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나의 꿈이

그의 핏속에 남아 있다. 언젠가 그는 화부(火夫)가 되어

네덜란드의 목조 어선을 탔을 때, 고래를 본 적이 있었다.

태양의 빛살 사이로 무거운 작살들이 날고

피거품 속에서 고래들이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쫓기며 꼬리를 쳐들고 작살과 싸우는 것을 보았다.

이따금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내가

사촌형은 아름다운 섬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었던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때면,

그는 회상의 미소를 띠면서 대답한다. 그들에겐

하루가 이미 늙었기에 태양이 떠올랐노라고.

 

- '남쪽바다' 중에서-

 

 

 

 

길게 늘어진 언덕이 정적 속에서 비에 젖는다.

 

지붕 위로 비가 내린다. 좁은 창문은

더욱 신선하고 벌거벗은 녹색으로 가득하다.

여인은 나와 함께 누워 있었지. 텅 빈 창문,

보는 사람 아무도 없고, 우린 벌거벗고 있었어.

그녀의 비밀스렁 육체는 지금 거리를 걷고 있으리라,

가볍고 부드러운 걸은걸이로. 그 걸음걸이처럼

가볍고 흐트러진 비가 내리고 있다.

지금 여인은 습기 속에 잠든 헐벗은 언덕을

보지 못한다. 낯선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길거리를 걷고 있다.

 

- '그 이후' 중에서-

 

 

8월이 달빛

 

노란 언덕들 너머에는 바다가 있다,

구름 저 너머에. 하지만 하늘을 배경으로

떨리며 물결치는 언덕들의 힘겨운 나날들이

앞에서 바다를 가로막는다. 이 위에는

얼굴도 비추지 못하는 물웅덩이와 올리브 밭이 있고,

끝없이 이어지는 그루터기, 그루터기들.

 

그리고 달이 떠오른다. 남편은 들판에 길게

늘어져 있다, 태양에 의해 머리통이 으깨어진 채-

아내는 시체를 자루처럼 끌고 갈 수 없다-

달이 떠오르고, 비틀린 나뭇가지들 아래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 속에서 아내는

온통 언덕을 적시며 엉겨 붙은 피와, 피로 얼룩진

얼굴을 향해 공포의 냉소를 흘린다.

들판에 늘어진 시체는 움직이지 않고,

그림자 속 여인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빗빛 눈은

누군가에게 끔벅이며 길을 가르쳐주는 듯하다.

 

멀리서 헐벗은 언덕들을 가로질러 기다란 전율이

다가오고 밀밭의 바다 위를 휘몰아가듯이,

여인은 어깨 뒤로 전율을 느낀다.

전율은, 달빛의 바다 속에 외로운 올리브나무의

가지들을 침범하고, 지레 움찔하는 듯한

올리브나무의 그림자마저 집어삼키려 한다.

 

여인은 달빛의 공포 속에서 뛰쳐나가고

자갈 위를 스치는 산들바람이 그녀를 뒤따른다.

희미한 그림자가 그녀의 발꿈치를 물어뜯고

만삭이 된 배에 통증이 뒤따른다. 여인은 그림자 속으로

구부정하게 되돌아오고, 자갈 위에 주저앉아 입술을 깨문다.

그 아래 거무스레한 땅이 피에 젖는다.

 

 

 

어머니

 

그 사내는 세 아들을 만들었다. 거대한 그의 몸집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으리라. 그가 지나가는 걸 보면

아들들도 그렇게 거대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아버지의 유신에서-여자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성장한 세 젊은이가 튀어나왔을 것 같다.

세 아들의 육체야 어찌 되었든,

아버지의 육신에는 조그마한 흠 하나

나지 않았다. 길을 걸어가는 그에게서 아들들이

분리되어 나와 나란히 걸어갔으리라.

 

                               여자는 있었다,

탄탄한 육체의 여자는 아들을 낳을 때마다 자신의

피를 뿌렸고, 셋째 아들을 낳고는 죽었다.

세 젊은이는 이상하리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여인,

힘겹게 그들을 낳고는 그 속으로 사라져간 여인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한때는 그 여자도 젊었고 웃으면서

말했지만, 삶에 뛰어든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놀이였지. 그래서 여인은 놀란 표정으로

자기 사내를 바라보며 침묵 속에 머물렀었지.

 

세 아들은 사내처럼 어깨를 으쓱거리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한때는

사내를 만족시켜주던 그 충문한 생명력을

두 눈과 육체 안에 간직하고 있지 않다.

젊은 아들이 강가에서 물속으로

뛰어드는 걸 보아도, 사내는 물속에서 펼쳐지더 그녀의

몸매를, 함께 잠긴 두 육체의 즐거움을 기억할 수 없다.

길을 걸어가는 아들들을 보아도 찾지 못하고

자신과 비교할 수도 없다.

그들을 낳은 지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가? 그런데도

세 아들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한 녀석은 벌써

아내도 없이, 실수로 아들까지 낳았다.

 

 

 

밤의 쾌락

 

바람마저 한 꺼풀씩 옷을 벗는 순간 우리도

걸음을 멈추고 발을 느낀다. 거리에는

차가운 바람만 일고, 모든 냄새가 사라졌다.

흔들리는 불빛 쪽으로 콧구멍을 쳐든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둠 속에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집이 있다.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여인은 잠들어 있다. 방에 따스한 냄새가 펴져 있다.

잠자며 호흡하는 여인은 바람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녀의 육체에서 나오는 따스함은

우리 몸속에서 속삭이는 피의 따스함.

 

이 바람이 어둠 속으로 펼쳐진 거리의 저쪽에서

다가와 우리를 씻어준다. 흔들리는 불빛과

우리의 긴장된 콧구멍들이 벌거벗고

서로 싸운다. 모든 냄새는 하나의 기억일지니.

멀리 어둠 속에서 바람이 솟아나와

도시를 휩쓸고, 저 아래 들판과 언덕으로

달려간다. 태양에 뜨거워진 풀밭과 체액으로

시커먼 대지가 있는 그곳. 우리의 기억은

쓰라린 냄새, 겨울이면 깊숙한 호흡을 내뿜는

황량한 대지의 초라한 부드러움. 어둠 속에선

모든 냄새가 사라지고 도시에는 바람만 휘날린다.

 

오늘밤 우리는 잠든 여인에게로 돌아가리라.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육체를 더듬으면

따스함이 우리의 피를 뒤흔들리라. 그것은

체액으로 시커먼 대지의 열기, 생명의 호흡.

여인도 태양 속에서 뜨거워지고, 이제 벌거벗은 채

낮이 되면 사라지는, 가장 부드러운 생명을

드러내다. 대지의 냄새가 풍긴다.

 

 

 

 

 

9월의 그라파

 

아침은 강기슭을 따라서 쓸쓸하게 흘러간다,

청명하게. 어둑어둑한 초록빛을 거느리며

새벽안개 걷히고 해가 뜨길 기다린다.

저 들판 끄트머리 길갓집 사람들이 파는 담배는

물기에 젖어 있고, 검은빛 머금은

진한 냄새가 난다. 푸르스름한 연기를 낸다.

그곳엔 물처럼 투명한 그라파도 판다.

 

모든 것이 멈추고 익어가는 ㅅ누간이 왔다.

멀리서 나무들은 말없이 차분함을

더하고, 한번 흔들면 후드득 떨어질지도 모를

열매들을 감춘다. 흐트러진 구름들도

열매처럼 잘 익어 둥글어진다. 멀리서 거리의

집들도 햇살의 따스함에 익어간다.

 

이 시간 그곳엔 여자들뿐. 여자들은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고, 양지바른 곳에 서서

과일처럼 따스한 햇볕만을 쪼인다.

차가운 대기의 안개를 조금씩 홀짝이면

그라파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맛을 낸다.

강물도 출렁대며 기슭을 들이켜

하늘 밑으로 강이 잠기게 한다, 여자들처럼

거리도 가만히, 서서히 익어간다.

 

이 시간이 되면 누구라도 걸음 멈추고

거리의 모든 것이 어떻게 익어가나 지켜보리라.

산들바람은 구름을 움직이게 하진 못해도,

흩어지지 않게 푸르스름한 연기를

피우게 할 만큼 세다, 그건 스쳐가는 새로운 맛.

담배는 그라파에 젖어 있다. 이렇게

아침을 즐기는 것은 여자들만이 아니다.

 

               

                  * 그라파: 포도주를 만들고 남은 포도 찌꺼기를 증류한 알코올 도수 높은술.

 

 

그 향이 진하고 독특해서, 몇년이 흘러도 기억에 남았던 '그라파'

생각만으로도 그라파의 향이 혓바닥을 찌릿하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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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10-07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라파라는 술 처음봤어요 술병두 독특하구 이쁘네요. 그런데 도수가 높다니! 책을 읽다가 기억하게되는 그 기분 상상이 됩니다 ㅎ

보슬비 2015-10-07 17:2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프라하에서 처음 알게 된 술이예요. 40도가 되는 술이라 많이는 못 마시고 찔끔 찔금 마시거나, 칵테일해서 마셨는데, 칵테일로 만들어도 확실한 술향과 맛이 있어서 지워지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아직도 기억에 남았던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