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1.참된 복음을 통해 전파되는 구원_2010.08.14.

 

 

(데살로니가전서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1. 문제제기 : 복음이냐 구원이냐

2. 능력으로 이른 복음.

3. 성령으로 이른 복음.

4. 큰 확신으로 이른 복음.

5. 적용.

 

 

1. 문제제기 : 복음이냐 구원이냐

데살로니가전서는 환난 중에 승리하는 교회의 표상이라 일컬을 만큼 견고한 믿음의 본을 보인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바울의 첫 번째 서신이다. 보통 바울의 서신들이 1장에서부터 문맥적 치밀함을 통해 일련의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면 다소 이례적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는 비교적 간결하게 교훈과 진리들을 소개하듯 나열하고 있다.

특별히 15절에서는 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 성도에게 전달된 복음이 무엇인지 정의내리고 있다. 우리는 이 정의로부터 복음에 대한 우리의 무딘 개념을 재정립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통상적으로 복음과 구원이란 개념은 모호하게 혼용되어 쓰여지는 경향이 있다. 보통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신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은밀한 의미에서 그건 복음이라 할 수 있다.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운명에서 어떤 소망도 없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속죄의 소망이 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복된 소식, 복음인 것이다. 그러나 구원이란 것은 이 복음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각자의 마음에 믿어짐과 동시에 실제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하게 되는 상태 그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단순히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설명하는 상태를 놓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단정하거나, 교회학교에서 제자들의 구원을 교사가 확정해주는 일은 실로 어리석고 무모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본문으로 돌아가 바울은 이 복음이 전파된 방식에 대해 부연하고 있다.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이 복음의 전달은 앞서 말한 것처럼 단순히 말 몇 마디로 이뤄진, 들어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만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만약, 그렇게 복음이 전파된다면 그것은 말로만 전파된 것이지 실제 복음 안에 있는 복음의 구성요소가 누락된 즉, 생명이 없는 복음일 뿐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참된 복음의 전파에는 복음의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 이어서 설명하고 있다.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우리는 참된 복음이 지니고 있는 이 세 가지의 요소가 무엇인지 충분히 고찰해봄으로써 진정한 생명의 복음이 어떤 것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2. 능력으로 이른 복음.

 

능력이란 것은 하나의 힘이며, 운동력을 지닌 어떤 것으로 물리적 또는 물리적인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 복음 안에도 능력이 있음으로 해서 복음이 전파될 때 어떤 힘과 운동력이 나타나며, 물리적인 변화내지 물리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능력은 복음 그 자체로는 완전하진 못하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복음의 능력은 성령을 통해 증거될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증거 되지 않는 복음에는 능력도 생명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내 죄로 인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있지만 어떠한 참된 변화를 야기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복음의 능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먼저, 구원의 능력이 있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로마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1:16, 개역)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복음에는 생명의 능력이 나타난다.

(4:28, 개역)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베드로전서 123-25절에는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되지 않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는데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씨앗으로써 복음을 믿는 자의 마음에 심기워져 싹이되고, 이삭이되고, 곡식이되는 자람이 있는 것이다. 바로 복음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현상,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명의 참된 현상이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이 참된 복음이라고 말하기 어렵니다. 만약, 그런 생명의 현상 없는 복음이 옳은 것이라면 성경은 다시 고쳐써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복음의 능력은 실로 무섭다. 바울은 거듭나기 전 자신을 교회의 포행자요 핍박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맛본 바울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러므로 갈라디아126절에서는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회고한다. 단순히 바울이 전도자로 잘 해서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다 저렇게 교회를 핍박하고 살인하던 사람도 복음의 능력이 충돌하니까 완전히 바뀌는구나 그것 때문에 영광을 돌린 것이다. 복음의 능력이란 실로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말로만 전파된 복음이 아무런 힘과 능력, 물리적, 물리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함에 비해 참된 복음은 철저한 변화를 일으키는 신령한 능력으로 운동하고 있다.

 

 

3. 성령으로 이른 복음.

 

복음은 성령으로 이른 것이다. 성령으로 복음이 이르는 것이 아니라면 말로만 이른 복음으로도 능력과 구원이 나타나야 될 것이다. 그렇나 그렇지 않다. 오직 복음의 진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성령은 복음을 증거하신다.

 

(8:11-13)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휴거 이후 복음을 듣고자 전세계를 찾아해맬 어떤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휴거의 날 성령님도 올라가신다. 이 땅에 더 이상 성령의 사역은 없다. 그럼으로 복음을 듣기 위해 온 세계를 누비지만 얻지 못해 갈하여 쓰러진다. 복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에게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62절에서는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또한, 성령은 복음 증거하고 계신다. (요일 5:7, 개역)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이렇게 복음은 성령의 사역과 증거하심으로 전파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복음이 믿는 자에게 전파될 때 성령도 그 사람 속에 실제로 임재하시는 것이다.

(1:13, 개역)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렇기 때문에 성령 없는 복음은 없으며, 성령의 인치심 없는 구원도 없다. 그러므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참으로 성령께서 인치시고, 들어와야 그는 복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것만이 환희의 날 그 사람의 기쁨을 보장해 줄 것이다.

 

 

4. 큰 확신으로 이른 복음.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해 증거된 복음은 충분히 큰 확신을 가져다 준다.

(고후 13:5, 개역)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여기서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는 본인 외 그 누구도 그 구원을 확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생명의 능력으로 간접적으로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확신은 언제나 각자 자기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다만, 어떤 경우는 정말 구원받은 것처럼 생활하고 확신도 있어서 본인을 비롯 주변의 그리스도인도 그 사람의 구원을 확신하는데 그럼에도 훗날 그 사람이 이제야 참으로 구원받았다.’라고 고백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놀랍다. 그래서 단순히 거듭난 듯한 행위만으로도 완전한 증거가 되진 못한다. 증거는 오직 성령이시다. 아무튼 참된 복음의 전파에는 큰 확신도 따른다.

 

(요일 4:18, 개역)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 복음이 확실할 때 심판의 두려움은 쫓겨난다. 확신이 없는 복음이라면 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릴 것이다.

 

종합해볼 때,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복음에 대한 참된 정의는 매우 훌륭하고 명쾌하다. 결코 몇 마디 말로 이 복음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건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에 불과하다. 참 복음은 구원의 능력과 생명의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복음에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뒤따른다.

 

 

5. 적용.

1)복음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

2)자기 구원에 대한 거짓된 확신을 가진 사람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골로새서26-8)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음_2010.07.10

 

 

1. 2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골로새교회의 상태

2. 사실상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된 것.

3.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고.

4. 적용

 

 

1. 2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골로새교회의 상태

 

골로새서는 에베소서와 더불어 쌍둥이서신으로 알려져 있다. 에베소서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강조한다면, 골로새서는 교회의 머리된 그리스도를 부각시킨다. 한편, 골로새서가 기록된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2장을 통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사실상 2장에서 골로새교회에 야기된 문제들이 무엇이었는지 적나라하게 언급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9절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초대교회 등장한 치명적인 이단사설은 영지주의였다. 신령한 그리스도께서 사악한 육적존재로 나타날 수 없다하여 이른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 이 사상의 요지였다. 따라서, 바울은 영지주의적 가르침에 반격해 그리스도의 신성의 모든 것이 육체로 거하신다는 것을 언급해야 했다.

*11절 할례, 14절 의문의 증서, 16절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종합적으로 볼 때, 이것은 유대교적 율법주의였다. 육적 할례의 필요성도 대두되었다. 그럼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설명한다. , 율법이란 의문의 증서는 십자가에서 도말되고, 못 박혔다고 강조한다. 한편,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의 구분, 유대교의 기념비적인 절기들의 준수문제, 월초의 금식, 안식일준수 등 유대교적 전통율법의 규례를 지키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결론은 명쾌하고도 단호하다.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8절 거짓 겸손과 천사숭배, 그 본 것을 의지함.

-이것은 일종의 신비주의였다. 그리스도의 겸손의 본이 아닌 거짓된 겸손으로 눈속임하며 천사숭배로 유인하고 있었다. 또한, 환상도 비중 있게 다뤄졌다. 그 본 것을 의지하고, 헛되이 과장했다.

*21절 말고 말라

-금욕주의도 기승을 부렸다. 일체의 접촉을 금했다. 어쩌면 이것이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금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자의적 숭배와 몸을 괴롭게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이교적 가르침과 거짓 교리에 대한 바울의 종합적인 견해는 20절에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세상의 초등 학문’.

이와 같이 세상의 초등 학문이 파고든 골로새교회의 실태를 이해할 때 우리는 2장에서 궁극적으로 사도가 제공하고자 하는 교훈과 주장하는 바의 목적을 이해하게 된다.

-2절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고 싶었다.

-4절 아무도 공교한 말로 속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7절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고 싶었다.

-8절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하는 자들을 주의하도록 경계심을 일으키고 싶었다.

 

 

2. 사실상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된 것.

 

전반적인 배경이 파악되었다면 우리는 좀 더 깊이 있는 탐구를 시도해야 한다. 사도는 골로새교회에 파생된 다양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지적한다.

 

(골로새서26-8)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로새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지만 그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너무나 개방적이었고, 귀가 얇았다. 그들은 믿음의 정확한 중심과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데 무능력했다. 사실상 모든 세상 초등학문에 귀를 열었다. 어느 것 하나도 그들에게 중대한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계심을 유발시키지 못했다. 어떤 노략질하는 자들을 주의하지 않았다. 그들의 뿌리는 너무나 얕아서 언제든지 뽑아서 다시 옮겨 심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처음 받은 교훈을 믿음으로 굳게 지키지 못했다. 다른 모든 교훈들도 그들에게 흥미를 돋구었다. 그들의 분별력은 매우 유치한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시 그들을 복음의 소망 안에 세우는 수고를 감수하기로 맘먹었다. 121-23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고 싶어하십니다. 만약, 당신들이 이 믿음 위에 심기우고 복음의 소망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바로 나 바울은 이 일을 위해 복음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다시 당신들을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기로 맘먹었습니다. 당신들은 무분별한 초등학문을 무차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또 다른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난마저도 제 육체에 채우겠습니다. 당신들이 잘못 배운 것들을 바로잡아주겠습니다. 비록 그것이 내게 괴로운 일일지라도!”

 

, 하나 문제의 원인은 2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부족이었다.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모든 부요함,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살펴볼 어떤 통찰력내지 지식의 능력이 있었다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 피상적이었다. 교회 안에 자리 잡아야 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 중심에 자리 잡지 못했다. 교인들은 제각각 자기 성향에 맞는 대로 외부로부터 들려주는 가르침에 혼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유발시키고 있었다.

 

 

3.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고.

 

27절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 된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여기서 특별히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란 사도의 권면이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도는 여기서 왜 갑자기 감사에 대해 말하는가. 그리고 이 감사는 어디로부터 유발된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었을 때, 올바른 교훈을 쫓아 믿음에 굳게 섰을 때 유발되는 감사함이다. 그때야말로 감사함은 넘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이 교훈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 말씀은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 믿음과 교훈의 깊고 넓은 것에 뿌리를 박으면 박을 수록 감사함이 넘치게 될 것이란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믿음의 터를 세우지 못하고, 깊이 박히지 않게 될 때 우리는 감사와는 멀어진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파생된 또 하나의 치명적 문제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처음 받은 교훈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된 복음의 기쁜 소망을 망각해버렸다. 처음에 그것은 그들을 참으로 깨닫게 한 날부터 자라게 하는 어떤 원동력이자 큰 기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지금은 영지주의와 유대교적 율법주의, 신비주의와 금욕주의가 혼재되면서 참된 복음의 소망과 기쁨, 감사와 즐거움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린 복음은 존재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7절에서 특별히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언급하는 이유를 명쾌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골로새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지 못함에 따라 받은 교훈을 망각해버렸다. 믿음 위에 세워지지 못했다. 그 결과 자연스레 그들은 혼미하게 되었다. 바울의 복음이 맞는 것인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가 맞는 것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그들은 감사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한편, 이는 사도가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인 치료책이 무엇이지 알게 해준다. 적어도 우리가 골로새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과 그 원인을 이해할 때 우리가 그와 같은 이단적 학설과 감사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힘써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탐구하는 시도를 해야한다.(2:3) 더불어 그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는 원동력이다.

 

 

4. 적용.

1) 오늘날도 많은 이단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 사도의 경고처럼 누가 철학내지 헛된 속임수로 우리 믿음을 노략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이란 것은 대학강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견해며 사상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생활 속에 우리가 만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 속에 이미 수많은 철학이 산재해 있다. 우리는 특별히 사람들의 말과 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갖게 되는 소위 불신앙적 생각이나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많은 부분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던지는 불신앙적 질문과 발언으로부터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두려워해야 된다. 그리고 명심해야 된다. 우리는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2) 최근 신천지 사상이 성도들을 노략질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우리를 당혹케 하는 일도 있다. 오랫동안 교회의 중앙부에 있다고 생각했던 분들도 노략된 것이다. 우리는 좀처럼 그런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심기우지 못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의미에서 감사를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우리는 특별히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바울이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이 넘치게 하라고 당부하는 것을 기억하자. 감사는 신앙의 원동력이며,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이 아닐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종의 극기훈련이 되고 만다. 인내하는 것과 극기는 다르다. 많은 이들이 신앙의 중반기로 접어들면서 처음 신앙의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자 차츰 의무와 습관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마치, 지쳐있지만 멈춰 서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그저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바로 그것이 극기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라도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런 생각을 위안 삼아 단순히 걷고 있는 것이 시험이란 것이다. 누구든지 그런 사람 옆에 와서 치면 넘어질 것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처럼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고민해야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탐구하고, 감사함을 경험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지혜와 계시의 정신_2010.02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17-19 지혜와 계시의 정신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이 가져다주는 변화와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내 생명의 은인이 있는데 그의 직업과 재산, 그의 성경과 사회적 관계를 알찌라도 그 은인된 사람을 그 자체로 모른다면, 그와 인격적 관계가 없다면...

 

우리가 기독교의 많은 교리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익숙할지라도 정작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실제적인 진리들을 적용하고, 그 가치를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된다. 하나님을 알 때 기독교 진리의 모든 기초가 되는 원리도 이해하며 적용하고 다양한 진리들을 엮고, 응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그 어떤 기독교 진리와 가르침 윤리가 통용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의 청년들에게 성결된 삶을 가르쳐보라.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성도 안에서도 하나님을 잘 모를 때 성경적 가치관과 진리가 무시되는 것을 발견케 될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담배 피우지 말란 말씀이라도 있나요?”

그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비춰질 때 성경으로 돌아간다. 성경에 착념한다. 하나님을 알고 깊이 있게 이해해 간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 분별력과 통찰력을 얻는다. 영적인 일은 영으로라야 분별한다는 말씀처럼 신령한 이해력이 강화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의 그 무엇을 살펴보는 능력이 있다. ,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그 계획과 깊이를 더욱 넓고 깊게 아는 것이며 더욱 진리 가운데 행하게 되는 것이며 삼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깊이 알수록 자연히 그 법 아래 순종, 구속되는 삶에 가까워진다. 교통법규, 신호를 알수록 설 때와 갈 때를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록 온전한 성도가 되어 간다.

처음 교제도 잘 안 나오던 사람이 교제만큼은 자리잡게 된다. 봉사하지 않던 이들이 봉사하게 된다.

 

한편, 마음의 눈을 밝힌다는 것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마음의 눈을 밝히신다. 이를 두 가지로 재설명하며 이와 같다.

 

하나,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밝히시기 위해서다.

, 마음과 눈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필히 하나님게로부터 오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필요하다.

종합해서 하나님은 어떤 이유 즉, 소망과 영광의 풍성 등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능력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기위해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혀주시길 원하는데 이는 지혜와 게시의 정신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부족할 수록 마음의 눈은 어두워지며 하나님의 부요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보다 높은 분별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마음 눈이 어둡다는 것이다. 누구는 영화롤 보고, 맛집을 다니는데 자주 시간을 쓰지만 누구는 그 시간을 아까워한다. ? 지헤와 계시의 정신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을 사랑치 말라고 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는 것이라 했다. 앞서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을 지배하는 유행과 오락이 친밀할수록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부족한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윤리와 도덕적 기준이 낮은 것이다. 성경의 윤리와 도덕이란 것은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심지어 성경 말씀은 벧전1장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고룩하라고 말씀한다. 솔직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럼에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물론, 영화를 보는 것을 무조건 죄로 여기는 건 아니다. 절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오락이 필요하다. 다만, 순수한 오락이 필요한 것이다. 순수한 오락이란 지나치지 않고, 너무 흥분되지 않고, 마음을 배앗기지 않는 절제된 적당한 오락을 말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마음의 눈이란 표현을 생각해보자. 마음에 눈이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 그렇습니다.’이다. 마음엔 입도 있고, 행위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입이 읽고 내려간다. 불쾌할 때 마음의 입이 불평한다. 종종 형제, 자매님을 평가하고 저주하는 말도 마음의 입이 내뱉는다. 매우 독특하다 마음이 말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은 행위도 있다. 의지의 출처가 마음에 있다. 행동이 나오기 전 주로 마음의 의지가 먼저 행위를 조장한다. 마음의 의지는 감정의 동기부여와 지원도 받는다. 그러면 생각은 실제 행동을 위한 수단과 방법을 고안하는데 나아간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을 밝히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 영광의 풍성, 능력의 크심을 알길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의지에 동인을 제공하는 지혜와 게시의 정신이라는 수단을 사용해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도록 인도하신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마음 안에 있는 1차적인 의지는 작동하며, 눈을 뜨게 한다. 그 눈은 처음 하나님이 목적하신 소망과 영광의 풍성, 능력의 크심을 발견하는 일을 시작하고 이루게 한다. 이로써 우리는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할 필요성과 당위성까지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는 눈은 등불이며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고,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다고 하셨다. , 눈이 밝으면 구별해서 행동하게 된다. 눈이 밝을수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물리적 존재의 특성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작용하셔서 진리로 이끄시는지 탐구해보라. 더불어 마귀 역시 이것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범죄에 빠지게 하는지도. 마귀는 정욕과 탐욕의 정신을 계시해준다. 우리 마음 눈은 흐려진다.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둔감해진다. 정욕적이고, 세상적인 즐거움과 유혹에 민감해진다. 우리의 감정과 마음의 의지가 정욕에 굴복된다. 자주 이방인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고, 맛집을 다닌다. 2-3달에 한 번은 신작 영화를 본다. 유흥을 위해 종종 돈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훈련은 부족하고, 읽어도 맛이 없다. 헌금과 같은 신앙의 기본적인 의무를 수행하데는 한계를 느낀다. 마음의 눈이 어두우므로 온 몸이 어둡게 된 것이다. 구별된 행위가 적은 것이다. 순종하는 삶이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눈이 어두운 그리스도인은 눈이 밝은 그리스도인을 헤아리지 못하지만 눈이 밝은 그리스도인은 어두운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감찰한다. 어째서? 영적인 일은 영으로라야 분별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좀 어두운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몇 마디 말로 금방 구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비그리스도인은 그의 정체가 드러난 것을 모를테지만.

 

, 마음의 눈은 그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다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한다. 그 능력은 영적 능력이기도 한데, 영적 분별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달라고 기도하고, 죄를 자백하고 버리기를 쉼없이 연습하고 실천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그리스도안에서_2010.02

 

 

(1:3-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3-13 그리스도 안에서

 

3절부터 13절까지에만 9번이 반복되는 어절이 있다. 바로그리스도 안에서이다.

 

1)구원(1:3-7)

 

하늘에만 있는 신령한 복이 있는데 그 복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택함 곧, 구원이다. 구원은 가장 신령한 복이다. 구원의 복주시는 목적은 흠없게 하기 위함이다. 구원을 통해 우리는 아들의 권세를 취득한다. 이로써 우리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헤의 풍성함은 구원으로 나타났는데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과 대속적 죽음으로 흘린 피로 실현되었다.

 

2)구원의 계획(1:8-12)

 

구원의 계시와 함께 하나님은 지식과 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발견하고 이해하며 그 넓이가 넓어진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개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유를 통일케 하는 것을 포함한다.

세상은 마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과 통일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피의 복음으로 다시 분리된 것을 통일코자 하신다. 하늘의 것이든 땅의 것이든, 자유자든 종이든, 영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유대인이든 헬라이든 전부 말이다.

하나님게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고자 계획하신 구속의 계획을 통해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켜 나가는 일을 해나가신다. 그리고 통일은 오래지 않아 이뤄질 것이다. 연합지 않는 세력은 심판의 날 소멸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들은 하나님의 통일, 구속의 계획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자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자들이고 연합된 자들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 뒤를 이은 복음의 기업이며, 성도의 기업이며, 하늘나라의 기업이며, 구속의 기업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찬송받기 합당한 하나님과 그 영광 찬송함을 회복케 될 것이다.

 

3)구속의 보증(1;13-14)

 

구속의 보증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다. 또한, 하나님의 구속의 게획 안에 있다. 누군가 보증을 도장 찍었다면 먼저 보증서가 있는 법이다.

먼저, 진리의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천지는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다. 하나님의 실존에 있어 말씀이란 것은 증거이다. 확증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다시 말해, 말씀이 없는 하나님은 없으며, 말씀이 없는 신앙은 없으며, 말씀이 없는 그리스도는 없으며, 말씀이 없는 구속은 없으며, 말씀이 없는 속죄는 없으며, 말씀이 없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신앙의 김족인 진리를 죽이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제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다. 로마서 1017절에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 때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생기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쳐진다. 믿음은 말씀을 듣는다는 전제를 둔다.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었기에 언제나 우리 구원의 재확증도 말씀으로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 그가 못박히신 것은 더더욱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동인이 무엇인가. 말씀이다. 우리 믿음과 구원의 근거는 문자로 쓰여진 성경이기에 말씀의 부족은 종종 구원의 의심으로 야기된다.

성령은 공개적으로 약속되었다. 그리스도는 구약과 신약되었지만 조금은 어렵다. 그라나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직접 약속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성령님은 성도 안에 임재하고 내주하심으로 성도의 구원을 확증하고 인쳐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버리운 자라고 했다. 성령님은 마치 완제품의 검사필마크와 같다. 보증이 되시고 보증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안심이 되는가. 성령님의 인치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다.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믿는 믿음에 있어 다시는 재검증, 재설정, 재시도가 요구치 않게 된 것이다. 믿음의 행위가 의심으로 말미암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일찌라도 참 믿음의 성령 인치심이 있었다면 우리의 의심조차 무능력한 것이란 의미다. 그 어떤 불신과 의심, 두려움도 우리 구원의 보장에 아무런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디 믿고 의심하기에 익숙한 우리의 본성을 생각할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성령님의 보증으로 말미암아 요한복음 1028절에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님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6.하나님과 교회의 사랑, 그리고 순종_2010.03.27

1. 하나님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해야 하시는가.

2. 아담은 하와를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

3. 아담과 하와의 갈등

4. 아담과 하와가 함께 바라봐야 할 곳.

5. 적용

1)개인적인 적용

2)교회적인 적용

5:22-33 하나님과 교회의 사랑, 그리고 순종

시작과 끝이 없으신 영원한 한 분이 계셨다.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이라 알려주신 그 분은 자신의 영원 속에서 기묘한 일을 시작하셨다. 바로, 창조였다. 태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개념들이 나타났다. 빛과 어둠, 위 아래, 모여짐과 드러남, 종류, 계절과 일자, 주관, 날다, 번성, . 그것들은 영원 속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작업을 통해 나타났다.

많은 창조물 중 하나님은 매우 도전적이고 기발한 창조를 시도했다. 바로 아담이었다. 유일하게 그에게는 하나님을 닮은 영이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유일할 뿐이었다. 이는 하나님을 유쾌하게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혼자 서있는 아담의 모습이 홀로 있는 여호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미리 만드신 여자를 아담의 갈빗대를 통해 실현시켰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란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들은 유일하게 같은 영을 소유했고, 그들은 같은 몸에서 나왔으며, 그들이 서로 깊이 사랑하길 원하셨다.

1.하나님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해야 하시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형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사랑할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민망하게 만든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에게 사랑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홀로 있는 아담을 외면하고 하와를 주지 않는 하나님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사랑은 존재의 필요성을 가장 정직하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궁극적인 동인과 목표는 바로 교회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다른 것을 사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를 사랑하고 싶어하신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렬한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더 명백해졌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다. 그를 통해 교회가 탄생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았고, 마귀로 말미암아 야기된 죽음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시기까지 하면서 자신이 사랑임을 증명하셨다.

그 사랑이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길 원하셔서 주름이나 흠이 없이 거룩하길 원하신다.

교회의 애칭은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교회가 신부인 이유는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가장 큰 기쁨은 무한한 사랑을 공급받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교회의 가장 큰 영광이다. 그렇다고 신부에게 아무런 의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적인 증거를 보일 수 없다. 사랑을 받는 신부는 필연적으로 순종적이 된다.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잠잠히 말하며, 겸손해지며, 그 어떤 거스르는 말로 신랑을 피곤하게 하고 싶지 않다.

바로 그것이 완전한 사랑을 하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한 교회를 향한 이상적 모형이다.

죽기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 그 사랑을 한없이 공급받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그 앞에 순종하는 교회.

2.아담은 하와를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당신은 아담인가? 아니면 하와인가? 아담과 하와는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과 교회의 그림자다. 이것을 32절에서는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고 공언한다. 그리고 이어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라고 명령하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고 교회를 이해할 수 있길 원하셨다. 무엇이든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자만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라는 특별한 공동체, 남편과 아내의 위치와 질서,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통해 하나님과 교회를 이해할 수 있기 원하셨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의 위치에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할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3.아담과 하와의 갈등

아담은 자기 몸처럼 하와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나의 아내의 허물과 잘못을 그냥 너그럽고, 온유하게 모두다 받아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뭔가 불평하며 아내를 책망하고 싶다. 아내는 나를 충분히 이해해주지 못하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도대체 어떻게 하와를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순간 아담은 눈을 뜬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를. 하나님이 흠있고, 허물 많은 교회를 얼마나 처절하게 사랑하고 계신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얼마나 자주 불순종하며, 교만하며, 말대꾸를 하며, 변명을 늘어놓는지.

하와는 아담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말이 복종이지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니 아담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의 냉소적인 한 마디는 자주 내 마음을 도려낸다. 그는 도대체 나를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걸까? 정말 하나님이 그에게 준 계명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복종하라니.

그 순간 하와도 눈을 뜬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 얼마나 깊은 경외와 사랑에서 부터 비롯된 것이었는지. 교회는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순종하고 있는지.

4.아담과 하와가 함께 바라봐야 할 곳.

아담과 하와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서로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책망해야 할까? 아니다. 정말 그들이 상기해야 될 것은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분인가이며, 그리스도는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종했는가이며, 그럼에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얼마나 소홀했는지 생각해야 한다.

아담이 하와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대신, 하와가 아담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대신, 아담과 하와는 함께 교회의 위치로써 하나님 앞에 교회의 의무를 되돌아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고전 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5.적용

적용1) 개인적인 적용

남편과 아내들에 대한 말씀을 보면서 본질적인 의미를 생각하기보다 남편과 아내 각자에 대한 의무를 감시하는 것이 될 때 갈등이 초래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의무이다. 가정도 그 자체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한편, 나도 나의 리브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30살이 되도록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적이 없다.‘좋아한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결코 사랑한다.’는 말은 할 자신이 없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다. , 나의 리브가는 나를 존경해줄까? 그것도 왠지 자신이 없다.

사실 나는 사랑할 자격도 존경을 받을 자격도 없다.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내게 주어진 사랑의 의무를 노력해야 하고, 리브가에게 복종을 강요하기보다 교회의 위치로써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봐야 할 것인데 그것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다. 머리는 너무 앞서 자랐지만 실천할 능력이 없기에 아직 내게 리브가를 주시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슬퍼하진 않는다. 자격 없이 얻는 것은 불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홀로 있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나는 그냥 그것이 좋다.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받는 것도 두렵다. 나는 강해보이는 척하지만 실은 조금도 강하지 않은 것이다.

적용2) 교회적인 적용

교회 안에서 형제들이 아내의 머리 위치에 있음으로 앞에서 주도적으로 일한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며, 교회의 위치에서는 아내처럼 형제도 복종해야 한다는 진실을 보지 못하기에 많은 형제들이 앞서 일하다 교만에 빠져 교회를 대적하며, 돌아선다. 자기 아내가 순종하지 않는 것은 말씀을 어긴 것이라 질책하면서 정작 자신은 교회의 위치로 머리되신 그리스도께는 불순종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 안에는 아내에 대한 존중과 경외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상하 수직의 관계에서 아내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아내의 의견도 존중해야 되며, 아내의 권리도 존중해야 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에 대한 순수한 경외를 동반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내들은 남편이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기가 반성하고 고쳐야할 잘못조차 용인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냥 토라지는 것으로 남편의 일방적인 사랑을 요구한다. 그것이 이기심이란 것과 남편의 의무를 잘못 사용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방식에 길들여지면 그 남편은 병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내 역시 남편을 사랑할 의무가 있는데 이 사랑이란 부족한 자신을 사랑해야할 남편의 입장을 생각할 때, 남편이 자신의 의무를 올바로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배려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편, 지나친 순종이 변질되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남편의 태도까지 순종해서는 안 된다. 남편이 신앙을 져버리거나 교회와 등질 때 순종하는 아내들을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