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은 껍질 밑 얇은 속살_2011.11.19

(신 3:25-27, 개역) 『[25]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 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두고 모세는 말한다. 자신은 절대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노라고. 그러나 그것이 결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말이다. 모세, 그는 하나님의 가로막으심으로 결단코 가나안을 밟을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이 설교를 하는 모세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의 여정을 되돌아본다.

40세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목동으로 살아가던 살인자를 부르셨다. 하나님은 그의 무능을 호소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억눌러 거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 내세우셨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직분을 맡았다. 모세는 그 자체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거기에다 그의 사역의 시작은 너무나 비참했다. 바로 앞에 나아갔다가 오히려 백성들의 학대가 더 거세져 민족적 배반자로까지 내몰렸다. 일당 백도 아닌 일당 수 백만명.

홍해 앞에서 또 한 번 원망과 미움을 받았다. 기적도 있었고 환희도 있었다. 그러나 광야를 맴돌면서 그는 수 없는 비난과 화살과 당을 짓는 무리들과 비겁자들과 불신자들과 불신앙의 회중들과 다투고 싸워야만 했다. 그는 철저히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수없이 참아야 했다. 수없이 울어야 했다. 수없이 부러지고 고통 받아야만 했다.

므리바 물에서 물이 없다고 격노하는 회중의 경박한 신앙과 불신앙과 철없는 모습에 딱 한 번 맞대응 했다. 분을 삭히지 못해 반석을 두 번 세차게 내리치며 물을 쏟아져 나오게 했다. 그러므로 그 일이 불씨가 되어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결단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임을 천명 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 아니었다. 슬펐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와닿지는 않았다.

40년의 광야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오늘 이 시점에 다다르면서 그는 얼마나 하나님께 매달렸을까? 정말 저 가나안에 나 역시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의 마음은 얼마나 미어져왔을까? 뿐 아니다. 사실 그는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했을까? 지난 40년의 세월 그가 얼마나 수고했단 말인가? 그의 뼈저린 희생과 피눈물과 고난들이 무엇 때문이었단 말인가? 무지한 백성을 가나안에 입성시키기 위해 그가 그 모든 것을 감수하였건만 정작 그는 그 므리바 물의 한 사건을 말미암아 영원히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게 되었다니!

그러나 오늘 저 비통한 설교를 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자. 진정 내가 모세였다면 나는 태연히 그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쏟아지는 눈물과 서러움에 목이 매여 말하지 못하진 않았을까? 아니, 오히려 격노하며 하나님께 대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모세의 설교 장면서는 결코 모세가 울었다든지.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저 단단한 사람 모세를 보자. 저 견고한 사람 모세를 보자. 사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슬픔과 뼈저리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눈앞에서 모든 수고의 대가를 그저 바라만 보고 밟을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결코 그는 울지 않는다. 목이 매이지도 않는다. 왜? 바로, 그것이 지난 40년의 숱한 고난과 좌절과 훈련과 희생과 징계과와 고통으로 빚어진 단단하고 견고한 그의 심장 때문이다. 그는 심하게 낙심하지만 결코 외형적으로 무너져 내리진 않는다. 결코 나약하지 않은 내공! 그 사람이 바로 모세인 것이다. 그 많은 고난과 수고와 훈련이 만들어준 모세의 웅장한 모습에 겸허해진다. 당신은 위대한 사람! 그러나 당신의 그 여린 속마음을 느낄 수만 있을 것 같다. 수 백 년을 살아온 고목의 껍질은 숱한 세월의 풍파에 굵고 단단하지만 여전히 그 질기고 단단한 껍집을 파고 들어가보면 속에는 여리고 부드러운 속살이 있음을 말이다. 장구한 세월의 풍파를 이겨온 고목처럼 여리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견고한 당신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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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상상_2011.11.13

(신 1:27, 개역)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말년의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설교를 한다. 무려 40년 전 가나안 정탐이 있었던 그때. 10명의 불신앙적 족장들의 불평으로 말미암아 온 회중이 낙망에 빠졌었다. 그리고 그때 온 회중이 하나님을 원망했다. 저 장대한 아낙 족속이 있는 가나안에 우리를 인도해 죽이려 한다고. 모세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의 불신앙적인 발언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저 가나안 땅에 인도하여 죽이려 한다.’

익히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약속의 땅. 축복의 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자 갈망하셨던 복의 땅이다. 그러나 정작 가나안 입구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저 가나안을 지배하고 있는 7족속을 보면서 결코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자 그들을 인도하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하고 계셨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전쟁으로 최후를 맞이하길 원하셨다. 하나님은 위대한 거짓말쟁이. 파렴치한 위선자였다. 아, 어찌 하나님께서!

그러므로 온 회중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 철저히 하나님을 불신하였으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하나님의 위선을 곱씹었다. 분노했다. 하나님 앞에 난폭하고 거칠게 항의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고, 그들은 충분히 정복할 수밖에 없는 젖과 꿀의 땅을 눈앞에서 잃어버렸다. 바람에 날리는 사막의 모래가루처럼 가나안은 날아가버렸다. 그들은 무려 40년의 고된 광야의 쳇바퀴를 돌게 되었다. 불신앙이 낳은 비극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강한 불신과 원망, 거부와 도전, 비난과 정죄에 대한 참담한 대가였다. 어째서 그들이 그런 어마어마한 죄악으로 하나님을 격노케했단 말인가.

그것은 이미 언급된 모세의 회고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거짓된 상상이 모든 범죄의 원흉이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고로’ 어째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워하고 계신다고 믿었던 걸까? 이전부터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토록 적대적인 분이셨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고통 중에 신음할 때 놀라운 기적과 능력으로 이끌어내신 전능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이고 나약한 우리들은 다소의 만족스럽지 못한 현상을 놓고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신다.’라고 가정하고는 하나님을 악당으로 몰아가버린다.

거짓된 상상!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움 받고 있다는 상상은 완전히, 근본적으로 새빨간 거짓이었다. 그것은 거짓된 상상과 그릇된 망상에 불과했다. 불신앙이 낳은 위대한 착각과 거짓된 망상을 주목해보자. 또, 거짓된 상상이 빗은 거치른 불신앙적인 태도와 분노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의 끔찍함을 보자.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불신앙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긍휼과 사랑에 대한 거짓된 상상과 악의적인 상상으로 붉게 물들이고 있는지 말이다. 나의 하나님은 결코 그런 거짓의 신(神)이 아니시다.

물위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나아갔던 베드로. 바람을 보고 빠져들어가는 베드로에게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책망하심과 동시에, 즉시 그 손을 내밀어 빠져들어가는 베드로를 붙드신 분 그분이 자비와 관용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풍랑의 바다 아래로 가라앉게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시다. 책망은 있으나 버림은 없다. 책망은 있으나 미워하심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대해 오해하지 말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갈릴리 바다를 지나가면서 풍랑을 만났다. 배가 뒤집힐 것 같은 풍랑에도 예수님은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실 뿐이었다. 다급한 제자들은 원망스럽게 예수님을 깨우며 말했다.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어째 주무시고 계십니까!’ 제자들은 심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호소했다. 그러나 태연히 잠을 깨신 주님은 파도와 바람을 꾸짖으심과 동시에 모든 것을 고요 속에 묻어버리셨다. 제자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가!’ 탄복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불신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결코 배가 파선하지 않는다는 것을 왜 믿지 않았을까? 불신앙이다. ‘우리가 다 죽게되었다.’ 과연 그런가? 예수님도 뒤집히는 배로 말미암아 익사하실 수 있는 분이셨던가? 그럴리가 없다. 우리는 인간에 불과한 종교지도자를 믿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있는가? 제자들의 불신과 불신앙이 거짓된 상상을 만들어냈다. 예수님조차도 예외 없이 모두 물에 빠져 죽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동요했다. 믿음은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그렇다. 우리가 삶의 풍랑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우리는 물위를 걷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신앙의 배를 타고 세상의 풍랑을 헤쳐 소원의 항구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바다는 지나치게 변칙적이다.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풍랑도 몰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신앙의 배 위에 예수님께서 고요히 주무시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은 지금도 편안히 주무시고 계신다. 고난의 풍랑이 너무 거칠다고 해서 파선할까봐 동요하지 말자. 예수님을 거세게 흔들며 ‘우리가 다 죽게 된 것을 보지 않으시나이까!’라고 소리치지 말자. 예수님과 함께 고요하자. 잠잠히 기다리자. 결코 뒤집히지 않을 것이다. 나와 늘 함께 하시는 나와 동행하시는 내 신앙의 배에 함께 승선하신 예수님을 믿자.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불신으로 말미암는 모든 거짓된 상상을 뒤집어 파선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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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부러짐_2011.10.22

(창 47:9, 개역)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우리는 꾀 많은 야곱이라 부른다. 야곱은 차자로 태어나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유순하고 가정적으로 자랐다. 사실 야곱은 그다지 강인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고, 그를 강하게 단련해가셨다. 야곱은 강하거나 유능한 편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가치관과 계획을 따라 움직일 줄 아는 전략가의 면모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를 돋보이게 하는 장점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다루셔야 할 기질이기도 했다. 야곱의 여정은 매우 파란만장했다. 그는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죽음을 직면했고,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가 환생한 요셉을 다시 만났을 때의 환희는 어떤 것이었을까?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따라 애굽으로 내려간 말년의 야곱은 바로왕 앞에서 말했다. 험악한 세월을 보냈었노라고… 야곱은 실제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서 축복을 받은 자마다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기까지 하면서 복을 받았지만 그 복의 대가는 험악한 세월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서는 축복을 빼앗겼음에도 에돔 족속의 시조가 되었고, 그는 유목민으로 매우 부유한 성공을 거뒀음을 훗날 야곱과 에서의 재회하는 장면에서 묘사된 에서의 물질적 상태에서 알 수 있다. 축복을 빼앗긴 에서가 환경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불행했던 것은 거의 없었다.
역시, 요셉은 어떠했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비전을 보여주셨다. 부모님도 형들도 자신에게 절했다. 그러나 그 환상이 주는 만족감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외국에 노예로 팔려가 종살이를 했다.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까지 갔다. 그가 다시 재기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였다. 꾀죄죄한 꼬마 목동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성령에 취했다. 그러나 다윗은 생명에 위협을 느끼며, 칼을 피해 10년을 방랑해야 했다. 아내의 배신, 이방 땅으로의 망명, 시므온의 저주, 압살롬의 반역 등등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언뜻 얼마나 매력적이고 동경스러운 환상으로 다가오는가. 그러나 현실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모세를 보라. 엘리야를 보라. 예수님을 보라. 바울을 보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마다 얼마나 많이 부러지는 삶을 살았는가. 특별히 예외가 있었다면 그것은 솔로몬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말년이 얼마나 불신앙적이고, 하나님 앞에 굴복되지 않는 강심장였던가.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야 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많이 부러지는 것을 각오해야 되는 것임을 말이다. 그 많은 부러짐은 단지 자기 내면의 괴로움과 흔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구경꾼들의 비웃음과 조롱, 오해와 판단, 정죄 그 모든 것마저도 각오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주어진 부러짐이라면 하나님은 두말 할 것 없이 다시 재기시켜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기를 죽이고 많이 부러뜨리고 싶으신 것이 그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겸손하길 원하고, 하나님을 의뢰하길 원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뻣뻣하고 강한 사람이 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유능한 사람일수록 하나님 앞에 한없이 약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많은 부러짐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운 인간이 되게 한다. 굴복하는 인간이 되게 한다. 많이 부러진 사람만이 신앙의 깊은 것을 더 많이 경험한다. 더 많이 깨닫고 하나님을 변함없이 믿고 의뢰하는 믿음의 큰 훈련과 연단을 받는다.

하나님 앞에 약한 사람이 사실은 가장 강한 사람이란 것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도 그걸 알고 계셨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과연 많이 부러져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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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 2011-11-07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묵상이 너무 가슴을 파고듭니다.. 말할순 없지만 많은걸 생각하게되는 묵상이네요..감사합니다^^
 


폰부스
 

스튜는 공중전화부스 안에 있다_2011.10.04

영화를 아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 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 싶다.


폰부스꽤 오래된 영화인데 나는 한참 뒤에야 이 영화를 봤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매우 성경적인 교훈을 담고 있음을 알고, 지금껏 소장하고 있다. 허영과 교만이 가득한 연예홍보업자 스튜가 폰부스에 갇혀 회개하기 까지의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교훈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자신의 교만과 위선, 기만과 허영에 대해 회개할 것을 요구받는 주인공 스튜는 자기만의 논리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하려하지만 숨어서 그를 겨누고 있는 암살범은 모든 사람 앞에서 스튜의 거짓을 폭로함으로 자백할 것을 요구한다. 영화의 말미에 가서 스튜는 자신의 파렴치함을 사람들과 매스컴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며 자백하고, 눈물을 흘린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이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스튜역의 콜린 파렐의 연기도 정말 탁월하다.


스튜는 말한다. 나는 이용가치 있는 사람만 상대했고, 우쭐대는 맛에 살았고 비싼 옷과 시계로 자신을 과대포장하면서 열등감을 감춰왔다고. , 거짓을 매스컴에 팔아먹으며 속고 속이는게 자신의 생활이었다고. 이 시계도 가짜고 자신도 가짜일 뿐이라고. 자신의 참모습을 알면 실망하게 될 거라고.


처음의 그와 달라진 것은 그가 자신을 깨닫고 인정했으며, 있는 그대로 고백했다는 것이다. , 그가 정직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겸손, 사랑. 그렇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정직이라고 말한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정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나는 수없이 느끼고 느낀다.


우리는 늘 부족하고 온전치 못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너무나 부정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경건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 우리가 매일 자백하게 되는 회개의 목록들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정직함으로 살지 못함으로 인해 일어난 잘못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직을 요구하신다. 우리의 정직함을 보길 원하신다. 우리의 그릇됨에 따지기에 앞서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고 그릇되게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을 아시므로 우선 우리가 정직하게 자신을 낮추고 자백하며, 정직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슬퍼하고 자백하길 원하신다.


왜 다윗이 아름다운가. 다윗이 온전한 사람이기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이 아니었다. 그도 너무나 많은 순간 그릇되이 행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슬퍼할 줄 아는 정직함이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강할 수 없었다. 그의 고난이 만들어준 겸손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의 수없는 시행착오와 허물과 심지어 간음과 살인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시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까지 칭찬해주셨다.


폰부스에서 흐느끼는 스튜를 볼 때마다 나는 이 정직함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된다. 그는 왜 부스에 갇혔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허영과 거짓말로 스스로 기만하고 자신을 자랑하며 살아왔지만 그런 거짓된 모습에 눈멀어 자신의 실체를 정직하게 보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말 이 영화가 내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 역시 정직하지 못할 때, 언젠가 내가 저 부스에 갇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울부짖는 스튜의 모습을 보며 나는 되뇌곤 한다. ‘저 부스 안의 스튜는 바로 나구나! 저 부스 안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고 정직해져야겠다.’


정직은 그리스도인의 최대 덕목 중 하나이다. 스튜는 공중전화부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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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냐_2011.10.02

어릴 적 종종 TV에서 볼 수 있었던 영화가 ‘삼손과 들릴라’였다. 삼손은 성경의 유명한 인물이자 사사로서 한 시대를 이끈 영웅이었다. 그의 독특한 힘과 에너지, 여성편력과 드라마틱한 영웅담은 충분히 재미있는 스토리를 엮어낸다.

그러나 나는 사사기를 읽을 때, 그리고 삼손을 만날 때마다 그가 지닌 독특한 개성과 그 라이프 스타일에 의구심을 품게 되곤 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주관이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삼손은 어떤 측면에서 돌연변이 같이 비춰진다. 솔직히 이러한 표현이 너무 과격하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그럼에도 어찌하였든 삼손이란 인물은 결코 내가 알던 성경의 모든 인물과는 전혀 차별화된 인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정상적인 궤도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내 변론을 들어보라.

삼손은 성경 사사기에서 만날 수 있는 성경위인이다. 사사기에는 총 12명의 사사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거의 그 행적이 묘사되지 않고 이름만 등재되다시피 되어있다. 반면, 기드온이나 입다, 삼손과 같이 그 주요 행적이 소개되는 사사들도 있다. 벌써 여기서부터 삼손은 다른 사사들과는 차별화된다. 사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삼손은 그 탄생의 비화부터 소개된다. 특별히 그 탄생비화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삼손이 나면서부터 나실인의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마치, 세례 요한이나 사무엘처럼 삼손도 태어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또, 아이러니하게도 세례 요한이나 사무엘과는 전혀 다르게 삼손은 조금도 나실인답게 살아가지 않았다. 사사기의 삼손에 대한 기록을 다 훑어봐도 그가 나실인의 신분으로써 자신의 위치와 자격에 걸맞게 행동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는 전혀 나실인 답지 않게 삶을 살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이자 돌연변이적인 면모의 첫 부분이다.

삼손의 기록을 읽어보면 삼손이 딤나의 블레셋 여인을 사랑하므로 딤나로 내려가던 길의 도중에 어린 사자를 만났다고 했다. 삼손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그 사자를 찢어 죽인다. 얼마 후 삼손이 다시 딤나로 내려갈 때 그는 그 어린 사자의 주검에 벌떼와 꿀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낼름 먹고는 자신의 부모님께도 그 꿀을 드린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바로 삼손이 나실인이란 사실이다. 나실인은 원칙적으로 주검을 가까이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사자의 주검에 고인 꿀을 취하는 삼손의 태도에는 조금도 나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조금도 꺼리낌 없이 사자의 주검에서 꿀을 취해 먹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것을 부모님께까지 드렸다. 그러므로 삼손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부모님 마저도 부정케 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회개했다거나 그릇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음을 암시하는 요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바쳐졌지만 조금도 나실인답지 않게 살아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삼손은 여성편력이 심했다. 딤나의 여인을 사랑했고, 훗날엔 자신을 파멸로 인도한 들릴라를 깊이 연애했다. 심지어 그는 이방인만을 사랑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블레셋 여인들에게 특별한 이성적 호감을 느꼈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방인인 여자를 부모님께 승낙을 구할 정도로 적극적이기까지 했다. 역시 그가 나실인다운 양심과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이 사실들자체가 놀랍지 않은가.

삼손의 모습은 말한다. 나는 비록 나실인으로 태어났지만 나는 내가 나실인이란 사실을 신중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으며, 내게 나실인이란 정체성은 매우 희미하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더 의아하게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구절이다.

(삿 13:24-25, 개역) 『[24]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삿 14:6, 개역)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기드온은 큰 용사였고, 입다도 걸출한 장군이었지만 사사기를 통틀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다고 묘사된 사사는 삼손이 유일하다.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전혀 나실인답지 않게 살아가는 여성 편력가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삼손에게 어울리는가.

더불어 여기서 또 하나의 예외적인 궤도를 발견하게 된다. 정말 삼손은 모든 것에서 새로운 변이들을 발견시켜주는 독보적인 캐릭터다. 삼손에게 묘사된 감동은 지극히 돌발적이고 일시적이며, 비규칙적이고 산발적이었다. 쉽게 말해 삼손이 경험한 신적 감동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감동은 삼손이 특별한 육체적인 에너지와 스테미너를 발휘하는 모습으로 실현되었다.

다시 말해, 이는 나실인 사무엘이 성령의 감동 속에서 위대한 설교와 회중을 이끄는 리더십으로 실현되었던 것과 반대이다. 나실인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양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모습으로 감동되었던 것과 반대이다. 삼손이 경험한 신적 감동은 오직 육체적인 스테미너를 발휘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블레셋 민족을 쳐죽이는 용사로써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감동은 매우 충동적이고 일시적인 동시에 산발적이기까지 해서 삼손의 대부분의 일상들은 그냥 육적인 충동과 기질을 따라 행동하는 것에 별다른 감흥과 변화를 주지는 못했다. 이 모든 것 속에서 바로 우리는 사사 삼손이자 나실인 삼손이 성경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경위인의 돌연변이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사기 13~16장 까지의 삼손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혼란에 빠지는 느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독특한 인물에 대해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삼손을 볼 때마다 이렇게 묻는 것이다. ‘너는 누구냐?’


나는 이 삼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아직도 그것을 다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이해하는데 전혀 접근해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 몇몇의 구절을 통해 삼손이라는 이 독특한 캐릭터로부터 교훈을 받을 수 있는 단서들은 찾을 수가 있다.

(삿 14:4, 개역)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덩치만 컸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떼를 쓰는 철없는 망나니 삼손을 뜯어 말리는 부모님의 모습.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것은 삼손의 그릇된 의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치고자 하시는 어떤 계획과 목적을 부합시키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분명, 삼손은 그릇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삼손의 그릇된 인격과 그릇된 면면 속에서도 자신의 섭리를 이루고자 하시는 적용점을 두고 있으셨다. 놀랍지 않은가. 어찌 우리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개입하지 않음이 있을 것인가. 상상할 수 없다. 잠언에는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히 하셨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여기서 잠깐 삼손의 라이프 스타일을 요약해보고 싶다. 삼손은 비록 나실인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그에게 나실인이란 정체성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그는 육신적인 인물로서 특별한 신앙심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육신적이고 정욕적이며 여성편력까지 갖고 있어서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결혼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그는 사사로 부르심을 입었고, 산발적으로 즉흥적인 신적 감동과 감화를 받았는데 그러한 감동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전혀 영적인 에너지로 발휘된 것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을 떼로 죽이고, 사나운 짐승을 맨손으로 잡는 등의 괴력이나 유체적인 에너지로 발휘하는 것으로만 실현되었다. 그는 불완전했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궤도에서 볼 때 전혀 다른 궤도를 도는 돌연변이적인 존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분명 그를 사사로 부르셨고, 그 나름의 독특한 인격과 기질과 성향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뤄가시는 도구로 적절히 활용하셨다.

한편, 훗날 들릴라를 사랑한 삼손은 자기 힘의 근원이 머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머리털이 밀리우고 힘을 잃고 만다. 결과 두 눈은 빠지고 맷돌을 돌리며 조롱거리가 된다. 분명, 하나님은 불완전한 삼손을 사용하실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릇된 삼손을 두둔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삼손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분명 응분의 대가를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민수기는 이렇게 말한다.

(민 14:18, 개역)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다 실현하시는 분이시다. 삼손은 하나님의 긍휼로 사사로 부름을 입고, 필요에 따라 능력을 발휘해 블레셋을 쳤지만 그 그릇됨에 대해서는 보응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삼손은 죽음. 죄로 인해 조롱거리가 된 삼손은 회개한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힘을 구하고 블레셋 사람 수천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게 된다. 그는 회개함으로써 마지막 하나님 앞에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함께 죽음으로써 그는 분명 용서와 긍휼을 얻긴 했지만 결코 명예로운 죽음이 되지는 못했다. 의미심장한 구절은 오히려 이것이다.

(삿 16:22, 개역)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머리털은 잘라도 다시 자라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힘의 원천이 머리의 머리털에 묘사하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삼손은 자기 힘의 근원을 까발림으로써 그 힘을 잃어버리는 수모와 곤란에 처했다. 그러나 다시 머리털이 자라는 것처럼 삼손은 회개함으로써 다시 그 힘의 근원을 되찾아 마지막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힘의 근원을 머리털에 묘사한 것 자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나실인 삼손에게 힘의 근원은 영원히 궤멸되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가 회개했음으로 마지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또한,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랄 수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시사하는 바는 더욱 클 것이다. 그의 머리털이 다시 회복될 수 없는 것이었다면 그의 회개도 무용했는지 모른다. 역사의 마지막에 성령께서 승천하시면 지상에 있는 성경책도 회개하는 시도도 무용하다.

하나님은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는 엄연한 사실과 그것이 힘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통해 삼손이 다시 회개할 때 재기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계신다고 나는 믿는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비록 나실인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도 종종 돌연변이 삼손처럼 살아간다. 때로는 성령 안에서 봉사하고, 기도하며 찬양한다. 주의 일에 힘쓴다. 그라나 종종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라이프 스타일과 패턴에 젖어있기도 하다. 우리는 삼손처럼 머리털이 밀리우고 성령의 능력과 힘을 잃어버린 것처럼 무기력하고 패배하고 침체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머리털이 다시 자라듯 다시 성령의 회복과 능력을 회복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즉흥적이다. 많은 순간 육체적으로 살면서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다. 그러면서 또, 성령 안에서 즉흥적이고 충동적일 때도 있다. 어쩌면 저 삼손은 여전히 죄성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이중적인 삶의 모습과 어떤 의미에서 돌연변이적인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궤도의 실물 모형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삼손을 다 모르겠다. 그를 통해 무엇을 교훈받고 무엇을 정말 깨닫게 될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분명 그는 내게 있어 만나면 만날 때마다 다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캐릭터이며, 왠지 내 뒷통수를 한 대 치면서 새로운 이해력과 시각의 문을 열어줄 어떤 비장한 의미를 감추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삼손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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