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당신에게 주는 위로_2012.02.2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8.)

 

( 16:22, 개역)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삼손은 특별한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돌발적이고 예외적인 인물이다. 사실 성경의 인물중 삼손이야 말로 가장 괴짜 같은 면모를 보여주며 또, 일반적인 영웅담이나 신화적인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다.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존재란 것도 알았다. 삼손은 기질적으로 신중한 성격이 아니어서 그렇지 삼손 역시 들릴라로 인해 자신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들릴라가 끊임없이 삼손의 힘의 근원에 대해 캐묻고, 거짓 답변을 들었을 때 그 거짓 답변을 따라 올무를 놓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ㅋㅋ 우리의 무식하게 힘만 좋고 우준하기 짝이 없는 삼손은 들릴라의 치마폭에 쌓여 침을 흘리고 있었다. 남자들이란…(?)

 

특별한 성령의 체험, 넘치는 스테미너. 즉흥적이고 낙천적인 성격. 성경인물 중에 삼손처럼 속 편한 사람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정말이지 삼손의 모습은 충동적이고, 돌발적이면서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다. 앞에 가로 막힌 게 없이 그냥 행동하고 싶은대로 움직이는 행동파였다. 그러나 역시 그런 미숙한 정신은 두말 할 것 없이 삼손의 자유로운 행보에 착고를 채이게 만들었다.

 

들릴라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어느날 그는 결코 내뱉어서는 안 될 진리를 폭로해버린 것이다. 그 근엄하고 웅장하며, 순전한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을 까발려버렸다. 자신에게로부터 비롯된 것도 아닌 하나님께 그 근원을 두고 있는 신적인 능력과 힘에 대해 공개했다. 삼손이 이런 위험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다면 적어도 들릴라의 치마폭에서 빨리 일어났어야 했다. 누구나 시험은 온다. 누구나 허물이 야기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재빨리 거기서 돌이켜 나와야 된다. 혹 그것이 언젠가는 다시 반복될 실수가 될지언정. 당장당장. 그 순간순간 벗어나고 돌이키는 습관과 양심을 길러야 한다. 아무튼 삼손은 위기 가운데 자신을 노출시키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들릴라의 치마폭에 누워있었다. 심령이 쫓기고 상하면서까지 말이다. , 그것이 특별한 성령의 체험을 하면서도 좀처럼 육신적인 자아의 기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삼손의 매우 독특한 면모였다.

 

결국 삼손은 머리털이 잘리우고, 무기력해진 그는 두 눈이 빠지게 된다. 그는 생전 처음 무기력이란 것을 경험했다. 자신을 사로잡는 한 두 사람을 어떻게 제어할 수가 없었다. 생애 속에서 단 한번도 겪어보지 않은 심히 비둔해진 몸의 무게와 피로를 느꼈을 것이다. 분명 한 때는 나귀 턱 뼈로 천명을 때려 잡았는데! 그러므로 삼손은 비로소 그의 무한한 힘과 능력이 참으로 전능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음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내 그는 깊은 착고에 매여 맷돌을 돌리고 있었다. 예전엔 별 것 아닌 노동이었지만, 이제 그에게는 심히 고달픈 노동이었다. 그 깊은 낙망과 죄책감과 후회와 눈물, 그리고 심한 육체적인 노동의 버거움.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배신했다는 처절한 회개. 그때보다 더 삼손이 하나님 앞에 정직해져 본 적은 없었다. 그때보다 더 삼손이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통찰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그곳에서 삼손은 회개에 승리했으며, 회개로 말미암아 재기했다.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 신앙의 재기는 언제든지 뿌리 깊은 회개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그것은 정말 회개해 본 사람, 정말 정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양심을 쏟아부어 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삼손의 머리칼이 여전히 자라게 해주셨으며, 특별히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났다는 이 한 구절의 성경을 기록해주셨다. 가히 의미심장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는 것은 자연적인 섭리이며, 불가항력적인 생리현상이다. 동시에 삼손의 머리털이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을 상징한다는 것으로부터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결코 마르지 않는 것임을 암시해준다.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삼손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삼손의 머리털은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자랐더라도 성경에서 자랐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생리적인 현상을 뒤집어 머리털이 자라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랐다는 것은 또한, 삼손이 진심으로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승리를 하였다는 의미의 반증이며, 그가 재기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렇게 삼손은 회복되었고, 그의 마지막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해질 수만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양심으로 부어질 줄 아는 심령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는 결코 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멸망 받을 죄인들이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영원한 은혜 안에 소유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완전함을 덧입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어디까지나 그 완전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덧입히워진 것이지 우리가 완전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가 인박힌 불완전한 몸으로 말미암아 시험을 받고, 시험을 초래하고 있다. 부활의 그날 이 죄의 몸을 벗는다. 진정으로 완전한 완성을 경험한다. 지금은 불안하다. 우리는 연약하며, 우리는 범죄하고 좌절한다. 우리는 때때로 삼손처럼 들릴라의 치마폭에 오래 머무르기까지 한다. 우리는 시험을 초래할 줄 알면서도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는 문제는 너무나 중요한 의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져야만 한다. 분명하게 고백하며, 숨기고 싶어하지 않으며, 낱낱의 허물을 고하며, 그 심령을 쏟아야 한다. 실패한 과오들, 거짓들, 위선들, 불경건한 것들. 한 명의 참된 성도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는 모든 양심의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받으신다. 우리의 정직함에 하나님은 흡족해 하시며, 만족하신다. 바로 다윗이 그러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간음하고 살인이나 저지른 저 흉악한 전과2범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해주셨던 것이다. 그 흉악한 범죄보다 하나님은 더 크시고, 하나님의 용서와 정결케 하시는 능력, 은혜의 힘은 더 무한히 크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죄가 크다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질 않으신다. 다만, 정직해지지 않는 것. 회개하지 않는 악한 마음이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실 뿐이다. ‘내가 너를 알건마는! 너는 네 자신을 인정하고 정직해지지 않다니!’ 그렇게 노여워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여, 분명히 깨닫자! 우리가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진지해질 때, 정직하고 한없이 순전함으로 고백되어질 때 결코 우리의 머리털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왜 그렇게 다 끝난 것처럼 낙심하고 포기해버리려 할까! 우리 능력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긍휼은 마르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결코 마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남겨주신 저 짧은 한 말씀이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얼마나 값진 진리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증거인지 감동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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