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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진 들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노을진 들녘』by 박경리
읽은 날 : 2024.12.01.
‘사주 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건 사실 틀린 전승이고, 정확한 표현은 “산천 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 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고 자란 산천(환경)에서 도망쳐 본들, 사람은 결국 제 운명대로 살게 마련이란 소리다. 그 틀린 전승의 시작이 무지의 소산이었다 해도 ‘말’은 언제나 그 자체의 힘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이 ‘산천 도망’이라는 말 대신 ‘사주 도망’이라는 말을 쓰게 된 데는 그 말이 가진 힘이 주효했다. 운명에 대한 거부. 우리가, 인간이 정해진 운명대로만 살아간다면 그래서 모든 것은 이미 정해진대로 흘러가는 것이라면 사람이 산다는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 로마 신화로 시작하는 모든 서사는 그 운명을 거역하고자 하는 인간(또는 신-그리스 로마신화에서는 신조차도 그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이 끝내 그 운명에 패배하는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 그런 말도 있다. “성격이 팔자다” 라는. 타고난 사주와 상관없이 자신의 성격이 자신의 운명(팔자)을 바꿔놓게 된다는 말이다. 흔히들 하는 말로 ‘지팔지꼰(지 팔자 지가 꼰다)’ 이라는데 타고난 사주, 운명과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만들어 간다는 뜻 정도로 읽힌다.(주로 나쁜 쪽일 때.)
박경리의 소설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절손 모티프’ 이다. 더 정확히는 부잣집의 유산과 함께 보호자 없이 홀로 남겨진 여아 하나. 박경리가 처음 토지를 구상하게 된 배경도 그 절손 모티프와 관련이 있다.
외갓집은 거제도에 있었어요. 거제도 어느 곳에,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까지 거둘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미 호열자가 그들을 죽음으로 데리고 갔지요. 외가에 사람들이 다 죽고 딸 하나가 남아 집을 지켰다고 해요. 나중에 어떤 사내가 나타나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객주집에서 설거지하는 그 아이의 지친 모습을 본 마을 사람이 있었대요.
《작가세계》통권22호 1994.가을, 박경리 특집, <삶에의 연민, 恨의 美學(송호근-박경리 대담)> 중, 세계사, 1994. p.47
박경리가 어릴 때 들은, 실화라는 이 이야기는 토지 뿐만이 아니라 박경리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모티프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도 그 절손 모티프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학병을 나가서 죽었고, 엄마는 고모와 함께 기차사고로 죽어버린 주실은 홀로 남은 할아버지와 함께 시골의 과수원에 산다. 이 할아버지는 그 과수원이 있는 동네의 대지주이자 왕과 같은 존재다. 할머니와 단 둘이 남은 서희와 주실은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이지만(최서희의 대척점에 주실이 있다, 다만 박경리의 주인공답게 외모가 최상급이라는 사실만은 공통적이다) 언젠가 혼자남은 이 여자아이가 물려받게 될 유산을 노리는 존재가 있고, 그 유산을 차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혼인을 쓴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서희는 병수와의 혼인을 피해 간도로 도망을 갔고, 주실은 도망치지 못했지만.
그 외에도 침모 봉순네를 연상시키는 침모 영천댁과 수동이 또는 김서방을 연상시키는 박서방이 등장하고 임이네를 연상시키는 김서방댁과 삼수를 연상시키는 성삼까지 등장한다는 점에서 토지와 연결지을 수도 있는 소설이었다 싶지만 토지와는 전혀 다른 소설로 읽힌다.
우선 박경리 초기 장편이 가지고 있는 끝도 없는 우연의 남발은 이 소설에서도 이어진다. 뭐가 우연인지 꼽을 필요도 없이 이 소설의 전체 사건이 우연히, 어쩌다보니 그렇게. 라는 말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우연히 버스에서 만난 여자가 알고보니 친구의 동료요, 직장 상사댁의 가정교사로 연결된다거나 신혜가 우연히 터미널에서 만난 어리숙한 촌년이 알고보니 주실이었다거나. 주실, 동섭, 신혜가 밥을 먹는 식당에 마침 성삼이 들어온다거나. 나중엔 슬몃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와중에도 이 소설을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서 단단히 땅으로 끌어내려 고정시키는 존재가 성삼과 김서방댁이다. 그야말로 ‘그럴싸’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과 태생을 빗대면 그들의 언행은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게 된다. 도대체 왜 그러니, 제발 좀 정신차릴 수 없어? 라고 중얼거리게 되는 나머지 인물들에 비하면 그 모자는, 응응, 당신들은 그럴만 해. 라고 수긍하게 된다.
여기서 토지와 이 소설이 다시 갈리는 지점이 나온다. 위에서 운명(숙명)과 팔자, 성격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토지의 인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악스레 거부하는 인물들이다. 그야말로 기를 쓰고 자신의 운명을 극복해 보려고 애를 쓴다. 절에 버려진 아이, 주인댁 아씨의 머슴이었던 길상이 그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서희의 남편이 되고자, 서희가 낳은 아이들의 당당한 아버지가 되고자 간도에 남아 독립운동에 투신해 자신의 신분을 바꾸려 한다거나, 서희가 절손을 극복하고 자신의 아들 둘에게 최씨 성을 붙여 최참판댁을 재건한다거나. 강간을 당해 임신을 했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종결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 한 집안의 가모로서의 자리를 지켜낸 윤씨부인이라든지, 무당의 딸, 백정의 사위. 끝도 없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딴지를 거는 운명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일정한 성취를 이루어 낸다. 그야말로 운명과 싸워 이기는 것이다.
그러다 이 소설로 돌아오면, 아, 이 무기력한 사람들아.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주실도 영재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극복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데, 독자도 스스로 노력하는 인물을 응원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래서 독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을 연민할 수는 있으되 사랑할 수는 없고, 나중에는 그 연민조차 화로 바뀐다. 성격이 팔자라, 지 팔자를 지가 꼬고 있는 것이다. 그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성격 탓에 그들의 운명은 점점 더 나락으로 나아간다.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한 원숭이같이 자란 주실이야 그래, 못배웠으니 어쩌겠니 한다쳐도. 영재의 행동은. 흠.
소설은 끝내 살인과 자살로 끝이 난다. 파멸과 파국이다. 산천도망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당연히 팔자도망에도 실패했다. 작가로서도 이렇게밖에 끝을 낼 수 없었겠다, 싶다.
그 와중에도 소설은 진보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인물들이 좀 더 구체적이고 개별화된다. 우연성의 남발이라는 단점은 여전하지만 사건이 속도감있게 진행되어 소설을 읽는 재미는 있다. 그야말로 글빨이란 이런 것.
ps. 오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고 해서, 오타가 없다고 오해는 마시라. 마로니에 사장님, 분발하시압!!!! 이 책에서는 오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시죠? 9쪽 "가려면 아직도 삽십 분은 더 걸어야 했다" 라는 문장이 두 번 반복됩니다. 이러지 마세요, 정말.
2024.12.7. by ash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