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는 자에게 주시는 기다림_2012.02.2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6.)
(야고보서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Once upon a time! 곰과 호랑이가 살았다. 곰과 호랑이는 너무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하늘의 환인께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구했다. 환인은 100일 동안 동굴 밖을 나오지 말고 냅다 마늘만 먹으면 인간이 될 거라고 격려했다. 그래서 곰과 호랑이는 야호! 외치면서 100일 동안 먹을 마늘을 싸가지고 동굴로 들어갔다.(그 많은 마늘을
어디서 캤을까? 농사지었을까?) 동굴 속은 좁고 어둡고, 무엇보다 마늘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마, 마늘을 먹는 것보다 마늘 냄새가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 호랑이는
매일 눈물도 흘렸다. 눈이 너무 매웠기 때문에.ㅠ.ㅠ
결국 호랑이는
생각했다. ‘아우, 정말 사람이 되는게 대체 뭐길래. 내가 이 짓을 하고 있지? 그냥,
나 사람 되는 거 포기할래.’ 그러나 곰은 달랐다. 완죤
곰탱이었다. 환인도 깜짝 놀랬다. ‘아니, 쟤는 농담을 구분을 못해? 진짜 저러고 100일 동안 마늘 먹는 거야?’ 으이구, 미련 곰탱이~’ 그러나 환인은 그 곰탱이를 유심히 봤다. 그리고 100일이 된 날 환인은 어쩔 수 없이 곰탱이를 웅녀란 곰순이로
거듭나게 해주셨다. 그리고 그 인내심에 감탄한 환인은 자신의 아들 환웅에게 웅녀를 아내로 삼게 하셨다. 환웅은 울었다. ‘내가 마늘 냄새나는 곰순이랑… 아빠, 미워ㅠ.ㅠ’
우리 고조선
건국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마늘양념이 들어간 음식을 좋아하나 보다. 외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을 보면 얘기한다. ‘너네 마늘 냄새놔~~ 곰탱이 후손들’
말 그대로
동화에 불과한 건국신화이지만 유독 인내와 기다림을 통한 축복을 스토리의 뼈대로 삼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곰탱이라고
놀렸지만 난 간교한 호랑이에 불과했다. 100일은 너무나 고독했다. 분명한
목적의식과 불굴의 의지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내 후회하고, 되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곤 했다. 인내를 이루라는 명령처럼 좀이 쑤시는 명령도 없을 것이다.
인내라든지
기다린다는 것에 대해 자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뤄지는 세태 속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더욱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모할 정도로 꾸준히 ‘그리스도인들이여 기다림으로 자신을 구원하라.’라고 권면해주시는 것 같다. 왜 그토록 하나님은 기다림에 대해서
특별히 우리를 연단시키려고 하시는 걸까?
물론, 우리는 좋은 답변들을 떠올릴 수 있다. 기다림으로 좋은 것을 얻으며, 기다림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하며, 기다림을 통해 겸손해지며, 기다림을 통해 보다 나은 인격을 갖추게 된다라는. 그리스도인에게
기다림을 통한 배움은 가장 갚진 것이라고. 그러나 또, 우리는
대꾸할 수 있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기다림과 인내가 너무나 혹독하고 어렵다고 말이다. 좀 돌아봐 달라고, 빨리 좀 구원해달라고.
솔직히 하는
얘기지만 사실 오래 기다린다는 것은 더 많은 시험을 초래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 많은 곤란과 유혹과
위기들을 참아내고 버텨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자칫 기다리다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나타나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겠지만 누군가는 인내도 쓰고, 열매도 얻지 못하는 수가
있다.
우리는 요셉의
인내와 승리를 안다. 그러나 요셉이 어떤 시험을 받았는지도 안다. 그가
준수한 청년으로 애굽의 종살이를 해야 할 때,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과 시험이 왔다. 총리대신에 오르기까지 13년의 기다림과 인내 속에서 치명적인 유혹과
시험들, 신앙의 위기들이 요셉에게로 그 얼굴을 내밀었다. 요셉이
인내하고 승리해서 망정이지 그가 실패했더라면 그처럼 서글픈 인생이 또 어디 있었을까?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하나님은 기다리고 인내하게 하셔야만 했을까? 요셉이 그것을 통해서 완전해질 수도 있었지만
실패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므로 하나님은 요셉을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믿고, 기대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더 기다림을 통해 완전해지라고 요구하신다. 사실 인내심이란 것은 겸손을 배우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결과물이다. 동굴
속의 곰은 단순히 인내심이 뛰어난 것만은 아니었다. 곰은 순박했던 것이다. 자기 자존심이라든지. ‘아니, 내가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 법이다. 즉, 자아가 주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호랑이는 인내하다가 생각했다. ‘대체 내가 왜?’라고. 자신이
주가 되었다. 자아가 존중 받고, 존경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대우를 당할 이유가 없어.’라고 결론이 났던 것이다. 또, 의지도
부족했다. 정말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갈망이 없었다. 분명
인내가 실패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목적의식의 부족이며, 갈망의 부족이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는 것, 자아가 주가 아니라 순박함을 배우는 것. 그것이 인내하는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자질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내가 많이 기다리고, 인내하고 배워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여전히 내 삶의 목적의식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며, 세속에 더럽혀지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이란 정체성이나 삶의 윤리를 종종 흐릿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여전히 내가
겸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부단히 기다림에 대해 요구하시고 계시리라.
그렇게 보면
한편으론 더욱 두렵고 자신감이 없어지기도 한다. 한없이 모자란 내 모습에 대해 안타까워지면서도 투정을
부리게도 된다. 그 지독한 기다림의 고독과 밀려오는 위기와 위험들이 너무나 두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붙들어 주신다고 하셨다. 오히려
나를 더욱 기대하고 계시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저 곰순이를 더 배우고 싶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들을 그저 단순히 믿고 진득히 행하는 것. 믿음으로 그저 그 길을 걸을 줄 아는 것.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말하는 법. 자아의
우월감을 풀어 버리고, 자존심을 낮추는 것. 겸손을 배우는
것. 또, 호랑이의 말을 듣지 않는 것. ‘야야, 그만 둬. 정말 100일
동안 이 어두운 동굴에서 마늘을 먹고 굳이 인간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건 곰 같은 짓이야. 관둬! 인간이 되기 전에 마늘만 먹다가 죽겠다야!’ 그럴 때 말하는 방법. ‘나 곰 맞아. 곰 같은 짓 할꼬얌!’ 즉, 현실과 환경의 어두움이나 마늘 냄새를 개의치 않는 것. 그냥 그렇게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때까지 잠잠히 침묵하며 기다릴 줄 아는 것.
사람이 될 때까지. 100일이 채워질 때까지. 그냥
그렇게.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거울 앞의 내 모습이 곰이 아닌 곰순이 웅녀로 달라져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인내를 통해 겸손해져
있는 자신을. 인내를 통해 더 성숙하고 완전해진 자신을. 인내를
통해 더 탄탄해진 내공과 신앙의 근력들을.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목적하신 바를 이루고 계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