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고추 농사로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농사에서 최대치란 뭘까'가 궁금했다. 그보다 더 깊은 속내는 '고추 농사라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 짓는다'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 욕심을 채우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먼저 모종을 튼튼하게 키웠다. 아침저녁으로 자주 들여다보면서 조그마한 벌레들이 떡잎을 갉아먹지 않게, 아예 모종 곁에 붙어지내다시피 했다. 행여나 영양이 부족하다 싶으면 손수 만든 영양제를 뿌려주었다. 밭 장만도 그랬다. 거름도 평소보다 더 많이 넣고, 두둑을 더 넓고 높게 했다. 모종을 밭으로 옮겨 심고는 또 정성으로 가꾸었다. 그랬더니 엄청나게 자랐다. 나중에는 내 어깨만큼 자랐고, 많이 자란 놈은 내 키만했다. 고추 밭이 아니라 고추 숲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고추가 웃자란 것이다. 예상보다 키가 너무 크다 보니 비바람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태풍이 몰려오자 처참하게 쓰러졌다.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뿌리가 다친데다 웃자라 병에 걸렸다. 결국 수확이 끝나고 결산을 해보니 평년작 아래였다. 결국 최대치 농사란 나 자신의 또 다른 욕망이었을 뿐이다. 아이들도 그렇지 않을까. 아이들을 최고로 기르고 싶은 부모 욕심에 아이들이 병들어가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일상에서 어디까지 부모가 해주어야 하고, 어디까지 아이를 믿고 내버려두어야 하는 걸까……. 농사에 깊이가 끝이 없듯 자식 키우기도 그런 것 같다.
=>자연을 통해 배우는 삶이네요.-.쪽
단순한 삶으로/ 어느 개척시대나 아름다움이 있다. 우리도 그때를 돌이켜보면 좋았던 점이 있다. 가장 좋았던 점을 들라면 '단순함'이다. 눈 뜨면 논밭에 가서 일하는 부모. 아이들은 저희가 원하면 부모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제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자라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남편도 힘이 났나 보다. 도시에서는 제 몫을 못 하던 아버지였다면, 여기서는 자기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곧장 식구를 위한 일이 되니까. 아이들에게 아버지를 되찾아준 그런 기분이었다. 조각났던 삶이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복잡한 사회속에서 살고 있는것 같아요. -.쪽
잔소리는 잘못된 애정표현?/ 사전에 따르면 잔소리는 '쓸데없이 자질구레한 말을 늘어놓음. 또는 그 말'이다. 한마디로 '쓸데 없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말을 자꾸 듣는 아이는 자신을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나 보다. 그렇다면 잔소리가 왜 나올까? 쉽지 않은 물음이다.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건 잔소리가 몸에 배어 있다는 점이다. 잔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곤 한다. 상대방이 들을 자세가 아닌데도 말을 한다는 것이다. 몸에 밴 잔소리는, 달리 보면 식구에 대한 애정표현이 잘못된 게 아닐까 싶다. 진심으로 아이를 위한다면 아이 이야기를 먼저 듣는 게 순서 아니겠나. 또한 잔소리는 '필요 이상의 말'이기도 하다. 아이가 '미안하다'고까지 했는데 말이 이어져 나오는 것이다. 식구 사이에 꼭 필요한 만큼만 말하기가 쉽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을 묻어둔 사람일수록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넘쳐난다. 부모 자신에게 억압이나 불만이 많을수록 잔소리가 는다. 부모가 자기 삶에 온전히 만족하고 산다면 아이들에게 바라는 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부모 불만이 아이를 통해 삐져나오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스트레스를 받아주는 꼴이다. 잔소리는 이래저래 부모 몫이 크다. 이제 이야기가 나올 만큼 나온 듯하여 내가 결론을 내려고 "잔소리는 쓸모가 없으니 되도록 필요한 소리만 하자!" 그러자, 탱이가 "그럼, 아무래도 엄마가 너무 힘들지 않겠어요?"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엄마가 아빠보다 잔소리가 많다고 느끼나보다.-.쪽
생명의 세계에는 사실 계획보다 뜻밖인 게 더 많다. 탱이마저도 따지고 보면 뜻밖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아이마다 무수히 많은 인연이 얽히고설킨 만남이 있었기에 우리 곁에 오는 게 아닌가. 그만큼 생명은 신비로운 것이리라. 만일 아이가 하는 뜻밖의 행동들을 불안한 눈으로 보았다면 아이 생명은 좌절을 맛보았을 것이다.-.쪽
전인이란 누구인가/ 나는 전인이라는 말을 산골에 살기 시작하면서 처음 들었다. 그때 그 놀라움이라니! 몇십 년을 전문가가 되라는 주문에 걸려 살다 그 반대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때 전인은 '자기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두루 자급할 수 있는 사람' 그런 뜻으로 다가왔다. 밥해 먹고, 집 짓고, 농사짓고, 이렇게 글쓰기도 하고, 가끔이지만 그림도 그리고, 옷도 짓고, 여기에다 악기도 다루고, 세계여행도 자연스레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 내게 전인이 뭔가를 제대로 알게 해준 건 탱이다. 전인, 그러니까 온전한 사람이란 오만 가지를 다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탱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지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전인이 무언지를 알 듯했다. 배가 고프면 스스로 밥을 차려 먹는 걸 보면서, 진달래꽃에서 꿀을 따먹는 걸 보면서, 사람이 지금 여기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게 전인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 거기서 주는 풍요로운 영감을 느끼고, 필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해내는 게 전인의 기본이리라. 무협지에서 보면 훌륭한 노사부는 수제자를 전인으로 기른다. 무술을 가르치기 전에 바느질, 빨래와 같은 살림살이, 강과 산에서 먹을거리 해오기, 연장 만들기처럼 사람으로 살아가는 기본을 가르친다. 그리고 사물을 바로 보는 법도 가르친다. 자기가 바로 서고, 사물을 바로 볼 수 있을 때 책에 나온 지식은 살아 움직일 수 있다. 만일 자기 눈앞에 놓인 것들을 바로 보고 거기서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한다면 책이 무슨 소용이리오. 아이가 태어나 전인이 되면 어디를 가도 그곳에서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자기 한 몸에 필요한 돈은 무얼 해도 벌 수 있다. 부모를 떠나 자기 나름대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면 그때가 성인이 되는 때라 생각한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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