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간 목적지로 활을 쏘다_2012.03.0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0.)

 

( 1:1, 개역)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룻기 1장만 읽어보더라도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값지고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를 발견할 수 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 그 시기와 정황에 대한 언급은 구체적이지 않다. 그러나 나오미 가족이 이주를 결정할 정도였다면 그 흉년이 결코 쉬운 흉년은 아니었을 수 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나오미 가족들은 인내심이 부족했거나 사업가적 기질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현실적이고 육신적인 비전을 앞세우는 삶의 윤리를 지닌. 어쨌든 베들레헴의 흉년을 인해 그들은 모압으로 이주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모압족속은 롯의 후예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린 기억해야 된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불 가운데 구원을 얻은 인물로 대표적인 신앙의 실패자였다. 롯은 소돔.고모라가 멸망할 때 두 딸과 함께 탈출했고, 두 딸은 롯과의 근친상간을 통해 자손을 잇게 되었는데 그들이 모압족속이었던 것이다. , 나오미 일가가 이동한 모압지방은 하나님 앞에 그릇된 곳이었다.

 

모압에 내려간 나오미 일가는 그곳에서 두 아들 말론과 기룐에게 모압여인을 아내로 삼아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신앙의 신념과 지조를 버리는 무책임하고 불신앙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자식들에게 이방여인을 아내로 삼아줄 정도면 그 상황이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결코 엘리멜렉(나오미의 남편)이나 그 가족의 신앙심이 탄탄하지만은 않았으리라 추측케 된다. 그런 신앙의 그릇된 면을 생각해볼 때, 어쩌면 모압으로 이주한다는 결정자체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큰 흉년이나 기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잠시의 고난이 싫어 섣불리 이주를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코 엘리멜렉과 그 가족들에게는 신앙심이라든지, 믿음이라든지 그러한 고결한 가치는 중요한 의미부여가 되지 못했다. 한편, 모압으로 이주한 후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사망했다. 미뤄볼 때, 이는 분명 불신앙적인 삶의 윤리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교훈은 이것이다. 흉년은 고난이다. 고난의 때에 가장 큰 시험을 받는 그리스도인은 불신앙적인 그리스도인이며, 믿음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므로 고난은 믿음 있는 그리스도인의 시금석이다. 신앙의 흉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열매와 소득이 없으며, 만족과 기쁨이 없이 그저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근심과 갈등으로 맞물리는 시기가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흉년이 올 때 종종 모압으로 이주하게 된다. , 고난을 피해 안식을 찾아 자신이 있어야 할 신앙의 땅을 버리고 불신앙의 땅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것이 실수가 된다. 삶의 암초에 걸려드는 신호탄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불신앙의 땅은 어디일까? 현재의 고난을 피하기 위해 계획하는 모든 수단과 방법의 처소이다.

 

어찌보면 서글픈 얘기일테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피해가야 할 벽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장애물이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시험이며, 우리 믿음의 시금석이며, 최종 우리 믿음의 내공이 견고해지는 기회이자 훈련이다. 그것을 피해가는 그리스도인들마다 또 다른 시련을 만난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겪는 개인적인 안타까움의 한 모습일 것이다. 자신에게 실망하는 그 어떤 것.

 

신앙의 흉년을 만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은 자기 수단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믿음의 표지이다. 그렇지 않고는 자기 수단과 방법대로 모압으로 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멜렉은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지 않았으며, 자기 수단과 방법대로 흉년을 피하기 위해 모압으로 가기로 결정해서 행동에 옮겨버렸다. 그것이 불신앙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는 종종 자기 수단과 방법을 버려야 된다는 가르침을 받는데, 이 의미가 곧, 그저 믿음으로 기다리라는 것이다. 인내야 말로 자기 수단과 방법을 버렸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모압으로 이주한 엘리멜렉이 자기 수단과 방법을 의지함으로써 실패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오래지 않아 베들레헴의 흉년이 회복이 되었다는 기록 때문이다.

 

( 1:6, 개역)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베들레헴의 흉년은 영원한 흉년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곳은 신앙의 땅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땅에 임하는 흉년은 지독할 수는 있어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권고하신다. 우리는 것을 믿어야 한다. 결국 엘리멜렉 일가는 불신앙과 자기 수단.방법을 의지함으로 생명을 잃어버리고, 풍족히 나가서 비어 돌아오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고난을 피하려다 더 큰 시련을 만나는 분명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이 흉년의 때를 기다렸더라면 모든 것이 순조로워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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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림 받지 않는 신앙_2012.03.0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9.)

 

( 21:25, 개역)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는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기록이다. 사사는 왕권이 없던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하고 다스리던 리더들이다. 평시에는 재판을 주관하기도 하며, 행정권을 갖고 있었다. 전쟁이 나면 군대를 이끌고 전장을 진두지휘하는 지휘관의 역할도 했다. 대개의 다른 나라들은 보다 일찍이 왕권이 수립되어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통치의 일반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췄던 것에 반해 이스라엘이 초대왕 사울을 중심으로 왕권수립을 하는데는 다소 늦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사무엘은 일찍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유능한 사사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사제도가 아닌 왕권수립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하나님이나 사무엘 편 모두에게 서글픈 것이었다.

 

사사기서를 읽으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표현이 4번에 걸쳐 반복되고 있다. 특별히 본문으로 채택한 동일한 내용의 말씀은 사사기서의 가장 마지막 절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 사사제도를 통한 통치와 다스림이 가지는 어떤 한계와 비효율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왕이 없다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조건이 매우 불리한 상황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마치 단팥 빠진 찐빵처럼. 그러나 과연 사사제도는 나약한 제도였을까? 왕권의 부재는 정치적인 결함에 해당됐을까?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보여질 수 있다. 사사기 5 16-17절은 이와 같기 때문이다.

 

( 2:16-17, 개역) [16]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이미 사사기 초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들의 통치와 지도력에 순종적이지 않았다. 그 의미는 객관적으로는 사사권의 미비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본질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망나니 같은 신앙의 습관이 더 큰 원인이었다. 그들은 다스림을 받으려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기 고집과 생각, 자기의 주관과 욕망대로 하고자 했다. 그래서 사사권을 무시했으며, 사사제도에 회의를 느꼈다. 그것이 나아가 강력한 왕권수립을 요구하는 욕구불만의 상태까지 이어진 것이다.

 

특별히 사사기의 말미로 다가서면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각기 자기 소견대로 행했다는 말씀이 연이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 시작은 17장에서 부터이다. 그리고 18, 19, 마지막 21. 즉 사사기의 종언에 치달으면서 사사권의 사실상 거의 붕괴 및 왕권에 대한 백성들의 어떤 갈망이 감당할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 이 말씀은 사실상 왕권에 대한 요구로 말미암아 사사제도에 대해서는 거의 무능하고 붕괴된 것으로 간주해버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한 욕망을, 그 원인을 왕권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그 탓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왜 굳이 왕이 없다고 해서 그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해야만 하는가? 그들에게는 사사들이 있었다. 사사들은 백성을 훈육하고 다스리며, 재판하고 전쟁 때는 군대장관이 되었다. , 모든 명령권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스림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타락한 습관은 바로 이 사사제도를 사실상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므로 그것이 반복되어 가면서 차츰 이스라엘은 이 모든 무질서가 바로 왕권이 수립되지 않은 것으로 탓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는 이것이 왕권의 부재가 낳은 병폐처럼 보여지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스림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모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한 습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이 제기하는 중요한 이슈가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사사제도가 아닌 보다 강력한 왕권통치를 바랐다. 그것이 모든 무질서와 기준이 모호한 제도들의 정비와 정립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사사제도가 무너진 것은 이스라엘의 교만과 순종하지 않는 습관에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비록 왕권이 수립되더라도 그것이 그들이 꿈꾸는 제도확립을 완성시켜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결국 왕권에도 굴복하지 않을 사람들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사사가 되었든 왕이 되었든 다스림을 받지 않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더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왕권이 수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들이 표면적으로는 사사들이 통치하는 제도 아래에 있었지만 이미 그들은 왕권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하고 불변하시는 왕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왜 사사제도가 필요했을까? 그것은 이미 왕이신 하나님께서 왕권을 갖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다스리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사제도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과 뜻, 이스라엘을 다스려가는 수단과 방편으로 사사들을 그 수종자로 삼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권 아래에 겸손히 다스림을 받되, 그 다스림을 수종해서 수행하는 사사들을 따랐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사사제도를 무시하고, 불복종하면서 왕권수립을 요구하고 있는 이 모습은? , 그들은 왕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들의 주권자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고작 구한다는 것이 그들의 육신적인 제도를 수립하고 통치할 인간의 왕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표면으로는 왕권의 부재로 인해 고통 받는 것처럼 울부짖는 이스라엘의 가증한 얼굴 뒤에 가려진 엄숙하고 섬뜩한 불신앙의 실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놀라야만 한다. 참된 왕을 쫓아버리고, 허수아비 왕을 구하는 구부러진 신앙이 실존하고 있었다. 그 헛된 염원이 사사기의 말미로 가면서 강하게 충동되기 시작했고, 결국 사사제도는 종언을 맞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갈망대로 인간의 왕 사울왕을 세워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사제도를 폐하는 이스라엘의 선택과 욕망의 거센 항의는 왕이신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버리는 이스라엘의 타락한 신앙의 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결코 다스림을 받지 않는 신앙. 망나니 신앙.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부족한 이스라엘을 시험할 도구로 40년이란 긴 세월을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며, 블레셋으로부터 나라를 위기에 빠트리고 백성을 학대하는 사울왕을 주심으로 그들의 배은망덕한 신앙과 위선에 징계를 주셨던 것이다.

 

누가 그리스도인이였던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섬기고 따르며, 순종하는 무리. 그러므로 우리의 왕은 반드시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우리는 그 왕 되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순응하고 있을까? 우리는 사사제도에 대해 격하시키고 있진 않을까? 우리는 과연,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솔직해져 보자 얼마나 많은 순간과 상황 속에서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을 내쫓아버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내시는 방편과 제도들에 대해 불응하면서 불만하고, 무시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보다 명확하고 유능한 지도력을 보여달라고 구했던지. 우리의 삶의 세밀한 곳에서 자행되어 온 하나님 무시하기.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환경과 제도들 안에서 실행되어져 온 하나님의 섭리를 망각한 채 하나님을 내몰아버리고 있었던지.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림을 역사해달라고 거짓 기도와 고백을 해왔던지. 때때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조차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는 상황들이 많았던지. 그 위선에 놀라게 된다. 정말 순종할 마음, 정말 고난을 받을 마음이었던가 말이다.

 

사사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왕권의 부재가 진정한 문제가 아니다. 오직 단 하나의 근본적이고 영원한 문제는 다스림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오만한 신앙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 환경과 내 삶의 섭리들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부재이기 때문에 비롯된 문제들이 아니다. 오직 모든 삶의 윤리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고 배척하고, 오히려 고난을 외면하고 이기적이고 싶어하는 우리의 완고한 신앙의 문제이다. 결국 우리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얼마나 서글픈 실제인가. 이스라엘의 잘 가공된 거짓 변명을 다시금 되뇌어 본다. 사실이 아니었던 나의 서글픈 변명을 돌이켜 본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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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당신에게 주는 위로_2012.02.2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8.)

 

( 16:22, 개역)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삼손은 특별한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돌발적이고 예외적인 인물이다. 사실 성경의 인물중 삼손이야 말로 가장 괴짜 같은 면모를 보여주며 또, 일반적인 영웅담이나 신화적인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다.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존재란 것도 알았다. 삼손은 기질적으로 신중한 성격이 아니어서 그렇지 삼손 역시 들릴라로 인해 자신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들릴라가 끊임없이 삼손의 힘의 근원에 대해 캐묻고, 거짓 답변을 들었을 때 그 거짓 답변을 따라 올무를 놓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ㅋㅋ 우리의 무식하게 힘만 좋고 우준하기 짝이 없는 삼손은 들릴라의 치마폭에 쌓여 침을 흘리고 있었다. 남자들이란…(?)

 

특별한 성령의 체험, 넘치는 스테미너. 즉흥적이고 낙천적인 성격. 성경인물 중에 삼손처럼 속 편한 사람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정말이지 삼손의 모습은 충동적이고, 돌발적이면서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다. 앞에 가로 막힌 게 없이 그냥 행동하고 싶은대로 움직이는 행동파였다. 그러나 역시 그런 미숙한 정신은 두말 할 것 없이 삼손의 자유로운 행보에 착고를 채이게 만들었다.

 

들릴라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어느날 그는 결코 내뱉어서는 안 될 진리를 폭로해버린 것이다. 그 근엄하고 웅장하며, 순전한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을 까발려버렸다. 자신에게로부터 비롯된 것도 아닌 하나님께 그 근원을 두고 있는 신적인 능력과 힘에 대해 공개했다. 삼손이 이런 위험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다면 적어도 들릴라의 치마폭에서 빨리 일어났어야 했다. 누구나 시험은 온다. 누구나 허물이 야기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재빨리 거기서 돌이켜 나와야 된다. 혹 그것이 언젠가는 다시 반복될 실수가 될지언정. 당장당장. 그 순간순간 벗어나고 돌이키는 습관과 양심을 길러야 한다. 아무튼 삼손은 위기 가운데 자신을 노출시키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들릴라의 치마폭에 누워있었다. 심령이 쫓기고 상하면서까지 말이다. , 그것이 특별한 성령의 체험을 하면서도 좀처럼 육신적인 자아의 기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삼손의 매우 독특한 면모였다.

 

결국 삼손은 머리털이 잘리우고, 무기력해진 그는 두 눈이 빠지게 된다. 그는 생전 처음 무기력이란 것을 경험했다. 자신을 사로잡는 한 두 사람을 어떻게 제어할 수가 없었다. 생애 속에서 단 한번도 겪어보지 않은 심히 비둔해진 몸의 무게와 피로를 느꼈을 것이다. 분명 한 때는 나귀 턱 뼈로 천명을 때려 잡았는데! 그러므로 삼손은 비로소 그의 무한한 힘과 능력이 참으로 전능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음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내 그는 깊은 착고에 매여 맷돌을 돌리고 있었다. 예전엔 별 것 아닌 노동이었지만, 이제 그에게는 심히 고달픈 노동이었다. 그 깊은 낙망과 죄책감과 후회와 눈물, 그리고 심한 육체적인 노동의 버거움.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배신했다는 처절한 회개. 그때보다 더 삼손이 하나님 앞에 정직해져 본 적은 없었다. 그때보다 더 삼손이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통찰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그곳에서 삼손은 회개에 승리했으며, 회개로 말미암아 재기했다.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 신앙의 재기는 언제든지 뿌리 깊은 회개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그것은 정말 회개해 본 사람, 정말 정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양심을 쏟아부어 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삼손의 머리칼이 여전히 자라게 해주셨으며, 특별히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났다는 이 한 구절의 성경을 기록해주셨다. 가히 의미심장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는 것은 자연적인 섭리이며, 불가항력적인 생리현상이다. 동시에 삼손의 머리털이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을 상징한다는 것으로부터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결코 마르지 않는 것임을 암시해준다.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삼손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삼손의 머리털은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자랐더라도 성경에서 자랐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생리적인 현상을 뒤집어 머리털이 자라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랐다는 것은 또한, 삼손이 진심으로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승리를 하였다는 의미의 반증이며, 그가 재기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렇게 삼손은 회복되었고, 그의 마지막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해질 수만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양심으로 부어질 줄 아는 심령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는 결코 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멸망 받을 죄인들이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영원한 은혜 안에 소유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완전함을 덧입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어디까지나 그 완전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덧입히워진 것이지 우리가 완전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가 인박힌 불완전한 몸으로 말미암아 시험을 받고, 시험을 초래하고 있다. 부활의 그날 이 죄의 몸을 벗는다. 진정으로 완전한 완성을 경험한다. 지금은 불안하다. 우리는 연약하며, 우리는 범죄하고 좌절한다. 우리는 때때로 삼손처럼 들릴라의 치마폭에 오래 머무르기까지 한다. 우리는 시험을 초래할 줄 알면서도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는 문제는 너무나 중요한 의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져야만 한다. 분명하게 고백하며, 숨기고 싶어하지 않으며, 낱낱의 허물을 고하며, 그 심령을 쏟아야 한다. 실패한 과오들, 거짓들, 위선들, 불경건한 것들. 한 명의 참된 성도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는 모든 양심의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받으신다. 우리의 정직함에 하나님은 흡족해 하시며, 만족하신다. 바로 다윗이 그러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간음하고 살인이나 저지른 저 흉악한 전과2범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해주셨던 것이다. 그 흉악한 범죄보다 하나님은 더 크시고, 하나님의 용서와 정결케 하시는 능력, 은혜의 힘은 더 무한히 크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죄가 크다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질 않으신다. 다만, 정직해지지 않는 것. 회개하지 않는 악한 마음이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실 뿐이다. ‘내가 너를 알건마는! 너는 네 자신을 인정하고 정직해지지 않다니!’ 그렇게 노여워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여, 분명히 깨닫자! 우리가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진지해질 때, 정직하고 한없이 순전함으로 고백되어질 때 결코 우리의 머리털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왜 그렇게 다 끝난 것처럼 낙심하고 포기해버리려 할까! 우리 능력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긍휼은 마르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결코 마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남겨주신 저 짧은 한 말씀이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얼마나 값진 진리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증거인지 감동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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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다림_2012.02.2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7.)

 

( 40:1-3)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다윗은 정말 많이 기다려본 사람이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덞번째 말째 아들로 태어나 시골의 촌뜨기 목동의 때에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을 입었다. 그리고 그가 위대한 다윗왕이 되기까지는 오랜 기다림과 훈련과 연단의 시간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것만 봐도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오랜 시간을 인내 가운데 기다렸던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많이 기다린다는 것은 사실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것이며, 가장 필요한 훈련 중에 하나이다. 기다림이 부족한 채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고,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점점 더 인내하고 기다리는 내공을 배울 수 없다. 부족한 기다림은 부족한 완성을 의미한다. 사울은 기다려 본 사람이 아니다. 그는 특별한 훈련의 시간이 없이 기름부음을 받고 이내 왕좌에 올랐다. 그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워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는 처음부터 기다려야 하는 고비가 올 때 실패했다. 사무엘이 이레를 기다리고 할 때 실패했다.

 

기다림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기다림은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의 시간이다. 또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난하게 만들어준다. 자신을 한없이 낮아지게 만들어준다. 욥은 고난의 시간을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아무도 다윗과 같은 기다림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다. 시편에서 보여지는 다윗의 고독과 절규, 하나님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그 갈망을 곁눈질해볼 때. 다윗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한없이 낮아졌고, 심령으로 쏟아졌고 하나님을 찾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부르짓는 다윗을 보고 싶어하셨음을.

 

하나님은 결코 잔인한 분이 아니셨다. 그러나 잔인하리만큼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을 맛보는 기다림을 다윗에게 주셔야만 했다. 왜냐하면 다윗을 진정으로 행복하고 기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배부른 자에게는 꿀이라도 싫다고 했다. 그것은 부족하지 않은 자의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들은 만족할 수 없고, 기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다. 정상적인 감정과 만족을 경험하지 못한다. 주린 자는 쓴 것도 달다고 했다. 참된 가치와 깊은 은혜와 진리를 고난 중에서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은 말한다. 한없이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자기의 심정을 쏟아부었었다고. 그리고 그 뿌리깊은 기다림을 넘어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자신을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셨다고 말이다. 그것은 탄성이다. 그 기막힐 웅덩이가 무엇일까? 그것은 결코 도무지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무저갱 같은 웅덩이인 것이다. 세상의 그 무엇도 구원해줄 수 없는 웅덩이, 하나님 조차도 건져내주시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그런 심연의 깊은 수렁을 다윗을 경험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랜 시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기대하고 기다리지만 만날 수 없다라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는 모든 수렁으로부터 다시는 벗어날 수 없고, 회복될 수 없는 것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다윗은 그 심연의 깊은 수렁으로부터 하나님을 기어이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의 하나님은 곤란과 곤핍, 환란과 눈물, 징계와 고독, 고통의 모든 수렁과 심연의 늪에서 건져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셨다. 다시는 디디지 못할 것만 같던 그 반석 위에 자신의 걸음을 견고케 해주시는 기적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긍휼의 풍성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회복되었으며, 웃음을 되찾았으며, 만족과 즐거움을 회복했다. 한없는 기쁨과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인해 새 노래와 찬송으로 부르고 또 부르게 되었다. 그렇게 다윗은 그 뿌리깊은 기다림의 시련을 관통하고 지나쳐 승리하였던 것이다. 기다림의 승리!

 

기다린다거나 참는다거나 인내한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항상 배우고 듣는다. 그러나 단순히 구원을 기다린다든지 은혜와 긍휼을 기다린다라고 생각해버린 오산이다. 우리는 결국 기다린다는 것을 통해, 기다림은 승리라는 공식과 의미를 경험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기다림의 승리를 맛보아야 한다. 그것은 진정으로 수렁으로부터 건지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며, 긍휼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우리의 기다림과 인내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의 주어진 환경의 곤란, 사람의 곤란, 육신적인 곤란, 인격적 곤란. 우리의 곤란의 종류와 유형은 너무나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그러한 다양성의 곤란이 회복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테지만. 사실 알고 보면 결국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반석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 기다림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우리의 곤란 중에 긍휼의 하나님이 다가와주시는 것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곤란으로 인해 슬픔 중에 있는 우리가 회복되는 그 처음이며, 최종 완성이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그 긍휼하신 하나님을 노래 부르게 되는 것이 결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우리로 하여금 곤란 중에 인내하고 기다리게 하시는 것인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긍휼의 하나님께 부르짖고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이다. 얼마나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하신 분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짖게 만드신다. 그 인내과 고독과 슬픔 속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기다림 끝에 만나는 은혜의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기막힐 웅덩이에서 건져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진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하나님을 새 노래로 찬양하게 하시길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 역시 우리를 한없는 긍휼의 찢어지는 가슴으로 사모하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윗이 그렇게 기다릴 때 하나님은 다윗을 만나주실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윗을 만나주시고 싶었던 것이다. 긍휼에 사무치는 하나님의 마음이 다윗을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게 다윗을 간절히 기다리셨다.

 

그러므로 기다림이란 우리 편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도 동일하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낮아진 심령과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그 간구하는 심령의 순결한 갈망을 얼마나 기다리고 계신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다림을 배워야 하며, 기다림을 경험하여야만 한다. 그것을 통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심령도 다시금 깨닫게 된다.

 

환경에 대한 모든 불필요한 오해와 한계를 상상할 필요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그저 순전한 심령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한다라면 우리는 그저 그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기가막히게 건지셔서 견고한 반석 위에 놀랍게 세워주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뿐이다. 그것은 오직 깊은 기다림을 통해서만 경험하게 될 놀라운 환희가 될 것이다.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린다. 새 노래로 찬양하게 될 그날을 미리 기대하고, 즐거워하며 긍휼의 풍성하시니 하나님의 여린 마음에 하나님을 찾는 뜨겁고 순결한 나의 마음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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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2012-02-28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더이상 못기다릴때..더이상 못참을때 그때부터 기다리고 참는게 진짜신앙이라는 말을
책에서 읽은적이 있습니다. 꾹 참고 기다려서 하나님의 응답을 맛본 사람만이 또 다시 기다릴 수 있는것 처럼. 저 또한 잠잠히 기다리고자 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시기에 기다리면 뭔가가 있겠죠 ^^ 당신의 기다림이 응답되는 순간을 상상해보세요.
 

기대하는 자에게 주시는 기다림_2012.02.2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6.)

 

(야고보서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Once upon a time! 곰과 호랑이가 살았다. 곰과 호랑이는 너무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하늘의 환인께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구했다. 환인은 100일 동안 동굴 밖을 나오지 말고 냅다 마늘만 먹으면 인간이 될 거라고 격려했다. 그래서 곰과 호랑이는 야호! 외치면서 100일 동안 먹을 마늘을 싸가지고 동굴로 들어갔다.(그 많은 마늘을 어디서 캤을까? 농사지었을까?) 동굴 속은 좁고 어둡고, 무엇보다 마늘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마, 마늘을 먹는 것보다 마늘 냄새가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 호랑이는 매일 눈물도 흘렸다. 눈이 너무 매웠기 때문에..

 

결국 호랑이는 생각했다. ‘아우, 정말 사람이 되는게 대체 뭐길래. 내가 이 짓을 하고 있지? 그냥, 나 사람 되는 거 포기할래.’ 그러나 곰은 달랐다. 완죤 곰탱이었다. 환인도 깜짝 놀랬다. ‘아니, 쟤는 농담을 구분을 못해? 진짜 저러고 100일 동안 마늘 먹는 거야?’ 으이구, 미련 곰탱이~’ 그러나 환인은 그 곰탱이를 유심히 봤다. 그리고 100일이 된 날 환인은 어쩔 수 없이 곰탱이를 웅녀란 곰순이로 거듭나게 해주셨다. 그리고 그 인내심에 감탄한 환인은 자신의 아들 환웅에게 웅녀를 아내로 삼게 하셨다. 환웅은 울었다. ‘내가 마늘 냄새나는 곰순이랑… 아빠, 미워.

 

우리 고조선 건국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마늘양념이 들어간 음식을 좋아하나 보다. 외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을 보면 얘기한다. ‘너네 마늘 냄새놔~~ 곰탱이 후손들

 

말 그대로 동화에 불과한 건국신화이지만 유독 인내와 기다림을 통한 축복을 스토리의 뼈대로 삼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곰탱이라고 놀렸지만 난 간교한 호랑이에 불과했다. 100일은 너무나 고독했다. 분명한 목적의식과 불굴의 의지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내 후회하고, 되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곤 했다. 인내를 이루라는 명령처럼 좀이 쑤시는 명령도 없을 것이다.

 

인내라든지 기다린다는 것에 대해 자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뤄지는 세태 속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더욱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모할 정도로 꾸준히 그리스도인들이여 기다림으로 자신을 구원하라.’라고 권면해주시는 것 같다. 왜 그토록 하나님은 기다림에 대해서 특별히 우리를 연단시키려고 하시는 걸까?

 

물론, 우리는 좋은 답변들을 떠올릴 수 있다. 기다림으로 좋은 것을 얻으며, 기다림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하며, 기다림을 통해 겸손해지며, 기다림을 통해 보다 나은 인격을 갖추게 된다라는. 그리스도인에게 기다림을 통한 배움은 가장 갚진 것이라고. 그러나 또, 우리는 대꾸할 수 있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기다림과 인내가 너무나 혹독하고 어렵다고 말이다. 좀 돌아봐 달라고, 빨리 좀 구원해달라고.

 

솔직히 하는 얘기지만 사실 오래 기다린다는 것은 더 많은 시험을 초래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 많은 곤란과 유혹과 위기들을 참아내고 버텨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자칫 기다리다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나타나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겠지만 누군가는 인내도 쓰고, 열매도 얻지 못하는 수가 있다.

 

우리는 요셉의 인내와 승리를 안다. 그러나 요셉이 어떤 시험을 받았는지도 안다. 그가 준수한 청년으로 애굽의 종살이를 해야 할 때,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과 시험이 왔다. 총리대신에 오르기까지 13년의 기다림과 인내 속에서 치명적인 유혹과 시험들, 신앙의 위기들이 요셉에게로 그 얼굴을 내밀었다. 요셉이 인내하고 승리해서 망정이지 그가 실패했더라면 그처럼 서글픈 인생이 또 어디 있었을까?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하나님은 기다리고 인내하게 하셔야만 했을까? 요셉이 그것을 통해서 완전해질 수도 있었지만 실패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므로 하나님은 요셉을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믿고, 기대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더 기다림을 통해 완전해지라고 요구하신다. 사실 인내심이란 것은 겸손을 배우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결과물이다. 동굴 속의 곰은 단순히 인내심이 뛰어난 것만은 아니었다. 곰은 순박했던 것이다. 자기 자존심이라든지. ‘아니, 내가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 법이다. , 자아가 주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호랑이는 인내하다가 생각했다. ‘대체 내가 왜?’라고. 자신이 주가 되었다. 자아가 존중 받고, 존경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대우를 당할 이유가 없어.’라고 결론이 났던 것이다. , 의지도 부족했다. 정말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갈망이 없었다. 분명 인내가 실패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목적의식의 부족이며, 갈망의 부족이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는 것, 자아가 주가 아니라 순박함을 배우는 것. 그것이 인내하는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자질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내가 많이 기다리고, 인내하고 배워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여전히 내 삶의 목적의식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며, 세속에 더럽혀지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이란 정체성이나 삶의 윤리를 종종 흐릿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여전히 내가 겸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부단히 기다림에 대해 요구하시고 계시리라.

 

그렇게 보면 한편으론 더욱 두렵고 자신감이 없어지기도 한다. 한없이 모자란 내 모습에 대해 안타까워지면서도 투정을 부리게도 된다. 그 지독한 기다림의 고독과 밀려오는 위기와 위험들이 너무나 두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붙들어 주신다고 하셨다. 오히려 나를 더욱 기대하고 계시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저 곰순이를 더 배우고 싶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들을 그저 단순히 믿고 진득히 행하는 것. 믿음으로 그저 그 길을 걸을 줄 아는 것.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말하는 법. 자아의 우월감을 풀어 버리고, 자존심을 낮추는 것. 겸손을 배우는 것. 또, 호랑이의 말을 듣지 않는 것. 야야, 그만 둬. 정말 100일 동안 이 어두운 동굴에서 마늘을 먹고 굳이 인간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건 곰 같은 짓이야. 관둬! 인간이 되기 전에 마늘만 먹다가 죽겠다야!’ 그럴 때 말하는 방법. ‘나 곰 맞아. 곰 같은 짓 할꼬얌!’ , 현실과 환경의 어두움이나 마늘 냄새를 개의치 않는 것. 그냥 그렇게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때까지 잠잠히 침묵하며 기다릴 줄 아는 것. 사람이 될 때까지. 100일이 채워질 때까지. 그냥 그렇게.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거울 앞의 내 모습이 곰이 아닌 곰순이 웅녀로 달라져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인내를 통해 겸손해져 있는 자신을. 인내를 통해 더 성숙하고 완전해진 자신을. 인내를 통해 더 탄탄해진 내공과 신앙의 근력들을.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목적하신 바를 이루고 계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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