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르메르트의 책은 <알렉스>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별로다 싶어서 이 책 <실업자>를 살 때는 많이 망설였었다. 이런 톤은 나한테 잘 안 맞는다 해서 사실 사놓고도 계속 외면하고 있었던 책이다. 간략한 내용을 읽어봐도 뭐 그럭저럭 버틸 수야 있겠지만 재미는 담보할 수 없을 지도.. 그러다가 올해의 첫 책으로 고른 건.... 뭥미. 그냥 아무 생각없이 골랐다고 보여지는..;;;;

 

새해부터 <실업자>라는 제목의 책을 읽다니. 쩝. 암튼 주인공 알랭 들랑브르는 57세의 가장으로 마음 잘맞고 사랑스러운 부인과 선생님, 변호사인 두 딸을 둔 사람이다. 대기업체의 인사부장으로 꿈을 키우다가 회사가 합병되면서 젊은 사람에게 밀려나 실직한 지 4년째. 이젠 어디 공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취직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지원서를 내던 중, 어느 회사에서 지원서에 대한 답을 받으면서부터 인생이 바뀌게 된 것. 나이가 많은데도 1차 면접을 통과시켜주고 결국 최종까지 올라간 데 마음껏 고무되었으나 최종심사라는 것이 가상 인질극에서 그 회사의 임원들을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 나중에 해고를 담당하게 될 최종 사람을 뽑는 데 참여하는 것이라니. 가족이 다 반대하는데도 알랭은 신들린 것처럼 이 일에 통과해야겠다고 갖은 무리수를 다 두게 된다. 그렇게 준비를 나름 하고 있는데, 이 채용의 승자는 정해져있다는 얘길 전해듣고 목숨을 건 전략을 짜게 된다는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50대에 실업자가 된다는 것. 그 감정의 추이. 변화해가는 세세한 부분들. 가족간의 관계. 떨어진 위신. 끝없이 초라해져가는 자신에 대한 반항감. 현실에 대한 분노 혹은 체념. 그러다가 기회를 만났고 그 기회가 내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바뀌어가는 모습.. 등이 참으로 구체적으로 신랄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었는데... 정말 씁쓸한 결말이라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날 정도다.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내게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현재의 것들을 충족시켰을 때 과연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들은 보존될 수 있는가. 무엇을 위해 우리는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끔 하는 책이었다. '실업'이라는, 일하는 사람에겐 정말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각자의 상이한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행동들... 에 대해 이해해보기도 했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런 것들이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좀더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이가 원수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온다는 거고 사실 생각할수록 쭈뼛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내용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괜챦은 소설이고..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이야기이다. 새해에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제목이었지만 (실업자라니.. 생각할수록..ㅜ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 첫 소설로 부족함이 없었다.

 

 

 

 

 

 

 

 

 

 

 

 

<알렉스> 이외에도 두 권 정도 더 번역되어 나와 있다. 척 보니 <알렉스> 류라 선듯 손은 안 가지만. 일단은 보관함에 넣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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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09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원이 되는 분들은... 고작 60도 안 된 나이부터
'일자리 없어서 헤매야 하는' 삶이란
참 어찌 할 길 없는 모습이곤 해요.

스스로 삶길을 여는 능력을
스스로 잃은 셈이라 할까요...
소설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 삶과 사회 이야기라서..

비연 2014-01-09 18:04   좋아요 0 | URL
대부분이 회사에 얽매여 있고 회사를 나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나이만 먹어 있으니 참 난감하죠.

울보 2014-01-09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십대가 지나가면 더 실업이란 말이 더 절실하게 들리지요.
참 많은 생각을하게 하네요
그 나이에 드는 부담감이 너 따르지는 친구 신랑들 이야기를 들으면 갑갑하지요.

비연 2014-01-10 15:38   좋아요 0 | URL
그런 것 같아요. 다가올 미래가 지나온 과거보다 길지 않을 때
사람들은 불안해지는 것 같구요.
이 책의 여러 문구들이 이런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어요.
 

 

울음이 타는 가을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너보다도 나보다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겠네.

 

 

 

마종기의 <우리 얼마나 함께>를 읽다 보니, 박재삼 시인과 그 딸과의 인연이 담긴 짧은 에세이가 있었다. 그냥 일상적일 수도 있는 인연에 대한 그 이야기가 내 마음에 별처럼 박혀 서러움이 되는 것은. 아마도 마종기 시인이 외우고 외운다는 이 시의 아름다움 때문이련가.

 

 

 

찾아보니 동명의 시집이 있음을 알았다. 시를 그다지 즐겨 찾지 않아서 유명한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 중 외우는 것 하나 없는 나로서는.. 가끔씩 접하는 이런 시의 아름다움이 문득 서러움으로 다가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에 감성으로 와닿는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를 외워서 언제 어느 때 한자락씩 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그게 멋인데... 마종기 시인이 외운다는 이 아름다운 시, 나도 외워볼까나...

 

 

 

 

밤바다에서


- 박재삼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찾아보니 시들이 참 좋다. 단아하고 아름다운 우리나라 말들이 내 마음에 진심으로 와닿는 느낌. 정말 시를 외워보고 싶구나. 박재삼 시인의 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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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2-04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권 모두 담아갑니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 은 저도 좋아하는 박재삼의 시에요.^^
삼천포 쪽으로 박재삼 문학관이 있던데 그곳에는 그의 시를 낭송해 볼 수 있는
부스가 있어요. 여럿 시 중에 골라서 영상을 보며 직접 낭송해 볼 수 있어요.^^

비연 2013-12-05 08:16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전 이 시 처음 접했는데 읽을 때마다 아릿해요..
박재삼 시인의 고향이 삼천포더라구요. 나중에 그 문학관, 한번 들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시인의 고향에 있는 문학관이라..
 

 

아 벌써 11월 말이야? 그러니까 오늘이 21일이니까 말.. 맞네. 도대체 시간은 왜 이리 빠른 걸까. 사실 순간순간은 그닥 빠르지 않은데 지나고 나면 어라? 어라? 벌써?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거겠지. 순간순간은 지겹고 지루하고 무료할 수 있는데 그 시간 대충 까먹고는 지나간 세월이 넘 빠르다고 탓을 한다. 그 간사한 인간 중에 하나가 비연.

 

요즘 머리가 아파서, 두통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여러가지로 머리 속이 복잡했다.. 라는 뜻인데... 쉬운 책들만 골라 읽었다고 해야 하나. 마음이 심란할 때는 역시나 책장 술술 넘어가는 책이 좋아요 라는 신념 하에 책장에 그득 꽂힌 두껍고, 의미있고, 내용있는 책들은 휘리릭 지나가버리고 물리적으로 혹은 내용적으로 가벼운 책들을 찾은 지가..어언... (흠... 이쯤에서 정량적인 숫자는 말하지 않으련다... 갑자기 작아지는 비연) 그제 이언 매큐언의 <토요일>을 다 읽어내면서 아 이젠 좀 진지한 책을 읽어야 겠다. 아니 적어도 머리를 쓰는 책을 읽어야겠다 라는 생각이 불쑥.

 

아마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 그닥 녹록한 내용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설이 다 재미있고 다 가볍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간혹은 철학책보다 내 머릿속을 더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을 때도 있다는 거지.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 딱히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긴 호흡의 글을 읽으면서 그래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어.. 진지한 무거운 독서의 세계로.

 

그래서 골랐다는 게 아래의 책.

 

 

엄청나게도 어려운 책을 골랐구려 라고 비웃는다면... 비웃으세요. 어쨌거나 이 정도로 돌아온 게 어디냐구요. 이전부터 에드워드 홀의 이 문화인류학 시리즈는 읽고 싶었다구요. 그 1편, 침묵의 언어. 말하자면 말만 말이냐 동작도 말이고 분위기도 말이고.. 그러니까 다른 문화를 배운다는 것,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verbal한 것만 배워서는 안된다, non-verbal이 떄론 더 중요하다.. 이런 메세지를 담고 있는 책...으로 추정된다. 아직 첫 장 넘겼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 이해. 근데 재밌다. 비교적 대중적인 서적이라서 그런 건지, 술술 넘어가고 이해가 잘 된다.

 

 

 

 

 

 

 

 

 

 

 

 

 

 

 

 

 


 

 

그러니까 이 문화인류학 4부작은 이 구성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권 한권 읽어도 되지만 전체가 맥락을 가지고 저술한 책이라 순서대로 쭈욱 읽고 싶다... 물론 1권 읽고 아마 다른 책 읽다가 읽게 될 공산이 크지만 말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머리를 마사지 할 수 있는 책을 읽게 되어, 그것도 아주 재미나게 읽게 되어 아주 좋다.

 

이제 긴긴 겨울엔 역사책이나 옛 선현들의 책을 읽을까 생각 중이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분서>랑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도스토예프스키 책이야 대부분 읽었지만, 좀더 진지하게(오늘 이 말 많이 쓰네..ㅎ) 천천히 곱씹어가며 읽고 싶어서 말이다. 흠흠... 그러나 수많은 송년회들은 다 어쩔 것이냐.. 휘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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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1-2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부터 "나 진지" 라고 확실하게 각인시켜주는 이미지군요..

비연 2013-11-22 11:23   좋아요 0 | URL
앗. 메피님... 오랜만이에요...흑. 어디 가 계셨삼?
정말 책표지가 한길사 답죠? ㅎㅎㅎ

페크pek0501 2013-11-25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나게도 어려운 책을 골랐구려 라고 비웃는다면.~~"
- 저, 절대로 비웃지 않아요. 멋진 걸요. 저도 시리즈로 읽을 수 있는 어떤 책이 있으면 해요.
한 우물 파기, 라면서 한 작가에 대해 깊게 파게 되는 책이 될 수 있으니까요. ^^

비연 2013-11-26 10:00   좋아요 0 | URL
우히히... 감사... 이 시리즈 괜챦은 것 같아요. 권해드려요~^^
 

 

 

 

 

 

 

 

 

 

 

 

 

 

 

이 책을 왜 읽기 시작했는가. 그냥 요즘 누군가의 질문에서 '윤리'라는 것을 고민하게 되었고 (물론 여기에서의 '윤리'는 '직업윤리' 였다) 그래서 실천윤리학의 대가라는 피터 싱어의 책에 손이 갔던 것 같다... 처음에 시작할 땐 나쁘지 않았는데 갈수록 마음이 불편해지는 책이었다. 지은이는 읽는 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려는 목적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논조는 죄책감을 넘어서서 힐난이었고 기부의 기준을 소득수준으로 정함으로써 뭔가 강제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 지은이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쓰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게이츠는 그 관대함으로, 그리고 자신의 재단을 운영하는 목표와 방법에서 선견지명을 보여준 점으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게이츠가 모든 인간 생명의 가치는 동등하다는 생각에 따라 살고 있지 않음은 분명해 보인다. 시애틀 근교 호반에 있는 무려 5만 제곱피트에 달하는 그의 저택은 1억 3천 5백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재산세만 매년 1백만 달러 가까이 나간다.. (중략)... 따라서 우리는 그의 막대한 기부금을 두고 그를 찬양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예방할 수도 있던 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있는 가운데 그만한 사치를 누리고 산다는 점에서 그를 비난해야 하는 걸까? 그는 더 기부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직도 더 기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는 그가 이미 기부한 액수에 대해 그를 칭찬해야 한다고 본다.  

 

헉. 더 기부할 수도 있다라니. 그러니까 돈많은 부자가 기부를 해도 욕을 먹는 꼴이 되어 버렸다. 부자를 딱히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기부한 액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건 말이 안되는 것 아닌가. 기부를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게 사니 너는 욕을 좀 먹어도 된다. 이거?

 

 

그러나 적어도 38만 3천 달러를 버는 사람에게, 세전 소득으로 35만 2천 1백달러로 살라고 요구하는 게 정말 지나친 요구일까? .. (중략).. 자신의 소득이 상위 10퍼센트에 들지 못한다고 해도, 틀림없이 여유 소득은 있을 것이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는 대신 생수병이나 음료수 캔을 사는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물론 그게 불가능한 일은 아닐 수 있고 합리적인 기부의 선일 수는 있지만.. 지나친 요구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기부액을 소득수준별로 정해놓고 그 이하를 내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강요'라고 생각하니까. 그럼 내가 콜라 한 캔 사먹을 때마다 수도물을 먹지 않고 음료수를 사먹는 나는 세계 빈곤 퇴치에 전혀 기여를 못하는 저질의 사람이라고 자책해야 하는가.

 

 

밀러의 기준은 가장 부담이 적다.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어서 이따금 평범하지 않은 스타일의 옷이나 액세서리를 사는 일은 문제가 없다... (중략)... 컬리티의 기준은 보다 엄격하다. 그가 말하는 '삶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은 스타일 좋은 옷 같은 것까지 포함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도 음악 감상은 포함될 수도 있는데, 컬리티에 따르면 음악 역시 근본적으로 삶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품의 경우, 지나치게 질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보다 싼 물건이 있다면 그쪽을 택해야 한다.

 

누구 맘대로 내 행위의 정당성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가. 싼 거 입고 싼 거 먹고 문화생활 하지 않고 그렇게 살면서 기부에 목적을 두고 살라는 뜻으로밖엔 안 읽혀시 심히 불편했다. 인간이 그저 흥청망청 사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돕고 그들이 양질의 환경에 놓여 보다 나은 삶을 사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것은 좋다. 그리고 그게 맞다고 본다. 하지만 그냥 보통사람들이 하는 일들에 가치를 매기고 기부와 견주어 비교하는 건, 솔직히 기분 안 좋다.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평범한 일들에까지, 예를 들어 약간의 비싼 옷을 산다거나 음료수를 사 먹는다거나 (맙소사!) 이런 것들에까지 죄스러움을 느껴야 한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사는 건가. 나인가, 멀리 아프리카의 난민들인가.

 

 

많은 사람들이 맵시 나는 옷을 입고, 훌륭한 음식을 먹고, 고급 스테레오로 음악을 듣는 일에서 큰 기쁨을 느낀다. 나는 그 기쁨에 반대하지 않는다. 같은 값이면 최대한 기쁨을 누리며 살라. 밀러, 컬리티, 후커가 돈을 써도 괜챦다고 본 것들에는 뭔가 가치가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의 주장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막을 수 있는 데도 그런 '가치 있는 것들'에 돈을 쓰는 일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매일 2만 7천명의 어린이들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죽음을 맞는 긴박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순간도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는데 커피한잔 홀짝이며 맛난 음식을 먹고 있다면 난 윤리적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매일의 일상으로 말미암아 알게모르게 나는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아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책이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덮어버리려다가 그래도 그래도 하는 마음으로 보았는데... 차라리 인간의 선한 심성에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감수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도)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하고 그것은 가급적 돈이어야 하며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이 시각 아파 쓰러지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하지 말아야 하고 재산이 있으면 가급적 기부에 다 돌리는 게 맞다고... 강권하는 책. 그 좋은 의도와 상관없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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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1-15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불편해 할 책이네요.
우리에게 각성을 촉구한다는 점에서만 보면 좋은 메시지이지만
강제성을 띤다는 점에서는 흔쾌히 동의하게 어렵게 만드네요.

지금 커피 한 잔 할 건데, 으음~~ 저도 누군가에게 미안해 하며 마셔야 할까요? ㅋ

글의 구성이 맘에 듭니다. 저도 이렇게 써봐야겠어요. ^^




비연 2013-11-15 11:09   좋아요 0 | URL
pek0501님... 사람에 따라서는 선한 의지로 좋게 받아들이시기도 하는 책이라..
조금 조심스러운 면도 있네요... 저 아침에 커피 마시면서 괜히 미안했어요..ㅜ
글 구성이 마음에 드신다니 .. 감사합니다~

단발머리 2013-11-15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안녕하세요~~
님 서재에 놀러왔다가, 다 모르는 책이라 깜짝 놀라고,
위의 페이퍼 곰곰히 읽다가 저도 "맞아, 맞아!" 두 번 외칩니다.

잘 정리해주신 페이퍼 읽다보니, 저도 저자가 조금 부담스러워진다는...
잘 읽고 갑니다.

비연 2013-11-15 15:51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ㅎㅎ 사람마다 관점이 틀려서 이 책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괜챦을 듯...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Tous les matins du monde sont sans retour)

 

 

"선생님, 전부터 여쭙고 싶은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

"왜 연주하시는 작품을 출판하지 않습니까?"

"아.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작곡을 하지 않네.  난 절대 악보를 쓰지 않아. 내가 가끔 하나의 이름과 기쁨을 추억하며 지어내는 것은 물, 물풀, 쑥, 살아있는 작은 송충이 같은 헌물일세."

"선생님의 물풀, 송충이 안에 음악이 어디 있는데요?"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작은 심장조각이네. 내가 하는 건 어떤 공휴일도 없이 그저 내 할 일을 하는 거네.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

간결한 문장들 위로 예술과 철학과 인생에 대한 사색이 넘쳐난다. 예술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이 구절들 속에서 했다. 자연의 모방인가. 아니면 자연과 일체인가.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음악이 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는가?"

"그건 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자넨 틀렸네. 신은 말하지 않는가."

"그럼 귀를 위한 것입니까?"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이 귀를 위한 것은 아니네."

"그럼 황금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 황금은 들을 수 없지."

"영광입니까?"

"아니네. 그건 명성에 불과하네."

"그럼 침묵입니까?"

"그건 언어의 반대말에 불과하네."

"경쟁하는 음악가입니까?"

"아냐!"

"사랑입니까?"

"아냐."

"사랑에 대한 회한입니까?"

"아니네."

"단념을 위한 겁니까?"

"아니야, 아니야."

"보이지 않는 자에게 바치는 고프레를 위한 겁니까?"

"그것도 아니네. 고프레가 뭔가? 그건 보이지 않나. 맛이 나고. 그건 먹는 거 아닌가. 그건 아무 것도 아니네."

"더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죽은 자들에게 한 잔은 남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네 자신을 태우게나."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

얼마 후 음악가의 그 늙고 뻣뻣한 얼굴 위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신의 야윈 손으로 마레의 포동포동한 손을 잡았다.

 

그렇다면 음악은 무엇인가.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것. 뱉어낸 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 무엇을 위하지 않는 것. 그것 자체인 것. 어쩌면 무아지경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그저 음악은 음악인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어렵다.

 

파스칼 키냐르의 책들을 뒤져 찾게 된다. 백 페이지 남짓의,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들 속에서 철학을 찾아 사색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 흔한 건 아니므로. 요즘처럼 일에 치여 나를 잃어갈 때는 이런 책들이 나를 구원해줄 지도 모른다. 읽노라니 설명하기 힘든, 그러나 분명히 느껴지는 만족감이 있다. 글이 사람을 생활의 질척한 늪에서 끄집어 내주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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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04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으로 마음 즐겁게 달래면서
새로운 십일월 첫 주도 아름답게 여셔요~

비연 2013-11-06 12:05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