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보석_2012.02.1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2.)

 

(시편7: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정직에 관한 가장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성경인물이 있다면 분명 다윗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성경의 위인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다윗의 일생과 삶의 은밀한 부분까지 우리로 하여금 들여다볼 수 있게 성경을 기록해주셨다. 마치 그것은 경주 대릉원에 가서 천마총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분들을 그저 밖에서 보고 있는게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 고분의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감상할 수 있듯이.

 

다윗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다윗을 사랑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다윗은 참으로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다윗만큼 수많은 대적과 많은 위협을 겪은 인물도 많지 않다. 어찌보면 다윗은 수많은 대적과 위협을 지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남았기에 마지막 그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일 게다.

 

한편, 우리가 다윗을 보는 것과 반대로 다윗이 자신을 바라볼 때는 어떨까? 우리가 다윗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허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직에 집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적나라한 죄상이 적나라하게 까발라진 입장에서 자신의 허물을 생각할 때 많은 고통도 감수해야 했다.

 

유독 다윗이 우리에게 많은 위로를 주는 이유가 있다. 그의 특별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직한 회개와 양심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었고,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귀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반열에 올라갔다. 그러나 반대로 다윗의 위대한 대적 사울을 생각해보자. 성경을 보면 사울이 도덕적으로 범죄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실제로 그가 얼마나 도덕적이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사울의 삶에서는 어떤 눈에 띄는 범죄의 행적이 없다. 다만,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정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무엘을 대신에 제사를 지낸 것,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은 것,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 등 그는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가 망하게 된 가장 치명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다윗을 보자. 그는 수없이 실패했다. 그의 잘못들을 유심히 보면 그는 참으로 그 답지 못할 때가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위대한 장군이자 시인, 왕이자 하나님의 사람이면서도 때때로 그릇된 판단과 무절제로 오점을 남기곤 했다. 그러나 그가 사울보다 더 위대해졌다.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정직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늘 자신의 실패와 잘못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상한 심령으로 나아간 사람이다. 그는 범죄하고는 이내 자신의 상태와 문제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탄원했다. 긍휼을 구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게 된다. 하나님은 강하고 유능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늘 자신의 양심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쏟아내고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다윗은 그러한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이렇게 말했다.

 

(시편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우리가 늘 완전하여서 하나님 앞에 조금도 꿀릴 것이 없는 완전함을 갖춰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완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충분히 아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오점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상한 심령으로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을 더 사랑하신다. 사울은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으로 나아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행위가 의로웠던 바리새인은 조금도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떳떳했다. 그러므로 그는 상한 심령을 배우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런 의로운 마음을 서글프게 바라보신다. ?

 

(22: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우리가 의롭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오만이다.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완전함 속에서도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재발견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상한 심령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의인이다.

 

욥이 왜 그 많은 고난을 받았던가. 바로 앞서의 욥기서의 고백이 욥이 깨달은 진리였던 것이다. 욥은 바리새인처럼 의로웠다. 적어도 욥 역시 하나님 앞에 바리새인처럼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 정직하고 순전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그는 자신의 순전함을 의지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럼으로 해서 그는 상한 심령으로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체험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런 욥을 사랑하셔서 그로 하여금 고난을 통해 그가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며 모든 자신의 완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하셨던 것이다. , 단련하여 정금같이 되게 하신 것이다. 정금. 의로울 뿐만 아니라 상한 심령과 연약함을 알고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해보이고 잘 갖춰진 사람은 늘 일등이고, 우월해보이지만 부족해서 늘 상심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다시 노력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 사람. 그 사람에게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바로, 그런 넘어짐과 세워짐의 반복을 통해 삶과 자아와 인생에 대해 깊은 것을 통찰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늘 일등만 하는 우월한 인자의 사람은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우리 심령의 깊은 곳을 감성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많이 부러졌지만 끊임없이 재기해본 사람이다. 마치, 사울이 아니라 다윗처럼. 그래서 우리는 다윗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그의 시편은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위로의 시()이다.

 

그리스도인.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정직함이다. 그리고 상한 심령이다. 다윗은 정말 수치스러운 죄를 우리에게 들켰다. 그러나 그가 아름다워진 것은 그 모든 것에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허물조차도 아름다움으로 재기되었다.

 

내가 가장 크게 고통 받는 게 있다. 내가 정말 정직하지 못하다는 진실이다. 내 삶의 많은 모양과 구석에서 나는 정말 정직하지 못하고, 위선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나를 상하게 한다. 나의 거짓에 대해 무릎을 꿇을 때 나는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되묻곤 했다. 그리고 다윗에게 도움을 청한다. 나는 정말 떳떳하지 못한 위선과 거짓말쟁이지만 나 역시 다윗 당신처럼 하나님 앞에서 다시 정직해지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긍휼을 입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다윗이 가진 정직한 양심 그것이 나에게도 동일한 소유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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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2012-02-1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람앞이 아닌 왜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 자신은 정직하지 못할까요?
마음을 토해내지 못할까요? 내마음을 보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죄를 지으면 숨고 싶고 감추고 싶은것이 자녀들의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보니 저도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고백하는것이 참 어색하네요.
그만큼 습관이 안되어 있었던거 같네요. 오늘부터라도 정직한 대화를 시도해야겠어요~


 

베어스 스타트(4): 정체성의 재발견_2012.02.09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1.)

 

(히브리서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사람은 곰이 아니다. 거기서부터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단적으로 말해보면 우리가 야생의 곰이 지닌 정체성을 기준으로 놓고 보게 될 때, 동물원의 곰은 진정한 곰이 아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말이다. 그러한 비교를 그리스도인에게 고스란히 대입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우리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 되는 꼴이다. 우리는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분명 이런 직접적인 대입은 현명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이런 결론은 자멸이나 다름없다.(더 이상 내가 성경과 묵상을 반복할 필요성도 사라진다.)

 

한편, 동물원의 곰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야생의 곰처럼 동물원 안에서 사냥하는 연습을 하고, 스스로를 삼가 훈련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 동물원의 곰은 절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본능만 따를 수 있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짐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사람이다. 사람은 짐승과 다르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고 스스로를 통솔하고, 훈련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한 탐구에 깊이 들어간 인간들은 종교적인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적어도 현대적인 그리스도인이 정체성을 재확립하기 위한 방편으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삶을 동일하게 경험하겠다고 결론 내리게 되면 역시 오산이다. 물 위에 서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모함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는 일부러 환란을 소망하고, 순교를 향해 돌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모방을 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그리스도인이란 분명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훈련과 징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바울?)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이며 참 아들이 아니라고 정의했다. 이 성구의 앞뒤를 잘 살펴보면 그는 징계로 인해 낙심하는 성도들에게 징계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와 징계야말로 참으로 구원받은 증거가 되고, 사랑 받는 증거란 것을 강조하면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려고 하고 있다.

 

톱과 칼, 환란과 죽음으로 인해 성도들은 낙심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이 왜? 그들도 우리처럼 의구심을 가졌다. 그런 의구심은 필연적으로 영적침체로 이어진다. 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특별한 의미를 일깨움으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신적인 훈련과 연단, 징계와 곤란이 동일한 방식으로 지금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반영되고,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무엇인가? 바로, 지금 우리들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 아래에서 훈련 받고 있으며, 징계 받고 있으며 참 아들로 인정 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훈련과 인내와 시련과 고난과 슬픔과 고통이 수반된다. 우리는 거듭났기 때문에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훈련과 연단을 받고 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다를 바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분명한 정체성의 증거이다. 참 아들이 아니고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아들의 대우. 아들의 증거.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가장 근본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시대에 따라 살아가는 라이프 스타일과 모습들이 달라져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련의 동일한 원리와 방법들을 따라 다루심을 입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야생을 떠나 동물원에 갇힌 곰은 더 이상의 자아성찰이란 것이 무의미한 짐승에 불과하며, 얼마든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곰으로 전락할 수 있을지언정. 사람인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다른 법이다. 우리는 어떤 환경, 어떤 시대, 어떤 자리에 머물든지 간에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의 영속성 속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섭리와 뜻을 따라 우리 삶에 대한 의무와 방향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스스로를 삼가 절제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익혀 나가면서 훈련 받고 있다 한다라면 우리의 정체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될 때야말로 우리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무튼 이제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우리는 굳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위대한 순교와 가눌 수 없는 환란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거나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절차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도 선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하심을 쫓아 훈련과 연단, 징계가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참 아들이며 사생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초대 성도와의 그 많은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고도 가장 중요한 하나의 동질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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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스 스타트(3): 불가항력적인 것_2012.02.0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10.)

 

(요한복음 4: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해가고 달라져 간다. 불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의 섭리를 따라 나누어진 법칙과도 같은 것들이다. , 종류별로 구별되어진 생명체들. 인류와 짐승, 암컷과 수컷. 나무와 식물. 모든 자연들. 그것은 불변한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왔다. 사회적 관습. 유행이나 라이프 스타일. 건축기술이나 과학기술. , 본질적으로 변경시킬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고 생존해가는 사회적인 면에서 항상 변화가 있었다. 생각과 가치관의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져갔다. 역시, 사람은 사회적 존재임이 분명하다.

 

좋다.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에도 변화를 주었다. 우리는 앞서간 세대의 그리스도인과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서 발견되는 이질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변명도 있다. 각 세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부러 순교하기 위해 앞다투어 적지에 뛰어들어야 할 의무는 없다. 다시 지나간 세대와 같은 환란과 핍박이 우리에게 주어지길 소망할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탐구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다워 질 수 있는가? 그것일 것이다. 우리는 분명 지나간 세대보다 강인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 의지에 있어서 연약하다. 우리는 칼 앞에 서 있지는 않지만 다른 위험과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우리의 모습이 그저 변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과 우리를 위협하는 세상과 대상들이 달라진 것이다.

 

무장해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순교는 칼과 피가 아니라 나태와 무기력이다. 그리고 무절제이다.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과 벗이 될 수 있는 현실 앞에서 한 올 한 올, 근신과 구별된 마음을 잃어가는 우리의 정신과 가치관을 단단히 동여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의무이자 우리의 일반적인 순교정신이 될지 모르겠다.

 

언제든지 현대는 앞서 간 세대에게 빚진 세대이다. 순교의 피를 흘려 복음을 간수한 세대의 빚을 우리는 지고 있다. 우리는 피 흘리지 않지만 전달받은 그 복음에 참예해 다시금 이 복음의 간수와 전승을 위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한다. 아니, 고군분투 해야 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의무를 완성하는 것이며, 이로써 후세대가 우리 세대로부터 빚진 자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 너무 나약해진 우리들은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세상을 누리지만 세상과 벗이 되지는 않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그리스도인을 환영하는 세상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지만 우리는 스스로 절제해야 한다. 우리는 정당하게 누려야 되지만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당하게 누려야 되지만 무절제해서는 안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삼가 하는 것이 가장 치열한 싸움이자, 오늘날 가장 그리스도인다워지는 방편이라 나는 믿는다.

 

다시 말해,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문명의 혜택과 물질의 이기를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로운 활용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 ,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위험이다. 우리가 물질의 이기와 문명의 혜택을 활용하고 적절히 운용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로움이 점점 우리로 하여금 무절제로 나아가게 한다. 또한, 하나님보다 세상과 문명과 이기를 더 의존하게 만들고 있다. 바로, 이점에 대해 우리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파리바게뜨에 갈 수 있다. 빵이 필요해서 우리가 파리바게뜨에 가게 되는 것은 거의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짧은 외출에서 출출해서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하나 사먹는 일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할 것이다. 나는 경우에 따라 카페베네에도 앉아 있을 것이다. 지나간 세대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우리가 현재 누려야 할 문명의 혜택조차 거부하는 방식을 취한다면 그것은 율법적인 정신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바로 이런 현대적 라이프 스타일로 말미암아 결국, 은근히 세상을 사랑하고 의지해 가고 있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경계가 모호해질 때, 우리는 문명으로 말미암아 무기력해져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 동물원에 있는 그리스도인처럼 말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대가 왔다. 자신을 삼가고, 절제하라는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대가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명의 이기와 혜택을 즐기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자신을 삼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더 많은 기도와 자아성찰과 회개가 동반되어야 한다.

 

나는 극장에도 간다. 그러나 영화를 즐기지는 않는다. 따로 영화를 다운받거나 구해서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내가 극장을 가는 경우는 단 한가지의 경우이다. 가족이나 형제, 자매님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극장을 가게 되는 경우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극장 자체를 가지 않기로 한다면 더 좋겠지만 꼭 그렇지 만은 않다. 영화를 보게 되는 이유는 사회적인 이유일 뿐이다. 그것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나 혼자 거룩하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 어쩌면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바울도 말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사람과 사람이 공존해간다는 이유로 인해 지나치게 자신의 신념만 내세운다든지 남을 수용하지 않고, 혼자 거룩해지려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절제된 범위 안에서 자신을 개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 굳이 극장을 피하려고 까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구별된 의식은 있다. 적어도 내겐 그런게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불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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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스 스타트(2): 동물원에 있는 그리스도인_2012.02.0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9.)

 

(히브리서11:36~38) 또 어떤 이들은 희롱와 채찍질 분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초대교회의 시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들처럼 핍박과 박해와 고난과 고초에 대해 가장 선명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세대가 있을까? 핍박의 세대에 있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칼날 앞에 서는 것이었다. 그들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단 한번도 칼 앞에 서 본적이 없는 세대가 왔다. 우리는 TV 앞에 앉아있는 것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건대 적어도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히브리서 1136~38절을 전적으로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저 말씀의 한 글귀도 헤아리지 못한다. 동일한 구세주를 쫓아 동일한 복음과 그 은혜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서로의 삶의 정체성에 대해 우리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 깊은 이질감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고민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궁극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바로,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 질문이다. 사실상 이 질문은 거의 난제에 가깝다. 어느 누군가가 핍박의 세대의 그리스도인과 풍요와 사치의 그리스도인을 놓고 어느 누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 물론. 우리는 흑백의 논리로는 그 어떤 해답도 찾지 못한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답을 정의 내릴 기준을 찾을 수 없다.

 

마치, 동물원에 누워 관람객의 과자를 받아먹는 곰을 보면서 숲과 강을 헤쳐 달리며 연어를 낚는 야생의 곰을 떠올리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 곰들은 서로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곰들이 서로 마주쳤다고 상상해볼 때, 그들의 생김새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곰을 보고 있는 꼴이 될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다른 것일까?

 

동물원에 드러누워 과자를 받아먹고, 사육사가 정성스레 다듬어주는 물고기를 먹고, 그저 어슬렁거리며 무기력하게 동물원을 배회하는 곰. 겨울이 되면 난방이 되는 인공굴에 들어가 잠을 자고, 봄이면 나와서 해 아래 일광욕을 즐기며 드러누워 자는 곰. 먹고 자는 것에 대해 아무런 염려와 고민이 없는 곰. 추운 겨울 사냥감을 찾지 못할까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는 곰. 모든 것이 부족하지 않는 동물원의 곰. , 내일이면 관람객이 던져줄 맛있는 과자를 받아먹을 상상을 하고 잠이 드는 곰.

 

그러나 단 한가지 잃어버린 모든 것. 바로, 이글거리는 생존의 눈을 뜨고, 몸을 던져 먹이를 사냥하며 거친 자연과 싸워 이기는 투쟁심과 극기력. 혹한의 계절에도 굴하지 않는 생존의 힘. 바로, 진정함 곰의 본능! 숲과 강에서 포효하며 나무를 쓰러트리고, 짐승을 뒤쫓으며 거친 물살을 거슬러 헤엄쳐 연어를 낚는 강인함. 그것이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참으로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곰의 모습이요 정체성이라 한다면 적어도 동물원의 안락한 곰은 진정한 의미에서 곰이 아니다. 아니다. 곰이다. 적어도 DNA.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곰은 아니란 그 얘기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칼날에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상상하지 않는 세대. 더 좋은 집과 차, 더 나은 삶의 복지와 문화혜택을 바라는 세대. 더울 땐 에어컨 아래로, 추울 땐 히터 아래로. 육체의 모든 고난와 어려움에 대해서는 자연적인 섭리조차도 부인할 수 있는 첨단의 편리 속에 길들여진 동물원의 그리스도인. 인공굴의 안락함. 내일 죽을지 모른다는 각오를 할 필요가 없이 내일을 즐길 것을 꿈꿀 수 있는 세대. TV와 오락들, 새로 나온 재밌는 영화. 휴식과 교제를 제공하는 파리바게뜨, 카페베네, 롯데리아. 그러나 알고 있었던가 그러므로 우리가 무기력하다는 것을. 식어버린 열정, 나약한 의지, 무절제함과 무분별한 상식. 잃어버린 신앙에 대한 투쟁심과 도전정신. 그 환란의 세대가 가진 매서운 눈매와 뜨거운 눈물과 희생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지한 오늘의 세대.

 

무엇이 하나님과 우리가 기대하는 그리스도인이었던가.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아무런 공포와 두려움 없이 어슬렁거리며 과자를 받아먹고 일광욕을 즐기는 동물원의 곰 같은 그리스도인? 아니면, 자연의 원리를 따라 본능에 충실하게 자연과 싸워이기며, 세상과 싸워이기면서 혹한의 계절과 공포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생명력과 투쟁심으로 포효하는 야생의 그리스도인?

 

그러므로 적어도 나는 나 자신에게 되물을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맞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DNA만큼은. 그러나 기대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풍요롭고 안락하기 때문에 벌거벗음이라든지, 핍박이나 박해라든지, 고난이나 환란이라든지 그런 세대에 대한 묵상은 고사하고. 누리는 풍요로움 안에서 더 나은 풍요의 집을 짓고, 풍요의 산을 오르고, 풍요의 환락을 꿈꾸고 있는 비참한 세대. 안락과 구경꾼이 던져주는 과자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세대. 고난과 환란 앞에 당당하고 강인한 심장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 앞에 그저 새가슴이 되어버린 그리스도인 세대.

 

참으로 우리는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해 말할 자격이 그 어느 세대보다도 부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다. 참된 성경적 그리스도인의 표준 앞에서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토록 많은 말씀이 선포되고, 그토록 깊이 있는 강해와 가르침이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식어진 가슴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은가.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들이나 우리는 진정한가?

 

오히려 저 야생을 가자. 저 오지의 선교지로 가자. 차라리 그것이 더욱 깊은 가르침이요, 동시에 무기력을 깨우는 참된 능력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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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그리스도인 2012-02-23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글에 대한 제 생각 역시 비슷합니다. 하지만 군대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
또한 반은 문명화된 오지로의 여행과도 비슷해서 현재는 그런 불만은 없지만.
사회에 나가면 저도 역시 비슷하게 될것같습니다. 고민이 많습니다

BH,G 2012-02-23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우리가 성령의 인치심과 복음 안에서 거듭났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본질이겠죠. 다만, 그 이후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대한 문제가 정말 그리스도인 답다라고 할 수 있는지.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을 정체성에 빗대어 생각해봤던 묵상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너무나 다른데 어쩌면 초대교회 성도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힘든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묵상의 마무리도 어떤 환경에 있든 우리가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 안에 관계되어 살아가면서 훈련받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변치 않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면서 끝나지요. 군대라는 환경 역시 형제님이 그곳에서 하나님과 관계되면서 신앙을 지키고, 고민하시는 만큼 형제님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고. 앞으로도 사회에 나와서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고민하면서 살아 가시겠죠.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란 정체성의 한 단면이라 생각봅니다. ^___^
 

베어스 스타트(1): 동물원에서 시작된 사색_2012.02.02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8.)

 

작년 가을 언젠가 동물원에서 곰을 본 적이 있다. 동물원에 있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별로 의욕적이지는 않았다. 날마다 만나는 구경꾼들을 이제는 의식조차 하지 않으면서 좁은 우리에 갇혀 무기력해 보여 그렇게 별로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부는 손님들이 던져주는 간식을 받아먹기 위해 의욕적인 동물들도 있었다.

 

그리고 곰을 봤다. 그 우리 안에 있는 몇 마리의 곰들 가운데 한 마리가 내 시선을 이끌었다. 관람석보다 낮게 패인 우리 안으로 곰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는데, 모여든 관람객들 중 누군가가 과자를 던져주고 있었다. 벌러덩 드러누운 곰 한 마리는 관객이 던져주는 과자를 용케도 입으로 잘 받아먹고는 입을 벌리고 또 벌렸다.

 

그 곰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덩치 큰 녀석이 벌러덩 드러누워 과자를 받아먹는 여유로운 모습. TV에서 보았던 숲과 강을 헤엄쳐 달리며 큰 연어를 낚아채는 곰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 분명, 두 마리다 동일한 모습의 곰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다른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나에게 새로운 생각에 대한 첫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같은 곰이지만 어쩜 그렇게 전혀 다른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정말 곰을 곰답게 하는 것일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곰다운 것일까?

진짜 곰의 모습은 무엇일까? 어떤 모습이든 DNA가 곰이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두 모습의 곰을 같은 하나의 곰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면 그 기준과 근거는 무엇일까?

 

그렇게 나는 처음,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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