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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by 마쓰이에 마사시
읽은 날 : 2017.8.1.
나는 3.1 독립 선언문을 좋아한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문장이다. 국한문 혼용의 당시(1919년) 문체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이 문장에 관해 최근 김훈 선생도 한 말씀 남기셨다.
이 문장은 완벽하다. 군더더기가 없고 지향점이 선명하다. 주어, 동사, 목적어가 정확한 자리에 배치되어 있고, 주어가 조사를 부려서 문장 전체를 작동시키고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문장 한 개로 정확히 선언하고 있다.
김훈, 『허송세월』, 나남, 2024, p.136, 「조사 ‘에’를 읽는다」
김훈 선생은 이 문장을 고등학교 졸업반 때 배웠고, 한국어의 헐거움이 갖는 기능과 깊이를 사랑하게 되었다(p.136) 하는데,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배웠던 것 같고 그때는 이 문장의 아름다움을 몰랐다. 그저 글자로 된 것이라면 뭐든 줄줄줄 외어대던 시기여서 송강가사들을 외듯 이 문장들도 그냥 외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내가 왼다는 사실을 잊었다.
이 문장을 다시 떠올린 건 아이가 초등학교에서 받아 온 코팅된 안내문 덕분이었다. 한 면에 학교의 한 해 일정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 기미독립선언문이 인쇄되어 있었다. 반가워서 읽어보는데, “이제 우리는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로 시작했다. 내가 아는 그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다. 1919년 당시의 선언문을 이해하기 쉽게 새로 고쳐 쓴 거란다. 이게 아니야, 기미 독립 선언문은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해. 라고 말을 하는 순간(나도 내가 이 문장을 외고 있었음에 황당하긴 했다.) 아이들은 내가 외국어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알아들을 수가 없단다. 알아 들을 수 있든 없든 간에 기미독립선언서는 ‘오등은’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함부로 풀어쓰지 말란 말이다.
나에게 카뮈라는 작가와 『이방인』이라는 작품을 가져다 준 사람은 김화영 교수였다. 불문학자인 김화영 교수의 불어 수준을 내가 평할 방법은 전혀 없으나 그의 한국어 문장은 정말로 아름답고 뛰어나다. 번역문이 아닌 한국어를 ‘부려’ 쓴 평론이나 에세이를 읽다 보면 그가 한국어를 정말 잘 구사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번역가는 외국어에도 능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도착어인 모국어를 잘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 2014년, 이 김화영 교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번역가가 나온다. 이정서다. 그는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 틀렸다 정도가 아니라 엉터리라고 까지 말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1942년 출판돼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최초로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54년, 김송과 이휘영이 각각 대지사와 청수사에서 출간했고 그 뒤 한국어 판본만 60여 종이 나온다. 김화영의 번역은 상대적으로 좀 늦은 1975년이다. 번역가 이정서는 2014년에 김화영의 『이방인』번역을 두고 ‘난해하다’고 평한다. 카뮈의 원문을 볼 방법이 내겐 없어서, 카뮈는 평이하게 썼는데 김화영이 난해하게 번역한 것인지 카뮈가 이미 난해하게 쓴 것을 김화영이 난해하게 옮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1919년의 한국어 문장과 2000년대의 한국어 문장이 이처럼(오등은!!!) 다른데 1942년 프랑스어라고 2000년의 프랑스어와 같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하지 못하겠다. 카뮈가 난해하게 썼다면 잘 읽히지 않더라도 난해한 문장이 나는 좋다.(근데, 『이방인』이 난해한가요....;;;;)
나는 민음사에서 1998년부터 발간하기 시작한 세계문학전집을 모으고 있는 중인데,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의도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권 변신이야기 책 뒷표지에서 가져옴>
굳이??? 새로 쓰지 왜. 이에 대해 번역가 정역목은 “원작은 가만히 있는데 번역은 왜 시대마다 새롭게 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간단한 건 아니죠.” (김혜리 인터뷰 모음집, 『진심의 탐닉』, 씨네21, 2010, p.322 「“세상 모든 일이 번역인지도 모르죠”-번역가 정영목」)라고 말한다.
외국어를 하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번역가들의 존재가 참으로 감사한데, 나는 가능하면 원문을 원문 그대로 옮겨주는 번역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대로 ‘번역은 설명이 아니잖아요? 원문 풀어쓰기도 아니고요.’(p.318) 역시나 원문과 번역문을 비교 대조할 능력은 없어서 그가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번역가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은 없으나 그가 하는 말에 기대어 그의 번역을 신뢰하는 거다.
(김)-번역문이 술술 읽혀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가하면 반대쪽에는 번역문은 원문쪽으로 끌어당겨서 쓴 이질성이 있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던데요.
(정)-저보고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번역스러운 번역쪽을 택하겠죠. ‘번역투’가 나쁘다는 것이 통념인데, 왜 나쁘냐고 반문할 수 있거든요. 번역인데 번역투가 아니라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요? 가만보면 몇몇 분열적인 직종이 있어요. 번역은 번역이 아닌 것처럼 보여야 칭찬받고 연기는 연기가 아닌 것처럼 보여야 호평받고. 정신건강에도 안 좋은 겁니다. (좌중 웃음) 옛날엔 실물과 똑같다는 것이 그림에 대한 칭찬이었지만 달라졌잖아요. 저는 번역의 매끄러움에는 집착하지 않습니다. 번역의 완성도와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김혜리 인터뷰 모음집, 『진심의 탐닉』, 씨네21, 2010, p.318 「“세상 모든 일이 번역인지도 모르죠”-번역가 정영목」
이렇게 말하는 정영목도 인터뷰 후반에 가면 결국은 “아닌 척하고 싶지만 투명한 체하고 싶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번역자의 무엇인가가 책 속에 남을 겁니다”(p.326)이라고 인정하고 만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아니 더 정확히는 당연한 일이겠지.
자. 돌고 돌아 다시 김춘미와 마쓰이에 마사시.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처음 읽었을 때 곧이어 떠오른 문장은 박경리의 『토지』에서 조찬하가 했던 생각이다.
일본인들 중에는 당신 같은 로맨티시스트가 더러 있지요. 그것은 벚꽃 같은 게 아니고 산간의 흰 백합 같은 것이오. 선량하고 깨끗하고 미적 감각이 예민하고,
박경리 『토지』4부 1권(통권13), 마로니에북스, 2012, p.191
일본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라고 말을 하려다보니 일본 작가의 책을 읽기는 엄청 읽었다. 민망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고 미야베 미유키도 좋아해서 전작 중이다. 요시모토 바나나도 좋아하고 에쿠니 가오리도 좋아한다. 교코쿠 나쓰히코는 어떻고. 국가별 섹션으로 나누자면 한국 작가 다음이 일본 작가일 정도로 책장 지분도 높다. 음, 이제 일본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안 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문학 기저에 깔려있는, 한국과는 다른 이질적인 어떤 정서같은 것에는 늘 저항감을 느낀다. 이건 감각으로 분류하자면 촉각의 영역에 들어갈 거다. 뭔가 끈적하고 찝찝하고 질척한 느낌. 때때로 가장 비일본적인 작가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에서도 그 끈적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일본 작품을 그렇게 많이 읽으면서도 여전히 일본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라고 중얼대게 되는 바탕에는 그 묘한 음습함이 있다. 이건 뭐가 어째서 그래요, 라고 구체적으로 딱 집어 말할 수가 없다. 그냥 느낌이다. 캘리포니아가 비치보이스의 Surfin’ U.S.A.를 흥얼거리며 그늘 한 점 없이 화창한 해변을 떠올리게 한다면 일본은 늘 내게 사철 빛이 들지 않는 북향의 어느 축축한 습지를 떠올리게 한다. 문학으로 접한 일본은 그랬다. 재미와 상관없이.
그러다 마쓰이에 마사시를 만나게 된 거다. 와. 매우 일본스러운데, 전혀 일본스럽지 않았다. 박경리의 말대로 “선량하고 깨끗하고 미적 감각이 예민”한 작품이었다. 습기 가득한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데도 특유의 질척거리는 축축함이 빠진.
무라이 설계사무소에 새로 입사하게 된 젊은 건축가와 특유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노년의 건축가의 이야기. 거기에 건축과 건축가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가 맞물리면서, 전체 이야기를 끌고가는 큰 축으로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이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튀지 않고 제 자리에서 조화롭게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와, 이 소설 너무 좋은데, 1958년생 작가의 첫 작품이라니 경이롭기까지 했다.
별로 오래 기다리지 않고 마쓰이에 마사시의 두 번째 작품이 나왔다.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이다. 음. 이건 전작만 못한데? 세 번째 작품이 나왔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다.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그 선량하고 깨끗하고 예민한 느낌은 어디로 간 걸까.
작가를 열심히 따지는 것에 비하면 번역가를 별로 인지하지 않고 책을 읽는 편인데, 이번에는 드디어 번역가를 보게 되었다. 세 권의 번역가가 다 다르다. 그리고 김춘미.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인데, 하다 기억이 났다. 나를 하루키 월드로 인도한 그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번역했다. 나 번역가 따지는 사람이었구나. 『해변의 카프카』는 내가 처음 읽은 하루키의 작품은 아니나 하루키를 전작하게 만든 작품이고, 나는 아직도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는 『해변의 카프카』가 제일 좋다.
그래서 김춘미가 번역한 마쓰이에 마사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내, 어디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김춘미 샘은 이미 작년에 마쓰이에 마사시의 작품 두 권 번역을 완료해 출판사에 넘겼다고 한다. 어느 출판사인지 모르겠지만 어서 내놓으시라.
ps. 내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와 비슷한 느낌의 책으로는 조지수의 『나스타샤』(지혜정원, 2008)와 야마시타 나츠의 『양과 강철의 숲』(예담, 2016)이 있다. 마쓰이에 마사시를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이 두 권도 읽어보시길. 아마 좋아하게 될 겁니다.
2025.1.22. by ash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