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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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프랜시스by 마쓰이에 마사시

 

읽은 날 : 2025.8.21.

 

소설의 첫 장면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오필리아를 떠올리게 했다. 물길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시신을 묘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마쓰이에 마사시라니. 스릴러라도 쓰시려나 싶다가도 띠지의 광고문구가 걸렸다. ‘섬세한 연애소설이란다. . 그렇군.

 

30대 중반의 미혼여성 무요 게이코는 동거하던 남자와 헤어지고 도쿄에서의 생활을 정리한 뒤, 아니 이 부분은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명확히 설명하자면, 남자와 헤어졌기 때문에 도쿄 생활을 정리했다기 보다는 도쿄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그다지 뜨겁지도 않던 동거남과 결별을 택한 쪽에 가깝다. 그렇다고 그 과정에서 상처받지 않았는가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아니고. 마쓰이에 마사시 인물 특유의 무덤덤함이라고 해야하나, 과하게 섬세하기에 오히려 대범하게 구는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도쿄를 떠나기로 한 게이코가 선택한 곳은 홋카이도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중학교 시절 3년간 홋카이도의 에다루 라는 곳에 살았었고, 그것을 한줄기 연고로 삼아 사회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또다시 에다루 옆 소도시 안치나이를 찾아 그곳 이주민(더 정확히는 이주 정착민’)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끝내 기억이라는 연고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홋카이도의 안치나이 마을로 이주에 성공했다.

 

30대 중반, 지지부진한 연애는 끝났고, 적당히 모인 돈도 있고, 내가 아는 이도, 나를 아는 이도 없는 전혀 낯선 곳에 가서 조용히 살 수 있는 배짱이 생길만한 나이도 되었고. 형태가 정해져 있고 그날 그날 끝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던 게이코는 안치나이 마을 우체국의 비정규 배달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도쿄에서의 월급에 비하면 형편없이 적은 금액이지만, 집값을 포함한 모든 물가가 대체로 도쿄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저렴한 곳인지라, 처음엔 5년을 이렇게 살아갈 수 있겠다 예상했다가 거기에 2년 정도를 더 붙여도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계산적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아는 자의 선택이다.

 

이런 그녀에게, 일 조차도 손에 잡힐 듯 형태가 정해져 있고 시작과 끝이 선명한 것을 하고 싶어 했던 그녀의 앞에 테라토미노 가즈히코가 등장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밑도 끝도 없이 “‘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 여기에서 프랜시스와 살고 있”(p.39) 다고 설명하는.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을 듣는다고 하고, 누가 들어도 여자의 이름일 수밖에 없는 프랜시스와 살고 있는 이 남자의 접근은 대범하고 당돌하다. 20대에는 필수적인 과정으로 여겨졌던 밀고 당기기의 과정이 산뜻하게 생략되어 버린 시작을 성급한 정열의 탓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저돌적으로 덤비는 가즈히코를, 게이코는 다소 두려워하면서도 순순히 그 손을 잡는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정확히는 이 사람이 포함된 내일을 꿈꾸고 계산하지 않기에 밀고 당기는 탐색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감정만을 남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연애일 수 있겠다.

 

우리 집 전기는 여기에서 만든 걸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갓 태어난 새 전력.”

왜 가즈히코가 그렇게 우쭐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디오라는 것은 전기의 순도에 따라서 음질이 완전히 달라지거든.”

전기에도 순도라든가 불순이라든가, 그런 게 있는 거야?”

물론이지. 벽의 콘센트는 전용 콘센트를 쓰는 게 좋고, 집 안에서도 고급 전기를 쓰지 않으면 안 돼.”

고급?”

다른 방을 돌아서 즉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나 에어컨에 뺏긴 뒤의 하급 전기로는 음이 탁해지거든. 그러니까 까다로운 사람은 벽의 콘센트 같은 것을 쓰지 않고, 전봇대에서 직접 전기를 끌어오기도 해. 웃기는 소리 같지만 내가 직접 귀로 듣고 확인 한 거니까 사실이야.”

(p.79)

 

이것이 소설적 허용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지만(막 귀인 나로서는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어떤 경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전기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고급 전기의 이야기는 이 둘의 연애담과 닮아있다.

 

가즈히코와 연애를 하던 초반, 게이코는 다시 한 번 오필리아의 악몽을 꾼다. ‘가라앉는오필리아와 끝내 가라앉아 그 생을 다하는 프랜시스. 그리고 불순물이 섞여들며 변질되어가는 그들의 연애는 계속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마쓰이에 마사시의 두 번째 소설이라고 한다. 한국에 소개되기로는 네 번째 소설이지만, 집필 순서로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집필한 후 쓴 두 번째. 그래서 두 소설의 인물이나 분위기는 여러모로 많이 닮아있다. 이건 김춘미라는 번역가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입혀지는 이유일 것 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불순물을 모두 제거한, 아름다움.

 

2025.9.3.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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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리 테일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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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리 테일by 스티븐 킹

 

읽은 날 : 2025.8.20.

 

2020-2022년은 정말 이상한 해였다. 중국 발 코로나 19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모든 일상이 멈췄다. TV를 켜면 오늘 발생 확진자 몇 명의 뉴스가 뜨고, 등교와 출근이 멈추고, 하얀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한 병원에 마스크를 구입하기 위해 길게 늘어섰던 줄, 봉쇄되었다고 소문난 중국의 도시와, 그 도시의 입출구를 지키고 서 있던 군인, SNS를 통해 중계되던 참상과 괴담들. 방역복을 구하지 못해 쓰레기 비닐을 뒤집어 쓰고 진료를 보던 미국(그때나 지금이나 세계 최고로 부유한 나라, 그 미국)의료진의 사진과 뉴욕 거리에 줄줄이 늘어놓았던 바디백들. 냉동탑차에 가득차 있다는 시신의 소문. 이태리 신문의 1면을 빼곡이 채웠던 사망자의 명단들.

 

그 와중에 대한민국은 그나마 이 코로나 19라는 낯선 전염병을 잘 콘트롤 했다. 몇몇의 영웅이 탄생했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거하게 끌어올랐다. 그 틈새를 뚫고 개신교는 여전히 지랄염병(이건 지랄염병이라는 표현 이외에는 쓸 말이 없다. 이런 때 쓰라고 지랄염병이라는 단어가 나왔나 싶기도 했다)을 떨었다. 그들이 믿는 신은 얼마나 무능하기에 그들이 다니는 교회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했다. RNA 백신이라는 것에 대하여, 바이러스와 세균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하여 전 국민이 공부를 하던 때이기도 했다. 바이러스가 과연 생명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 대하여, 인류가 바이러스에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하여, 정보가 곧 생명체가 되는 현상을 실시간 목도하며 세상은 실시간으로 변화해 나갔다. 아직은 한참이나 멀었으리라 했던 온라인 수업이 급히 도입되었고, 재택근무도 빠르게 정착되었다. 학교에서는 온라인 수업을 하는데 학원에서는 대면 수업을 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흔했다.

 

20217, 충무공이 덜컥, 밀접 접촉자 판정을 받았다. 졸지에 한 집에 같이 살던 나와 중학생 딸아이 둘도 자가 격리 2주 판정을 받았다. 한창 코로나 변이 델타가 위용을 부리던 시기였다. 구청에서 자가 격리 키트가 왔다. 햇반과 3분 카레, 소독제 등등이 들어있던 박스가 네 개. 남편과 둘이 엘리베이터도 타지 못하고 계단을 걸어내려가 보건소로 갔다. 기나긴 줄의 끝에 붙어서서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그렇게, 자가격리 13일만에 충무공은 증상이 발현되어 생활치료시설로(그나마 증상이 경미하단 이유로) 구급차를 타고 갔고, 집엔 방역복을 입은 소독요원이 들이닥쳐 남편이 있던 방에 소독제를 들이 붓다시피 뿌리고 갔다. 그리고 남은 나와 아이들은 추가로 다시 14일의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이전의 13일을 포함하면 한 달에 가까운 격리였다. 성동구청에서는 자가격리 키트를 또 보내주었다. 이번엔 시리얼도 들었던가. 격리 20일이 다 되어갈 때쯤 낯선 전화도 받았다. 성동구청 직원이란다, 니가 자가격리를 충실히 하고 있는지 보러왔으니 현관문을 열고 얼굴을 보이란다. 아이들도 마찬가지. 직원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고개만 내밀고, 우리 셋도 현관문을 빼꼼히 열어 얼굴만 보였다. 이후 유해진 격리 지침들을 생각해 보면(격리 일수가 10, 7일로 줄었고, 증상이 나와도 경미한 경우 가정 요양이 가능해졌다. 어떻게 아느냐면, 이후에 큰놈이 학교에서 또다른 변이 코로나 오미크론에 걸려왔고, 이어 충무공 회사에서 확진자가 나왔고 등등) , 그러고 어떻게 버텼나 싶게. 코로나는 그야말로 전 지구적 사태였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은 너무나 익숙한 단어였다. 4인 이상 모임금지. 크리스마스와 명절이 사라진 몇 해였다.

 

14세기,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쓰여졌다. 피렌체 공화국에서 발생한 흑사병을 피해 교외로 피신한 10명의 남녀가 열흘간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형태의 소설이다.

 

그리고 공포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은 이 전지구적인 사태를 맞아 집에 들어앉아 혼자 소설을 썼다. 질병이 만연한 나라를 구하러 가는 찰리 왕자의 이야기를. 카뮈가 페스트를 쓰고, 다니엘 디포가 전염병 연대기를 쓴 것처럼. 코로나 시기에 쓰여진 페어리 테일이 질병으로 몰락해 가는 나라를 구하러 가는 페어리 테일인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소설은 스티븐 킹의 이야기답게 박진감 넘치고 섬세한 묘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말로 딱 스티븐 킹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

 

결국, 인간이 어쩌해 볼 수 없는 사태를 구원하는 것은 이야기인 것이다. 찰리 왕자는 우물 속 동화의 세계를 구했고, 스티븐 킹은 코로나 속 인류를 구했다. 그 이야기의 힘으로.

 

2025.8.21.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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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21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고 초반에 확진 판정 받아 고생하셨어요. 저는 거의 끝날무렵이어서 상대적으로 좀 편하게 격리했었는데요. 이 책이 코로나시절에 질병으로 몰락해가는 나라를 구하러 가는 왕자 얘기라니 설정은 좀 유치한데 스티븐 킹이니까요
당연히 재밌을거같아요

아시마 2025-08-21 19:11   좋아요 1 | URL
그 유치한 설정마저 이겨내는게 스티븐 킹이죠. 재미있습니다. 이 작가 이세계 탐험물을 곧잘 쓰잖아요? <리시 이야기>의 ‘부야문’ 도 떠오르고.

초창기 감염이라(전 감염 안됐습니다만 ㅎㅎ) 자가 격리 지원금도 꽤 쎘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 4인가족기준 14일 상한으로 140쯤 받았어요. 이듬해 오미크론에 큰놈이 걸려왔을 땐 100만 주고 그 뒤론 안주더라고요. ㅎㅎㅎ 저 제 주변에선 코로나로 나랏돈 젤 많이 받은 여자. ㅎㅎㅎ
 
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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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에 마사시와 김춘미의 만남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요. 제가 일본문학 번역가를 처음으로 인지하고 이름을 확인하게 한 사람과 작가가 김춘미와 마쓰이에 마사시죠. 최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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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에 마사시 x김춘미 가
비채에서 8/18 출간예정이란 알람이 떴어요!!! 제목은
<가라앉은 프랜시스>래요!!!

김춘미 샘 번역의 마쓰이에 마사시(aka.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를 좋아하신다면 기대하시라!!!

Ps. 출판사 님하, 저 분명 두편 넘겼다 들었습니다만?????

Ps2. 출판사에서 올린 작가 파일을 보니 <거품> 이라는 낯선 제목뒤에 (비채근간) 이라 꼬리표 단 거 보니 곧 나오는 건가요???

일해라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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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 이후북스 책방일기
황부농 지음, 서귤 그림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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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by 황부농

 

읽은 날 : 2025.7.28.

 

작년 여름의 끝물에 읽은 책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는 전국에 있는 작은 책방들의 탐방기이기도 했다. 전국 각지의 작은 책방들을 소개하는 그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책방이 아니다)은 제주도의 작은 책방을 소개하는 중에 있었다.

2011, 서울 살던 젊은 부부는 제주도에 내려와 게스트 하우스를 연다. 아이까지 낳고 제주에 정착해 살아보려 하니 가장 아쉬웠던 게 책을 맘껏 사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단다. 그래서 서울에 사는 친구와 동업으로 제주에 책방을 연다.

 

그리하여 서울에 있는 여자와 제주에 살고 있는 여자가 몹시도 소심하게, 만일 책이 팔리지 않으면 우리 둘이 나눠 갖자는 마음으로 책방 문을 열었다.

백창화, 김병록 ,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남해의 봄날, 2015, p.155

 

소심하게 연 책방이라 책방 이름도 <소심한 책방>이다. 하하하

이런 마인드로 살아갈 수 있다면, 산다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이 서울 부부가 제주에 내려와 게스트 하우스를 열게 되기 까지의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그 이후 흘러가는 사고와 사건의 흐름은 유쾌하다.

책 사기가 어렵네? 그럼 내가 팔지 뭐.

혼자 열 용기가 안 나는 데? 그럼 친구랑 같이 동업하지 뭐.

책이 안 팔리면 어쩌지? 그럼 동업자랑 둘이 나눠 갖지 뭐.

이 심플하고도 유려한 생각과 실천의 결합이라니. 책방을 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샀을 책을 책방을 한다는 이유(핑계)로 당당히 사게 될 때는 분명 통쾌한 맘이 들었을 거다. 세상과 나에게 당당해지는 그 기분이란,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배웠다. , 책방을 하게 되면 책을 당당히 구매할 수 있겠구나, 하는. 책방을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기억이란 참 재미있는 것이어서, <소심한 책방>이라는 이름은 잊었는데 그들의 그 소심하고도 당당한 한마디 팔리지 않으면 우리 둘이 나눠 갖자”(‘내가가 아닌 우리 둘이라는 데서 오는 이 가벼움이라니. 망해도 나 혼자 망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걱정.)만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그 주변의 정보들을 희미하게 지워 나갔다. 여성, 제주, 친구 이런 정보들이 그 유쾌한 문장의 그림자처럼 남았다.

 

그러다 이 책을 읽었다. 황부농 이라는 책방지기가 상냥이라는 친구? 동업자와 함께 (우리 둘!) 망원동에서 독립서점을 열었단다. 이 친구의 글을 읽다보면, 제주에서 뭔가를 하다 망... 했고(아닐수도 있고, 어쨌든 제주의 일을 접고) 서울에 올라와 책방을 한다고 정리되었다. 여성이고, 제주고, 책방지기. 기억이 내 맘대로 조작되기 시작한 거다.

 

그러니까, 제주의 <소심한 책방>은 내 맘대로 이미 망해 버렸고, (하하하, 죄송합니다. 제주 <소심한 책방>2025.8.2. 현재 아주 성업중인 듯 합니다, 검색결과.) 그 책방을 하던 친구 둘이 그 책들을 사이좋게 나눠가지는 대신 서울로 이고 지고 올라와 망원동에 책방을 열었구나, 하고 내 맘대로 남의 가게 사연을 조작해 버린 거지. 아니, 어쩌면 제주에서 서점이 너무 잘 되어서 서울로 진출하기로 한 것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도 하며.

 

그런 가슴이 아플수도, 가슴이 웅장해 질 수도 있는 내 맘대로의 사연이 있는 작가의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으면서, 남편과 종알거렸다. 정확히는 내가 생각하는, 언젠가는 내가 열지도 모르는 책방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이후 북스에서는 커피와 자몽에이드를 판단다. , 카페와 책방을 겸하고 있는 모양이다. 책과 음료란 독자 입장에서 잘 맞는 커플인 동시에 서점 주인 입장에서는 최악의 궁합이기도 하다. , 왕십리 역사 내 영풍문고 안에도 카페가 입점해 판매중인 책(정확히는 견본삼아 살펴볼 수 있는 책)을 커피를 마시면서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영풍이니까 가능한 거고, 책을 한 권만 주문하게 되어 목소리가 줄어든 소심한 책방지기가 있는 이후북스에서 그런 게 가능한가. 생각하다가, , 북카페처럼 차를 마시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은 중고책으로 따로 둘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럼 나중에 내가 차릴 책방에서는 어떤 형태로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남편에게 내 나름의 책 판매 전략을 말했더니, 어 그거 말 된다고, 괜찮은 전략이라고 고개를 끄덕여 주길래 흐뭇해 하다가(충무공은 무려 상경대 출신이다! 나 상경대 출신에게 경영전략 잘 짰다 칭찬받은 문대 출신), 아니 근데 내가 이 책을 판다고? 아직 책방을 열지도 않았음에도 이 애지중지 모아놓은 절판 애장본을 팔 생각을 하니 미리부터 가슴이 아파서 애틋하게 내 책장을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이 책은 팔 수가 없을 거야, 못파는 책들은 미리 딱지를 붙여야하나 생각 하다가, 딱지를 붙이면 책등이 미워질텐데 책장을 분리하나 생각하다가, 팔지는 못해도 읽게는 해 줘야 하나 생각하다가. 하하하하하하

 

어린왕자의 그 유명한 구절을 떠올린 거다. “네가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할 거야.” 라는.

 

나에게 독립서점에 관한 책들은 다들 이런 효용을 가진다. 아주 구체적으로 나의 미래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그리고 세시의 기쁨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만드는. 물론 여러 가지 정황상 내가 책방을 할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나는 낯선 사람이 내 공간에 들어오는 것을 상당히 무서워한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오프라인 상점은 최악의 선택이다, 나에게) 우리는 종종 책으로 사방의 벽을 둘러 친 조그만 카페를 경영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지역은 어디로 할까, 맥주를 팔아도 되나? 주류 판매 허가는 따로 받아야 하나? 나는 정원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시골, 산골로 들어가야 하겠지? 거기 책방을 열면 누가 오기나 하겠니, 그냥 카페의 탈을 쓴 개인 서재겠지. 뭐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사상누각을 지었다 허물었다, 네 시에 올 너를 기다리며 이미 기뻐진 세 시의 우리 둘

 

책방에 관한 꿈을 꾸는 주제에, 하하하하, 독립 책방 투어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어서, 아마 이후북스에 가는 일은 없겠지만, 책은 뭐, 나쁘지 않았다. 정말이지 딱 책방지기의 책이었다. 그러니까, 책 판매자의 책이었다. 내가 판매하는 물품에 대한 애정이 물씬 느껴지는 책이었지만, 내가 판매하는 물품에 대한 정보는 부족했다. 아마도 나는 지금 이 책방지기가 무슨 책을 읽고 있고, 어떤 책에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함께 읽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독립 출판물을 많이 다루는 이후북스 책방지기의 입장에서는 제작자와 너무 밀착되어 있는 판매자인지라 말을 하기가 참 어려웠겠다 하는 생각도 든다. 나도 어떤 책을 욕할 땐 그 작가도 편집자도 모르는 사람이라 마구 하는 거지, 아는 사람이면 입을 열기 어렵지. 하하하.

 

가볍게, 가볍게 잘 읽었다. 이후에 황부농의 책을 굳이 더 찾아 읽게 될 거 같지는 않지만. 이후북스의 번창을 빕니다. 이 책을 낸 이후에 이후북스는 진짜로 제주 지점을 낸 것 같더라. 소심한 책방 검색하다 혹시나해서 같이 검색해 보니 제주에도 서점을 열었더라고.

 

얼마전 어느 통계에서 대한민국 독서율이 성인 1인당 10.5권이라는 충격적인(진짜로 충격적인!) 숫자를 봤는데, 독립서점이 자꾸만 생겨나는 것 같은 느낌은(물론 문을 닫는 서점들도 정말 많다고 한다) 이건 대체 뭘까 싶기도 하다마는.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이니까요. 우리 많이 팔고 많이 삽시다. 그리고 독서는, 산 책중에 골라서 하는 겁니다. 하하하.

 

2025.8.2.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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