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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도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은 날 : 2024.10.30.
소설가는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박완서의 첫 책 『나목』이 그 좋은 예다. “1.4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박완서, 1976년 열화당 판 『나목』의 작가 후기- 2012년 세계사판 『나목』의 서문에서 옮겨옴)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박완서는 그(박수근 화백)가 작고한지 몇 년만에 열린 유작전을 보고 ‘제기랄’ 이라고 중얼거린다. ‘그가 제대로 평가받는 데 대한 기쁨과 놀라움이 클수록 그의 생전의 가난이 억울했고, 한 예술가의 운명에 대해 비감을 금할 수가 없’었던 박완서는 ‘그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걸 증언’ 하고 싶어 그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마침 종합 월간지《신동아》에서 일년에 한번씩 실시하는 논픽션 모집 마감일이 임박했던 때였다. 그러나 글은 잘 써지지 않았다.(따옴표 박완서 문학앨범에서 발췌)
그의 전기를 쓰는 데는 거짓말과의 싸움 말고도 또 난관이 있었다. 자꾸만 내 얘기가 하고 싶은 거였다. 도처에 투사된 내 모습도 그의 전기를 순수치 못하게 했다. 자꾸만 끼어들려는 자신의 모습과 거짓말을 배제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걸 완전히 배제하면 도무지 쓰고 싶은 신명이 나지 않았다.
박완서,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박완서 문학앨범』, 웅진지식하우스, 2011, p.50-51,「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中
결국 박수근 화백의 전기를 쓰려 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욕망이 훨씬 강했기에 박완서는 논픽션 대신 픽션을 쓰기 시작하고, 《신동아》가 아닌 《여성동아》장편소설 모집에 응모해 당선이 된다. 습작품 하나 없이 처음 쓴 소설이 『나목』이라니, 이분은 소설을 쓰려고 태어났어요.
박경리도 비슷한 노선을 걷는다. 단편 「계산」(1955)「불신시대」(1957)로 시작되어 이 소설 『표류도』에서 박경리의 ‘내 얘기’는 절정을 이룬다. 바람잡아 본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본 아버지, 본격적인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쪽과 약간의 관련을 가지고 있던 남편이 전쟁통에 죽어버린 전쟁미망인. 어머니와 어린 딸의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 높은 학벌과 그보다 더 높은 지적 능력, 뛰어난 미모. 기승하고도 결벽스런 성격. 어머니와의 성격 차이로 인한 불화. 주인공 강현회가 처한 상황은 그대로 당시의 박경리가 처해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심지어 여학교 시절 담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1년간의 휴학을 감행해 버리거나 훗날 『토지』에서 용이의 손녀 상의의 에피소드로도 변주되는 여학교에서 일본인 하급생과 S(여학생들끼리의 플라토닉한 연인관계)를 맺는 편지를 썼다가 징계를 받는 이야기 등은 박경리 본인의 에피소드이기도 했다.
이 소설이 흔한 불륜 연애소설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은 자신의 불륜에 움츠러들기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 앞에 당당한 현회의 사고思考덕분이다. 유부남 상현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현회는, 상현의 아내를 만난 뒤에도 자신이 불륜녀라는 사실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사회제도에 대한 굴복이기보다 한 여성에 대한 패배였으며, 역시 상현 씨와 나 사이에는 메워질 수 없는 풍토적인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다시 인식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상현 씨한테 가장 적합하고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다. 그 여자가 지닌 교양과 인품은 상현 씨가 가진 그것과 흡사하다.
p.108
‘사랑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사랑은 그 사람의, 상현 씨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범하지는 못한다.’(p.106)고 사랑과 관계 그 자체를 분리해서 생각했던 현회다. 남편을 뺏고 뺏기는 문제와 사랑의 문제는 별개인 것이다. 그래서 현회는 상현과의 사랑을 두고 남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내 것이기에. 그런 현회를 굴복시키는 건 ‘상현의 아내’가 아닌 ‘수정’이라는 한 여성 그 자체다. 현회 본인보다 훨씬 상현과 조화를 이루는 여자라는 것이 현회를 괴롭게 한다. 그래서 끝내 현회는 상현의 애정을 쟁취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
“나는 억지로라도 현회의 애정을 빼앗을 거야. 현회는 왜 못해, 응?”
“죽어도 아니하겠어요. 세상이 무너져도 그것만은 아니하겠어요.”
“자존심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선생님 마음속에 미운 여자로 남겨두지는 않을래요.”
p.143
자존심이 아닌 열등감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모습에서 현회의 당당한 자존이 읽힌다. 이미 상현의 아내 수정을 봐 버린 뒤다. 빼앗아 올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사람의 조화를 자신은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애정에도 염치가 있어야 한다. 항상 애정을 강요하던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어느새 나를 소심하게 조심스럽게 만든 것이다. 만일 나의 연인이, 그리고 내 딸이, 나에게 의무적인 또는 동정이나 강요에 못 이긴 포용(이거 포옹의 오탈자 아닐까요.... 마로니에 사장님.)을 했다고 하자. 그것은 기막히는 일이다’(p.74) 라는 현회의 마음 그대로, 조화롭지 못한데 사회적 제도가 맺어준 ‘부부’라는 이름에 묶여 상현의 애정이 의무, 동정, 강요의 결과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을 현회의 결벽성은 용납할 수 없다.
박경리가 그리는 사랑은 늘 그런식이다. ‘머리카락 한 오라기까지도 나 아닌 누구에게도 줄 수 없고 그의 순간적인 생각까지도 나로부터 비켜서는 것을 원치않는 강한 독점욕,’(p.198) 그러나 그 독점욕의 이면에는 ‘상반된 환경과 관점과, 그리고 서로 흡사한 소심한 선의식으로 하여 차츰 애정이 파괴되고 말 것이라 예감하는 나의 총명’(p.199)이 있다. 세상의 시선따위는 무시할 수 있으나 내 내면의 분별력이나 도덕적 장벽은 넘어설 수가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현회는 ‘그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순간을 태연히 기다리고 있는’ 연애를 한다. 그리고 이 총명한 분별이 이 글을 흔해 빠진 불륜 연애소설이 아닌 인간과 사랑의 본질을 탐구하는 소설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애정이 없으면 생활이 허물리어 버리듯이 생활이, 생활감정이 다르면 애정도 허물려 버려요.’(p.166)와 같은 통찰은 내가 이래서 박경리를 읽는구나를 새삼 느끼게 한다. 그래서 끝내 박경리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쓰지 못하는 것이다. 계층이 다른 사람들의 결합이 어떻게 끝날지를 알거든.
이 책에서는 이후 박경리 소설에 여러 가지로 변주되어 등장할 인물과 사건의 씨앗들이 곳곳에 흩어져있다. 훗날 기화(봉순이)가 되어 나타나게 될 아버지의 첩 이야기나 걸핏하면 목을 메고 죽는 시늉을 해 자식을 괴롭히는 어머니의 이야기(이 에피소드는 『토지』에서 송관수가 만난 한 보부상의 에피소드로 변주된다.). 그런 장면을 보는 만큼이나 이름 돌려막기도 반가웠다. 바로 전 소설에 조연으로 등장했던 강현회라는 이름을 박경리는 고스란히 가져다 쓴다. 이름을 짓는 게 귀찮으셨거나 강현회라는 이름이 정말로 마음에 드셨거나. 뭐, 사소한 재미였다. 더불어 표류도 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가 대체 뭔가 많이 고민했는데 후반부에 가면 나온다. 표류하는 섬(島), 인간들은 대부분 그렇게 표류하며 지향점을 가지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섬, 외로운 단독자인 거다.
현회는 사촌오빠가 데려다 준 밀물이 되면 물 속에 잠겼다가 썰물이 되면 드러나는 섬에서 생애 최초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살고싶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죽음이 코 앞으로 닥쳐올 때, 인간의 가장 진실한 삶에 대한 의지가 드러나는 법, 현회는 단독자의 삶을 꿈꾸었지만 진실로 단독자가 된 순간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 먹는다. 다행이에요, 행복하세요, 현회씨. 라고 중얼거리게 되는 통속적 결말이지만, 그들의 결합은 신데렐라와 왕자님의 유리구두를 매개로 한 결합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가지고 올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아, 다행이다.
당신의 정절(貞節)보다 나의 배덕(背德)이 훨씬 위대하다.
p.163
그렇죠, 그렇죠, 쌤, 제가 그래서 쌤 책을 읽어요! 이런 구절 때문에.
2024.10.31. by ashima
ps. 나는 마로니에판 토지 전질을 샀고, 이 책 표류도를 읽으며 이미 두개의 오탈자를 발견했다. 에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