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오는 날개를 펼치고_2011.12.06

옛날 유난히 크고 보기 싫게 태어난 오리새끼 한 마리가 있었다. 그 이름은 미오(미운 오리 새끼).
미오는 형제들과 다른 외모 때문에 항상 구박을 당하고, 엄마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자기가 자란 농가를 뛰쳐나와 숲속의 작은 새들을 만나지만 역시 미오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외로운 미오. 그는 물가에 비친 자기를 본다. 그 호수는 물결이 일렁이고 미오의 모습은 일그러져 있었다. 미오는 그 물결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던 어느 날 미오는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한 무리의 백조떼를 본다. 우아한 자태와 품위 있는 비행으로 하늘을 수놓는 백조의 무리를 말이다. 그 아름다움에 반한 미오는 자신의 날개를 펼치고 그 백조의 아름다운 비행에 함께 승차한다. 그리고 미오는 자신이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닌 한 마리의 아름다운 백조였음을 알게 된다.

오리들의 틈에서 자신이 백조인지도 모른 채 외롭고, 방황하던 미오는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고 자기에게 찾아온 행복을 자만하지 않으며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의 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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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
 

얼마 전 목사님의 설교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사실 가장 그리스도인다워지는 중요한 방편은 말씀과 기도이다.(딤전4:5) 나는 이 원리를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와 말씀의 부족은 우리 영적 침체의 가장 실제적인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인 문제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가게 된다. 기도와 말씀을 충분히 누릴 시간적인 여유가 있느냐는 것. 어쩌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어려움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분주할 수밖에 없는가?’

오늘날의 이 분주함. 복잡함. 다양함. 거대함을 생각해볼 때, simple life를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에게 분명 최대의 위기가 온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시간이 나더라도 너무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고 활용하고 개발하기 위해 시간을 소모해야 하기까지 하다. 현대인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사회적 인간으로 부합되기 위해 우리는 일반적인 생활에서조차 컴퓨터, 스마트폰, 운전, 세탁기, mp3, 네비게이션, 각종 기계와 기구 조작법, 법률과 상식 등 속지 않고 살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한다. 그런 것들을 포기하면 낙오자에 가까워진다. 세상의 낙오자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서글픈 현실일지 모르겠다. 차라리 머리 밀고 속세를 떠난 중이 되면 세상의 낙오자가 부처가 될지 몰라도. 목사님 말씀처럼 문명의 역기능이다. 문명이 발전하는 만큼 영적, 정신적 세계도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퇴한다.

영혼이 피폐해지는데도 세상의 연을 끊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세상을 사랑해서? 적어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세상이 밉지만. 미워도 다시 한번. 어쩔 수 없는 굴레와 같다.

오늘의 시대가 바로 문명이 만들어 놓은 소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하루를 직장에 쓰는 시간보다 봉사를 하는 더 써야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저축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자동차나 집,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이나 우리나 그것들이 다 필요하다. 그것을 소유하려면 지불이 요구된다. 지불을 하려면 벌어야 된다. 벌이를 하려면 세상에 나가 일해야 한다.

더 이상 자급자족하던 시대는 없다. 오늘날의 life style은 자급자족을 거의 전멸시켜 놓았다. 디자인과 기능의 발달. 거기에 날개를 달아준 대량생산과 교통의 발달은 거대한 도시문명을 이룩시켰다. 그리고 이 도시 위에는 오직 소비만이 생존하게 되었다. 메이커 자동차를 대체하기 위해 직접 차를 만들어 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파트를 대체하기 위해 손수 터를 취하고, 오두막을 지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겨울 스웨터 하나도 손수 짜서 입는다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 오늘의 시대는 구매와 소비의 시대이다. 모든 것이 디자인과 기능성을 갖춰야 제격이 된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투박하고 기능성이 미달되는 자급자족은 city life의 밸런스를 깨트린다. 도시의 기반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자본이 해마다 소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이 소비의 시대에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이것이 마귀가 만들어 놓은 도시문명의 미학 뒤에 숨어있는 노림수 일 것이다. 어쩌면 이 소비의 시대가 바로 오늘을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는 가장 큰 영적 침체의 원인 중 하나이진 않을까?

가나안 점령 때, 단 지파는 가장 비옥한 땅을 소유했지만 가장 먼저 우상숭배에 빠졌다. 기독교의 비율이 높은 나라가 잘 산다는 일반적인 통계가 있다. 하나님을 믿고, 우상을 적게 숭배하고 문명이 발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문명의 발달이 우상숭배를 야기시키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랍다. 예기치 않은 어느 순간에 뒤집힌다. 어쩌면 이미 우리도 예외가 아닌 길로 접어들었는지 모른다. 문명의 발달이 편리와 만족과 자부심과 영광을 주었지만 차츰 그것을 유지하고 버티고 지키기 위해 허덕이고 있다. 영광을 지키기 위한 막대한 사회 간접자본의 충당을 위해서라도 소비와 자금의 유동이 촉진되어야 한다. 브레이크가 마모되기 시작한 미친 소비의 시대가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 마치, 오늘날 위태로운 미국이 최초의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

그 소비의 거친 물결 속에서 함께 조급해지고, 다급해지고 허덕이기 시작한 우리 역시 영혼을 돌아볼 삶의 여유는 너무 부족해 보인다. 무서운 징조의 시작이다. 더 많은 복음의 역사가 이제 중국에 있고, 몽골에 있고, 파키스탄에 있고, 도시문명과 소비시대의 파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저 가난한 나라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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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글랜드발 복음열차는 불타고 있다. 

인류역사상 복음의 가장 큰 수혜지는 어디였을까? 부족하나마 나의 지식으로는 아마 잉글랜드와 미국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개신교 신학의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프랑스 출신의 존 칼빈(이것 역시 영어식 이름이다. 프랑스식 그의 본명은 장 칼뱅)이지만 정작 청교도의 나라, 복음주의 신학의 최대 활동지는 항상 영국이었다. 정말 청교도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국은 복음에 있어서 굉장한 수혜자였다.

뿐만 아니다. 청교도 혁명과 청교도 주의를 기반으로 18c 영국대각성 운동. 그 중심엔 야외집회로 명성을 떨친 조지 휫필드와 감리교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존 웨슬리가 있었다. 물론, 역사적 고증은 휫필드가 실제적인 감리교의 창시자라고도 한다. 아무튼 이 위대한 두 인물이 버틴 영국은 18c 복음의 왕국이었다. 전 세계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뜨거운 곳이었다.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배출되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대각성운동과 복음의 파워는 훗날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 후대로 인해 미국에까지 복음주의를 꽃피웠다. 조나단 에드워즈, 디엘 무디, 좀 다른 노선을 걷긴 했지만 부흥사 찰스 피니까지. 언제든지 신약성경의 시대 이후를 논한다면 우리는 영국과 근세기의 미국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해외여행을 갈 기회가 있다면 영국의 복음주의 흔적을 찾아 가보고 싶었다.

조지 휫필드가 웅장한 목소리로 야외로 청중을 불러모아 영혼을 구원했던 곳 해넘산. 그 산 아래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집해서 휫필드가 외치는 복음을 들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떠한가. 이제는 정말 추억하고 싶지 않은 두 나라가 되어버렸다.

미국은 아직도 70%가 개신교도이며, 청교도적 분위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변했다. 크리스마스라고도 부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대통령은 여전히 성경책에 손을 얻고 선서하지만 세계 전쟁을 불사한다. 마약, 살인, 범죄, 도덕적 붕괴 사회 곳곳이 병들어 있다. 메가처치 교회들은 부정 축재로 무너지기도 한다. 국회는 동성애를 합법화 했다. 교회마저도 동성애 결혼을 인정하는 추세로 거의 변질되고 있다.

영국은 더 심하다. 복음이 전해졌던 교회당은 이제 술과 향락이 가득한 클럽으로 바뀌고 있다. 교회들이 급속히 사라져 간다. 교회학교는 거의 씨가 말라간다. 10대들의 문화 속에는 ‘임신’이 하나의 유행이 되기도 한다. 교사와 제자들이 부정한 관계를 수시로 맺는다. 영국에서 자주 쇼킹한 사건들이 들려온다. 거의 도덕적으로 붕괴된 것 같다. 심지어 영국의 모 국회의원도 10대들의 잦은 임신 등의 문제를 놓고 ‘영국은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라고 꼬집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봤던 위대한 부흥과 복음의 수혜지였던 나라가 이제는 없다. 잉글랜드에서 출발한 복음의 폭주기관차는 영국을 이미 한참 떠났다. 이제 영국발 복음기관차는 불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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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부스
 

스튜는 공중전화부스 안에 있다_2011.10.04

영화를 아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 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 싶다.


폰부스꽤 오래된 영화인데 나는 한참 뒤에야 이 영화를 봤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매우 성경적인 교훈을 담고 있음을 알고, 지금껏 소장하고 있다. 허영과 교만이 가득한 연예홍보업자 스튜가 폰부스에 갇혀 회개하기 까지의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교훈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자신의 교만과 위선, 기만과 허영에 대해 회개할 것을 요구받는 주인공 스튜는 자기만의 논리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하려하지만 숨어서 그를 겨누고 있는 암살범은 모든 사람 앞에서 스튜의 거짓을 폭로함으로 자백할 것을 요구한다. 영화의 말미에 가서 스튜는 자신의 파렴치함을 사람들과 매스컴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며 자백하고, 눈물을 흘린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이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스튜역의 콜린 파렐의 연기도 정말 탁월하다.


스튜는 말한다. 나는 이용가치 있는 사람만 상대했고, 우쭐대는 맛에 살았고 비싼 옷과 시계로 자신을 과대포장하면서 열등감을 감춰왔다고. , 거짓을 매스컴에 팔아먹으며 속고 속이는게 자신의 생활이었다고. 이 시계도 가짜고 자신도 가짜일 뿐이라고. 자신의 참모습을 알면 실망하게 될 거라고.


처음의 그와 달라진 것은 그가 자신을 깨닫고 인정했으며, 있는 그대로 고백했다는 것이다. , 그가 정직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겸손, 사랑. 그렇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정직이라고 말한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정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나는 수없이 느끼고 느낀다.


우리는 늘 부족하고 온전치 못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너무나 부정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경건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 우리가 매일 자백하게 되는 회개의 목록들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정직함으로 살지 못함으로 인해 일어난 잘못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직을 요구하신다. 우리의 정직함을 보길 원하신다. 우리의 그릇됨에 따지기에 앞서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고 그릇되게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을 아시므로 우선 우리가 정직하게 자신을 낮추고 자백하며, 정직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슬퍼하고 자백하길 원하신다.


왜 다윗이 아름다운가. 다윗이 온전한 사람이기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이 아니었다. 그도 너무나 많은 순간 그릇되이 행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슬퍼할 줄 아는 정직함이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강할 수 없었다. 그의 고난이 만들어준 겸손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의 수없는 시행착오와 허물과 심지어 간음과 살인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시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까지 칭찬해주셨다.


폰부스에서 흐느끼는 스튜를 볼 때마다 나는 이 정직함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된다. 그는 왜 부스에 갇혔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허영과 거짓말로 스스로 기만하고 자신을 자랑하며 살아왔지만 그런 거짓된 모습에 눈멀어 자신의 실체를 정직하게 보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말 이 영화가 내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 역시 정직하지 못할 때, 언젠가 내가 저 부스에 갇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울부짖는 스튜의 모습을 보며 나는 되뇌곤 한다. ‘저 부스 안의 스튜는 바로 나구나! 저 부스 안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고 정직해져야겠다.’


정직은 그리스도인의 최대 덕목 중 하나이다. 스튜는 공중전화부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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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로 인하여_2011.07.23.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맴돌면서 그 길의 험악함과 그 길의 먼 여정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였다. 잠언에는 마음이 상하면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물었다. 가데스 바네아의 반역으로 인해 무려 40년을 광야에서 맴돌아야 했다. 형제 부족인 에돔의 적대로 인해 먼 길로 돌아가야 했던 그 긴 시간. 얼마든지 백성들의 마음은 상할 만 했다.

이스라엘의 반역, 그 불순종이 그들의 여정을 험악하게 했다. 그들의 여정을 너무나 고달프게 했다. 그들의 마음을 실망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다. 불순종의 대가는 이토록 쓰라린 것인가.

내 신앙의 여정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불순종과 오만으로 인해 먼 여정을 되돌아가고 있다. 고달픈 시간을 보냈다. 그 길의 험악함으로 인해 낙심하기도 했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거의 2년 여 만에 나는 다시 되돌아온 기분이다. 불순종이 나로 시간을 허비하게 했다. 배운 것은 있지만 돌아오지 않았으면 더 나아갔을 것을 아쉬움이 남는다.

어떻게 하면 변함없이 겸손할까? 어떻게 하면 변함없이 순종할까? 어떻게 하면 세상의 목적이 아닌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내 삶의 목적과 주인으로 삼을까?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니은 진노하신다. 스스로의 불순종으로 그 길의 여정을 험악하게 해놓고 매번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다니! 불뱀들이 백성들을 공격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급한대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아무리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해도 그들의 도움은 여전히 하나님께만 있다. 장대 위에 놋뱀을 달고 바라보라신다.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께 반성하고 도움은 구하지만 여전히 순종하지는 않는 모습.

하나님은 언제나 의중을 보신다. 마음의 진정성을 시험하신다. 정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반성하고 돌이킨다면 순종하는 행위로 증거되어야 한다. 놋뱀은 그들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도구가 되었다.

하나니은 길의 여정을 되돌아가는 나에게도 놋뱀을 보여주신다. 바라보라고 말이다. 내 생활의 무엇이, 어떤 현상이, 어떤 상태가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인 것일까?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무릎 꿇고 순종할 수 있길 기도한다.

길의 여정이 우리를 낙심케 한다. 얼마든지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간구하자. 여호와의 도우심과 긍휼, 그 은혜를 말이다. 그리고 놋뱀을 찾자. 내 생활, 내 형편, 내 환경 어딘가에 세워져 있는 장대 위의 놋뱀을 말이다. 내 진정성을 살피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워두신 놋뱀을 찾아보자. 바라보자. 순종하자. 다시 굴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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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2011-08-3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놋뱀을 보여주셔도 바라보지 않는 태도가 마치 제 모습을 보는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저도 항상 두렵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스스로 모르지 않기 때문에 더 두렵습니다. 참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