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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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by 김영하

 

읽은 날 : 2025.4.6.

 

의도하지 않게 영원히 지속되는 삶에 대한 이야기(영원한 천국정유정, 은행나무, 2024)를 읽고 연달아 단 한 번의 삶에 대한 글을 읽게 됐다. 정유정의 글은 읽을 책을 차례대로 줄을 세워놓았던 라인에 놓여있었고, 김영하는 김영하였기에 배송받자마자 읽은 건데 일이 참 공교롭게 그리 되었다. 삶의 이런 우연성이 나는 좋다. 일부러 그런거라면 그건 좀, 너무, 도식적이잖아.

 

김영하는 내가 대학 신입생이던 1995년에 등단했다. 첫 번째 산문집은 2000굴비낚시, 영화를 주제로 한 에세이다. 두 번째 산문집이 2002포스트 잇이다. 그 즈음부터 나는 책을 모으기 시작했기에 김영하의 에세이집이 나오는 족족 실시간으로 따라 읽었다. 나보다 9살이나 많은 작가를 나와 동시대 작가로(9살 정도면 동시대 맞나.), 나와 함께 나이 먹어가는 작가로 인식하게 된 계기가 거기에 있다.

 

주제를 정하지 않은 진짜 산문집으론 첫 번째 권이 될 포스트 잇에서 김영하는 소설과 산문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평범한 인간들의 내면에 괴물이 한두 마리쯤은 숨어 있다고 늘 생각한다. 수효가 문제일 뿐, 없는 사람은 없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면 괴물이 내게 손을 내밀고 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선다. 우리는 뚜벅뚜벅 지상으로 향한다. 마침내 땅 위로 올라오면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소설이라 부른다. ……

그런데 한 번 지상으로 올라온 그 괴물들은 다시 내려가지 않는다. …… 양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시정의 잡사에 참견하는 것을 즐긴다. 사람들은 그들을, 잡문 혹은 산문이라 부른다. …… 개중에는 괴물로서의 특성을 완전히 망각한 말랑말랑한 글도 있지만 아직 털갈이가 채 끝나지 않은 괴물의 축축한 글도 있다.

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4-5

 

25년여 전의 영하씨의 산문은 털갈이가 채 끝나지 않은 괴물의 축축한 글이 꽤 된다. “평생 지나간 것이나 그리워하도록 되어먹은 것이 인간이라는 흉물”(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71) 이라거나 아무 일도 없다는 게 사랑의 비극이다. 사랑은 낭비이며 사치이며 한가한 감정놀음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그러나 자기는 전혀 사랑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잔인한 자들은 무슨 일이냐라고 묻는다. ‘그냥……으로 시작하는 대답을 기어이 그의 입으로 말하게 함으로써 말하는 자를 한심하게 만드는 놀음을, 그들은 즐긴다.”(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123) 이라거나 왜 문학인가? 좋다. 말해주마.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어쩌자고 문학이냐, 아니면 왜 하필 문학이냐, 혹은 미쳤다고 문학이냐는 뜻이지 않은가.”(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229) 이런식이다. 시니컬하고 사납다. 소설속 정제된 언어들과 달랐다. 물론 영하씨의 초기 작품들도 이렇게 폭력적이긴 하지만. 나는 이 에세이를 읽고 똘똘한 아이의 세상 인상기라는 제목을 달아 준 적이 있다. 갓 서른이 된 남자라기 보다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랬던 영하씨의 산문은 나이를 먹어가며 달라진다. 입고 있는 양복에 익숙해지고, 사회적 언어를 사용하는데 더 노련해지며 날것의 감정을 토해내는 대신 순화하고 돌려서 말하는 법도 익혔다. 갓 서른이 되었던 사람이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환갑이 멀지 않게 되는 나이까지 성장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다. 여전히 스마트하고, 여전히 예민하지만 이제는 사용하는 언어의 질이 달라져 간다.

 

이십대의 나는 길에서 마주쳐도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 역시 십대의 나를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이 과거의 그 사람과 같은 존재라고 애써 믿으며 살아간다. 변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애써 찾아내, 사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복복서가, 2025, p.77

 

김영하는 지금까지 산문을 통해 자신에 대한 어떤 정보를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직업군인 아버지가 있고, 전업주부 어머니가 있고, 남동생이 하나 있고, 연세대를 나왔고, 부산 출신 아내와 결혼을 했고, 이걸 좋아하고 저걸 취미로 가지고 있고 블라블라블라. 아버지의 직업 덕에 매년 전학을 해야했던 초등학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첫사랑 이야기며, 대학 시절의 이야기며. 김영하에 대한 정보는 어느 글에서나 넘쳐나서 이쯤 되면 이 사람을 친근하게 느끼는 것도 인지상정일 것 같은데, 묘하게 거리를 두는 느낌이 있었다. 하긴 공인이니까, 자신의 정보를 각색하는 것도 당연하지 싶으면서도 아니, 전혀 각색되지 않은 날것의 정보를 그대로 전달하는데도 묘하게,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는데 사실은 하나도 듣지 않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박완서나 박경리의 글이나 인터뷰는 자신의 모친에 대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판단으로 넘쳐난다. 그것이 어떻게 작품에 반영되는지 선명하게 선이 그어질 정도로. 그런 인터뷰와 산문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김영하의 우리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어요. .” 이라는 정보는, 정보를 받았으나 받지 않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데. 하긴,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해야할 의무는 없잖아? 그 기묘한 거리감을 나는 김영하의 세련된 처세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다 이 책을 읽고 드디어 생각했다. , 그랬군. 그동안 정보는 주었는데 감정은 주지 않았던 거야. 그러니 김영하의 작품과 연관 지을 선이 그어지지 않았던 거지. 이번 산문집에서 김영하는 자신의 아버지에 관하여, 그리고 어머니에 관하여 꽤나 자세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그분들이 어떤 분들이었는지, 자신이 그분들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아마도 두 분 모두 돌아가신 뒤이기에 가능했던 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평생 쓸 일이 없겠구나. 하하하.) 어쩌면 그렇게까지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나이를 먹어가며 모서리가 좀 둥글어지는 모습일 수도 있겠고.

 

김영하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내가 느끼는 김영하는 초기작을 쓸 때부터 이미 완성형의 작가였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한편 글을 쓸 때마다 나아지는 작가란, 발전하는 모습이니까 좋은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은 음, 그건 그거대로 또 좀 별로이지 않나. 어쨌든 소설이 나아진다는 느낌보다는 소재와 주제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수는 있는 정도지 처음부터 글 진짜 잘 쓰는 작가이긴 했다. 타고난. 그래서 소설의 발전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에세이를 따라가면서는 할 말이 좀 생긴다. 작가도 나이를 먹고, 나도 나이를 먹고. 좋아하는 작가와 동시대에 함께 나이먹고 있다는 축복을 맘껏 누리는 중이다.

 

2025.4.6.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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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4-07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 반가워요. 그리고 김영하 작가의 사적인 고백에 대한 감상 아시마님이 정리해주시니 제가 느낀 뭔가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던 감정이 정리되는 느낌이에요. 솔직한데, 뭔가 감정이 넘치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이런 거였군요. 자신의 사적인 정보를 노출할 때 태도라는 게 뭔가 의도를 가지면 거부감이 드는 부분이 있잖아요. 김영하 작가에겐 그런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어요. 담백한데 그게 오히려 뭔가 더 울림을 주는... 김영하 작가의 나이듦에 대해 저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어요.
 
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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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by 정유정

 

읽은 날 : 2025.4.5.

 

1. ‘사이버 가수아담이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981월이다. 당시 기술로서는 최첨단이었겠으나 지금의 눈이 아닌 그때의 눈으로 보아도 이미 어설프기 그지없는 3D 그래픽에 아이고, 이건 좀 무리수 아닌가 중얼거리며 그냥 신경을 껐는데 의외로 엄마가 아담을 몹시 신기해했다. 그래서 저건 대체 뭐냐? 고 묻는 엄마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망연했던 기억이 있다.

 

2. 키오스크의 일반화와 함께 디지털 소외계층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음식점에서 식음료 주문을 하지 못하거나, 택시 호출을 하지 못해 길에 하염없이 서 있게 되는 노년층에 관한 이야기들.

 

3. 나의 음악취향은 매우 올드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바, 사람은 20대 초, 가장 감성적으로 말랑할 때 들었던 음악을 평생 듣게 된다는데 내가 그러하다. 요즘 출퇴근시 듣는 플레이 리스트 안의 음악들은 죄다 세기말의 음악이다. 좋아하는 가수도 거기에 멈춰있는 나는 요즘 아이돌은커녕 버추얼 아이돌의 이야기로 넘어가면 저건 대체 뭐냐라고 묻던 엄마의 얼굴과 닮은 얼굴이 된다.

 

4. 정유정에 대한 나의 평이 박한 것에 비하면, 정유정이 출간한 모든 소설을 다 읽어왔다. 그리고 정유정에 대한 평가도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갔다. 정유정이 그리는 인물에 동의하기는 어려우나 한국 작가로는 드물게 서사에 강한 작가라는 점만은 인정한다. 좋아하지 않는 작가의 신작을 진득하게 읽어가는 재주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이런식으로 평가가 조금씩 상향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역시 소설가는 서사지.

 

5. 헌데 이 소설을 읽고는 좀 당황했다. 여전히 순간순간 몰아치는 서사의 재주는 발군인데 이 소설 자체는 당황스러웠다. <롤라>라는 가상의 세계와 롤라 극장드림시어터와 설계자. 아담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끝내 실패한 엄마처럼 버추얼 아이돌의 가치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 내가 이 소설의 세계에 몰입하기는 어려웠다. 소설이란 모름지기 이 소설 속 롤라 극장이 그러하듯 자신의 자아가 서사 속 주인공의 자아로 대체되기에 가상의 삶이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p.20)하는데에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순간순간 시스템 오류를 일으켜 이야기에서 튕겨지는 기분이었다.

 

6. 어느새 사이버 가수 아담을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나이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과학과 신기술의 발달은 그때의 속도와는 비교도 안되게 빠르고,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문제인 것인가 독자를 납득시키는데에 실패한 작가의 문제인 것인가.

 

7. 2004년 개봉해 브래드 피트의 절정기 미모를 영원히 감상할 수 있게 한 영화 트로이. 바다의 요정 테티스와 인간 남자 펠레우스 사이에 태어난 아킬레우스는 갓난아기였을 때 테티스가 저승의 강 스틱스에 빠트려 상처 입지 않는(죽을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준다. 죽어서 불멸의 명성을 가지고 싶어하지만 영원히 이어지는 삶으로 인해 그는 잊혀지는 존재가 될 뿐이다. 결국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면 불멸의 영광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신탁에 참전한다. “신은 인간을 질투해. 인간은 언젠가 죽거든. 그래서 삶이 아름다운 거야.”-아킬레스가 신녀 브리셰이스에게 하는 말은 두고두고 곱씹어 볼 여지가 있다. 불멸과 영원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8. 일회성과 유한함 때문에 오늘이, 지금이, 이 순간이, 인간의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이 소설에서 말하는 <롤라>라는 공간과 거기에 대한 인물들의 집착에 동의하지 못했기에 끊임없이 소설에서 튕겨져 나오는 경험을 했다, 나도 이제 버추얼 아이돌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디지털 소외계층이 되었기에 이 소설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것인가.

  

9. 작가는 그러니까 이 소설은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고자 하는 인간의 마지막 욕망에 대한 이야기”(p.523 작가 후기에서)라고 말하지만 음, 글쎄. 120204년의 지구는 새하얀 얼음별이 되어 지구상 동식물 대부분이 멸종을 맞(p.384)았고, 인간은 <롤라>에 업로드 되어 혼자의 고독한 삶을 영원히 살아간다. 가상 공간에 업로드 된 인간도 인간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감각으로 인지하는 몸이 있다는 것만으로 몸이 있을 수 있는 건가. 신동집의 시 <오렌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래, 그 가상공간에서라도 살면 되잖니, 영혼이라고 할지 정신이라고 할지가 있으니까. 실체가 뭐가 중요하니, 싶다가, 내가 다시 소설에서 튕겨나와 버린 순간은 이 부분이다.

 

버스 승강장을 지나자 어둠의 벽이 나를 막아섰다. 이 벽은 그의 영역이 시작되는 경계선이었다. …… 나는 몸을 돌리고 벽을 향해 섰다. 어둠의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밖으로 발을 디디자 만경로가 등 뒤로 물러나며 벽이 닫혔다. 동시에 황막한 사막이 나를 감쌌다. 내 거처로 들어온 것이었다. (p.394)

 

그러니까 말이다. <롤라>에 업로드 된 사람들은 각자의 기억으로 구축된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 살아간다. 그 안에서 만나고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죄다 내 기억에서 불러낸 사람들일 뿐이다. . 이 고독의 극한을 보여주는, 고통의 영원이라니. 이건 마치 영원히 죽지 못하는 저주를 받아 우주를 홀로 떠돌고 있는 인간을 볼 때와 같은 고통이다. 그래서 경주를 다시 <롤라>로 불러들이기 위해 애를 쓰는 해상의 노력이 이해되지 않았고, 해상을 롤라에 업로드 하기 위해 노력하는 제이의 노력도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가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졌으니까. 말이야 업로드지만 결국은 죽는 거잖아. 그나마 업로드라도 하면 영혼이, 아니 정신이 남아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업로드 하지 못하고 죽은 연인에 대한 기억은 간직한채 고독속 영원을 누리는 삶이라니. 이게 과연 천국일까요 지옥일까요. 맙소사.

 

10. 결국은 <롤라>에 대한 가치 판단의 문제에 따라 이 소설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지도 모르겠다. 롤라를 긍정할 수 있어야 이 소설 전체를 따라갈 수 있는데. . 1998년의 아담을 보며 했던 생각을 또 한다. 무리수예요. 기원전 8세기부터 호메로스 옹이 외쳤잖아요? 영원과 불멸은 달라요! 인간은 소멸할 수 있기에 아름답고 가치있는 거예요.

 

11. 몸과 영혼(정신)이 분열되어 정신만이 남은 메트릭스의 세상은 천국이 아니라고, 이미 지난 세기 말에 워쇼스키 형제가 말했답니다. 우리 이미 한번 봤잖아요. 그 세상 별로예요.

 

2025.4.6.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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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여성

 



어느날 우리집 책장에 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마어마한 벽돌책이 나타났다. 숫자와 지명, 유명 장군의 이름으로 요약되는 전투와 전쟁의 이야기는 스펙타클한 재미가 있다. 그것이 실화, 진짜로 있었던 일이기에 더욱. 물경 9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삼국지 읽듯 숨도 안 쉬고 독파했다. 전쟁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는 나는 뇌의 어디가 고장 난 거 아닐까. 사이코패스였는데 나만 몰랐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야기가 식상해져 갈 무렵이었다.

 

트럼프가 또 다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재선이 못 될 것을 예상했듯,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가 이길 것도 예상했던 사람도 많았다. 그럼에도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세계에 던진 파문은 늘 그렇듯 무엇을 예상했건 그 이상이었다. 어머 어머 어머 미쳤나봐, 어머 어머 어머, 라는 말만 반복하게 만들던 트럼프의 행보가 외교로 넘어갔을 때, 그리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넘어갔을 때는 사람을 멍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마 세계 경찰 캡틴 아메리카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나보다.

 

전 세계에 실시간 생중계 된 첫 번째 전쟁은 91년 걸프전이었다. 사막의 방패Operation Desert Shield, 사막의 폭풍Operation Desert Storm, 사막의 기병도Operation Desert Sabre 라니. 이 화려하다 못해 낭만적이기까지 한 작전명에 이어진 전투 상황의 실시간 중계는 전쟁을 더욱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끼게 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스커드 미사일을 공중요격하는 장면(실은 이게 조작된 화면이라고는 하더라만)은 갤러그 게임을 연상시켰다. 사람의 생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우주 저 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루시모드 몽고메리의 사랑스러운 소설 <빨간머리 앤>의 마지막 권은 제1차 세계대전을 시대 배경으로 한다. 앤과 앤의 가족이 사는 곳은 캐나다의 본토도 아닌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고,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이 아니다. 다만 영연방 국가의 일원으로 영국이 참전하자 캐나다에서도 의용군을 모집하여 영국군의 일원으로 보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앤의 아들들도 참전한다.

 

릴러는 처음의 충격이 지나자 슬픔에 잠기면서도 이 일 전체의 낭만적인 요소에 반응을 나타냈다. 군복차림의 젬은 확실히 훌륭했다. 캐나다 젊은이들이 조국의 요구에 이처럼 재빨리 이해타산을 버리고 두려움없이 응한 것은 생각만 해도 멋졌다.

루시모드 몽고메리, ANNE8. 아들들 딸들, 김유정 역, 동서문화사, 2009, p.77

(동서문화사 판 ANNE은 총 10권의 소설이지만, 앤과 앤의 자녀들을 주축으로 하는 이야기 자체는 8권으로 끝나고, 9, 10권은 애번리 인물들의 자잘한 삽화같은 단편 모음이다.)

 

지나간(끝난) 전쟁과 타지의 전쟁은 언제나 낭만의 요소를 품고 있다. 젊고 잘생긴 제복 차림의 남자와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여성. 오죽하면 로망스의 시작이 기사도 문학일까.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군복차림은 훌륭하고 멋지다. 릴러의 느낌처럼.

 

그렇게, 남의 땅에서, 숫자의 뒤에 숨은 익명성에 기댈 때 전쟁은 낭만적인 이야기이고 흥미진진한 게임이 된다. 아마도 그래서 이 지구상에 전쟁이 끝나지 않는 모양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산 건 누군가가 자신이 그해 읽은 책 중 가장 좋은 책으로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전쟁과 여성이라니 뜻밖의 조합이다. 당연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 쉽게 납득되는 제목이기도 했다. 전쟁이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은 건 맞지 뭐. 전쟁과 여성이라니 뭐 어쩌라는 거지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역, 문학동네, 2015, p.17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남자니까, 당연히 전쟁에 관해 서술하는 것도 남자여야 하지 않나. 여자들은 남편과 아들을 전장에 보내고, 그들의 자녀를 키우며 다쳐서 돌아온 남자를 보살피는 존재로 전장의 후방에 위치하니까. 굳이 전쟁의 한가운데에 여성이 있다면 그건 전쟁 범죄의 희생자로서였다. 그러나 탐욕의 끝, 사상 최악의 전쟁’(2차 세계대전의 부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모두 남성이다.)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에서는 양상이 달랐다.

 


 

한국문학은 아버지 부재의 문학이다. 이건 작가의 성별이나 주인공의 성별과 관계없이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라 더 흥미롭다. 시대 배경이 20세기의 중반, 일제 강점기 후반부이거나 6.25를 전후로 한 시기라면 더욱 그렇다.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 한국문학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부재를 통해 주인공의 삶을 조건을 더 열악하게(가난하게) 만들거나, 존재감이 너무도 희미해 있지만 있지 않은 존재다. 이러한 한국 문학의 기이한 부성부재’(또는 모성과다’)의 현상은 꽤 오래 끈질기게 이어져 20세기 후반에 활약한 작가들의 작품에도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외국의 문학(특히 이웃 일본의 문학은 오히려 어머니 부재라는 느낌이 들만큼 부성이 강조된다.)에 비해 한국 문학은 대부분 어머니 혼자 아이를 낳아 어머니 혼자 기른다. 김원일 마당 깊은 집-남성작가, 남성주인공-, 박완서 엄마의 말뚝-여성 작가 여성주인공-등등을 봐도 그렇지만 말이다, 한국 문학에서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있지는 않다는 것을.”라는 멋진 조언을 남기는 닉 캐러웨이의 아버지 같은 아버지는 나오지 않는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년 작품이다)

 

그 시대 한국의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그런 멋진 조언을 남길 만큼(또는 자녀가 그런 조언을 기억할 수 있을 나이가 될 때까지) 자녀의 곁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독립 운동을 하러 만주와 상해로 떠났고, 돈을 벌러 일본으로 징용을 갔고, 나중에는 전쟁으로 끌려갔다. 그 빈 자리를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가 채웠다. 그 시대 한국 여인들은 어머니이자 아버지였다. 한국 작가들이 어머니 찬양을 할 수 밖에 없는 근간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이 비슷한 상황은 2차 세계대전, 소련에서도 일어난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들이었다.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주로 소련 영토 내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해 2,900만 명에 이르는 소련 시민들이 사망했으며 동시에 전체 독일군 사상자의 80퍼센트 역시 동부 전선에서 발생했다.

폴 콜리어 외2차 세계대전강민수 역플래닛미디어, 2020, p.6

 

2,900만 명의 소련 사망자는 1,200만 명의 군인 사망자 외 1,700만 명의 민간인 사망자로 나뉜다. 소련 콜호스(집단농장)의 남자들은 자의든 타의든 자국의 영토 내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투입되어 남아있는 건 노인, 여자, 아이들밖에 없는 처절한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소련의 소녀들은 자원 입대했다. 위생병이나 통신수 같은 지원부대만이 아니라 저격수나 고사포병, 심지어 보병 같은 전투부대에도 지원해 직접 총을 들고 싸웠다. 그녀들에게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는 없고, 내 땅은 지켜야했다.

 

전쟁이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게 되는 이유는 신체 차이에서 온다. 전쟁터에서는 남자라는 것이 곧 능력이요, 권력이 된다. 신체 능력이 월등하니까. 키와 완력의 차이는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열다섯 열여섯의 소련소녀병사들은 그 차이를 극복하는 대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그들의 동료로서 함께 싸울 수 있음을 증명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키가 작아도, 힘이 없어도 총을 쏠 순 있으니까. 그럼에도 그녀들과 함께 싸운 남자 병사들은 동료애를 느끼기보다는 이런 소녀들마저 전장으로 끌어들인데 대하여 남자로서 죄책감을 느낀다. 죄책감에 대해 소녀들이 과연 고마워했는지는 다음 문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는 전쟁이라면 토할 것 같고, 전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그런 책을 쓸 수만 있다면, 미치도록 쓰고 싶다’(p.28)고 말한다. 그래서 무기질의 숫자와 지명이 지워낸 개별 인간의 증언을 기록하기로 했다. 그 개별 인간 중에서도 전쟁이라는 무정부의 상황 속 여성의 목소리를. 그녀가 이 책을 쓸 무렵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다. 그 전쟁을 보고 있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벨라루스 작가인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쨌든 그녀의 시도가 실패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김훈이 그린 이순신에게도 그랬다. 포로로 잡혀 온 일본군의 울음은 그가 일본군이라는 뭉뚱그린 적이 아니라 개별의 사람임을 인식하게 한다. 내 앞에 서 있는 각자가 모두 개별의 인간이라는 인지를 하는 순간, 손에 들고 있는 무기를 휘둘러 그의 생명을 빼앗기는 불가능해지는 지점이 온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01, p.254

 

그리고 전쟁이 멈추는 실마리는 아마도 그 자리에 있지 않을까. 숫자가 아닌 사람 그 개별성을 인지하는 순간에.

 

그래서 개별 인간의 전쟁 체험담은 전혀 낭만적이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않다. 인상을 찡그릴만큼 고통스러워서 숙제하듯 글을 읽었다. 내가 하도 괴로워하며 책을 읽으니 남편이 옆에서 대체 왜 읽고 있냐, 집에 책이 이렇게 많은데 다른 거 읽지. 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그러게. 도대체 왜 읽었느냐고 묻는다면, 읽어야만 했으니까. 라고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다. 읽어야만 했으니까. 세상에는 흥미와는 관계없이, 재미와는 관계없이 읽어야만 하는 책들도 가끔은 있다.

 

전쟁의 원인(트로이의 헬렌)이나 보호의 대상(앤의 릴러)이 되지 않고 전쟁에 직접 참여한 여자의 목소리를 내게 처음으로 들려준 책은 김서령의 여자전(푸른역사, 2017)이었다. 그 전까지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여자는 잔 다르크나 뮬란 같이 아마조네스 전설에서나 나오는 존재였다. 그게 아니면 나이팅게일이나 마타하리같이 후방을 지원하는 의료인력이나 미모를 활용한 스파이 활동을 하는 정도. 물론 세례 요한을 죽인 루 살로메 같은 암살자도 있고 만주를 누빈 독립운동가 중에도 여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군부대에 소속되어 직접 전투요원으로 참여하는 여성을 상상하는 건 어려웠다. 뭔가, 상상력의 한계 밖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여군이 있다는 것도 알고, 냉병기의 시대가 지나간 지금 여성이 전쟁을 수행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늘 전쟁은 남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밤중에 군인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더니 붙잡힌 동지들을 몇 끌고 나갑니더. 끌려 나갔다 온 젊은 여자들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바닥에 엎드려서 울고……. 그게 뭔지 내가 다 알았네요. 가족을 잃고 죽음을 목전에 둔 누더기 같은 여자들을 그 틈에 강간하다니.

김서령, 여자전, 푸른역사, 2017, p.18

 

지리산 토벌의 결과로 잡아 온 빨치산 여성을 강간하는 대한민국 국군이라니. 그래, 그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을 거라고 각종 소설을 읽으며 했던 생각을 실체적 진실로 만났을 때의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이런 충격을 작가 김서령도 겪는다. 중공군으로 6.25에 참전했던 윤금선의 증언을 들을 때. “난생처음 듣는 내용이기도 했고 난생처음 생각해본 관점이기도 했”(김서령, 여자전, 푸른역사, 2017, p.137)단다. 아이들과 젊은이는 몰살당하고 노인들만 남은 마을을 보며 미국이라면 저절로 원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 미군이 중심이 된 UN군 참전으로 북한의 침략을 막아냈다, 라는 교육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 뇌가 문득 흔들렸다. 북한 주민은 우리의 동포고, 헌법상 북한 땅도 대한민국의 영토라면서 그들을 죽인 미국에 감사를 느끼는 인지부조화. 거기에 같은 한국 여성을 강간하는 한국 군인이라니. 때로 여자는 남자와는 전혀 다른 전쟁을 치러내는 지도 모른다.

 



크리스티나 램의 책은 야디지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낯선 이름의 종교(이자 종족)를 가진 이들은 인근 이슬람 교인들에 의해 사냥 당한다. 남자 야디지 족은 죽이고, 여자 야디지 족은 성노예로 팔려나가고 거래된다. 종교의 이름으로 허용되는 이 끔찍한 짓을 가장 먼저 응징해야 할 것은 스스로는 평화로운 종교라고 주장하는 이슬람 교인들과 같은 이슬람권 국가여야 할 거 같은데, 정작 이들을 구해주는 건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이슬람은 가해자이기만 한가하면, 미얀마의 로힝야족에게 일어난 일을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이슬람을 믿는 로힝야족을 박해하는 건 자비와 깨달음의 종교라는 불교 신도들이다. 이 과정에서도 로힝야족 여인들은 강간의 대상이 된다.

 

이 책의 내용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가해는 차라리 인간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때로 강간은 전쟁의 무기로 사용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의 붉은군대는 사흘간 베를린의 독일 여성을 정책적으로 강간한다. 당시 베를린의 여성 셋 중 하나는 소련군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독일 여성을 욕보이는 것은 나치에게 열등 종족으로 취급당한 러시아인이 쓸 수 있는 보복 수단 중 하나였다. 여성의 성은 가장 쉬운 공격 대상이었다.

크리스티나 램, 관통당한 몸, 한겨레, 2022, 9.강간군대와 사냥의 시간

 

여자와 동료가 되어 전쟁을 치르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던 소련 남자들이 독일에 가서는 여자에게 그런 짓을 했다. 물론 죄책감을 느낀 남자와 강간을 한 남자가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동일인 일수도 있겠지.). 여자를 강간하는 것이 보복 수단이라니. 정작 저들을 죽인 건 나치 독일의 남자였는데. 이런 찌질한. 그러나 이조차 인간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일이 콩고 민주공화국에서는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다.

 

같은 나라, 같은 종족의 성인 남자가 18개월 된 여아를 강간한다. 처녀의 피가 자신들을 더 강하게 해 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이쯤 되면 인류혐오를 느끼게 된다.

 

다시, 이 책의 서문의 제목을 본다. ‘여성의 몸, 전장이 되다.’

 

강간은 일회성의 훼손이 아니다. 강간을 당한 사람은 지속적으로 그 후속 피해를 입는다. 신체의 훼손이 복구된 뒤에도 내면은 끊임없이 죽어간다. 심부 화상이 계속 진행되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강간 피해자 한 사람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의 가정은 파괴되고, 공동체는 해체된다. 이것은 목숨을 잃는 것 이상의 고통이다. 심지어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를 입었음을 외부에 쉽게 발설할 수도 없다. 피해자임에도 사회에서 경원시 되는 것은 그들이기 때문에. 성폭력은 참 특이한 폭력이다. 전쟁이 끝나도 강간 피해자의 전쟁은 끝이 나지 않는다. 몸이 전장이 되는 거다.

 

대한민국에서 성희롱 관련 재판이 처음으로 있었던 게 94(최종심은 99)이다. 서울대 신정휴 교수는 대법원까지 질질 끌고 간 끝에 끝내 패소했고, 대한민국은 처음으로 성희롱이라는 개념을, 그것이 범죄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성희롱을 저지르면 처벌을 받는다는 선례는 미래에 있었을 수도 있었을 수많은 성희롱 범죄를 예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처벌은 중요하다. 처벌받기 전까지 신정휴 교수는 제가 잘났다고, 죄가 없다고 책까지 펴냈다. 나는 성희롱 교수인가(혜화당, 1998)라는. 그리고 대법까지 끌고 가(세 번이나 무죄를 주장한 건 웃기고, 세 번 다 유죄를 선고받은 건 통쾌) 최종 선고가 난 1999년 이후, 온갖 성희롱 관련교육과 백서가 나왔다. 이 판결은 여자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조금 더 나아진 것 뿐만 아니라 남자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게 범죄인 줄 모르고 하는 일도 죄의 무게는 동일하고 가해력도 동일하다. 그게 죄라는 것을 알고 나면 하지 않을 사람들도 참 많다. 인간이란 간사해서 말이지. 처벌 받을 것을 알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쟁 성범죄가 처벌 받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의 역사와 전쟁의 역사는 동일할 것이고, 전쟁 강간 범죄도 그 전쟁의 역사와 궤를 같이할 것인데, 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와 도쿄에 세워진 국제 재판소에 성폭력 기소는 단, , , 도 없었다. , , , . 말이다.

 

사람들은 전시 강간 문제로 상대국의 비인도성을 비난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베를린에서 붉은 군대가 사흘간 8세에서 80세 사이의 독일 여성을 체계적(믿어지지 않겠지만)으로 강간했다거나 일본이 중국의 난징 대학살을 저지르는 과정에 수많은 여성에 대한 강간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 적국이 얼마나 비도덕적 비인도적인지에 관하여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6년 열린 난징에서의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에서 강간문제는 빠져 있었다. 강간이 전쟁 범죄로 처벌 된 것은 1998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심지어 이 판결은 항소심 후 뒤집히기까지 했다.) 같은 해,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되었고, 이 책이 쓰여지기까지 21년동안 전시 강간에 유죄판결을 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단 한번의 경우가 있었지만 항소심으로 뒤집힌다.) 이렇게나 심각한 범죄인데 이렇게나 소홀하게 취급되다니.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가 있다.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안다. 그런데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기에 범죄가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된다. 처벌하지 않는다면 범죄는 반복된다.

 

이 반복되는 범죄를 멈추라고 외치기 위해 이 책은 쓰여졌다. 가해자가 처벌받을 때까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사람들의 용기에 관한 이야기. 잊지 말라는 이야기. 이 이야기의 한꼭지로 등장하는 수요집회 이야기는 무참한 마음이 들게 만든다. 60년을 넘어 70년을 넘어 80년이 지난 이야기를 10, 20, 30년째 하고 있는데도, 피해자가 있고 증언을 하는데도 왜. . .

 

가끔 그런 책이 있다. 읽지 않았다는 부채감을 안기는 책. 눈에 띌 때마다 언제 읽을 거야? 라고 물어보는 것 같은 책. 참 열심히도 다른 핑계를 찾아 외면하게 만드는 책. 크리스티나 램의 관통당한 몸이 그랬다. 역시 앞부분 몇 장을 읽다가 덮었다. 악몽을 꿀 것 같아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책과 나란히 꽂아두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리고 한참 뒤 묵혀 둔 숙제를 하듯 이 두 권의 책을 이어 읽었다.

 

아아, 삐뚤어질테다. 이 망할놈의 세상.

 

여자전 : 2019.2.14

제2차 세계대전 : 2025.2.10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2025.2.13

관통당한 몸 : 2025.2.24


2024.3.31.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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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김약국의 딸들』by 박경리

 

읽은 날 : 2025.2.8.

 

소설의 첫 문장은 매우 중요하다. 소설의 첫인상을 결정하기도 하고,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무심하게 툭 던지는 한 줄이 소설 전체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장 뛰어난 첫 문장을 가진 소설들의 목록을 만든 이들도 많다. 나는 한국 소설에서는 세 권을 꼽는데, 김훈의 칼의 노래(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이상의 날개(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그리고 이 소설이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漁港)이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마로니에북스, 2013, p.9

 

이 문장이 왜 그렇게 가슴을 치는가를 묻는다면, 글쎄, 어떻게 설명해야 납득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다음 문장, 다음 단락을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문장이라고 밖에는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이 문장에 휘말려 이 소설을 읽었다. 30년도 더 전에. 그리고 김약국의 딸이 넷이었나 다섯이었나(다섯이다) 헷갈릴 정도로 내용이 가물가물해진 뒤에도 이 첫문장만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이 소설은 김약국집 3대의 낙하를 기록한다. 초대 관약국’(아마도 현대로 치면 보건소장쯤 되는, 나름 국가직 공무원이다.)이었던 김봉제와 그의 동생 김봉룡, 여동생 김봉희가 1대다. 김봉제는 뇌짐병(폐결핵, 신병)을 앓는 딸 연순 하나만을 두고 있고 김봉룡은 2대 관약국이 될 아들 성수를 하나 낳는다. 그러나 김봉룡은 의처증 환자여서 아내 숙정의 부정을 의심해 숙정의 과거 연인을 칼로 찔러 죽이고 사라진다. 숙정은 비상을 먹고 자살했다. ‘비상 묵은(먹은) 자손은 지리지 않는다는 저주의 시작이다. 지리다는 번성하다의 경상도 사투리다.

 

2대 김약국이 되는 김성수는 큰어머니 송씨의 손에 자란다. 송씨는 돌이 되지도 않은 조카를 데려와 키웠음에도 정을 붙이지 못했다. 단순히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비상을 먹고 자살한 동서 숙정의 얼굴을 그대로 닮은 조카에게서 늘 동서의 망령을 보는 듯 기분이 나쁘고 이상야릇한 무서움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거기에 남편의 재산을 자신의 병든 딸에게 물려주지 못하고 조카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데서 오는 심술이 겹쳐 잔인한 정서적 학대를 가한다.

 

3대 관약국은 없다. 우선 관약국의 관인을 물려줄 아들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약국의 관인을 발행할 나라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상 묵은 자손은 지리지 않는다는 저주대로 김성수는 아내 한실댁을 맞아 아들 용환을 낳지만 여섯 살에 돌림병에 죽는다. 용환이 죽고, 조선이 망하고, 2대 김약국 김성수는 약국을 그만두고 어장을 경영했다.

 

한실댁은 첫 아들이 죽은 뒤로 내리 딸을 다섯이나 낳는다. 그 시대의 기준으로 딸은 자손에 들지 않으니 남편 김약국에게 소실이라도 들여 아들을 볼 것을 권하지만 김성수는 딱히 아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 딸들을, 한실댁은 부유한 살림과 타고난 심성으로 여유를 가지고 넉넉히 사랑으로 품는다.

 

큰 딸 용숙은 샘이 많고 만사가 칠칠하여 대갓집 맏며느리가 될 거라고 했다. 둘째 딸 용빈은 영민하고 훤칠하여 뉘 집 아들 자식과 바꿀까 보냐 싶었다. 셋째 딸 용란은 옷고름 한 짝 달아 입지 못하는 말괄량이지만 달나라 항아같이 어여쁘니 으레 남들이 다 시중 들것이요, 남편 사랑을 독차지하리라 생각하였다. 넷째 딸 용옥은 딸 중에서 제일 인물이 떨어지지만 손끝이 야물고, 말이 적고 심정이 고와서 없는 살림이라도 알뜰히 꾸며나갈 것이니 걱정 없다고 했다. 막내둥이 용혜는 어리광꾼이요, 엄마 옆이 아니면 잠을 못잔다. 그러나 연한 배같이 상냥하고 귀염성스러워 어느 집 막내며느리가 되어 호강을 할 거라는 것이다.

(p.86)

 

이랬던 한실댁의 소박하고도 아름다운 꿈은 첫째 용숙이 대갓집은 아니어도 부잣집의 맏며느리로 들어가는 데는 성공했으나 아들 하나를 둔 청상의 과부가 되는 것으로 첫 번째 패배를 맛본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 김약국네 다섯 딸들의 하강의 과정은 어머니 한실댁의 꿈이 하나씩 꺾이어 나가는 슬픈 기록이다.

 

여기서 작가 박경리의 무자비하고도 박력있는 서술은 무시무시할 정도다. 작가는 조금도 얼버무리거나 뭉개지 않고 그 비참을 세밀하고도 박진감 넘치게 묘사해 낸다.

 

김약국의 딸들이 하락하는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가정의 경제적, 도덕적 몰락에서 오는 결과가 아니다. 점점 비참해지는 집안의 모습은 그대로 구한말-일제시대로 이어지는 조선인들의 몰락과정을 연상하게 한다. 김약국은 나라가 망하면서 직업을 잃었고, 넉넉했던 가산을 바탕으로 새로 시작했던 사업 또한 당시 조선인들의 처지와 비슷하게 점점 악화 일로를 걷는다. 조선의 멸망은 김약국의 멸망으로, 김약국의 멸망은 그 딸들의 멸망으로 포커스가 좁혀지는 것 같아도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본다고, 한 집안의 딸들이 몰락하는 과정을 통해 한반도에 사는 서민의 몰락을 집약해 보여주는 것이다.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 딸은 과부, 그리고 영아 살해혐의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 그것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부터가 반대했으니까요. 그는 처녀가 아니라는 험 때문에 아편쟁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어요. 결국 그 아편쟁이 남편은 어머니와 그 머슴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그 가엾은 동생은 미치광이가 됐죠. 다음 동생이 이번에 죽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

(p.408-409)

 

다섯 딸에 대한 한실댁의 꿈과 둘째 용빈이 비참한 현실을 요약해 보여주는 대목은 비교하면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박경리는 이 비참한 하강으로 이야기를 끝내지는 않는다. 김약국이 죽고 통영을 떠나는 용빈과 용혜, 그리고 용빈의 곁에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 강극을 통해 미래의 희망을, 현재로서는 전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희망을 보여준다. 이것이 박경리의 힘이다. 그 무자비할 정도의 박력으로 끝의 끝까지 인물을 몰아 붙이고도 박경리는 새로 시작할 용기를 불어넣는다. 그야말로 끈질긴 생명력이다.

 

인생이란 사철이 봄일 수는 없잖아? 가을이 오면 잎이 떨어지고 한겨울이 오면 헐벗고 떨어야 하지만, 이내 봄이 오지 않니? 희망을 잃어서는 안 돼요.

(p.231)

 

영국에서 온 노처녀 선교사 케이트의 말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한겨울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조선인들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홍섭의 배신을 포함한 집안의 몰락으로 절망하는 용빈에게 그녀는 기다려라, 기다려봐라라고 말한다.

 

소설은 초반에 등장하는 비상 묵은 자손은 지리지 않는다는 저주가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완벽하게 펼쳐놓는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 한자락을 끝내 놓지 않았다. 김약국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통영으로 내려온 용빈은 김약국 사후 통영집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미스 케이트가 한실댁에게 맡겨두고 간 성경을 발견한다. “용빈이, 믿음을 잃지 말아요!” 라는 단 한줄의 메시지. 여기서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지만 이내 봄이 올 거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신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을 지탱하다보면 봄이 온다는 믿음 또한 실현되는 것이다. 이 비참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낙하(落下)는 이 믿음을 통해 낙화(落花)로 변환된다. 끝이 아닌 시작이요 강인한 생명력이다. 한 집안이 어떤 부흥과 몰락을 겪든 통영은 여전히 다도해의 조촐한 어항으로 존재할 것이며 그 어떤 강력한 저주가 내려진다 해도 생명은 여전히 이어질 테니.

 

2025.2.11.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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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1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고등학교 때 읽었는데 그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네요. 오랫만에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곱씹어보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의 연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 형제의 연인들』by 박경리

 

읽은 날 : 2025.1.23.

 

박경리 장편 아홉 번째 소설이다. 이전 장편 소설의 제목은 그 주제를 포괄하고 있기는 하지만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이 소설의 제목은 매우 직관적이고 구체적이다. 이 소설 이후 나오는 김약국의 딸들이 진짜로 김약국의 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식으로 이 소설 역시 그 형제-심인성과 심주성-와 그들의 연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이 직관적이고 구체적이어서 그럴까, 이야기 역시 직관적이고 구체적이다. 그 시대로서는 드물디 드문 저택에 살면서 호화판 댄스 파-아티를 열고, 음대를 다니는 성악가이거나 작곡가, 또는 재벌가 아들이라는 식의 백마 탄 왕자님이나 탑 속 공주님을 잔뜩 등장시켜 로맨스 없는 로맨스 소설같은 느낌을 주던 이전의 이야기와는 달라졌다.

 

그 형제 중 형 심인성은 개인병원을 차리고 있는 내과 의사다. 사랑 없이 적당히 조건 맞춰 결혼한 아내 현숙은 임신 중이고(소설 초반에 딸을 낳는다) 병원은 뭐 썩 잘되는 것 같지는 않다. 동생 심주성은 K대학 독문과 졸업반이고, S대학 약대생인 송애와 집안끼리의 친분으로 혼담이 오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 두 형제의 아버지 심상호씨가 자수성가한 사업가라 집안은 나름 유복한 편이기는 하나 박경리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 치고는 제법 많이 땅으로 내려왔다.

 

첫 사건으로 일어나는 혜원의 맹장염과 인성의 냉정함은 인상적이다. 혜원의 집으로 왕진을 간 인성은 맹장염의 진단을 내리고 수술을 해야한다고 말 해 줄 뿐, 수술비가 없다는 혜원의 동생 혜준의 말에도 냉정하게 돌아선다. 그냥 두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주인공이 이렇게 차갑고 비도덕적이라는 사실(이건 전광용의 꺼삐딴 리나 할 행동이 아닌가.)을 통해 박경리는 인성이 삶만이 아니라 자신조차도 이미 방기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타인의 죽음에 간여하지 않는 태도는 죽음 그 자체에 이미 초탈한 사람만이 취할 수 있다. 인성은 그저 살아 있으니 살아갈 뿐. 그랬던 인성이 정말로 죽음을 목전에 둔 폐결핵 환자 규희를 만나 살아 있음에 집착을 보이며 점점 살아난다.

 

지금까지 인생에 대하여 무관심하려 했던 인성이나 일종의 자학 의식에 사로잡힌 규희나 다 같이 육체보다 어떤 정신적인 환자가 아니었던가. 그 정신적인 환자들이 지금 서로 다가서려 하고 있는 것이다.

(p.103)

 

주성은 형인 인성과는 정반대의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는 세상 앞에 자신만만하고 거칠 것이 없다.

 

산다는 것은 주장이야. 절망을 뛰어넘고 내가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을 주장하는 거지 뭐야.”

(p.133)

 

세상의 인습과 윤리적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연상의 이혼녀, 친구의 누이 혜원을 사랑하는주성은 절망일 때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송애가 오만하다 말을 해도, “이 세상에 내가 나온 것을 주장하는데 어째서 오만하다는 거야?”라 반문할 뿐이다.

 

이랬던 주성도 세상의 장벽 앞에 바스라져 가는 혜원을 위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대신 상대를 위해 양보하는 법을 배운다.

 

이 소설은 그렇게, ‘그 형제가 각각의 연인들을 만나 변화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전 소설에 비하면 특별히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이. 규희의 전 약혼자 상진과 바람을 피우는 현숙에 대해 인성이 보이는 태도는 아, 이 사람이 정말로 변했구나 하는 확신이 들게 한다.

 

재미있는 건, 사랑과 연민에 대한 작가의 변화다.

 

토지에서 박경리는 연민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태도를 길상과 그의 아들 환국과의 대화를 통해 명확하게 보인다.

 

연민은 순수한 애정의 출발일 게다.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마음도 연민일 것이다. 사별의 슬픔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슬픔보다 연민에서 오는 슬픔이 한층 더 진할 것 같구나.”

아버님은 어머님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셨습니까? 어머님은 대단히 강하신 분인데.”

공격하듯 말했을 때,

사고무친한 남의 땅에, 타민족이 오고 가고, 이십이 못 된 천애고아인 처녀가 강했으면 얼마나 강했겠느냐.”

박경리, 토지52(통권17), 마로니에북스, 2012, p.28

 

결혼 연차가 꽤 된 언니들이 웃으며 농담처럼 하던 자는 모습이 불쌍해 보이면 게임 끝난 거라던 말을 실감하던 순간은 박경리에 새삼 감탄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연민은 좀 다르게 쓰인다. ‘인생은 의의 깊은 것이고 의학은 슬기로운 사명의 직업이라 생각해 의사의 길로 들어섰던 인성은 여러 생명의 마지막을 보면서 삶에 대한 의심을 품게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정신을 무장하기 위해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적용했고, 그런 결과가 그의 결혼이었다. 내 삶에 의미가 없는데 아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랴. 그저 적당히 조건이 맞는 사람과 결혼해 살아가려던 그가, 규희를 만나며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버리고 인정과 도덕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아내 현숙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 이전까지의 냉정하기 그지없는 모습과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민은 사랑의 시작이 아니다.

 

연민이라는 감정이 동물 아닌 인간에게 향하여졌을 때 그것은 죄악에 가까운 독선적인 것’(p.350)이라는 그의 말은 서희를 연민하였다는 길상의 고백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길상의 연민은 그대로 사랑이었으니까.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연민하는 대상을 연민하게 되는 이유를 알면서 그 이유를 없애지는 못하는 인성 자신을 죄악에 가까운 독선이라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현숙을 불쌍하게 만들고 있는 사람은 인성이니까.

 

이야기는 여전히 통속성과 우연의 남발을 버리지는 못하고 있다. (자꾸만 만나요, 사람들이, 우연히 우연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 모두가 발을 단단히 지면에 붙이고 움직이고 있기에 긴밀한 구조를 완성해낸다. 기대 이상으로 좋은 소설이었다.

 

2025.1.23.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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