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스 스타트(3): 불가항력적인
것_2012.02.0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0.)
(요한복음 4: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해가고 달라져 간다. 불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의 섭리를 따라 나누어진 법칙과도 같은
것들이다. 즉, 종류별로 구별되어진 생명체들. 인류와 짐승, 암컷과 수컷. 나무와
식물. 모든 자연들. 그것은 불변한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왔다. 사회적 관습. 유행이나 라이프 스타일. 건축기술이나 과학기술. 즉, 본질적으로
변경시킬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고 생존해가는 사회적인 면에서 항상 변화가 있었다. 생각과
가치관의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져갔다. 역시, 사람은 사회적 존재임이 분명하다.
좋다.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에도 변화를 주었다. 우리는 앞서간 세대의 그리스도인과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서 발견되는 이질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변명도 있다. 각 세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부러 순교하기 위해 앞다투어 적지에 뛰어들어야 할 의무는 없다. 다시 지나간 세대와 같은 환란과 핍박이 우리에게 주어지길 소망할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탐구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다워 질 수 있는가? 그것일
것이다. 우리는 분명 지나간 세대보다 강인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 의지에 있어서 연약하다. 우리는 칼 앞에 서 있지는 않지만 다른 위험과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우리의 모습이 그저 변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과 우리를 위협하는 세상과 대상들이 달라진 것이다.
무장해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순교는 칼과 피가 아니라 나태와 무기력이다. 그리고 무절제이다.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과 벗이 될 수 있는 현실 앞에서 한 올 한 올, 근신과
구별된 마음을 잃어가는 우리의 정신과 가치관을 단단히 동여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의무이자 우리의 일반적인 순교정신이 될지 모르겠다.
언제든지
현대는 앞서 간 세대에게 빚진 세대이다. 순교의 피를 흘려 복음을 간수한 세대의 빚을 우리는 지고 있다. 우리는 피 흘리지 않지만 전달받은 그 복음에 참예해 다시금 이 복음의 간수와 전승을 위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한다. 아니, 고군분투 해야 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의무를 완성하는 것이며, 이로써
후세대가 우리 세대로부터 빚진 자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
너무 나약해진 우리들은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세상을 누리지만 세상과 벗이 되지는 않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그리스도인을 환영하는 세상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지만 우리는 스스로 절제해야 한다. 우리는 정당하게 누려야 되지만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당하게 누려야 되지만 무절제해서는 안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삼가 하는 것이 가장 치열한 싸움이자, 오늘날 가장 그리스도인다워지는 방편이라 나는 믿는다.
다시 말해,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문명의 혜택과 물질의 이기를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로운 활용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 즉,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위험이다. 우리가 물질의 이기와 문명의 혜택을 활용하고
적절히 운용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로움이 점점 우리로 하여금 무절제로
나아가게 한다. 또한, 하나님보다 세상과 문명과 이기를 더
의존하게 만들고 있다. 바로, 이점에 대해 우리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파리바게뜨에 갈 수 있다. 빵이 필요해서
우리가 파리바게뜨에 가게 되는 것은 거의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짧은 외출에서 출출해서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하나 사먹는 일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할 것이다. 나는 경우에 따라 카페베네에도 앉아 있을 것이다. 지나간 세대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우리가 현재 누려야 할 문명의 혜택조차 거부하는 방식을 취한다면 그것은 율법적인 정신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바로 이런 현대적 라이프 스타일로 말미암아 결국, 은근히
세상을 사랑하고 의지해 가고 있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경계가 모호해질 때, 우리는 문명으로 말미암아 무기력해져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즉, 동물원에 있는 그리스도인처럼
말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대가 왔다. 자신을 삼가고,
절제하라는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대가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명의 이기와
혜택을 즐기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자신을 삼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더 많은 기도와 자아성찰과 회개가
동반되어야 한다.
나는 극장에도
간다. 그러나 영화를 즐기지는 않는다. 따로 영화를 다운받거나
구해서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내가 극장을 가는 경우는 단 한가지의 경우이다. 가족이나 형제, 자매님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극장을 가게 되는
경우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극장 자체를 가지 않기로
한다면 더 좋겠지만 꼭 그렇지 만은 않다. 영화를 보게 되는 이유는 사회적인 이유일 뿐이다. 그것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나 혼자
거룩하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 어쩌면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바울도 말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사람과 사람이 공존해간다는 이유로 인해 지나치게 자신의 신념만 내세운다든지 남을 수용하지 않고, 혼자 거룩해지려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절제된 범위
안에서 자신을 개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 굳이 극장을 피하려고
까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구별된 의식은 있다. 적어도 내겐 그런게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불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