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1장.참된 복음을 통해 전파되는 구원_2010.08.14.
(데살로니가전서1장5절)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1. 문제제기 : 복음이냐 구원이냐
2. 능력으로 이른 복음.
3. 성령으로 이른 복음.
4. 큰 확신으로 이른 복음.
5. 적용.
1. 문제제기 : 복음이냐 구원이냐
데살로니가전서는 ‘환난 중에 승리하는 교회의 표상’이라 일컬을 만큼 견고한 믿음의 본을 보인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바울의 첫 번째 서신이다. 보통 바울의 서신들이 1장에서부터 문맥적 치밀함을 통해 일련의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면 다소 이례적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는 비교적 간결하게 교훈과 진리들을 소개하듯 나열하고 있다.
특별히 1장5절에서는 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 성도에게 전달된 복음이 무엇인지 정의내리고 있다. 우리는 이 정의로부터 복음에 대한 우리의 무딘 개념을 재정립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통상적으로 복음과 구원이란 개념은 모호하게 혼용되어 쓰여지는 경향이 있다. 보통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신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은밀한 의미에서 그건 복음이라 할 수 있다.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운명에서 어떤 소망도 없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속죄의 소망이 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복된 소식, 복음인 것이다. 그러나 구원이란 것은 이 복음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각자의 마음에 믿어짐과 동시에 실제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하게 되는 상태 그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단순히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설명하는 상태를 놓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단정하거나, 교회학교에서 제자들의 구원을 교사가 확정해주는 일은 실로 어리석고 무모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본문으로 돌아가 바울은 이 복음이 전파된 방식에 대해 부연하고 있다.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이 복음의 전달은 앞서 말한 것처럼 단순히 말 몇 마디로 이뤄진, 들어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만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만약, 그렇게 복음이 전파된다면 그것은 말로만 전파된 것이지 실제 복음 안에 있는 복음의 구성요소가 누락된 즉, 생명이 없는 복음일 뿐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참된 복음의 전파에는 복음의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 이어서 설명하고 있다.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우리는 참된 복음이 지니고 있는 이 세 가지의 요소가 무엇인지 충분히 고찰해봄으로써 진정한 생명의 복음이 어떤 것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2. 능력으로 이른 복음.
능력이란 것은 하나의 힘이며, 운동력을 지닌 어떤 것으로 물리적 또는 非물리적인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 복음 안에도 능력이 있음으로 해서 복음이 전파될 때 어떤 힘과 운동력이 나타나며, 물리적인 변화내지 非물리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능력은 복음 그 자체로는 완전하진 못하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복음의 능력은 성령을 통해 증거될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증거 되지 않는 복음에는 능력도 생명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내 죄로 인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있지만 어떠한 참된 변화를 야기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복음의 능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먼저, 구원의 능력이 있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로마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롬 1:16, 개역)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복음에는 생명의 능력이 나타난다.
(막 4:28, 개역)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베드로전서 1장23-25절에는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되지 않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는데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씨앗으로써 복음을 믿는 자의 마음에 심기워져 싹이되고, 이삭이되고, 곡식이되는 자람이 있는 것이다. 바로 복음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현상,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명의 참된 현상이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이 참된 복음이라고 말하기 어렵니다. 만약, 그런 생명의 현상 없는 복음이 옳은 것이라면 성경은 다시 고쳐써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복음의 능력은 실로 무섭다. 바울은 거듭나기 전 자신을 교회의 포행자요 핍박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맛본 바울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러므로 갈라디아1장26절에서는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회고한다. 단순히 바울이 전도자로 잘 해서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다 저렇게 교회를 핍박하고 살인하던 사람도 복음의 능력이 충돌하니까 완전히 바뀌는구나 그것 때문에 영광을 돌린 것이다. 복음의 능력이란 실로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말로만 전파된 복음이 아무런 힘과 능력, 물리적, 非물리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함에 비해 참된 복음은 철저한 변화를 일으키는 신령한 능력으로 운동하고 있다.
3. 성령으로 이른 복음.
복음은 성령으로 이른 것이다. 성령으로 복음이 이르는 것이 아니라면 말로만 이른 복음으로도 능력과 구원이 나타나야 될 것이다. 그렇나 그렇지 않다. 오직 복음의 진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성령은 복음을 증거하신다.
(암8:11-13)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휴거 이후 복음을 듣고자 전세계를 찾아해맬 어떤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휴거의 날 성령님도 올라가신다. 이 땅에 더 이상 성령의 사역은 없다. 그럼으로 복음을 듣기 위해 온 세계를 누비지만 얻지 못해 갈하여 쓰러진다. 복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에게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6장 2절에서는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또한, 성령은 복음 증거하고 계신다. (요일 5:7, 개역)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이렇게 복음은 성령의 사역과 증거하심으로 전파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복음이 믿는 자에게 전파될 때 성령도 그 사람 속에 실제로 임재하시는 것이다.
(엡 1:13, 개역)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렇기 때문에 성령 없는 복음은 없으며, 성령의 인치심 없는 구원도 없다. 그러므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참으로 성령께서 인치시고, 들어와야 그는 복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것만이 환희의 날 그 사람의 기쁨을 보장해 줄 것이다.
4. 큰 확신으로 이른 복음.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해 증거된 복음은 충분히 큰 확신을 가져다 준다.
(고후 13:5, 개역)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여기서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는 본인 외 그 누구도 그 구원을 확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생명의 능력으로 간접적으로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확신은 언제나 각자 자기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다만, 어떤 경우는 정말 구원받은 것처럼 생활하고 확신도 있어서 본인을 비롯 주변의 그리스도인도 그 사람의 구원을 확신하는데 그럼에도 훗날 그 사람이 ‘이제야 참으로 구원받았다.’라고 고백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놀랍다. 그래서 단순히 거듭난 듯한 행위만으로도 완전한 증거가 되진 못한다. 증거는 오직 성령이시다. 아무튼 참된 복음의 전파에는 큰 확신도 따른다.
(요일 4:18, 개역)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 복음이 확실할 때 심판의 두려움은 쫓겨난다. 확신이 없는 복음이라면 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릴 것이다.
종합해볼 때,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복음에 대한 참된 정의는 매우 훌륭하고 명쾌하다. 결코 몇 마디 말로 이 복음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건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에 불과하다. 참 복음은 구원의 능력과 생명의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복음에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뒤따른다.
5. 적용.
1)복음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
2)자기 구원에 대한 거짓된 확신을 가진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