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life
 

얼마 전 목사님의 설교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사실 가장 그리스도인다워지는 중요한 방편은 말씀과 기도이다.(딤전4:5) 나는 이 원리를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와 말씀의 부족은 우리 영적 침체의 가장 실제적인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인 문제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가게 된다. 기도와 말씀을 충분히 누릴 시간적인 여유가 있느냐는 것. 어쩌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어려움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분주할 수밖에 없는가?’

오늘날의 이 분주함. 복잡함. 다양함. 거대함을 생각해볼 때, simple life를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에게 분명 최대의 위기가 온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시간이 나더라도 너무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고 활용하고 개발하기 위해 시간을 소모해야 하기까지 하다. 현대인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사회적 인간으로 부합되기 위해 우리는 일반적인 생활에서조차 컴퓨터, 스마트폰, 운전, 세탁기, mp3, 네비게이션, 각종 기계와 기구 조작법, 법률과 상식 등 속지 않고 살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한다. 그런 것들을 포기하면 낙오자에 가까워진다. 세상의 낙오자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서글픈 현실일지 모르겠다. 차라리 머리 밀고 속세를 떠난 중이 되면 세상의 낙오자가 부처가 될지 몰라도. 목사님 말씀처럼 문명의 역기능이다. 문명이 발전하는 만큼 영적, 정신적 세계도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퇴한다.

영혼이 피폐해지는데도 세상의 연을 끊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세상을 사랑해서? 적어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세상이 밉지만. 미워도 다시 한번. 어쩔 수 없는 굴레와 같다.

오늘의 시대가 바로 문명이 만들어 놓은 소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하루를 직장에 쓰는 시간보다 봉사를 하는 더 써야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저축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자동차나 집,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이나 우리나 그것들이 다 필요하다. 그것을 소유하려면 지불이 요구된다. 지불을 하려면 벌어야 된다. 벌이를 하려면 세상에 나가 일해야 한다.

더 이상 자급자족하던 시대는 없다. 오늘날의 life style은 자급자족을 거의 전멸시켜 놓았다. 디자인과 기능의 발달. 거기에 날개를 달아준 대량생산과 교통의 발달은 거대한 도시문명을 이룩시켰다. 그리고 이 도시 위에는 오직 소비만이 생존하게 되었다. 메이커 자동차를 대체하기 위해 직접 차를 만들어 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파트를 대체하기 위해 손수 터를 취하고, 오두막을 지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겨울 스웨터 하나도 손수 짜서 입는다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 오늘의 시대는 구매와 소비의 시대이다. 모든 것이 디자인과 기능성을 갖춰야 제격이 된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투박하고 기능성이 미달되는 자급자족은 city life의 밸런스를 깨트린다. 도시의 기반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자본이 해마다 소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이 소비의 시대에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이것이 마귀가 만들어 놓은 도시문명의 미학 뒤에 숨어있는 노림수 일 것이다. 어쩌면 이 소비의 시대가 바로 오늘을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는 가장 큰 영적 침체의 원인 중 하나이진 않을까?

가나안 점령 때, 단 지파는 가장 비옥한 땅을 소유했지만 가장 먼저 우상숭배에 빠졌다. 기독교의 비율이 높은 나라가 잘 산다는 일반적인 통계가 있다. 하나님을 믿고, 우상을 적게 숭배하고 문명이 발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문명의 발달이 우상숭배를 야기시키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랍다. 예기치 않은 어느 순간에 뒤집힌다. 어쩌면 이미 우리도 예외가 아닌 길로 접어들었는지 모른다. 문명의 발달이 편리와 만족과 자부심과 영광을 주었지만 차츰 그것을 유지하고 버티고 지키기 위해 허덕이고 있다. 영광을 지키기 위한 막대한 사회 간접자본의 충당을 위해서라도 소비와 자금의 유동이 촉진되어야 한다. 브레이크가 마모되기 시작한 미친 소비의 시대가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 마치, 오늘날 위태로운 미국이 최초의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

그 소비의 거친 물결 속에서 함께 조급해지고, 다급해지고 허덕이기 시작한 우리 역시 영혼을 돌아볼 삶의 여유는 너무 부족해 보인다. 무서운 징조의 시작이다. 더 많은 복음의 역사가 이제 중국에 있고, 몽골에 있고, 파키스탄에 있고, 도시문명과 소비시대의 파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저 가난한 나라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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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글랜드발 복음열차는 불타고 있다. 

인류역사상 복음의 가장 큰 수혜지는 어디였을까? 부족하나마 나의 지식으로는 아마 잉글랜드와 미국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개신교 신학의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프랑스 출신의 존 칼빈(이것 역시 영어식 이름이다. 프랑스식 그의 본명은 장 칼뱅)이지만 정작 청교도의 나라, 복음주의 신학의 최대 활동지는 항상 영국이었다. 정말 청교도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국은 복음에 있어서 굉장한 수혜자였다.

뿐만 아니다. 청교도 혁명과 청교도 주의를 기반으로 18c 영국대각성 운동. 그 중심엔 야외집회로 명성을 떨친 조지 휫필드와 감리교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존 웨슬리가 있었다. 물론, 역사적 고증은 휫필드가 실제적인 감리교의 창시자라고도 한다. 아무튼 이 위대한 두 인물이 버틴 영국은 18c 복음의 왕국이었다. 전 세계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뜨거운 곳이었다.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배출되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대각성운동과 복음의 파워는 훗날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 후대로 인해 미국에까지 복음주의를 꽃피웠다. 조나단 에드워즈, 디엘 무디, 좀 다른 노선을 걷긴 했지만 부흥사 찰스 피니까지. 언제든지 신약성경의 시대 이후를 논한다면 우리는 영국과 근세기의 미국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해외여행을 갈 기회가 있다면 영국의 복음주의 흔적을 찾아 가보고 싶었다.

조지 휫필드가 웅장한 목소리로 야외로 청중을 불러모아 영혼을 구원했던 곳 해넘산. 그 산 아래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집해서 휫필드가 외치는 복음을 들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떠한가. 이제는 정말 추억하고 싶지 않은 두 나라가 되어버렸다.

미국은 아직도 70%가 개신교도이며, 청교도적 분위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변했다. 크리스마스라고도 부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대통령은 여전히 성경책에 손을 얻고 선서하지만 세계 전쟁을 불사한다. 마약, 살인, 범죄, 도덕적 붕괴 사회 곳곳이 병들어 있다. 메가처치 교회들은 부정 축재로 무너지기도 한다. 국회는 동성애를 합법화 했다. 교회마저도 동성애 결혼을 인정하는 추세로 거의 변질되고 있다.

영국은 더 심하다. 복음이 전해졌던 교회당은 이제 술과 향락이 가득한 클럽으로 바뀌고 있다. 교회들이 급속히 사라져 간다. 교회학교는 거의 씨가 말라간다. 10대들의 문화 속에는 ‘임신’이 하나의 유행이 되기도 한다. 교사와 제자들이 부정한 관계를 수시로 맺는다. 영국에서 자주 쇼킹한 사건들이 들려온다. 거의 도덕적으로 붕괴된 것 같다. 심지어 영국의 모 국회의원도 10대들의 잦은 임신 등의 문제를 놓고 ‘영국은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라고 꼬집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봤던 위대한 부흥과 복음의 수혜지였던 나라가 이제는 없다. 잉글랜드에서 출발한 복음의 폭주기관차는 영국을 이미 한참 떠났다. 이제 영국발 복음기관차는 불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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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껍질 밑 얇은 속살_2011.11.19

(신 3:25-27, 개역) 『[25]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 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두고 모세는 말한다. 자신은 절대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노라고. 그러나 그것이 결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말이다. 모세, 그는 하나님의 가로막으심으로 결단코 가나안을 밟을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이 설교를 하는 모세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의 여정을 되돌아본다.

40세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목동으로 살아가던 살인자를 부르셨다. 하나님은 그의 무능을 호소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억눌러 거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 내세우셨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직분을 맡았다. 모세는 그 자체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거기에다 그의 사역의 시작은 너무나 비참했다. 바로 앞에 나아갔다가 오히려 백성들의 학대가 더 거세져 민족적 배반자로까지 내몰렸다. 일당 백도 아닌 일당 수 백만명.

홍해 앞에서 또 한 번 원망과 미움을 받았다. 기적도 있었고 환희도 있었다. 그러나 광야를 맴돌면서 그는 수 없는 비난과 화살과 당을 짓는 무리들과 비겁자들과 불신자들과 불신앙의 회중들과 다투고 싸워야만 했다. 그는 철저히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수없이 참아야 했다. 수없이 울어야 했다. 수없이 부러지고 고통 받아야만 했다.

므리바 물에서 물이 없다고 격노하는 회중의 경박한 신앙과 불신앙과 철없는 모습에 딱 한 번 맞대응 했다. 분을 삭히지 못해 반석을 두 번 세차게 내리치며 물을 쏟아져 나오게 했다. 그러므로 그 일이 불씨가 되어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결단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임을 천명 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 아니었다. 슬펐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와닿지는 않았다.

40년의 광야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오늘 이 시점에 다다르면서 그는 얼마나 하나님께 매달렸을까? 정말 저 가나안에 나 역시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의 마음은 얼마나 미어져왔을까? 뿐 아니다. 사실 그는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했을까? 지난 40년의 세월 그가 얼마나 수고했단 말인가? 그의 뼈저린 희생과 피눈물과 고난들이 무엇 때문이었단 말인가? 무지한 백성을 가나안에 입성시키기 위해 그가 그 모든 것을 감수하였건만 정작 그는 그 므리바 물의 한 사건을 말미암아 영원히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게 되었다니!

그러나 오늘 저 비통한 설교를 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자. 진정 내가 모세였다면 나는 태연히 그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쏟아지는 눈물과 서러움에 목이 매여 말하지 못하진 않았을까? 아니, 오히려 격노하며 하나님께 대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모세의 설교 장면서는 결코 모세가 울었다든지.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저 단단한 사람 모세를 보자. 저 견고한 사람 모세를 보자. 사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슬픔과 뼈저리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눈앞에서 모든 수고의 대가를 그저 바라만 보고 밟을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결코 그는 울지 않는다. 목이 매이지도 않는다. 왜? 바로, 그것이 지난 40년의 숱한 고난과 좌절과 훈련과 희생과 징계과와 고통으로 빚어진 단단하고 견고한 그의 심장 때문이다. 그는 심하게 낙심하지만 결코 외형적으로 무너져 내리진 않는다. 결코 나약하지 않은 내공! 그 사람이 바로 모세인 것이다. 그 많은 고난과 수고와 훈련이 만들어준 모세의 웅장한 모습에 겸허해진다. 당신은 위대한 사람! 그러나 당신의 그 여린 속마음을 느낄 수만 있을 것 같다. 수 백 년을 살아온 고목의 껍질은 숱한 세월의 풍파에 굵고 단단하지만 여전히 그 질기고 단단한 껍집을 파고 들어가보면 속에는 여리고 부드러운 속살이 있음을 말이다. 장구한 세월의 풍파를 이겨온 고목처럼 여리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견고한 당신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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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상상_2011.11.13

(신 1:27, 개역)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말년의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설교를 한다. 무려 40년 전 가나안 정탐이 있었던 그때. 10명의 불신앙적 족장들의 불평으로 말미암아 온 회중이 낙망에 빠졌었다. 그리고 그때 온 회중이 하나님을 원망했다. 저 장대한 아낙 족속이 있는 가나안에 우리를 인도해 죽이려 한다고. 모세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의 불신앙적인 발언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저 가나안 땅에 인도하여 죽이려 한다.’

익히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약속의 땅. 축복의 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자 갈망하셨던 복의 땅이다. 그러나 정작 가나안 입구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저 가나안을 지배하고 있는 7족속을 보면서 결코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자 그들을 인도하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하고 계셨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전쟁으로 최후를 맞이하길 원하셨다. 하나님은 위대한 거짓말쟁이. 파렴치한 위선자였다. 아, 어찌 하나님께서!

그러므로 온 회중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 철저히 하나님을 불신하였으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하나님의 위선을 곱씹었다. 분노했다. 하나님 앞에 난폭하고 거칠게 항의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고, 그들은 충분히 정복할 수밖에 없는 젖과 꿀의 땅을 눈앞에서 잃어버렸다. 바람에 날리는 사막의 모래가루처럼 가나안은 날아가버렸다. 그들은 무려 40년의 고된 광야의 쳇바퀴를 돌게 되었다. 불신앙이 낳은 비극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강한 불신과 원망, 거부와 도전, 비난과 정죄에 대한 참담한 대가였다. 어째서 그들이 그런 어마어마한 죄악으로 하나님을 격노케했단 말인가.

그것은 이미 언급된 모세의 회고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거짓된 상상이 모든 범죄의 원흉이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고로’ 어째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워하고 계신다고 믿었던 걸까? 이전부터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토록 적대적인 분이셨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고통 중에 신음할 때 놀라운 기적과 능력으로 이끌어내신 전능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이고 나약한 우리들은 다소의 만족스럽지 못한 현상을 놓고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신다.’라고 가정하고는 하나님을 악당으로 몰아가버린다.

거짓된 상상!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움 받고 있다는 상상은 완전히, 근본적으로 새빨간 거짓이었다. 그것은 거짓된 상상과 그릇된 망상에 불과했다. 불신앙이 낳은 위대한 착각과 거짓된 망상을 주목해보자. 또, 거짓된 상상이 빗은 거치른 불신앙적인 태도와 분노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의 끔찍함을 보자.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불신앙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긍휼과 사랑에 대한 거짓된 상상과 악의적인 상상으로 붉게 물들이고 있는지 말이다. 나의 하나님은 결코 그런 거짓의 신(神)이 아니시다.

물위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나아갔던 베드로. 바람을 보고 빠져들어가는 베드로에게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책망하심과 동시에, 즉시 그 손을 내밀어 빠져들어가는 베드로를 붙드신 분 그분이 자비와 관용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풍랑의 바다 아래로 가라앉게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시다. 책망은 있으나 버림은 없다. 책망은 있으나 미워하심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대해 오해하지 말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갈릴리 바다를 지나가면서 풍랑을 만났다. 배가 뒤집힐 것 같은 풍랑에도 예수님은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실 뿐이었다. 다급한 제자들은 원망스럽게 예수님을 깨우며 말했다.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어째 주무시고 계십니까!’ 제자들은 심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호소했다. 그러나 태연히 잠을 깨신 주님은 파도와 바람을 꾸짖으심과 동시에 모든 것을 고요 속에 묻어버리셨다. 제자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가!’ 탄복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불신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결코 배가 파선하지 않는다는 것을 왜 믿지 않았을까? 불신앙이다. ‘우리가 다 죽게되었다.’ 과연 그런가? 예수님도 뒤집히는 배로 말미암아 익사하실 수 있는 분이셨던가? 그럴리가 없다. 우리는 인간에 불과한 종교지도자를 믿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있는가? 제자들의 불신과 불신앙이 거짓된 상상을 만들어냈다. 예수님조차도 예외 없이 모두 물에 빠져 죽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동요했다. 믿음은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그렇다. 우리가 삶의 풍랑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우리는 물위를 걷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신앙의 배를 타고 세상의 풍랑을 헤쳐 소원의 항구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바다는 지나치게 변칙적이다.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풍랑도 몰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신앙의 배 위에 예수님께서 고요히 주무시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은 지금도 편안히 주무시고 계신다. 고난의 풍랑이 너무 거칠다고 해서 파선할까봐 동요하지 말자. 예수님을 거세게 흔들며 ‘우리가 다 죽게 된 것을 보지 않으시나이까!’라고 소리치지 말자. 예수님과 함께 고요하자. 잠잠히 기다리자. 결코 뒤집히지 않을 것이다. 나와 늘 함께 하시는 나와 동행하시는 내 신앙의 배에 함께 승선하신 예수님을 믿자.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불신으로 말미암는 모든 거짓된 상상을 뒤집어 파선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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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부러짐_2011.10.22

(창 47:9, 개역)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우리는 꾀 많은 야곱이라 부른다. 야곱은 차자로 태어나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유순하고 가정적으로 자랐다. 사실 야곱은 그다지 강인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고, 그를 강하게 단련해가셨다. 야곱은 강하거나 유능한 편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가치관과 계획을 따라 움직일 줄 아는 전략가의 면모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를 돋보이게 하는 장점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다루셔야 할 기질이기도 했다. 야곱의 여정은 매우 파란만장했다. 그는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죽음을 직면했고,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가 환생한 요셉을 다시 만났을 때의 환희는 어떤 것이었을까?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따라 애굽으로 내려간 말년의 야곱은 바로왕 앞에서 말했다. 험악한 세월을 보냈었노라고… 야곱은 실제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서 축복을 받은 자마다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기까지 하면서 복을 받았지만 그 복의 대가는 험악한 세월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서는 축복을 빼앗겼음에도 에돔 족속의 시조가 되었고, 그는 유목민으로 매우 부유한 성공을 거뒀음을 훗날 야곱과 에서의 재회하는 장면에서 묘사된 에서의 물질적 상태에서 알 수 있다. 축복을 빼앗긴 에서가 환경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불행했던 것은 거의 없었다.
역시, 요셉은 어떠했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비전을 보여주셨다. 부모님도 형들도 자신에게 절했다. 그러나 그 환상이 주는 만족감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외국에 노예로 팔려가 종살이를 했다.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까지 갔다. 그가 다시 재기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였다. 꾀죄죄한 꼬마 목동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성령에 취했다. 그러나 다윗은 생명에 위협을 느끼며, 칼을 피해 10년을 방랑해야 했다. 아내의 배신, 이방 땅으로의 망명, 시므온의 저주, 압살롬의 반역 등등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언뜻 얼마나 매력적이고 동경스러운 환상으로 다가오는가. 그러나 현실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모세를 보라. 엘리야를 보라. 예수님을 보라. 바울을 보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마다 얼마나 많이 부러지는 삶을 살았는가. 특별히 예외가 있었다면 그것은 솔로몬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말년이 얼마나 불신앙적이고, 하나님 앞에 굴복되지 않는 강심장였던가.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야 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많이 부러지는 것을 각오해야 되는 것임을 말이다. 그 많은 부러짐은 단지 자기 내면의 괴로움과 흔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구경꾼들의 비웃음과 조롱, 오해와 판단, 정죄 그 모든 것마저도 각오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주어진 부러짐이라면 하나님은 두말 할 것 없이 다시 재기시켜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기를 죽이고 많이 부러뜨리고 싶으신 것이 그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겸손하길 원하고, 하나님을 의뢰하길 원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뻣뻣하고 강한 사람이 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유능한 사람일수록 하나님 앞에 한없이 약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많은 부러짐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운 인간이 되게 한다. 굴복하는 인간이 되게 한다. 많이 부러진 사람만이 신앙의 깊은 것을 더 많이 경험한다. 더 많이 깨닫고 하나님을 변함없이 믿고 의뢰하는 믿음의 큰 훈련과 연단을 받는다.

하나님 앞에 약한 사람이 사실은 가장 강한 사람이란 것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도 그걸 알고 계셨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과연 많이 부러져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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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 2011-11-07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묵상이 너무 가슴을 파고듭니다.. 말할순 없지만 많은걸 생각하게되는 묵상이네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