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열세 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일관되게 뚫고 지나가는 섬뜩한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을 직설적으로 뱉어 낸 대목에서
멈칫했다. 

노골적이고도 머뭇거리지 않는 그 문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한 십 초 정지했나 보다.
허리에 실린 <조>라는 이야기의
첫문장이다. 

김연수와 김영하를 무심코 비교하게 된 적이 있다. 두 작가는 동성임에도 성적으로 대척점에 배열되는 것 같다.
김연수는 여성적 섬세함과 뭉클함의 외피를 입었다면 김영하에게는 근원적인 남성성에 대한 희구가 있다.
김연수가 잃어버린 낭만과 서정에 대한 향수에 천착한다면 김영하는 우리가 지금 잃어가고 있는 것들을 응시한다.
두 작가 아직 완전한 지향에 도달하지 못한 설익은 지점이 분명 있다.
하지만 그 지점을 돌파해 나갈 것을 기대하고
또 점점 그것을 향해 밀고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독자로서 분명 즐거운 일이다. 

김연수가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 갈망했던 소통의 화두는 김영하 앞에서 친밀감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변주된다.
그런데 김연수가 그 소통에 희망적이었다면, 김영하는 조금 회의적이고 멈칫하는 것 같다.
<소통>에서 여자 앞에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읊어대던 남자가 막상 관계의 진전 앞에서 도망가는 모습이나
<밀회>에서 죽음으로 그 여자를 떠나고 마는 남자의 슬픈 독백, <조>에서는 한층 더해 관계의 형성 자체가 유실되는
모습들이 그러하다.  

김영하의 시선은 이제 물질적으로 소외되어 카드회사의 소유가 된 그녀들에게로 향한다.  

황사는 평등했다. 황사는 어디에나 있었고 그것 때문에 모두가 함께 고통을 겪었다. 실로 공평한 재난이었다. 먼지는 일억원이 넘는 고급 승용차의 보닛 위에도, 오십만원짜리 스쿠터 위에도 모두 내려앉았다.<중략> 타클라마칸 사막 같은 데에는 가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수경 같은 이에겐 이것만이 사막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었다. 
-<로봇> 중 

타락한 경찰이 좀도둑들을 얼러 전리품들을 챙기는 <조>에 이러한 그녀들의 거대한 은유가 백화점 판매직으로 나온다.  백화점에 근무하는 그녀들의 신산한 삶과 타락과의 타협을 그의 시선으로 들여다 본 이 작품은 냉소적이면서도 서글프다. 허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시대의 보고서 같아 영 불편하고 선뜩하다. 연봉, 남자친구의 차, 들고 다니는 가방들은 이제 그녀들의 장식품이라기 보다는 그녀들 자체로 녹아내리고 있다. 허영이나 자기기만에서 나온 물질에의 집착이 아니라 극도의 궁핍과 소외에서 초래된 자연발생적 투항은 더 비극적이다. 김영하는 그런 모습들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그려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타락은 역설적으로 이유없는 타락인 것처럼 가장되고 있지만 우리는 알아차리게 된다. 타락이 처절한 생에의 투항임을. 

우울한 얘기들, 그러나 실재를 치열하게 파고 들어가는 얘기들 속에 김영하 특유의 유머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마코토>와 <아이스크림>은 낯이 익다. 발표되었었던 작품이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읽어도 일본인 유학생에 들이대다 굴욕을 맛보는 씩씩하고 밉지 않은 그녀의 고백과 우연히 아이스크림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아 제과점에 제보한 젊은 부부와 소비자 상담실에서 나온 나이 지긋한 남자 직원과의 에피소드는 유쾌하고 재미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소재에서 지나치게 진지한 성찰을 건져 올리려 오버하지 않는 작가의 모습이 쿨하다. 김영하는 내도록 쿨한 것 같다. 

가족이 강도에 의해 몰살당하고 유산을 물려 받아 홀로 커다란 아파트에서 아줌마를 부리며 사는 소시적 동네 친구와 퀴즈쇼에서 조우하게 되는 <퀴즈쇼>는 결론이 약간 허무했다. 사실 이런 결론 자체가 타인과의 소통이나 친밀감에 대한 회의적인 작가의 생각과 맞불리는 지점일 수도 있겠지만 나,와 너, 는 스치지만 함께 할 수는 없다,고 되풀이 말하는 것은 어쩐지 영 불편한다. 우울한 진실을 대면하는 것보다는 허망한 기대를 슬쩍 남겨 놓는 것에 더 매료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말미에 실린 <약속>에서처럼 마시는 커피이름으로 대유된다면 나는 <카라멜 마키아또>가 되고 그나 그녀는 <아메리카노>가 되겠지만 결국 그 둘은 한 탁자에서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마침내 시선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피어오르는 하나의 희망과 공감, 기대가 떠받치는 삶의 매혹이 있기 때문이다.  착각하고 사는 것도 때로는 괜찮다. 가끔은 이런 참혹한 진실을 대면하게 해 줄 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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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07-23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책을 다 읽어보려고 차곡차곡 쌓아만 놓고 아직 제대로 읽어보질 못했어요. 신작도 꽤 괜찮군요. 이 글 읽고나니 더 읽고 싶어지네요.^^

2010-07-23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10-07-24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와 너, 는 스치지만 함께 할 수는 없다,"
아 이 구절, 슬로우 모션의 한 영상과 함께 아련히 흐르네요.

blanca 2010-07-24 21:24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그런 것을 깨달아 가고 수긍해 가는 게 나이들어 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요즘 들어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 가지는 의미에 대해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stella.K 2010-07-24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를 아직 읽어보지 않아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김영하와 비교하시는 브랑카님의 안목이 대단하군요.
퀴즈쇼 나름 재밌게 읽긴 했는데 제 취향은 아닌지라
이 책은 또 어떨지 모르겠어요. 기회되면 한번...!^^

blanca 2010-07-24 21:2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저도 퀴즈쇼는 취향이 좀 안맞더라구요. 제대로 다 읽어 보진 못했고 조선일보에 연재할 때 드문드문 읽었어요. 뮤지컬로도 아마 만들어진 것 같던데...기회되면 한 번 읽어 보세요. 분량도 적으니 시간도 많이 안잡아 먹을 것 같아요. 김영하라는 작가가 조금 과대평가되어 있지 않나 싶었는데 이 책 읽고 앞으로 발전할 역량이 많은 작가라 여겨졌어요.

stillyours 2010-07-2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읽고 있는데 -
미리 읽는 리뷰도, 너무 좋아요 블랑카 님.
특히,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말이죠.
헉- 하게 만들었던 이 문장을 나는 그의 목소리로 먼저 들었어요.
http://me2day.net/kimyoungha
17일자 북테일러, 혹시 아직 못 보셨다면!
MOT의 이언 작품인데,
멋지답니다.
목소리도 세련된 그,
어떠한 감동도 없는 그의 목소리로 듣는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blanca 2010-07-24 21:27   좋아요 0 | URL
moon님...댓글 달고 꼭 들어볼게요. 문동까페에 제목으로 올라와 있는 걸 보긴 했는데 들어보지 않았거든요. 다 읽고 moon님의 리뷰도 기다리겠습니다.

아시마 2010-07-24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아직 이 책은 안 읽어봤지만요, 전 예전에 김영하와 이만교를 비교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 얼마전부터 김연수랑 같은 선에 놔두고 요모조모 생각중이었죠.
그래서 이번엔, 제가 깜짝 놀랄 차례예요.
저 역시,
블랑카님과 제가 비슷한 것들을 느낄때가 많은 것 같아서 놀라워요.
이 책을 배송받으려면 적어도 2달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다른 물건들이 줄을 서 있어요. ㅠ.ㅠ)
이 책이 오면, 읽고, 반드시 이 글에 먼댓글로 리뷰를 쓰겠사와요.

ps. 마코토는 김영하의 여행자 시리즈 도쿄편에 실려있는 소설이구요, 아이스크림은 30회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이예요. 그해 대상은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 였구요. 아마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읽으시면서 읽으셨을 거예요. 은희경이 <아이스크림>에 대해 평하기를 "새삼 작가의 서사감각과 솜씨를 느끼게 해 준다. 미련없이 끊어내 버리는 산뜻함이 이작가의 매력인데 이 작품 역시 강약 조절과 취사 선택이 매우 노련하다. 사소한 에피소드를 한편의 소설로 빚어내는 역량에서 또 한번 문학적 재능을 엿보게 된다"고 찬탄했죠. 은희경을 원래 좋아하기도 하지만, 김영하에 대한 저러한 평가에는 100%의 싱크로율로 동의하는지라, 기억하고 있어요. ^^

blanca 2010-07-24 21:29   좋아요 0 | URL
아시마님!! 속이 다 시원합니다. 맞아요. 분명 어디선과 분명 읽었는데 가물가물한 기억. 그런데 아시마님 기억력 완전 놀랐습니다. 저도 그런 기억력을 좀 지녔으면 좋겠어요. 두 달. 아시마님의 감상도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연수와 김영하. 저는 이 두 작가가 참 부러워요...비슷한 연배에 비슷한 인지도에 나이들어가며 어떻게 바뀔 지도 참 기대되구요.

아시마 2010-07-25 02:34   좋아요 0 | URL
전 김연수 보다는 김영하 쪽에 좀 더 높은 점수를 줘요. 김영하와 김연수를 보면, 김영하는 얄미울 정도로 재능을 타고났다는 느낌이고(사실 김영하 소설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들이 바로 이 "타고난 소설적 재능"에 관해 말을 하고 있기도 하구요.) 김연수는 재능도 물론 있지만 노력과 성실함으로 일구는 작가같거든요. 결국 엉덩이 무거운 놈이 이기는 게 세상 이치라고는 하는데... 음, 예술은 그런 이치에서 약간은 벗어나 있지 않나요? ㅎㅎ

김영하는 아직은 단편쪽이 나은 것 같아요. 그렇다고 장편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 장편도 좋은데 둘 중에서 굳이 고르라면 단편쪽이라는 거죠. 반면에 김훈 선생은 단편보다는 장편에 강하신 것 같고요. 김연수는 장편과 단편이 고루고루 평이한데 그래도 굳이 고르라면 장편쪽이요.

전 김연수를 보면 아직은 뭔가가 좀 아슬아슬하거든요. 뭐랄까 재미와 지루함의 경계에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지루하진 않지만 재미있지도 않은 그런 경지라는 게 아니구요, 되게 재미있기는 한데, 한발만 삐긋하면 지루함으로 풍덩~ 해 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요.
근데 또 김영하를 보고있으면, 이 친구가 재능을 낭비해 버릴까봐 두렵기도 해요. 김연수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문제로 아슬아슬함을 느끼는 거죠.

결국 , 제게는 둘다 비등비등하지만 그래도 김영하쪽이 포인트가 좀 더 높은데요,
블랑카님은 김연수 쪽이 좀 더 포인트가 높죠? ㅎㅎㅎ 왠지 그럴 것 같아요.

ps. 두 작가의 인지도가 꼭 비슷하진 않아요. 초판 발행 부수가 완전 다르다는... ^^

blanca 2010-07-25 16:31   좋아요 0 | URL
아시마님! 저는 사실 김영하를 안다고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장편은 검은꽃 한 편 읽어 봤어요. 그러니 90프로 정도 읽은 김연수를 조금 더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해요. 타고난 소설적 재능...김연수는 안그래도 스스로를 타고난 작가가 아니라고 단정짓더라구요. 김영하가 그런 행운아로군요. 초판 발행 부수. 저는 김연수가 4만부가 젤 많이 팔린 거라고 해서 참 놀랐어요--;;

아시마님에게 많이 배워요.. 참, 그런데 빛의 제국은 어때요? 궁금해서요. 추천해 주시면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