 우리는 영광 중에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영화로운가. 모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 위에 강림하신 하나님과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의 눈에는 맹렬한 불 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불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종 심판의 모습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불과 유황이 쏟아졌다. 세상의 끝은 불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지옥의 자식들은 세세토록 불 가운데 고난받는다.

여호와의 영광이 어째서 저 무서운 불 심판으로 보여졌던 것일까? 하나님은 십계명을 전수하기 위해 시내산에 임하셨다. 그 십계명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도구이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죄인들이었다. 죄의 종. 하나님을 원망하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의 종.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오히려 맹렬한 불 같이 공포스럽게 보여졌다.

누가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다.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영혼들.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죄인들은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공포스러운 심판의 불처럼 다가올 뿐이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들이 영광의 광채로 빛나는 모세의 얼굴을 두려워하면서 수건으로 가려야만 했던 것처럼.

아모스 선지자는 말한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암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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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애純粹愛_2011.06.26.

순수[純粹] [명사]
1.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
2.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


세월은 연륜을 만들어준다. 연륜은 사람을 더 지혜롭게 해준다. 어려움을 많이 겪어본 사람일수록 실제로 더 지혜롭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세월이 만들어준 연륜이라는 자리에는 사라져가는 것도 있다. 그것은 바로 순수!

어린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는 아름답다. 통통한 볼 살에 티 없고 부드러운 아기 피부. 쉽게 글썽거리는 눈망울까지. 어른들에게는 능숙함과 숙련된 능력과 지혜가 있다. 그러나 아이의 그 순수함은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나 보다.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자신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그 순수에 대한 추억과 동경을 아이에게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도 연륜이 있다. 아무리 나이 많은 어른일지라도 신앙에는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부터 시작한다. 작은 것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하루 한 장 성경을 읽지 못한 것에서도 크게 상심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구원을 의심하기도 하는 모습들. 그러나 그 모든 모습들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수해 보인다. 나를 추억하게 해준다.

대학시절 종종 침체에 빠지곤 했다. 몇 달간 성경도 제대로 안 읽고 낙심해 있었다. 그리고 동계수련회가 다가오자 그래도 1독은 하겠다고 성경을 읽어 내려갔다. 눈은 읽으나 마음에는 담겨지지 않는 허무함. 동계수련회 가는 버스 안에서까지 읽고 읽어 광주교회 도착 직전 1독을 했다. 그리고 생활상담을 했다. 성경을 잘 안 읽었노라고. 여기 오면서 차에서까지 읽어서 겨우 1독을 했노라고. 정말 내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인지 의심이 간다고 말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문제였고, 근심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순수했고, 해맑았다. 구원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가신 지금 오히려 나는 더 무성의하다.

힘든 여건과 고난 속에서도 영혼을 향한 순수한 갈망과 복음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명에 대해 감각되고, 깨어있는 순수한 형제, 자매님들의 간증을 듣는다. 다른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복음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책임감을 느끼는 참된 분들. 그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광야 같은 마음에 시원한 바람처럼 느껴진다. 내가 정말 사랑해야 될 사람들은 바로 당신!

주님을 위해 울었던 기억들.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영혼에 대한 책임감이 무거워 고뇌했던 시간들. 그러나 세월이 어린 아이를 어른으로 바꾸어 놓았다. 관심사가 새로워졌고, 이제 순진하지만은 않은. 여리지만은 않은. 견고해진 영혼, 단단해진 맷집, 깊어진 묵상, 더 다양해진 경험, 넓어진 말씀의 지식.

그리고 함께 늘어났던 변명들. 친숙함이 만들어 준 경멸들... 인간적인 연민과 아쉬움들. 세상의 바다에 나가 세파와 싸우는 동안 어느새 욕망의 산을 오르는 자신의 뒷모습.

그러므로 누군가에게는 순수함이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신앙의 원리가 육적인 원리 위에 변화무쌍하게 서야 할 지금이다. 때때로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순수함 이상으로 너무나 육적인 원리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모습을 볼 때라면 서글퍼진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형제, 자매란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존귀한 우리들인데 우리는 얼마나 육적인 조건으로 인해 형제, 자매를 존중해주지 못하고, 사랑해주지 못했는지. 신앙은 육적인 조건 뒤에 서서 너무 뒤쳐진 것만 아니면 되는 것처럼 비춰질 때라면 내가 배운 그리스도에 대해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렇게 말씀을 사모하고, 자주 영적교훈을 받고, 성실히 봉사하고, 그토록 지식과 묵상은 깊어져가면서도 실상은 위선에 더 익숙해져 가는 모습을 발견할 때라면 두려워진다. 그러나 형제, 자매는 육적인 조건이 있어서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아름다운 이유, 그들이 귀히 여겨져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했기 때문이란 사실.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인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이 그리스도의 원리이길 기도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나의 방법이 순수함이길 소망한다. 그러므로 오늘 나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순수애純粹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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