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수성 리더십 SERI 연구에세이 52
박현모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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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조선왕조 내내 따라다니는 왕의 독살설로부터 자유로운 임금이었다.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국왕은 조선왕조 27명의 국왕 가운데 총 7명으로(인종ㆍ선조ㆍ효종ㆍ현종ㆍ경종ㆍ정조ㆍ고종) 26%에 달한다. 이것은 조선시대에서 장남이 왕이 된 비율과 같은 수치인데(문종ㆍ단종ㆍ연산군ㆍ인종ㆍ현종ㆍ숙종ㆍ경종), 거기에다 소현세자와 같은 국왕후보자까지 포함시키면 독살설에 휘말린 숫자는 더 많아진다.
이처럼 국왕이나 국왕후보자의 독살설이 많은 이유로는 우선 종신임기제 하에서 최고권력자의 위태로운 지위와, 의외로 구멍이 많은 궁궐의 수비체제를 들 수 있다. 최고권력자의 자연 사망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도전자는 독살을 꾀하거나 자객을 침입시킨다. 한밤중에 궁궐을 가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 깊은 밤의 궁궐은 일종의 공동묘지와 같은 곳이다. 특히 기다란 회랑과 기와지붕으로 이어진 궁궐은 내시와 궁녀 몇 명만 작당하면 쉽게 왕의 침소나 편전까지 접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정조가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책을 읽거나 신하들과 토론을 한 이유도 실상 이런 두려움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쪽

훈민정음 창제는 단순히 언어정책 차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의 정치관의 차이를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면 세종은 과연 무엇을 위해 한글을 창제했을까?
훈민정음 창제 자체가 워낙에 비밀리에 추진되다가 세종 재위 25년(1443년) 12월에 전격적으로 공표를 했기 때문에 창제 동기와 그 원리는 여전히 미스터리와 상이한 해석들에 둘러싸여 있다.
우선 '창제 동기'에 대해서는 민중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정책적 고려였다는 입장과, 백성의 자의식이 성장한 결과라는 설명, 언어/문자의 분리로 인한 사회 계층 분리(language devided)를 극복하려는 세종의 의도에서 나왔다는 시각이 있다.-.쪽

1940년 7월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면서,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에 의해 발음기관을 본떠서 창제했다는 것이 정설화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훈민정음은 문자의 역사에서 비춰볼 때, "아주 예외적인 발명품(invention)"이며,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기록체계"라는 것이 언어학계의 정설이다.
(중략)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지 3년이 지난 1446년 9월 상순에 집현전 학사들에 의해 발간된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글을 만든 원리와 사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단지 그 말소리에 들어 있는 이치를 다했을 뿐[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이다. 억지로 머리로 짜내고 힘들여 찾아낸 것이 아니라 "말소리에 갖추어져 있는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이 지나기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한글이야말로 중국 문자나 일본 문자, 그리고 영어 알파벳보다 우수한 문자라고 평가된다.-.쪽

세종은 자신의 시대를 "수성기(守成期)"로 인식하고 있었다. 수성기란 '창업(創業)-수성(守成)-경장(更張)-쇠퇴(衰退)'라는 동양사상의 체계순환론에서 두 번째 단계로, 혁명과 건국이라는 창업의 어수선한 시기를 지나 정치 및 사회 운영 메커니즘이 안정화되고 제도화되어가는 시기를 뜻한다.
기업이든 국가든 간에 창업을 하고 일정한 수준까지 올려놓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대내외적 도전과 시련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난관들을 극복하고 정상(頂上)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키고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그동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따라서 창업의 단계를 넘어서 수성의 단계로 진입시키는 뛰어난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수성의 리더십을 가볍게 여기거나, 그것을 창업의 리더십과 혼동하곤 한다. 기껏 현상유지 능력 정도로 수성의 리더십을 간주하거나, 반대로 창업자와 같은 끝없는 도전정신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국가나 대기업은 현상유지나 도전정신만으로 지켜질 수 없다. 태종이 양녕이나 그 아래 효령이 아니라 충녕으로 후계자를 바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수성기의 조선왕조에는 도전정신과 현상유지를 넘어선 제3의 길이 그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지키고 이루어'가야 하는 것일까?.-.쪽

수성의 지도자는 조직에 자기 지속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지속성을 지니면서도(守)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거듭하여 발전해가는(成) 생명체와도 같은 조직을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자기 지속적인 성장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수성의 군주는 세 가지 일을 수행해야 한다. 즉 하위체계 간의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과, 내부적 긴장을 처리하는 방식의 세련화, 그리고 구성원들의 가치와 동기를 활성화하는 일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시스템'에 의해 국가가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인데, 세종시대 사람들은 이를 '권도(權道)의 정치'에서 '경도(經道)의 정치'로 전환이라고 불렀다. 즉 "시의(時宜)에 따라서 변경할 수 있는 손익(損益)하는 법"인 권도가 창업의 덕목인 데 비해, 수성의 군주는 "영세(永世)토록 전하여 변경할 수 없는 경상(經常)의 법"인 정도(正道)를 정착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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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18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종을 새로이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세종은 정치면에서도 최고경영자의 면모를 보이는 사람이었다구요. 인재를 보고 고르는 눈, 창의적인 면, 과학기술을 장려하는 면 그리고 인간적인 면으로 사람을 끄는 면까지.. 그런 덕목들이 다시 말하면 수성리더쉽이네요..

보슬비 2006-06-1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집어서 말씀해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