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여성
어느날 우리집 책장에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마어마한 벽돌책이 나타났다. 숫자와 지명, 유명 장군의 이름으로 요약되는 전투와 전쟁의 이야기는 스펙타클한 재미가 있다. 그것이 실화, 진짜로 있었던 일이기에 더욱. 물경 9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삼국지 읽듯 숨도 안 쉬고 독파했다. 전쟁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는 나는 뇌의 어디가 고장 난 거 아닐까. 사이코패스였는데 나만 몰랐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야기가 식상해져 갈 무렵이었다.
트럼프가 또 다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재선이 못 될 것을 예상했듯,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가 이길 것도 예상했던 사람도 많았다. 그럼에도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세계에 던진 파문은 늘 그렇듯 ‘무엇을 예상했건 그 이상’ 이었다. 어머 어머 어머 미쳤나봐, 어머 어머 어머, 라는 말만 반복하게 만들던 트럼프의 행보가 외교로 넘어갔을 때, 그리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넘어갔을 때는 사람을 멍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마 세계 경찰 캡틴 아메리카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나보다.
전 세계에 실시간 생중계 된 첫 번째 전쟁은 91년 걸프전이었다. 사막의 방패Operation Desert Shield, 사막의 폭풍Operation Desert Storm, 사막의 기병도Operation Desert Sabre 라니. 이 화려하다 못해 낭만적이기까지 한 작전명에 이어진 전투 상황의 실시간 중계는 전쟁을 더욱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끼게 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스커드 미사일을 공중요격하는 장면(실은 이게 조작된 화면이라고는 하더라만)은 갤러그 게임을 연상시켰다. 사람의 생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우주 저 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루시모드 몽고메리의 사랑스러운 소설 <빨간머리 앤>의 마지막 권은 제1차 세계대전을 시대 배경으로 한다. 앤과 앤의 가족이 사는 곳은 캐나다의 본토도 아닌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고,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이 아니다. 다만 영연방 국가의 일원으로 영국이 참전하자 캐나다에서도 의용군을 모집하여 영국군의 일원으로 보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앤의 아들들도 참전한다.
릴러는 처음의 충격이 지나자 슬픔에 잠기면서도 이 일 전체의 낭만적인 요소에 반응을 나타냈다. 군복차림의 젬은 확실히 훌륭했다. 캐나다 젊은이들이 조국의 요구에 이처럼 재빨리 이해타산을 버리고 두려움없이 응한 것은 생각만 해도 멋졌다.
루시모드 몽고메리, 『ANNE』8. 아들들 딸들, 김유정 역, 동서문화사, 2009, p.77
(동서문화사 판 『ANNE』은 총 10권의 소설이지만, 앤과 앤의 자녀들을 주축으로 하는 이야기 자체는 8권으로 끝나고, 9, 10권은 애번리 인물들의 자잘한 삽화같은 단편 모음이다.)
지나간(끝난) 전쟁과 타지의 전쟁은 언제나 낭만의 요소를 품고 있다. 젊고 잘생긴 제복 차림의 남자와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여성. 오죽하면 로망스의 시작이 기사도 문학일까.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군복차림’은 훌륭하고 멋지다. 릴러의 느낌처럼.
그렇게, 남의 땅에서, 숫자의 뒤에 숨은 익명성에 기댈 때 전쟁은 낭만적인 이야기이고 흥미진진한 게임이 된다. 아마도 그래서 이 지구상에 전쟁이 끝나지 않는 모양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산 건 누군가가 자신이 그해 읽은 책 중 가장 좋은 책으로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전쟁과 여성이라니 뜻밖의 조합이다. 당연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 쉽게 납득되는 제목이기도 했다. 전쟁이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은 건 맞지 뭐. 전쟁과 여성이라니 뭐 어쩌라는 거지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역, 문학동네, 2015, p.17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남자니까, 당연히 전쟁에 관해 서술하는 것도 남자여야 하지 않나. 여자들은 남편과 아들을 전장에 보내고, 그들의 자녀를 키우며 다쳐서 돌아온 남자를 보살피는 존재로 전장의 후방에 위치하니까. 굳이 전쟁의 한가운데에 여성이 있다면 그건 전쟁 범죄의 희생자로서였다. 그러나 ‘탐욕의 끝, 사상 최악의 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부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모두 남성이다.)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에서는 양상이 달랐다.
한국문학은 ‘아버지 부재’의 문학이다. 이건 작가의 성별이나 주인공의 성별과 관계없이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라 더 흥미롭다. 시대 배경이 20세기의 중반, 일제 강점기 후반부이거나 6.25를 전후로 한 시기라면 더욱 그렇다.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 한국문학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부재를 통해 주인공의 삶을 조건을 더 열악하게(가난하게) 만들거나, 존재감이 너무도 희미해 있지만 있지 않은 존재다. 이러한 한국 문학의 기이한 ‘부성부재’(또는 ‘모성과다’)의 현상은 꽤 오래 끈질기게 이어져 20세기 후반에 활약한 작가들의 작품에도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외국의 문학(특히 이웃 일본의 문학은 오히려 ‘어머니 부재’라는 느낌이 들만큼 부성이 강조된다.)에 비해 한국 문학은 대부분 어머니 혼자 아이를 낳아 어머니 혼자 기른다. 김원일 『마당 깊은 집』-남성작가, 남성주인공-, 박완서 『엄마의 말뚝』-여성 작가 여성주인공-등등을 봐도 그렇지만 말이다, 한국 문학에서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있지는 않다는 것을.”라는 멋진 조언을 남기는 닉 캐러웨이의 아버지 같은 아버지는 나오지 않는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1925년 작품이다)
그 시대 한국의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그런 멋진 조언을 남길 만큼(또는 자녀가 그런 조언을 기억할 수 있을 나이가 될 때까지) 자녀의 곁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독립 운동을 하러 만주와 상해로 떠났고, 돈을 벌러 일본으로 징용을 갔고, 나중에는 전쟁으로 끌려갔다. 그 빈 자리를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가 채웠다. 그 시대 한국 여인들은 어머니이자 아버지였다. 한국 작가들이 어머니 찬양을 할 수 밖에 없는 근간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이 비슷한 상황은 2차 세계대전, 소련에서도 일어난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들이었다.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주로 소련 영토 내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해 2,900만 명에 이르는 소련 시민들이 사망했으며 동시에 전체 독일군 사상자의 80퍼센트 역시 동부 전선에서 발생했다.
폴 콜리어 외, 『제2차 세계대전』, 강민수 역, 플래닛미디어, 2020, p.6
2,900만 명의 소련 사망자는 1,200만 명의 군인 사망자 외 1,700만 명의 민간인 사망자로 나뉜다. 소련 콜호스(집단농장)의 남자들은 자의든 타의든 자국의 영토 내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투입되어 남아있는 건 노인, 여자, 아이들밖에 없는 처절한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소련의 소녀들은 자원 입대했다. 위생병이나 통신수 같은 지원부대만이 아니라 저격수나 고사포병, 심지어 보병 같은 전투부대에도 지원해 직접 총을 들고 싸웠다. 그녀들에게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는 없고, 내 땅은 지켜야했다.
전쟁이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게 되는 이유는 신체 차이에서 온다. 전쟁터에서는 ‘남자’ 라는 것이 곧 능력이요, 권력이 된다. 신체 능력이 월등하니까. 키와 완력의 차이는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열다섯 열여섯의 소련소녀병사들은 그 차이를 극복하는 대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그들의 동료로서 함께 싸울 수 있음을 증명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키가 작아도, 힘이 없어도 총을 쏠 순 있으니까. 그럼에도 그녀들과 함께 싸운 남자 병사들은 동료애를 느끼기보다는 이런 소녀들마저 전장으로 끌어들인데 대하여 남자로서 죄책감을 느낀다. 그 ‘죄책감’에 대해 소녀들이 과연 고마워했는지는 다음 문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는 ‘전쟁이라면 토할 것 같고, 전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그런 책을 쓸 수만 있다면, 미치도록 쓰고 싶다’(p.28)고 말한다. 그래서 무기질의 숫자와 지명이 지워낸 개별 인간의 증언을 기록하기로 했다. 그 개별 인간 중에서도 전쟁이라는 무정부의 상황 속 여성의 목소리를. 그녀가 이 책을 쓸 무렵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다. 그 전쟁을 보고 있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벨라루스 작가인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쨌든 그녀의 시도가 실패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김훈이 그린 이순신에게도 그랬다. 포로로 잡혀 온 일본군의 울음은 그가 ‘일본군’이라는 뭉뚱그린 적이 아니라 개별의 사람임을 인식하게 한다. 내 앞에 서 있는 각자가 모두 개별의 인간이라는 인지를 하는 순간, 손에 들고 있는 무기를 휘둘러 그의 생명을 빼앗기는 불가능해지는 지점이 온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01, p.254
그리고 전쟁이 멈추는 실마리는 아마도 그 자리에 있지 않을까. 숫자가 아닌 사람 그 개별성을 인지하는 순간에.
그래서 개별 인간의 전쟁 체험담은 전혀 낭만적이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않다. 인상을 찡그릴만큼 고통스러워서 숙제하듯 글을 읽었다. 내가 하도 괴로워하며 책을 읽으니 남편이 옆에서 대체 왜 읽고 있냐, 집에 책이 이렇게 많은데 다른 거 읽지. 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그러게. 도대체 왜 읽었느냐고 묻는다면, 읽어야만 했으니까. 라고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다. 읽어야만 했으니까. 세상에는 흥미와는 관계없이, 재미와는 관계없이 읽어야만 하는 책들도 가끔은 있다.
전쟁의 원인(트로이의 헬렌)이나 보호의 대상(앤의 릴러)이 되지 않고 전쟁에 직접 참여한 여자의 목소리를 내게 처음으로 들려준 책은 김서령의 『여자전』(푸른역사, 2017)이었다. 그 전까지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여자는 잔 다르크나 뮬란 같이 아마조네스 전설에서나 나오는 존재였다. 그게 아니면 나이팅게일이나 마타하리같이 후방을 지원하는 의료인력이나 미모를 활용한 스파이 활동을 하는 정도. 물론 세례 요한을 죽인 루 살로메 같은 암살자도 있고 만주를 누빈 독립운동가 중에도 여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군부대에 소속되어 직접 전투요원으로 참여하는 여성을 상상하는 건 어려웠다. 뭔가, 상상력의 한계 밖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여군이 있다는 것도 알고, 냉병기의 시대가 지나간 지금 여성이 전쟁을 수행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늘 전쟁은 남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밤중에 군인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더니 붙잡힌 동지들을 몇 끌고 나갑니더. 끌려 나갔다 온 젊은 여자들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바닥에 엎드려서 울고……. 그게 뭔지 내가 다 알았네요. 가족을 잃고 죽음을 목전에 둔 누더기 같은 여자들을 그 틈에 강간하다니.
김서령, 『여자전』, 푸른역사, 2017, p.18
지리산 토벌의 결과로 잡아 온 빨치산 여성을 강간하는 대한민국 국군이라니. 그래, 그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을 거라고 각종 소설을 읽으며 했던 생각을 실체적 진실로 만났을 때의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이런 충격을 작가 김서령도 겪는다. 중공군으로 6.25에 참전했던 윤금선의 증언을 들을 때. “난생처음 듣는 내용이기도 했고 난생처음 생각해본 관점이기도 했”(김서령, 『여자전』, 푸른역사, 2017, p.137)단다. 아이들과 젊은이는 몰살당하고 노인들만 남은 마을을 보며 “미국이라면 저절로 ‘원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 미군이 중심이 된 UN군 참전으로 북한의 침략을 막아냈다, 라는 교육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 뇌가 문득 흔들렸다. 북한 주민은 우리의 동포고, 헌법상 북한 땅도 대한민국의 영토라면서 그들을 죽인 미국에 감사를 느끼는 인지부조화. 거기에 같은 한국 여성을 강간하는 한국 군인이라니. 때로 여자는 남자와는 전혀 다른 전쟁을 치러내는 지도 모른다.
크리스티나 램의 책은 야디지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낯선 이름의 종교(이자 종족)를 가진 이들은 인근 이슬람 교인들에 의해 사냥 당한다. 남자 야디지 족은 죽이고, 여자 야디지 족은 성노예로 팔려나가고 거래된다. 종교의 이름으로 허용되는 이 끔찍한 짓을 가장 먼저 응징해야 할 것은 스스로는 평화로운 종교라고 주장하는 이슬람 교인들과 같은 이슬람권 국가여야 할 거 같은데, 정작 이들을 구해주는 건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이슬람은 가해자이기만 한가하면, 미얀마의 로힝야족에게 일어난 일을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이슬람을 믿는 로힝야족을 박해하는 건 자비와 깨달음의 종교라는 불교 신도들이다. 이 과정에서도 로힝야족 여인들은 강간의 대상이 된다.
이 책의 내용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가해는 차라리 인간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때로 강간은 전쟁의 무기로 사용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의 붉은군대는 사흘간 베를린의 독일 여성을 정책적으로 강간한다. 당시 베를린의 여성 셋 중 하나는 소련군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독일 여성을 욕보이는 것은 나치에게 열등 종족으로 취급당한 러시아인이 쓸 수 있는 보복 수단 중 하나였다. 여성의 성은 가장 쉬운 공격 대상이었다.
크리스티나 램, 『관통당한 몸』, 한겨레, 2022, 9.강간군대와 사냥의 시간
여자와 동료가 되어 전쟁을 치르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던 소련 남자들이 독일에 가서는 여자에게 그런 짓을 했다. 물론 죄책감을 느낀 남자와 강간을 한 남자가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동일인 일수도 있겠지.). 여자를 강간하는 것이 보복 수단이라니. 정작 저들을 죽인 건 나치 독일의 남자였는데. 이런 찌질한. 그러나 이조차 인간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일이 콩고 민주공화국에서는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다.
같은 나라, 같은 종족의 성인 남자가 18개월 된 여아를 강간한다. 처녀의 피가 자신들을 더 강하게 해 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이쯤 되면 인류혐오를 느끼게 된다.
다시, 이 책의 서문의 제목을 본다. ‘여성의 몸, 전장이 되다.’
강간은 일회성의 훼손이 아니다. 강간을 당한 사람은 지속적으로 그 후속 피해를 입는다. 신체의 훼손이 복구된 뒤에도 내면은 끊임없이 죽어간다. 심부 화상이 계속 진행되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강간 피해자 한 사람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의 가정은 파괴되고, 공동체는 해체된다. 이것은 목숨을 잃는 것 이상의 고통이다. 심지어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를 입었음을 외부에 쉽게 발설할 수도 없다. 피해자임에도 사회에서 경원시 되는 것은 그들이기 때문에. 성폭력은 참 특이한 폭력이다. 전쟁이 끝나도 강간 피해자의 전쟁은 끝이 나지 않는다. 몸이 전장이 되는 거다.
대한민국에서 성희롱 관련 재판이 처음으로 있었던 게 94년(최종심은 99년)이다. 서울대 신정휴 교수는 대법원까지 질질 끌고 간 끝에 끝내 패소했고, 대한민국은 처음으로 ‘성희롱’ 이라는 개념을, 그것이 범죄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성희롱을 저지르면 처벌을 받는다’는 선례는 미래에 있었을 수도 있었을 수많은 성희롱 범죄를 예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처벌은 중요하다. 처벌받기 전까지 신정휴 교수는 제가 잘났다고, 죄가 없다고 책까지 펴냈다. 『나는 성희롱 교수인가』(혜화당, 1998)라는. 그리고 대법까지 끌고 가(세 번이나 무죄를 주장한 건 웃기고, 세 번 다 유죄를 선고받은 건 통쾌) 최종 선고가 난 1999년 이후, 온갖 성희롱 관련교육과 백서가 나왔다. 이 판결은 여자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조금 더 나아진 것 뿐만 아니라 남자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게 범죄인 줄 모르고 하는 일도 죄의 무게는 동일하고 가해력도 동일하다. 그게 죄라는 것을 알고 나면 하지 않을 사람들도 참 많다. 인간이란 간사해서 말이지. 처벌 받을 것을 알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쟁 성범죄가 처벌 받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의 역사와 전쟁의 역사는 동일할 것이고, 전쟁 강간 범죄도 그 전쟁의 역사와 궤를 같이할 것인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와 도쿄에 세워진 국제 재판소에 성폭력 기소는 단, 한, 건, 도 없었다. 단, 한, 건, 도. 말이다.
사람들은 전시 강간 문제로 상대국의 비인도성을 비난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베를린에서 붉은 군대가 사흘간 8세에서 80세 사이의 독일 여성을 체계적(믿어지지 않겠지만)으로 강간했다거나 일본이 중국의 난징 대학살을 저지르는 과정에 수많은 여성에 대한 강간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 적국이 얼마나 비도덕적 비인도적인지에 관하여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6년 열린 난징에서의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에서 강간문제는 빠져 있었다. 강간이 전쟁 범죄로 처벌 된 것은 1998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심지어 이 판결은 항소심 후 뒤집히기까지 했다.) 같은 해,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되었고, 이 책이 쓰여지기까지 21년동안 전시 강간에 유죄판결을 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단 한번의 경우가 있었지만 항소심으로 뒤집힌다.) 이렇게나 심각한 범죄인데 이렇게나 소홀하게 취급되다니.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가 있다.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안다. 그런데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기에 범죄가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된다. 처벌하지 않는다면 범죄는 반복된다.
이 반복되는 범죄를 멈추라고 외치기 위해 이 책은 쓰여졌다. 가해자가 처벌받을 때까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사람들의 용기에 관한 이야기. 잊지 말라는 이야기. 이 이야기의 한꼭지로 등장하는 수요집회 이야기는 무참한 마음이 들게 만든다. 60년을 넘어 70년을 넘어 80년이 지난 이야기를 10년, 20년, 30년째 하고 있는데도, 피해자가 있고 증언을 하는데도 왜. 왜. 왜.
가끔 그런 책이 있다. 읽지 않았다는 부채감을 안기는 책. 눈에 띌 때마다 언제 읽을 거야? 라고 물어보는 것 같은 책. 참 열심히도 다른 핑계를 찾아 외면하게 만드는 책. 크리스티나 램의 『관통당한 몸』이 그랬다. 역시 앞부분 몇 장을 읽다가 덮었다. 악몽을 꿀 것 같아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책과 나란히 꽂아두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리고 한참 뒤 묵혀 둔 숙제를 하듯 이 두 권의 책을 이어 읽었다.
아아, 삐뚤어질테다. 이 망할놈의 세상.
여자전 : 2019.2.14
제2차 세계대전 : 2025.2.10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2025.2.13
관통당한 몸 : 2025.2.24
2024.3.31. by ash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