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_2012.02.19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4.)

 

(사무엘상31:3-5)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무엘하1:7-15) 사울이 뒤로 돌이켜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또 내게 이르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에 들었나니 너는 내 곁에 서서 자를 죽이라 하시기로 저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 곁에 서서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다윗이 그 고한 소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소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사무엘상의 마지막 31장과 사무엘하의 1장은 사울의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선 사무엘상하는 원래 한 권의 성경이었음으로 결국 상호 어어지는 이야기임을 알고 접근하면 훨씬 수월해진다. 그리고 이 두 장을 잘 살펴보면 내용이 무엇인가 맞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삼하 31장의 사울의 죽음을 보면 그는 분명 자살로써 생을 마감했다. 그가 중상을 당하여 살 소망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그는 자기 옆에 있는 호위병에게 죽여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호위병은 감히 왕을 쳐 죽일 담력이 없었다. 그러자 사울은 자기 칼을 세워두고 그 위에 몸을 쓰러뜨려 자살을 한다. 그리고 주군을 잃어버린 호위병 역시 전쟁의 패배와 주군의 자살로 인해 자기 역시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알고 또, 패닉상태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 호위병 역시 자살을 한다. 그렇게 사울은 비참한 최후로써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삼하 1장에는 사울의 죽음에 대한 전혀 다른 증언이 등장한다. 자신을 아말렉 사람이라 소개하는 소년이 전장으로부터 다윗의 무리에게로 나아왔다. 그 소년의 손에는 사울의 왕관과 팔찌가 들려 있었다. 이 소년의 증언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사울이 중상을 당해 쓰러졌으나 그 목숨은 아직 붙어 있었는데 사울이 요청하기를 중상으로 인해 살지 못할 것이나 아직 목숨이 남아 있어 심하게 고통 받고 있으니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아말렉 소년은 사울왕의 부탁대로 그가 더 살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어 그를 쳐 죽이고 사울왕의 소지품을 챙겨 다윗에게 보고를 드림으로 사울왕의 죽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이에 다윗과 그 일행은 사울왕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 동시에 아무 두려움 없이 여호와의 기름부은 바 된 왕을 쳐죽인 이 아말렉 소년의 오만방자함으로 인해 그 소년을 처단하게 된다. 기름부음 받은 자를 함부로 칼을 대서 죽인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 되었든 하나님 앞에서 그릇된 것이었다.

 

우리는 바로 이 장면이 상호 보충이라든지, 오버랩이 아니라 전혀 상충되고 있는 장면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결론은 무엇일까? 바로 이 아말렉 소년의 보고는 거짓 보고였던 것이다. 사무엘하의 장면처럼 사울은 자살했으며, 그의 병기 든 자도 자살했다. 그러나 인근에서 그 장면을 바라본 것으로 추정되는 이 아말렉 소년이 사울왕의 죽음을 보고 다윗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리고 영광을 얻기 위해 죽은 사울의 소지품을 벗겨서 다윗에게로 나아온 것이다. 분명 이 아말렉 소년은 사울왕을 자신이 죽였다는 소식을 다윗에게 전함으로써 축복을 받고, 미래를 보장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당히 다윗에게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보여드리며, 내가 죽음 앞에 당도한 사울의 마지막 목숨을 끊어버리고 이렇게 다윗에게 나아왔노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왠일. 안타깝게 하나님 앞에 정직한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듣고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리고 오히려 아말렉 소년의 경솔함을 책망하며 이제 네가 죽을 차례라며 처단케 된 것이다. 그러고보면 다윗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무려 10년을 사울의 칼날에 맘 편히 쉬지 못하고 도망다녔음에도 그 모든 압박과 괴로움도 승화되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정직한 양심과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반대로 허위보고를 통해 자신의 안정과 번영을 꿈꿨던 이 아말렉 소년은 기대했던 영광은 커녕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경솔히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자신의 목숨을 절단내고 말았다. 거짓말을 통해 영광을 바라다가 오히려 자기의 남은 생명까지도 도려내어 버렸다. 이런 비극이!

 

정직에 대한 가장 좋은 사례를 찾아야 한다라면 바로 이 장면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가장 일반적인 경우 한 가지를 재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좋은 의도를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종종 자신의 부정을 감추고 자신의 허물과 약점을 숨기고 그릇된 명예와 영광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아말렉 소년은 그릇된 명예를 얻고자 거짓말을 선택했다. 그는 외국인의 아들이었다. 여호와의 신앙에 무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용병인 그가 사울왕의 위치에 대해, 기름부음에 대해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별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이 다윗의 대적이었던 점을 이용해 다윗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허위보고를 결심했다. 황금보화, 한 자리 차지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는 죽은 사울의 머리에서 면류관을 벗겨냈을 것이다. 늘어진 사울의 양팔에서 팔찌를 빼냈을 것이다. 그는 기쁨과 곧 눈앞에 펼쳐질 영광을 상상하며 쉬지 않고 달려서 다윗에게 나아왔던 것이다. 자기의 죽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렇게 착각에 빠져 이렇게 기쁘게 뛰어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거짓에 눈 먼 인간의 어리석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아말렉 소년은 그렇다치고 나의 양심은 어떠한가. 사람이 하루에 8분마다 거짓말을 한다는 통계에 있어 그리스도인은 얼만큼 예외적인걸까. 우리는 더 큰 양심의 호소를 외면한 채 거짓을 말하고, 허위보고를 한 적이 없었던가.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는 정말 사람들 앞에서도 정직한가. 우리는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는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고백되어져야 할 것이 많다. 우리가 범죄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며, 더불어 사람을 향해 범죄하고 있는 것이다. 정직이란 것은 그저 하나님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직은 사람과도 관계가 된다.

 

아말렉 소년의 모습은 종종 내 양심을 짓누른다. 그동안 나는 사람들 앞에서도 너무나 정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실수투성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 못했으며, 내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해왔었다. 나는 무책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믿었고, 내가 보다 완전하다고 믿어줬다. 그러므로 나는 종종 사람들을 속여버린 꼴이 되었다. 또한, 나는 보다 나은 것들을 얻고 싶었기 때문에 정직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 후에는 깊은 자책이 나를 괴롭히곤 했다. 아차, 내가 또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하지 못했구나. 청교도 삶의 윤리에서 중요한 한 가지가 정직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청교도와는 전혀 달랐다. 매사에 나는 스스로를 속이며, 사람들을 속였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이기적이었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내가 거짓을 일삼았던 것에는 사랑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회는 컸다.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다 말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모든 순간에 완전하고 정직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함으로써 보다 정직하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런 정직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지 않았다. 무뎌진 양심으로 순간순간 정직에 대해 신중하게 대처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봤다. 어쩌면 나는 저 아말렉 소년처럼 허위보고를 하러 뛰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나는 죽음을 당할까? 그렇게 두려워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아말렉 소년이 아니다. 나의 근본은 그리스도인이며, 그래서 나는 소망이 있고, 내게 후회는 있지만 멸망은 없었다. 내게는 긍휼을 하나님이 계셨다. 나는 아말렉 소년과 같았던 내 모습에 대해 하나님께 자백할 것이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특권이자 동시에 내가 아말렉 소년과 같이 끝맺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정말 아말렉 소년과 같은 모습은 배우지 않는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매순간 순간 더욱 정직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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