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참고 기다리다_2012.02.2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5.)

 

(하박국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루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기다림에 대한 교훈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특별한 교훈임이 틀림없다. 성경에는 기다림으로 인한 복과 실패가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신앙의 좋은 위인들은 모두 혹독한 기다림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다. 오늘 나도 정말 포기하고 싶었던 환경에서 다시 한 번 참고 기다리며, 인내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억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약속 받은 후에도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도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심지어 군대장관으로 성공한 이후 10년의 도망하는 방랑의 세월을 지나며 훈련 받아야 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 총리 대신이 되기까지 오래 참고 기다려야 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에게 강조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는 분명 오래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왔기에 근신해야 된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 구원을 받고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당장 오실 것만 같았던 주님은 여전히 침묵하신다. 오히려 앞으로도 오시지 않을 것처럼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희미해진다. 어쩌면 그래서 오래 참으라는 교훈은 더 중요해져 가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해이해 진 채 주님을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울은 기다리는데 부족함을 보여주었다. 사무엘이 이르기까지 7일을 기다려야 했지만 사무엘이 당도하기 직전 스스로 제사를 지내고 말았다. 믹마스에 모인 블레셋 군대, 흩어지는 백성들, 사무엘의 부재. 조급함에 초조해지기 시작한 사울은 마지막 고비를 참지 못하고 우를 범했다. 그때부터 사울은 인생의 내리막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울의 그런 불찰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불찰이 되곤 한다. 개인적인 생활에서 종종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더 좋은 것을 살 수 있었고, 얻을 수 있었고, 만나고자 했던 사람을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인내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참지 못함으로 우를 범하곤 한다.

 

인내심이 부족하고, 오래 기다린다는 것에 익숙치 못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인내에 대한 특별한 훈련도 잊지 않으신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함을 입기 위해 모든 것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에 대해 무뎌져 간다. 그럼으로써 마지막 때 그리스도인으로 근신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윤리가 퇴색되어지곤 한다. 기다림에 약한 것이다. 시내산 아래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는 것에서 실패했다. 그래서 우상숭배로 나아갔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데 실패하면 우리는 세상에 소망을 두게 된다.

 

사실 평안 중에 기다린다는 것은 좀 지루할 수는 있어도 그렇게 힘들진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반대로 고난 중의 기다림은 가장 힘든 고통이 된다. 원망이나 반항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잠잠히 기다리라고 하신다.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있으며, 우리를 시험하신다고 한다. 욥은 심한 고난 중에 잠잠히 기다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에게 이전보다 배나 되는 축복으로 되갚아주셨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고 했다. 그 진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익숙히 받을 줄 알아야 될 사람들이다. 그러나 고난을 싫어하게 되면 인내할 수 없게 된다. 예전엔 그런 생각을 했다. 좀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면 쉽게들 그만 두려했지만, 나는 그리스도인이 좀 힘들다고 안 하려고 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며 꿋꿋히 해내곤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을 주셨고, 그곳에서 전도도 할 수 있게 해주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어느날 나는 그런 순수한 마음과 겸손을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힘들고 부담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할 수 있는대로 피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마음을 나약하게 먹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오래 기다리고 참지 못했다.

 

기다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는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서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심한 어려움과 환란 중에서 오래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내공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인내와 마지막 축복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일깨워주고 감동을 더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단순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보다 나은 인간이 된 것처럼 생각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사실 삶의 여러 모양에서 종종 그리스도인이 부족을 보일 때가 많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업무상의 이유로 만나게 된 사람들 중에도 종종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들이 있는데, 오히려 그런 분들이 하나님을 믿으니 복을 받아서 좀 편하고, 쉽고, 단순히 일을 처리할 수 있어. 난 지옥가는 죄인이 아니고 하나님 자식이기 때문이지.’란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보았다. 그래서 소위 약았다.’라고 할 만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한편, 그런 약은 모습이 때로는 내게도 있는 모습일 때가 있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좀 더 손해보도라도 내가 희생하고, 양보해야지, 더 책임감 있게 잘 해야지.’그런 모습이 아닌.

 

힘든 상황 속에서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다. 잠잠히 기다릴 줄 안다면 더욱 그렇다. 하나님은 복을 얻기 전에 먼저 기다리는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다윗처럼, 요셉처럼, 욥 처럼. 그리스도인 반드시 배워야 할 인격이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의 많은 문제들과 과오들이 해결되어져 간다. 시간이 약이란 말처럼 말이다.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행동할 때 그릇된다. 마치, 사울처럼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해버린다. 그러면 상황은 더욱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

 

요셉이 기다리는 것에 지쳐 여호와 신앙을 포기해버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셉이 고난의 시간을 인내할 수 없어 신앙을 포기했다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신앙의 위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또한, 믿음과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얻는 진리에 대해서 교훈 받을 수 없다.

 

언젠가 보았던 신문기사가 내게 크게 뇌리박힌 적이 있었다. 야구선수인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의 필라델피아 소속으로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직후의 인터뷰였다. 노장의 박찬호에게 기자는 어떻게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되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은 생각했다. 운이 좋았고, 우승하기 위해 특별한 훈련과 노력을 했으며, 팀웍이 좋았고 등등. 그러나 박찬호의 신중한 대답은 짧고 단조로웠다.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 한마디에는 단순히 필라델피아 소속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는 단편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한 마디에는 박찬호 선수의 야구인생이 모두 담겨있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전성기도 구가하고, 슬럼프를 겪으며 10여 년을 메이저리그란 혹독한 환경에서 인내한 결과였다. 슬럼프를 겪던 박찬호는 한 때, 소속팀에서 방출되기도 했으며 마이너리그로 내려가 생활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정말 메이저리그와는 대우가 천지차이였다. 메이저리그 소속의 선수들이 전세기를 이용해 이동을 한다면 마이너리그 선수들은 전세버스로 그 큰 대륙을 몇 박 몇 일 동안 이동해서 경기를 치뤄야 했다. 낡은 골방에 들어가 빵 몇 조각을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공을 던져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영광을 누려 본 그가 그 수치스러운 시간을 눈물을 훔치며 참고 기다렸다. 그는 자존심을 버리고 그 수치를 다 참아냈던 것이다. 공을 던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메이저리그로 입성할 수 있는 기회가 왔고. 드디어 그는 필라델피아 소속으로 월드시리즈에 등판했으며 최종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러므로 많은 훈련이 있었고, 팀웍과 단결이 있었고, 우승을 위한 치밀한 전략과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찬호 선수는 그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고, 정말 야구를 포기하고 싶었을 때, 정말 인내할 수 없었고 기다리고 싶지 않았을 때 기다렸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포기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낙심하고 좌절할 때도 많다. 구원받지 않은 가족들의 반대, 핍박. 이웃과 친구들의 외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의 길을 걸어가는 외로움과 왕따의식. 구원받기 전에는 겪지 않았던 내적인 갈등과 자기 절제에 대한 특별한 의무. 그러므로 신앙을 포기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신앙을 떠나서라도 세상의 어느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고독한 자기만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은 사람들이다. 그들도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 못지 않게 특별한 자기 절제와 고독, 주변의 외면과 시기, 질투 모든 고난을 다 경험하게 되어 있다. 고난 없이 영광을 얻을 수 없다는 진리는 비단 그리스도인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진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유독 신앙의 고난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가운데 보다 적극적으로 인내하고, 참고 기다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만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의 길을 오래 참음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세상의 어떤 분야에 있는 사람이든 그는 구별된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 배워야 할 정신 중 하나는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실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 중에 드러나는 믿음일 것이다. 우리는 것을 소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다. 인내하지 못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역시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않는다면, 더 참지 못하겠다고 비명을 지를 그대에 참고 기다릴 수 있다라면 분명 우리 신앙의 위치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될 것이다. 내 신앙의 욥, 내 신앙의 요셉, 내 신앙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승리를 맛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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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_2012.02.19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4.)

 

(사무엘상31:3-5)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무엘하1:7-15) 사울이 뒤로 돌이켜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또 내게 이르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에 들었나니 너는 내 곁에 서서 자를 죽이라 하시기로 저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 곁에 서서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다윗이 그 고한 소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소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사무엘상의 마지막 31장과 사무엘하의 1장은 사울의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선 사무엘상하는 원래 한 권의 성경이었음으로 결국 상호 어어지는 이야기임을 알고 접근하면 훨씬 수월해진다. 그리고 이 두 장을 잘 살펴보면 내용이 무엇인가 맞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삼하 31장의 사울의 죽음을 보면 그는 분명 자살로써 생을 마감했다. 그가 중상을 당하여 살 소망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그는 자기 옆에 있는 호위병에게 죽여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호위병은 감히 왕을 쳐 죽일 담력이 없었다. 그러자 사울은 자기 칼을 세워두고 그 위에 몸을 쓰러뜨려 자살을 한다. 그리고 주군을 잃어버린 호위병 역시 전쟁의 패배와 주군의 자살로 인해 자기 역시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알고 또, 패닉상태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 호위병 역시 자살을 한다. 그렇게 사울은 비참한 최후로써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삼하 1장에는 사울의 죽음에 대한 전혀 다른 증언이 등장한다. 자신을 아말렉 사람이라 소개하는 소년이 전장으로부터 다윗의 무리에게로 나아왔다. 그 소년의 손에는 사울의 왕관과 팔찌가 들려 있었다. 이 소년의 증언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사울이 중상을 당해 쓰러졌으나 그 목숨은 아직 붙어 있었는데 사울이 요청하기를 중상으로 인해 살지 못할 것이나 아직 목숨이 남아 있어 심하게 고통 받고 있으니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아말렉 소년은 사울왕의 부탁대로 그가 더 살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어 그를 쳐 죽이고 사울왕의 소지품을 챙겨 다윗에게 보고를 드림으로 사울왕의 죽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이에 다윗과 그 일행은 사울왕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 동시에 아무 두려움 없이 여호와의 기름부은 바 된 왕을 쳐죽인 이 아말렉 소년의 오만방자함으로 인해 그 소년을 처단하게 된다. 기름부음 받은 자를 함부로 칼을 대서 죽인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 되었든 하나님 앞에서 그릇된 것이었다.

 

우리는 바로 이 장면이 상호 보충이라든지, 오버랩이 아니라 전혀 상충되고 있는 장면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결론은 무엇일까? 바로 이 아말렉 소년의 보고는 거짓 보고였던 것이다. 사무엘하의 장면처럼 사울은 자살했으며, 그의 병기 든 자도 자살했다. 그러나 인근에서 그 장면을 바라본 것으로 추정되는 이 아말렉 소년이 사울왕의 죽음을 보고 다윗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리고 영광을 얻기 위해 죽은 사울의 소지품을 벗겨서 다윗에게로 나아온 것이다. 분명 이 아말렉 소년은 사울왕을 자신이 죽였다는 소식을 다윗에게 전함으로써 축복을 받고, 미래를 보장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당히 다윗에게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보여드리며, 내가 죽음 앞에 당도한 사울의 마지막 목숨을 끊어버리고 이렇게 다윗에게 나아왔노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왠일. 안타깝게 하나님 앞에 정직한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듣고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리고 오히려 아말렉 소년의 경솔함을 책망하며 이제 네가 죽을 차례라며 처단케 된 것이다. 그러고보면 다윗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무려 10년을 사울의 칼날에 맘 편히 쉬지 못하고 도망다녔음에도 그 모든 압박과 괴로움도 승화되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정직한 양심과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반대로 허위보고를 통해 자신의 안정과 번영을 꿈꿨던 이 아말렉 소년은 기대했던 영광은 커녕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경솔히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자신의 목숨을 절단내고 말았다. 거짓말을 통해 영광을 바라다가 오히려 자기의 남은 생명까지도 도려내어 버렸다. 이런 비극이!

 

정직에 대한 가장 좋은 사례를 찾아야 한다라면 바로 이 장면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가장 일반적인 경우 한 가지를 재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좋은 의도를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종종 자신의 부정을 감추고 자신의 허물과 약점을 숨기고 그릇된 명예와 영광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아말렉 소년은 그릇된 명예를 얻고자 거짓말을 선택했다. 그는 외국인의 아들이었다. 여호와의 신앙에 무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용병인 그가 사울왕의 위치에 대해, 기름부음에 대해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별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이 다윗의 대적이었던 점을 이용해 다윗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허위보고를 결심했다. 황금보화, 한 자리 차지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는 죽은 사울의 머리에서 면류관을 벗겨냈을 것이다. 늘어진 사울의 양팔에서 팔찌를 빼냈을 것이다. 그는 기쁨과 곧 눈앞에 펼쳐질 영광을 상상하며 쉬지 않고 달려서 다윗에게 나아왔던 것이다. 자기의 죽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렇게 착각에 빠져 이렇게 기쁘게 뛰어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거짓에 눈 먼 인간의 어리석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아말렉 소년은 그렇다치고 나의 양심은 어떠한가. 사람이 하루에 8분마다 거짓말을 한다는 통계에 있어 그리스도인은 얼만큼 예외적인걸까. 우리는 더 큰 양심의 호소를 외면한 채 거짓을 말하고, 허위보고를 한 적이 없었던가.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는 정말 사람들 앞에서도 정직한가. 우리는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는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고백되어져야 할 것이 많다. 우리가 범죄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며, 더불어 사람을 향해 범죄하고 있는 것이다. 정직이란 것은 그저 하나님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직은 사람과도 관계가 된다.

 

아말렉 소년의 모습은 종종 내 양심을 짓누른다. 그동안 나는 사람들 앞에서도 너무나 정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실수투성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 못했으며, 내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해왔었다. 나는 무책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믿었고, 내가 보다 완전하다고 믿어줬다. 그러므로 나는 종종 사람들을 속여버린 꼴이 되었다. 또한, 나는 보다 나은 것들을 얻고 싶었기 때문에 정직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 후에는 깊은 자책이 나를 괴롭히곤 했다. 아차, 내가 또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하지 못했구나. 청교도 삶의 윤리에서 중요한 한 가지가 정직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청교도와는 전혀 달랐다. 매사에 나는 스스로를 속이며, 사람들을 속였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이기적이었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내가 거짓을 일삼았던 것에는 사랑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회는 컸다.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다 말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모든 순간에 완전하고 정직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함으로써 보다 정직하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런 정직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지 않았다. 무뎌진 양심으로 순간순간 정직에 대해 신중하게 대처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봤다. 어쩌면 나는 저 아말렉 소년처럼 허위보고를 하러 뛰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나는 죽음을 당할까? 그렇게 두려워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아말렉 소년이 아니다. 나의 근본은 그리스도인이며, 그래서 나는 소망이 있고, 내게 후회는 있지만 멸망은 없었다. 내게는 긍휼을 하나님이 계셨다. 나는 아말렉 소년과 같았던 내 모습에 대해 하나님께 자백할 것이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특권이자 동시에 내가 아말렉 소년과 같이 끝맺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정말 아말렉 소년과 같은 모습은 배우지 않는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매순간 순간 더욱 정직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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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장애_2012.02.16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3.)

 

(사무엘상15:30)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찌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다윗의 보석이 정직함이라 한다면 반대로 사울의 장애는 체면이었다. 우리는 다윗과 사울이 얼마나 서로 대조적인 두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다. 다윗과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성패가 나뉘어지는 두 종류의 인간상을 절묘하게 엮어낸다.

 

다윗은 왕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왕자는 아니었다. 그는 일개 시골촌뜨기 말째 목동이었다. , 그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변변찮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떤 특별한 감수성이 있었다. 그는 인간적인 감수성 뿐만 아니라 영적인 감수성을 겸비한 다재다능한 면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유심히 보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비전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그에게 보여주신 비전과는 전혀 반대로 상황을 만들어갔다. 하나님은 다윗의 가시밭을 예비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불러서 세우시기 전까지 특별한 훈련을 통과케 하셨다. 왜냐하면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 때문이었다. 그 수난의 기간을 통과하면서 다윗은 그의 천부적인 감수성을 하나 더 갖추게 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정직함과 상한 심령이었던 것이다. 다윗은 너무나 곤란을 많이 겪었기에 하나님의 엄위하신 징계를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엄하심을 몸소 체험하면서 결코 하나님 앞에서는 강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으며, 하나님 앞에서 부정직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결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범죄하기는 했지만 정말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했고, 그래서 두렵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고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자백하곤 했다.

 

그러나 사울은 달랐다. 사울도 변변찮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특별한 수난의 과정을 겪어보지 못했다. 성급히 왕좌에 오른 사울은 너무나 쉽게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기득권, 자신의 명예를 잃는 것에 특별한 공포심을 가졌다. 하나님보다 그것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그럴만 한 것이 사울은 낮아짐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까지 비참해져 봤다면 그리고 군대장관이면서도 도망자 신세가 되어보고, 왕이면서도 도망자 신세가 되어보면서 하나님의 징계와 엄위하심을 체험하면서 겸손을 배워봤다면. 사울은 그런 적이 없었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굴러 떨어진 왕좌와 권력과 부와 명예로 인해 드높아진 자신의 위상에 익숙해져가면서 차츰 그것을 잃는 것을 심하게 두려하기 시작했다. 그 두려움에서부터 평생에 다윗을 죽이려는 그릇된 야망도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사울에게 추락이란 것은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의 마지막 죽음의 장면도 생각해보자.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칼에 죽는다는 것이 자기 체면을 깎을 것 같아서 자살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사울의 장애였다. 사울에게 정직함이란 것은 거의 무모한 것이었다. 사울은 거의 정직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대부분의 상황 속에서 사울은 자신의 체면에 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부정직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면서 극단적인 체면유지에 목을 매다시피 했다.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았을 때도 어떠한가. 그가 불순종한 것은 백성들의 바람에 부합하면서 자신의 인기를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불순종임을 책망하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 버림받게 될 것이라고 조차 저주를 예언하는데도 고작 사울의 답변은 이것이었다.

 

내가 비록 범죄하였을찌라도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범죄했다는 사실에 대해 사울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다든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않다든지 자신을 속이고 기만한다든지 그 모든 것이 사울에게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오직 자신의 체면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사울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자기 체면의 종이었던 것이다. 사울은 그렇게 하나님 보다도 자신을 더 높이고, 자신을 깊이 사랑했다. 사울은 결코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 초라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랍지 않은가?

 

그리스도인은 좋은 군사로 부르심을 입고, 이제 날마다 훈련 받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 역시 훈련을 싫어한다. 우리는 낮아진다거나 고난이나 징계로 인해 초라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만약,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훈련과 낮아짐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젠가 사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초라해지는 자신을 견딜 수 없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견딜 수 없게 된다. 사울은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다윗과 같은 수난과 모욕의 시기를 거쳐 영광을 얻는 뿌리 깊은 경험들이 있었더라면 적어도 사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윗은 비록 초라할 때가 많았지만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훈련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의 훈련은 훗날 그가 왕이 되어서도 낮아지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 수 있게 해주었다. 다시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 앞에서 통회하고, 정직해질 수 있도록 해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언제든지 유능한 사람은 결핍을 경험해본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유능함을 얻는다면 그는 곧 장애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체면이라는 장애. 그 체면 때문에 결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해질 수 없는 장애를 겪게 된다.

 

하나님은 다윗과 사울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 교훈해주실 수 있다. 훈련을 싫어하고 낮아지고 초라해지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는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다윗을 거울 삼아 그 훈련을 배우도록 하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런 곤란을 겪는 것에 대해 어려워한다. 우리는 사실 많은 모습 속에서 다윗이기 보다는 사울적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명성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정직하지 못하다. 사울처럼 체면 때문에 거짓을 선택하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참됨은 분명 정직함이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또는 나의 생활을 돌이켜볼 때 나 역시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왜냐하면, 나의 명예와 체면, 나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너무나도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이 교회이든 형제, 자매이든. 회사이든 이방인이든 가리지 않고 나는 나를 위해 거짓말을 한다. 마치, 사울처럼 말한다.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얼마 전에도 나는 나의 실수를 교묘히 감추기 위해 꾀를 냈다. 정직하게 그것에 대해 재검토를 거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책망이 두렵고, 내가 쌓아둔 신뢰에 금이 갈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마치 장로들과 백성들 앞에 있는 사울과도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묘하게 나의 부정직함을 드러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정말 내 신뢰에 금이 가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그것을 뭍어 둘 수 있게 해주지 않은 하나님에 대해 처음엔 난감해했다. 그러나 이내 내가 부정직함에 대해 난감해하지 않고, 부정직을 감출 수 있게 돕지 않은 하나님을 난감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기겁을 했다. 나는 완전히 사울이었던 것이다.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사울의 모습 그대로 나는 부정직이라는 그리스도인에게 걸맞지 않는 범죄는 아랑곳 않고 하나님을 난감해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나의 체면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 생활의 곳곳에서 아기자기하게 반복되는 거짓과 타락과 위선들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헤아릴 수 없는 나의 소소한 부정직함에 대해 슬퍼하면서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거짓의 조합들 앞에서 한없이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일까?’ 그러면서 말이다. 공중전화 부스에 있는 그 스튜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위선으로 감추고 꾸미며, 속고 속이는 게 내게 있어서는 내 삶의 한 구석에 있는 비참한 단면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이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속였던 것만큼 나를 용서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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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2012-02-24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신의 부도덕함과 결점들을 드러내기 싫어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이 드러내시겠지만..그 이후에 나의 태도가 사울이냐 다윗이냐가 중요한것 같습니다. 하나님앞에 정직하면 사람들 앞에서도 정직히 행할 수 있으며 당당해집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형제자매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정직하지
못함을 발견하곤 합니다. 결코 다를 수 없기 때문이죠.
이번 묵상을 통해서 나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되어 감사가 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자신의 사울 된 모습을 반성하고 되돌아보는 당신이야말로 다윗의 태도를 가졌네요.

BH,G 2012-02-25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ㅎㅎ 격려해주셔서 감사해요. 다윗이고 싶네요!
 

다윗의 보석_2012.02.1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2.)

 

(시편7: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정직에 관한 가장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성경인물이 있다면 분명 다윗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성경의 위인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다윗의 일생과 삶의 은밀한 부분까지 우리로 하여금 들여다볼 수 있게 성경을 기록해주셨다. 마치 그것은 경주 대릉원에 가서 천마총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분들을 그저 밖에서 보고 있는게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 고분의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감상할 수 있듯이.

 

다윗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다윗을 사랑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다윗은 참으로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다윗만큼 수많은 대적과 많은 위협을 겪은 인물도 많지 않다. 어찌보면 다윗은 수많은 대적과 위협을 지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남았기에 마지막 그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일 게다.

 

한편, 우리가 다윗을 보는 것과 반대로 다윗이 자신을 바라볼 때는 어떨까? 우리가 다윗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허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직에 집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적나라한 죄상이 적나라하게 까발라진 입장에서 자신의 허물을 생각할 때 많은 고통도 감수해야 했다.

 

유독 다윗이 우리에게 많은 위로를 주는 이유가 있다. 그의 특별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직한 회개와 양심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었고,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귀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반열에 올라갔다. 그러나 반대로 다윗의 위대한 대적 사울을 생각해보자. 성경을 보면 사울이 도덕적으로 범죄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실제로 그가 얼마나 도덕적이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사울의 삶에서는 어떤 눈에 띄는 범죄의 행적이 없다. 다만,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정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무엘을 대신에 제사를 지낸 것,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은 것,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 등 그는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가 망하게 된 가장 치명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다윗을 보자. 그는 수없이 실패했다. 그의 잘못들을 유심히 보면 그는 참으로 그 답지 못할 때가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위대한 장군이자 시인, 왕이자 하나님의 사람이면서도 때때로 그릇된 판단과 무절제로 오점을 남기곤 했다. 그러나 그가 사울보다 더 위대해졌다.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정직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늘 자신의 실패와 잘못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상한 심령으로 나아간 사람이다. 그는 범죄하고는 이내 자신의 상태와 문제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탄원했다. 긍휼을 구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게 된다. 하나님은 강하고 유능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늘 자신의 양심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쏟아내고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다윗은 그러한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이렇게 말했다.

 

(시편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우리가 늘 완전하여서 하나님 앞에 조금도 꿀릴 것이 없는 완전함을 갖춰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완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충분히 아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오점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상한 심령으로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을 더 사랑하신다. 사울은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으로 나아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행위가 의로웠던 바리새인은 조금도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떳떳했다. 그러므로 그는 상한 심령을 배우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런 의로운 마음을 서글프게 바라보신다. ?

 

(22: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우리가 의롭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오만이다.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완전함 속에서도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재발견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상한 심령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의인이다.

 

욥이 왜 그 많은 고난을 받았던가. 바로 앞서의 욥기서의 고백이 욥이 깨달은 진리였던 것이다. 욥은 바리새인처럼 의로웠다. 적어도 욥 역시 하나님 앞에 바리새인처럼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 정직하고 순전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그는 자신의 순전함을 의지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럼으로 해서 그는 상한 심령으로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체험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런 욥을 사랑하셔서 그로 하여금 고난을 통해 그가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며 모든 자신의 완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하셨던 것이다. , 단련하여 정금같이 되게 하신 것이다. 정금. 의로울 뿐만 아니라 상한 심령과 연약함을 알고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해보이고 잘 갖춰진 사람은 늘 일등이고, 우월해보이지만 부족해서 늘 상심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다시 노력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 사람. 그 사람에게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바로, 그런 넘어짐과 세워짐의 반복을 통해 삶과 자아와 인생에 대해 깊은 것을 통찰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늘 일등만 하는 우월한 인자의 사람은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우리 심령의 깊은 곳을 감성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많이 부러졌지만 끊임없이 재기해본 사람이다. 마치, 사울이 아니라 다윗처럼. 그래서 우리는 다윗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그의 시편은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위로의 시()이다.

 

그리스도인.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정직함이다. 그리고 상한 심령이다. 다윗은 정말 수치스러운 죄를 우리에게 들켰다. 그러나 그가 아름다워진 것은 그 모든 것에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허물조차도 아름다움으로 재기되었다.

 

내가 가장 크게 고통 받는 게 있다. 내가 정말 정직하지 못하다는 진실이다. 내 삶의 많은 모양과 구석에서 나는 정말 정직하지 못하고, 위선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나를 상하게 한다. 나의 거짓에 대해 무릎을 꿇을 때 나는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되묻곤 했다. 그리고 다윗에게 도움을 청한다. 나는 정말 떳떳하지 못한 위선과 거짓말쟁이지만 나 역시 다윗 당신처럼 하나님 앞에서 다시 정직해지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긍휼을 입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다윗이 가진 정직한 양심 그것이 나에게도 동일한 소유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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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2012-02-1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람앞이 아닌 왜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 자신은 정직하지 못할까요?
마음을 토해내지 못할까요? 내마음을 보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죄를 지으면 숨고 싶고 감추고 싶은것이 자녀들의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보니 저도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고백하는것이 참 어색하네요.
그만큼 습관이 안되어 있었던거 같네요. 오늘부터라도 정직한 대화를 시도해야겠어요~


 

베어스 스타트(4): 정체성의 재발견_2012.02.09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1.)

 

(히브리서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사람은 곰이 아니다. 거기서부터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단적으로 말해보면 우리가 야생의 곰이 지닌 정체성을 기준으로 놓고 보게 될 때, 동물원의 곰은 진정한 곰이 아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말이다. 그러한 비교를 그리스도인에게 고스란히 대입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우리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 되는 꼴이다. 우리는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분명 이런 직접적인 대입은 현명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이런 결론은 자멸이나 다름없다.(더 이상 내가 성경과 묵상을 반복할 필요성도 사라진다.)

 

한편, 동물원의 곰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야생의 곰처럼 동물원 안에서 사냥하는 연습을 하고, 스스로를 삼가 훈련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 동물원의 곰은 절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본능만 따를 수 있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짐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사람이다. 사람은 짐승과 다르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고 스스로를 통솔하고, 훈련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한 탐구에 깊이 들어간 인간들은 종교적인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적어도 현대적인 그리스도인이 정체성을 재확립하기 위한 방편으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삶을 동일하게 경험하겠다고 결론 내리게 되면 역시 오산이다. 물 위에 서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모함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는 일부러 환란을 소망하고, 순교를 향해 돌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모방을 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그리스도인이란 분명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훈련과 징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바울?)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이며 참 아들이 아니라고 정의했다. 이 성구의 앞뒤를 잘 살펴보면 그는 징계로 인해 낙심하는 성도들에게 징계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와 징계야말로 참으로 구원받은 증거가 되고, 사랑 받는 증거란 것을 강조하면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려고 하고 있다.

 

톱과 칼, 환란과 죽음으로 인해 성도들은 낙심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이 왜? 그들도 우리처럼 의구심을 가졌다. 그런 의구심은 필연적으로 영적침체로 이어진다. 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특별한 의미를 일깨움으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신적인 훈련과 연단, 징계와 곤란이 동일한 방식으로 지금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반영되고,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무엇인가? 바로, 지금 우리들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 아래에서 훈련 받고 있으며, 징계 받고 있으며 참 아들로 인정 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훈련과 인내와 시련과 고난과 슬픔과 고통이 수반된다. 우리는 거듭났기 때문에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훈련과 연단을 받고 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다를 바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분명한 정체성의 증거이다. 참 아들이 아니고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아들의 대우. 아들의 증거.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가장 근본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시대에 따라 살아가는 라이프 스타일과 모습들이 달라져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련의 동일한 원리와 방법들을 따라 다루심을 입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야생을 떠나 동물원에 갇힌 곰은 더 이상의 자아성찰이란 것이 무의미한 짐승에 불과하며, 얼마든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곰으로 전락할 수 있을지언정. 사람인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다른 법이다. 우리는 어떤 환경, 어떤 시대, 어떤 자리에 머물든지 간에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의 영속성 속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섭리와 뜻을 따라 우리 삶에 대한 의무와 방향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스스로를 삼가 절제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익혀 나가면서 훈련 받고 있다 한다라면 우리의 정체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될 때야말로 우리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무튼 이제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우리는 굳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위대한 순교와 가눌 수 없는 환란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거나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절차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도 선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하심을 쫓아 훈련과 연단, 징계가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참 아들이며 사생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초대 성도와의 그 많은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고도 가장 중요한 하나의 동질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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