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품절


그래도 의자, 햇살, 꽃들. 이런 것들을 쉽사리 무시해 선 안 된다. 나는 목숨이 붙어 있고, 살아가고 있고, 숨 쉬고 있다. 꼭 모아쥐고 있던 두 손을 펴고 햇살을 받아본다. 내가 있는 이곳은 감옥이 아니라 특혜의 장소다. 흑백 논리를 사랑하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말대로.-17쪽

나라면 죽기 전에 좀 시간이 있는 편을 택하겠어. 그래야 삶을 정리하지.-40쪽

제일 끔찍한 것은 머리에 씌워놓은 주머니들이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얼굴보다 주머니가 더 끔찍하다. 그걸 쓰면 사람들이 마치 얼굴을 미처 그려 넣지 못한 인형처럼 보인다. 허수아비들 같다. 하긴 어떻게 보면 허수아비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을 겁주려는 게 목적이니까. 또 어떻게 보면 그들의 머리는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 밀가루나 반죽 같은 것으로 채워진 주머니처럼 보이기도 한다. 명백히 드러나는 머리들의 무게, 텅 빈 공허감, 중력이 머리들을 밑으로 끌어당기고 있으며 고개를 쳐들 목숨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는 느낌은 끔찍스러웠다. 머리들은 무다.-60-61쪽

내 곁의 여자에게서 작은 떨림이 느껴진다. 그녀는 울고 있는 걸까? 여기서 운다고 해서 어떤 식으로 내게 잘 보일 수 있는 거지? 그런 걸 알아줄 만한 여유가 내게는 없다. 내 두 손이 바구니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불끈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무엇이든 절대로 그리 순순히 내주지 않을 테다.-63쪽

경계선을 따라 피어 있는 튤립꽃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빨갛고, 꽃봉오리가 벌어져 이제는 와인 잔이 아니라 넓은 술잔 모양이 되어 있다. 저렇게 온몸을 내던지는 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일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꽃들은 완전히 뒤집혀지고, 천천히 흩어져 꽃잎들이 비늘처럼 나부낄 텐데.-78쪽

즉시 변화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천천히 데워지는 목욕물처럼 자기도 모르게 끓는 물에 익어 죽어버리는 거다.-99쪽

비둘기들은 세 가지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번째 그룹은 한 번 쫄 때마다 옥수수가 한 알씩 나왔고, 두번째 그룹은 두 번에 한 알씩 옥수수가 나왔으며 세번째 그룹은 정해진 원칙이 없었다. 담당자가 옥수수 배급을 끊으면 첫번째 그룹은 상당히 일찍 포기했고, 두번째 그룹은 그보다 약간 늦게 포기했다. 하지만 세번째 그룹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을 때까지 버튼을 쪼는 쪽을 택했다. 어떻게 해야 옥수수가 나오는지 처음부터 몰랐으니까.
-120쪽

일단은 거기서 멈추자. 나는 이곳에서 나갈 작정이다. 영영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 다른 사람들도 이전에, 흉흉한 시대를 만나면 탈출할 궁리를 했고 그 사람들이 언제나 옳았다. 어떻게든 그들은 탈출했고 폭압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다. 비록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 동안 계속되긴 했겠지만.-229쪽

제발 명심해 달라.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정말이지 그런 충동은 참으로 거역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용서 역시 일종의 권력이다. 용서를 구하는 일 역시 권력이며, 용서를 유보하거나 베푸는 일 또한 일종의 권력이다. 아마 그만큼 커다란 권력은 없을 것이다.
-230쪽

우리는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그릇이자 걸어다니는 성배다.-233쪽

그럼, 밤이 내렸다고 해야겠지. 돌덩이처럼 나를 짓누르는 밤의 무게가 느껴진다.-325쪽

사령관이 한 말은 사실이다. 하나 더하기 하나 더하기 하나 더하기 하나는 넷이 아니다. 각각의 하나들이 독특하기 때문에 무조건 한데 묶을 수 없다. 그들은 일대일로 교환할 수 없다. 그들은 서로를 대체할 수 없다.
-326쪽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소, 그가 말한다. 우리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 더 좋은 세상이라고요? 나는 조그맣게 되뇐다. 어떻게 이걸 더 좋은 세상이라 생각할 수 있는 거지? 더 좋은 세상이라 해서, 모두에게 더 좋으란 법은 없소. 그는 말한다. 언제나 사정이 나빠지는 사람들이 조금 있게 마련이지.

-360쪽

나는 작은 식탁에 앉아 포크로 크림콘을 먹고 있다. 포크와 스푼은 나오지만, 나이프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고기가 나올때면 미리 썰어져 나온다. 마치 내가 손도 못 쓰고 이빨도 없는 사람처럼. 사실 나는 둘 다 가지고 있다. 그게 내게 나이프를 주지 않는 이유다.-390쪽

나는 모이라가 무서워진다. 그녀의 목소리 속에서 무심함, 의지 결여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말로 모이라에게 그런 짓을 해버렸단 말인가? 그녀 존재의 핵심에 있던 무언가를 앗아가 버렸단 말인가? 하지만 나 자신도 그렇게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그녀가 버텨나가길 기대한단 말인가? 내 마음대로 꾸며낸 그녀의 용기로 끝까지 살아나가기를, 온 몸으로 실천하기를, 어떻게 그녀에게 바란단 말인가?-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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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le 2005-03-18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페이지 인덱스인가요? 서재에서 처음봐요. 굉장하군요....님의 서재는 자료가 엄청나게 많아서 천천히 오래 머물면서 읽어봐야겠네요. 반갑습니다.

보슬비 2005-03-18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구절들을 표시해두고 올린거랍니다.
알라딘에서 그렇게 올리도록 하는 기능이 있어요. 물론 글은 직접 타이프해야하지만^^ - 서재가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