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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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재우고 자정이 넘어도 그 시간은 아깝다. 가수면 상태에서 눈을 번쩍 뜨고 나와 현관에 면한 옹색한 옷방에 웅크리고 앉아 책을 잡는다. 흔한 벽시계가 아쉬운 순간 시간은 정지한 듯한데 책장은 무섭게 넘어간다. 마음 같아서는 밤을 꼴딱 새워서라도 다 읽고 싶은 책이었다. 

미혼이었을 때 나와 연년생 여동생은 박완서의 에세이를 함께 읽었다. 소설에 거부감이 심한 동생은 박완서의 수필로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려 들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더이상 책을 읽지 않는 여동생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박완서의 수필. 그 곳의 어느 지점에서 나와 동생은 조우한다. 아가씨들이 왜 노년의 그 자박자박 걷는 걸음에 묻혀 가고 싶어했는지 그 의아함의 기억은 벌써 아련해진다.  

임신했을 때 드러누워 박완서의 단편을 가열차게 읽어 내려갔다. 암투병으로 머리칼을 잃은 남편이 선물받고 사모은 모자에 얽힌 사연을 소설화한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태교와는 무관하게 가슴을 저며 팠다. 암이 뇌로 전이되어 퇴근길에 갈지자로 걷는 모습을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며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심정에 고통스럽게 공감하며 나는 아름답지 않은 진실에 육박해 가는 그의 삶에 대한 응시에 매료되어 갔다. 아름다운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삶의 비루하고 치사스런 면면을 더듬더듬하며 아이와의 만남을 기다렸다.  

그는 척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매사에 그렇게 어정쩡하고 적당히 비겁하다고 거듭 매도한다.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그래서 다분히 복합적이고 실제적이다. 평면적이고 얄팍한 허구적 인간 군상의 허술함에 질린 이라면 그의 소설을 접해 보기를 권한다.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나를 읽고 너를 읽고 우리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순수하면서도 야비하고 비겁하면서도 과감하고 순박하면서도 비열할 수도 있는 그래서 정말 인간 같은 인물들이 팔딱이는 그의 이야기 속에는 삶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삶 속으로 비집고 들어올 것만 같은 두려움까지 들 정도이다. 소설을 읽으며 그 소설 속에 몰입하고 그 과정에서 나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한 도약이다. 가능할 것만 같으면서도 일말의 작위성에 밀려 결국 나는 소설을 읽고 있다,는 명징한 깨달음의 한계의 철책을 저만치 밀어버리는 일은 그의 소설의 독특한 미학이 아닌가 한다.  

이제 그는 여든의 길목에 들어선다. 나이 든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는 처량한 나이, 내 정수리를 지긋이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을 토로한다. 나이드니 좋다, 세상사에 초연해질 수 있다고 가식을 떨지 않는다. 젊어 보인다는 소리가 제일 좋고 그런 소리를 들은 날은 종일토록 기분이 좋지만 글에서만큼은 나잇값을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런 수만가지 삶과 수만 명의 인간을 체현한 그가 종당은 깨달은 삶에 대한 얘기들은 어떤 것인가. 궁금했다.  

그에게 있어 6.25의 체험은 소설의 재료이자 소설가라는 직업을 택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서 작용했다. 때로 너무 우려 먹는다는 지적에 대하여 그는 맞춤한 변명거리들을 마련해 놓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 기억의 깊이와 무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4후퇴 때 양쪽 다리를 못쓰게 된 오빠를 손수레에 싣고 피난길을 떠난 그 나날들이 생생하고 기분나쁘게 냉동보관되어 차라리 하나의 질병처럼 작가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는 고백은 왜 그토록 작가가 과거의 기억들을 토대로 전쟁을 증언하는 데에 매달렸는 지를 이해하는 데에 하나의 단초가 된다. 어쩔 수 없는 절절하고 생생한 시간들. 감각의 기억들. 오죽하면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으며 감기에 걸리기까지 했을까. 전쟁을 간접적으로 전해듣고 상상하는 것들과 실제로 그 인간이 전체 속에 함몰해 들어가 그 중량감과 존귀함을 갑자기 상실하고 개인의 삶이 요동치는 실제 전쟁의 체험과는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완서는 외려 현재의 풍요로움이 하나의 환상 같고 과거의 그 전시의 빈곤함과 신산한 삶들이 더 현실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나고 좌도 싫고 우도 싫다는 그의 외침이 내려 앉는 자리는 그가 노구의 몸안에 왜 청춘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고 얘기하는 지에 대한 이해와 만난다. 

과거에 대한 반추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그가 본 영화, 읽은 책, 가 본 장소에 대한 소소한 감상도 감칠맛 나게 읽힌다. 특히나 레이몬드 카버의 <<대성당>>에서의 그 맨숭맨숭한 인간관계들과 우리의 낫또 같이 끈끈한 줄을 달고 다니는 인간 관계에 대한 비교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예리하다. 카버의 <<대성당>>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안의 표제작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아들의 죽음과 빵집 주인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진한 감동에 휩싸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 하나로도 카버의 전부를 인정해 버리고 싶을 만큼 위로를 통한 치유를 절묘하고 생생하게 그려 낸 수작이었다. 박완서는 특히 이 작품의 전체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감상을 얘기하고 있다. 여든의 작가와 내가 함께 사랑하는 작품이 있다는 건 묘한 공감에의 감동이 있는 대목이다. 한 번도 뵙지 못한 그와 마치 마주앉아 그거 정말 죽이지 않냐!고 함께 손 맞잡고 방방 뛰는 듯한 반가움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나는 여즉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한 하루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인상깊다. 삿포로의 대형서점에 앉아 뜨게질교본을 어루만지며 행복해 하고 하루끼의 달리기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일본인들의 친절의 근원을 우월감의 소산으로 해석하고 이 좋은 걸 왜 이제 알았냐며 월드컵에 흥분하는 작가의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는 절절 끓는다.  

십 년만 더 젊어진다면 완벽하게 정직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그. 마당의 살구 나무에서 떨어진 살구를 큰 스텐 들통에 넣고 한여름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고아 삼십 통의 잼을 만들어 노느매기한다는 그. 지구를 신이 찬 가장 멋진 축구공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읽는 일에 흠뻑 빠져 때로 그 시간들이 대리 체험이상이 아니라고 비하하지 않아도 되는 그곳에 박완서 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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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08-04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작가의 글들은 생생한 삶이 녹아져 있어 좋아요. 6.25에 대한 기억도 작가의 글을 통해 좀 더 세밀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엄마의 말뚝도 그랬고,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도 그랬구요. 이 책은 에세이집인거죠? 궁금하네요.^^
아이 재워놓고 보는 책의 맛이 어떤지 저도 잘 알아요. 그런 조각 조각의 시간들이 블랑카님이나 저한테 행복을 주는 시간인거죠.^^

blanca 2010-08-05 13:52   좋아요 0 | URL
예, 꿈꾸는섬님~ 에세이에요. 서평이랑 박경리, 박수근 화백 추모글도 있어요. 아이는 잘 때가 제일 이쁘다,고 러셀도 그러더라구요^^;;

2010-08-07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8-05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그렇게 괜찮아요? 아.....
그러고보니 박완서님 책은 단 두권 밖에 안 읽어봤네요...

난 임신했을 때 하필이면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이런 책들 읽어서,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떨었다눈... ㅡㅡ;;

blanca 2010-08-05 13:5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제 친구도 비슷한 책 보고 가위 눌리고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박완서를 많이 좋아하다보니 평이 조금 편향적이라^^;; 자신있게 권해드리지는 못하겠어요^^

2010-08-05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5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0-08-05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재워놓고 조용한 시간에 읽는 책, 맛나지요.^^
블랑카님의 좋은(이 말로는 표현하기가 부족한^^) 리뷰를 보니 이 책도 당깁니다.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를 전 참 좋아해요.

blanca 2010-08-05 13:55   좋아요 0 | URL
저도 친절한 복희씨 참 여러 번 읽었어요. 노년 문학이 왜이리 와닿던지....나이 들어가며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들과 깨닫는 것들을 소설화하니 삶에 대해 앞서 배우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기억의집 2010-08-05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덟개의 모자~~그 단편 읽으면서 박완서 선생님의 애절함이 너무 너무 절절히 묻어나서 울며서 읽은 소설이여서 기억해요. 저문 날의 삽화에 들어있던 단편이지요. 방금 찾아보니...다시 그 때의 감정이 되새김질되네요. 저도 지금 박선생님의 수필 나왔다 길래 살까말까 망설여지긴 하는데. 저 대목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작가와의 감정 공유 대목을 읽으니 어떻게 쓰셨길래 하는 생각이 드네요^^

blanca 2010-08-05 13:56   좋아요 0 | URL
저도 울었어요. 게다가 실화라니.그것 알기도 전에 읽으며 이건 체험이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오더라구요. 그리고 이 책! 기다리세요^^

stella.K 2010-08-05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선생은 소설을 쓰기 위해 특별히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 안들어요.
그냥 직접 겪었을 또는 어디서가 들은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힘이 들어가지 않은 이야기의 힘. 그게 박완서 선생의 특징인 것 같아요.
그렇게 블랑카님처럼 밤을 새워 읽을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책 만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 건지...
모처럼 행복한 밤이었겠습니다.^^
옷방이면 작은 방 아니었나요? 옆에 선풍기는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ㅋㅋ

blanca 2010-08-05 13:58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그죠. 저는 그래서 이런 생각 했어요. 자기 인생이 너무 순탄하면 작가가 소재가 빈곤하겠다고. 가장 좋은 건 경험하지 않은 것들도 경험한 것 이상으로 그려내는 거지만 그게 쉽지가 않을 테니까요. 옷방. 무자게 작구요. 대박으로 더웠어요 ㅋㅋㅋ 죄지은 것처럼 거기에서 불켜고 오그리고 책 읽었다니까요. 한 두시까지 봤나봐요.

穀雨(곡우) 2010-08-05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지기가 박완서님 글은 참 좋아해요. 저두 오늘 김영하작가 책이랑 카트에 밀어 넣었다죠.^^
블랑카님의 눈을 통해 박완서님을 보니 새롭네요. 인간에 대한 본질에 가 있는 것도 같고 말이죠.

blanca 2010-08-06 14:26   좋아요 0 | URL
곡우님~ 셋째!! 정말 감축드려요. 축복 같은 아이네요....이 책도 참 좋아하실 거예요.

gimssim 2010-08-05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온지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책을 읽으셨군요.
박완서 선생의 책을 잘 읽히지요.
저는 대뷔작 <나목>을 좋아합니다만 이 분 글은 노년에 쓰신 글이 훨씬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찬 바람이 좀 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요즘 계속 그로키 상태라~~

blanca 2010-08-06 14:28   좋아요 0 | URL
중전님! 나목 참 좋지요. 저도 찬바람이 불어야 할 것 같아요, 중전님. 요새는 더워서 그런 건지 정말 힘들어요. 처서를 기다리고 있어요. 중전님도 힘내세욥!

따라쟁이 2010-08-0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박완서님의 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왠지 이 리뷰를 읽자니 한 두어권 구입해서 찬찬히 읽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택배상자가 또 늘겠네요ㅠㅠ

blanca 2010-08-06 23:41   좋아요 0 | URL
그 어여쁘다는 따라쟁이님인가요?^^ 저는 택배 상자가 너무 많이 와서 다 겹쳐서 눈속임해 둔답니다.^^

비로그인 2010-08-07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것이었군요.
아 어디선가 슬쩍 스쳐본 내용에는 이분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다른 방향으로 했었던 기억도 물큰 만져집니다.
그나저나 작가와 비슷한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 참 기분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쓰신 글에서 blanca님의 이런 느낌의 눈웃음이 막 보일듯 하네요. ^^

blanca 2010-08-08 15:36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박완서의 소설에는 제가 숨기고 싶은 저의 은밀한 욕망, 시기, 분노 등이 드러나 때로는 불편해지기도 해요. 그런 것들이 모인 것이 인간임을 간파한 노작가의 시선에 움찔하기도 하고요. 그의 소설을 읽으며 인간을 더 잘 알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순오기 2010-08-08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한동안 열병처럼 박완서를 읽었는데...그러다 보면 또 멀미가 나서 멀리하기도 했지요.^^
친절한 복희씨로 다시 만났지만 호미는 읽지 않았어요. 이 책은 님의 리뷰 때문에 장바구니에 담아요.
구매는 좀 있다 하겠지만...
토지문학상 시상식에 박경리샘이랑 같이 오셨을 때 뵈었어요~ 팔을 꼭 잡고 사진도 찍은걸요.^^

blanca 2010-08-08 15:3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멀미, 맞아요. 저도 한동안 박완서샘 소설을 주구장창 읽다가 손을 놓기도 했어요. 우아! 박경리샘도 생전에 만나보셨겠군요. 팔을 꼭 잡고 사진을...저도 박완서샘을 꼭 뵙고 싶은데. 너무 부러워요. 토지 문학관도 가보고 싶고. 광주에서 모임 가진다고 하셔서 갈 수 없음에 통탄했습니다. 이래저래 너무 가보고 싶은데 아이가 더 커서 자유를 찾기를 바랄 뿐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8-08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가 좋았어요.누구나 가지고 있는 속물근성을 은근히 톡 쏘아주는 맛이 있더군요.산문집으로는 '두부'를 읽었지요.

blanca 2010-08-08 15:39   좋아요 0 | URL
노자님! '그해~'는 섬뜩한 면도 있더라구요. '두부'는 제 동생이 특히 좋아했어요. 속물근성,하면 저는 박완서샘이랑 모옴이 생각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상찬을 바치는 작품이 있다. 유명인들이 추천 도서 목록 고전에 거의 반드시 올리는 소설이 있다. 소설의 죽음을 이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얘기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메시지까지 싸안고 있는 그 책. 

 

 

 

 

 

 

 

 

별 다섯 개가 거개인 리뷰를 몇십 개를 달고 있는 소설도 흔치 않다. 그것도 고전중에. 그러니 나는 언제나 항상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였다. 그리고 칠레의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그 독특하고 유머러스하고 야하고 그럼에도 아름다운 그 남미의 문학 특유의 분위기에 완전히 중독되어 남미 작가들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며(고작 두 권 읽고) 이 책을 시작했다. 

그.런.데. 폭염과 더불어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 같은 이름이 몇 대에 걸쳐 반복되고 죽었다 살아나고 이모랑 했는지 여동생이랑 했는지를 헷갈리는 등장인물과 더불어 완전히 미로를 땀을 뻘뻘 흘리며 헤매다 끝나고 말았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의 리뷰를 적을 자격이 없다. 일단 성실하지 않은 독서였고 그 마술적 리얼리즘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은 딱딱한 감수성을 견지했으며 근친상간이 가지는 더 큰 문학적, 예술적 은유를 떠올리지 못했으니 이 책을 논하지 못하겠다. 

다만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소설보다 독특했고 기묘했고 매력적이었다는 것만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기필코 시원한 바람이 불면 다시 제대로 이 책에 빠져보리라. 이 책은 딱딱하고 까칠한 눈으로는 절대로 온전하게 즐길 수 없다는 것만을 깨달았다. 

남미에는 아주 독특한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사주며 잘 먹는 나를 흡족해하며 지갑을 털어댔던 절친은 지금 베네수엘라에 가 있다. 그녀는 과테말라에 있다 베네수엘라로 가며 미스 베네수엘라가 되겠다고 싸이의 대문글에 적었다. 그 독특하고 남을 의식하지 않는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를 떠올리며 남미의 그 문화에 한 번 젖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중복날 우리 가족은 칼국수를 먹으러 갔다. 허름하고 무뚝뚝한 그 작은 칼국수집에 근처 대학교의 농구팀 비슷한 젊은 청년들이 대거 들어서자 그 무뚝뚝하던 종업원 아줌마는 그간 본적 없던 애교와 너스레를 발휘하셨다. 정말 친절하셨다. 싸인 한 장씩 해달라고 세 번 반복하시며. 

분홍공주님은 아예 그쪽으로 돌아앉아 한참 그 오라버니들을 완상하시더니 돌아앉아 갑자기 음흉하게 웃는다.  
그건 분명 아주 의미있는 웃음이었다.

그렇다. 여자들은 남자들을. 남자들은 여자들을 좋아한다. <백년의 고독>도 결국은 그런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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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2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이 미로를 헤맸다는 책이면...난 안볼래.
저번에 블랑카님의 리뷰보고...그거 읽었다가...나 한참 헤맸어요.ㅠㅠ

blanca 2010-07-30 15:42   좋아요 0 | URL
마기님~ 그게 뭐예요?^^;; 괜히 미안해질라고 해요^^;; 좀 시원해져야 책 내용도 머리에 들어올 것 같아요. 당분간은 좀 가벼운 걸 찾아 볼라구요. 아, 정말이지 너무 더워요!

비로그인 2010-07-30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덥죠 blanca님 !

전.. 후에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 판타그뤼엘 읽을때 느낌이 좀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온갖 것들이 마구 뒤섞여 있는 듯 하지만 그 속에는 뭔가 질서가 있는 듯하고, 그 질서란 다름아닌 옛부터 내려오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그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여자들은 남자를, 남자들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그런걸까요..? ^^

참! 제가 읽은 어느 책에 의하면 (정확히 몇살인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3-4살정도가 되면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에게 어떤 유혹의 제스처를 본능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분홍공주님" 도 이제 그런 나이가 된걸까요? ㅎ

blanca 2010-07-30 15:44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아, 진짜 오늘 제대로 덥네요. 끈적끈적하고. 하하하. 제가 딸애를 키우면서 느낀 건데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자애들 앞에서 달랐어요 ㅋㅋㅋ 바람결님 얘기 들으니 이제야 이해가...여성으로 키워지는 게 아니라 타고난 여성적 본능이 있는 것 같아요. 진짜 신기해요. 가르강티아/판타그뤼엘. 제목부터가 어렵네요^^;; 그런데 아마도 번역본이라 그런 면도 있을 것 같아요. 원서로 접하면 또다른 느낌일 것 같은데...

금욜은 많은 것들이 용서되는 요일인 것 같아요^^

루체오페르 2010-07-30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 여자들은 남자들을. 남자들은 여자들을 좋아한다!

명쾌합니다!^^

blanca 2010-07-30 15:45   좋아요 0 | URL
루체오페르님. 그건 유아부터 노인까지 두루두루 적용되는 유일하게 예외가 아주 적은 명제인 것 같아요 ㅋㅋㅋ 며칠 전 병원에서 자원봉사하시는 이쁜 할머니들 주변에 할아버지들이 둥글게 둘러싼 것도 봤어요^^

비로그인 2010-07-30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남미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도리어 그 감성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을 보면 부럽기까지 합니다. 제가 아는 남미는 음악으로 모든 것이 채워져 있어서, 음악 이외의 무엇을 즐겨본 적이 없었어요)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고 더운 나라들을 내가 싫어한다는 걸 명백히 확인하게 되었어요. 이 책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소설이지요. 하지만 저도 길잃은 1인입니다. 이름을 못외워서 길을 잃었다니 무식해 보이지만 어쩌겠어요, 그게 저인걸요. 하지만 이름을 기억 못한다는 이 사항이 뭔가 뒤틀렸던 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 때였지요. 정말 하나도 헛갈리지가 않았어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애칭이 따로 있는 그 이름들 속에서 전 길을 잃지도 않았고 찬탄해 마지않으며 읽었더랬어요. 그래서 내 나름대로의 이상한 논리가 그 때 생겨났습니다. 난 더운 나라에 적응을 못하는구나.

이 거대한 문학의 지도 앞에서 날씨 운운이라니요. 무식하지만 저의 책읽기 자체가 벼룩같은 걸, 깨달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나마 똑같이 더워도 이슬람에선 길을 잃지 않으니(옆에 있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저의 베스트 중의 하나여요) 이상야릇하지만요.


그러나 이 책을 내가 좋아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강력한 이유는, 역시 문체였어요. 그 남자의 마지막 말은 아직도 기억합니다. 어쩌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반짝반짝 빛이 나요. 물론, 어디 가서 읽었다 말하기 면팔리지만 말입니다.(하나더-반가워요! 나 혼자만이 아니었어요!)

blanca 2010-07-30 15:48   좋아요 0 | URL
쥬드님! 정말 비슷한 감상이에요. 저는 이름이 너무 헷갈리더라구요.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저 이 소설 읽고 정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전직의사가 사람들은 그저 전쟁만 맨날 해대는 존재감 없는 나라로 오인한 아프가니스탄을 그렇게나 아름다운 역사와 향토색, 사랑이 있는 나라로 복원해 냈다는 게 정말 감동이더라구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또 의욕이 생기네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다시 들춰보고 싶어집니다.

프레이야 2010-07-3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것의 표지가 더 마음에 드네요.
이 책의 유머에 젖으려면 저부터 무장해제하고 흥청망청 읽어야겠단 생각,
저도 비슷하게 했더랬어요.
아무튼 블랑카님의 결론이 아주 간명하고 정확하네요.^^
그리고 분홍공주님 귀여워요. ㅎㅎ

blanca 2010-07-30 15:4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그러니 이게 다 말도 안된다,고 시비 걸듯이 땀흘리며 읽었으니 저는 난중에 좀 상태 좋을 때 제대로 다시 읽어야 할 듯해요. 어젠 정말 그녀가 너무 웃겼어요 ㅋㅋㅋ 사실 저도 좀 흘낏 흘낏 보긴 했었거든요.

마녀고양이 2010-07-30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 분홍공주님의 웃음이 너무 궁금해여, 아이 보고 시퍼라.

이 더운날,, 저는 어려운 주제는 근처도 안 갑니다. "테메레르"에 홀랑 빠져서 삼일만에 벌써 4권 들어가고 있습니다. 거의 "테메레르" 폐인으로 집안꼴이 엉망이랍니다, 현재.

루체오페르 2010-07-30 10:41   좋아요 0 | URL
오홋 마녀님을 그렇게 빠지게 만들다니...테메레르 관심은 갔는데 상당히 재밌나 보군요.

blanca 2010-07-30 15:50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테메레르가 뭐예요? 검색해 볼게요. 하여튼 시리즈는 섣불리 시작하며 안되기에 나중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토지 읽다 살림을 완전히 놓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요 ㅋㅋ 분홍공주 대신 저를 보여드리죠^^

비로그인 2010-07-30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는 [백년동안의 고독] 신봉자 중의 하나에요. 옆에 가계도 하나 놓고, 별 생각없이 그냥 굽이굽이 같이 흘러가는거지요. 냉철함 보다는 속편하고 감정적인 저같은 타입에 맞는 책인걸까요?

얼마전에 [광대 샬리마르]를 정말 힘들게 읽었어요. 몇페이지 미리보기만 하고 책을 사선 안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지요. 온갖 풍이 뒤섞인 반전소설이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낯설은 카슈미르 이름들이 때론 이름으로, 때론 성으로, 때론 이름+미들네임, 혹은 직함으로 불리니 날도 더운데 더 씩씩거리면서 읽었다지요..

지금은 [여명]을 기다리고 있는데, 수요일에 '바로드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점서는 양장본 재고가 없다고 집으로 보내준다더니 큰 길 건너면 코앞인데 아직도 안 왔어요. ㅜㅜ

blanca 2010-07-30 15:52   좋아요 0 | URL
만치님! 가계도를 뜯어서 옆에 둘 생각을 저는 왜 못한 걸까요? 저 완전 바보인가봐요--;; 광대 샬리마르 읽고 싶었는데 아...그렇군요. 소설 제대로 읽으려면 가계도를 작성하든지 이름을 주욱 적어넣고 시작해야 될 것 같아요. 심지어 한국 소설도 헷갈리는 저인걸요 아, 여명 양장본으로 신청하셨군요. 저는 무엇보다 얇아서 강력 권합니다. 오늘은 왔을까요?

하이드 2010-07-30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남미 소설 시작한 것이 백년의 고독과 보르헤스 ^^ 다르면서도 공통된 엄청난 뭔가가 있어요.
마르크 레비의 <너 어디에 있니?>를 추천합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인데, 이 책을 보고 의외로 '중남미' 라는 곳에 대해 깨닫기도 했구요.

blanca 2010-07-30 15:53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보르헤스를 읽으셨다니 저는 맨날 읽지도 않아 놓고 아는 척 하잖아요 ㅋㅋㅋ 보르헤스...언젠가는 꼭 도전해 보겠습니다. 하이드님이 중남미 소설에 일가견이 있으시잖아요. 마르크 레비의 소설! 예, 장바구니에 담아둘게요~

stella.K 2010-07-30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읽다 포기했는데 지금 읽으면 재밌게 읽히려나 모르겠어요.
난 왜 노벨문학상이면 경기부터 하는지 모르겠습니다.ㅜㅜ

blanca 2010-07-30 23:32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제 일천한 경험상 노벨상 수상작이 기똥차게 재미있을 확률은 낮은 것 같아요. ㅋㅋㅋ

순오기 2010-07-30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 책을 여기저기서 추천해도 전혀 땡기지 않아서 읽을 생각도 안 했어요.
난해한 책 읽으며 골 아프기 싫어요. 예전보다 더 많이~~~ ^^
칼국수는 잘 해 먹는데, 올 여름엔 아직 팔칼국수를 안 했어요.
거의 저녁 메뉴는 잔치국수나 콩물국수로 때우고 있어요.ㅋㅋ

blanca 2010-07-30 23:3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팥칼국수 은근히 손 많이 가지 않나요? 저도 완전 면킬러라 잔치국수 엄청 해먹었어요. 그런데 역시나 자꾸 먹으니까 속이 좀 안좋더라구요. 콩물국수. 저도 콩 직접 갈아서 해먹고 싶은데 도저히 엄두가 안나서요.

기억의집 2010-07-30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저는 이 책을 백년의 고독이 아닌 백년동안의 고독으로 번역되었을 때 읽었어요. 저는 야하면서도 남미 문학 특유의 낙천적이고 늘어지는, 그렇게 읽었던 것 같아요. 무척이나 재밌게 읽었던 소설인데. 전 이 작품으로 마르케스가 좋아졌는데 그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인가 뭔가 하는 소설은(블랑카님이 백년의 고독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 도.저.히 몰입이 안 되더라구요. 백년은 그 때 첨 선뵈인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인가 뭔가 하는 소설적 기법이 독특하고 우리 문학의 기법하고 달라 몇 번을 읽었는지 제가 셀 수 없을 정도였는데........ 창녀는 읽다가 접었어요. 휴~~~

그리고 오늘 책 보냈는데, 그림책 두 권도 함께 보냈어요. 사실 그림책 더 챙길려고 했는데 어떤 스탈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더 못 넣었어요. ^^

blanca 2010-07-30 23:36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마술적 리얼리즘은 하도 들어서리 저도 읽기도 전에 알고 있었다니까요. 저도 아무래도 한 번 더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 그림책까정..이건 거꾸로 되는 거잖아요. 아...너무 고맙습니다. 저 기억의집님 덕택에 토마스 로커 나무책에 구름책까지 구입했답니다. 받으면 말씀드릴게요.

2010-07-30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1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2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1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2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2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육아의 맹점은 무언가를 내가 한다,는 느낌이 별로 없다는 거다. 특히 절제와 수긍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두 돌 반의 아이를 종일토록 상대한다는 것은 직장을 다녀서 종일토록 고되지만 그래도 하루를 마감한다는 개념과는 사뭇 다른 것 같다. 어느 것이 더 힘들다,는 경중의 문제가 아니라 하루 하루가 줄줄 늘어져서 뚝뚝 끊어지는 맛이 없으니 시간아 어서 가라, 어서 커라, 이런 식이 된다는 문제가 있다. 

예전에 온라인 카페에서 어떤 이가 아이 키우는 게 너무 힘들고 무료하다,고 하자 하루하루를 그냥 때우지 말고 직장을 다니듯 계획을 세우고 어떻게 함께 해줄까를 고민해 보라는 조언이 본 기억이 남는다. 머리로는 그래, 바로 그거야! 해놓고 또다시 나는 시계를 본다. 회사에 다닐 때는 다섯 시 이후 부터 이십 분 간격 정도로 시계를 슬쩍 슬쩍 보긴 했는데 이건 아침 열 시부터 시계를 보게 된다.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버티나. 직장에 다녀도 아이를 키워도 하루는 여하튼 고달픈 것이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는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거야, 라는 도피처를 아예 불신하게 되었다. 어떻게 해도 하루는 곤곤하다. 그러니 되도록 지금이 전성시대라고 생각하고 사는 수밖에 없다고 혼자 다독이기로 했다. 

어제 밤에 인터넷 항해에 빠져 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극성이 아니라 성의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감이 깨어 있을 지금 어떻게 책좀 보고 글좀 써볼 시간만 호시탐탐 노리며 아이를 방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과 함께. 

오늘. 지하철을 삼십 분을 타고 어린이 대공원에 갔다. 즉흥적으로.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물론 지하철 안에서 <백년의 고독>을 읽기는 했다.--;; 아이는 으레 엄마는 그러려니 하며 사람 없어 좋다고 에어콘 바람 쐬며 나름 즐거워했다. 

흐릴 거라 생각했던 날씨는 폭염에 햇빛 정조준이었다. 일단 식물원에 들어가 식물공부를 좀 하다 너무 예쁜 덩굴꽃을 봐서 이름을 기억해 두려고 이름표가 보이게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이 지경이다. 리아. 아...이젠 내가 무언가를 한다고 했는데 뒤돌아 보니 그것도 아닌 시점까지 와버렸다.

 

널따란  놀이터에서 줄서서 타지 않아도 되는 그네를 독식하며 즐거워 하던 따님은 맹수류에 잔뜩 호기심을 보이시며 내내 안고 관람하기를 주장해 주셨다. 극기 훈련의 시작이었다. 비오듯 하는 땀과 안기에는 큰 아이를 안고 표범과 퓨마우리를 지날 때마다 이게 호랑이냐! 호랑이를 보여달라고 주장해 대는 그 분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 큰 맹수 우리를 맴돌아야 했던 엄마를, 표범 보고 호랑이라 눙치려고 벼르던 그 엄마를, 한 큐에 나가떨어지게 해주시는 분. 그거 표범이다!라고 외치는 옆에 아주머니. 360도 돌고 오니 호랑이는 하늘로 올라간 것인지 코끼리가 맞아 주신다.  

호랑이는 없네.  

인공 냇가와 분수로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그곳에 가보겠냐고 하니 시큰둥하다 막상 들어가니 재미있는 모양인지 목욕하듯 온 몸을 담그고 흐뭇해한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이제는 엎드려서 헤엄치는 시늉을 한다. 어떤 또래 아이가 재미로 한 번 밟고 지나가 주신다. 그 아이의 엄마가 혼비백산하여 뛰어온다. 정작 내 아이는 시큰둥하니 그냥 일어난다.  

지하철 타고 돌아오는 길, 그저 몸으로 때운 시간들이 괜히 흐뭇하다. 내가 뭔가를 한 것 같고 해 준 것 같다. 그러니 또 <백년의 고독>의 그 허랑방탕하고 기묘한 저 세계로 들어간다. 스리슬쩍. 건너편에 아주머니가 아이를 쳐다 보는 것 같다. <백년의 고독>에서 아홉살의 소녀에게 반해 각시로 맞으려고 머리를 굴리는 남자 얘기에 빠져 있는 동안 아이는 사탕을 물고 옆 할머니에게로 쓰러져 잠들어 있다. 미안시러웠다. 그러니 또 그 땡볕 더위에 아이를 들쳐 안고는 그 끝이 안보이는 계단들을 오르락 내리락 한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폭풍의 언덕 위로 도저히 또 올라갈 엄두가 안나 맞춤하게 오는 택시를 타버렸다.

꿈꾸는 섬님 서재에 갔다 우연히 어린이 대공원 탐방기를 읽고 작성하다. 뵐 수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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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7-26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에게도 동물원에서 엄마를 극기훈련시키는 따님이 있으시군요..전혀 생각을 못했다지요.

blanca 2010-07-27 18:57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시간은 정말 잘 가더라구요...그리고 저도 조금 재미있었답니다.^^

꿈꾸는섬 2010-07-27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기훈련...맞아요. 전 낙타타는 곳에서부터 주차장까지 현수를 안고 업고 땀을 줄줄 흘리며 갔다지요.ㅎㅎ
그래도 아이가 즐거우니 우리도 행복하잖아요.^^
코끼리 옆에 사자, 사자 옆에 호랑이가 있는데 그걸 못 보셨군요. 아쉬워라. 다음엔 꼭 볼 수 있을거에요. 또 가셔야하는거 아시죠?

blanca 2010-07-27 18:59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아,,거기 가셨군요. 상상이 되서 또 갑자기 ㅋㅋㅋ 아이궁. 꿈꾸는 섬님도 힘드셨겠어요. 더위에 아이 데리고 야외 나가기 참 힘들지만 또 지금 아니면 언제 이렇게 함께 할 수 할 수 있을까 싶어 자주 나가려고 해요.

물놀이 그게 참 잼나서 또 가보려구요...이번에 꼭 수건도 가져가려구요. 여벌옷만 입고 수건이 없어서 대략 낭패였답니다.--;;

비로그인 2010-07-27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하필이면 서재 대문 사진의 괴테의 말이 어찌나 의미심장한지요. 그럼요, 그럼요. 감각은 우리를 속이지 않아요. 하지만 판단이 속일 뿐이지요. 때로는 친밀한 타인들(표범이다!), 때로는 냉정한 타인들(밟고 지나가 주신다) 사이에서 나를 온전히 알아내어야 할 존재를 책임지는 일은 얼마나 저릿한가요.

무얼 한다고 했는데 뒤돌아 보니 그것도 아닌 시점이라는 말과 사진에서 저 blanca님에게 반해 버렸어요!(제가 왜 이런 것에 반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만 저를 반하게 하는 순간은 늘 이런 순간이어요)

blanca 2010-07-27 19:01   좋아요 0 | URL
쥬드님!! 그저 반해만 주신다면 감사하지요^^ 그 아주머니는 가르쳐 주신다고 하신 건데 그게 그만 저한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고 만거지요--;; 타인한테 대체 어디까지 개입해야 적절할까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대문글은...가끔 되뇌어도 고개를 그 때마다 끄덕이게 되어서요..사실 그게 아닌 걸 알면서 내 판단을 밀고 나가는 경우가 꽤 많은 것 같아요. 더운데 건강 유의하세요^^

무해한모리군 2010-07-27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또 읽어보아요.
내가 경험한 적이 없는 아이와의 세계를.
온전히 어떤 생명을 책임지는 것은 얼마나 고단한 일일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쨌거나 꼬맹이는 즐거운 하루였겠네요.

blanca 2010-07-27 19:02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제 여동생은 신혼인데 벌써 육아의 고통을 저를 통해 대리체험하고 있답니다. 그래도 분명 의미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휘모리님이 참 부러운 것도 사실이네요^^ 휘모리님은 제가 늦게야 깨달은 사회에의 책임감에 관한 의식도 가지고 계시니 더욱 부럽습니다.

2010-07-27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7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극곰 2010-07-2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가끔 님의 글을 읽으면서 아이가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나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했답니다. 저도 3, 5살 아이가 있어서 그 맘을 잘 알아요. 퇴근하고 집에서 시간이 나면 너무 아까워서 짬짬이 책을 들여다보고 했더니.. 어느 날 큰녀석이 그러드라구요. "엄마는 맨날맨날 책만 보고, 나랑은 놀아주지도 않고, 힝~!" 애들이 다 알고 있드라구요. 그래서 요즘엔 회사 점심시간에 책을 보는 진상?이 되어버렸어요. ㅠ..ㅠ

blanca 2010-07-27 19:05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 반갑습니다. 맞아요....물론 안그러려고 하지만 책을 읽으며 건성으로 놀아주는 것도 엄연한 방치에 해당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독서하는 부모가 독서하는 아이들을 만든다지만 그건 분위기 조성 정도인 것 같아요. 점심 시간에 우아...저는 점심시간을 그런 식으로 활용하지 못했는데 대단하세요. 더위 조심하세요. 정말 너무 더워요^^

마녀고양이 2010-07-27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더운날 하필이면 동물원을 갔답니까.. 이긍이긍.
블랑카님 집에서는 강남쪽으로 휙 돌아서 LT 놀이공원도 있고, 삼성 어린이 박물관도 있고, LT 놀이공원 지하에 사람 모형 해놓은 장소도 있고.. 그제 뉴스 보니 아이들 위한 전시회가 또 있던데....
여하간 블랑카님 성격이 무모하단 말예여,, 에어컨 빵빵한 곳에서 나른한 한나절 보내삼~ ^^

고생하셨어여,,,,, 근데 웃긴건 아이 데리고 극기 훈련하는데 살두 안 빠지더란... 블랑카님은 어때여?

아 맞다.... 울 딸두 내가 시험 공부하는거 싫대여, 꼼짝않고 책 들여다본다구,, 아주 싫대여. ^^

blanca 2010-07-27 19:07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 제대로 극한 체험하고 이상스런 쾌감도 느끼고 왔습니다. ㅋㅋㅋ 너무 덥고 힘드니까 멍한 상태라고나 할까요. 삼성 어린이 박물관 너무 가보고 싶은데 지금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해서요. 지하철 타고 고고 해볼까요? 살이요? 오늘 엘리베티어에 비쳐 보니 참....팔뚝이 건장하더군요^^;; 아, 코알라 정도 커도 그러나요? 그렇군요...

stella.K 2010-07-27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극작가 누구더라? 그 사람은 자기 글 쓰려고 아들한테 피아노를 배우게 했답니다.
정작 본인은 글쓰는데 방해 된다고 음악은 듣지도 않고.
그래도 그 아들이 잘 자라 유명 피아니스트가 됐다지요.
그러니 너무 아이들 눈동자같이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블랑카님 책읽을 때 분홍 공주는 자기 나름의 일을 찾아 하잖아요.ㅋ

blanca 2010-07-27 19:08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저도 벤치마킹좀 해야겠네요. 이게 참 딜레마에요. 스텔라님 댓글로 위안좀 받고 갑니다. 예. 자기 나름의 일을 뭔가 사고를 항상 치기는 해요 ㅋㅋ

pjy 2010-07-27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감질맛나는 리아는 뭘까요?ㅋㅋ

blanca 2010-07-27 21:43   좋아요 0 | URL
piy님 도통도통 기억이 단서도 없습니다. 아주 어렵고 긴 이름이었던 것만은 분명한데...방법은 다시 가 보는 수밖에 없는 걸까요--;;

gimssim 2010-07-27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아, 살림, 독서, 글쓰기...정말 대단하세요.
지금은 젊으시니 최대한 일할 수 있는 분량을 늘려서 마음것 하는 것도 좋답니다.
어느 새 세월은 흘러 자꾸만 자꾸만 행동반경을 줄이고픈 때가 곧 온답니다.

blanca 2010-07-28 20:18   좋아요 0 | URL
중전님. 예..욕심과 의욕을 줄여나가는 것도 아름답게 나이들어 가는 과정임을 명심하겠습니다.

비로그인 2010-07-2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동네 가까이에 오셨었군요?

blanca 2010-07-28 20:20   좋아요 0 | URL
마기님! 제가 부러워하는 바로 어린이 대공원 근처에 유모차 끌고 나올 수 있는 엄마가 마기님이었군요? 막내도련님은 이제 괜찮은 거죠? 물놀이하게 되어 있는 곳에 데려가면 좋아할 것 같아요.

순오기 2010-07-2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보이는 꽃이름은 부켄베리아에요.
마치 종이로 만든 꽃같죠? 분홍 다홍 색깔도 예뻐요!^^

blanca 2010-07-28 20:21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갑니다. 부켄베리아!! 안그래도 저 사진 올린 건 누군가가 저 꽃 이름을 알려 주기를 바랐기 때문인데..역시 순오기님입니다.!!

pjy 2010-07-28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역시 순오기님이닷^^

blanca 2010-07-29 15:12   좋아요 0 | URL
pjy님 저 꽃이름 안 잊으려고 칠판에 써놓았어요^^

아시마 2010-07-29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똑같은 고민을 하시네요. 저도 매달 초입에, 매주 초입에, 매일 아침마다, 이번달은 이번주는 오늘은 책 좀 적당히 보자고 맹세에 맹세를 거듭하는데도 그게 잘 안되요. 책의 유혹은 너무나 막강하고,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긍정되는 행위라는 것이 오히려 더 치명적인 것 같아요. 책 읽는 엄마라니, 이건 모르는 사람이 봐서는 너무나 근사하고 모범적인 모습이잖아요? 진실은. 음.

저도 맨날 그래요. 맨날맨날맨날. 책만 읽고 있는 내가 짜증나고, 맨날 저녁에 애들 재우고 나면 아, 오늘도 애를 방치해뒀구나, 하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달력에 오늘 내가 무슨 책 봤나 쓰는 거 서너달전부터 관뒀어요. 한달이면 서른권에 육박하는 책들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아이들을 방치했나 느끼는 거 싫어서요.

전 때때로 제가 책 중독이라고, 진심으로. 느껴요.

blanca 2010-07-29 23:03   좋아요 0 | URL
사회적으로 긍정되는 행위...정곡을 콕 찌르셨어요. 맞아요....예전에 제가 자주 가는 까페에 자아실현과 육아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신랄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나요. 자아실현욕구가 강한 엄마일수록 아이를 방치한다는...너무 극단적이고 편협한 글이었지만 일말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어서 찔리더라구요. 저는 어린 시절 하도 책에 집착해서 외할머니한테 욕도 먹고 그랬어요. --;; 그런데 이게 말이에요, 아시마님. 저는 책이 없음 살 수가 없어요. 제가 외국에 갈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앞에서 제일 두려운 게 책 공수 문제랍니다. 친구가 베네수엘라로 갔는데 결국 원서로 돌아서더라구요. 어쩔 수 없이. 그것도 너무 어렵고 구하는 문제도 그렇고 가격도 그렇고.

저도 매일 밤 반성해요. 그래서 요새는 아예 밖에 나가요. 야외 활동을 막 시키는 그 순간에도 책을 안 가져왔음을 아쉬워하니 병이지요. 흑흑...갑자기 우울해질라고 해요, 아시마님. 그래도 또 담주에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랑 박완서샘 책 주문할 거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어요^^;;

아시마 2010-07-30 12:12   좋아요 0 | URL
김영하 오빠가 돌아왔다는 정말 근사한 책이예요. 그 책은 그 책 단독으로 읽어도 재미있지만, 그 이전의 작품들을 읽고나서 읽으면 그야말로 '오빠'가 돌아와서 아빠가 되었구나 싶었다니까요. 전 진짜로, 김영하가 그 책 이후에 아빠가 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마눌님하고 고양인지 강아지님을 데리고 살더군요. 흠. 하루키가 되려고 그러나. 자식을 기르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블링크가 하루키에게서는 분명히 느껴지는데 말이죠.

전 남편 발령 받았을 때 제일먼저 확인한게 알라딘의 해외 배송 정책이랑 가격이었어요. 요즘도 매일매일 시달리고 있죠. 해외배송 시켜 말어... 출장자 고생시키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흠...
 

진지함과 가벼움이 조화를 이루기란, 몸매는 섹시하고 얼굴은 청순하며 지적인 여성을 앞에 두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이나 
곤란하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 잡탕의 미학을 실현한 작가를 결국 너무 늦지 않게 만나고야 말았다. 깔깔대고는 웃다가 지나치게 야한 장면에서는 괜히 응큼하게 심호흡을 해보다가 결국 질질 짜는 자신을 발견할 때의 당혹감이란. 독자를 이렇게 무장해제시키고 괜히 민망해서 얼굴을 쓰다듬게 만드는 작가가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해졌다.

최후의 자지러지는 소리가 끝을 맺자 온 밤이 질퍽해졌고...  p.135

유물론자가 뭐요? 코스메가 입게 거품을 물고 말했다.
"장미와 통닭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때 항상 통닭을 집는 사람이죠." p.103  

그 순간 잔잔하던 바다에 반짝이는 고기 떼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언할 수 없이 거대한 달이
마리오를 환하게 비추었다. 베아트리스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순간 '영원'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p.91

검은 물이 바다를 바라보는 네루다의 집과.  역시 물로 화해 버린 유리창 너머로 지금 떠오르는 물의 집과, 사물의 집이었던
시인의 눈과, 말의 집이었던 시인의 입술을 복되게 적시고 있었다. p.157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인 이 작품은 칠레의 작은 어촌에 있는 단출한 우체국에서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받을 편지만을 배달하게 된 한 젊은 집배원이 사랑에 빠지고 시를 알아가고 마침내 시인이 투신한 사회적 가치에 발을 담그게 되는 얘기다. 새벽이 다하고 포도주가 바닥날 때까지 휘어 감고 탱고를 추고픈 허리의 소녀에게 대시인의 훈수를 받아 사랑의 작전을 펴나가는 청년의 무모한 열정과 그 열정을 적절하게 밀고 당기며 세상을 보는 프리즘에 대어 주는 시인의 사랑스러운 노련함은 작가의 재기발랄하고 걸쭉한 입담으로 투명하고 끈적끈적하고 반짝거린다.  

실제 노벨 문학상을 받고 칠레의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오마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이 작품은 잡탕의 미학을 실현한 것으로 자평했던 작가의 익살스런 눈으로 또다른 유머러스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비틀즈의 <우체부>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노시인의 모습을 묘사한 풍경은 절경이다. 문자 텍스트로 영상의 애드벌룬을 띄우는 비법을 작가에게 전수받고 싶을 정도로 그의 문장들은 살아서 꿈틀대며 냄새를, 소리를, 이미지를 뿜어낸다. 그러니 인내심을 손톱 만큼도 발휘하지 않아도 이 소설은 무난하게 읽어내려 가게 된다.  

집배원 마리오가 프랑스의 대사로 떠난 네루다를 위하여 바람에 울리는 작은 종들의 소리부터 사랑의 결실이 태어나는 소리까지 작은 포구 마을의 모든 소리를 세심하게 녹음하는 장면의 서정적 아름다움과 군부 쿠데타로 감금되다시피 한 노시인의 죽음을 지키는 장면의 처절한 진지함은 안토니오 스메르타가 실현한 문학적 성취를 방증한다. 결국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는 눈물을 닦으며 문을 닫고 나오게 만든다. 시는 읽는 사람의 것이라며 세상 모든 사물을 메타포로 이해하는 그 거대한 은유의 미학까지 넌지시 찔러 준 후 결국은 인간의 잔인한 권력욕에 스러지고 마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농밀한 응시까지를 체험하게 되면 또다른 그의 작품을 찾아 헤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책은 아름다운 지구별 볕뉘에서 몸을 데우는 소외된 자들이 꿈을 꾸고 마침내 이루었다 생각하고 그러다 스러져 가는 이야기이다. 감옥에서 사면되어 나온 미소년 좀도둑이 삼류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발레를 사랑하는 소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의 꿈의 실현을 몰래 기획하고 조력하고 또 함께 출소한 소위 기품있는 대도인 베르가라 그레이와 멋지게 한탕하고 '한탕은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는데 대체 난 왜 죽는 거지?' 자문하며 죽어가는 얘기다.^^ 

신파적 요소와 누와르적 분위기가 물씬한 이 소설의 특별한 지점은 시원하고 드넓은 태평양을 지척에 두고도 스모그에 둘러싸여 득시글거리는 가낭뱅이들과 독재에 반대하다 머리를 잘린 아빠를 둔 소녀의 절망과 독재시절 기업가들로부터 받은 검은돈을 금고에 보관하고 떵떵거리는 파렴치한 인간에 대한 분노가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고도 정작 소외된 이들의 체념과 맞물려 형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카르메타는 언제나 진지하고자 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언제나 자신이 텍스트의 빗장을 열고 사회적 현안을 치열하게 응시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책임감을 등에 지고 다니는 것 같다. 이런 그의 윤리의식은 그의 이야기를 지루하고 건조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되레 생동감 있고 적당히 달콤한 슬픔의 독특한 기류를 흐르게 한다. 

마지막 젊은 앙헬과 나이 든 베르가라가 금고의 돈을 터는 장면에서 등장한 레이먼드 카버의 <노란 장미 세 송이>의 체호프의 임종을 그린 작품에 대하여 주고받는 얘기들은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독특한 잔상이 남는다. 인생이란 마치 이런 것이라는 듯한. 또 예술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듯한. 도둑질하며 위대한 체호프를 연호하고 죽으며 난 잘했는데 왜 죽는 거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 지구별에 대한 시원한 조망이 가능한 그런 얘기다. 

지구는 수많은 행성들 사이에서 저만의 꿈을 꾸며 자전하는 미친, 그러나 다정한 별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지나치는 것들 하나하나는 모두 위대하고 바꿀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p.449 

자전하는 미친, 그러나 다정한 별에서 이런 작가의 얘기를 듣는 행복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그는 독자를 존중하고 추어줄 줄 아는 정말 드문 작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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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24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눈으로 읽으니 이렇게 아름다운 감상이 흘러나오나 봅니다.
내 블랑카님의 눈을 직접 봐야겠어!

blanca 2010-07-25 16:26   좋아요 0 | URL
마기님~그 날 너무 실망마세용 ㅋㅋㅋ

굿바이 2010-07-25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짝작!!!!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작정하지 않아도 작가의 호흡과 리듬을 따라갈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쿵쾅쿵쾅거리다 털썩 주저앉게 하는 이 책은 살덩어리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어요. 제 책장에 꽂혀 있었던 것을 잊고 있었는데, 너무 반가워요~^^

blanca 2010-07-25 16:27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읽으셨군요. 살덩어리로 태어나다, 이 표현 넘 와닿습니다. 정말 흥겨운 음악을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굿바이님과 그 느낌을 공유하게 되어 기뻐요^^

비로그인 2010-07-25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글이 마치 잘 짜여진 광주리 같아 너무 좋습니다.

시적 은유, 삶이 가져다 주는 또 다른 의미의 선물인 아이러니. 이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나봅니다.

더 많이, 보았던 것을 다시 보게 하는 시선, 오늘 아침을 풍요롭게 하는 생각들. 오늘은 이런것들을 담아 갑니다.

blanca 2010-07-25 16:28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안그래도 저 오늘 이쁜 담양 광주리 사가지고 들어왔어요^^;; 감사합니다. 이 책 한 번 꼭 읽어 보셨으면 좋겠어요. 바람결님도 분명 아주 좋아하실 것 같아요. 참, 그런데 혹시 유진 프리즌이란는 첼로리스트 아세요? 뉴에이지로 가긴 한 것 같은데...완전 뜬금없는 댓글들이지요^^;;

비로그인 2010-07-25 19:39   좋아요 0 | URL
네 꼭 말씀처럼 잊지 않고 다시, 전해주신 얘기생각하면서.. 깊게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유진 프리즌.. 지금 검색해서 그의 곡 하나 듣고 왔습니다.
퍽이나 짧아진 여름 저녁만큼 아련하니 좋네요. 오늘은 이곳 저곳에서 첼로 소리나 많이 나는 날이네요.

주말 잘 마감하세요 ^^

후애(厚愛) 2010-07-2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캡쳐 이벤트>하는데 참여하세요~ ^^
알라딘 마을에 소문내고 다녔더니 부끄럽고 재밌고.. ㅎㅎㅎ

blanca 2010-07-25 16:28   좋아요 0 | URL
옙! 후애님 갈게요. ^^

순오기 2010-07-25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전하는 미친, 그러나 다정한 별... 제목만 보곤 뭔가 했어요.^^
같은 책을 읽고도, 이렇게 멋진 글로 풀어내는 걸 보면 정말 감동스러워요!

blanca 2010-07-26 21:3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의 리뷰 읽고 구입한 겁니다. 순오기님이 좋다고 한다면 그건 확실하다 싶어서요.^^ 고마워요. 이 책을 읽게 해주셔서....

마녀고양이 2010-07-2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일 포스티노가 그리 좋다면서요... 아직도 못 봤어요.

진지함과 가벼움의 조화,,, 블랑카님. 양파처럼 그렇게 다양한 면을 가진 사람이 되고픈 생각을 해여.
항상 "저건 양파다...." 하고 알 정도의 일관성을 가지면서도, 또한 다이내믹하고픈 맘은 너무 큰 욕심일까요?

blanca 2010-07-26 21:33   좋아요 0 | URL
마녀 고양이님, 양파 같은 사람. 진짜 매력적이에요. 마녀 고양이님 양파 같은 여인 아니었어요? 이미 그런 걸로 알고 있는데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열세 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일관되게 뚫고 지나가는 섬뜩한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을 직설적으로 뱉어 낸 대목에서
멈칫했다. 

노골적이고도 머뭇거리지 않는 그 문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한 십 초 정지했나 보다.
허리에 실린 <조>라는 이야기의
첫문장이다. 

김연수와 김영하를 무심코 비교하게 된 적이 있다. 두 작가는 동성임에도 성적으로 대척점에 배열되는 것 같다.
김연수는 여성적 섬세함과 뭉클함의 외피를 입었다면 김영하에게는 근원적인 남성성에 대한 희구가 있다.
김연수가 잃어버린 낭만과 서정에 대한 향수에 천착한다면 김영하는 우리가 지금 잃어가고 있는 것들을 응시한다.
두 작가 아직 완전한 지향에 도달하지 못한 설익은 지점이 분명 있다.
하지만 그 지점을 돌파해 나갈 것을 기대하고
또 점점 그것을 향해 밀고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독자로서 분명 즐거운 일이다. 

김연수가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 갈망했던 소통의 화두는 김영하 앞에서 친밀감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변주된다.
그런데 김연수가 그 소통에 희망적이었다면, 김영하는 조금 회의적이고 멈칫하는 것 같다.
<소통>에서 여자 앞에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읊어대던 남자가 막상 관계의 진전 앞에서 도망가는 모습이나
<밀회>에서 죽음으로 그 여자를 떠나고 마는 남자의 슬픈 독백, <조>에서는 한층 더해 관계의 형성 자체가 유실되는
모습들이 그러하다.  

김영하의 시선은 이제 물질적으로 소외되어 카드회사의 소유가 된 그녀들에게로 향한다.  

황사는 평등했다. 황사는 어디에나 있었고 그것 때문에 모두가 함께 고통을 겪었다. 실로 공평한 재난이었다. 먼지는 일억원이 넘는 고급 승용차의 보닛 위에도, 오십만원짜리 스쿠터 위에도 모두 내려앉았다.<중략> 타클라마칸 사막 같은 데에는 가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수경 같은 이에겐 이것만이 사막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었다. 
-<로봇> 중 

타락한 경찰이 좀도둑들을 얼러 전리품들을 챙기는 <조>에 이러한 그녀들의 거대한 은유가 백화점 판매직으로 나온다.  백화점에 근무하는 그녀들의 신산한 삶과 타락과의 타협을 그의 시선으로 들여다 본 이 작품은 냉소적이면서도 서글프다. 허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시대의 보고서 같아 영 불편하고 선뜩하다. 연봉, 남자친구의 차, 들고 다니는 가방들은 이제 그녀들의 장식품이라기 보다는 그녀들 자체로 녹아내리고 있다. 허영이나 자기기만에서 나온 물질에의 집착이 아니라 극도의 궁핍과 소외에서 초래된 자연발생적 투항은 더 비극적이다. 김영하는 그런 모습들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그려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타락은 역설적으로 이유없는 타락인 것처럼 가장되고 있지만 우리는 알아차리게 된다. 타락이 처절한 생에의 투항임을. 

우울한 얘기들, 그러나 실재를 치열하게 파고 들어가는 얘기들 속에 김영하 특유의 유머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마코토>와 <아이스크림>은 낯이 익다. 발표되었었던 작품이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읽어도 일본인 유학생에 들이대다 굴욕을 맛보는 씩씩하고 밉지 않은 그녀의 고백과 우연히 아이스크림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아 제과점에 제보한 젊은 부부와 소비자 상담실에서 나온 나이 지긋한 남자 직원과의 에피소드는 유쾌하고 재미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소재에서 지나치게 진지한 성찰을 건져 올리려 오버하지 않는 작가의 모습이 쿨하다. 김영하는 내도록 쿨한 것 같다. 

가족이 강도에 의해 몰살당하고 유산을 물려 받아 홀로 커다란 아파트에서 아줌마를 부리며 사는 소시적 동네 친구와 퀴즈쇼에서 조우하게 되는 <퀴즈쇼>는 결론이 약간 허무했다. 사실 이런 결론 자체가 타인과의 소통이나 친밀감에 대한 회의적인 작가의 생각과 맞불리는 지점일 수도 있겠지만 나,와 너, 는 스치지만 함께 할 수는 없다,고 되풀이 말하는 것은 어쩐지 영 불편한다. 우울한 진실을 대면하는 것보다는 허망한 기대를 슬쩍 남겨 놓는 것에 더 매료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말미에 실린 <약속>에서처럼 마시는 커피이름으로 대유된다면 나는 <카라멜 마키아또>가 되고 그나 그녀는 <아메리카노>가 되겠지만 결국 그 둘은 한 탁자에서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마침내 시선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피어오르는 하나의 희망과 공감, 기대가 떠받치는 삶의 매혹이 있기 때문이다.  착각하고 사는 것도 때로는 괜찮다. 가끔은 이런 참혹한 진실을 대면하게 해 줄 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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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07-23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책을 다 읽어보려고 차곡차곡 쌓아만 놓고 아직 제대로 읽어보질 못했어요. 신작도 꽤 괜찮군요. 이 글 읽고나니 더 읽고 싶어지네요.^^

2010-07-23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10-07-24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와 너, 는 스치지만 함께 할 수는 없다,"
아 이 구절, 슬로우 모션의 한 영상과 함께 아련히 흐르네요.

blanca 2010-07-24 21:24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그런 것을 깨달아 가고 수긍해 가는 게 나이들어 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요즘 들어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 가지는 의미에 대해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stella.K 2010-07-24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를 아직 읽어보지 않아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김영하와 비교하시는 브랑카님의 안목이 대단하군요.
퀴즈쇼 나름 재밌게 읽긴 했는데 제 취향은 아닌지라
이 책은 또 어떨지 모르겠어요. 기회되면 한번...!^^

blanca 2010-07-24 21:2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저도 퀴즈쇼는 취향이 좀 안맞더라구요. 제대로 다 읽어 보진 못했고 조선일보에 연재할 때 드문드문 읽었어요. 뮤지컬로도 아마 만들어진 것 같던데...기회되면 한 번 읽어 보세요. 분량도 적으니 시간도 많이 안잡아 먹을 것 같아요. 김영하라는 작가가 조금 과대평가되어 있지 않나 싶었는데 이 책 읽고 앞으로 발전할 역량이 많은 작가라 여겨졌어요.

stillyours 2010-07-2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읽고 있는데 -
미리 읽는 리뷰도, 너무 좋아요 블랑카 님.
특히,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말이죠.
헉- 하게 만들었던 이 문장을 나는 그의 목소리로 먼저 들었어요.
http://me2day.net/kimyoungha
17일자 북테일러, 혹시 아직 못 보셨다면!
MOT의 이언 작품인데,
멋지답니다.
목소리도 세련된 그,
어떠한 감동도 없는 그의 목소리로 듣는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blanca 2010-07-24 21:27   좋아요 0 | URL
moon님...댓글 달고 꼭 들어볼게요. 문동까페에 제목으로 올라와 있는 걸 보긴 했는데 들어보지 않았거든요. 다 읽고 moon님의 리뷰도 기다리겠습니다.

아시마 2010-07-24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아직 이 책은 안 읽어봤지만요, 전 예전에 김영하와 이만교를 비교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 얼마전부터 김연수랑 같은 선에 놔두고 요모조모 생각중이었죠.
그래서 이번엔, 제가 깜짝 놀랄 차례예요.
저 역시,
블랑카님과 제가 비슷한 것들을 느낄때가 많은 것 같아서 놀라워요.
이 책을 배송받으려면 적어도 2달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다른 물건들이 줄을 서 있어요. ㅠ.ㅠ)
이 책이 오면, 읽고, 반드시 이 글에 먼댓글로 리뷰를 쓰겠사와요.

ps. 마코토는 김영하의 여행자 시리즈 도쿄편에 실려있는 소설이구요, 아이스크림은 30회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이예요. 그해 대상은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 였구요. 아마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읽으시면서 읽으셨을 거예요. 은희경이 <아이스크림>에 대해 평하기를 "새삼 작가의 서사감각과 솜씨를 느끼게 해 준다. 미련없이 끊어내 버리는 산뜻함이 이작가의 매력인데 이 작품 역시 강약 조절과 취사 선택이 매우 노련하다. 사소한 에피소드를 한편의 소설로 빚어내는 역량에서 또 한번 문학적 재능을 엿보게 된다"고 찬탄했죠. 은희경을 원래 좋아하기도 하지만, 김영하에 대한 저러한 평가에는 100%의 싱크로율로 동의하는지라, 기억하고 있어요. ^^

blanca 2010-07-24 21:29   좋아요 0 | URL
아시마님!! 속이 다 시원합니다. 맞아요. 분명 어디선과 분명 읽었는데 가물가물한 기억. 그런데 아시마님 기억력 완전 놀랐습니다. 저도 그런 기억력을 좀 지녔으면 좋겠어요. 두 달. 아시마님의 감상도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연수와 김영하. 저는 이 두 작가가 참 부러워요...비슷한 연배에 비슷한 인지도에 나이들어가며 어떻게 바뀔 지도 참 기대되구요.

아시마 2010-07-25 02:34   좋아요 0 | URL
전 김연수 보다는 김영하 쪽에 좀 더 높은 점수를 줘요. 김영하와 김연수를 보면, 김영하는 얄미울 정도로 재능을 타고났다는 느낌이고(사실 김영하 소설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들이 바로 이 "타고난 소설적 재능"에 관해 말을 하고 있기도 하구요.) 김연수는 재능도 물론 있지만 노력과 성실함으로 일구는 작가같거든요. 결국 엉덩이 무거운 놈이 이기는 게 세상 이치라고는 하는데... 음, 예술은 그런 이치에서 약간은 벗어나 있지 않나요? ㅎㅎ

김영하는 아직은 단편쪽이 나은 것 같아요. 그렇다고 장편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 장편도 좋은데 둘 중에서 굳이 고르라면 단편쪽이라는 거죠. 반면에 김훈 선생은 단편보다는 장편에 강하신 것 같고요. 김연수는 장편과 단편이 고루고루 평이한데 그래도 굳이 고르라면 장편쪽이요.

전 김연수를 보면 아직은 뭔가가 좀 아슬아슬하거든요. 뭐랄까 재미와 지루함의 경계에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지루하진 않지만 재미있지도 않은 그런 경지라는 게 아니구요, 되게 재미있기는 한데, 한발만 삐긋하면 지루함으로 풍덩~ 해 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요.
근데 또 김영하를 보고있으면, 이 친구가 재능을 낭비해 버릴까봐 두렵기도 해요. 김연수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문제로 아슬아슬함을 느끼는 거죠.

결국 , 제게는 둘다 비등비등하지만 그래도 김영하쪽이 포인트가 좀 더 높은데요,
블랑카님은 김연수 쪽이 좀 더 포인트가 높죠? ㅎㅎㅎ 왠지 그럴 것 같아요.

ps. 두 작가의 인지도가 꼭 비슷하진 않아요. 초판 발행 부수가 완전 다르다는... ^^

blanca 2010-07-25 16:31   좋아요 0 | URL
아시마님! 저는 사실 김영하를 안다고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장편은 검은꽃 한 편 읽어 봤어요. 그러니 90프로 정도 읽은 김연수를 조금 더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해요. 타고난 소설적 재능...김연수는 안그래도 스스로를 타고난 작가가 아니라고 단정짓더라구요. 김영하가 그런 행운아로군요. 초판 발행 부수. 저는 김연수가 4만부가 젤 많이 팔린 거라고 해서 참 놀랐어요--;;

아시마님에게 많이 배워요.. 참, 그런데 빛의 제국은 어때요? 궁금해서요. 추천해 주시면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