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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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재우고 자정이 넘어도 그 시간은 아깝다. 가수면 상태에서 눈을 번쩍 뜨고 나와 현관에 면한 옹색한 옷방에 웅크리고 앉아 책을 잡는다. 흔한 벽시계가 아쉬운 순간 시간은 정지한 듯한데 책장은 무섭게 넘어간다. 마음 같아서는 밤을 꼴딱 새워서라도 다 읽고 싶은 책이었다. 

미혼이었을 때 나와 연년생 여동생은 박완서의 에세이를 함께 읽었다. 소설에 거부감이 심한 동생은 박완서의 수필로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려 들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더이상 책을 읽지 않는 여동생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박완서의 수필. 그 곳의 어느 지점에서 나와 동생은 조우한다. 아가씨들이 왜 노년의 그 자박자박 걷는 걸음에 묻혀 가고 싶어했는지 그 의아함의 기억은 벌써 아련해진다.  

임신했을 때 드러누워 박완서의 단편을 가열차게 읽어 내려갔다. 암투병으로 머리칼을 잃은 남편이 선물받고 사모은 모자에 얽힌 사연을 소설화한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태교와는 무관하게 가슴을 저며 팠다. 암이 뇌로 전이되어 퇴근길에 갈지자로 걷는 모습을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며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심정에 고통스럽게 공감하며 나는 아름답지 않은 진실에 육박해 가는 그의 삶에 대한 응시에 매료되어 갔다. 아름다운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삶의 비루하고 치사스런 면면을 더듬더듬하며 아이와의 만남을 기다렸다.  

그는 척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매사에 그렇게 어정쩡하고 적당히 비겁하다고 거듭 매도한다.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그래서 다분히 복합적이고 실제적이다. 평면적이고 얄팍한 허구적 인간 군상의 허술함에 질린 이라면 그의 소설을 접해 보기를 권한다.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나를 읽고 너를 읽고 우리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순수하면서도 야비하고 비겁하면서도 과감하고 순박하면서도 비열할 수도 있는 그래서 정말 인간 같은 인물들이 팔딱이는 그의 이야기 속에는 삶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삶 속으로 비집고 들어올 것만 같은 두려움까지 들 정도이다. 소설을 읽으며 그 소설 속에 몰입하고 그 과정에서 나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한 도약이다. 가능할 것만 같으면서도 일말의 작위성에 밀려 결국 나는 소설을 읽고 있다,는 명징한 깨달음의 한계의 철책을 저만치 밀어버리는 일은 그의 소설의 독특한 미학이 아닌가 한다.  

이제 그는 여든의 길목에 들어선다. 나이 든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는 처량한 나이, 내 정수리를 지긋이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을 토로한다. 나이드니 좋다, 세상사에 초연해질 수 있다고 가식을 떨지 않는다. 젊어 보인다는 소리가 제일 좋고 그런 소리를 들은 날은 종일토록 기분이 좋지만 글에서만큼은 나잇값을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런 수만가지 삶과 수만 명의 인간을 체현한 그가 종당은 깨달은 삶에 대한 얘기들은 어떤 것인가. 궁금했다.  

그에게 있어 6.25의 체험은 소설의 재료이자 소설가라는 직업을 택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서 작용했다. 때로 너무 우려 먹는다는 지적에 대하여 그는 맞춤한 변명거리들을 마련해 놓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 기억의 깊이와 무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4후퇴 때 양쪽 다리를 못쓰게 된 오빠를 손수레에 싣고 피난길을 떠난 그 나날들이 생생하고 기분나쁘게 냉동보관되어 차라리 하나의 질병처럼 작가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는 고백은 왜 그토록 작가가 과거의 기억들을 토대로 전쟁을 증언하는 데에 매달렸는 지를 이해하는 데에 하나의 단초가 된다. 어쩔 수 없는 절절하고 생생한 시간들. 감각의 기억들. 오죽하면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으며 감기에 걸리기까지 했을까. 전쟁을 간접적으로 전해듣고 상상하는 것들과 실제로 그 인간이 전체 속에 함몰해 들어가 그 중량감과 존귀함을 갑자기 상실하고 개인의 삶이 요동치는 실제 전쟁의 체험과는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완서는 외려 현재의 풍요로움이 하나의 환상 같고 과거의 그 전시의 빈곤함과 신산한 삶들이 더 현실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나고 좌도 싫고 우도 싫다는 그의 외침이 내려 앉는 자리는 그가 노구의 몸안에 왜 청춘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고 얘기하는 지에 대한 이해와 만난다. 

과거에 대한 반추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그가 본 영화, 읽은 책, 가 본 장소에 대한 소소한 감상도 감칠맛 나게 읽힌다. 특히나 레이몬드 카버의 <<대성당>>에서의 그 맨숭맨숭한 인간관계들과 우리의 낫또 같이 끈끈한 줄을 달고 다니는 인간 관계에 대한 비교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예리하다. 카버의 <<대성당>>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안의 표제작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아들의 죽음과 빵집 주인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진한 감동에 휩싸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 하나로도 카버의 전부를 인정해 버리고 싶을 만큼 위로를 통한 치유를 절묘하고 생생하게 그려 낸 수작이었다. 박완서는 특히 이 작품의 전체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감상을 얘기하고 있다. 여든의 작가와 내가 함께 사랑하는 작품이 있다는 건 묘한 공감에의 감동이 있는 대목이다. 한 번도 뵙지 못한 그와 마치 마주앉아 그거 정말 죽이지 않냐!고 함께 손 맞잡고 방방 뛰는 듯한 반가움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나는 여즉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한 하루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인상깊다. 삿포로의 대형서점에 앉아 뜨게질교본을 어루만지며 행복해 하고 하루끼의 달리기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일본인들의 친절의 근원을 우월감의 소산으로 해석하고 이 좋은 걸 왜 이제 알았냐며 월드컵에 흥분하는 작가의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는 절절 끓는다.  

십 년만 더 젊어진다면 완벽하게 정직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그. 마당의 살구 나무에서 떨어진 살구를 큰 스텐 들통에 넣고 한여름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고아 삼십 통의 잼을 만들어 노느매기한다는 그. 지구를 신이 찬 가장 멋진 축구공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읽는 일에 흠뻑 빠져 때로 그 시간들이 대리 체험이상이 아니라고 비하하지 않아도 되는 그곳에 박완서 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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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08-04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작가의 글들은 생생한 삶이 녹아져 있어 좋아요. 6.25에 대한 기억도 작가의 글을 통해 좀 더 세밀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엄마의 말뚝도 그랬고,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도 그랬구요. 이 책은 에세이집인거죠? 궁금하네요.^^
아이 재워놓고 보는 책의 맛이 어떤지 저도 잘 알아요. 그런 조각 조각의 시간들이 블랑카님이나 저한테 행복을 주는 시간인거죠.^^

blanca 2010-08-05 13:52   좋아요 0 | URL
예, 꿈꾸는섬님~ 에세이에요. 서평이랑 박경리, 박수근 화백 추모글도 있어요. 아이는 잘 때가 제일 이쁘다,고 러셀도 그러더라구요^^;;

2010-08-07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8-05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그렇게 괜찮아요? 아.....
그러고보니 박완서님 책은 단 두권 밖에 안 읽어봤네요...

난 임신했을 때 하필이면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이런 책들 읽어서,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떨었다눈... ㅡㅡ;;

blanca 2010-08-05 13:5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제 친구도 비슷한 책 보고 가위 눌리고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박완서를 많이 좋아하다보니 평이 조금 편향적이라^^;; 자신있게 권해드리지는 못하겠어요^^

2010-08-05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5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0-08-05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재워놓고 조용한 시간에 읽는 책, 맛나지요.^^
블랑카님의 좋은(이 말로는 표현하기가 부족한^^) 리뷰를 보니 이 책도 당깁니다.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를 전 참 좋아해요.

blanca 2010-08-05 13:55   좋아요 0 | URL
저도 친절한 복희씨 참 여러 번 읽었어요. 노년 문학이 왜이리 와닿던지....나이 들어가며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들과 깨닫는 것들을 소설화하니 삶에 대해 앞서 배우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기억의집 2010-08-05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덟개의 모자~~그 단편 읽으면서 박완서 선생님의 애절함이 너무 너무 절절히 묻어나서 울며서 읽은 소설이여서 기억해요. 저문 날의 삽화에 들어있던 단편이지요. 방금 찾아보니...다시 그 때의 감정이 되새김질되네요. 저도 지금 박선생님의 수필 나왔다 길래 살까말까 망설여지긴 하는데. 저 대목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작가와의 감정 공유 대목을 읽으니 어떻게 쓰셨길래 하는 생각이 드네요^^

blanca 2010-08-05 13:56   좋아요 0 | URL
저도 울었어요. 게다가 실화라니.그것 알기도 전에 읽으며 이건 체험이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오더라구요. 그리고 이 책! 기다리세요^^

stella.K 2010-08-05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선생은 소설을 쓰기 위해 특별히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 안들어요.
그냥 직접 겪었을 또는 어디서가 들은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힘이 들어가지 않은 이야기의 힘. 그게 박완서 선생의 특징인 것 같아요.
그렇게 블랑카님처럼 밤을 새워 읽을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책 만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 건지...
모처럼 행복한 밤이었겠습니다.^^
옷방이면 작은 방 아니었나요? 옆에 선풍기는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ㅋㅋ

blanca 2010-08-05 13:58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그죠. 저는 그래서 이런 생각 했어요. 자기 인생이 너무 순탄하면 작가가 소재가 빈곤하겠다고. 가장 좋은 건 경험하지 않은 것들도 경험한 것 이상으로 그려내는 거지만 그게 쉽지가 않을 테니까요. 옷방. 무자게 작구요. 대박으로 더웠어요 ㅋㅋㅋ 죄지은 것처럼 거기에서 불켜고 오그리고 책 읽었다니까요. 한 두시까지 봤나봐요.

穀雨(곡우) 2010-08-05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지기가 박완서님 글은 참 좋아해요. 저두 오늘 김영하작가 책이랑 카트에 밀어 넣었다죠.^^
블랑카님의 눈을 통해 박완서님을 보니 새롭네요. 인간에 대한 본질에 가 있는 것도 같고 말이죠.

blanca 2010-08-06 14:26   좋아요 0 | URL
곡우님~ 셋째!! 정말 감축드려요. 축복 같은 아이네요....이 책도 참 좋아하실 거예요.

gimssim 2010-08-05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온지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책을 읽으셨군요.
박완서 선생의 책을 잘 읽히지요.
저는 대뷔작 <나목>을 좋아합니다만 이 분 글은 노년에 쓰신 글이 훨씬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찬 바람이 좀 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요즘 계속 그로키 상태라~~

blanca 2010-08-06 14:28   좋아요 0 | URL
중전님! 나목 참 좋지요. 저도 찬바람이 불어야 할 것 같아요, 중전님. 요새는 더워서 그런 건지 정말 힘들어요. 처서를 기다리고 있어요. 중전님도 힘내세욥!

따라쟁이 2010-08-0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박완서님의 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왠지 이 리뷰를 읽자니 한 두어권 구입해서 찬찬히 읽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택배상자가 또 늘겠네요ㅠㅠ

blanca 2010-08-06 23:41   좋아요 0 | URL
그 어여쁘다는 따라쟁이님인가요?^^ 저는 택배 상자가 너무 많이 와서 다 겹쳐서 눈속임해 둔답니다.^^

비로그인 2010-08-07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것이었군요.
아 어디선가 슬쩍 스쳐본 내용에는 이분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다른 방향으로 했었던 기억도 물큰 만져집니다.
그나저나 작가와 비슷한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 참 기분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쓰신 글에서 blanca님의 이런 느낌의 눈웃음이 막 보일듯 하네요. ^^

blanca 2010-08-08 15:36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박완서의 소설에는 제가 숨기고 싶은 저의 은밀한 욕망, 시기, 분노 등이 드러나 때로는 불편해지기도 해요. 그런 것들이 모인 것이 인간임을 간파한 노작가의 시선에 움찔하기도 하고요. 그의 소설을 읽으며 인간을 더 잘 알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순오기 2010-08-08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한동안 열병처럼 박완서를 읽었는데...그러다 보면 또 멀미가 나서 멀리하기도 했지요.^^
친절한 복희씨로 다시 만났지만 호미는 읽지 않았어요. 이 책은 님의 리뷰 때문에 장바구니에 담아요.
구매는 좀 있다 하겠지만...
토지문학상 시상식에 박경리샘이랑 같이 오셨을 때 뵈었어요~ 팔을 꼭 잡고 사진도 찍은걸요.^^

blanca 2010-08-08 15:3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멀미, 맞아요. 저도 한동안 박완서샘 소설을 주구장창 읽다가 손을 놓기도 했어요. 우아! 박경리샘도 생전에 만나보셨겠군요. 팔을 꼭 잡고 사진을...저도 박완서샘을 꼭 뵙고 싶은데. 너무 부러워요. 토지 문학관도 가보고 싶고. 광주에서 모임 가진다고 하셔서 갈 수 없음에 통탄했습니다. 이래저래 너무 가보고 싶은데 아이가 더 커서 자유를 찾기를 바랄 뿐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8-08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가 좋았어요.누구나 가지고 있는 속물근성을 은근히 톡 쏘아주는 맛이 있더군요.산문집으로는 '두부'를 읽었지요.

blanca 2010-08-08 15:39   좋아요 0 | URL
노자님! '그해~'는 섬뜩한 면도 있더라구요. '두부'는 제 동생이 특히 좋아했어요. 속물근성,하면 저는 박완서샘이랑 모옴이 생각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