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상상_2011.11.13

(신 1:27, 개역)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말년의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설교를 한다. 무려 40년 전 가나안 정탐이 있었던 그때. 10명의 불신앙적 족장들의 불평으로 말미암아 온 회중이 낙망에 빠졌었다. 그리고 그때 온 회중이 하나님을 원망했다. 저 장대한 아낙 족속이 있는 가나안에 우리를 인도해 죽이려 한다고. 모세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의 불신앙적인 발언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저 가나안 땅에 인도하여 죽이려 한다.’

익히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약속의 땅. 축복의 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자 갈망하셨던 복의 땅이다. 그러나 정작 가나안 입구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저 가나안을 지배하고 있는 7족속을 보면서 결코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자 그들을 인도하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하고 계셨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전쟁으로 최후를 맞이하길 원하셨다. 하나님은 위대한 거짓말쟁이. 파렴치한 위선자였다. 아, 어찌 하나님께서!

그러므로 온 회중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 철저히 하나님을 불신하였으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하나님의 위선을 곱씹었다. 분노했다. 하나님 앞에 난폭하고 거칠게 항의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고, 그들은 충분히 정복할 수밖에 없는 젖과 꿀의 땅을 눈앞에서 잃어버렸다. 바람에 날리는 사막의 모래가루처럼 가나안은 날아가버렸다. 그들은 무려 40년의 고된 광야의 쳇바퀴를 돌게 되었다. 불신앙이 낳은 비극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강한 불신과 원망, 거부와 도전, 비난과 정죄에 대한 참담한 대가였다. 어째서 그들이 그런 어마어마한 죄악으로 하나님을 격노케했단 말인가.

그것은 이미 언급된 모세의 회고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거짓된 상상이 모든 범죄의 원흉이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고로’ 어째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워하고 계신다고 믿었던 걸까? 이전부터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토록 적대적인 분이셨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고통 중에 신음할 때 놀라운 기적과 능력으로 이끌어내신 전능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이고 나약한 우리들은 다소의 만족스럽지 못한 현상을 놓고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신다.’라고 가정하고는 하나님을 악당으로 몰아가버린다.

거짓된 상상!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움 받고 있다는 상상은 완전히, 근본적으로 새빨간 거짓이었다. 그것은 거짓된 상상과 그릇된 망상에 불과했다. 불신앙이 낳은 위대한 착각과 거짓된 망상을 주목해보자. 또, 거짓된 상상이 빗은 거치른 불신앙적인 태도와 분노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의 끔찍함을 보자.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불신앙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긍휼과 사랑에 대한 거짓된 상상과 악의적인 상상으로 붉게 물들이고 있는지 말이다. 나의 하나님은 결코 그런 거짓의 신(神)이 아니시다.

물위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나아갔던 베드로. 바람을 보고 빠져들어가는 베드로에게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책망하심과 동시에, 즉시 그 손을 내밀어 빠져들어가는 베드로를 붙드신 분 그분이 자비와 관용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풍랑의 바다 아래로 가라앉게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시다. 책망은 있으나 버림은 없다. 책망은 있으나 미워하심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대해 오해하지 말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갈릴리 바다를 지나가면서 풍랑을 만났다. 배가 뒤집힐 것 같은 풍랑에도 예수님은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실 뿐이었다. 다급한 제자들은 원망스럽게 예수님을 깨우며 말했다.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어째 주무시고 계십니까!’ 제자들은 심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호소했다. 그러나 태연히 잠을 깨신 주님은 파도와 바람을 꾸짖으심과 동시에 모든 것을 고요 속에 묻어버리셨다. 제자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가!’ 탄복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불신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결코 배가 파선하지 않는다는 것을 왜 믿지 않았을까? 불신앙이다. ‘우리가 다 죽게되었다.’ 과연 그런가? 예수님도 뒤집히는 배로 말미암아 익사하실 수 있는 분이셨던가? 그럴리가 없다. 우리는 인간에 불과한 종교지도자를 믿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있는가? 제자들의 불신과 불신앙이 거짓된 상상을 만들어냈다. 예수님조차도 예외 없이 모두 물에 빠져 죽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동요했다. 믿음은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그렇다. 우리가 삶의 풍랑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우리는 물위를 걷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신앙의 배를 타고 세상의 풍랑을 헤쳐 소원의 항구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바다는 지나치게 변칙적이다.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풍랑도 몰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신앙의 배 위에 예수님께서 고요히 주무시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은 지금도 편안히 주무시고 계신다. 고난의 풍랑이 너무 거칠다고 해서 파선할까봐 동요하지 말자. 예수님을 거세게 흔들며 ‘우리가 다 죽게 된 것을 보지 않으시나이까!’라고 소리치지 말자. 예수님과 함께 고요하자. 잠잠히 기다리자. 결코 뒤집히지 않을 것이다. 나와 늘 함께 하시는 나와 동행하시는 내 신앙의 배에 함께 승선하신 예수님을 믿자.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불신으로 말미암는 모든 거짓된 상상을 뒤집어 파선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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