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을 가꾸고 있습니다 - 동물들이 찾아오고 이야기가 샘솟는 생태다양성 가득한 정원 탄생기
시몽 위로 지음, 한지우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원을 가꾸고 있습니다by 시몽 위로

 

읽은 날 : 2024.12.8.

 

2024년의 첫눈은 첫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하게 내렸다. 그 첫눈이 내리던 시기에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인 동네에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유숙자 옮김, 설국, 민음사, 2003, p.7

 

라고 절로 중얼거리게 되는. 북악터널을 경계로 그곳은 그야말로 설국이었다. 자랑이랄 것도 없지만(내 정원이 아니니까) 운이 좋게도 나는 사무실 문을 열면 아주 넓지는 않은, 그래도 그다지 좁다고도 말할 수 없는 잔디 정원이 있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 30년 가까운 세월동안(그렇다고 내가 30년간 일을 해왔다는 오해는 금물이다.) 내가 발을 디딘 정원은 각각 달라졌지만 그곳에서의 내 모습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사무실 컴퓨터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열심히 놀리는 것에 질리면 유리문을 열고 나가 정원의 잔디 위에서 손가락을 열심히 놀린다. 그리고 그렇게 잡초를 뽑을 때마다 박완서 선생의 에세이 한구절을 떠올린다.

 

처음엔 재미삼아 하던 게 일단 잔디와 클로버로 편을 갈라 잔디 편을 들기로 작정을 하자 점점 클로버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증오가 끓어올랐다.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하는 식이었다. 여북해야 그짓에 들려 헤어나지 못하면서 문득 인간의 광기 중 가장 무서운 인종청소에 들린 독재자의 심정을 다 이해한 것처럼 느꼈을까.

 

박완서, 두부, <봄의 환()>, 창작과비평사, 2002, p.107

 

같은 사무실을 쓰는 다른 직원들은 나의 광기 어린 풀뽑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잔디를 관리하는 분은 따로 있어왔다, 항상.) 그냥 재미삼아 하는 거예요, 라는 어쭙잖은 변명으로 나는 나의 적개심과 증오를 숨기지만, 내가 잔디정원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내가 뽑아 제거할잡초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선생님(그러니까 정원의 진짜 주인)과 나는 쿵짝이 잘 맞는 짝패여서 우리 둘은 곧잘 신나게 정원의 잡초 제거에 열을 올린다.(그래봐야 최장 10분이다. 그 이상은 허리 아파 안 한다.) 정해진 시기에 맞추어 정원사를 불러 나무의 전지를 하고, 시든 화초를 죄다 뽑아버리고 새로운 화초를 심지만 제초제를 뿌리지는 않는다. 정원사는 매번 권하지만 그때마다 선생님과 나는 어물거리며 다음엔 뿌리지요, 라는 말로 말꼬리를 흐린다.(잔디 관리의 책임을 맡은 분은 이번엔 꼭 제초제를 뿌리라 강권하지만.) 제초제의 독성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잡초 뽑기 놀잇감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거다. 물론 잔디 정원의 잡초는 놀이삼아 뽑는 걸로는 절대 끝이 안 나기에 잔디 관리하는 분은 우리 둘의 고집에 치를 떤다. 음음, 죄송합니다.

 

제초제는 절대 사절이지만 수목 소독을 위한 약(살충제)을 치는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는다. 잡초는 (뽑는 재미를 위해) 환영하지만 벌레만은 절대 사양이라는 이 이율배반적 모순이라니. 결국 내가 좋아하는 정원은 레이첼 카슨이 말한 침묵의 봄이다. 벌레가 없고, 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기형의 정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와바타 야스나리 적인 고장은 서울시내에서 가장 자연 친화적인 동네임에 분명하다.

 

그러다 이 책을 봤다. 내가 좋아하는 정원에 관한 책이다. 심지어 아주 잘 만들어진 만화책이다. “동물들이 찾아오고 이야기가 샘솟는 생태다양성 가득한 정원 탄생기라는. 동물들이 찾아온다는 건 글로 봤을 때까지만 낭만적이다. 우리 정원엔 분기별로 한번씩 솔거의 까치가 영면을 하고(솔거의 까치는 그림 소나무에 앉으려다 그리되고 우리 정원 까치는 유리창에 비친 소나무에 앉으려다 그리된다.) 때론 작은 호랑이(호랑이는 식육목 고양이과 동물이다)에게 사냥을 당해 정원 가득 깃털을 흩뿌리고 사라진다. 그 사체를 치워야하는 입장에서 생태다양성이란 재앙이다. 물론 까치에게도 재앙은 재앙일터. 이 재앙을 재앙으로 보지 않고 긍정할 수 있을 때 생태다양성은 가능해진다.

 

이 소박하고 멋진 만화책을 그린 이는 도심의 한가운데에서 이 생태다양성 가득한 정원을 탄생시켰다. 그는 거미의 외모도 찬양할 줄 알고(맙소사!) 도마뱀이 살기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주며, 뱀의 편을 들어 고양이와 싸우고(세상에!), 지렁이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반적이 삽이 아닌 갈퀴삽으로 땅을 일군다. 그가 가꾼 정원에는 나비가 찾아오고 나방이 찾아오고, 모기 살충제를 쓰는 대신 모기를 잡아먹는 박쥐와의 공존을 선택한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책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훗날 언젠가 내가 나의 정원과 농장을 가꾸는 날이 오더라도 나는 아마, 생태다양성을 추구하지는 못하리라. 내가 시골 살이를 접고 도시로 돌아오는 이유에는 아마도 지네를 포함한 벌레와 뱀을 비롯한 파충류가 큰 지분을 차지하게 될테니.

 

실천하지는 못할지라도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책이었다.

 

2024.12.8. by ashim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범한 결혼생활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범한 결혼생활by 임경선

 

읽은 날 : 2024.12.7.

 

며칠 전 결혼 19주년을 지났다. 그러면서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할 일이 생길 땐 결혼 20년 쯤 됐다는 말을 한 2-3년 전부터 하고 있다. 이 결혼 20년 됐단 이야기는 앞으로도 2-3년 더 써 먹을 생각이니까, 시간의 마디에 관한 인간의 인식이란 이렇게 강박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나 느슨하고 대충대충 이다. 10주년, 20주년이라는 말의 무게나 힘이 너무 커서 앞 뒤의 2-3년씩을 지배하는 경향도 있고.

 

임경선 작가의 책 어느날 그녀들이를 읽고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어떤 의미의 경악이었는지는 말하지 않겠고, 그저 그 뒤로 이 작가의 책은 기를 쓰고 피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 책이. 그런데 이 책을 굳이굳이 사서 읽은 건, . 20주년이라는 시간의 마디가 주는 파워 때문이다. 아이도 20년이 지나면 부모와 떨어진 독립개체가 된다고 법적인 인정을 하는데, 서로서로 별개의 인간 둘이 합체를 해 20년이 지나면 이제는 그 자체로 개별적인 무언가라고 인정을 해 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하던 중에 이 책을 발견했기에.

 

우리 부부는 대체로 무난무난하게 살아온 셈인데 이 무난의 기저에는 남편의 너그러움과 나의 무심함, 그리고 둘 다 가지고 있는 결벽성향이 있다. 남편은 그 너그러운 성품으로는 상상이 안 되게 예민한 면이 있고(그래서 이 남자는 불면증이 있다) 나는 무심한 것만큼이나 까칠하고 까다로운 인간인지라(그래서 나는 불안증이 있다) 우리는 서로의 결벽성향에 감사한다. 이게 맞지 않았다면 이혼까지는 몰라도 불행은 확실 했을테니.

 

나는 세상의 기준이 나라고 생각할만큼 오만하거나 자기중심적이지는 않다. 아니, 뒤집어 말하겠다, 나는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지만 세상의 기준이 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어순을 바꾼 두 개의 문장이 주는 어감의 차이 때문에 피식 웃는다.) 다만 그 기준이 남편과 내가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정신적 결벽의 기준이 같아서.

 

글이라는 건 작가의 사상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건 소설이든 시든 에세이든 상관이 없다. 에세이가 소설에 비한다면 한 겹의 가림막(허구성)을 벗어던졌을 뿐 결국 모든 글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의 반영이다. 어떤날 그녀들이의 경악은 거기서 왔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깔끔하지 못한 유무형의 관계를 혐오한다. 그건 그냥 추하다고 생각한다. 추한 것을 추한 것이 아니라고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다. 임경선은 톨스토이가 아니다. (뭐 당연한 건가.)

 

이 글을 읽는 내내 그래서 불편했다. 허구성이라는 한 겹의 가림막도 치워진 뒤라 조금 더 많이 불편했다. “나는 가끔 다른 남자들에게 호감을 품은 적이 있다.”(p.84)는 유부녀의 고백을 솔직하고 쿨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나는 앞뒤로 꽉 막힌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욕을 먹을지라도 어쩔 수가 없다. 그냥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다행한 건 이걸 같이 불편해하는 남자와 20년을 살았고 앞으로도 20년을 더 살 거라는 사실 정도. 이런 문장이 쿨하게 읽히려면 톨스토이 정도는 와야 한다. 뭐 그렇단 이야기다.

 

앞으로 임경선의 글을 더는 읽지 않을 것 같다. (이 한마디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2024.12.08. by ashim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을진 들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노을진 들녘by 박경리

 

읽은 날 : 2024.12.01.

 

사주 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건 사실 틀린 전승이고, 정확한 표현은 산천 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고 자란 산천(환경)에서 도망쳐 본들, 사람은 결국 제 운명대로 살게 마련이란 소리다. 그 틀린 전승의 시작이 무지의 소산이었다 해도 은 언제나 그 자체의 힘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이 산천 도망이라는 말 대신 사주 도망이라는 말을 쓰게 된 데는 그 말이 가진 힘이 주효했다. 운명에 대한 거부. 우리가, 인간이 정해진 운명대로만 살아간다면 그래서 모든 것은 이미 정해진대로 흘러가는 것이라면 사람이 산다는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 로마 신화로 시작하는 모든 서사는 그 운명을 거역하고자 하는 인간(또는 신-그리스 로마신화에서는 신조차도 그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이 끝내 그 운명에 패배하는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 그런 말도 있다. “성격이 팔자다라는. 타고난 사주와 상관없이 자신의 성격이 자신의 운명(팔자)을 바꿔놓게 된다는 말이다. 흔히들 하는 말로 지팔지꼰(지 팔자 지가 꼰다)’ 이라는데 타고난 사주, 운명과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만들어 간다는 뜻 정도로 읽힌다.(주로 나쁜 쪽일 때.)

 

박경리의 소설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절손 모티프이다. 더 정확히는 부잣집의 유산과 함께 보호자 없이 홀로 남겨진 여아 하나. 박경리가 처음 토지를 구상하게 된 배경도 그 절손 모티프와 관련이 있다.

 

외갓집은 거제도에 있었어요. 거제도 어느 곳에,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까지 거둘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미 호열자가 그들을 죽음으로 데리고 갔지요. 외가에 사람들이 다 죽고 딸 하나가 남아 집을 지켰다고 해요. 나중에 어떤 사내가 나타나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객주집에서 설거지하는 그 아이의 지친 모습을 본 마을 사람이 있었대요.

 

작가세계통권221994.가을, 박경리 특집, <삶에의 연민, 美學(송호근-박경리 대담)> , 세계사, 1994. p.47

박경리가 어릴 때 들은, 실화라는 이 이야기는 토지 뿐만이 아니라 박경리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모티프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도 그 절손 모티프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학병을 나가서 죽었고, 엄마는 고모와 함께 기차사고로 죽어버린 주실은 홀로 남은 할아버지와 함께 시골의 과수원에 산다. 이 할아버지는 그 과수원이 있는 동네의 대지주이자 왕과 같은 존재다. 할머니와 단 둘이 남은 서희와 주실은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이지만(최서희의 대척점에 주실이 있다, 다만 박경리의 주인공답게 외모가 최상급이라는 사실만은 공통적이다) 언젠가 혼자남은 이 여자아이가 물려받게 될 유산을 노리는 존재가 있고, 그 유산을 차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혼인을 쓴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서희는 병수와의 혼인을 피해 간도로 도망을 갔고, 주실은 도망치지 못했지만.

 

그 외에도 침모 봉순네를 연상시키는 침모 영천댁과 수동이 또는 김서방을 연상시키는 박서방이 등장하고 임이네를 연상시키는 김서방댁과 삼수를 연상시키는 성삼까지 등장한다는 점에서 토지와 연결지을 수도 있는 소설이었다 싶지만 토지와는 전혀 다른 소설로 읽힌다.

 

우선 박경리 초기 장편이 가지고 있는 끝도 없는 우연의 남발은 이 소설에서도 이어진다. 뭐가 우연인지 꼽을 필요도 없이 이 소설의 전체 사건이 우연히, 어쩌다보니 그렇게. 라는 말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우연히 버스에서 만난 여자가 알고보니 친구의 동료요, 직장 상사댁의 가정교사로 연결된다거나 신혜가 우연히 터미널에서 만난 어리숙한 촌년이 알고보니 주실이었다거나. 주실, 동섭, 신혜가 밥을 먹는 식당에 마침 성삼이 들어온다거나. 나중엔 슬몃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와중에도 이 소설을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서 단단히 땅으로 끌어내려 고정시키는 존재가 성삼과 김서방댁이다. 그야말로 그럴싸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과 태생을 빗대면 그들의 언행은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게 된다. 도대체 왜 그러니, 제발 좀 정신차릴 수 없어? 라고 중얼거리게 되는 나머지 인물들에 비하면 그 모자는, 응응, 당신들은 그럴만 해. 라고 수긍하게 된다.

 

여기서 토지와 이 소설이 다시 갈리는 지점이 나온다. 위에서 운명(숙명)과 팔자, 성격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토지의 인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악스레 거부하는 인물들이다. 그야말로 기를 쓰고 자신의 운명을 극복해 보려고 애를 쓴다. 절에 버려진 아이, 주인댁 아씨의 머슴이었던 길상이 그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서희의 남편이 되고자, 서희가 낳은 아이들의 당당한 아버지가 되고자 간도에 남아 독립운동에 투신해 자신의 신분을 바꾸려 한다거나, 서희가 절손을 극복하고 자신의 아들 둘에게 최씨 성을 붙여 최참판댁을 재건한다거나. 강간을 당해 임신을 했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종결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 한 집안의 가모로서의 자리를 지켜낸 윤씨부인이라든지, 무당의 딸, 백정의 사위. 끝도 없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딴지를 거는 운명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일정한 성취를 이루어 낸다. 그야말로 운명과 싸워 이기는 것이다.

 

그러다 이 소설로 돌아오면, , 이 무기력한 사람들아.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주실도 영재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극복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데, 독자도 스스로 노력하는 인물을 응원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래서 독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을 연민할 수는 있으되 사랑할 수는 없고, 나중에는 그 연민조차 화로 바뀐다. 성격이 팔자라, 지 팔자를 지가 꼬고 있는 것이다. 그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성격 탓에 그들의 운명은 점점 더 나락으로 나아간다.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한 원숭이같이 자란 주실이야 그래, 못배웠으니 어쩌겠니 한다쳐도. 영재의 행동은. .

 

소설은 끝내 살인과 자살로 끝이 난다. 파멸과 파국이다. 산천도망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당연히 팔자도망에도 실패했다. 작가로서도 이렇게밖에 끝을 낼 수 없었겠다, 싶다.

 

그 와중에도 소설은 진보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인물들이 좀 더 구체적이고 개별화된다. 우연성의 남발이라는 단점은 여전하지만 사건이 속도감있게 진행되어 소설을 읽는 재미는 있다. 그야말로 글빨이란 이런 것.

 

ps. 오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고 해서, 오타가 없다고 오해는 마시라. 마로니에 사장님, 분발하시압!!!! 이 책에서는 오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시죠? 9쪽 "가려면 아직도 삽십 분은 더 걸어야 했다" 라는 문장이 두 번 반복됩니다. 이러지 마세요, 정말.


2024.12.7. by ashim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 운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푸른 운하by. 박경리

 

읽은 날 : 2024.11.19.

 

박경리 다시 읽기라고 부제를 달다 문득, 좀 부끄러웠다. 다시 읽기는 무슨, 지금까지 내리 읽은 여섯 권 중 표류도한 권 빼곤 죄다 처음 읽는다. 하하하. 자신있게 말하건대, 박완서의 작품은 진짜로 전부 읽은지라, 지금은 무슨 책을 읽어도 다시 읽기가 맞는데, 박경리는 앞으로 줄줄이 남아있는 장편(마로니에판 기준이다) 13권 중 김약국의 딸들파시』『시장과 전장을 제외하곤 죄다 처음 읽기다. 여기에 마로니에에선 출간하지 않았고, 다산에서만 출간한 몇몇 장편들을 포함한다면 더 늘어나겠지. 지금이라도 부제를 바꿔야 하나.

 

박경리의 장편은 대부분 1960년대에 쓰였다. 1969년 토지 1부가 연재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선생은 단편과 몇몇 경장편을 쓴 외엔 더 이상 토지 외의 장편을 집필하지 않는다. 26년의 세월을 오롯이 토지에 바치는 거다. 토지가 완간된 이후 집필하기 시작한 장편 나비야 청산가자는 미완으로 남았고, 그 작품을 제외한다면 박경리는 더 이상 소설을 집필하지 않는다. 시집만 두어권 내셨다. 그러니까, 실제 박경리의 작품활동은 1994년으로 종료되다시피 하는 거다.

 

박완서가 처음 집필을 시작한 것은 1970년이다. 박완서는 다산성의 작가여서, 집필을 시작한 이후 장편 단편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책을 내 작고한 2011년까지 꾸준히 신작이 나왔다. 나는 1990년대 초중반부터 이 두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나를 미치도록 매혹시킨 책은 토지였고 거의 실시간으로 동시 호흡한 작가는 박완서다. 전작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당연히 토지 이전의 작품을 찾아 읽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이미 읽은 파시, 표류도,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은 토지를 읽기 이전에 읽었던 책들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박완서의 책은 찾기가 너무 쉬웠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쉴틈 없이 옷을 갈아입고 출판사와 판형을 바꿔가며 재출간, 재출간, 재출간을 거듭했다. 박경리의 책은 달랐다. 내가 이미 읽은 네 권의 책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1970년이후에 출간된 책이 거의 없다. 장편은.

 

출판의 논리도 시장 논리와 다르지 않을 게다. 팔리지 않는 책은 만들지 않는다. 무협지를 잔뜩 팔아(그것도 저작권이 해결되지 않은 해적판을. 우리나라가 세계저작권협회에 가입한 건 1994년이고, 그 이전에는 뭐. 해외 작품은 맘 내키는대로 저자 허락 따위 받지 않고 마구 번역해 책으로 찍어내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출판사였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벌어들인 돈으로 절대 팔리지 않는 교수들의 평론집이나 학술이론서를 내주는 출판사가 있었다. 대학 때 그 출판사에서 찍어낸 책 몇 권이 교재였는데 우린 그나마도 학교 앞 제본소를 활용했으니 흠흠. 평론집이나 학술서적은 그 출판사의 목적이었고, 해적판 무협지는 그 출판사의 수단이었으려나.

 

박경리의 1960년대 장편들은 그 시대에는 엄청난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드라마로도 제작되고 영화로도 제작되고, 연재가 끝나면 바로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고, 바로 전작 장편으로 출간되는 책도 있었고, 어쨌든 박경리는 그 소설들을 팔아 어머니와 외동딸을 홀로 부양하며 전업 작가로서 생계를 꾸려나갔으니 그 시대치고도 대단한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거다. 60년대의 장편들이 박경리로서는 그 볼드모트 출판사의 해적판 무협지 같은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베스트셀러들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조용히 사라져갔다. 시대가 지나가고나면 다시 재출간 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은.

 

박경리와 박완서를 두고 누가 더 뛰어난 작가인가를 비교한다는 건 누가 봐도 어딜 감히, 라는 말을 들을 법한 불경스런 짓이다. , 최소한 나에게는 불경에 근접한 일이다. 다만, 박경리의 1960년대 작품이 몇몇을 제외한다면 전멸이라 할만큼 1980년대 이후 출판시장에서 사라진 것과 박완서의 1970년대 작품이 대부분 199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싱싱하게 살아있었던 차이는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건 박완서의 작품이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해도 그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며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경리의 1960년대 여성지에 연재되었던 소설들과는 달리. 박경리의 1960년대 초기 장편들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을 1960년에 가져다 놔도, 1950년에, 2020년에 가져다 놔도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인류 공통의 어떤 정서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물론 그런 면도 있다. 이 와중에도 인간의 심리는 어찌나 잘 그려내시는지) 현실과 완벽하게 분리되어 소설 속 세상에서만 노는 인간인 탓이다. 그야말로 시대가 이 꼬락서닌데 연애질하느라 바쁜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주어진 시대 현실에 치열하게 고민하는 토지의 인물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 나온다. (, 그래서 연애소설이구나.) 표류도에서 잠시 현실이 반영되다 다시 현실과 상관없는 뜬구름 소설들이 줄줄줄 나온다. (그 와중에 글빨은 미쳤구요. , 어쩜 이런 소설도 이렇게 잘 쓰세요, 선생님.) 그러니 그저 베스트셀러로 끝이 난다. 글빨이 미쳤고, 읽다보면 우와우와 하다가, 돌아서면 끝.

 

그러다 드디어 이 소설이 등장한다. 이 소설의 후반부는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 말기의 시대 혼란상과 마산에서 시작된 3.15 의거에 이은 4.19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시대 현실에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드디어 등장하고, 그 시대 현실이 주인공들의 앞길에 영향을 준다. 드디어, 드디어 현실과 꿈(연애) 사이에 운하를 뚫기 시작하신 거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은경이 바다 같아서 잡히지 않는 치윤의 마음을 차지하려 애쓰는 대신 운하를 파서 바다를 끌어들일 거라 결심하는 것처럼.

 

드디어 이 소설에 처음으로 유식하지 않은, 학벌이 높지 않은 고졸 여자주인공이 등장한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어리기까지 한 주인공은 세련되고 유식한 다른 여성들에게 무시도 당하고 놀림도 당한다. 영어도 할 줄 모르고 춤도 출 줄 모르며 가끔은 식모 취급까지 당하기도 한다. 박경리의 여주인공치고는 가장 하층민에 가깝다. 그러나 그 시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가장 흔한(하긴 그 시대엔 고졸도 흔하진 않았겠다마는) 현실 반영의 인물이다. 주인공 치윤도 가난한 시골 출신에 고학으로 대학을 마친 인물이다. 물론 김남식이라는 재벌가 도련님도 나오지만.

 

자 드디어 운하를 뚫으셨어요, 선생님. 이제 이 운하를 따라 우리는 토지로 가는 걸까요?

 

꿈과 현실이 다르다는 얘기군요. 하긴, 모든 일이 다 그렇죠. 꿈과 현실이 같을 수 없지.”

(p.109)

 

2024.11.19. by ashima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24-11-20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 저도 박경리 작가의 다산책방 시리즈를 따라 읽었는데 의외의 이야기들이 있어서 내심 놀라는 중이었어요. 작품의 결이 <토지>와는 완전 다르더라고요. 재미있고 잘 읽히고 신파적 경향도 있고 드라마 보는 것도 같고..대작가에게도 이런 시기가 있었구나 내심 발견의 재미가....<파시>는 아주 좋았고요. 이 작품은 읽기 전이에요.

아시마 2024-11-20 23:08   좋아요 0 | URL
저 마로니에에선 안찍고 다산에서만 낸 장편 <타인들>주문해놓고 기다리는 중이에요. 다산도 제발 책을 이쁘게(미모는 내면만큼 중요한 겁니다, 우리 박경리쌤 쥔공들이 그러하듯)만들었길 빌며(마로니에 책은 진짜 이뻐요. 또한번 자랑질 ㅋㅋㅋ 나 마로니에사장딸 아님)
지난 책에선 빅토르 위고 였는데 이번 책에선 도스토옙스키가 생각났어요. 그 위대한 러시아 작가는 평생을 온갖빚에 시달리며 글을 썼거든요. 오죽하면 빚쟁이가 옆에 붙어서서 한장한장 완성될때마다 원고를 갈취해갔단 썰도 있고, 최대한 글을 빨리 쓰기 위해 속기사를 고용해 구술을 하는 걸로 출간을 하기도 했다죠. 그때까지 이 작가는 퇴고라는 걸 한번도 못한.

그러다 아내가 출판사를 차려 생활이 좀 안정되니 그 위대한(하긴 그 이전 소설도 참 어마어마하긴하죠) <카라마조프>가 나오거든요.

작가가 가난과 생계에 쫓겨 글을 쓴다는 건 참 슬픈일이구나 싶었어요. 토지를 쓰기까지 갈고 닦는 과정이었다고 하기엔 이 소설들 사이에도 표류도와 파시와 김약국이 있으니. 흠.

사실 박완서샘은 사업가 남편이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분이었으니. 매문이 필요없으셨을거구요.

그나저나 <파시> 는 절 토지로 이끈 작품이에요. 넘 죻죠. ㅎㅎ 김약국이 최고라고들 하는데 전 파시가 더 좋습니다. ^^
 
내 마음은 호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마음은 호수by. 박경리

 

읽은 날 : 2024.11.17.

 

며칠 전 인터넷에서 빅토르 위고의 글이 왜 그렇게 장황한 수사어구가 많은가에 대한 우스개 섞인 글을 보았다. 빅토르 위고 시절엔 단어의 개수를 세어 원고료를 지불하던 시대여서, 가난했던 위고는 억지로라도 단어의 수를 늘여 원고료를 더 받으려 했다는 이야기.

 

성녀와 마녀』『은하를 거쳐 이 책까지 읽고 나니 문득, 빅토르 위고가 떠올랐다.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은 그게 전부다. , 사는 게 참 힘든 일이로다.

 

ps. 성녀와 마녀(여원1960.4-1962.3), 은하(대구일보1960.4-5.26) 그리고 이 소설 내 마음은 호수(조선일보1960.4.6.-12.31)는 모두 동시 실시간 연재가 된 작품이다. 다만 종료 시기가 서로 좀 다를 뿐, 시작되는 시기는 모두 19604월 초로 동일하다.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을 동일한 시기에 실시간 연재까지 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렸던 걸까. . 산다는 게 참 힘든 일인 건 맞는 모양이다.

 

2024.11.17. by ashim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