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형제의 연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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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 형제의 연인들』by 박경리

 

읽은 날 : 2025.1.23.

 

박경리 장편 아홉 번째 소설이다. 이전 장편 소설의 제목은 그 주제를 포괄하고 있기는 하지만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이 소설의 제목은 매우 직관적이고 구체적이다. 이 소설 이후 나오는 김약국의 딸들이 진짜로 김약국의 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식으로 이 소설 역시 그 형제-심인성과 심주성-와 그들의 연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이 직관적이고 구체적이어서 그럴까, 이야기 역시 직관적이고 구체적이다. 그 시대로서는 드물디 드문 저택에 살면서 호화판 댄스 파-아티를 열고, 음대를 다니는 성악가이거나 작곡가, 또는 재벌가 아들이라는 식의 백마 탄 왕자님이나 탑 속 공주님을 잔뜩 등장시켜 로맨스 없는 로맨스 소설같은 느낌을 주던 이전의 이야기와는 달라졌다.

 

그 형제 중 형 심인성은 개인병원을 차리고 있는 내과 의사다. 사랑 없이 적당히 조건 맞춰 결혼한 아내 현숙은 임신 중이고(소설 초반에 딸을 낳는다) 병원은 뭐 썩 잘되는 것 같지는 않다. 동생 심주성은 K대학 독문과 졸업반이고, S대학 약대생인 송애와 집안끼리의 친분으로 혼담이 오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 두 형제의 아버지 심상호씨가 자수성가한 사업가라 집안은 나름 유복한 편이기는 하나 박경리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 치고는 제법 많이 땅으로 내려왔다.

 

첫 사건으로 일어나는 혜원의 맹장염과 인성의 냉정함은 인상적이다. 혜원의 집으로 왕진을 간 인성은 맹장염의 진단을 내리고 수술을 해야한다고 말 해 줄 뿐, 수술비가 없다는 혜원의 동생 혜준의 말에도 냉정하게 돌아선다. 그냥 두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주인공이 이렇게 차갑고 비도덕적이라는 사실(이건 전광용의 꺼삐딴 리나 할 행동이 아닌가.)을 통해 박경리는 인성이 삶만이 아니라 자신조차도 이미 방기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타인의 죽음에 간여하지 않는 태도는 죽음 그 자체에 이미 초탈한 사람만이 취할 수 있다. 인성은 그저 살아 있으니 살아갈 뿐. 그랬던 인성이 정말로 죽음을 목전에 둔 폐결핵 환자 규희를 만나 살아 있음에 집착을 보이며 점점 살아난다.

 

지금까지 인생에 대하여 무관심하려 했던 인성이나 일종의 자학 의식에 사로잡힌 규희나 다 같이 육체보다 어떤 정신적인 환자가 아니었던가. 그 정신적인 환자들이 지금 서로 다가서려 하고 있는 것이다.

(p.103)

 

주성은 형인 인성과는 정반대의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는 세상 앞에 자신만만하고 거칠 것이 없다.

 

산다는 것은 주장이야. 절망을 뛰어넘고 내가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을 주장하는 거지 뭐야.”

(p.133)

 

세상의 인습과 윤리적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연상의 이혼녀, 친구의 누이 혜원을 사랑하는주성은 절망일 때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송애가 오만하다 말을 해도, “이 세상에 내가 나온 것을 주장하는데 어째서 오만하다는 거야?”라 반문할 뿐이다.

 

이랬던 주성도 세상의 장벽 앞에 바스라져 가는 혜원을 위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대신 상대를 위해 양보하는 법을 배운다.

 

이 소설은 그렇게, ‘그 형제가 각각의 연인들을 만나 변화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전 소설에 비하면 특별히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이. 규희의 전 약혼자 상진과 바람을 피우는 현숙에 대해 인성이 보이는 태도는 아, 이 사람이 정말로 변했구나 하는 확신이 들게 한다.

 

재미있는 건, 사랑과 연민에 대한 작가의 변화다.

 

토지에서 박경리는 연민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태도를 길상과 그의 아들 환국과의 대화를 통해 명확하게 보인다.

 

연민은 순수한 애정의 출발일 게다.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마음도 연민일 것이다. 사별의 슬픔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슬픔보다 연민에서 오는 슬픔이 한층 더 진할 것 같구나.”

아버님은 어머님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셨습니까? 어머님은 대단히 강하신 분인데.”

공격하듯 말했을 때,

사고무친한 남의 땅에, 타민족이 오고 가고, 이십이 못 된 천애고아인 처녀가 강했으면 얼마나 강했겠느냐.”

박경리, 토지52(통권17), 마로니에북스, 2012, p.28

 

결혼 연차가 꽤 된 언니들이 웃으며 농담처럼 하던 자는 모습이 불쌍해 보이면 게임 끝난 거라던 말을 실감하던 순간은 박경리에 새삼 감탄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연민은 좀 다르게 쓰인다. ‘인생은 의의 깊은 것이고 의학은 슬기로운 사명의 직업이라 생각해 의사의 길로 들어섰던 인성은 여러 생명의 마지막을 보면서 삶에 대한 의심을 품게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정신을 무장하기 위해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적용했고, 그런 결과가 그의 결혼이었다. 내 삶에 의미가 없는데 아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랴. 그저 적당히 조건이 맞는 사람과 결혼해 살아가려던 그가, 규희를 만나며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버리고 인정과 도덕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아내 현숙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 이전까지의 냉정하기 그지없는 모습과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민은 사랑의 시작이 아니다.

 

연민이라는 감정이 동물 아닌 인간에게 향하여졌을 때 그것은 죄악에 가까운 독선적인 것’(p.350)이라는 그의 말은 서희를 연민하였다는 길상의 고백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길상의 연민은 그대로 사랑이었으니까.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연민하는 대상을 연민하게 되는 이유를 알면서 그 이유를 없애지는 못하는 인성 자신을 죄악에 가까운 독선이라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현숙을 불쌍하게 만들고 있는 사람은 인성이니까.

 

이야기는 여전히 통속성과 우연의 남발을 버리지는 못하고 있다. (자꾸만 만나요, 사람들이, 우연히 우연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 모두가 발을 단단히 지면에 붙이고 움직이고 있기에 긴밀한 구조를 완성해낸다. 기대 이상으로 좋은 소설이었다.

 

2025.1.23.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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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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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by 마쓰이에 마사시

 

읽은 날 : 2017.8.1.

 

나는 3.1 독립 선언문을 좋아한다. “오등(吾等)은 자()에 아()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문장이다. 국한문 혼용의 당시(1919) 문체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이 문장에 관해 최근 김훈 선생도 한 말씀 남기셨다.

 

이 문장은 완벽하다. 군더더기가 없고 지향점이 선명하다. 주어, 동사, 목적어가 정확한 자리에 배치되어 있고, 주어가 조사를 부려서 문장 전체를 작동시키고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문장 한 개로 정확히 선언하고 있다.

김훈, 허송세월, 나남, 2024, p.136, 조사 를 읽는다

 

김훈 선생은 이 문장을 고등학교 졸업반 때 배웠고, 한국어의 헐거움이 갖는 기능과 깊이를 사랑하게 되었다(p.136) 하는데,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배웠던 것 같고 그때는 이 문장의 아름다움을 몰랐다. 그저 글자로 된 것이라면 뭐든 줄줄줄 외어대던 시기여서 송강가사들을 외듯 이 문장들도 그냥 외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내가 왼다는 사실을 잊었다.

 

이 문장을 다시 떠올린 건 아이가 초등학교에서 받아 온 코팅된 안내문 덕분이었다. 한 면에 학교의 한 해 일정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 기미독립선언문이 인쇄되어 있었다. 반가워서 읽어보는데, “이제 우리는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로 시작했다. 내가 아는 그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다. 1919년 당시의 선언문을 이해하기 쉽게 새로 고쳐 쓴 거란다. 이게 아니야, 기미 독립 선언문은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해. 라고 말을 하는 순간(나도 내가 이 문장을 외고 있었음에 황당하긴 했다.) 아이들은 내가 외국어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알아들을 수가 없단다. 알아 들을 수 있든 없든 간에 기미독립선언서는 오등은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함부로 풀어쓰지 말란 말이다.

 

나에게 카뮈라는 작가와 이방인이라는 작품을 가져다 준 사람은 김화영 교수였다. 불문학자인 김화영 교수의 불어 수준을 내가 평할 방법은 전혀 없으나 그의 한국어 문장은 정말로 아름답고 뛰어나다. 번역문이 아닌 한국어를 부려쓴 평론이나 에세이를 읽다 보면 그가 한국어를 정말 잘 구사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번역가는 외국어에도 능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도착어인 모국어를 잘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 2014, 이 김화영 교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번역가가 나온다. 이정서다. 그는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 틀렸다 정도가 아니라 엉터리라고 까지 말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1942년 출판돼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최초로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54, 김송과 이휘영이 각각 대지사와 청수사에서 출간했고 그 뒤 한국어 판본만 60여 종이 나온다. 김화영의 번역은 상대적으로 좀 늦은 1975년이다. 번역가 이정서는 2014년에 김화영의 이방인번역을 두고 난해하다고 평한다. 카뮈의 원문을 볼 방법이 내겐 없어서, 카뮈는 평이하게 썼는데 김화영이 난해하게 번역한 것인지 카뮈가 이미 난해하게 쓴 것을 김화영이 난해하게 옮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1919년의 한국어 문장과 2000년대의 한국어 문장이 이처럼(오등은!!!) 다른데 1942년 프랑스어라고 2000년의 프랑스어와 같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하지 못하겠다. 카뮈가 난해하게 썼다면 잘 읽히지 않더라도 난해한 문장이 나는 좋다.(근데, 이방인이 난해한가요....;;;;)

 

나는 민음사에서 1998년부터 발간하기 시작한 세계문학전집을 모으고 있는 중인데,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의도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권 변신이야기 책 뒷표지에서 가져옴>

 

굳이??? 새로 쓰지 왜. 이에 대해 번역가 정역목은 원작은 가만히 있는데 번역은 왜 시대마다 새롭게 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간단한 건 아니죠.” (김혜리 인터뷰 모음집, 진심의 탐닉, 씨네21, 2010, p.322 세상 모든 일이 번역인지도 모르죠”-번역가 정영목)라고 말한다.

 

외국어를 하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번역가들의 존재가 참으로 감사한데, 나는 가능하면 원문을 원문 그대로 옮겨주는 번역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대로 번역은 설명이 아니잖아요? 원문 풀어쓰기도 아니고요.’(p.318) 역시나 원문과 번역문을 비교 대조할 능력은 없어서 그가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번역가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은 없으나 그가 하는 말에 기대어 그의 번역을 신뢰하는 거다.

 

()-번역문이 술술 읽혀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가하면 반대쪽에는 번역문은 원문쪽으로 끌어당겨서 쓴 이질성이 있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던데요.

()-저보고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번역스러운 번역쪽을 택하겠죠. ‘번역투가 나쁘다는 것이 통념인데, 왜 나쁘냐고 반문할 수 있거든요. 번역인데 번역투가 아니라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요? 가만보면 몇몇 분열적인 직종이 있어요. 번역은 번역이 아닌 것처럼 보여야 칭찬받고 연기는 연기가 아닌 것처럼 보여야 호평받고. 정신건강에도 안 좋은 겁니다. (좌중 웃음) 옛날엔 실물과 똑같다는 것이 그림에 대한 칭찬이었지만 달라졌잖아요. 저는 번역의 매끄러움에는 집착하지 않습니다. 번역의 완성도와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김혜리 인터뷰 모음집, 진심의 탐닉, 씨네21, 2010, p.318 세상 모든 일이 번역인지도 모르죠”-번역가 정영목

 

이렇게 말하는 정영목도 인터뷰 후반에 가면 결국은 아닌 척하고 싶지만 투명한 체하고 싶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번역자의 무엇인가가 책 속에 남을 겁니다”(p.326)이라고 인정하고 만다. ,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아니 더 정확히는 당연한 일이겠지.

 

. 돌고 돌아 다시 김춘미와 마쓰이에 마사시.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처음 읽었을 때 곧이어 떠오른 문장은 박경리의 토지에서 조찬하가 했던 생각이다.

 

일본인들 중에는 당신 같은 로맨티시스트가 더러 있지요. 그것은 벚꽃 같은 게 아니고 산간의 흰 백합 같은 것이오. 선량하고 깨끗하고 미적 감각이 예민하고,

박경리 토지41(통권13), 마로니에북스, 2012, p.191

 

일본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라고 말을 하려다보니 일본 작가의 책을 읽기는 엄청 읽었다. 민망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고 미야베 미유키도 좋아해서 전작 중이다. 요시모토 바나나도 좋아하고 에쿠니 가오리도 좋아한다. 교코쿠 나쓰히코는 어떻고. 국가별 섹션으로 나누자면 한국 작가 다음이 일본 작가일 정도로 책장 지분도 높다. , 이제 일본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안 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문학 기저에 깔려있는, 한국과는 다른 이질적인 어떤 정서같은 것에는 늘 저항감을 느낀다. 이건 감각으로 분류하자면 촉각의 영역에 들어갈 거다. 뭔가 끈적하고 찝찝하고 질척한 느낌. 때때로 가장 비일본적인 작가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에서도 그 끈적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일본 작품을 그렇게 많이 읽으면서도 여전히 일본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라고 중얼대게 되는 바탕에는 그 묘한 음습함이 있다. 이건 뭐가 어째서 그래요, 라고 구체적으로 딱 집어 말할 수가 없다. 그냥 느낌이다. 캘리포니아가 비치보이스의 Surfin’ U.S.A.를 흥얼거리며 그늘 한 점 없이 화창한 해변을 떠올리게 한다면 일본은 늘 내게 사철 빛이 들지 않는 북향의 어느 축축한 습지를 떠올리게 한다. 문학으로 접한 일본은 그랬다. 재미와 상관없이.

 

그러다 마쓰이에 마사시를 만나게 된 거다. . 매우 일본스러운데, 전혀 일본스럽지 않았다. 박경리의 말대로 선량하고 깨끗하고 미적 감각이 예민한 작품이었다. 습기 가득한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데도 특유의 질척거리는 축축함이 빠진.

 

무라이 설계사무소에 새로 입사하게 된 젊은 건축가와 특유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노년의 건축가의 이야기. 거기에 건축과 건축가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가 맞물리면서, 전체 이야기를 끌고가는 큰 축으로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이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튀지 않고 제 자리에서 조화롭게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 이 소설 너무 좋은데, 1958년생 작가의 첫 작품이라니 경이롭기까지 했다.

 

별로 오래 기다리지 않고 마쓰이에 마사시의 두 번째 작품이 나왔다.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이다. . 이건 전작만 못한데? 세 번째 작품이 나왔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그 선량하고 깨끗하고 예민한 느낌은 어디로 간 걸까.

 

작가를 열심히 따지는 것에 비하면 번역가를 별로 인지하지 않고 책을 읽는 편인데, 이번에는 드디어 번역가를 보게 되었다. 세 권의 번역가가 다 다르다. 그리고 김춘미.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인데, 하다 기억이 났다. 나를 하루키 월드로 인도한 그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번역했다. 나 번역가 따지는 사람이었구나. 해변의 카프카는 내가 처음 읽은 하루키의 작품은 아니나 하루키를 전작하게 만든 작품이고, 나는 아직도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는 해변의 카프카가 제일 좋다.

 

그래서 김춘미가 번역한 마쓰이에 마사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 어디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김춘미 샘은 이미 작년에 마쓰이에 마사시의 작품 두 권 번역을 완료해 출판사에 넘겼다고 한다. 어느 출판사인지 모르겠지만 어서 내놓으시라.

 

ps. 내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와 비슷한 느낌의 책으로는 조지수의 나스타샤(지혜정원, 2008)와 야마시타 나츠의 양과 강철의 숲(예담, 2016)이 있다. 마쓰이에 마사시를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이 두 권도 읽어보시길. 아마 좋아하게 될 겁니다.

 

2025.1.22.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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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1-22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진짜 좋았어요. 그 연필 깎는 장면 묘사는 정말 그 흑연 냄새가 책장 바깥으로 나오는 것 같잖아요. 김춘미샘이 마쓰이에 마사시를 번역하셔서 이미 출판사에 넘겼다고요? 설레는 소식이네요.한 권도 아니고 두 권이나 벌써 넘겼다면 출판만 빨리 해주기를...<해변의 카프카> 마지막 대목은 진짜...눙물이....정말 명문이죠. 그나저나 하루키는 이제 글을 안 쓰나요. 아시마님은 다 아실 것 같아서요.

아시마 2025-01-23 09:42   좋아요 0 | URL
그쵸그쵸, 이 책 너무 좋죠. 저 얼마나 좋았는지 8월에 읽은 책을 11월에 또 읽었더라고요. 소설 여러번 읽는 건 좋아해도 그렇게 짧은 간격을 두고 읽긴 또 처음. 저는 그 연필깎는 묘사보고 오피넬 나이프 검색했잖아요. ㅎㅎ 리라 홀더랑.
‘비에 씻긴 초록에서 솟구치는 냄새’(p.151)같은 건 원문을 보고 싶을 정도예요.
해변의 카프카 너무 좋죠. 한국에선 별로 인기 없던 작품인데 같이 좋아해 주시니 넘 좋아요.
근데, 하루키가 이제 글을 안 쓰나요? 헐. 그럼 넘 슬픈데요. ㅠㅠ
 
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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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을 나는가 『아무튼, 술』by 김혼비



읽은 날 : 2025.1.5.



주말에 제주를 다녀오느라 비행기를 탔다. 최초의 동력 비행기가 1903년, 내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본 건 그로부터 한세기가 거의 다 지날 무렵인 1998년,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뜬금없이 비행기라는 걸 한번 타 보고 싶다는 이유로 탔다. 서울-부산 간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렇게 잦지는 않게, 그렇지만 그렇게 드물지도 않게 비행기를 탄다. 그런데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나는 늘, 이 거대한 쇳덩이가 하늘을 난다는 사실이 무슨 마법 같고 놀랍기만 하다.



유체역학이니, 양력이니, 공기의 저항이니, 엔진 출력으로 일으키는 베르누이의 원리니, 뉴턴의 제3법칙이니 이런 걸 내가 다 이해할 수도 없지만, 이해한다 해도 나의 단순한 감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걸 과학으로 백날 설명해봐야 나에게는 그저 마법 같은 일의 하나일 뿐이다. 이 감탄은 이해와는 별개의 어느 지점에 있다. 그야말로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일이라고 할까.



비행기 옆좌석에 앉은 남편에게 소곤거렸다. “당신은 이 비행기가 난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아? 난 이륙 순간마다 항상 놀라.” 남편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도 나와 같은 본투비 문과이니까, ‘지금 내게 비행기가 뜨는 과학적 이유를 설명해 달라는 말이냐?’ 라는 표정이 되는 것도 당연하고, 이 나이가 되어서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옆에 앉은 남편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어처구니없는 것도 당연하다. 가는 비행기에서 하는 말을 오는 비행기에 또 한다. 매번 진지한 놀라움을 담아. 마치 비행기라는 걸 처음 타 보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처럼 신기한 걸 어쩌랴. 친절한 인터넷과 백과사전 덕분에 뜨는 이유는 안다. 실제로 비행기를 타고 다니니까 경험도 했다. 안 믿을 도리가 없고, 이게 마법의 일종이 아니라는 사실도 안다. 그럼 뭐하나, 신기한 건 신기한 거지. 나는 도리어, 나와 같은 놀라움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게 더 신기하다. “비행기보다 몇백 배는 큰 항공모함이 물 위에 떠 다니는 건 안 신기하냐”, 길래 아주 하찮은 것을 보는 표정으로 “물의 부력도 모르냐?” 라는 대답도 해 줬다. 아니 어쨌든 물은 형태와 밀도를 가지고 있잖아. 공기는 밀도가 없냐? 라고 묻는다면, 다시 과학 원리로 들어가야 하는데, 안다고, 안다니까. 아는 것과 납득이 되는 건 별개의 문제더라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나에게 이, “비행기는 대체 어떻게 하늘을 나는가.” 류의 질문과 동급의 질문이 “어떤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시는가.” 이다.



아버지가 술을 안드시는 집에서 자란 나는, 아마도 그 체질을 물려받았는지 술을 마시지 못한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술 분해효소가 없는 간을 가지고 태어난 게다. 그러다보니 술자리에 갈 일이 별로 없고, 누가 주정을 하는 것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더구나 나는 창밖이 어두워지면 무조건 집에 들어가야 맘이 편해지는 집순이여서, 어쩌다 참석하게 되는 술자리에서도 끝을 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술을 제대로 마시는 사람을 본 건 형부였는데, 말술인 우리 형부는 술버릇이 매우 얌전했다. 앉은 자리에서 소주 두 병을 마시고도 술자리가 끝나면 조용히 씻고 잤다. 심지어 아내가 거슬려 할까봐 침대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자리를 깔고 자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형부와 처제로 얼굴을 마주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형부의 술버릇은 그처럼 얌전하다.



덕분에 나는 술에 대해 매우 관대한 사람이 되었다. 미혼의 친구들이 남편의 조건으로 꼽는 대표적인 것이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었는데, 그건 내 남편감의 요구조건에 있지 않았다. 술이 뭐, 뭐가 어때서. 마실 줄 알면 좋은 거 아냐? 가끔 가는 술자리에서 무알콜의 음료를 홀짝이며 술에 ‘적당히’ 취한 사람들을 보는 일은 재미있었다. 사람을 반듯하게 죄어놓는 나사가 한 바퀴나 반 바퀴쯤 풀려(나사가 빠지면 안 된다.) 살짝 느슨해진 사람들은 평소보다 유쾌했고 웃음이 헤퍼졌고, 너그러워졌다. 취옹(醉翁)의 경지가 이런 것이로구나, 나로서는 평생 도달하지 못할 어떤 부분이라 부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술에 관한 한 아주 해맑은 상태로 남편을 만났고 결혼을 했다. 술버릇을 알아보고 어쩌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내가 술을 못 마시니 우리의 데이트는 늘 밥과 커피였고, 어쩌다 남편(그땐 남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난 늘 창밖이 어두워졌으니 집에 가야 하는 8시 신데렐라였으니. 그런 깐으로는 참으로 운이 좋게도(이게 운이 좋은 거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땐 몰랐지.), 남편도 술버릇이 형부만큼이나 얌전했다. 술을 먹고 들어오면 조용히 씻고 자는 사람이었다. 결혼 전까지, 아니, 내가 시부님의 주사를 직관하기 전까지, 남편은 자기 아버지의 알콜릭을 숨겼다. 정확하게 말하면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아버지는 술 문제가 좀 있었어.” 라고 말을 했지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시어머니와 남편은, 그리고 시부 본인까지, 시아버님의 알콜 문제는 기를 쓰고 숨기는 일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시댁과 다섯 시간 거리의 서울에 살고, 정해진 날에만 내려가거나 내려가기 하루 이틀 전에는 시댁에 미리 연락을 해 두니까, 우리가 갈 때는 시아버님도 술을 드시지 않았다. 술을 먹지 않았을 때의 시아버지는 그냥 평범하고 무뚝뚝한, 은근히 살가운 데도 있는 경상도 시부일 뿐이었다. 다만 친정과 시댁의 명절 풍경이 너무도 달라서 신기하긴 했다. 친정은 명절이 되어 자식들이 오면 술판이 벌어졌다. 술은 형부와 사촌형부 둘이 마시고, 가끔 엄마도 곁에서 한 두 잔을 받아 마시고, 나머지 딸들과 아버지는 다른 음료를 마시며 유쾌한 명절이 지나갔다. 내가 결혼한 뒤에는 술 멤버(울 남편 말이다)도 늘었다. 그런데 시댁의 명절은 술이 한 방울도 없었다. 남편도 술을 먹는데, 시숙님도 술을 먹는다고 손윗동서에게 들었는데, 멀리 살다 명절이라고 간만에 만난 형제 둘이 소주는커녕 맥주 한잔 기울이는 법도 없었다. 신기했다. 명절인데 왜 술이 없냐? 고 물었을 때, 남편이 한 말이 그 말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술 문제가 좀 있었어. 그래서 엄마가 술을 싫어해.”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결혼 10년이 지난 어느날 시댁 방문 스케줄이 꼬이는 실수로 직관하게 된 시부의 주사를 보고야 알았다.



흉했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저

흉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어이없는 질문 목록이 하나 추가되었다. “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을 나는가.”의 다음 줄에 “어떤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시는가.”가.



술과 나는 아예 인연이 없으리니 하고 살던 내가 술을 처음으로 배운, 아니, 그러니까, ‘취기’라는 즐거움을 처음으로 배운 곳은 마트다.(웃기겠지만 팩트다.) 이마트나 코스트코 같은 대형 마트의 시음 코너. 40살이 되기 직전이었다. 코스트코의 와인 코너 앞에는 와인 시음 매대가 있다. 시음 와인은 매주 달라지고, 시음을 하겠다고 가면 소주잔 사이즈의 종이컵 바닥 1/4 정도를 채워 준다. 딱, 한 모금.



남편과 둘이 1층 매장에서 각종 공산품을 골라 카트에 담고 무빙워크를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바로 보이는 게 와인 코너다. 매번 거기서 딱 한 모금의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인지를 하게 된 거다. 마트에 가서, 와인 한 모금을 시음하면 딱 기분좋을만큼 취기가 돈다는 사실을. 그렇다, 나는 딱 한 모금의 와인에도 취하는, 알콜에 관한 한 매우 가성비가 뛰어난! 사람인 거다. 술을 못한다는 말보다야 알콜 가성비 좋다는 말이 훨씬 듣기 좋지 않은가. 그게 뭐가 됐든 ‘좋은 게 좋은 거’ 니까.



그걸 인지한 순간부터 나는 한 모금의 와인을 마시고 난 뒤의 내 상태를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많이도 말고 딱 0.5센치 만큼만 땅에서 떨어졌다. 감각의 모서리가 아주 조금 무뎌져 살짝 몽롱해진 느낌은 오, 와, 사람들이 이래서 술을 먹는군! 하고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 취기는 마트 식품 코너의 쇼핑을 마칠 때쯤 완전히 사라져 계산할 때 나는 매우 명료하고 청명한 정신상태로 돌아온다. (이거 봐, 나 술도 이렇게 금방 깬다니까!)숙취 따위 있을 리 없는 나 혼자의 짧은 취생몽사醉生夢死다. 같이 장을 보러 가는 남편만이 아는 나의 음주벽이다.



이제 나는 술자리에서 딱 반 잔의 맥주를 받아 둔다. 그리고 그 술자리가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그 반 잔의 맥주를 핥듯이 아껴가며 마신다. 첫 모금에 취했다가, 한 1-20분 뒤에 취기가 깼다가, 다시 한 모금을 마시고 취했다가, 또 깼다가 하며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취생몽사를 즐긴다. 그 알딸딸한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이 취기의 즐거움을 알게 된 뒤에도 ‘어떤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시는가’라는 나의 오랜 질문은 답을 찾지 못했다. 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을 나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한 상태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도 갔다가 발리도 갔다가 부산도 갔다가 하는 것처럼, 술에 취하면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시나요.” 라고 묻게 되는 어떤 지점에 나는 서 있다. 술이라는 건 기분이 좋으려고 마시는 것 아닌가요. 술만 마시면 기분이 나빠지고 시비를 걸게 되고, 술에 취해 사고까지 치는 경험을 하고, 심지어 술을 마시면 폭력성향이 나오기까지 한다면, 아니, 술을 안마셔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술 취한 내가 저지른 사고는 술이 깬 내가 처리해야 하는데, 그런 일을 반복하는 건 너무 바보같지 않나요. 그같은 일을 몇 번 하고 나면 술이 깬 나는 두 번 다시 술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할 거 같은데.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시는가.’ 이번 술에는 절대 주사를 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더 놀라운 것은 주사가 있는 사람과 술을 같이 마셔주는 사람이다. 흉하지 않나??? 아, 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을 나느냐고요.



성석제는 “내가 아는 한 어떤 음식도 냉면처럼 열렬한 신도를 거느리고 있지 못하다”(성석제, 『소풍』, 창비, 2006, p.149)라고 말했지만, 냉면보다 훨씬 열렬한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 게 바로 ‘술’ 같다. 이건 술에 관한 책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면 명약관화하다. 한창훈은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를 썼고, 김혼비의 이 책에도 언급되는 권여선의 『오늘 뭐 먹지?』는 ‘음식’ 산문을 가장한 ‘안주’ 산문집을 표방하다 6년 뒤 아예 『술꾼들의 모국어』라는 제목의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음식에 관한 에세이를 가장 잘 쓰는 작가로 내가 꼽는 성석제도 음식 에세이 『칼과 황홀』의 한 챕터 전체를 술에 관한 글에 할애했다. 윤대녕의 맛 산문집 『어머니의 수저』에도 술에 관한 꼭지는 두 개나 있다. (주제가 소주, 맥주, 청주, 막걸리다.)『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자로 유명한 구스미 마사유키는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와 『낮의 목욕탕과 술』이라는 술을 주제로 한 에세이집을 두권이나 냈고, 하라다 히카의 소설은 제목이 아예 『낮 술』이다. 작가들이 그 빼어난 글솜씨로 술에 관한 예찬을 하는 것을 읽다 보면, 술을 먹을 줄 모르는 게 너무나 억울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술이란, “우리를 조금씩 허술하게 만”들어 “평소라면 잘 하지 못했을 말을 술술 하는 순간”을 불러오는(p.166) 그런 것이다. 세상에는



아무런 힘이 없어 누군가의 귀에 가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말일지라도, 때로는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쉬운 말밖에 없을지라도, 이런 쉬운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김혼비, 『아무튼, 술』, 제철소, 2019, p.61-62



그런 말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의 힘으로 한 시기를 건너갈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반듯하게 죄는 나사가 살짝, 반바퀴에서 한바퀴쯤만 풀어지는 순간을 나는 기대한다. 그 술기운을 빌려서 하는 말이, 때로는 그 순간을 버티게하는 유일한 힘이 될 때가 있으니까. 그런 순간들 없이 사회적 약속과 규범을 반듯하게 잘 지켜 “지나고 보면 상대도 나도 적정선 안에서 ‘나이스’했”기에 결국 “지나고 보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p.167)게 되는 그런 관계를 나도 숱하게 맺어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을 명확하게 긋는 사람이라는 평을, 상대를 긴장시키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어려운 사람이라는 말도 들었다. 아닌데, 나 만만한 사람인데, 라고 혼자 중얼거리지만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안다. 적정선 안의 ‘나이스’ 한 관계 맺기를 디폴트로 했던 후유증이다. 나도 술을 마시고 나사를 풀 줄 알았다면 그런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가 마시지 못하는 술을 기어코 마시고 싶어하는 이유다. 술도 마시지 못하는 내가 술 예찬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데 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을 나나요? 라고 묻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5.1.6.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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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온 여인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가을에 온 여인by 박경리

 

읽은 날 : 2024.12.28.

 

읽는 내내 박완서의 소설 욕망의 응달이 떠올랐다. 미리 말해두지만, 박완서 선생은 자신의 장편소설 전집을 세계사에서 이미 출간한 상태였지만 죽기 전 그 책과 목록을 다시 정리하여 결정판 전집목록을 만들었다. 박완서의 결정판 장편 전집에서 욕망의 응달은 빠진다. 박완서 선생은 그 소설을 사장시키길 원했다.

 

장소 그 자체가 이야기를 장악하는 소설들이 있다. 최근에 읽어 기억나는 책은 종로구 옥인동 벽수산장을 배경으로 한 심윤경의 영원한 유산이나 인천 대불호텔을 배경으로 한 강화길의 대불호텔의 유령이 있다. 둘 다 구한말이라는 시대와 그 집에 얽힌 역사를 배경으로 유령처럼 보이지만 유령이 아닌 사람과 사람처럼 보이지만 유령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장소의 특성과 맞물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진행해 간다. 이럴 때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 책에도 푸른 저택이라는 특정 장소가 나온다. 그러나 심윤경이나 강화길의 책에서처럼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만한 사연을 지닌 장소는 아니다. 박완서의 책에 등장하는 저택집처럼, 이 책의 푸른저택은 어떤 시대 배경이나 역사를 지닌 장소가 아니라 그저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는 데 의의가 있는 곳이다. 각자의 사연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 곳. 그들이 만나야 이야기가 진행되니 말이다. 또한 박경리의 푸른저택과 박완서의 저택집은 세상과 유리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세상과의 분리, 단절은 시대와 현실과도 분리 단절됨을 의미한다. 이제 여기에 모인 인물들은 세상이 무슨 난장판이 되든 상관없이 그들만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간다.

 

박경리의 인물은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토지에서 길상이는 서희를 떠보려 불쌍한 과수댁과 살림을 차리는 시늉을 한다. 그녀와 잠자리를 하면서도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에게 매달려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길상이는 그녀와 살겠다는 말을 당당하게 한다. 아주 개자식이다. 이런 개자식 길상이를 끝내 미워하지 않고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은 길상이 본인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길상이가 사랑하는 존재인 서희의 매력에 있다. 독자가 용이의 간통과 두 집 살림에 대해 눈을 감게 되는 것은 박경리가 오래오래 공을 들여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을 독자에게 설득시킨 덕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용이라는 인물 자체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낸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작가는 그러한 설득에 실패한다. 오 부인의 강사장의 동생에 대한 집착과 구분되지 않는 애정의 문제라든가 주인공 신성표가 처음 석영희에게 마음이 갔다가 오세정으로 마음이 옮겨가고 그 마음이 다시 나의화로 옮겨가는 과정 등을 독자에게 납득시키는데 실패하고 있다. 그 덕에 이 소설은 기괴한 인물들이 기괴한 말과 행동을 하는 광대놀음에 그치고 만다. 안타깝다.

 

다시, 박완서 선생은 죽기 전 자신의 장편 중 한 권인 욕망의 응달을 영원히 사장시키는 선택을 하였다. 박경리 선생도 아마 그러고 싶은 작품이 있기는 있지 않았을까.

 

추리 소설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일으킨 범인을 독자에게 찾아 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텐데, 이 소설에도 그렇고 박완서 선생의 욕망의 응달에도 그렇고, ‘추리소설의 기법을 차용한운운의 헌사에 가까운 광고 문구가 참 많다. . 어쩌면 작가 본인들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만약 진짜 그랬다면 더욱 안타까울밖에.

 

2025.1.4.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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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가꾸고 있습니다 - 동물들이 찾아오고 이야기가 샘솟는 생태다양성 가득한 정원 탄생기
시몽 위로 지음, 한지우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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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가꾸고 있습니다by 시몽 위로

 

읽은 날 : 2024.12.8.

 

2024년의 첫눈은 첫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하게 내렸다. 그 첫눈이 내리던 시기에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인 동네에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유숙자 옮김, 설국, 민음사, 2003, p.7

 

라고 절로 중얼거리게 되는. 북악터널을 경계로 그곳은 그야말로 설국이었다. 자랑이랄 것도 없지만(내 정원이 아니니까) 운이 좋게도 나는 사무실 문을 열면 아주 넓지는 않은, 그래도 그다지 좁다고도 말할 수 없는 잔디 정원이 있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 30년 가까운 세월동안(그렇다고 내가 30년간 일을 해왔다는 오해는 금물이다.) 내가 발을 디딘 정원은 각각 달라졌지만 그곳에서의 내 모습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사무실 컴퓨터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열심히 놀리는 것에 질리면 유리문을 열고 나가 정원의 잔디 위에서 손가락을 열심히 놀린다. 그리고 그렇게 잡초를 뽑을 때마다 박완서 선생의 에세이 한구절을 떠올린다.

 

처음엔 재미삼아 하던 게 일단 잔디와 클로버로 편을 갈라 잔디 편을 들기로 작정을 하자 점점 클로버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증오가 끓어올랐다.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하는 식이었다. 여북해야 그짓에 들려 헤어나지 못하면서 문득 인간의 광기 중 가장 무서운 인종청소에 들린 독재자의 심정을 다 이해한 것처럼 느꼈을까.

 

박완서, 두부, <봄의 환()>, 창작과비평사, 2002, p.107

 

같은 사무실을 쓰는 다른 직원들은 나의 광기 어린 풀뽑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잔디를 관리하는 분은 따로 있어왔다, 항상.) 그냥 재미삼아 하는 거예요, 라는 어쭙잖은 변명으로 나는 나의 적개심과 증오를 숨기지만, 내가 잔디정원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내가 뽑아 제거할잡초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선생님(그러니까 정원의 진짜 주인)과 나는 쿵짝이 잘 맞는 짝패여서 우리 둘은 곧잘 신나게 정원의 잡초 제거에 열을 올린다.(그래봐야 최장 10분이다. 그 이상은 허리 아파 안 한다.) 정해진 시기에 맞추어 정원사를 불러 나무의 전지를 하고, 시든 화초를 죄다 뽑아버리고 새로운 화초를 심지만 제초제를 뿌리지는 않는다. 정원사는 매번 권하지만 그때마다 선생님과 나는 어물거리며 다음엔 뿌리지요, 라는 말로 말꼬리를 흐린다.(잔디 관리의 책임을 맡은 분은 이번엔 꼭 제초제를 뿌리라 강권하지만.) 제초제의 독성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잡초 뽑기 놀잇감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거다. 물론 잔디 정원의 잡초는 놀이삼아 뽑는 걸로는 절대 끝이 안 나기에 잔디 관리하는 분은 우리 둘의 고집에 치를 떤다. 음음, 죄송합니다.

 

제초제는 절대 사절이지만 수목 소독을 위한 약(살충제)을 치는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는다. 잡초는 (뽑는 재미를 위해) 환영하지만 벌레만은 절대 사양이라는 이 이율배반적 모순이라니. 결국 내가 좋아하는 정원은 레이첼 카슨이 말한 침묵의 봄이다. 벌레가 없고, 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기형의 정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와바타 야스나리 적인 고장은 서울시내에서 가장 자연 친화적인 동네임에 분명하다.

 

그러다 이 책을 봤다. 내가 좋아하는 정원에 관한 책이다. 심지어 아주 잘 만들어진 만화책이다. “동물들이 찾아오고 이야기가 샘솟는 생태다양성 가득한 정원 탄생기라는. 동물들이 찾아온다는 건 글로 봤을 때까지만 낭만적이다. 우리 정원엔 분기별로 한번씩 솔거의 까치가 영면을 하고(솔거의 까치는 그림 소나무에 앉으려다 그리되고 우리 정원 까치는 유리창에 비친 소나무에 앉으려다 그리된다.) 때론 작은 호랑이(호랑이는 식육목 고양이과 동물이다)에게 사냥을 당해 정원 가득 깃털을 흩뿌리고 사라진다. 그 사체를 치워야하는 입장에서 생태다양성이란 재앙이다. 물론 까치에게도 재앙은 재앙일터. 이 재앙을 재앙으로 보지 않고 긍정할 수 있을 때 생태다양성은 가능해진다.

 

이 소박하고 멋진 만화책을 그린 이는 도심의 한가운데에서 이 생태다양성 가득한 정원을 탄생시켰다. 그는 거미의 외모도 찬양할 줄 알고(맙소사!) 도마뱀이 살기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주며, 뱀의 편을 들어 고양이와 싸우고(세상에!), 지렁이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반적이 삽이 아닌 갈퀴삽으로 땅을 일군다. 그가 가꾼 정원에는 나비가 찾아오고 나방이 찾아오고, 모기 살충제를 쓰는 대신 모기를 잡아먹는 박쥐와의 공존을 선택한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책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훗날 언젠가 내가 나의 정원과 농장을 가꾸는 날이 오더라도 나는 아마, 생태다양성을 추구하지는 못하리라. 내가 시골 살이를 접고 도시로 돌아오는 이유에는 아마도 지네를 포함한 벌레와 뱀을 비롯한 파충류가 큰 지분을 차지하게 될테니.

 

실천하지는 못할지라도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책이었다.

 

2024.12.8.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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