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럴 때가 있는 거다. 같은 책을 가지고 페이퍼 두 개 정도는 쓰고 싶어질 때. 그런 책을 만나면 그냥 즐겁고 함께 나누고 싶고 그래서 자꾸자꾸 얘기하고 싶어지고 그런다. 그게 뭐 특별난 책이라서는 아니고 유독 아름다운 문체나 멋들어진 문장이나 대단히 고상한 내용을 담아서도 아니다. 그저 내 맘의 주파수와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며칠 전에 후다닥 유쾌하다고 쓰고 나갔던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이란 책은, 유쾌를 넘어선 그 무엇인가가 있는 책이었다. 그래서 몇 줄 꼭 더 써야지..라는 마음으로 8월 마지막날 토요일,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에 노트북을 열고야 말았다.

 

 

 

 

 

 

 

 

 

 

 

 

 

 

 

 

 


 

누가 봐서는 정신 나갔다고 보기 딱 알맞는 잭과 웬디라는 부부가 미국 버지니아주 한 귀퉁이에 다 스러져 가는, 인구라봐야 고작 몇 천명 남짓한 시골구석의 옛 탄광촌 빅스톤갭에 헌책방을 떡하니 여는 사고를 치고나서의 이야기를 담은 글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책 이야기이다. 그러나 읽다보면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마음을 울린다.

 

 

잭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생각에 잠긴 말투로 던졌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꽤 오래 머문다고 가정하면 근처에 당신이 가르칠 많한 대학이 하나 있긴 하던데... 아, 그렇다고 지금 당장 장기계획을 세우자는 건 아니고."

갑자기 심장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그렇죠, 지금 무슨 장기 계획이에요."

"언젠가 책방을 내면 되지." "흠. 언젠가는요."

우리는 조용히 콘칩을 씹었다. 다음 순간, 잭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 언젠가가 오늘이라면?"

 

이렇게 호흡이 잘 맞는 부부라니. 갑자기 부부라는 연을 맺어보는 것도 괜챦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잭과 웬디는 정말 착착 맞는다. 20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하는데, 도대체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부부이자 친구사이 같아서 책 읽는 내내 질투까지 났더랬다. 이런 사람 만난 웬디라는 여자, 운이 너무 좋은 거 아냐? 나에게도 그런 운이... (쩜쩜쩜..)

 

 

솔직히 말하면, 열정이 도움이 되긴 한다. 그러나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노동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행복을 좇으라"는 말에는 숨은 뜻이 있다. 알고 보면 그 말은 "행복을 좇으면,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게 된다"는 뜻이다. 가끔씩 자기도 언젠가는 책방을 열고 싶다고 말하는 손님을 볼 때면, 그 사람의 열정에서 과거 우리 자신의 순진함을 발견한다. 그들도 긴 노동시간과 적은 수입을 어느 정도 짐작하겠지만, 끔찍한 화재라든가 고약한 게릴라 흥정꾼, 사별한 일들의 아픔, 교도소와 맺게 될 인연에 대해선 까맣게 모를 것이다. 우리도 그랬다. 처음에는 까맣게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잘 안다. 알고 보면, 책방에서 만나는 가장 무섭고 가장 힘들고 가장 슬프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은 책이 아니라 손님들 안에 담겨 있다.

 

 

뭐든 꿈과 현실은 다르기 마련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고 파고 들었을 때 그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산적해 있을 거라고 실제적으로 예상하기는 쉽지 않은 게다. 아마 어렵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과 그러나 잘 해낼 수 있을거야 라는 더 막연한 결의? 정도로 꿈을 좇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이 많겠지. 나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헌책방을 운영하는 잭과 웬디는 헌책을 찾아 혹은 기부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 속에서 인생을 본다고 했다. 그들의 속사정이 여과없이 드러날 수 있는 곳. 그 속에서 헌책방 주인은 중심을 잡고 들어주고 말없이 차 한잔을 따라주며 그들의 위안이 되어주는 것. 그런 것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들고 의미있는 일인가를 누누이 말하고 있다.

 

 

당황해서 말이 막 쏟아져 나왔다. "물론 아버님께서 모은 웨스턴 소설들을 소장하고 싶지 않으시다는 전제하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개인적인 애착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버님이 그걸 정말 좋아하셨거든요. 알고 계시겠지만요. 아니, 알고 계셨겠지만. 아니, 알고 계시겠지만. 죄송해요." (...중략...)

"분명 좋아하셨어요." 그녀의 말투가 다소 거칠어졌다. "텔레비전에서 영화를 해주면 꼭 챙겨 보셨죠. 그런데 모르고 계셨군요. 아마 아버지가 절대 말 안하셨을테니까요. 당신들 같은 친구를 둔 걸 자랑스러워하셨으니까요. 배운 사람들 말이에요. 교육을 항상 강조하셨거든요. 저를 보세요. 아빠가 기를 쓰고 대학까지 마치게 해줬쟎아요."

저게 웃음일까, 아니면 흐느낌일까? "아빠는 읽을 줄 모르셨어요. 여기서 사 가신 건 전부 다 재향군인회에 갖다줄 책들이었어요. 아마 다 합쳐서 수백 권은 기증하셨을 거예요." (...중략...)

하지만 손님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다정하게 꼭 쥐었다. "이미 많은 걸 해주셨어요. 두 분께서 지난 몇 년간 아빠한테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느끼게 해주셨쟎아요. 그래서 아빠가 여기 오는 걸 그렇게 좋아혔던 거예요. 신의 은총은 두 분이 받으셔야지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가장 가슴이 찡했던 에피소드였다. 어쩌면 '사람'이 파는 '종이책'이 줄 수 있는 큰 은혜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글자를 못 읽는 수다쟁이 땅꼬마 윌리는 와서 쉴새없이 떠들면서 책 속에서 위안을 얻고 그 책을 파는 사람들과의 교류 속에서 존엄성을 느끼며 마지막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는 거. 책 이야기 아니고는 이런 얘기가 감동을 줄 수 있겠나 싶다...

 

 

잭은 당장 테이블에 앉아 꾸러미를 풀어보았다. 안에 든 것은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저지대에서 생산되는 최상급 싱글몰트 위스키였다. 잭이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로 특별 주문을 해야 구할 수 있는 상품이었고, 우리 주머니 사정으로는 왠만해선 맛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선물에는 이런 쪽지가 붙어 있었다. "친애하는 잭과 웬디, 당신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우리가 뭘 하고 지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마을에서 제일 귀한 보물을 위해 보물 사냥 좀 해봤어요. 맛있게 드세요!"

우리는 정말 정말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이다.

 

책의 마지막 구절을 읽으면서, 정말 진심으로 오랜만에 부러운 사람들이 생겼음을 알았다. 수억만금을 가졌거나 세상을 호령하며 지내거나 상당한 지위에서 명예를 누리거나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은 그냥 아무 느낌없는 부러움이다. 저런 위치면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던가 저 정도 되면 사람들에게 떳떳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속물적 근성이 결부된 부러움일 뿐이다.

 

하지만 잭과 웬디에 대한 부러움은 다르다.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부러움.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사람들.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전심을 다해 사는 사람들. 함께 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즐겁게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책이 늘 함께 하는 사람들. 부럽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는 이 즈음, 따뜻한 부러움으로 마음이 괜스레 뭉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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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많으니까 휘리릭 쓰고 나가야 한다...=.=;;

 

아침에 가볍게 읽을 만한 책 한 권 골라서 나오는 것도 일상의 소소한 기쁨 중 하나인데.. 오늘 냅따 가져나온 책은 이 책.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 이다.

 

계속 봐야지 봐야지 째리고 있었는데... 이걸 왜 오늘에야 읽기 시작했을까 싶을 정도로 재밌다. 책에 대한 책을 즐겨 읽어서이기도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웬디와 그 남편 잭의 버지니아주 어느 한켠 빅스톤갭이란 곳에서 무작정 벌인 헌책방 운영기는 완전 재밌고 웃기다. 웬디라는 사람의 글빨도 좋고 (이거 영어로 읽어볼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 상황도 재밌다. 아. 아침에 통근버스 기다리면서 이걸 읽는데, 유쾌한 마음이 스며서 출근길이 갑자기 밝아진 느낌이었다.

 

일단 여기까지. 일하러 갔다가 나중에 다시...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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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말인가.... 라디오를 듣는데, 트루먼 카포티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리도 좋아한다는 작가.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작가.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스무살 나이에 유명해져서 승승가도를 달리다가 말년은 비참하게 끝냈던 사람. 실화를 배경으로 한 르뽀형 소설 '인 콜드 블러드'라는 명작을 남긴 사람... 원제가 'Complete stories of Truman Capote'인 <차가운 벽>의 단편소설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귀가 번쩍 뜨였다. 어. 이거 나도 사두었는데. 심지어 우리 엄마는 바로 읽고 좋다고 하셨었는데... 난 아직이네? ㅜ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는 거다. 읽고 있던 <관찰의 힘>을 부랴부랴 마무리하고 (근데 이 책, 생각보단 별루였다..;;;) <차가운 벽>을 꺼내들어 보니 2008년에 출간. 그러니까 내가 몇 년을 책장에 놔두었던 거야..ㅜ 책을 쟁여 놓다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다. 물론 이 책을 사게 된건, 그 전에 <인 콜드 블러드>를 읽고 나서 너무 놀래서 (정말 놀랐다. 이런 책을 쓰다니!) 그 이후에 <차가운 벽>이 나오길래 바로 샀던 기억이 난다.


 

 

 

 

 

 

 

 

 

 

 

 

 

 

 

 

이제 와서 뒤져보니 글쎄 최근에 트루먼 카포티의 책 시리즈가 나왔더라는. 그러니까 내가 갖고 있는 책들은 다 구판이 되었고 신간이 비슷한 컨셉의 표지들로 나왔더라는 거다.

 

 

 

 

 

 

 

 

 

 

오오. 이런. 글자체가 좀 우스꽝스럽게 변했고 책마다 색깔을 입혔구만. 개인적으로는 이전의 표지들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한데... 암튼 간에 그새 이런 책들이 나오다니. 나머지도 다 구입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라면서 보관함에 퐁퐁퐁~

 

다시 <차가운 벽>으로 돌아가서.... 트루먼 카포티가 데뷔할 즈음부터 쓴 단편소설들을 연대순으로 모아둔 책이다. 첫번째 소설의 제목이 '차가운 벽'. 지금 1/3 정도 읽었는데 처음엔 좀 미숙한 것 같고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고 그랬는데, 점점 나아져 가고 있다. 오헨리상을 여러번 받은 사람답게 (이 책 중에 있다) 내용이나 작풍이 상당히 재미있고 짜임새 있다. 가끔 섬짓한 내용도 있고. ('미리엄' 이런 거...)  재미있는 대목들 밑줄도 쳐두었으나 지금은 회사니까 패스.. 나중을 기약.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 인생은 정말 알고보면 남루했구나. 벼락부자된 아버지와 성적으로 미숙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버려졌다가 나중에 어머니가 재혼해서 거두어졌고... 아무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큰 유년시절 속에서 길러졌을 컴플렉스와 정서적 결핍들이 나중에 여러가지로 인생에서 힘든 부분들을 만든 게 아니었을까. 유명했고 유명한 사람들과 교류도 잦았지만, 나중에 결국 약물에 찌들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걸 보면 참 인생이란, 특히나 이런 사람의 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에겐 좋은 책을 안겨 주었지만, 자신의 인생은 힘들었을 사람.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그런 인생을 살게 해주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그냥 평범하고 행복하고 안온한 인생을 바랄 듯. 물론 그렇게 한다면 그저 평범하고 평범한 한 사람으로 인류역사상 점 하나의 구실도 못 한 채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다. 가끔 판단이 안 선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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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3-08-2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신간들에서는 트루먼 카포티가 아니라 트루먼 '커포티'라고 표기했다. 커포티. 흠...
 

 

 

 

 

 

 

 

 

 

 

 

 

 

 

 

비채의 이 책 시리즈는 가벼워서 좋다. 어제의 헤세의 글을 다 읽고 깜빡 잠이 들어 출근할 때 들고 갈 책을 잊어버리고 선택하지 않은 바람에, 아침에 부랴부랴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잠깐 망설였다. 그냥 가져가지마? 흠... 그러나 책이 없으면 왠지 불안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 급하니까 가장 가벼운 걸로 나온다는 게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가벼운 만큼 내용도 가벼워서 오늘 오고가는 길에 끝나지 않을까 싶다.

 

 

생각컨대, 인간이란 본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어떤 계기로, '자, 오늘부터 달라지자!' 하고 굳게 결심하지만, 그 어떤 것이 없어져버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형상기억합금처럼, 혹은 뒷걸음질쳐서 구멍 속으로 숨어버리는 거북이처럼 어물어물 원래 스타일로 돌아가버린다. 결심 따위는 어차피 인생의 에너지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옷장을 열고 팔도 제대로 끼어보지 않은 슈트와 주름 하나 없는 넥타이를 보면서 그런 사실을 통감했다. 그러나 반대로 '딱히 달라지지 않아도 돼'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희한하게 사람은 달라진다. 이상한 얘기지만.

 

 

역시나 하루키. 일상의 작은 틈새에서 어쩜 이렇게 마음을 잘 읽어내는 것이냐. 특히 저 표현 '어물어물'에서 팟 웃어버렸다. 정말 모양새가 그런거다. 확 안 하지도 않고 뺄까 말까 뺼까 말까 망설이면서 점점 뒤로 물러나는 꼴이라니. 그러면서 온갖 변명을 다 대는 것이지. 이러쿵저러쿵.

 

올해만 해도 내가 굳게 결심한 게 몇 건이더냐. 물론 건강상의 문제나 회사의 일복이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수첩 한귀퉁이에 적혀진 그 '결심'이란 것들 때문에 무지하게 가끔 무거운 기분이 된다는 거, 부인할 수가 없다. 어쩌면 난, 할 수 없는 일 내키지 않는 일을 결심이라는 항목에 밀어넣어 자기에게 강제하고 있는 거 아닐까.. (라고 또 변명..ㅜ)

 

 

우리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젊은 남녀가 앉아 있었다. 아직 밤이 되기는 일렀고 손님은 우리와 그 사람들뿐이었다. 아마 남자는 이십대 후반 여자는 이십대 중반쯤. 둘 다 인물도 괜챦고 도회적이면서도 깔끔한 옷차림에 굉장히 스마트한 분위기의 커플이었다...(중략)...남자는 '슬슬 꼬셔볼까' 생각하고 있고, 여자도 '그냥 넘어가줄까' 궁리중이다. 잘되면 식사 후 어딘가의 침대로 향하게 될지도 모른다. 테이블 한가운데에 페로몬을 머금은 안개가 자욱히 떠있는 것이 보인다...(중략)...

 

그러나 그런 약속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분위기도 프리모 피아토가 나오자 운산무소, 문자 그대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쪽 남자가 '츠르릅 츠르릅!' 하고 엄청난 소리를 내며 파스타를 입안으로 밀어넣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정말로 압도적인 소리였다. 계절이 바뀔 때 지옥의 문이 한번 열렸다 닫히면서 나는 것 같은 소리. 그 소리에 나도 얼어붙었고, 내 아내도 얼어붙었고, 웨이터도, 소믈리에도 얼어붙었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도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숨을 삼키고 모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남자만은 무심하게 츠르릅 츠르릅 하고 너무도 행복하게 파스타를 먹었다.

 

이 대목에서 완전히 빵 터져서.. 통근 버스 안에서 소리를 죽이고 웃어야 했다. 멋진 남녀. 무르익은 분위기. 아름다운 레스토랑... 그리고 급작스러운 소음. ㅎㅎㅎㅎ 당사자의 무심함이 더 웃긴. 그러고보면, 가끔 이런 경험을 했던 것 같다. 절대 내지 않을 것 같은 소리를 내는 멋진 사람들. 트림이라든가, 방귀라든가... 먹을 때 후루룩 짭짭이라든가. 그런 일련의 경험들이 떠오르면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지더라는. 아침 출근길이 참 유쾌(?)해졌지 뭔가.

 

아 일해야지. 점심시간이 길었네...하루키의 에세이가 소소하게 즐거워서 말이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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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3-08-09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제가 '결심의 재발견'을 노리고 있는거죠. 사람은 변한다고 생각해요. 일단 생각만말고 움직이며 몸과 뇌와 마음을 잔뜩 써주는거죠.

비연 2013-08-09 16:3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생각보다 움직임이 중요한 듯... 다시한번 해볼까봐요 그렇게 결심을.
 

 

 

 

 

 

 

 

 

 

 

 

 

 

 

 

 

헤르만 헤세가 정원일을 평생 하며 살았고 심지어 그의 프로필에 '화가'가 붙는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무식 비연. 난 그저 좀더 깊이 있는 에세이가 읽고 싶어서 이 책을 샀을 뿐인데, 여러가지로 놀라운 사실들을 접하고 아연.

 

헤르만 헤세의 책들은 대부분 다 읽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별로라서(ㅜㅜ) 성질머리가 이상해서 아주 좋아하는 작가와 아주 맘에 안 드는 작가의 작품은 다 읽게 된다. 좋아하는 작가는 뭐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다 그럴테니. 맘에 안 드는 작가는 왜? 내가 왜 남들이 다 대문호라고 칭하고 열심히 밑줄쳐 가며 읽어대는 작품들을 뜨아해 하는가. 뭔가 다른 점을 찾아보자. 내가 좋아할 만한 구석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거야. 하면서.. 근데 대체로 맘에 안 드는 작가는 다 읽어도 비슷했다..

 

그렇다고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그의 글은 깊이가 있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들은 오히려 현실감이 있으며 섣불리 속단할 수 없는 성찰이 드러난다. 다만, 나는 메세지를, 경구를 주려고 하는 문체에 힘겨워할 뿐인 거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책은 좋다. 역시 에세이도 그냥 날림으로 대충 쓰는 걸 읽을 때와는 다른 맛을 선사한다. 첫장을 펼쳐들면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이 글귀를 읽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면 내가 넘 감상적인 것일까.

 

 

나는 내 작은 정원에 봄이 온 것을 기뻐하면서 콩과 샐러드, 레세다, 겨자 따위의 씨앗을 뿌린다. 그리고 앞서 죽어간 식물들의 잔해를 거름으로 준다. 그러면서 그 죽어간 것들을 돌이켜 생각하고, 앞으로 피어날 식물들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본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나도 질서정연한 자연의 순환을 자명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하는 이따금의 순간, 내 마음속에는 땅 위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들만이 이와 같은 사물들의 순환으로부터 어딘지 제외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물들의 덧없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서 개인적이고 개성적인 특별한 무언가를 갖고 싶어하는 욕구가 너무도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pp20-21)

잠은 자연이 주는 가장 귀중한 선물 가운데 하나이며, 친구이자 피난처이고, 마법사이고, 조용히 위로해주는 자이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는 고통 때문에 겨우 30분 정도 조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살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을 한 번도 경험새보지 못한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가장 순진한 영혼을 지닌 자연의 어린아이 같은 사람일 것이다. (pp35-36)

 

날이 덥다. 아열대 기후가 맞는 게지. 이런 때는 선풍기며 에어컨이며를 끼고 살게 되는데, 그 속에서도 허덕허덕거리다가 세월 다 보내는 수가 생긴다. 역시 이렇게 더울 때에도 책을 보는 것이 오히려 피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던 대작가의 육성을 보며 들으며 인생을 사색하고 괜한 서늘함도 느껴보는 것 말이다... 이 책 좋다. 헤르만 헤세를 나처럼 그닥 호감스러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찬찬히 또박또박 한글자한글자 소중히 읽을 수 있다. 내가 그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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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8-03 0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다시 나왔군요.
왜 이 책이 예전에 쉽게 절판이 되었나 궁금한데,
요즈음 우리 사회 흐름을 헤아리면
다시 잘 읽힐 수 있을까 하고 빌어 봅니다.

비연 2013-08-03 20:19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절판되었다 다시 나온 거였군요...^^
함께살기님도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읽어보며 느낌을 새롭게 하시는 것도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