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녀는 순수하다_2012.03.1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2.)

 

( 3:5, 개역)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룻기의 매력은 시적이고,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와 더불어 분명하고 충분한 교리적 뼈대를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는 것일게다. 2장부터는 룻의 러브스토리가 싹트게 되며, 신앙의 비전을 따라간 룻의 정직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우리의 백마 타신 보아스 왕자님은 백마 타신 예수님의 정확한 모형이다. 모압여인이면서 이방여자로서 은혜와는 멀어져 있는 그녀가 믿음으로 보아스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 자체가 은혜에서 멀었던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잘 보여준다. 룻은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던가. 그녀는 이방여인이지만 믿음으로 다윗의 조모요, 그리스도의 직계 혈통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계보에 속하게 되었다. 믿음이란 것이 얼마나 큰 일을 이룰 수 있는가 깨닫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제 그녀의 러브스토리를 조금 감상해보자. 무엇보다 우리는 한때 결혼까지 했던 젊은 룻이란 여인의 순박함에 매료될 것이다. (좀 차갑게 표현하면 그녀는 과부이지만)

 

늙은 시모를 쫓아 낯선 이방의 땅 베들레헴으로 이주해온 모압여인. 남편까지 읽은 과부의 신세요, 늙은 시모를 모셔야 하는 처량함. 조금이라도 세상을 안다라면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울만 했다. 초라하고, 불쌍하고 자기 신세가 안타까웠을 것이다. 더구나 이방여인이기에 사람들의 숨은 천대와 무시는 더 클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절박한 환경이었다. 솔직히 나는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코.

 

그러나 룻은 말했다. 어머니 저로 밭으로 나가서 이삭을 줍게 허락해주세요. 누군가가 은혜를 베푼다면 제가 이삭을 주울 수 있을 거예요.’(2:2) 충격이다.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부두막에 앉아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여리지만 강인한 그녀의 순수한 삶에 대한 열정과 애착은 스스로를 밭으로 나가게 종용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순박한 여자였다.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초라하게 보이고, 보잘 것 없이 보여지든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믿음을 가지고 시어머니와 신앙의 땅으로 왔으며, 이제 베들레헴이 그녀가 정착하고 늙은 시모와 재기해야 할 땅이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특별히 모질고 독한 마음을 품은 것 같지도 않다. 그저 덤덤히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금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하나씩 해나가기로 했을 뿐이다. 그만큼 룻, 그녀는 순박하고 꿋꿋하고 겸손했다. 결국 그녀는 영악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세대가 주는 서글픔이 무엇일까? 우리가 너무 약았고, 영악해졌다는 사실이다. 철저한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 현실적인 비전에 대한 많은 비중,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양식. 똑똑하고 유능한가 아닌가의 판단, 보여지는 것에 대한 의미부여. 그러므로 늘 우리를 싸고 있는 위선의 포장. 최종 잃어버린 순수함과 순박함. 아마,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위선과 가식의 문제는 그 옛날 바리새인의 위선의 문제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기심에 대해 생각해보았는가. 그것 역시 마찬가지.

 

룻은 종용하며, 소박하며, 순박하고, 겸손하며, 꿋꿋한 여자였다. 나오미가 그녀에게 은혜를 입도록 돕기 위해 보아스의 곁에 머물도록 조언했다. 심지어 보아스가 근족이자 유력한 자로써 잃어버린 자기 기업을 되사서 무를 수 있는 사람임을 생각했을 때, 나오미는 적극적으로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에게 다가서야 될 것을 가르쳤다. 그때도 룻은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그 어느 날, 나오미는 룻에게 말했다. 오늘 밤 보아스가 눕는 자리를 보아둬서 그곳에 가서 함께 누우라고 말이다.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발라 깨끗이 단장을 한채로 그의 눕는 자리에 같이 누우라고 말이다. 그때도 룻은 순종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나오미의 요구는 룻에게 매우 곤란한 요구임이 틀림없었다. 결코 쉬운 요구는 아니었다. 룻은 모압여자였다. 이방여자이면서 동시에 한때 결혼해서 남편을 둔 유부녀였다. 현재는 남편과 사별하고 과부의 신세이다. 고작 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 밑바닥에 있는 처지였다. 모든 정황을 고려해볼 때 나오미의 요구는 자칫 일이 그릇될 경우 룻으로 하여금 심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방여인 주제에 부정을 시도한 죄로 몰릴 수 있고, 생계의 유일한 수단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맞아 죽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물론, 보아스의 룻에 대한 태도가 호의적이고 친절을 베풀었으며, 그가 기업을 무를 자격이 있음을 감안할 때 용기를 얻었겠지만 그렇다할찌라도 용기를 내기 쉽지는 않을만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녀는 여러 말이 필요 없이 그저 종용한 목소리로 단 한 마디를 내뱉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그녀의 종용함과 소박한 성품, 믿음이 반짝반짝 빛나지 않을 수 없는 한마디. 그렇게 그녀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며, 겸손하고 순박하게 살았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말했다. ‘이 성읍 사람들 모두가 너의 현숙함을 안다.’라고 말이다. 그녀는 빛나는 보석이었다. 또한, 보아스는 말한다. ‘네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젊은 남자를 찾아갈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3:10) 그러한 사실과 생활 속에 보여진 룻의 단아함은 모든 성읍사람들의 마음 적셨다.

 

분명, 룻은 성경에서 말하는 현숙한 여인의 가장 실제적인 모형일 것이다. 그녀가 이방여인이란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녀는 가장 순수한 성품과 고결함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순박함이 우리의 마음마저도 들뜨게 한다. 그리고 분명 우리 역시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룻의 소박하고 순박한 믿음과 겸손은 필요한 것임을. 그리스도인면서도 너무나 이기적이었고, 영악하고 계산적이었던 많은 모습들을 부끄럽게 한다. 위선의 많은 가면들을 불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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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vision, 비전 없는 과녁의 정중앙에 활을 꽂다_2012.03.1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1.)

 

( 1:11, 개역)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계속해서 룻기 1장에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삶의 윤리가 분명하게 대조되고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래의 일에 대해 두려워한다. 현재의 상태는 미래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다. 현재의 상태가 곤란하다면 우리는 거의 필연적으로 미래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엘리멜렉이 그러했다. 현재의 베들레헴의 닥친 흉년이라는 곤란이 계속해서 베들레헴에 머물렀을 때의 미래상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근심하던 그는 모압으로 가는 것이 미래에 대한 올바른 비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회사를 선택할 때, 배우자를 선택할 때 등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어떤 중대한 결정을 할 때 반드시 그것이 제시하는 미래의 가능성, 비전에 대해 심도 있게 살펴보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룻의 선택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다. 바로 그 점이 엘리멜렉과 룻의 삶의 윤리가 분명히 대조된다는 의미이다.

 

모압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한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돌이켜 베들레헴으로 복귀하려고 했다. 그것은 방향을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시키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나오미의 깊은 회개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큰 고통을 경험하며, 그들이 나아온 모압이 하나님 앞에 틀린 것임을 알았다. 어쩌면 나오미는 그것을 처음부터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완고했을 것이다.

 

막상 베들레헴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하고 났을 때, 나오미는 두 며느리가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함께 살아온 가족이기에 두 며느리도 함께 시어머니를 쫓아 베들레헴으로 가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나오미는 정작 그들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다한들 별다른 대책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나오미는 아직 젊은 두 며느리, 재기할 기회가 있는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비전을 찾아 헤어지는 것이 더 낫겠다는 권유를 하게 되었다. 분명, 그 마음이 쉴사이 없이 아팠을 것이다.

 

( 1:13, 개역)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나오미는 말했다. 너희들도 각자 너희 백성과 너희 신()에게로 돌아가라고. 나를 따라와봐야 너희 남편이 되어줄 아들들이 없다고. 나는 여기 모압으로 내려와서 이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모든 것을 잃고 초라하게 돌아가고 있다라고. , 나에겐 아무런 비전도 없으며, 그러므로 너희에게 비전을 줄 수도 없다고.

 

이는 얼마나 나오미가 낮아진 마음과 순결한 며느리에 대한 긍휼, 안타까움으로 권면해주는 진심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럼으로 해서 오르바는 나오미의 말을 수긍했다. 오르바는 결코 잘못된 며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룻보다 특별히 며느리로써 부족했다든지 순종적이지 않았다고 추측하려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비약일지 모른다. 다만, 오르바는 보다 현실적이었고, 현재의 비전에 대해 더 밝았다. 또한, 무엇보다 오르바는 여호와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오르바는 적어도 삶의 비전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는 시아버지 엘리멜렉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오르바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현실적인 비전을 앞세우는 삶의 윤리를 가졌는지 반성해볼 때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놀라운 룻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의 윤리를 거스려 NO VISION을 선택했다. 나오미는 늙었고, 그들의 가족은 신앙에서 실패했으며, 징계받았고 모든 것을 잃고 초라한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 어떤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보장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저 캄캄했다. 그러나 룻은 아무런 비전 없는 그 미래에 자신을 던졌다. 왜냐하면 여호와 신앙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오미가 말리려고 할 때 룻의 대답은 분명 이것이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어머니께서 죽어 장사되는 곳에 나 역시 장사될 것인데, 죽음이 아닌 다른 이유로 어머니와 이별한다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시길 원합니다.’

 

신앙에 실패한 엘리멜렉 가정에 이방신을 섬기던 이방여인이 시집을 와서 여호와의 신앙을 확신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어두운 미래에 자신의 삶을 던질 수 있었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사무엘과 같이 신앙으로 무장한 가정에서도 불신앙으로 죽임을 당하는 아들이 나왔던 것을 생각해볼 때, 룻의 신앙은 사막의 붉은 황무지에서 피어 오른 더 짙은 한 송이 장미였다. 정말 이것은 가능한 일이었던가.

 

그러므로 우리는 룻의 믿음과 신앙, 그의 삶의 윤리가 가져온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선택을 놓고 생각해볼 때 우리 삶의 윤리에서 차지하는 비전에 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분명 엘리멜렉과 룻을 함께 놓고 비교해보아야 할 것이다. 전적으로 다른 삶의 윤리를 지니 두 사람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화살을 쏘았는지 말이다.

 

엘리멜렉의 삶의 윤리는 그의 앞날에 대한 비전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현실적이고 육신적인 가치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두었다. 그러나 룻의 삶의 윤리는 그의 앞날의 비전을 선택함에 있어서 여호와의 신앙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두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는 우리 삶의 윤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한가지 되새겨야 할 교훈이 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미래 비전에 지나치게 비중을 둠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시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학교, 직장, 결혼, 가정 모든 삶의 중대한 영역에 있어서 우리는 너무 비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함으로 인해 엘리멜렉과 같은 그릇된 선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압으로 갔다. 우리는 룻과 같지 않았다. 보라,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갔지만, 룻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갔던 사람이었음을. 이제 우리의 비전 역시 신앙의 확신과 신앙의 비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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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간 목적지로 활을 쏘다_2012.03.0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0.)

 

( 1:1, 개역)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룻기 1장만 읽어보더라도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값지고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를 발견할 수 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 그 시기와 정황에 대한 언급은 구체적이지 않다. 그러나 나오미 가족이 이주를 결정할 정도였다면 그 흉년이 결코 쉬운 흉년은 아니었을 수 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나오미 가족들은 인내심이 부족했거나 사업가적 기질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현실적이고 육신적인 비전을 앞세우는 삶의 윤리를 지닌. 어쨌든 베들레헴의 흉년을 인해 그들은 모압으로 이주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모압족속은 롯의 후예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린 기억해야 된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불 가운데 구원을 얻은 인물로 대표적인 신앙의 실패자였다. 롯은 소돔.고모라가 멸망할 때 두 딸과 함께 탈출했고, 두 딸은 롯과의 근친상간을 통해 자손을 잇게 되었는데 그들이 모압족속이었던 것이다. , 나오미 일가가 이동한 모압지방은 하나님 앞에 그릇된 곳이었다.

 

모압에 내려간 나오미 일가는 그곳에서 두 아들 말론과 기룐에게 모압여인을 아내로 삼아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신앙의 신념과 지조를 버리는 무책임하고 불신앙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자식들에게 이방여인을 아내로 삼아줄 정도면 그 상황이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결코 엘리멜렉(나오미의 남편)이나 그 가족의 신앙심이 탄탄하지만은 않았으리라 추측케 된다. 그런 신앙의 그릇된 면을 생각해볼 때, 어쩌면 모압으로 이주한다는 결정자체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큰 흉년이나 기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잠시의 고난이 싫어 섣불리 이주를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코 엘리멜렉과 그 가족들에게는 신앙심이라든지, 믿음이라든지 그러한 고결한 가치는 중요한 의미부여가 되지 못했다. 한편, 모압으로 이주한 후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사망했다. 미뤄볼 때, 이는 분명 불신앙적인 삶의 윤리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교훈은 이것이다. 흉년은 고난이다. 고난의 때에 가장 큰 시험을 받는 그리스도인은 불신앙적인 그리스도인이며, 믿음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므로 고난은 믿음 있는 그리스도인의 시금석이다. 신앙의 흉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열매와 소득이 없으며, 만족과 기쁨이 없이 그저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근심과 갈등으로 맞물리는 시기가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흉년이 올 때 종종 모압으로 이주하게 된다. , 고난을 피해 안식을 찾아 자신이 있어야 할 신앙의 땅을 버리고 불신앙의 땅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것이 실수가 된다. 삶의 암초에 걸려드는 신호탄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불신앙의 땅은 어디일까? 현재의 고난을 피하기 위해 계획하는 모든 수단과 방법의 처소이다.

 

어찌보면 서글픈 얘기일테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피해가야 할 벽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장애물이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시험이며, 우리 믿음의 시금석이며, 최종 우리 믿음의 내공이 견고해지는 기회이자 훈련이다. 그것을 피해가는 그리스도인들마다 또 다른 시련을 만난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겪는 개인적인 안타까움의 한 모습일 것이다. 자신에게 실망하는 그 어떤 것.

 

신앙의 흉년을 만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은 자기 수단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믿음의 표지이다. 그렇지 않고는 자기 수단과 방법대로 모압으로 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멜렉은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지 않았으며, 자기 수단과 방법대로 흉년을 피하기 위해 모압으로 가기로 결정해서 행동에 옮겨버렸다. 그것이 불신앙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는 종종 자기 수단과 방법을 버려야 된다는 가르침을 받는데, 이 의미가 곧, 그저 믿음으로 기다리라는 것이다. 인내야 말로 자기 수단과 방법을 버렸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모압으로 이주한 엘리멜렉이 자기 수단과 방법을 의지함으로써 실패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오래지 않아 베들레헴의 흉년이 회복이 되었다는 기록 때문이다.

 

( 1:6, 개역)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베들레헴의 흉년은 영원한 흉년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곳은 신앙의 땅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땅에 임하는 흉년은 지독할 수는 있어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권고하신다. 우리는 것을 믿어야 한다. 결국 엘리멜렉 일가는 불신앙과 자기 수단.방법을 의지함으로 생명을 잃어버리고, 풍족히 나가서 비어 돌아오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고난을 피하려다 더 큰 시련을 만나는 분명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이 흉년의 때를 기다렸더라면 모든 것이 순조로워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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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림 받지 않는 신앙_2012.03.0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9.)

 

( 21:25, 개역)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는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기록이다. 사사는 왕권이 없던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하고 다스리던 리더들이다. 평시에는 재판을 주관하기도 하며, 행정권을 갖고 있었다. 전쟁이 나면 군대를 이끌고 전장을 진두지휘하는 지휘관의 역할도 했다. 대개의 다른 나라들은 보다 일찍이 왕권이 수립되어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통치의 일반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췄던 것에 반해 이스라엘이 초대왕 사울을 중심으로 왕권수립을 하는데는 다소 늦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사무엘은 일찍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유능한 사사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사제도가 아닌 왕권수립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하나님이나 사무엘 편 모두에게 서글픈 것이었다.

 

사사기서를 읽으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표현이 4번에 걸쳐 반복되고 있다. 특별히 본문으로 채택한 동일한 내용의 말씀은 사사기서의 가장 마지막 절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 사사제도를 통한 통치와 다스림이 가지는 어떤 한계와 비효율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왕이 없다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조건이 매우 불리한 상황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마치 단팥 빠진 찐빵처럼. 그러나 과연 사사제도는 나약한 제도였을까? 왕권의 부재는 정치적인 결함에 해당됐을까?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보여질 수 있다. 사사기 5 16-17절은 이와 같기 때문이다.

 

( 2:16-17, 개역) [16]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이미 사사기 초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들의 통치와 지도력에 순종적이지 않았다. 그 의미는 객관적으로는 사사권의 미비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본질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망나니 같은 신앙의 습관이 더 큰 원인이었다. 그들은 다스림을 받으려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기 고집과 생각, 자기의 주관과 욕망대로 하고자 했다. 그래서 사사권을 무시했으며, 사사제도에 회의를 느꼈다. 그것이 나아가 강력한 왕권수립을 요구하는 욕구불만의 상태까지 이어진 것이다.

 

특별히 사사기의 말미로 다가서면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각기 자기 소견대로 행했다는 말씀이 연이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 시작은 17장에서 부터이다. 그리고 18, 19, 마지막 21. 즉 사사기의 종언에 치달으면서 사사권의 사실상 거의 붕괴 및 왕권에 대한 백성들의 어떤 갈망이 감당할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 이 말씀은 사실상 왕권에 대한 요구로 말미암아 사사제도에 대해서는 거의 무능하고 붕괴된 것으로 간주해버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한 욕망을, 그 원인을 왕권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그 탓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왜 굳이 왕이 없다고 해서 그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해야만 하는가? 그들에게는 사사들이 있었다. 사사들은 백성을 훈육하고 다스리며, 재판하고 전쟁 때는 군대장관이 되었다. , 모든 명령권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스림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타락한 습관은 바로 이 사사제도를 사실상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므로 그것이 반복되어 가면서 차츰 이스라엘은 이 모든 무질서가 바로 왕권이 수립되지 않은 것으로 탓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는 이것이 왕권의 부재가 낳은 병폐처럼 보여지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스림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모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한 습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이 제기하는 중요한 이슈가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사사제도가 아닌 보다 강력한 왕권통치를 바랐다. 그것이 모든 무질서와 기준이 모호한 제도들의 정비와 정립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사사제도가 무너진 것은 이스라엘의 교만과 순종하지 않는 습관에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비록 왕권이 수립되더라도 그것이 그들이 꿈꾸는 제도확립을 완성시켜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결국 왕권에도 굴복하지 않을 사람들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사사가 되었든 왕이 되었든 다스림을 받지 않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더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왕권이 수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들이 표면적으로는 사사들이 통치하는 제도 아래에 있었지만 이미 그들은 왕권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하고 불변하시는 왕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왜 사사제도가 필요했을까? 그것은 이미 왕이신 하나님께서 왕권을 갖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다스리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사제도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과 뜻, 이스라엘을 다스려가는 수단과 방편으로 사사들을 그 수종자로 삼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권 아래에 겸손히 다스림을 받되, 그 다스림을 수종해서 수행하는 사사들을 따랐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사사제도를 무시하고, 불복종하면서 왕권수립을 요구하고 있는 이 모습은? , 그들은 왕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들의 주권자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고작 구한다는 것이 그들의 육신적인 제도를 수립하고 통치할 인간의 왕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표면으로는 왕권의 부재로 인해 고통 받는 것처럼 울부짖는 이스라엘의 가증한 얼굴 뒤에 가려진 엄숙하고 섬뜩한 불신앙의 실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놀라야만 한다. 참된 왕을 쫓아버리고, 허수아비 왕을 구하는 구부러진 신앙이 실존하고 있었다. 그 헛된 염원이 사사기의 말미로 가면서 강하게 충동되기 시작했고, 결국 사사제도는 종언을 맞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갈망대로 인간의 왕 사울왕을 세워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사제도를 폐하는 이스라엘의 선택과 욕망의 거센 항의는 왕이신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버리는 이스라엘의 타락한 신앙의 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결코 다스림을 받지 않는 신앙. 망나니 신앙.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부족한 이스라엘을 시험할 도구로 40년이란 긴 세월을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며, 블레셋으로부터 나라를 위기에 빠트리고 백성을 학대하는 사울왕을 주심으로 그들의 배은망덕한 신앙과 위선에 징계를 주셨던 것이다.

 

누가 그리스도인이였던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섬기고 따르며, 순종하는 무리. 그러므로 우리의 왕은 반드시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우리는 그 왕 되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순응하고 있을까? 우리는 사사제도에 대해 격하시키고 있진 않을까? 우리는 과연,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솔직해져 보자 얼마나 많은 순간과 상황 속에서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을 내쫓아버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내시는 방편과 제도들에 대해 불응하면서 불만하고, 무시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보다 명확하고 유능한 지도력을 보여달라고 구했던지. 우리의 삶의 세밀한 곳에서 자행되어 온 하나님 무시하기.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환경과 제도들 안에서 실행되어져 온 하나님의 섭리를 망각한 채 하나님을 내몰아버리고 있었던지.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림을 역사해달라고 거짓 기도와 고백을 해왔던지. 때때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조차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는 상황들이 많았던지. 그 위선에 놀라게 된다. 정말 순종할 마음, 정말 고난을 받을 마음이었던가 말이다.

 

사사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왕권의 부재가 진정한 문제가 아니다. 오직 단 하나의 근본적이고 영원한 문제는 다스림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오만한 신앙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 환경과 내 삶의 섭리들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부재이기 때문에 비롯된 문제들이 아니다. 오직 모든 삶의 윤리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고 배척하고, 오히려 고난을 외면하고 이기적이고 싶어하는 우리의 완고한 신앙의 문제이다. 결국 우리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얼마나 서글픈 실제인가. 이스라엘의 잘 가공된 거짓 변명을 다시금 되뇌어 본다. 사실이 아니었던 나의 서글픈 변명을 돌이켜 본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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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당신에게 주는 위로_2012.02.2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8.)

 

( 16:22, 개역)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삼손은 특별한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돌발적이고 예외적인 인물이다. 사실 성경의 인물중 삼손이야 말로 가장 괴짜 같은 면모를 보여주며 또, 일반적인 영웅담이나 신화적인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다.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존재란 것도 알았다. 삼손은 기질적으로 신중한 성격이 아니어서 그렇지 삼손 역시 들릴라로 인해 자신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들릴라가 끊임없이 삼손의 힘의 근원에 대해 캐묻고, 거짓 답변을 들었을 때 그 거짓 답변을 따라 올무를 놓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ㅋㅋ 우리의 무식하게 힘만 좋고 우준하기 짝이 없는 삼손은 들릴라의 치마폭에 쌓여 침을 흘리고 있었다. 남자들이란…(?)

 

특별한 성령의 체험, 넘치는 스테미너. 즉흥적이고 낙천적인 성격. 성경인물 중에 삼손처럼 속 편한 사람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정말이지 삼손의 모습은 충동적이고, 돌발적이면서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다. 앞에 가로 막힌 게 없이 그냥 행동하고 싶은대로 움직이는 행동파였다. 그러나 역시 그런 미숙한 정신은 두말 할 것 없이 삼손의 자유로운 행보에 착고를 채이게 만들었다.

 

들릴라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어느날 그는 결코 내뱉어서는 안 될 진리를 폭로해버린 것이다. 그 근엄하고 웅장하며, 순전한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을 까발려버렸다. 자신에게로부터 비롯된 것도 아닌 하나님께 그 근원을 두고 있는 신적인 능력과 힘에 대해 공개했다. 삼손이 이런 위험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다면 적어도 들릴라의 치마폭에서 빨리 일어났어야 했다. 누구나 시험은 온다. 누구나 허물이 야기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재빨리 거기서 돌이켜 나와야 된다. 혹 그것이 언젠가는 다시 반복될 실수가 될지언정. 당장당장. 그 순간순간 벗어나고 돌이키는 습관과 양심을 길러야 한다. 아무튼 삼손은 위기 가운데 자신을 노출시키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들릴라의 치마폭에 누워있었다. 심령이 쫓기고 상하면서까지 말이다. , 그것이 특별한 성령의 체험을 하면서도 좀처럼 육신적인 자아의 기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삼손의 매우 독특한 면모였다.

 

결국 삼손은 머리털이 잘리우고, 무기력해진 그는 두 눈이 빠지게 된다. 그는 생전 처음 무기력이란 것을 경험했다. 자신을 사로잡는 한 두 사람을 어떻게 제어할 수가 없었다. 생애 속에서 단 한번도 겪어보지 않은 심히 비둔해진 몸의 무게와 피로를 느꼈을 것이다. 분명 한 때는 나귀 턱 뼈로 천명을 때려 잡았는데! 그러므로 삼손은 비로소 그의 무한한 힘과 능력이 참으로 전능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음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내 그는 깊은 착고에 매여 맷돌을 돌리고 있었다. 예전엔 별 것 아닌 노동이었지만, 이제 그에게는 심히 고달픈 노동이었다. 그 깊은 낙망과 죄책감과 후회와 눈물, 그리고 심한 육체적인 노동의 버거움.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배신했다는 처절한 회개. 그때보다 더 삼손이 하나님 앞에 정직해져 본 적은 없었다. 그때보다 더 삼손이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통찰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그곳에서 삼손은 회개에 승리했으며, 회개로 말미암아 재기했다.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 신앙의 재기는 언제든지 뿌리 깊은 회개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그것은 정말 회개해 본 사람, 정말 정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양심을 쏟아부어 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삼손의 머리칼이 여전히 자라게 해주셨으며, 특별히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났다는 이 한 구절의 성경을 기록해주셨다. 가히 의미심장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는 것은 자연적인 섭리이며, 불가항력적인 생리현상이다. 동시에 삼손의 머리털이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을 상징한다는 것으로부터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결코 마르지 않는 것임을 암시해준다.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삼손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삼손의 머리털은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자랐더라도 성경에서 자랐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생리적인 현상을 뒤집어 머리털이 자라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랐다는 것은 또한, 삼손이 진심으로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승리를 하였다는 의미의 반증이며, 그가 재기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렇게 삼손은 회복되었고, 그의 마지막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해질 수만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양심으로 부어질 줄 아는 심령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는 결코 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멸망 받을 죄인들이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영원한 은혜 안에 소유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완전함을 덧입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어디까지나 그 완전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덧입히워진 것이지 우리가 완전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가 인박힌 불완전한 몸으로 말미암아 시험을 받고, 시험을 초래하고 있다. 부활의 그날 이 죄의 몸을 벗는다. 진정으로 완전한 완성을 경험한다. 지금은 불안하다. 우리는 연약하며, 우리는 범죄하고 좌절한다. 우리는 때때로 삼손처럼 들릴라의 치마폭에 오래 머무르기까지 한다. 우리는 시험을 초래할 줄 알면서도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는 문제는 너무나 중요한 의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져야만 한다. 분명하게 고백하며, 숨기고 싶어하지 않으며, 낱낱의 허물을 고하며, 그 심령을 쏟아야 한다. 실패한 과오들, 거짓들, 위선들, 불경건한 것들. 한 명의 참된 성도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는 모든 양심의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받으신다. 우리의 정직함에 하나님은 흡족해 하시며, 만족하신다. 바로 다윗이 그러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간음하고 살인이나 저지른 저 흉악한 전과2범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해주셨던 것이다. 그 흉악한 범죄보다 하나님은 더 크시고, 하나님의 용서와 정결케 하시는 능력, 은혜의 힘은 더 무한히 크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죄가 크다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질 않으신다. 다만, 정직해지지 않는 것. 회개하지 않는 악한 마음이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실 뿐이다. ‘내가 너를 알건마는! 너는 네 자신을 인정하고 정직해지지 않다니!’ 그렇게 노여워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여, 분명히 깨닫자! 우리가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진지해질 때, 정직하고 한없이 순전함으로 고백되어질 때 결코 우리의 머리털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왜 그렇게 다 끝난 것처럼 낙심하고 포기해버리려 할까! 우리 능력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긍휼은 마르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결코 마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남겨주신 저 짧은 한 말씀이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얼마나 값진 진리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증거인지 감동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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