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들어 각종 매체에서 연일 어느 뮤지션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생전에는 종종 비호감과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던 그이다. 그러나 새삼 그의 죽음이 증명해 낸 것은 수만은 안티들의 수면 아래 있던 조용한 팬들의 애도였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3,40대 층이다. 나 역시 어느덧 30대 중반이기에 그의 음악적 궤도를 지켜본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나 역시 중고교 학창시절에 그의 음악을 사색하며 지나왔다. 사실 최근에는 더 그러했겠지만, 당시에도 그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지극히 대중적인 동시에 불편한 진실을 감수해야 할 처지였다. 자기만의 음악세계와 철학이 너무나 분명한 뮤지션이었기에 대중의 호불호도 분명했고, 더구나 그의 안타까운 전력이 더욱 그를 기괴한 인물로 전락시켜놓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19살 구원을 받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음악장르를 구애 없이 잡식하던 터라 적어도 그가 어떤 뮤지션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뮤지션으로서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보통의 대중음악이 흥을 돋우거나 정서적 공감을 누리는 것이었다면, 그는 자기성찰을 통해 음악으로 사색할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해주었다.


한편, 이제 영원한 죽음의 문을 지나간 그는 오늘의 나에게는 사실 그 어떤 의미의 대상도 아닐 것이다.그런데 한가지의 여운은 남겨준다. 바로 열망이다. 그는 가수가 아니라 뮤지션이었다. 좋은 곡을 받아 노래를 부르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기스타가 아니었다. 심지어 아이돌의 계보로 출발하였음에도 스스로 그 자리를 비켜갔다. 보통 싱어송라이터라도 전성기가 지나면 더 이상의 자기 음악적 색깔을 담은 새로운 창작물을 생산하기 힘든 법이다. 음악에 대한 도전과 열정, 새로운 철학과 장르에 대한 개발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히 프로듀서로 전향하면서 후배들의 음악을 만들어주는 일에 주력한다.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음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는 자기만의 곡을 만들어 왔다. 그 의미는 음악에 대한 단순한 열정을 넘어 소위 소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란 의미다. 그는 종종 음악을 향한 자신의 열망을 노랫말로 말해왔다.

생애 처음 기타를 사고 음악을 하기로 맘 먹었을 때, 비웃는 친구들 걱정하는 친구들 함께 음악을 시작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그 친구들이 없노라고. 그러나 나는 영원히 원한다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에 길들어지는 것이지만 남들과 닮아가는 사이 꿈은 우리 곁을 떠난다고. 즉, 그는 음악으로 평생 밥 먹고 사는 것이 힘든 현실에서 세상에 길들여져야 했지만, 꿈을 잡았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불안한 미래 때문에 함께 하자고 말하지 못했다고 두 번이나 노래했다. 사랑보다도 음악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의 장례식장에 울려 퍼진 민물장어의 꿈도 그렇다. 민물장어인 자신이 민물이란 생태적 근원을 넘어 바다의 거친 파도 아래까지 가고자 하는 음악적 목표를 위해 자기를 깎고 따뜻한 저녁과 가족의 웃음소리까지 고갤 흔들어 잊어버리며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쉬지 말고 가라하는…. 그만큼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은 고독하기 짝이 없었고, 음계 위의 수도사처럼 음악에 자기 삶을 걸었던 것이다.

 

언젠가 구원을 받은 후 이 곡을 듣게 되었을 때, 마치 난 이 곡이 오지에서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죽어가는선교사의 노래처럼 들렸다. 그에게는 음악이 곧 복음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유가 우리에겐 정말 우울한 명제일테지만. 그런데 이 우울한 명제가 내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너의 복음은 무엇이냐라고. 그가 노래한 것처럼. 이것 아니면 진짜 죽음, 이거 아니면 정말 끝장 내 전부를 걸어보고 싶은 니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한때는 청년의 그 순수한 열정으로 정말 오지의 선교지로 가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죽을 수 없을까? 죽기 싫어진 걸까? 지금 누리는 것이 많아서 포기할 수 없다라는 단지 그 변명이 아니었다. 그때의 순수한 열정에 못 미치는 것도 물론 중요한 변명의 하나이겠으나, 오히려 더 두려운 변명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나 하나 희생하고 죽어서 될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이토록 큰 두려움일 줄은 과거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열정뿐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패기와 자신감마저 움츠러든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아도니람 저드슨과 허드슨 테일러를 동경했지만 이제 나는 처자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하지 않으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그 말씀 앞에서 망설이고 심각하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열망이란 것이 대상을 향한 그저 자기 혼자만의 열정으로만 결론 지어지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열정도 중요하지만 자기에게 책임지어진 어떤 기대와 의무 조차도 져버릴 수 있을 만큼 소명과 사명감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던 거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인생을 소명과 사명감으로 불태울 수 있다라면 그것은 가히 위대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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