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눈물_2012.01.2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

 

(신명기 22:8)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신앙생활은 일면에서는 교회생활, 교제생활이라고 할 것이다. 말씀을 듣고, 교제를 하고 봉사를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항상 모여야 한다. 연합이란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무이다. 그러므로 항상 모임이나 연합에 대한 많은 강조가 뒤따른다. 그러나 또 그러한 강조가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도 개성이 너무나 다양하고 뚜렷하기 때문에 연합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연합된다. 그러나 육신문제, 갈등과 비교, 시기와 다툼, 논쟁과 오해 등등 여러 인간적인 부스럼들이 연합을 훼방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만으로도 무엇인가 신령하게 느껴질 정도이지만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많은 갈등이 붉어지고 있는지 현실적으로 살펴보면 한편으론 적잖이 곤란해진다.

 

예전에 들은 우스개 소리가 생각난다. ‘예수 믿어도 지 성질대로 믿더만.’ 별로 덕이 안 되는 말이라 여겨지면서도 어찌보면 사실 그대로를 직설적으로 찌른 말 같아 씁쓸하다. 성령 안에서 연합해야 하는 것임에도 사실 얼마나 성령 밖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은지 모른다. 미안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구원받고 성품이 변화된다는 소위 성품구원’, 성화에 대해 듣지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 있어서 미지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도 인정해야 할 문제다.

 

어쩌면 우리가 갈등하는 모든 인간적인 문제들은 모두 성화의 부족에 따른 갈등인지 모르겠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고유의 습성과 기질, 성격과 성향, 반응하는 것들의 문제에 있어서 변화와 개선이 너무나 힘듦을 느낀다. 물론, 이방인이었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이 육체와의 싸움에 있어서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여리고들이 가득하다. 아직 일곱 바퀴를 돌지 못했고, 아직 날 수를 채우지 못했다. 보다 나은 성화를 이루는 문제에 있어서 게으르고 지지부진한 나를 본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해서 교회의 연합은 종종 곤란한 지경에 이른다. 논쟁과 오해, 다툼과 갈등, 시기와 질투. 막말. 감정의 표출.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원인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되는 것 같다. 상처 주는 말과 감정의 표출. 이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로부터 떨어지는 일들이 있다.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이다.

 

(잠언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왜 그렇게 칼로 찌르는 것처럼 노골적이고 감정적으로 쏘아 붙여서 말해야 할까? 또는 왜 그렇게 배려 없이 농을 쳐야 할까?

 

(26:23)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입술로는 속이지만 감정을 품으면 금새 드러난다. 표정관리가 안 된다. 낮은 은을 입힌 토기는 살짝 부딪혀도 벗겨진다. 은이 아니라 토기일 뿐임이 드러난다.

(마가복음9:24)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극단적인 죄가 될 것인지 말씀조차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형제, 자매님을 너무 경솔하게 대하려고 한다. 지나치게 장난스럽거나 인격이나 감정을 상하게 할 그런 농을 친다. 육신적이고 덕이 되지 않는 말과 행동을 서스럼 없이 한다. 그러므로 한 켠에 여린 형제, 자매님들의 마음에 문제를 일으키고 근심을 준다. 누군가는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의 표출과 언어로 칼로 찌르듯 마음을 그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문제로 인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으면 항상 이렇게 권면한다.우리가 주님 보고 신앙 생활하는 거지 형제, 자매님 보고 신앙생활 하는게 아니잖아요.’ 무미건조하게 마치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혀 나온 종합감기약 하나 먹여주는 것 같다.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더 그 마음을 헤아려줄 수는 없었던 걸까? 오히려 우리가 먼저 그런 상처를 예방하기 위해 배려해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나는 이런 모습들이 교회 안에서 반복될 때 그런 반성어린 생각을 한다. 형제, 자매의 뺨을 때려 놓고선 우리가 주님 보고 신앙생활 하는 거지 형제, 자매님 보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 뺨 때리는 거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나는 지금껏 얼마나 남모를 뺨을 때려왔을까? 실족케 해왔을까?

 

해답은 배려이다. 해답은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주신 계명이 있었다. ‘서로 사랑하라사랑은 상처를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긍휼과 자비, 배려를 소유물로 삼는다. 우리가 형제, 자매들과 가깝고 친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사귐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배려해 주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사랑의 부족, 배려의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형제, 자매님들의 희생양이 되어 떨어져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을 것인가?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여전히 미워하고, 다투고, 함부로 말하고,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맘에 안 들면 못 본척하고 외면할 것인가. 가히 교회의 눈물이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문제에 있어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고린도전서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그러나 오히려 교회 안에서는 반대의 모습을 종종 보았다. 알고 보면 그게 다 그 형제, 자매님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가 그런 식으로 하니까 그렇게 된 거지.’ 책임을 회피한다. 응분의 대가를 받은 것처럼 공정한 것으로 결론 내린다. 그리고 그것은 한때의 내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것은 마귀의 아름다움이다. 얼마나 잔인한가. 얼마나 긍휼과 배려가 없는가. 얼마나 이기적인가. 사랑의 반대현상인가.

 

어느 교회를 가든지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눈물을 듣고 보게 될 것이다. 자기애로 말미암아 얼마나 이타적인 사랑의 용서와 배려에는 인색한 우리의 모습이 많은지. 그러므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쓴다는 연합의 문제는 항상 해결해야 될 과제로 묘사되어야 하는지. 사랑에 관해서는 가장 유능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사랑은 가장 치열한 성취의 문제로 저 표적에 놓였는지.

 

하나님께서 생활의 규례와 명령을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새 집을 짓거든 할 수 있는대로 반드시 지붕의 난간을 만들어두라고 말이다. 혹 누군가 지붕에 올라갔다가 난간이 없음으로 해서 아차의 찰나, 떨어질지 두렵다고 말이다. 만에 하나 있을 실수로 인해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지붕의 난간을 설치할 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당부하신다.

 

우리 신앙의 영역에서, 나의 형제와 자매에 대한 반응과 태도에 있어서 늘 난간을 두라고 말이다. 그 난간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배려이다. 경계를 두어야 한다. 배려의 난간을 울타리 쳐야 한다. , 나로 인해 형제, 자매님들이 시험 받고, 상처받고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저 친하고 가깝고, 쉽게 농친다고 덕이 되는 게 아니다. 배려해야 한다. 바울의 결심 속에 담긴 뜨거운 형제애를 보자. 형제가 문제를 삼는다면 그 맛있는 고기를 평생 동안 먹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이다. 얼마나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정신인가.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신 형제에 대한 참된 존중과 긍휼인가. 우리가 고기는 못 끊더라도 좀 부족한 그리스도인도 품어주는 것. 난간을 두고 배려해줌으로써 상처주지 않는 것. 좀 미워도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삼가고 기도하는 것. 그런 최소한의 긍휼은 가져야 하지 않은가. 나는 난간을 둔 그리스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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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_2012.01.1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그러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는 본질로 인해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이 십계명은 거의 돌판에 새겨진 유대교적 가치관으로 폐기된 듯한 인상을 준다.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유대교적 발상일까? 그것은 믿음이 아닌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왜곡된 신앙의 행동양식일까?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만한 결론을 미리 내뱉어보자면, 유대인보다도 훨씬 십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십계명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될 것이다.

 

무지한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위해 십계명을 지키고 준수하는 일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유대인들 역시 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궁극의 목적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러한 율법의 문제에 정면 도전하고 나섰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거짓 선지자인지 의견이 분분할 만큼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접근과 해석, 실행방법은 파격적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을 무시하는 행보였다. 그것은 유대교적 율법정신에서 보자면 거의 하나님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정신이 삶의 표준방식인 정통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전적으로 이단자 내지 사이코 사마리안이었다.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은 구원이나 믿음의 근거를 오직 은혜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은혜로 말미암아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선포한다. ‘이신칭의로 대변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믿음으로 얻는 의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이란 것이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에게는 마치 율법적인 가르침이나 행위를 통한 의를 묘사하는 구시대적인 가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십계명을 살펴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형성 속에서 정리되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의무이자 도덕적인 계명이다. 십계명이란 것이 구원의 의를 얻기 위한 궁극의 장치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결코 그렇다고 해서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가 그리스도인에게 조차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직설적으로 풀어서 말하자면, 사실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철저히 십계명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다. 오히려 유대인보다도 더!

 

비록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행보가 자유롭긴 했지만 그것이 율법을 무시하거나, 그것이 무의한 것이기 때문에 폐기하시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폐하기는커녕 완전케 하기 위함이라고 선언하셨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는 것에 의의 완성을 바랐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 내지 의의 완성은 전적으로 행동의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것은 양심이나 마음의 문제, 심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했다. , 양심과 행위의 측면을 아울러 살펴볼 때, 그것은 전적으로 행위에만 편중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거짓 예배와 경건, 거짓 신앙과 악의가 가득했다. 겉으로는 완전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선한 양심과 정직한 마음의 문제는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고르반이라든지 의와 신은 버렸다.’라든지 그랬다.

 

예수님은 표면적으로는 율법을 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양심과 정신은 가장 율법적이고, 율법의 관점에서 완전했다. 예수님은 사람의 시각에서 보는 표준에 부합해서 율법을 준수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 가장 부합되는 율법의 의를 구사했던 것이다. 그것은 일면에서는 율법의 훼손처럼 보였지만 참된 율법의 정신과 가치를 되살린 것이었다.

 

한편,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최소 축소판인 십계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여전히 십계명은 율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마치 믿음의 의와는 다소 상반된 감정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전도집회 때 믿음의 의와는 상반되는 행위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자주 접하는 가운데, 십계명의 가치를 믿음의 의와 구별하려는 수단으로만 편용하려는 경향도 가진다.

 

그러나 정말 여전히 그리스도인에게 십계명은 그런 존재감에 불과한 것일까? 구원을 받는다든지 영생을 소유한다든지 복음을 통과한다든지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취지에서 볼 때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한낱 율법적 행위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라면 이제 십계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접근, 십계명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는 전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가장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행동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십계명을 하나하나를 면밀히 살펴보자. 그 어떤 계명 하나도 그리스도인이 된 나에게 무의미한 행동양식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 물론, 율법은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십계명은 그리스도인에게 를 안겨줄 참된 행동양식을 명령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참으로 십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게 될 자격을 갖춘 것이다.

 

이제 논증을 위해 예수님의 주장으로 되돌아 가자.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양심과 마음의 정직한 동기가 없이 그저 행동만 율법적으로 완전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으려는 절름발이 의를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한 양심과 동기가 외면된 행동의 완전은 반쪼가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이야 말로 율법의 완전이 아니라 율법의 불완전한 성취이며, 율법정신의 왜곡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전을 말하시고 싶었다. 그것은 마음과 행동이 일체가 되는 것이었다.

 

(요한일서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마음의 음욕은 간음, 미움은 살인, 노하면 살인. 이것이 예수님의 주장이었다. , 그것이 완전한 율법을 위해 마음에 이뤄져야 할 율법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의 문제를 단순히 행동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정말 율법을 지킨다라면 양심의 문제에서조차 해결하고 준수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율법준수에 대한 높은 기준인가? 누가 이 기준에 도달할 것인 것? 그것이야 말로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때려 죽이지만 않으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해도 자신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 앞에 완전하다고 믿었다. 의롭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시는 것처럼 보이면서 오히려 자신이 율법을 폐하는 자가 아니라 완전케 하는 자라고 주장하시면서 네 양심의 문제에서 미워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신다. 미워하는 것도 동일하게 살인에 불과하다라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율법의 완전한 준수는 마음의 미움을 버리고, 행위에서도 살인하지 않는 것이 살인치 말라는 계명에 대한 준수였던 것이다. 마음과 행동이 모두 율법을 지킨다는 관점이야 말로 율법의 완전한 준수이자, 율법의 완성이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은 율법에 대한 접근을 제시하심으로써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이다.

 

, 그렇다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가. 십계명을 지킨다는 문제는 행위로 의를 얻는다는 무지한 유대인의 습관을 상기시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문제에서는 전적으로 자유롭다. 대신 우리가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써 의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표준을 위해 십계명은 여전히 소중하며, 선하며 우리 행동의 정당한 표준양식이 되어 마땅하다. 이제 우리는 의로워졌기 때문에 십계명을 진정한 의미에서 따르고, 지키면서 생활해가야 한다. 참된 의의 실천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양심의 문제에서와 더불어 행동의 방식에서조차 십계명에 준해서 생활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무지한 유대교적 습관이라고 치부해버릴 것인가?

 

다시금 십계명을 들여다 보자.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문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아닌 세상의 많은 것을 사랑하면서 행동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속이는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문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방의 우상을 마음에 섬기면서도 겉으로는 우상숭배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속이는가. 살인과 간음, 도둑질의 문제. 우리는 얼마나 경건치 못한 내 양심의 실체를 경험하는가. 우리의 위선과 부정을 십계명 앞에서 비춰볼 때 우리기 비록 이신칭의는 이루었다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정직하지 못한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십계명 앞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내 양심과 행동의 문제를 십계명 앞에서 재조명하는 가운데 회개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얼마나 십계명의 참된 필요와 가치를 외면해 왔던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무모한 무지였던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십계명 앞으로 가자. 오히려 십계명을 지켜 의롭다함을 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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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세대에 대한 자각_2012.01.1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

 

(벧후3:10-12)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자연인(非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이 구절을 좀 진중하게 바라본다라면 성경은 확신할 수 없는 묵시록의 하나로 밖에 다가오지 않을 거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나 일반적인 말씀이지만 사실 이 구절은 우리가 매일 같이 숨쉬고, 발을 디디며, 생존하고 사람들과 엮여서 살아가는 터전에 대한 한줄기 소망 없는 사망을 선포하고 있다. 생존과 평화, 안정과 번영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갈망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미래상을 단언하는 성경은 아주 배은망덕하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는 어지간하지 않고서는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의사도 말기암 환자에게 며칠 뒤에 죽을테니 묘자리 알아보시죠.’라고 말하진 않는다. 조심스레 돌려 말한다. ‘준비하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그에 반해 성경은 너무 잔인하다. 뭐 거의 막말수준이다.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얼마나 극단적인 것인지 생각해보자. 너무 익숙한 말씀이라고? 무지한 자각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자연인과 살아가는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다라는 일반성을 재검토해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 비로소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일상을 요약하면 이와 같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잠시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세면을 하고 식사를 한다. 출근이나 학교를 간다.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자가용이나 버스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그 버스 안에는 그리스도인도 있고, 자연인도 있다. 모두 아침의 졸음이 아직 덜 가신 모습들이다. 날씨가 춥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나 자연인이나 패딩이나 코트를 입고 있다. 주로 대부분은 이어폰을 끼고 있다. 누가 자연인이고 그리스도인인지 육안으로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다.)

 

그리고 사람을 사귀는 부분에 있어서도 자연인은 그리스도인의 친구가 되며, 그리스도인은 자연인의 동료가 된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일한다. 여유 시간이 되면 함께 커피를 마시고, 정치나 경제, 사회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함께 식사한다. 어떤 반찬이 맛있고 없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다.

 

살아가는 문제나 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에 대해 함께 고민한다. 앞으로의 장래에 대한 문제, 10년 뒤 사회적인 기반이 어떨 것인지에 대해서도 자연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모두 불투명한 미래이다.

 

우리는 같이 호흡한다. 그가 마시는 공기를 그리스도인도 마신다. 현대나 기아, 삼성이나 쉐보레 중에 보통 차를 고른다. 생활 필수품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자연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모두 그것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전혀 다르지 않다. 자연인이 피서를 즐기는 곳은 그리스도인도 여유가 된다면 찾는 곳이다.

 

그리스도인도 파리바게뜨에서 빵을 사며, 사적인 만남을 위해 카페베네에 앉는다. GS편의점이나 홈플러스에서 쇼핑하고, 자판기를 이용한다.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적성의 문제라든지 직장에 대해 고민한다. 결국 도덕적으로 죄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현실적인 문제나 고민에 있어서 자연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다만, 가치관의 차이이다. 비중의 차이이다. 그 차이가 주는 삶의 다름은 자연인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의 종교적 행동에 국한될 뿐이다.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먹는 것과 입는 것,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있어 그리스도인과 자연인이 다른 것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인과 전적으로 다르지만, 육체의 모습으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에 있어서 거의 동일하다. ,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사실 그리스도인으로 스스로 구별된 삶을 산다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에 비해, 오히려 우리는 상당부분 자연인과 흡사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아파도 기도만 하고 병원에 가지 않을 것인가?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을 것인가? 자가용이나 집을 마련하지 않을 것인가? 학교에 가지 않고, 직장에 가지 않을 것인가? 돈을 벌지 않을 것인가?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그리스도인은 자연인과 공유되고 오버랩 되는 삶을 사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환경, 사회적 기반과 배경이 이 모든 나를 둘러싼 현상들은 자연인 못지 않게 우리 생존 문제의 견고한 기반이자 터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학생들도 진로나 적성, 직장에 대해 고민하고 기도한다. 직장을 가진 그리스도인도 직장생활의 미래에 대한 준비나 구상을 한다. 이 세상은 사실 우리에게조차 얼마나 친밀한 것이며, 의미 깊은 주제인가.

 

그러나 베드로후서 3장을 보라. 바로 이것이 다 불탄다고 잘라 말한다. 고민하는 그리스도인 당신에게 묻는다. 그게 불탄단 말이다. 학교생활, 학점, 졸업, 취업, 아르바이트. 그게 풀어지고 형체조차 없어진단 말이다. 정말 그걸 믿을 수 있는가. 이 놀라운 도시문명을 보자. 높은 빌딩과 잘 건축된 도시들, 집과 도로와 항만들, 녹지와 공원들, 쇼핑과 오락 및 문화의 공간들, 조명과 자동차들(누구는 베츠와 아우디), 잘 정비된 도로와 교통체계. 그것들이 잿더미가 된다. 아무 형체가 없다. 모든 화려한 문명의 이기들이 동일하게 한 줌의 재로 통일된다. 상상해보지 못한 변신이다. 단 한가지 남는 것은 숨겨져 있었던 모든 무형의 일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 심각하게 공포스럽고 두려운 진실 아닌가.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획일화된 관념만 지닌 채,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자연인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미진한 자각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정곡을 찌르시는 한 마디를 보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다가오는 궁극적인 미래가 어떤 것이었나.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최첨단의 시대와 광속의 세대 앞에 놓인 미래가 한 줌의 재에 불과할 것이라니. 우리는 쉽사리 인정하고 자각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소망이 없다라는 교훈에 대해 진지하게 각오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우리는 TV라는 바보상자 앞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다가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진리를 대해왔다. 우리의 미래가 한 줌의 재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이 진리이자 현실이다. 더 이상 미화시킬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연이어 던지시는 하나님의 촌철살인 같은 말씀을 보자.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정말 내가 되고 싶다는 분명한 자아상은 이 말씀에 부합하는가? 바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의 피만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정말 다가올 세대의 공포를 직시하고 영원한 것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은 팁을 주신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결코 잊어서는 안될 진리에 대해 말씀하신다.

 

너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말이다. 너 역시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문명과 사회적 관계와 기반을 더불어 생존하고 있단다. 그러므로 해서 너희들은 종종 그리스도인이란 참된 자각과 정체성을 망각해버리곤 한단다. 넌 교회를 오고,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하지. 기도도하고 봉사도 한단다. 그러나 그건 말이다. 상당부분 교회 안에서 네 생활이란다. 주중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시간의 많은 부분에서 너는 거의 자연인과 다르지 않은 활동을 하며 시간을 쓰고 있단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미 자연인과 같이 동화되어 가지. 그러므로 다가올 세대의 비극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고 있구나. 마치, 성경을 모르는 자연인처럼 말이다. , 그리스도인아. 곧 다가올 미래는 내가 의지하는 생존세계의 모든 기반이 잿더미가 될 거란다. 그러므로 너는 분명히 생각해야만 한단다. 도대체 너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될 것인지 말이다. 그저 예수님의 공로로 복음 안에 들어왔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만족하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란다. 그리스도인은 그 다운 자각과 자아에 대한 분명한 비전과 목적의식, 자아정체성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란다. 바로 그것은 말이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거룩한 행실이란다. , 경건함이란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도덕적인 죄는 물론이거니와 내 행동과 삶의 가치관가 기준점에 있어 그것은 동인이 되어야 한단다. 정직과 진실함, 회개와 자아성찰, 검소함과 절제, 인내와 온유 그 모든 것들이 바로 거룩이며, 경건이란다. 그러므로 너여. 거룩함과 경건함을 구비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아와 정체성을 정립하고, 잿더미가 될 미래로 인해 지금 올무에 걸리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날이 임하길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하려무나. 올무에 거는 현상은 다가올 미래에 그저 잿더미에 불과할 테지만 숨은 모든 일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란다. 그것이 정녕 두려운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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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born again Christian BH,G_2012.01.10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2.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나 자신의 첫 시작에 대해 회고하게 된다. 나는 어떻게 복음 안에 들어왔던 것일까?

 

 

 

오늘 나는 내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데 조금도,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명백한 확신이 있으며, 나는 나의 복음을 증명할 수 있다. 심지어 내가 생활하는 교회 안에서도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복음에 대해 나는 완전히 자유로우며, 절대적으로 완전하다. 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나 역시 한때는 조금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전혀 기독교적이지도 않았다. 나는 불교적인 가르침을 배우면서 자랐고, 나 스스로도 나의 종교적 감수성과 기초는 불교라고 믿었다. 나의 할머니는 정통 불교인 조계종을 따르는 분이셨다. 한때 나의 어머니는 불교도에서 원불교도로 전향하여 소태산 대종사님을 섬겼다. 어릴 적 누나와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주일이면 원불교 교당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곳은 비교적 신식불교를 구사하고 있었기에 토요일이면 학생회 모임도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특별한 종교적 감성이 있었다. 사실 어머니나 나는 불교나 원불교나 크게 가리지는 않았지만 생활적인 면에서는 보다 원불교에 가까웠다. 어머니께로부터 물려받은 종교적인 감성은 내게도 있었다. 겨울방학 때면 성지순례를 갔다. 전라도 영광군 백수면. 그곳이 대종사님의 출생지다.

 

 

 

나의 원불교 법명은 김종원이었다. 그 법명이 매우 좋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편, 희미한 기억인데 학생회 시절 설문조사 같은 걸 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 등등 여러 질문이 있었다. 그때 나는 우담바라 꽃이라고 썼다. 어떤 질문의 답들에 대해서는 열심히 읽은 교전을 바탕으로 철학적으로 썼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지만 어린이교전을 몇 번 독파했었다. , 학교수업이 끝나면 매일 도서관에 가서 2~3시간 책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심지어 그 나이에 한국판 계시록이라 할 격암유록을 다 읽었다. 어쨌든 나중에 교무님은 내 설문지를 보고서 천재가 될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지리적인 사정을 비롯 중학교 이후 사실상 나는 원불교와는 인연을 끝맺게 되었다. 적어도 6년 정도는 종교적으로는 무적의 신세였다. 그러나 불교적 감성은 여전했다. , 배운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 그러던 와중 고3 처음으로 교회란 곳을 가보게 된다. 드럼을 배우기 위해 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 감성적으로 교회가 어색하고 거북했던 나는 이내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방언과 영안을 가진 동료를 만나게 되고, 어떤 특별한 체험을 통해 처음으로 기독교적 믿음을 가졌다. 물론, 그것이 구원은 아니었다. 그냥 기독교인이 되었을 뿐.

 

 

 

그 이후 나는 수개월 간 한 가지 기도에만 매달렸다. ‘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제게 알게 해주소서.’ 몇 달 뒤 대학에 진학한 나는 공교롭게 불교재단의 대학에 진학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거듭난 형제님을 만나서 인도함을 받고, 복음에 합류하게 되었다. 내가 기도했던 바대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내게 새로운 삶의 변화를 일으키진 못했다. 오히려 나는 심한 혼동과 내적갈등을 경험했다. 일반교회에서 배운 무속신앙 같은 종교적 습관과 감수성으부터 성경말씀을 근거로 한 인격적이고 이지적인 신앙에는 큰 괴리감이 있었다. 그것이 튜닝되는 동안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교정작업에 대해 나 스스로도 어떤 확신과 정립된 바가 없는 혼동의 연속이었다. 정신적 사고적인 재정립이 마무리 되어갈 즈음에는 또 다른 시련이 있었는데, 그건 날 인도해준 분이 교제로부터 이탈해 타락해버린 것이었다. 그는 술을 마셨고, 여자를 만났다. 심지어 나를 조롱하고 때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심한 정신적 충격에 한동안 추스릴 수가 없었다.

 

 

 

보혈의 주님은 만났지만 오히려 내 신앙의 문제는 무저갱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를 벗어나 간신히 교제 안에서 살아남고, 신앙이 정상적인 궤도로 오르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고 훗날 그런 무모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아직도 나는 그런 내 신앙의 최초 단계에 대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바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앙이란 것은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굳이 다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내가 얻은 유일한 해답일 뿐.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심한 고비와 후유증을 극복한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은혜로 대학기간 동안 신앙의 큰 진일보를 경험했다. 어릴 적부터 길러진 책에 대한 내공을 바탕으로 성경을 읽고, 신앙서적을 읽었다. 기도를 배우면서는 1시간 이상씩 기도하고, 많을 때는 2시간40분 이상 한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도 했다. 전도의 열매도 계속 있었다. 나의 첫 열매는 여전히 교회 안에 있고, 가족들도 전도했다. 경건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해서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이 지나간다고 느껴질 때면 아예 그 방향으로 쳐다보지도 않았고, 음란한 포스터나 유인물도 아예 보지 않았다. 한동안은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이 느껴졌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시구나.’라고 읊조리곤 했다.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애물단지처럼 시작했지만 훗날 대학을 졸업하면서 교회를 떠날 때는 교회의 청년 기둥이 떠난다고 했다. 그 시간들은 내 신앙의 큰 자산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때 경험한 성령충만과 감동은 내 신앙에 대한 반성과 회개를 이끄는 표준이 되어 준다.

 

 

 

이후 군입대를 하면서부터 내 신앙은 또 한번 어둠의 시기를 맞았다. 상병 초 까지 내무반의 변변찮은 막내에 불과했던 나는 거의 1년을 죽고 싶을 만큼 힘들게 생활했다. 내 얼굴은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신앙적인 모든 성취와 만족과 자부심이 다 부러진 시간들이었다. 나는 거칠고 악한 마음을 품었고, 고참을 폭행하는 상상도 했으며, 자살하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생수통을 들고 부대 교회로 가서 생수를 받는 동안 서재에 꽂힌 조지 휫필드의 전기기독교인물사등의 책을 잠시 읽고 있을 때는 잊었던 성령의 은혜와 도전과 감동이 내 몸을 전율케 해줬다. 화장실에 쪼그려 포켓 성경에서 시편을 읽으며 도망치는 다윗의 눈물과 심정을 공감할 수 있었다.

 

 

 

전역을 한 이후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고향으로 오면서 교회도 옮기고, 교제도 다시 시작해야 했고, 무뎌진 양심과 신앙적인 감수성을 되찾아야 했다. 그러나 직장의 문제와 구원받지 못한 부모님과의 동거 등 현실적인 문제들 등 어느 것 하나 순조로운 것이 없었다. 그것은 제2의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별로 두각을 나타낼 것도 없었고, 군생활의 고초로 인해 많이 무거워진 나는 지나치게 말이 없기도 했다. , 까칠했다.

 

 

 

그리고 대학시절과 달리 신앙적인 기복이 많아졌다. 기복은 언제든지 있었지만 그 양상이 좀 달랐다. 대학시절이 감정적인 경향이 좀 더 두드러졌다면. 이후에는 생활에 대한 염려를 얼마나 극복하느냐의 문제와 신앙적인 영역에 대한 투자를 얼만큼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좀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사실 신앙의 기본기나 내공은 이미 대학시절 상당부분 만들어져 있었다. 그때 배운 기초가 항상 나를 붙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녹록하지 만은 않았다.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처럼 나는 또 다른 환경과 또 다른 조건들 속에서 내가 결코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것을 뼈저리게 배워야만 했다.

 

 

 

이때부터는 교회 안에서 목사님께도 호되게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유독 내게 모질게 대하셨다. 내가 좀 나태하거나 열심이 부족해 보이면 가차없이 책망을 하시면 분발하도록 채찍질 하셨다. 나의 인격적인 부분에 대해 내가 느끼지 못하는 모난 부분들을 치실 때는 정말 서러워서 혼자 엉엉 울기도 했다. 정말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어린 청년형제에게 너무 모질게 대하시는구나.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시지?’

 

 

 

그러나 나중에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실 때 알게 되었다. ‘병훈 형제 모난 부분을 다듬어서 쓰려고 했다. 병훈 형제는 각진 부분만 다듬으면 슈퍼 클래스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은 그것이었다. ‘병훈 형제 장가 못 보내고 떠나는 게 가장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약속했다. 결혼하게 되면 목사님께서 주례를 봐주시기로 말이다. 그러나 그 후로 시간이 4년 이상 흘렀다.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한편으로 그때가 내 신앙의 어떤 가능성과 비전이 끝났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몇 년의 시간동안 거의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기분이다. 더 배웠고, 더 지식이 늘었고, 더 융화되어 갔지만 내 개인의 신앙에 대한 철저한 주제의식과 불굴의 의지, 도전정신 같은 고상한 가치들은 퇴보를 거듭했다는 것이 나의 반성이다. 솔직히 나는 요즘 나는 이제 끝났다.’라는 좌절감을 느낄 정도이다. 하나님 앞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것들이 있다. 아직도 혼란스러운 것이 있다. 아무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한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신다고 느꼈지만, 이제 가능성의 시간들은 지나가버린 것만 갔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노력, 인간적인 타협을 거부하는 강인함, 신앙에 대한 투쟁심. 오히려 나약해진 의지를 본다. 육신의 문제, 경건의 문제, 내 삶의 목적에 대해 되묻곤 한다. 모두를 실망시킬만한 질문들을 나는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지어 나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들을 다시금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일까?’ 어떤 의미에서 이런 질문들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위기에 봉착할수록 ‘to be basic’. 자존심이라든지 체면 같은 거 찾을 정신이 없다. 내가 바로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묻고, 재정립하고 싶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 나는 더 이상 큰 비전과 가능성은 포기했는지 모른다. 한때의 웅장한 비전은 없다. 그냥 본질에 대한 정립은 앞으로도 생존하기 위한 필수이자 가장 기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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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 나는 그리스도인인가_2012.01…

 

[사도행전 11:26]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년간 모여 있어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출현과 집단의 형성.

초대 안디옥으로 부터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일까?

십자가 아래 뿌려진 보혈에 대한 자각과 믿음. 영원한 속죄와 성령의 인치심.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그것으로 완벽한가.

 

오늘 나는 십자가 앞에 서서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그리스도인일까?’

 

 

도대체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일까? ‘What is 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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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G 2012-01-1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나의 질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그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부인하고자 함은 아니다. 우리는 믿고 성령의 인치심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러나 그 이후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워지느냐가 본질적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