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일반적 위험
1. 불신앙
2.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3. 중심의 진실함이 부패
4. 합리화의 오류
5. 신앙의 기복
6. 마음의 성벽이 무너짐
7. 기도하지 않음
8. 무절제
9. 자기신뢰
10. 외식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정 거듭난 후 신앙생활 가운데 많은 어려움과 시험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결과를 볼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 그것은 두 가지로 분리되는 것 같다. 하나는 영적 승리요 하나는 영적 패배이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승리와 영적 패배의 양면성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건만 그리스도인의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결과란 것이 신앙의 처음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것에 기인한다고 볼 수 없다.
(겔03:20)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겔18:27)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법과 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실패의 원인이 되는 몇 가지 사항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앞으로 서술될 그리스도인들의 위험은 물론, 내게도 적용되는 것이며 나에게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인식한다.
1. 불신앙
사실 나는 불신앙에 대해서 그다지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불신앙이란 요소를 인식하면서 나는 이것이 완고한 성향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원인이 된다는 것과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생각보다 훨씬 많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다.
우리는 ‘신앙생활’이란 표현을 쓰는데 신앙은 분명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예배의 생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은 얼마나 그 본질에서 왜곡되어져 있는지 모른다. 결국, 불신앙은 실질적인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예배의 상태가 아닌 신앙과 대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의 속성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느끼지 못하며 삶의 굴레에 억눌려 신앙을 포기하거나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본다. 그리고 혹 교회 가운데 거하며 봉사를 맡은 자들까지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교회의 뜻에 순순히 따를 의사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이 외형적인 봉사와 열심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불신과 적대감을 알게 될 때 상당히 놀라운 것이다. 왜 그들은 그러한 불신앙의 올무에 걸렸을까?
불신앙은 물론 사람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겠지만 일단 그 차이는 접어 두겠다. 불신앙의 사람들은 대체로 말씀이 부족하다. 그것은 성경의 많은 진리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의미하며 그로 인해 그들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뒷받침 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믿음 가운데 행하는 확신이 부족하므로 작은 일에 두려워하고 걱정한다. 그리고 대부분 사사로운 생활의 염려에 매일같이 싸여있다. 그래서 교제에서 주로 거론하는 화두에는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문제가 많다. 그들은 신앙에 대해서는 얘기할 지식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영적 상태와 신앙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부족하고 하나님과 교회와 전도에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실 영적인 생각을 할 원동력이 거의 녹슬어 있다.
이들의 가장 무서운 점은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영적인 교제와 말씀을 적용해도 그들은 그것을 낮은 마음으로 받기보다는 그들의 환경과 형편을 핑계 삼아 자기 생각으로 배척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영적인 교제와 말씀의 적용이란 상당히 이론적이고 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심지어 말씀을 신뢰하는 것과 그로 인해 자아를 굴복시키는 것을 애초 두려워한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대속 사역과 사랑의 풍성함까지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막연히 인정할 뿐이며 실질적이고 보다 고차원의 영적인 삶에서 적용되고 인정되는 말씀을 실제로는 동의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도리어 말씀에 대한 의문과 반론을 보인다. 내 가까이 있는 사람도 그러했다. 그 사람은 구약의 말씀은 확실히 인정하지만 신약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것은 시대적으로 오늘날과 맞지 않을 수 있기에 신약이 요구하는 것이 늘 현실에 적용된다는 것은 힘들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신앙의 타락을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는 사악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불신앙의 사람들은 쉽게 넘어진다. 증거가 확실하고 필요한 예방책을 아무리 많이 들려줄지라도 모범답안적인 작은 시련에 금방 신앙을 포기하려 든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보호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 교제에 성실하고 육적인 욕망의 개혁하려는 의도와 진행을 보이더라도 자신의 육적 불편이 느껴지고 환경적인 반대 세력이 불거져 나오면 이내 그것을 문제 삼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정하려 든다. 그리고 완악한 마음으로 굴복하려는 태도를 철수시켜 버린다.
또한, 이들은 성경의 사소한 모순(물론, 모순이 아니라 사람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이라도 보이면 그것으로 변론하려 든다. 그들은 그런 태도가 얼마나 무지한 상태이며 완고한 모습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단지 그들은 자기중심적이다. 그리고 자연히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신뢰한다. 신앙생활의 성실보다는 현실적인 성실을 중요시한다. 그들은 영적인 그리스도인과는 철저히 대조되는 삶으로 그들의 불신앙을 증거해보인다. 그리고 늘 불평을 많이 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불평하며 하나님의 뜻을 선하게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사실 이들의 이런 사고방식은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리고 불신앙은 거짓된 소망 곧,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소망을 소유하며 설사 하늘의 소망을 얻더라도 이내 소멸해 버릴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신령한 소망이 뿌리내릴 질 좋은 땅이 전무하다. 결국 그들은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내적 평강이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늘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성실했고 잘못이 없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공식만 나열할 뿐 하나님의 조건에는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조건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른다.
불신앙은 확실히 하나님에 대한 대적자의 영역에서는 것이고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어둠의 그물이며 자신의 신앙을 철저히 패배시키고 모든 올바른 판단과 순종을 가로막는 죄악이 된다. 결국 불신앙은 각종 죄악의 뿌리가 된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거듭나지 못한 죄인의 근본적 속성에 해당되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불신앙에 감염된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말씀과 기도의 부족, 신앙과 의무의 소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조건에 대한 인식 부족이라 생각된다.
(딤전04:0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언젠가 이 말씀을 보면서 나는 왜 굳이 말씀과 기도를 거론했을까 생각했다. 교제와 봉사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안다면 이내 수긍이 가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생활 속에서 체험할 기회를 갖지 못했거나 하나님과의 교제가 구부려짐으로 신뢰감을 상실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이 진실한 신앙을 갖는 것에 대해 헌신하려 하거나 노력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자기는 하나님 앞에 죄가 없다고 단정 짓는 듯하다. 혹 성실함이 있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명예와 이기심에서 기인하므로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렘02:35)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치 아니하였다 함을 인하여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그리고 말씀에 대한 진실한 연구와 순수한 수용이 없이도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무지하게 할 것이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신뢰의 부족으로 발전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조건들을 탐구해야 되고 가능하다면 그 모든 조건에 있어 만족되어야 하는 것이 솔직한 정석이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서 늘 배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듣는 것과 읽는 것에 성실할 뿐 실질적인 탐구와 적용에 대한 연구는 거의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탐구와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고 싶다. 말씀을 듣고 충분히 이해한다면 반드시 그것을 나의 환경과 형편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그것이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봐야 될 것이다.
나의 경우 그것을 기도 제목으로 적용하고 생활에 적용했을 때 큰 유익을 얻었다. 그 유익을 말씀드리면 아마 놀랄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보다 영적인 안목을 얻은 것에서부터 전도의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앞의 모든 과정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일 테지만.
2.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육신적이란 것은 역시 영적이란 것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것으로 나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보곤 한다.
바다에 푸른 물고기가 살고 있었고 육지의 초원에는 말들이 뛰놀고 있었다. 어느 날 푸른 물고기가 말에게 제안했다. ‘우리 서로 바꿔 살아보자.’ 그래서 푸른 물고기는 육지로 올라와 초원을 뛰어 달리며 놀았고 말들은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 수영을 하면서 놀았다.
아주 황당한 이야기란 것을 느끼는가. 결국 영적인 속성과 육적인 속성은 도무지 교류될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롬08:0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신앙생활 역시 지극히 영적이 생활이다. 육신의 힘이 아니라 절대적인 영적인 힘 곧, 성령의 힘으로 이뤄져야만 가능한 것이라 생각된다. 육신과 영은 서로가 도무지 이해될 수 없다. 결국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늘 죄에 빠지며 도무지 열매가 없으며 의지가 약하고 세속적이며 땅의 소망을 두며 영적 분별력이 쇠약하여 거의 모든 생활에서 육신적인 선택을 하며 영혼을 생각하지 않으며 희생하지 않으며 이기적이며 불만과 불평에 거하며 무기력하고 늘 간증은 탄식이다. 그들은 평강을 모르며 성결을 모르며 그들의 생활은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고 사망의 향기로써 역시 믿지 않는 자들의 영적 암초가 된다.
사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유발되거나 육신적인 생각에 기인한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눈에 보이는 교회는 엄격하고 율법적이고 신앙 중심이며 현실과 분리된 그룹이다. 심지어 그들은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수치스럽게까지 생각한다. 그리고 늘 세상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교제를 나누면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의견에 대적하고 무시하려 한다. 그들은 세상과 너무나 닮아 있기에 자신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며 교제 참석은 언제든지 옵션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스러운 취미생활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엄청난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처럼 말씀을 가려서 듣고 가려서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 능력은 비교적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영적인 것에 무지하므로 신앙의 가치가 영적인 결과로 평가되는 것을 모른다.
또한, 교회와 교제를 모르기에 찬양대의 찬양을 들어도 찬양대가 연습을 가지는지 모르며 식사를 해도 식사를 준비하는 자매님들의 수고가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의 모든 행정이 전자동인 줄 무의식중에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중심적이다. 예전에 어느 분이 청년회 교제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을 이유로 교제 시간을 옮기면 안 되냐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 분은 그 자리에 모인 수 십 명의 청년들이 자기를 희생하고 시간을 할애하여 참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다루어야 할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있다. 그런데 지금 언급하는 이 그리스도인이 정말 위험하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들은 영적으로 어린 많은 그리스도인 초신자들을 변질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회 A형제님이 구원을 받으셨다. 그분의 간증을 들으면 그분이 참으로 순수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 이는 구원받은 초기의 밝아진 양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분의 말투와 행동으로 보아 그분이 구원받기 전에도 비교적 순수한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B라는 형제님은 꽤 신앙생활도 하셨고 교회의 중요한 직분도 가지신 분인데 교제 이외의 모습에서 그다지 진실 되지 못한 언행을 가지신 분이었다. 이런 분들은 상당히 붙임성 있고 말 잘하고 다소의 유머 감각이 있고 신앙생활도 좀 했고 직분도 그럴듯한 호감을 주는 인상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영적 분별력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이 좋은 모습인 양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것이다. 많은 경우 그들이 외형상 인기 있어 보이고 좋아 보일지라도 이면에서 그를 존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서로가 외식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아마,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면 분명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마치 극성과 극성이 섞이고 비극성과 비극성이 결합되듯 그럴 것이다.
나는 예수님이 농담을 하셨다고 믿지 않으며 유머 감각이 뛰어났다고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농담과 유머를 경멸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교제의 간증에서는 거룩하지만 일상의 모습에서는 주로 비 진실된 자들의 무절제한 농담과 유머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형제, 자매님이 나의 의견에 동의하신다면 다음 말씀을 마음으로 듣길 바란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나는 그리스도인은 진지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혹 그것이 너무나 고리타분한 모습이라고 비난받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경박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아야 되지 결코 세상의 관점으로 신앙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개인적인 이유로 시간이 지나 A형제님을 만났을 때 나는 큰 서글픔을 느꼈다. 그분이 다름 아닌 B형제님을 쏙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볍고 농담 따먹기 식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했다. 처음에 보았던 진실함과 순수함이 완전히 더렵혀진 것 같았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 그 형제님이 교제에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한때 나도 그런 모습을 따라간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을 닮고자 하는 의도는 인간적인 인기를 얻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나중에 그것이 잘못인 것을 인식하면서 나는 그 저속한 말투를 고치기 위해 엄청나게 고생을 해야 했으며 문득문득 다시 그런 말투를 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죄는 잔인하다.
확연히 드러나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 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교회 안에서 초신자를 유린하는데 역부족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적은 그럴싸하게 보이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직분으로 상대방의 신앙을 가늠하지 않는다. 결코 직분이 그 사람의 신앙을 말해주는 것이 될 수 없다고 나는 믿고 있으며 나는 그런 나의 생각을 확신케 한 몇 가지 경험도 하였다.
(마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물론, 영적으로 온전한 분들이 좋은 직분과 헌신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겠으나 또한, 많은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드러나지 않지만 가장 막강하며 오직 그들은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그 가치가 제대로 분별되어진다. 그들의 향기는 가장 오래간다. 그리고 소수의 그 무리들이 교회의 90%이상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3. 중심의 진실함이 부패
(시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근래에 내가 가장 오랫동안 묵상한 말씀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중심의 진실함. 모든 승리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은 내 마음이 진실한가에 있다고 생각된다.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어서도 그렇고 신앙의 승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내가 진실하다면 하나님께서 길을 여시리라 믿는다.
궁극적으로 내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는 진실한 마음의 순수함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는 선할 것이며 나의 모든 삶의 행위는 순결하고 정직한 것이 될 것이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듣는 횟수의 많음에 비례해서 실질적으로는 행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예전에 나는 이 구절을 보면서 한 동한 골몰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먹고 마시는 것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수 있을까? 다양하게 생각해 보았다. 심지어 발로 식사를 한다면...(?). 나중에 알게 된 것이 그 날 하루를 주님을 위해서 산다면 그 날에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지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나의 소망이 나의 의지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지고자 한다면 그 소망 가운데 행해지는 모든 삶의 형태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드려질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심의 진실함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형제, 자매님들도 긍정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많은 경우 중심의 진실함보다는 자신의 욕망과 버리지 못한 죄를 은닉한 채로 중심에 진실함을 말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리스도인의 초창기에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내게 재발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그것이 정말 중요하며 늘 경계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나의 그리스도인 초창기에 나는 남에게 쉽사리 밝힐 수 없는 죄를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 그것이 죄인지도 잘 몰랐다. 나는 영적이지 못했기에 그러했으며 또한, 그러한 이유로 그 죄를 버리지 못함으로 인해 나중에는 완전한 습관이 되어져 있었다. 그러나 교제에 있으면서 나는 그것이 버려야 할 죄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때는 습관처럼 그 죄를 짓고 있어서 버리기가 여간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아마, 이것이 진솔한 표현이리라.)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그 죄를 버리기를 기도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또 그 죄를 탐닉하고자 하는 의도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신앙생활은 진정한 힘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 죄를 버릴 만한 동기가 될 경험을 하게 되었다. 역시 그 죄를 짓고 나는 상투적인 회개를 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면서 다윗의 간음죄가 거론되었다. 말씀에서 다윗은 간음죄를 짓고 회개한 후 다시는 그 죄에 빠지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왜 나와 다윗이 다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물론, 내가 이 죄에서 궁극적인 탈출이 가능한 것은 비록 죄를 버리지 못했으나 신앙이 올바르게 되길 바라는 진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렇지 않았다며 나는 탐구도 기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얻은 결론은 나의 회개가 진실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였다면 나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죄를 두고 장기간 동안 기도하게 되었으며 진실로 회개할 수 있길 원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그 죄를 또 범하게 되었다.(그때의 암담함이란...) 그리고 나는 다시 심각하게 생각했다. 왜 나는 그 죄를 진실로 회개하길 바라는 기도를 시작하고서 다시 그 죄에 빠졌을까? 나는 그것을 또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한 두 달 뒤 나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말씀 가운데 찾았다.
(엡0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곧, 나는 영적으로 그리고 내적인 인격이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마치, 음료수 빠진 깡통처럼 나는 요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든 신앙의 문제는 그 다양함에 각각의 개별적인 원인과 치료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의 출발은 단 한 가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결여 그리고 영적 미성숙이다.
가벼운 말투, 가벼운 행동, 죄에 쉽사리 유혹 당함, 세속적인 모습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모든 신앙의 더러운 죄들은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과 성숙되지 않음에 기인한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결심과 의지를 세우더라도 그 죄를 이기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빈 깡통이 ‘나는 다시는 깡통소리를 내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내 실패한다. 유일한 방법은 물을 채우는 것이다. 역시 중심의 진실함을 소유하는 것과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그것에 대해 고민했고 가장 먼저 행한 것이 말을 줄이는 것이었다. 나는 간증을 절대적으로 줄였으며 일상에서 말하고 싶은 욕구를 잔인하게 제어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교제 가운데 단순히 말의 화려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별하게 되었으며 말의 가벼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교제 가운데 아무리 말이 화려하고 말씀이 풍부하고 경건하게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하더라도 그를 통해 전혀 열매가 없다면 그는 외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이러한 변화를 겪으면서 나는 영적 열매를 거둘 수 있으리라 기대하게 되었고 시간이 다소 걸렸지만(하나님의 확인의 과정이기도 하리라.) 하나님께서 필요한 방식을 준비하게 인도하셨고 결국 인내 가운데 전도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0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요03:0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우리가 열매로 영적인 그리스도인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자칫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양의 탈을 쓴 외식에 기만당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있더라도 한 사람에게 영적 열매가 거둬들여지고 한 사람에게는 전혀 열매가 없다면 두 사람의 신실한 모습이 아무리 동일하게 보일지라도 그 이면의 중심과 생활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리라. 하나는 영이고 하나는 철저히 육이다.
4. 합리화의 오류
어느 그리스도인이 바람직하지 못한 죄를 범하고 간증을 했다. 그는 죄를 통해 패배의 마음을 열어 놓았고 죄에 대해 후회했다. 그러나 결말에 가서 그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많은 교훈이 되었으므로 그 죄가 필연적이었다고 말했다.
어느 청년회에서 청년회 교제를 마치고 밤늦은 시간까지 교회당에서 교제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새벽에 다 되어서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는데 워낙 피곤해서 기도를 시도하다 그냥 포기하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교제를 했으니 괜찮을 거야...’
나는 이와 같은 상황과 이와 유사한 선상의 상황들에 대해 ‘합리화의 오류’라고 말하고 싶다. 어떠한 죄의 실패가 내게 교훈이 되었더라도 죄는 죄이다. 그것은 절대 합리화되어서는 안 되며 긍정되어도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죄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가진다면 늘 죄의 수렁에 빠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실상 그리스도인들의 범죄가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범죄이다.
그리고 교제로 인해 기도하지 못했고 그것이 합리화될 수 있다는 것도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기도 시간을 소멸시킬 만큼 가치 있는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사실 이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얼마나 우리는 기도를 쉬는 죄를 자주 범하는가. 진정한 교제는 하나님과 나의 개별적인 교제이다. 나는 이러한 기도 생활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로맨티스트’라고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아침, 매일 저녁 그리고 언제 어느 때든지 은밀히 데이트하러 다가올 나의 방문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주님이 신실하신 분인가를 보여주는 실제 사건이다. 그래서 나는 늘 기도하는 앞부분에서 하나님의 그러한 신실하심과 나의 기도를 듣기를 원하시고 기다리고 계심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고백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애통한 경험을 한 가지 했다. 그 날은 청년회 교제가 있는 날이었고 교회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이어서 저녁에 청년들이 교제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때 좀 고민이 되었다. 가야 될까 말아야 될까? 그러나 나는 참석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는데 왜냐하면 자주 있는 기회가 아니었고 그 교제의 궁극적인 의도는 악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늦어도 꼭 기도하리라는 마음의 다짐으로 그 교제에 참석했는데 결과는 엄청난 실망이었다. 나는 그 교제에 끼여 있지 못하고 나와 버렸다. 그러나 그곳에서 집이 멀었고 교통이 없어 나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그냥 바깥에서 배회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그 교제는 너무나 세속적인 대화와 놀이들이 오갔으며 중간 중간 양념 치듯 ‘찬양 곁들이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혹, 나의 이런 이야기를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실 형제, 자매님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나는 너무나 확실하게 느낀 것이 도무지 이 교제에는 주님이 함께 하실 수 없으며 도리어 하나님이 모욕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앞에서 주도를 잡은 분이 세상적인 저속한 말과 말투, 놀이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냥 앉아서 웃으며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나 불합리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를 했다. 나는 나의 불합리한 선택에 대해 회개했으며 그 자리에 모인 모든 형제, 자매님들을 위해 기도했다.
5. 신앙의 기복
사실 우리의 하루는 매일 매일이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하루의 전날과 바로 뒷날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결말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내가 죄에 대한 나의 탈출 경험을 얘기했지만 내가 그 죄를 지금껏 범하지 않고 있다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란 보장이 없다는 말이다. 마치, 내가 지금껏 실족한 적이 없으므로 나는 앞으로도 실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죄에 대해서도 그러하다고 본다. 설사 내가 진실한 깨달음으로 그것을 극복하였더라도 나는 다시 그 죄에 빠질 위험은 매일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한번 실족을 경험한 형제가 교제에 돌아오고 다시 신앙이 회복된 후 ‘나는 과거의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왜 실족하는지 그 위험을 터득했다.’라고 말할지라도 그는 다시 그리스도를 떠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과 신앙의 모습을 좀 더 진실 되고 객관적으로 탐구한다면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두리뭉실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많은가를 조금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고향인 K교회에서 주일 말씀을 가끔씩 들을 때가 있는데 한 날은 다윗의 전쟁에 대한 부분을 들었다. 거기서 다윗은 싸움에 앞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싸우라고 말씀 해주셨다. 그리고 다윗은 승리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대적이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곳에 진을 치고 왔는데 다윗은 지난번의 경험을 의뢰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거기서 하나님은 전혀 다른 답변을 다윗에게 주셨다.(그 부분이 잘 기억이 안 나서 대충 서술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늘 우리의 경험을 의뢰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고.
그래서 죄에 대한 탈출의 경험도, 어떤 신앙에 대한 탁월한 경험도 그것이 그 날부터 영원까지 늘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나의 현실 역시 그러했다. 물론, 내가 옛 죄를 다시 범해서가 아니라 영적 컨디션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복은 개인적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 아마 대부분의 형제, 자매님도 그러한 경험을 한다고 믿는다. 하루는 너무나 힘있고 활기찬데 하루는 전혀 그렇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하루는 성결했는데 다음날은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그다지 성결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특히 이것은 게으른 하루를 시작했을 때, 아침기도를 소홀히 했을 때 많다고 생각된다.
(고후01:0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결국 나는 매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가치 있는 경험도 나의 가치 있는 지식도 그것이 항구적인 보호책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재차 실수할 수 있는데, 근본적인 죄성이 소멸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내일도 나의 죄성은 늘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오늘이며 내일은 내일일 뿐이다. 이것을 인식하면 왜 그리스도인이 항상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는가를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수이자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을 그렇게 지으신 것이리라. 그래서 믿음은 내일은 생각하지 않는 것인 것 같다. 생각할 필요도 없고 염려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냥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강물처럼 흘러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생활비의 부족으로 빚을 질 수 있는 위험에 처했었는데 그때 나는 하나님께 빚지는 죄를 짓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정확히 내게 있는 돈을 그 달에 100% 맞게 쓰고 빚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실 어떤 징조가 보일 때나 두 가지의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때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면 된다.
(마0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6. 마음의 성벽이 무너짐
(잠25:28)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이것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사실 이것처럼 서글픈 것도 없는 것 같다. 내가 외적인 죄를 근절한 후 나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생활은 내면생활이라는 것이었다. 아마, 그런 깨달음은 내가 성령 가운데 행하는 생활을 조금이나마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있으면서,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면서 문득문득 내 속에서 올라오는 잔인한 죄의 유혹과 치열하게 싸웠었다.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죄가 올라오는 즉시 자백과 함께 그 죄를 버리는 것이었다.
(요일01:0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그런데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동일한 경험을 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것도 습관이 되어야 한다. 습관이 되기 전에는 참으로 번거롭기 때문이다. 마음에 죄가 올라올 때 그 자리에서 그것을 자백하고 보혈의 사함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도 기도이며 마무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끝나야 되기 때문이다. 죄는 한 순간인데 자백은 좀 더 길다. 결국 죄와 자백의 전체 시간은 나의 작업을 잠시 중단케 하는 것이며 자백에 온전히 마음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글쎄,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소개 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이것을 몇 달하면 익숙해지고 습관처럼 자백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도 늘 즉각인 회개로 대항하지 못할 때도 발생한다.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연약함 때문이다. 결국 이런 때는 내 마음에서 죄가 좀 더 오래 주장하게 된다. 내가 철저히 마음의 성벽을 정비하고 강한 의지 가운데 있을 때는 죄가 올라오면 거의 2초에 다가가지 못한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면 죄는 약 5초까지 가고 그 이상을 넘어가려 한다.
사실 이러한 마음의 성벽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 내적인 죄의 발단이 되고 최악의 경우 행동의 죄로까지 이어지는 원인이 된다. 성벽이 부실할 때는 사소한 유혹에도 흔들리고 죄를 뿌리칠 의지가 거의 없어지고 만다.
이런 경우는 주로 몸이 쇠약할 때도 흔히 나타나며 평소에 근신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 것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죄의 유혹에 늘 노출되는 생활을 하거나 유혹 거리를 눈앞에 두는 것도 원인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거의 길을 걸을 때 영화 포스터를 보지 않는다. 그리고 야한 여자가 있다고 생각되면 그쪽으로 쳐다보는 것을 아예 자제한다. 그리고 신문과 대중매체를 통해서 연예, 영화, 스포츠를 안 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T.V는 거의 안 봐야 된다. 그래서 나는 요즘 무슨 영화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의 능력이 내 안에서 약해지면 나는 모든 죄에 대해 저항력이 소멸할 것이란 것을 나는 확신한다. 나는 언제부턴가 신약을 읽으면서 성령이란 단어가 나오는 부분을 유심히 보게 되었는데 성령이란 단어가 나오는 구절 치고 성령의 중요성이 부각되지 않은 구절을 거의 보지 못했다. 맨 앞에서도 신앙생활은 성령의 생활이라 했듯이 성령이 소멸하면 나의 신앙생활은 율법에 얽매이고 짐을 지는 부담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질 짐을 내가 져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성령이 소멸하는 그리스도인은 썩은 고기와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실족하거나 도무지 무능력하게 살아가는 것을 확인하였다. 결국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마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아직 확실히는 모르지만 나는 이것에 신앙생활의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 마음의 성벽을 제어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과 이를 위해서는 신체적 컨디션을 잘 조절하는 것도 지혜인 것 같고 성령께서 소멸하지 않도록 생활 속에서 말씀과 기도 생활 그리고 보이는 죄를 멀리하는 생활을 해야 된다고 믿는다. 그것은 역시 행할수록 더욱 행할 힘이 넘치게 되는 것이고 행하지 않을수록 더욱 행할 능력을 읽게 되는 것이리라.(마25:29)
7. 기도하지 않음
이것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계속 언급했고 너무나 잘 아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그 중요성은 전혀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을 절대적인 위험으로 생각하고 삽입시켰다.
우리가 정말 기도의 소중함을 안다는 것은 실질적인 기도의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증명된다. 왜냐하면 중심의 진실함은 결국 행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의 소중함을 안다는 것 자체가 기도를 하지 않고서는 실제적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그다지 덕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은 그들이 봉사를 전혀 하지 않거나 물의를 일으킨다는 뜻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통해 영적 향기가 없다는 걸 말한다. 한마디로 쳐다보기에 안쓰럽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심각성은 그들이 변화되려는 노력이나 개선의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최소한의 노력이고 결과적으로는 최고의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엄청나게 놀라운 사실이었다. 적어도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 빛을 볼 날이 오리라 믿는다. 나는 죄 가운데 살면서도 한때 2시간이 넘게 기도한 4월이 있었다. 물론, 그 기도는 많은 부분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지는 못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쉽게 포기하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불신앙의 모습으로 발전하고 나중에는 그냥 그 모습에 안주해 버린다. 나는 이들을 보면 이 이야기가 생각난다. 빈대를 병에 넣어 두고 뚜껑을 닫으면 처음에 몇 번 뚜껑을 들이박다가 나중에는 뚜껑을 치워도 그 이상 뛰지 않는다는 얘기.
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늘 제자리걸음을 하며 생활의 많은 세속적인 죄가 제거되지 않고 그들의 은밀한 삶이 하나님과 교통되지 못하며 검증되지 못하고 치유되지도 못한다. 절대적인 영적 궁핍의 상태에 이르며 무기력하고 소망이 없으며 성령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불신앙의 모습이 되며 육신적이 된다. 기도의 능력에 대해 무지하며 삶의 능력이 없고 승리를 거의 맛보지 못하고 늘 요동하고 고민하고 믿음이 불안하다.
대충의 서술이지만 이 각각이 또한 파생하는 문제들은 더 다양하다. 무엇보다 이것으로 파생되는 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이 몇 가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는 것. 이것이 너무 상투적일지 모르지만 잘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세상은 죄로 물들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 없이 거뜬히 살아간다. 거듭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죄에 놓여 있고 진노와 심판에 놓여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피가 죄를 속한다.’는 법을 정하셨고 직접 예수 그리스도, 피조물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죽음을 당하여 나에게 영광과 의를 주셨다. 그것도 침 뱉음과 주먹으로 맞으셨다는 것, 뼈가 바글바글 깨졌다는 것. 살점이 뜯겨져 나갔다는 것. 그리고 숨이 가빠 헐떡였을 것이고 심한 현기증과 빈혈 증세가 나타났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나님의 전 우주에서 선택한 동역자를 탄생시키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헌신과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동역자들의 대부분이 제대로 기도하지 않으며 심지어 타락하고 하나님께 저항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옛 죄로 돌아가 하나님의 대적자의 위치에 서고 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은 회심하지 않은 영혼들을 통해 받는 고통보다 더한 배신의 상처를 받고 계시며 그분의 무한한 사랑으로 재차 타락한 그리스도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다시 일하셔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떨지 감히 상상하지 못하겠다.
한마디로 이것은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부작용이다. 하나님은 온전하신데 그분의 속성을 소유한 유일무이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부작용을 만들어 내는 사기꾼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걸 생각하면 심판대 앞에 설 때의 부끄러움과 두려움, 후회를 내게 알게 하셔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을 소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둘째, 잃어진 영혼에 대해 영원한 죽음의 암초가 된다. 빛을 발하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죽음의 암초가 되고 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없고 지극히 육신적이고 세속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빛이 되지 않으면 죽음의 암초밖에 아무것도 될 것이 없다. 등대가 빛을 내지 않으면 배들은 파산할 것이다. 등대가 빛을 내지 않는 그 자체로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배들이 난파될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심각성은 더 할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배들이 있는데 그들의 거의 대부분이 빛을 찾는 잃어진 배이다. 만약, 그들이 혼동에 빠져서 난파당한다면 그 파급 속도와 정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얼마나 격렬해질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얼마나 게으르고 세속적인지 모른다.
셋째, 그들의 봉사가 도리어 하나님 앞에 독이 될 것이다. 분명히 성령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음은 성령의 소멸을 가져올 것이고 성령의 소멸은 성령의 역사를 막을 것이며 지극히 육신적으로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 교회 안에 있는 많은 봉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드려지기에 부실하게 될 것이다.
특히, 교사의 경우 그러하다. 나 역시 교사를 해보았는데 교사를 관두고 몇 달 동안 나는 나의 교사의 직분에 대해 회개하였다. 많은 교사들이 충실히 연구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일주일 동안 매일 공과공부를 하였다. 그런데 많은 교사들이 토요일 하루 공부하거나 당일 즉석으로 가르치려 한다. 그리고 심지어 실족한다. 도대체 그들을 통해 아이들이 뭘 배웠을지 무섭다. 그들이 양의 탈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들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 아이들의 영혼을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다. 교회의 교사는 가장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어야 된다.
나의 행위, 봉사 그 자체가 아무리 선할지라도 그것의 중심이 선하지 못하고 진실 되지 못하다면 선한 행위의 모든 것이 범죄의 수단으로 전락될 수 있다.
그러면 기도의 유익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기도 응답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이 향상될 것이다. 그리고 내적인 평안을 느낄 것이며 어떤 어려움과 예기치 못한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크게 요동치 않으며 담대할 수 있다. 그리고 영적 침체를 극복할 수 있으며 자기 검색의 작용으로 세속에 오염되는 것과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바르게 해준다. 또한, 더욱 그리스도를 닮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도움이 될 것이며 교제 가운데 덕을 세우고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또한, 때때로 급속한 영적 성숙을 경험할 신앙의 전환점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과 행함에 대한 신뢰감과 자신감을 준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의 어우러짐이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에 큰 능력으로 나타날 것이다.
8. 무절제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무절제는 사람을 경박하게 만든다고 생각된다. 또한, 절제를 못하는 사람은 미련하게 보인다. 사실 우리 개인을 은밀히 살펴보면 매우 많은 형태의 무절제가 존재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내고 제거하고 싶다. 내 마음과 생활의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절제의 형태는 그것이 잠, 죄, 소비, 마음을 다스림, 말, 행동, 식생활, 취미의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교제, 기도, 말씀 묵상까지 신앙의 직접적인 영역까지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절제는 죄에 대해 나 자신을 노출시키는 원인이 된다. 이것은 육신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가령, 분노하는 마음을 제대로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다투게 될 것이며 그것은 외적으로 큰 죄가 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친다. 사실 이것도 내가 경험해 보았다. 그렇다면 절제를 해야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다 잘 알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무절제가 신앙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덕을 상실케 하기도 한다. 가령, 교제를 무절제하게 밤늦도록 나눈 경험들이 다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진액을 다 빼내도록 교제를 하는데 그 결말이 영 개운치 않다. 마치는 것말고 이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운이 남지 않는다.
더구나 그 무절제함이 교제의 전체적인 질을 떨어뜨리는 것과 함께 기도를 소멸시킬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막고 덧입을 은혜를 무효화시킬 것이다. 또한, 신체적인 피곤을 가중시키고 다음날 지각하게 되는 원인이 될 것이며 그로 인해 나는 하나님과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덕이 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 날 하루 종일 마음에 후회가 있을 것이고 무기력하고 졸음에 허덕이면서 능률을 상실할 것이다. 그리고 정작 필요한 교제를 피하게 할 수도 있다. 하나의 무절제가 얼마나 많은 문제로 나타나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또한 내가 세상적인 마음을 절제하지 못한다면 고의적인 죄를 많이 지을 것이다. 가령, 쇼핑을 무지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습관적으로 쇼핑을 하고픈 유혹을 느낄 것이고 그는 많은 시간을 쇼핑에 헛되이 낭비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보다 생산적인 그리스도인의 일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세상적인 마음은 근절되지 못할 것이고 그는 분명 충동구매를 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소비까지 무절제해지고 궁극적으로 그의 재물은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직접적으로 헌금이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제 행하지 않으면 늘 무절제의 굴레 속을 맴돌 것이고 자신에게 무절제가 있는지 조차 전혀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절제는 자기부인의 한 영역이라고 나는 믿고 있으며 절제는 직접적인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한 부분이라고 또한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제를 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자기부인의 개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편, 무절제의 억제와 반대로 확장의 고난도 있다. 그것은 영적인 부분에 대해서 그러하다. 우리에게 부족한 영혼에 대한 사랑을 소유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장되어야 할 부분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한동안 기도했는데 도무지 응답이 오질 않았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만 영혼을 생각하지 정작 기도를 마치고 하루를 보내는 동안 세상 사람들을 대면하면 도무지 그들을 영적인 존재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기도하면서 거의 분노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그 모든 탄식이 영혼을 향한 사랑으로 전환되는 묘한 경험을 하였다. 그리고 그 후로 나는 세상 사람들을 늘 영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매일같이 영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9. 자기신뢰
성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신앙의 좌초에서 많은 경우 그것은 ‘교만’이었다. 사울의 교만은 얼마나 그의 결말을 비참하게 했었는지.
(잠 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교만이란 것은 사실 많은 부분에서 자기신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영적인 성숙에서 자신의 신념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서 뜻하지 않는 오류에 걸리곤 한다. 만약, 마음에 강한 자기신뢰가 있을 때 그것은 독선과 자기 의가 될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이 신뢰하는 것을 행하되 당신의 마음은 늘 가난하고 주의할 때 안전하다.
그리스도인이 늘 겸손할 수 있는 것을 주님 앞에 깨닫는다면 불필요한 많은 시련을 거치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다. 남에게 결코 부서지고 싶지 않은 자아의 강인함, 자기의 의지와 자기의 지식들이 얼마나 많은 시련의 과정을 요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10. 외식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혹독히 호통 치셨을 때 주님은 그들의 외식을 지적하셨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다를 때 외식이라고 한다. 사실, 외식이 전혀 없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누구나 때때로 원치 않게 외식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외식보다 더욱 위험한 외식이 있는데 그것은 과장된 행위에 기인하는 외식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나의 영적충만 속에서 나의 열심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나의 영성이 소멸되었을 때 나는 나의 연약해짐을 보이기가 참으로 번거로워졌다. 그래서 쉽사리 기도부탁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나는 다소의 외식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런 나의 경험을 뛰어넘어 나는 다소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 자매의 이야기이다. 가까운 시간에 두 자매님이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참으로 재밌는 것이 두 자매님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는 점이다. A자매님은 조용하고 묵묵한 이미지였고 B자매님은 불안하고 시끄러웠다. 그래서 모두들 A자매님에게 미래의 일꾼으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은 외모를 본다고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타났다.
몇 달의 시간, 거의 1년이 흘러갈 무렵이었다. A자매님은 오랜 슬럼프를 겪는 것처럼 보였으며 언제부터인가 자매님의 묵묵함이 믿음이 아닌 가식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B자매님은 조금씩 그 모습이 나아지는 쪽으로 변해갔다.
결국 A자매님은 자신의 믿음의 범위를 넘어 남들에게 잘 보여지려는 의도가 강하게 숨겨져 있었음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A자매님에 대한 형제, 자매님의 반응은 “위험하다.”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A자매님은 자신의 문제를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교제를 이탈했다. 많은 자매님들이 교제를 시도했지만 A자매님은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기에 이제는 너무나 오래 동안 외식으로 자신을 꾸며왔던 것이다.
후에 들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A자매님은 교회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계속 담배를 끊지 못해 고민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그 자매님을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그토록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것을 막아버린 외식과 과장된 성숙함이 신앙을 파멸시키기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슬픈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거듭남을 경험한 후 나는 지금껏 세 번의 전환점을 경험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첫 번째는 지극히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에서 비교적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의 전환과 두 번째는 영적 미성숙의 상태에서 비교적 영적 성숙의 상태로 전환한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영혼에 대한 무감각에서 영혼에 대한 감각으로였다. 나는 이러한 신앙의 전환점들이 내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것은 앞으로도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