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스림 받지 않는 신앙_2012.03.0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9.)
(삿 21:25, 개역)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는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기록이다. 사사는 왕권이 없던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하고 다스리던 리더들이다. 평시에는 재판을 주관하기도 하며, 행정권을 갖고 있었다. 전쟁이 나면 군대를 이끌고 전장을 진두지휘하는 지휘관의 역할도 했다. 대개의
다른 나라들은 보다 일찍이 왕권이 수립되어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통치의 일반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췄던 것에 반해 이스라엘이 초대왕 사울을
중심으로 왕권수립을 하는데는 다소 늦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사무엘은 일찍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유능한 사사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사제도가 아닌
왕권수립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하나님이나 사무엘 편 모두에게 서글픈 것이었다.
사사기서를
읽으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표현이 4번에 걸쳐
반복되고 있다. 특별히 본문으로 채택한 동일한 내용의 말씀은 사사기서의 가장 마지막 절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 사사제도를 통한 통치와 다스림이 가지는 어떤 한계와 비효율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왕이 없다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조건이 매우 불리한 상황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마치 단팥 빠진 찐빵처럼. 그러나 과연 사사제도는 나약한 제도였을까? 왕권의 부재는 정치적인 결함에 해당됐을까?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보여질 수 있다. 사사기 5장 16-17절은 이와 같기 때문이다.
(삿 2:16-17, 개역) 『[16]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이미 사사기
초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들의 통치와 지도력에 순종적이지 않았다. 그 의미는 객관적으로는 사사권의
미비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본질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망나니 같은 신앙의 습관이 더 큰 원인이었다. 그들은 다스림을 받으려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기
고집과 생각, 자기의 주관과 욕망대로 하고자 했다. 그래서
사사권을 무시했으며, 사사제도에 회의를 느꼈다. 그것이 나아가
강력한 왕권수립을 요구하는 욕구불만의 상태까지 이어진 것이다.
특별히 사사기의
말미로 다가서면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각기 자기 소견대로 행했다는 말씀이 연이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 시작은 17장에서 부터이다. 그리고 18장, 19장, 마지막 21장. 즉 사사기의 종언에 치달으면서 사사권의 사실상 거의 붕괴
및 왕권에 대한 백성들의 어떤 갈망이 감당할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이 말씀은 사실상 왕권에 대한 요구로 말미암아 사사제도에 대해서는 거의 무능하고 붕괴된 것으로 간주해버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한 욕망을, 그 원인을 왕권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그 탓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왜 굳이 왕이 없다고 해서 그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해야만 하는가? 그들에게는
사사들이 있었다. 사사들은 백성을 훈육하고 다스리며, 재판하고
전쟁 때는 군대장관이 되었다. 즉, 모든 명령권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스림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타락한 습관은 바로 이 사사제도를 사실상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므로 그것이 반복되어 가면서 차츰 이스라엘은 이 모든 무질서가 바로
왕권이 수립되지 않은 것으로 탓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는 이것이 왕권의 부재가
낳은 병폐처럼 보여지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스림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모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한
습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이 제기하는 중요한 이슈가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사사제도가
아닌 보다 강력한 왕권통치를 바랐다. 그것이 모든 무질서와 기준이 모호한 제도들의 정비와 정립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사사제도가 무너진 것은 이스라엘의 교만과 순종하지 않는 습관에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비록 왕권이 수립되더라도 그것이 그들이 꿈꾸는 제도확립을 완성시켜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결국 왕권에도 굴복하지 않을 사람들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사사가 되었든 왕이 되었든 다스림을 받지 않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더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왕권이 수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들이 표면적으로는
사사들이 통치하는 제도 아래에 있었지만 이미 그들은 왕권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하고 불변하시는
왕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왜 사사제도가 필요했을까? 그것은
이미 왕이신 하나님께서 왕권을 갖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다스리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사제도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과 뜻, 이스라엘을 다스려가는 수단과 방편으로 사사들을 그 수종자로 삼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권 아래에 겸손히
다스림을 받되, 그 다스림을 수종해서 수행하는 사사들을 따랐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사사제도를 무시하고, 불복종하면서 왕권수립을
요구하고 있는 이 모습은? 즉, 그들은 왕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들의 주권자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고작 구한다는 것이 그들의 육신적인 제도를 수립하고 통치할 인간의 왕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표면으로는 왕권의 부재로 인해 고통 받는 것처럼 울부짖는 이스라엘의 가증한 얼굴 뒤에 가려진
엄숙하고 섬뜩한 불신앙의 실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놀라야만 한다. 참된 왕을 쫓아버리고, 허수아비 왕을 구하는 구부러진 신앙이 실존하고
있었다. 그 헛된 염원이 사사기의 말미로 가면서 강하게 충동되기 시작했고, 결국 사사제도는 종언을 맞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갈망대로 인간의
왕 사울왕을 세워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사제도를 폐하는 이스라엘의 선택과 욕망의 거센 항의는
왕이신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버리는 이스라엘의 타락한 신앙의 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결코
다스림을 받지 않는 신앙. 망나니 신앙.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부족한 이스라엘을 시험할 도구로 40년이란 긴 세월을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며, 블레셋으로부터 나라를 위기에 빠트리고 백성을 학대하는 사울왕을 주심으로 그들의 배은망덕한 신앙과 위선에 징계를
주셨던 것이다.
누가 그리스도인이였던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섬기고 따르며, 순종하는 무리. 그러므로 우리의 왕은 반드시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우리는 그 왕
되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순응하고 있을까? 우리는 사사제도에 대해 격하시키고 있진 않을까? 우리는 과연,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솔직해져 보자 얼마나 많은 순간과 상황 속에서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을 내쫓아버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내시는
방편과 제도들에 대해 불응하면서 불만하고, 무시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보다 명확하고 유능한 지도력을
보여달라고 구했던지. 우리의 삶의 세밀한 곳에서 자행되어 온 하나님 무시하기.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환경과 제도들 안에서 실행되어져 온 하나님의 섭리를 망각한 채 하나님을 내몰아버리고
있었던지.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림을 역사해달라고 거짓 기도와 고백을 해왔던지. 때때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조차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는 상황들이 많았던지. 그 위선에 놀라게 된다. 정말 순종할 마음, 정말 고난을 받을 마음이었던가 말이다.
사사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왕권의 부재가 진정한 문제가 아니다. 오직
단 하나의 근본적이고 영원한 문제는 다스림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오만한 신앙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
환경과 내 삶의 섭리들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부재이기 때문에 비롯된 문제들이 아니다. 오직 모든 삶의 윤리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고 배척하고, 오히려
고난을 외면하고 이기적이고 싶어하는 우리의 완고한 신앙의 문제이다. 결국 우리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얼마나 서글픈 실제인가. 이스라엘의
잘 가공된 거짓 변명을 다시금 되뇌어 본다. 사실이 아니었던 나의 서글픈 변명을 돌이켜 본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