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운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푸른 운하by. 박경리

 

읽은 날 : 2024.11.19.

 

박경리 다시 읽기라고 부제를 달다 문득, 좀 부끄러웠다. 다시 읽기는 무슨, 지금까지 내리 읽은 여섯 권 중 표류도한 권 빼곤 죄다 처음 읽는다. 하하하. 자신있게 말하건대, 박완서의 작품은 진짜로 전부 읽은지라, 지금은 무슨 책을 읽어도 다시 읽기가 맞는데, 박경리는 앞으로 줄줄이 남아있는 장편(마로니에판 기준이다) 13권 중 김약국의 딸들파시』『시장과 전장을 제외하곤 죄다 처음 읽기다. 여기에 마로니에에선 출간하지 않았고, 다산에서만 출간한 몇몇 장편들을 포함한다면 더 늘어나겠지. 지금이라도 부제를 바꿔야 하나.

 

박경리의 장편은 대부분 1960년대에 쓰였다. 1969년 토지 1부가 연재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선생은 단편과 몇몇 경장편을 쓴 외엔 더 이상 토지 외의 장편을 집필하지 않는다. 26년의 세월을 오롯이 토지에 바치는 거다. 토지가 완간된 이후 집필하기 시작한 장편 나비야 청산가자는 미완으로 남았고, 그 작품을 제외한다면 박경리는 더 이상 소설을 집필하지 않는다. 시집만 두어권 내셨다. 그러니까, 실제 박경리의 작품활동은 1994년으로 종료되다시피 하는 거다.

 

박완서가 처음 집필을 시작한 것은 1970년이다. 박완서는 다산성의 작가여서, 집필을 시작한 이후 장편 단편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책을 내 작고한 2011년까지 꾸준히 신작이 나왔다. 나는 1990년대 초중반부터 이 두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나를 미치도록 매혹시킨 책은 토지였고 거의 실시간으로 동시 호흡한 작가는 박완서다. 전작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당연히 토지 이전의 작품을 찾아 읽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이미 읽은 파시, 표류도,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은 토지를 읽기 이전에 읽었던 책들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박완서의 책은 찾기가 너무 쉬웠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쉴틈 없이 옷을 갈아입고 출판사와 판형을 바꿔가며 재출간, 재출간, 재출간을 거듭했다. 박경리의 책은 달랐다. 내가 이미 읽은 네 권의 책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1970년이후에 출간된 책이 거의 없다. 장편은.

 

출판의 논리도 시장 논리와 다르지 않을 게다. 팔리지 않는 책은 만들지 않는다. 무협지를 잔뜩 팔아(그것도 저작권이 해결되지 않은 해적판을. 우리나라가 세계저작권협회에 가입한 건 1994년이고, 그 이전에는 뭐. 해외 작품은 맘 내키는대로 저자 허락 따위 받지 않고 마구 번역해 책으로 찍어내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출판사였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벌어들인 돈으로 절대 팔리지 않는 교수들의 평론집이나 학술이론서를 내주는 출판사가 있었다. 대학 때 그 출판사에서 찍어낸 책 몇 권이 교재였는데 우린 그나마도 학교 앞 제본소를 활용했으니 흠흠. 평론집이나 학술서적은 그 출판사의 목적이었고, 해적판 무협지는 그 출판사의 수단이었으려나.

 

박경리의 1960년대 장편들은 그 시대에는 엄청난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드라마로도 제작되고 영화로도 제작되고, 연재가 끝나면 바로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고, 바로 전작 장편으로 출간되는 책도 있었고, 어쨌든 박경리는 그 소설들을 팔아 어머니와 외동딸을 홀로 부양하며 전업 작가로서 생계를 꾸려나갔으니 그 시대치고도 대단한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거다. 60년대의 장편들이 박경리로서는 그 볼드모트 출판사의 해적판 무협지 같은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베스트셀러들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조용히 사라져갔다. 시대가 지나가고나면 다시 재출간 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은.

 

박경리와 박완서를 두고 누가 더 뛰어난 작가인가를 비교한다는 건 누가 봐도 어딜 감히, 라는 말을 들을 법한 불경스런 짓이다. , 최소한 나에게는 불경에 근접한 일이다. 다만, 박경리의 1960년대 작품이 몇몇을 제외한다면 전멸이라 할만큼 1980년대 이후 출판시장에서 사라진 것과 박완서의 1970년대 작품이 대부분 199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싱싱하게 살아있었던 차이는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건 박완서의 작품이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해도 그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며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경리의 1960년대 여성지에 연재되었던 소설들과는 달리. 박경리의 1960년대 초기 장편들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을 1960년에 가져다 놔도, 1950년에, 2020년에 가져다 놔도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인류 공통의 어떤 정서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물론 그런 면도 있다. 이 와중에도 인간의 심리는 어찌나 잘 그려내시는지) 현실과 완벽하게 분리되어 소설 속 세상에서만 노는 인간인 탓이다. 그야말로 시대가 이 꼬락서닌데 연애질하느라 바쁜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주어진 시대 현실에 치열하게 고민하는 토지의 인물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 나온다. (, 그래서 연애소설이구나.) 표류도에서 잠시 현실이 반영되다 다시 현실과 상관없는 뜬구름 소설들이 줄줄줄 나온다. (그 와중에 글빨은 미쳤구요. , 어쩜 이런 소설도 이렇게 잘 쓰세요, 선생님.) 그러니 그저 베스트셀러로 끝이 난다. 글빨이 미쳤고, 읽다보면 우와우와 하다가, 돌아서면 끝.

 

그러다 드디어 이 소설이 등장한다. 이 소설의 후반부는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 말기의 시대 혼란상과 마산에서 시작된 3.15 의거에 이은 4.19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시대 현실에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드디어 등장하고, 그 시대 현실이 주인공들의 앞길에 영향을 준다. 드디어, 드디어 현실과 꿈(연애) 사이에 운하를 뚫기 시작하신 거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은경이 바다 같아서 잡히지 않는 치윤의 마음을 차지하려 애쓰는 대신 운하를 파서 바다를 끌어들일 거라 결심하는 것처럼.

 

드디어 이 소설에 처음으로 유식하지 않은, 학벌이 높지 않은 고졸 여자주인공이 등장한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어리기까지 한 주인공은 세련되고 유식한 다른 여성들에게 무시도 당하고 놀림도 당한다. 영어도 할 줄 모르고 춤도 출 줄 모르며 가끔은 식모 취급까지 당하기도 한다. 박경리의 여주인공치고는 가장 하층민에 가깝다. 그러나 그 시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가장 흔한(하긴 그 시대엔 고졸도 흔하진 않았겠다마는) 현실 반영의 인물이다. 주인공 치윤도 가난한 시골 출신에 고학으로 대학을 마친 인물이다. 물론 김남식이라는 재벌가 도련님도 나오지만.

 

자 드디어 운하를 뚫으셨어요, 선생님. 이제 이 운하를 따라 우리는 토지로 가는 걸까요?

 

꿈과 현실이 다르다는 얘기군요. 하긴, 모든 일이 다 그렇죠. 꿈과 현실이 같을 수 없지.”

(p.109)

 

2024.11.19.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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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11-20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 저도 박경리 작가의 다산책방 시리즈를 따라 읽었는데 의외의 이야기들이 있어서 내심 놀라는 중이었어요. 작품의 결이 <토지>와는 완전 다르더라고요. 재미있고 잘 읽히고 신파적 경향도 있고 드라마 보는 것도 같고..대작가에게도 이런 시기가 있었구나 내심 발견의 재미가....<파시>는 아주 좋았고요. 이 작품은 읽기 전이에요.

아시마 2024-11-20 23:08   좋아요 0 | URL
저 마로니에에선 안찍고 다산에서만 낸 장편 <타인들>주문해놓고 기다리는 중이에요. 다산도 제발 책을 이쁘게(미모는 내면만큼 중요한 겁니다, 우리 박경리쌤 쥔공들이 그러하듯)만들었길 빌며(마로니에 책은 진짜 이뻐요. 또한번 자랑질 ㅋㅋㅋ 나 마로니에사장딸 아님)
지난 책에선 빅토르 위고 였는데 이번 책에선 도스토옙스키가 생각났어요. 그 위대한 러시아 작가는 평생을 온갖빚에 시달리며 글을 썼거든요. 오죽하면 빚쟁이가 옆에 붙어서서 한장한장 완성될때마다 원고를 갈취해갔단 썰도 있고, 최대한 글을 빨리 쓰기 위해 속기사를 고용해 구술을 하는 걸로 출간을 하기도 했다죠. 그때까지 이 작가는 퇴고라는 걸 한번도 못한.

그러다 아내가 출판사를 차려 생활이 좀 안정되니 그 위대한(하긴 그 이전 소설도 참 어마어마하긴하죠) <카라마조프>가 나오거든요.

작가가 가난과 생계에 쫓겨 글을 쓴다는 건 참 슬픈일이구나 싶었어요. 토지를 쓰기까지 갈고 닦는 과정이었다고 하기엔 이 소설들 사이에도 표류도와 파시와 김약국이 있으니. 흠.

사실 박완서샘은 사업가 남편이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분이었으니. 매문이 필요없으셨을거구요.

그나저나 <파시> 는 절 토지로 이끈 작품이에요. 넘 죻죠. ㅎㅎ 김약국이 최고라고들 하는데 전 파시가 더 좋습니다. ^^
 
내 마음은 호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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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호수by. 박경리

 

읽은 날 : 2024.11.17.

 

며칠 전 인터넷에서 빅토르 위고의 글이 왜 그렇게 장황한 수사어구가 많은가에 대한 우스개 섞인 글을 보았다. 빅토르 위고 시절엔 단어의 개수를 세어 원고료를 지불하던 시대여서, 가난했던 위고는 억지로라도 단어의 수를 늘여 원고료를 더 받으려 했다는 이야기.

 

성녀와 마녀』『은하를 거쳐 이 책까지 읽고 나니 문득, 빅토르 위고가 떠올랐다.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은 그게 전부다. , 사는 게 참 힘든 일이로다.

 

ps. 성녀와 마녀(여원1960.4-1962.3), 은하(대구일보1960.4-5.26) 그리고 이 소설 내 마음은 호수(조선일보1960.4.6.-12.31)는 모두 동시 실시간 연재가 된 작품이다. 다만 종료 시기가 서로 좀 다를 뿐, 시작되는 시기는 모두 19604월 초로 동일하다.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을 동일한 시기에 실시간 연재까지 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렸던 걸까. . 산다는 게 참 힘든 일인 건 맞는 모양이다.

 

2024.11.17.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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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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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연구자, 정확히는 소설 토지연구자들이 세어본 바, 토지에는 약 600여명의 인물이 등장한다고 한다. 등장인물의 수가 워낙 많아 토지 전집엔 반드시 인물 사전이 딸려나온다. 2002년 나남판이 나올때부터 부록으로 인물 사전을 내더니 2012년 마로니에북스판에도 2023년 다산북스판에도 인물 사전이 부록으로 딸려 나온다. (사실 뭐 그럴거까지야, 싶기는 하다. 전질에 따라와 책장에 꽂혀있기는 하나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다. 생각난 김에 한번 볼까.)

 

워낙 소설의 길이가 길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박경리는 토지의 인물 하나하나에 섬세한 서사를 부여하고 성격과 특징을 주어 그 인물이 가진 개성이 사건을 풀어 나가는 데 영향을 주게 만든다. 이용은 이용이기 때문에 임이네를 버리지 못했고, 유인실은 유인실이기 때문에 오가다와 결합하지 못했다. 그 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려면 인물 사전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나오니까.

 

이 소설은 토지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주 단출하다. 주인공 최인희와 인희의 친구 김은옥, 아버지 최진구와 서모 장연실, 남편 이성태와 인희의 연인이자 구세주가 될 강진호. 은옥의 연인 이정식과 이광민. 두 사람을 더 꼽자면 이성태의 딸 선자와 그녀의 과외선생 윤영철 정도. , 강진호의 약혼녀 이성자도 있다.(별로 힘도 못 쓰는 악역 둘의 이름이 이선자와 이성자라니 아이고 선생님 참 애정이 없으신만큼 성의도 없으셨군요.) 이렇게 꼽아보면 260페이지 남짓한 소설에 등장인물이 결코 적은 수가 아닌데 등장인물이 별로 없다고 느껴진다. 그건 각각의 등장인물이 자신의 자리에서 아주 충실하게 주어진 배역대로만 움직이는 사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사도 없고 개성도 없다. 악역 이성태는 악역답게 충실하다 느껴질 정도로 악역이 해야 할 일들을 열심히 한다. 서모 장연실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최진구 역시 유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로서의 아버지로 존재할 뿐이고. 너무도 전형적이라 일어나는 사건들조차 인물만큼 클리셰cliché 범벅이다.

 

그러나. 식상하기는 해도 재미 자체는 보장되는 게 클리셰인 법. 당연한 거 아닌가? 맛있으니 자꾸 써먹는 거다. 그리고 이 클리셰를 박경리가 그 출중한 글솜씨로 버무리면 통속소설이라 던져버리기 미안해지는 이런 작품이 튀어나온다. 어머, 선생님, 선생님은 어쩜 통속소설도 잘 쓰세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최인희의 행보는 2024년의 시각으로 읽으면 속터져 죽을만큼 답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경리의 다른 여주인공들처럼 박경리를 닮은 구석이 있다.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이다.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꾸려나가려는 경제적인 자립, 그것을 통한 자존의 성취에 대한 추구는 박경리의 여주인공들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자세인 동시에 박경리가 평생 동안 추구해 온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박경리의 소설이 통속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뛰어넘는 원동력은 여기서 나온다. 속터져 죽을 만큼 답답한 인희를 끝까지 응원하고 아이고, 이 둘이 잘 되어야 할 텐데, 맺어져야 할텐데라 안달하며 다음장, 다음장을 넘기게 하는 힘은 인희가 끝까지 자신의 자립과 자존을 잃지 않으려 애쓰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응원해야지. 싶은.

 

소설은 박경리의 소설치고는 드물게 꽉닫힌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주인공 커플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열심히 도와준 조연 커플도 역시나 해피엔딩이다. 심지어 악역은 그에 걸맞는 응징까지 받으니 오, 이건 정말 박경리로서는 드물디 드문 결말이다.

 

주인공이 아무리 답답해도 사건의 전개가 빠르고 남자주인공이 박력있는 뜻밖의 행동파라,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박경리 선생이 애가에서 토지로 넘어가는 길을 제대로 잘 찾아가고 있는 느낌. . 도장깨기는 이래서 재미지지. 다음 책으로 고고.

 

2024.11.13. by ashima


ps. 아참, 마로니에 사장님. 이 책에서도 오타 난무인거 아시나요? p.61 한 페이지 안에 두개예요. '부서러기->부스러기' '하던대요->하던데요' 책 진짜 이쁜데, 슬퍼요. 에혀. 다산사장님은 오타 안내셨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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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와 마녀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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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 2024.11.10.

 

이 글은 박경리 선생의 세 번째 장편 소설이자 여성 월간지 여원19601년간 연재된 소설이다. 첫 번째 장편 소설은 <민주신보>라는 부산의 지역신문(이긴 하였으나 6.25때 부산이 피난수도 역할을 하며 1958년 당시에는 전국 규모의 신문이었다고.)에 연재되었고 두 번째 장편소설 표류도가 문학잡지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

 

사실 첫 장편 애가를 읽고 두 번째 장편 표류도를 읽었을 때,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었다. “아니 선생님, 아무리 선생님이 박경리지만, 어라, 어떻게 1년 만에 글이 이렇게 좋아지세요? 세상에나 세상에나, 어떻게 이 두 작품이 같은 작가가 1년 상간에 쓴 글이라고 하겠어요, 대단하세요!” 그만큼 표류도가 좋았다. 표류도는 제2회 내성문학상(추리소설가 김내성을 기리기 위해 <경향신문>에서 만든 문학상. 1회는 정한숙이, 2회는 박경리가 받은 것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내성추리문학상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을 받을 만했다. 글치 문학상을 아무 작품에나 주겠느냐고.

 

그런데 세 번째 작품인 이 작품과 전작 표류도는 그 낙차가 너무 커서 어질어질하다. 애가를 쓰고, 표류도를 쓰시더니 다시 애가 시절로 돌아가신 건가 싶을 정도로. 인물들은 설익었고, 사건은 과장되었고, 배경과 유리되어 따로 놀고,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섬세하게 반영해주고 있던 표류도(책 출간을 위한 종이를 구하기 힘들 정도의 빈곤, 각종 브로커가 판을 치고, 뇌물이 일상화 되어있던 전쟁직후 혼란상을 잘 반영한 소설이다.)를 쓰셨던 양반이 이 소설에서는 왜이렇게까지 현실과 따로노나, 생각해 보니, , 발표 지면이 여성지다. 당시 소설은 신문연재, 문학잡지 연재, 여성지 연재가 각각 성격이 다 달랐다. 서열은 말하지 않겠다.

 

이 소설을 읽으며 떠오른 작품이 박완서 선생의 욕망의 응달이다. 막장스런 스토리에 추리소설을 어설프게 뒤섞은 이 작품은 여성동아1978-1979까지 1년간 연재되었고, 여기서부터가 중요한 이야긴데 말이다, 세계사에서 처음 발간하는 박완서 전집에는 5번으로 포함이 된다. 실제 박완서의 장편 소설 발표 순서로 다섯 번째니까. 그런데 박완서는 죽기 전 자신의 전집 결정판을 다시 내기로 결정하면서 딱 한 작품, 욕망의 응달은 전집에서 빼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박완서 전집 세계사 결정판에는 이 책이 빠진다. 정말이지 박완서스러운 작품인 동시에 박완서스럽지 않은 작품이기는 했다. 박완서의 소설은 1. 전쟁경험 2. 도시중산층 소시민의 위선 3. 여성주의 이렇게 세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각각의 소설에 따라 발표 지면을 바꾸고 있다. 정확히는 발표 지면의 요구에 따른 작품을 썼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대표적인 페미니즘 소설이라 할 수 있는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와 같은 작품은 <여성신문>에서 연재되었고, 도시 중산층의 위선을 명확히 보여주는 작품 휘청거리는 오후<동아일보>에 연재되는 식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여성잡지 여원에 연재된 소설이다. . 그렇구나, 싶다. 박경리의 발표 순서로 보면 세 번째 쓰여진 소설임에도 그간 각종 전집 출간 때 외면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마로니에 북스의 장편소설세트를 낼 때도 거의 마지막인 2019년에 초판을 찍었다. 그 이전엔 인디북이라는 출판사에서 소리소문없이 나오긴 했다만. 박완서 샘이 죽기 전 유언으로 욕망의 응달을 지워달라 하셨듯, 박경리 샘도 비슷한 유언을 하셨다한들 별로 신기하지 않은 그런 음. (그러나 다산북스에서도 또 나왔다.)

 

박경리 도장깨기를 하느라 힘들게 읽었다.

, 도장깨기 성실하게 하고 있다 자랑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딱히 권하고 싶지 않은.

 

2024.11.10.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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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도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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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 2024.10.30.

 

소설가는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박완서의 첫 책 나목이 그 좋은 예다. “1.4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박완서, 1976년 열화당 판 나목의 작가 후기- 2012년 세계사판 나목의 서문에서 옮겨옴)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박완서는 그(박수근 화백)가 작고한지 몇 년만에 열린 유작전을 보고 제기랄이라고 중얼거린다. ‘그가 제대로 평가받는 데 대한 기쁨과 놀라움이 클수록 그의 생전의 가난이 억울했고, 한 예술가의 운명에 대해 비감을 금할 수가 없었던 박완서는 그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걸 증언하고 싶어 그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마침 종합 월간지신동아에서 일년에 한번씩 실시하는 논픽션 모집 마감일이 임박했던 때였다. 그러나 글은 잘 써지지 않았다.(따옴표 박완서 문학앨범에서 발췌)

 

그의 전기를 쓰는 데는 거짓말과의 싸움 말고도 또 난관이 있었다. 자꾸만 내 얘기가 하고 싶은 거였다. 도처에 투사된 내 모습도 그의 전기를 순수치 못하게 했다. 자꾸만 끼어들려는 자신의 모습과 거짓말을 배제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걸 완전히 배제하면 도무지 쓰고 싶은 신명이 나지 않았다.

박완서,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박완서 문학앨범, 웅진지식하우스, 2011, p.50-51,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결국 박수근 화백의 전기를 쓰려 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욕망이 훨씬 강했기에 박완서는 논픽션 대신 픽션을 쓰기 시작하고, 신동아가 아닌 여성동아장편소설 모집에 응모해 당선이 된다. 습작품 하나 없이 처음 쓴 소설이 나목이라니, 이분은 소설을 쓰려고 태어났어요.

 

박경리도 비슷한 노선을 걷는다. 단편 계산(1955)불신시대(1957)로 시작되어 이 소설 표류도에서 박경리의 내 얘기는 절정을 이룬다. 바람잡아 본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본 아버지, 본격적인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쪽과 약간의 관련을 가지고 있던 남편이 전쟁통에 죽어버린 전쟁미망인. 어머니와 어린 딸의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 높은 학벌과 그보다 더 높은 지적 능력, 뛰어난 미모. 기승하고도 결벽스런 성격. 어머니와의 성격 차이로 인한 불화. 주인공 강현회가 처한 상황은 그대로 당시의 박경리가 처해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심지어 여학교 시절 담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1년간의 휴학을 감행해 버리거나 훗날 토지에서 용이의 손녀 상의의 에피소드로도 변주되는 여학교에서 일본인 하급생과 S(여학생들끼리의 플라토닉한 연인관계)를 맺는 편지를 썼다가 징계를 받는 이야기 등은 박경리 본인의 에피소드이기도 했다.

 

이 소설이 흔한 불륜 연애소설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은 자신의 불륜에 움츠러들기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 앞에 당당한 현회의 사고思考덕분이다. 유부남 상현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현회는, 상현의 아내를 만난 뒤에도 자신이 불륜녀라는 사실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사회제도에 대한 굴복이기보다 한 여성에 대한 패배였으며, 역시 상현 씨와 나 사이에는 메워질 수 없는 풍토적인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다시 인식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상현 씨한테 가장 적합하고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다. 그 여자가 지닌 교양과 인품은 상현 씨가 가진 그것과 흡사하다.

p.108

 

사랑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사랑은 그 사람의, 상현 씨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범하지는 못한다.’(p.106)고 사랑과 관계 그 자체를 분리해서 생각했던 현회다. 남편을 뺏고 뺏기는 문제와 사랑의 문제는 별개인 것이다. 그래서 현회는 상현과의 사랑을 두고 남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내 것이기에. 그런 현회를 굴복시키는 건 상현의 아내가 아닌 수정이라는 한 여성 그 자체다. 현회 본인보다 훨씬 상현과 조화를 이루는 여자라는 것이 현회를 괴롭게 한다. 그래서 끝내 현회는 상현의 애정을 쟁취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

 

나는 억지로라도 현회의 애정을 빼앗을 거야. 현회는 왜 못해, ?”

죽어도 아니하겠어요. 세상이 무너져도 그것만은 아니하겠어요.”

자존심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선생님 마음속에 미운 여자로 남겨두지는 않을래요.”

p.143

 

자존심이 아닌 열등감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모습에서 현회의 당당한 자존이 읽힌다. 이미 상현의 아내 수정을 봐 버린 뒤다. 빼앗아 올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사람의 조화를 자신은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애정에도 염치가 있어야 한다. 항상 애정을 강요하던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어느새 나를 소심하게 조심스럽게 만든 것이다. 만일 나의 연인이, 그리고 내 딸이, 나에게 의무적인 또는 동정이나 강요에 못 이긴 포용(이거 포옹의 오탈자 아닐까요.... 마로니에 사장님.)을 했다고 하자. 그것은 기막히는 일이다’(p.74) 라는 현회의 마음 그대로, 조화롭지 못한데 사회적 제도가 맺어준 부부라는 이름에 묶여 상현의 애정이 의무, 동정, 강요의 결과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을 현회의 결벽성은 용납할 수 없다.

 

박경리가 그리는 사랑은 늘 그런식이다. ‘머리카락 한 오라기까지도 나 아닌 누구에게도 줄 수 없고 그의 순간적인 생각까지도 나로부터 비켜서는 것을 원치않는 강한 독점욕,’(p.198) 그러나 그 독점욕의 이면에는 상반된 환경과 관점과, 그리고 서로 흡사한 소심한 선의식으로 하여 차츰 애정이 파괴되고 말 것이라 예감하는 나의 총명’(p.199)이 있다. 세상의 시선따위는 무시할 수 있으나 내 내면의 분별력이나 도덕적 장벽은 넘어설 수가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현회는 그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순간을 태연히 기다리고 있는연애를 한다. 그리고 이 총명한 분별이 이 글을 흔해 빠진 불륜 연애소설이 아닌 인간과 사랑의 본질을 탐구하는 소설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애정이 없으면 생활이 허물리어 버리듯이 생활이, 생활감정이 다르면 애정도 허물려 버려요.’(p.166)와 같은 통찰은 내가 이래서 박경리를 읽는구나를 새삼 느끼게 한다. 그래서 끝내 박경리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쓰지 못하는 것이다. 계층이 다른 사람들의 결합이 어떻게 끝날지를 알거든.

 

이 책에서는 이후 박경리 소설에 여러 가지로 변주되어 등장할 인물과 사건의 씨앗들이 곳곳에 흩어져있다. 훗날 기화(봉순이)가 되어 나타나게 될 아버지의 첩 이야기나 걸핏하면 목을 메고 죽는 시늉을 해 자식을 괴롭히는 어머니의 이야기(이 에피소드는 토지에서 송관수가 만난 한 보부상의 에피소드로 변주된다.). 그런 장면을 보는 만큼이나 이름 돌려막기도 반가웠다. 바로 전 소설에 조연으로 등장했던 강현회라는 이름을 박경리는 고스란히 가져다 쓴다. 이름을 짓는 게 귀찮으셨거나 강현회라는 이름이 정말로 마음에 드셨거나. , 사소한 재미였다. 더불어 표류도 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가 대체 뭔가 많이 고민했는데 후반부에 가면 나온다. 표류하는 섬(), 인간들은 대부분 그렇게 표류하며 지향점을 가지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섬, 외로운 단독자인 거다.

 

현회는 사촌오빠가 데려다 준 밀물이 되면 물 속에 잠겼다가 썰물이 되면 드러나는 섬에서 생애 최초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살고싶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죽음이 코 앞으로 닥쳐올 때, 인간의 가장 진실한 삶에 대한 의지가 드러나는 법, 현회는 단독자의 삶을 꿈꾸었지만 진실로 단독자가 된 순간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 먹는다. 다행이에요, 행복하세요, 현회씨. 라고 중얼거리게 되는 통속적 결말이지만, 그들의 결합은 신데렐라와 왕자님의 유리구두를 매개로 한 결합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가지고 올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 다행이다.


당신의 정절(貞節)보다 나의 배덕(背德)이 훨씬 위대하다.

p.163

 

그렇죠, 그렇죠, , 제가 그래서 쌤 책을 읽어요! 이런 구절 때문에.

 

2024.10.31. by ashima


ps. 나는 마로니에판 토지 전질을 샀고, 이 책 표류도를 읽으며 이미 두개의 오탈자를 발견했다. 에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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