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2장6-8절)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음_2010.07.10
1. 2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골로새교회의 상태
2. 사실상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된 것.
3.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고.
4. 적용
1. 2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골로새교회의 상태
골로새서는 에베소서와 더불어 ‘쌍둥이서신’으로 알려져 있다. 에베소서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강조한다면, 골로새서는 교회의 머리된 그리스도를 부각시킨다. 한편, 골로새서가 기록된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2장을 통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사실상 2장에서 골로새교회에 야기된 문제들이 무엇이었는지 적나라하게 언급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9절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초대교회 등장한 치명적인 이단사설은 ‘영지주의’였다. 신령한 그리스도께서 사악한 육적존재로 나타날 수 없다하여 이른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 이 사상의 요지였다. 따라서, 바울은 영지주의적 가르침에 반격해 그리스도의 신성의 모든 것이 육체로 거하신다는 것을 언급해야 했다.
*11절 할례, 14절 의문의 증서, 16절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종합적으로 볼 때, 이것은 유대교적 율법주의였다. 육적 할례의 필요성도 대두되었다. 그럼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설명한다. 또, 율법이란 의문의 증서는 십자가에서 도말되고, 못 박혔다고 강조한다. 한편,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의 구분, 유대교의 기념비적인 절기들의 준수문제, 월초의 금식, 안식일준수 등 유대교적 전통율법의 규례를 지키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결론은 명쾌하고도 단호하다.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8절 거짓 겸손과 천사숭배, 그 본 것을 의지함.
-이것은 일종의 신비주의였다. 그리스도의 겸손의 본이 아닌 거짓된 겸손으로 눈속임하며 천사숭배로 유인하고 있었다. 또한, 환상도 비중 있게 다뤄졌다. 그 본 것을 의지하고, 헛되이 과장했다.
*21절 말고 말라
-금욕주의도 기승을 부렸다. 일체의 접촉을 금했다. 어쩌면 이것이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금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자의적 숭배와 몸을 괴롭게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이교적 가르침과 거짓 교리에 대한 바울의 종합적인 견해는 20절에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세상의 초등 학문’.
이와 같이 세상의 초등 학문이 파고든 골로새교회의 실태를 이해할 때 우리는 2장에서 궁극적으로 사도가 제공하고자 하는 교훈과 주장하는 바의 목적을 이해하게 된다.
-2절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고 싶었다.
-4절 아무도 공교한 말로 속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7절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고 싶었다.
-8절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하는 자들을 주의하도록 경계심을 일으키고 싶었다.
2. 사실상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된 것.
전반적인 배경이 파악되었다면 우리는 좀 더 깊이 있는 탐구를 시도해야 한다. 사도는 골로새교회에 파생된 다양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지적한다.
(골로새서2장6-8절)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로새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지만 그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너무나 개방적이었고, 귀가 얇았다. 그들은 믿음의 정확한 중심과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데 무능력했다. 사실상 모든 세상 초등학문에 귀를 열었다. 어느 것 하나도 그들에게 중대한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계심을 유발시키지 못했다. 어떤 노략질하는 자들을 주의하지 않았다. 그들의 뿌리는 너무나 얕아서 언제든지 뽑아서 다시 옮겨 심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처음 받은 교훈을 믿음으로 굳게 지키지 못했다. 다른 모든 교훈들도 그들에게 흥미를 돋구었다. 그들의 분별력은 매우 유치한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시 그들을 복음의 소망 안에 세우는 수고를 감수하기로 맘먹었다. 1장 21-23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고 싶어하십니다. 만약, 당신들이 이 믿음 위에 심기우고 복음의 소망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바로 나 바울은 이 일을 위해 복음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다시 당신들을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기로 맘먹었습니다. 당신들은 무분별한 초등학문을 무차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또 다른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난마저도 제 육체에 채우겠습니다. 당신들이 잘못 배운 것들을 바로잡아주겠습니다. 비록 그것이 내게 괴로운 일일지라도!”
또, 하나 문제의 원인은 2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부족이었다.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모든 부요함,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살펴볼 어떤 통찰력내지 지식의 능력이 있었다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 피상적이었다. 교회 안에 자리 잡아야 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 중심에 자리 잡지 못했다. 교인들은 제각각 자기 성향에 맞는 대로 외부로부터 들려주는 가르침에 혼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유발시키고 있었다.
3.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고.
2장 7절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 된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여기서 특별히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란 사도의 권면이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도는 여기서 왜 갑자기 감사에 대해 말하는가. 그리고 이 감사는 어디로부터 유발된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었을 때, 올바른 교훈을 쫓아 믿음에 굳게 섰을 때 유발되는 감사함이다. 그때야말로 감사함은 넘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이 교훈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 말씀은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 믿음과 교훈의 깊고 넓은 것에 뿌리를 박으면 박을 수록 감사함이 넘치게 될 것이란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믿음의 터를 세우지 못하고, 깊이 박히지 않게 될 때 우리는 감사와는 멀어진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파생된 또 하나의 치명적 문제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처음 받은 교훈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된 복음의 기쁜 소망을 망각해버렸다. 처음에 그것은 그들을 참으로 깨닫게 한 날부터 자라게 하는 어떤 원동력이자 큰 기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지금은 영지주의와 유대교적 율법주의, 신비주의와 금욕주의가 혼재되면서 참된 복음의 소망과 기쁨, 감사와 즐거움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린 복음은 존재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7절에서 특별히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언급하는 이유를 명쾌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골로새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지 못함에 따라 받은 교훈을 망각해버렸다. 믿음 위에 세워지지 못했다. 그 결과 자연스레 그들은 혼미하게 되었다. 바울의 복음이 맞는 것인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가 맞는 것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그들은 감사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한편, 이는 사도가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인 치료책이 무엇이지 알게 해준다. 적어도 우리가 골로새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과 그 원인을 이해할 때 우리가 그와 같은 이단적 학설과 감사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힘써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탐구하는 시도를 해야한다.(골2:3) 더불어 그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는 원동력이다.
4. 적용.
1) 오늘날도 많은 이단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 사도의 경고처럼 누가 철학내지 헛된 속임수로 우리 믿음을 노략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이란 것은 대학강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견해며 사상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생활 속에 우리가 만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 속에 이미 수많은 철학이 산재해 있다. 우리는 특별히 사람들의 말과 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갖게 되는 소위 불신앙적 생각이나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많은 부분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던지는 불신앙적 질문과 발언으로부터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두려워해야 된다. 그리고 명심해야 된다. 우리는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2) 최근 신천지 사상이 성도들을 노략질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우리를 당혹케 하는 일도 있다. 오랫동안 교회의 중앙부에 있다고 생각했던 분들도 노략된 것이다. 우리는 좀처럼 그런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심기우지 못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의미에서 감사를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우리는 특별히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바울이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이 넘치게 하라’고 당부하는 것을 기억하자. 감사는 신앙의 원동력이며,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이 아닐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종의 극기훈련이 되고 만다. 인내하는 것과 극기는 다르다. 많은 이들이 신앙의 중반기로 접어들면서 처음 신앙의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자 차츰 의무와 습관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마치, 지쳐있지만 멈춰 서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그저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바로 그것이 극기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라도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런 생각을 위안 삼아 단순히 걷고 있는 것이 시험이란 것이다. 누구든지 그런 사람 옆에 와서 치면 넘어질 것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처럼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고민해야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탐구하고, 감사함을 경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