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스 스타트(4): 정체성의
재발견_2012.02.09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1.)
(히브리서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사람은 곰이
아니다. 거기서부터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단적으로 말해보면 우리가 야생의 곰이 지닌 정체성을 기준으로 놓고 보게 될 때, 동물원의
곰은 진정한 곰이 아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말이다. 그러한
비교를 그리스도인에게 고스란히 대입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우리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 되는
꼴이다. 우리는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분명 이런
직접적인 대입은 현명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이런 결론은 자멸이나 다름없다.(더 이상 내가 성경과 묵상을 반복할 필요성도 사라진다.)
한편, 동물원의 곰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야생의 곰처럼 동물원 안에서 사냥하는 연습을 하고, 스스로를 삼가 훈련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즉, 동물원의 곰은 절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본능만 따를 수 있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짐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사람이다. 사람은 짐승과 다르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고 스스로를 통솔하고, 훈련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한 탐구에 깊이 들어간 인간들은 종교적인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자,
적어도 현대적인 그리스도인이 정체성을 재확립하기 위한 방편으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삶을 동일하게 경험하겠다고 결론 내리게 되면 역시
오산이다. 물 위에 서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모함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는 일부러 환란을 소망하고, 순교를 향해 돌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모방을 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그리스도인이란 분명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훈련과 징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바울?)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이며 참 아들이 아니라고 정의했다. 이 성구의
앞뒤를 잘 살펴보면 그는 징계로 인해 낙심하는 성도들에게 징계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와 징계야말로 참으로 구원받은 증거가 되고, 사랑 받는 증거란 것을 강조하면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려고 하고 있다.
톱과 칼, 환란과 죽음으로 인해 성도들은 낙심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이 왜? 그들도 우리처럼 의구심을 가졌다. 그런 의구심은
필연적으로 영적침체로 이어진다. 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특별한 의미를 일깨움으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신적인 훈련과
연단, 징계와 곤란이 동일한 방식으로 지금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반영되고,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무엇인가? 바로, 지금 우리들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 아래에서
훈련 받고 있으며, 징계 받고 있으며 참 아들로 인정 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훈련과 인내와 시련과 고난과 슬픔과 고통이 수반된다. 우리는 거듭났기 때문에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훈련과 연단을 받고 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다를 바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분명한 정체성의 증거이다. 참 아들이 아니고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아들의 대우. 아들의 증거.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가장 근본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시대에 따라 살아가는 라이프 스타일과 모습들이 달라져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련의 동일한 원리와 방법들을 따라 다루심을 입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야생을 떠나 동물원에 갇힌 곰은 더 이상의 자아성찰이란 것이 무의미한 짐승에 불과하며, 얼마든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곰으로 전락할 수 있을지언정. 사람인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다른 법이다. 우리는 어떤 환경, 어떤 시대, 어떤
자리에 머물든지 간에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의 영속성 속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섭리와 뜻을 따라 우리 삶에 대한 의무와 방향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스스로를 삼가
절제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익혀 나가면서 훈련 받고 있다 한다라면 우리의 정체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될
때야말로 우리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무튼 이제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우리는 굳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위대한 순교와 가눌 수 없는 환란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거나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절차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도 선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하심을 쫓아 훈련과
연단, 징계가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참 아들이며
사생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초대 성도와의 그 많은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고도 가장 중요한 하나의 동질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