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스 스타트(3): 불가항력적인 것_2012.02.0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0.)

 

(요한복음 4: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해가고 달라져 간다. 불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의 섭리를 따라 나누어진 법칙과도 같은 것들이다. , 종류별로 구별되어진 생명체들. 인류와 짐승, 암컷과 수컷. 나무와 식물. 모든 자연들. 그것은 불변한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왔다. 사회적 관습. 유행이나 라이프 스타일. 건축기술이나 과학기술. , 본질적으로 변경시킬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고 생존해가는 사회적인 면에서 항상 변화가 있었다. 생각과 가치관의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져갔다. 역시, 사람은 사회적 존재임이 분명하다.

 

좋다.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에도 변화를 주었다. 우리는 앞서간 세대의 그리스도인과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서 발견되는 이질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변명도 있다. 각 세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부러 순교하기 위해 앞다투어 적지에 뛰어들어야 할 의무는 없다. 다시 지나간 세대와 같은 환란과 핍박이 우리에게 주어지길 소망할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탐구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다워 질 수 있는가? 그것일 것이다. 우리는 분명 지나간 세대보다 강인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 의지에 있어서 연약하다. 우리는 칼 앞에 서 있지는 않지만 다른 위험과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우리의 모습이 그저 변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과 우리를 위협하는 세상과 대상들이 달라진 것이다.

 

무장해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순교는 칼과 피가 아니라 나태와 무기력이다. 그리고 무절제이다.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과 벗이 될 수 있는 현실 앞에서 한 올 한 올, 근신과 구별된 마음을 잃어가는 우리의 정신과 가치관을 단단히 동여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의무이자 우리의 일반적인 순교정신이 될지 모르겠다.

 

언제든지 현대는 앞서 간 세대에게 빚진 세대이다. 순교의 피를 흘려 복음을 간수한 세대의 빚을 우리는 지고 있다. 우리는 피 흘리지 않지만 전달받은 그 복음에 참예해 다시금 이 복음의 간수와 전승을 위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한다. 아니, 고군분투 해야 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의무를 완성하는 것이며, 이로써 후세대가 우리 세대로부터 빚진 자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 너무 나약해진 우리들은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세상을 누리지만 세상과 벗이 되지는 않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그리스도인을 환영하는 세상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지만 우리는 스스로 절제해야 한다. 우리는 정당하게 누려야 되지만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당하게 누려야 되지만 무절제해서는 안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삼가 하는 것이 가장 치열한 싸움이자, 오늘날 가장 그리스도인다워지는 방편이라 나는 믿는다.

 

다시 말해,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문명의 혜택과 물질의 이기를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로운 활용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 ,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위험이다. 우리가 물질의 이기와 문명의 혜택을 활용하고 적절히 운용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로움이 점점 우리로 하여금 무절제로 나아가게 한다. 또한, 하나님보다 세상과 문명과 이기를 더 의존하게 만들고 있다. 바로, 이점에 대해 우리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파리바게뜨에 갈 수 있다. 빵이 필요해서 우리가 파리바게뜨에 가게 되는 것은 거의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짧은 외출에서 출출해서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하나 사먹는 일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할 것이다. 나는 경우에 따라 카페베네에도 앉아 있을 것이다. 지나간 세대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우리가 현재 누려야 할 문명의 혜택조차 거부하는 방식을 취한다면 그것은 율법적인 정신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바로 이런 현대적 라이프 스타일로 말미암아 결국, 은근히 세상을 사랑하고 의지해 가고 있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경계가 모호해질 때, 우리는 문명으로 말미암아 무기력해져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 동물원에 있는 그리스도인처럼 말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대가 왔다. 자신을 삼가고, 절제하라는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대가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명의 이기와 혜택을 즐기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자신을 삼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더 많은 기도와 자아성찰과 회개가 동반되어야 한다.

 

나는 극장에도 간다. 그러나 영화를 즐기지는 않는다. 따로 영화를 다운받거나 구해서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내가 극장을 가는 경우는 단 한가지의 경우이다. 가족이나 형제, 자매님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극장을 가게 되는 경우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극장 자체를 가지 않기로 한다면 더 좋겠지만 꼭 그렇지 만은 않다. 영화를 보게 되는 이유는 사회적인 이유일 뿐이다. 그것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나 혼자 거룩하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 어쩌면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바울도 말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사람과 사람이 공존해간다는 이유로 인해 지나치게 자신의 신념만 내세운다든지 남을 수용하지 않고, 혼자 거룩해지려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절제된 범위 안에서 자신을 개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 굳이 극장을 피하려고 까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구별된 의식은 있다. 적어도 내겐 그런게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불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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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스 스타트(2): 동물원에 있는 그리스도인_2012.02.0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9.)

 

(히브리서11:36~38) 또 어떤 이들은 희롱와 채찍질 분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초대교회의 시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들처럼 핍박과 박해와 고난과 고초에 대해 가장 선명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세대가 있을까? 핍박의 세대에 있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칼날 앞에 서는 것이었다. 그들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단 한번도 칼 앞에 서 본적이 없는 세대가 왔다. 우리는 TV 앞에 앉아있는 것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건대 적어도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히브리서 1136~38절을 전적으로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저 말씀의 한 글귀도 헤아리지 못한다. 동일한 구세주를 쫓아 동일한 복음과 그 은혜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서로의 삶의 정체성에 대해 우리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 깊은 이질감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고민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궁극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바로,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 질문이다. 사실상 이 질문은 거의 난제에 가깝다. 어느 누군가가 핍박의 세대의 그리스도인과 풍요와 사치의 그리스도인을 놓고 어느 누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 물론. 우리는 흑백의 논리로는 그 어떤 해답도 찾지 못한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답을 정의 내릴 기준을 찾을 수 없다.

 

마치, 동물원에 누워 관람객의 과자를 받아먹는 곰을 보면서 숲과 강을 헤쳐 달리며 연어를 낚는 야생의 곰을 떠올리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 곰들은 서로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곰들이 서로 마주쳤다고 상상해볼 때, 그들의 생김새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곰을 보고 있는 꼴이 될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다른 것일까?

 

동물원에 드러누워 과자를 받아먹고, 사육사가 정성스레 다듬어주는 물고기를 먹고, 그저 어슬렁거리며 무기력하게 동물원을 배회하는 곰. 겨울이 되면 난방이 되는 인공굴에 들어가 잠을 자고, 봄이면 나와서 해 아래 일광욕을 즐기며 드러누워 자는 곰. 먹고 자는 것에 대해 아무런 염려와 고민이 없는 곰. 추운 겨울 사냥감을 찾지 못할까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는 곰. 모든 것이 부족하지 않는 동물원의 곰. , 내일이면 관람객이 던져줄 맛있는 과자를 받아먹을 상상을 하고 잠이 드는 곰.

 

그러나 단 한가지 잃어버린 모든 것. 바로, 이글거리는 생존의 눈을 뜨고, 몸을 던져 먹이를 사냥하며 거친 자연과 싸워 이기는 투쟁심과 극기력. 혹한의 계절에도 굴하지 않는 생존의 힘. 바로, 진정함 곰의 본능! 숲과 강에서 포효하며 나무를 쓰러트리고, 짐승을 뒤쫓으며 거친 물살을 거슬러 헤엄쳐 연어를 낚는 강인함. 그것이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참으로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곰의 모습이요 정체성이라 한다면 적어도 동물원의 안락한 곰은 진정한 의미에서 곰이 아니다. 아니다. 곰이다. 적어도 DNA.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곰은 아니란 그 얘기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칼날에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상상하지 않는 세대. 더 좋은 집과 차, 더 나은 삶의 복지와 문화혜택을 바라는 세대. 더울 땐 에어컨 아래로, 추울 땐 히터 아래로. 육체의 모든 고난와 어려움에 대해서는 자연적인 섭리조차도 부인할 수 있는 첨단의 편리 속에 길들여진 동물원의 그리스도인. 인공굴의 안락함. 내일 죽을지 모른다는 각오를 할 필요가 없이 내일을 즐길 것을 꿈꿀 수 있는 세대. TV와 오락들, 새로 나온 재밌는 영화. 휴식과 교제를 제공하는 파리바게뜨, 카페베네, 롯데리아. 그러나 알고 있었던가 그러므로 우리가 무기력하다는 것을. 식어버린 열정, 나약한 의지, 무절제함과 무분별한 상식. 잃어버린 신앙에 대한 투쟁심과 도전정신. 그 환란의 세대가 가진 매서운 눈매와 뜨거운 눈물과 희생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지한 오늘의 세대.

 

무엇이 하나님과 우리가 기대하는 그리스도인이었던가.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아무런 공포와 두려움 없이 어슬렁거리며 과자를 받아먹고 일광욕을 즐기는 동물원의 곰 같은 그리스도인? 아니면, 자연의 원리를 따라 본능에 충실하게 자연과 싸워이기며, 세상과 싸워이기면서 혹한의 계절과 공포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생명력과 투쟁심으로 포효하는 야생의 그리스도인?

 

그러므로 적어도 나는 나 자신에게 되물을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맞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DNA만큼은. 그러나 기대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풍요롭고 안락하기 때문에 벌거벗음이라든지, 핍박이나 박해라든지, 고난이나 환란이라든지 그런 세대에 대한 묵상은 고사하고. 누리는 풍요로움 안에서 더 나은 풍요의 집을 짓고, 풍요의 산을 오르고, 풍요의 환락을 꿈꾸고 있는 비참한 세대. 안락과 구경꾼이 던져주는 과자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세대. 고난과 환란 앞에 당당하고 강인한 심장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 앞에 그저 새가슴이 되어버린 그리스도인 세대.

 

참으로 우리는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해 말할 자격이 그 어느 세대보다도 부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다. 참된 성경적 그리스도인의 표준 앞에서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토록 많은 말씀이 선포되고, 그토록 깊이 있는 강해와 가르침이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식어진 가슴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은가.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들이나 우리는 진정한가?

 

오히려 저 야생을 가자. 저 오지의 선교지로 가자. 차라리 그것이 더욱 깊은 가르침이요, 동시에 무기력을 깨우는 참된 능력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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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그리스도인 2012-02-23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글에 대한 제 생각 역시 비슷합니다. 하지만 군대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
또한 반은 문명화된 오지로의 여행과도 비슷해서 현재는 그런 불만은 없지만.
사회에 나가면 저도 역시 비슷하게 될것같습니다. 고민이 많습니다

BH,G 2012-02-23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우리가 성령의 인치심과 복음 안에서 거듭났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본질이겠죠. 다만, 그 이후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대한 문제가 정말 그리스도인 답다라고 할 수 있는지.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을 정체성에 빗대어 생각해봤던 묵상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너무나 다른데 어쩌면 초대교회 성도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힘든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묵상의 마무리도 어떤 환경에 있든 우리가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 안에 관계되어 살아가면서 훈련받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변치 않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면서 끝나지요. 군대라는 환경 역시 형제님이 그곳에서 하나님과 관계되면서 신앙을 지키고, 고민하시는 만큼 형제님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고. 앞으로도 사회에 나와서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고민하면서 살아 가시겠죠.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란 정체성의 한 단면이라 생각봅니다. ^___^
 

베어스 스타트(1): 동물원에서 시작된 사색_2012.02.02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8.)

 

작년 가을 언젠가 동물원에서 곰을 본 적이 있다. 동물원에 있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별로 의욕적이지는 않았다. 날마다 만나는 구경꾼들을 이제는 의식조차 하지 않으면서 좁은 우리에 갇혀 무기력해 보여 그렇게 별로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부는 손님들이 던져주는 간식을 받아먹기 위해 의욕적인 동물들도 있었다.

 

그리고 곰을 봤다. 그 우리 안에 있는 몇 마리의 곰들 가운데 한 마리가 내 시선을 이끌었다. 관람석보다 낮게 패인 우리 안으로 곰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는데, 모여든 관람객들 중 누군가가 과자를 던져주고 있었다. 벌러덩 드러누운 곰 한 마리는 관객이 던져주는 과자를 용케도 입으로 잘 받아먹고는 입을 벌리고 또 벌렸다.

 

그 곰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덩치 큰 녀석이 벌러덩 드러누워 과자를 받아먹는 여유로운 모습. TV에서 보았던 숲과 강을 헤엄쳐 달리며 큰 연어를 낚아채는 곰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 분명, 두 마리다 동일한 모습의 곰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다른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나에게 새로운 생각에 대한 첫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같은 곰이지만 어쩜 그렇게 전혀 다른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정말 곰을 곰답게 하는 것일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곰다운 것일까?

진짜 곰의 모습은 무엇일까? 어떤 모습이든 DNA가 곰이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두 모습의 곰을 같은 하나의 곰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면 그 기준과 근거는 무엇일까?

 

그렇게 나는 처음,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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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길갈!_2012.02.0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

 

(여호수아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 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출애굽의 1세대들은 광야에서 쓰러졌다. 그들은 갈망했다. 바로의 학대로부터 구원받기를그러나 정작 애굽을 벗어나자 그들은 실망하고 말았다. 광야의 초라함.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그리고 애굽을 그리워했다. 오직 좋았던 것만. 참외, 고기, 부추. 잔인한 고통은 숨긴 채. 가나안 정탐을 실패하면서 그들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들이 되었다.

 

어쩌면 출애굽의 1세대들은 비극을 벗어나자 마자 재차 비극을 맞아 비참한 죽음으로 끝난 비운의 세대였다. 그들은 애굽에 머물면서도 노예이자 종의 신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지긋지긋한 종살이에서 벗어나자마자 불순종과 불신앙의 노예가 되어 광야의 종살이를 하고 말았다. 그들처럼 비극적인 세대가 또 있을까?

 

그러나 오늘 여호수아와 출애굽의 2세대들은 길갈에 당도하였던 것이다. 불순종으로 광야의 유리하는 자들이 되었던 징계의 쓴 잔을 다 채우고, 그 비극의 시간 동안 중단되어 버린 할례가 재개되었다. 그들은 다시 회복되었다. 구별된 증표를 다시 실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지난 광야의 오랜 세월 중단되어버린 할례를 재기할 것을 명하셨다. 그들은 다시 구별되어진 것이다. 그들은 길갈에 당도하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야 너희에게서 애굽의 수치가 굴러 갔도다.’

 

애굽을 벗어나서도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날 때까지 애굽의 수치는 벗겨지지 않고 있었다. ? 어째서? 바로,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이었다. 사실 출애굽기 1세대들에게 있어 불순종과 불신앙은 친구 같은 존재였다. 1세대들은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갚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째로 그것과 맞바꾸었다. 가장 슬픈 비극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제야 그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 애굽의 흔적,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 애굽의 정신, 불신과 불순종. 모든 수치들이 걷어차였다. , 애굽의 수치. 바로 노예근성이다. 사실 출애굽의 1세대들은 간절히 출애굽을 소원하였지만 정작 그 애굽을 벗어났을 때 돌이켜 애굽을 그리워했다. 노예의 신분이 죽고 싶을 만큼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애굽을 나와서는 광야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보고 하나님을 불신했다. 그들은 매번 애굽을 재차 그리워했다. 그 수치와 모욕의 신분은 잊어버린 채 그곳에서 먹었던 외와 부추와 고기를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사람은 항상 그렇다. 현재의 좋은 것은 망각하려고 하고, 안 좋은 것은 과거의 좋은 것과 비교하면서 과거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과거의 쓴 것은 또, 망각하고 있다. 철저한 모순과 이기심이다. 그러므로 항상 무모한 소모를 반복한다.

 

애굽의 수치가 굴러 갔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유독 의미 깊게 다가오는 이유다.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끈질기게 그 이면에서는 노예적인 기질과 근성을 벗어날 수 없었던 출애굽의 1세대들. , 노예의 때를 그리워하던 쪼다 병신 같은 모습.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1세대들은 결코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광야에서 소멸됨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비극을 벗어나자 마자 재차 비극을 맞은 세대.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수치의 세대.

 

그 무모한 세대가 종말을 고하고, 이제야 애굽의 수치가 굴러간 세대가 왔다. 더 이상 애굽을 그리워하지 않는 세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진 세대. 가나안 정복에 대한 강한 열망과 도전정신으로 무장된 세대. 그들이 선 땅이 길갈이었다. 이제야 그 수치스러운 종의 근성, 노예의 기질을 벗어던지고 용맹하고 진취적이며 믿음으로 쟁취할 자들.

 

그리스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여 세상에서 벗어난 세대. 십자가의 보혈을 통과해 종의 삶을 벗어난 세대. 그러나 어느 세대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될까? 비극의 운명을 벗어나자 마자 다시 비극을 맞이하는 세대? 그렇지 않으면 길갈에 선 당당한 그리스도인?

 

어리석고 무모한 나는 여전히 내 삶의 많은 장소에서 길갈이 아니다. 여전히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지 않았다. 벗겨지지 않은 노예 근성으로 말미암아 범죄하고, 불찰하고 그러면서 광야를 돌고 있는 수치. 여전히 길갈은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너무나 길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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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지 않는 예수_2012.01.2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

 

(에베소서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의무였다. 그리고 신약시대 이제 모든 이방인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친히 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이제 사랑에 대해 새로운 표준이 나타났다. 하나님과 동등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뜨거운 열망은 구약시대 성막을 통해 재현되었지만, 이제 신약시대 친히 육체의 모양으로 인간들 가운데 함께 거하시며 최고조에 달한다. 하나님이면서 또한, 인간이신 완전한 분 예수.

 

우리는 비록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게 되었다. 어째서 그리스도인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사랑하며, 그를 위해 목숨조차 버릴 수 있는 심장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셨다.

 

(로마서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마침표. 확증이 곧 예수님의 죽으심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주신 것에 보답이라도 하듯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의 피를 기꺼이 바쳤다.

 

그러나 알고 있는가. 이제는 순교의 피가 메마른 시기란 것을. 물론, 시대가 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순교의 피를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죽는 것만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되묻게 된다. 그럼,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무엇으로 증명해야 할까?

 

, 오히려 정말 우리는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리스도를 위해 내 생명을 버린다는 것에 대한 사실적인 자각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초대교회와 핍박의 세대에는 달랐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분명한 자각과 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결심과 열정 없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 어색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 용납되는 세대가 오늘이다.

 

초대교회에는 세상 속에 그리스도인이 없었다. 그들은 영적으로 구별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고립되고 구별되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또 다른 인류 그리스도인이었다. 하지만 복음의 후세대인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과 연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 가장 많은 논란을 겪는 세대가 되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는커녕 그리스도인다워 질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예수님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상상이 된 것 같다. 그러나 깨달아야 될 것이 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의 피는 필요하다는 것. 오늘도 할 수 있는 대로 순교의 피는 뿌려져야 할 시대이다. 지나간 세대가 뿌린 순교의 피를 감상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상기시키는 이벤트를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오늘은 왜 그 피가 없는 것일까?

 

지나간 세대가 보여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오늘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랑에 대해 증명하라고 묻는 것만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무엇으로 증명해야 할 것인가. 순교의 피를 흘린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워진 시대가 되었다면, 다른 그 무엇으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을 증명할 것인가. 그러므로 정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세련되게 잘 건축된 교회당, 잘 정비된 교회정치, 봉사와 예배, 찬양단과 찬양들, CCM의 세대, MP3 설교의 다운로드. 신앙적인 모든 것이 풍성한 세대에게 감춰진 풍요 속의 빈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 우리는 사랑한다고 속고 있는 것인 아니었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교회 안에서 유능한 직분을 맡았고, 견고하게 신앙생활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장 서글픈 고뇌는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예수

 

내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에 대해 당신은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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