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담론을 뒤?v다 보면 역설적으로 작가란 어쩌면 거대한 픽션의 세계 속에, 즉 소설의 세계 안에 실재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픽션의 세계 밖에서 군림하듯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시하던 ‘작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스토리텔링이 만들어 놓은 허구의 세계 속에 정주한 작가의 모습을 종종 만나게 된다.
가령 폴 오스터의 소설 ‘뉴욕 3부작’에서는 작가가 극중 인물의 한사람으로 등장하고 있다. ‘뉴욕3부작’의 첫 번째 소설인 ‘유리의 도시’에서 탐정소설을 쓰는 작가 다니엘 퀸은 폴 오스터를 찾는 잘못 걸려온 전화로 인해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전화선 너머의 수화기에선 폴 오스터라는 탐정을 간절하게 찾고 있어, 주인공 퀸은 폴 오스터의 역할을 떠맡게 되는데, 폴 오스터에 의해 쓰여진 소설 속의 주인공이 폴 오스터를 찾는 전화를 받고 작가가 아닌 탐정 폴 오스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내 진짜 폴 오스터라는 인물은 탐정과는 거리가 먼 이름 없는 작가다. 작가는 더 이상 픽션을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라 픽션의 세계 속에 살아가는 주변인물에 불과하다. 작가와 소설의 화자, 소설 속의 등장 인물들이 모두 한 공간에 어울러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화자가 이야기 하는 것은 함께 살고 있는 픽션의 세계들에 대한 리얼리티를 재생산하는 역설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더 이상 읽혀지는 세계와 살아가는 세계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인식이 폴 오스터 소설의 공간적 전제가 되고 있다.
폴 오스터는 뉴 저지의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 졸업후 잠시 프랑스와 유럽을 둘러본 경우를 제외하고는 줄곧 뉴욕에서 살고 있으며, 그의 소설에는 마치 우디 알렌과 비견할 만하게 숱한 뉴욕의 거리명과 골목 풍경들이 세세하게 이야기되어진다. 뉴욕은 무진장 널려 있는 공간이자 한없이 걸을 수 있는 미궁이라고 소설속의 주인공은 이야기한다. 주인공은 그 미궁과도 같은 뉴욕의 거리들을 한 없이 걷는다. 무엇인가를 찾거나 특정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방황하고 배회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퀸에 의해서 감시당하는 피터 스틸만이 하루 종일 시내를 걸으면서 하루 하루 만들어내는 글자들처럼 결국 방황과 배회의 흔적은 삶의 리얼리티를 형상화 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