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그 책 - 추억의 책장을 펼쳐 어린 나와 다시 만나다
곽아람 지음 / 앨리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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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그 책by 곽아람 & 안녕, 나의 순-by 이영희

 

읽은 날 : 2025.7.26.

 

어느 집이나 다 그렇겠지만, 아이를 핑계 삼아 어른의 욕심을 채우는 것들이 있다. 어린날의 결핍을 치유하기 위해. 우리집에서는 디즈니 베이비돌 시리즈가 그렇고(나는 베이비돌 시리즈를 전부 다! 사이즈 별로 다! 가지고 있다. 하하하, 진지하게 말하건대, 자랑이다. 반어 아님 주의.) 시공주니어의 네버랜드 클래식 시리즈가 그렇고, 창비 아동문고 시리즈와 시공주니어 문고본 시리즈가 그러하다. 모두가 완역본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하다. 둘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날이 멀지않은 지금도, 이 책들은 아이방 책장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고, 얼마전 책장정비를 한참 하던 시기에도 이들을 위한 자리를 지켰다. 처음 살 때는 애 핑계를 대고 산 책들이라 둘째방 책장에 넣었지만 애는 읽지 않는다.(아니 왜 안읽냐고, 이 세상 재미진 책을.)

 

초등학교, 그러니까 그때는 국민학교였던 그 때, 아마 3-4학년이 막 되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도 동네에는 책 외판원이 돌아다녔다. 엄마는 그 책 외판원을 통해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 소녀 세계문학전집> 30권을 구매하셨다. 1981년이 초판인 책인데 전권은 60권이고 앞의 30권까지는 외부가 파란색, 뒤의 30권은 외부가 갈색(또는 짙은 보라?)이었다. 아마도 경제적 이유로 그때 엄마는 나와 동갑의 아이가 있는 옆집과 사이좋게 나누어 30권씩을 구매하셨던 터라, 우리집에는 30권의 파란책 밖에 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9번은 소공자였고, 10번이 소공녀였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책. 1-30번까지의 책은 세계 각국의 전래동화집(영국동화집, 프랑스 동화집, 남유럽 동화집, 중국 동화집 등이 있었다. 내가 지금 쓰는 아이디 ashima는 이 시리즈의 중국 동화집에 실린 동화 <아시마>에서 기인한다)을 비롯한 아동용 이야기가 많았고, 후반 31-60 까지는 그리스 로마신화를 시작으로 세익스피어에 레미제라블, 돈키호테, 삼국지, 서유기 같은 고전 축약본(,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작품을 아동용으로 축약, 개작한 것)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두 집이 책을 나눠서 살 때에는 서로 다 읽고 나면 돌려가며 읽자가 약속이었을 텐데, 활자에 미친 나는 그 30권을 후루룩 뚝딱 다 읽어버렸고, 책을 그다지 읽지 않았던 옆집에선, 아직 누구도 그 책을 전부 다 읽지 않은 상태여서(게다가 후반부 30권은 아이들이 탐낼만한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무려 성서 이야기라는 성경 축약본도 한권 들어간 시리즈였으니까.) 책을 빌리려고 하면 눈치를 주었다. 처음에는 눈치를 주는 정도였는데 나중엔 대놓고 거절을 해서(아직 안 읽어서 못 빌려 줘.) 후반부 30권 중에는 읽은 책 보다 읽지 않은 책이 더 많다. (그래도 조르주 상드의 <사랑의 요정>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쇼팽의 연인 그 조르주 상드) 명작의 축약본을 혐오 수준으로 싫어하는지라, 읽지 않았음이 오히려 다행으로 느껴질 정도니까 별로 아쉽지는 않다.

 

정말 미친 듯이 좋아했던 전집이었지만, 그때도 어렴풋이 이거 뭐가 빠진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더랬다. 그때는 완역의 개념도 잘 모를 때여서 무의식중에 이게 원문의 전부일까? 하는 생각. 완역에 집착하는 나는, 그래서 이 책들을 읽던 시기가 그리울 뿐, 자체가 그립지는 않았다. 소장의 욕구도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축약본과 다이제스트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목록 그 자체는 나에게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시공주니어와 웅진주니어에서 완역본을 출간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읽었던 책들을 기준으로 사모으기 시작했다. 오오 완역본이다아아아아아! 외치면서. 극도로 총애했던 몇몇 이야기들은 (소공자, 소공녀, 작은아씨들) 출판사별 완역본을 다 가지고 있다. 번역가가 다르니까. 그 외에도 이 30권 안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책들의 완역본을 모두 소장했다. 여러 형태로. <쿠오레>라는 제목으로 이 전집의 23번이었던 책은 창비아동문고 <사랑의 학교1,2,3> 완역본을 가지고 있고, 17번 십 오 소년 표류기는 열림원에서 나온 쥘 베른 전집을 갖추면서 완역본을 갖췄다. 18번 엑토르 말로의 <집 없는 아이>는 궁리 출판사 판을 가지고 있다. (시공사에서 이 책의 완역판은 왜 안냈는지 모르겠다)

 

전집의 추억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곽아람의 어릴 적 그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부분의 전집들은 이 계몽사 <소년 소녀 세계문학전집>을 제외하고는 단 한 질도 나의 소유였던 적이 없었다.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ACE 88>(종종 에이브 전집-ABE 88-과 혼동되어 검색된다. ACE 88이 좀 더 어덜트한 소설들이 많았다. 어차피 축약본이었겠지만 반지의 제왕까지 수록된 전집이었다.)은 나와 두 살 터울의 외사촌이 가지고 있었다. 이 전집에서 <백만년 에이라>를 처음 읽었을 때의 매혹은 대단했다. 그 뒤 진 M. 아우얼의 <대지의 아이들> 시리즈를 모두 소장했다. (물론 완역이다. 하하하) 외가에 갈 때마다 함께 놀자는 사촌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책장 앞에 붙어있게 만든 전집이기도 했다. 다행히 이 전집의 소유주였던 두 살 아래 사촌동생은 나와 비슷한 수준의 활자벌레여서 내가 책을 빌려보는 걸 조금도 고까워하지 않았지만, 그렇게도 너그러웠던 외숙모도 이 책을 빌려주려 하지는 않으셨다. 이 전집은 당시 오늘 세계 아이들 최고 책 에이스라는 어마어마한 수식어가 붙어있었고 외숙모는 이 책을 사 준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아마 많이 아끼셨던 모양이다. 책을 빌려주는 것은 물론 전집에 이가 빠지는 것을 혐오 수준으로 싫어하는 나는, 그때도 외숙모를 원망하지 않았고, 지금은 너무나도 이해한다. 어쨌든 자주 만나던 사이지만 아무래도 남의 집에 있는 책이라 이 88권을 전부 독파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나는 이 전집의 몇몇 소설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 외숙모는 다른 책은 아주 잘 빌려주셨다. 그리고 나는 외숙모의 책장에서 무려 세로 쓰기로 된 <왕비열전> 전집을 빌려 읽었다. 하하하.)

 

지경사 판 <소녀 명랑 소설> 시리즈는 큰언니의 단골 선물이었다.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 5살 터울의 언니는 생일이나 어린이 날,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 이 시리즈의 책을 한권씩 사 주었다. 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가 언니의 첫 선물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나중에 언니는 작은 아씨들 시리즈의 후속편을 사서 선물해 주었다.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의 8번 작은아씨들은 베스가 병을 앓았다 회복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작은아씨들 1부인 셈이다.) 그 뒤로 언니는 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의 책을 때마다 한권씩 사 주었다.

그리고 이 시리즈 안에, 소설판 캔디캔디 1,2,3이 있었다. 아빠를 조르고 졸라 이 세 권을 사서 옥상에 누워 읽었다. 하늘은 새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햇살이 무섭도록 쨍하던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날이 그렇게 좋으면 캔디 캔디를 읽던 날이 떠오른다. 아아, 나의 테리우스.

 

곽아람은 1979년생이다. 나와 거의 동년배인 셈이라 우리의 유소년기를 지배하는 책은 거의 겹친다. 다행히 나는 이야기에는 집착하지만 그 자체에는 집착하지 않아서 곽아람이 겪은 책 수집의 에피소드는 없다. 지금도 그때 읽었던 그 책을 소장하고 싶은 욕망은 전혀. 그저 너도? 나도! 반가워!!! 라고 외치는 기분이었다.

 

곽아람의 책을 읽고 바로 어느날 구입해 반쯤 읽고 책장에 던져뒀던 중앙일보 문화부장 이영희의 책 안녕, 나의 순-을 꺼내 다시 읽었다. 나의 초-중등기를 지배했던 것의 팔할이 문학(정확히는 동화, 영 어덜트 소설)이었다면 나의 고등학교 시기를 지배했던 것은 구할이 만화였다.

 

그 시절 연년생 언니와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순정만화 잡지들은 이제 없다. 성인이 돼 독립을 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본가에 돌아가니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보지도 않는데 쌓아두면 뭐하니? 먼지만 쌓이고 벌레 생겨라고 엄마는 냉정하게 말했었지.

이영희, 안녕, 나의 순-, 다산북스 놀, 2020, p.6

 

이 경험, 나도 있다. 하하하. 만화잡지 <윙크>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938월에 창간되었다. 격주간지였고, 한권에 2500원이었다. 창간호부터 사모았다. 울엄마가 무슨 맘인지 그때 윙크 살 돈은 꼬박꼬박 주셨고, 집에 한권 한권 쌓아두는 것도 그냥 두셨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낙이었다. 대학을 가느라 집을 떠나면서 그 잡지를 얌전히 라면박스에 넣어 고이 보관했다. 또 한 번, 엄만 대체 무슨 마음이었는지 그 만화잡지 박스를 이사하면서도 버리지 않고(내가 대학을 들어간 뒤 우리집은 사정상 두 번의 이사를 했다, 내가 없는 사이)잘 들고 다니셨다. 몇 년을 잘 데리고 있던 엄마는 어느날, 그 책을 묻지도 않고 싸그리 버려버렸다. 윙크가 단종되어 전권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다음의 일이라 아까워서 속이 쓰렸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 고등학생이던 우리 교실엔 정해진 책 공급책이 있었다. 할리퀸 로맨스는 수영이가 공급했다. 매달 새로운 책이 나오면 만화방에서 빌려와 순서를 정해놓고 수업시간에 교과서에 끼워넣고 읽었고, 나는 윙크 공급책이었다. 단행본 만화 공급책은 민지와 몇 명이 더 있었다. 할리퀸 로맨스는 만화방이나 책방에서 빌려오는 거였고, 단행본 만화는 각자 모으는 책이나 소장하고 있는 책이 달랐다. 우리는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아르미안을 읽었고, 레드문을 읽었고, 불의 검과 점프트리 에이플러스를 읽었다. , 지금도 기억나는, 이은혜 작가. 우리 여고 앞에 와서 사진을 찍어 가는 걸 봤다는 아이가 있었지.

 

한동안은 또, 그때 봤던 만화책들을 엄청나게 사 모으던 시기가 있었다. 중고나라를 통해, 불의 검이니, 안녕 미스터 블랙이니, 이은혜의 책들을. 30이 가까워 오던 나이였다. 결혼을 했고, 내 책장을 보던 남편은 딱 두가지를 말했다. 사조영웅전을 보고는, “나는 무협지를 사서 읽는 사람을 본 건 네가 처음이야.” 했고 만화책들을 보고는 나는 만화책을 사서 읽는 사람도 네가 처음이야.” 했다. ... (그러는 남편도 신의 물방울은 사서 읽었다. -물론 다 팔아치웠다, 내가.)

 

아무래도 만화책이라. 딱히 소장의 욕구가 강하지 않은데다 권수도 워낙 많아서 다 팔아 치우고 몇 개만 남겨두었다가 몇 번의 책장 구조조정을 하던 중에 마저 다 팔아치워 버렸다.

 

마지막으로 팔았던 만화책이 이현세의 <남벌>이었다. 하도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라(순정도 아닌데!) 학산문화사에서 애장 박스판이 나왔을 때 냅다 사서 소장하고 있던 책이었다. (이 책을 주문할 땐 남편도 신의 물방울을 살 때라 뭐.) 팔까 말까 많이 망설이다가 가격도 별로 내리지 않고 당근에 올려놓고 잊고 있었다. 팔리면 팔고, 아니면 안고 갈 생각이었다. 올린지 한 반년이 지났을 무렵인가 갑자기 연락이 왔고, 팔았다. 구매자는 우리집 근처 지하철 역을 거래장소로 지정했고, 우리는 지하철 역 앞 파리바게트에서 만났다. 나온 분은 뜻밖에도 50이 훌쩍 넘어 60 가까이 되어보이는 아저씨였다. <남벌>을 사서 읽겠다고 지하철을 타고 와서 중고거래를 하는 아저씨라니. 그는 나를 보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내가 만화책을 사러 간다고 했더니 안그래도 아내가 퉁박을 주더라고요. 무슨 만화책을 사서 보냐고.” 무슨 답을 하겠는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네네, 아내분은 그럴 수도 있죠. 대답을 하는데 그분이 책이 든 쇼핑백을 아주 소중히 안아들며 그랬다.

내가 옛날에 읽은 만환데, 하도 재미있게 읽은 추억이 있어서 꼭 다시 읽고 싶어서 그런다고 했어요.”

어정쩡하고 어설프게 네네, 재미있게 읽으세요. 하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나도 마흔이 넘어 만화책 중고거래를 하는 아줌마가 될 줄은 몰랐고, 그분도 육십이 다 되어 만화책을 사들이는 아저씨가 될 줄은 몰랐겠지. 우리의 나이는 거의 15년 이상 차이가 났지만 같은 만화책의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시기 이후로는 만화를 거의 보지 않아서(나는 웹툰도 보지 않는다.) 만화에 대한 추억은 고등학교 시기를 전후로 하여 거의 멈춰있다. 그래서 이영희의 책에서는 내가 모르는 만화 이야기가 더 많다. 이영희 기자는 아마도 나보다 한두살 많을 것도 같은데 말이지.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으며, 이승환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문을 외어 보자~

 

내가, 완역을 핑계삼아 어릴 때 집착 수준으로 좋아하며 읽었던 책을 사서 모으는 이유는, 이 책들이 주문이기 때문이다. 나를 그때 그 순간으로 데려가는, 마법의 주문. 끝내 외숙모의 책장에서 빌려 읽었던 세로쓰기 왕비열전까지 기억하게 만드는, 그 시기의 나를 다시 불러내어 그때의 그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최근에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그 외숙모의 남편이었던, 우리 엄마와 관계가 아주 각별했던, 우리집 딸들을 모두 고루 아껴주셨지만 그 중에서도 나를 더 많이 편애하셨다는 것을 그분도 알고 나도 아는 그 외삼촌이 갑자기.

 

오래 만나지 못했던 사촌을, ACE 88의 소장자였던 그 사촌을 거의 10년만에 그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사촌도 장가를 갔고, 나도 시집을 갔으니, 내가 명절에 외삼촌에게 인사를 갈 때쯤, 사촌은 이미 아내와 처가에 간 뒤여서 만날 일이 없었다. 그 사이 집안 행사도 없었고.) 장소가 장소임에도 오랜만에 만난 사촌은 반가웠다.

문득, 그 사촌에게 간만에 전화라도 할까보다. ACE 88 기억하니? 라고 묻게.

 

2025.7.27.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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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7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모든 책의 추억이 저랑 겹쳐서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
 
나는 글과 오래 논다
강인숙 지음 / 열림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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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대할 수 있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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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가가 읽은 세계문학 - 증보판
김연수.김애란.심보선.신형철.최은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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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가가 읽은 세계문학by 김연수 외

 

읽은 날 : 2025.5.15.

 

나는 수능 2세대다. 수능으로 대학을 간 두 번째 학번이고, 어쩌면 수능체제 교육을 제대로 받은 첫 세대 일지도 모르겠다. 수능, 그러니까 수학능력시험이 학력고사를 대체하게 되리라는 발표가 나왔을 때 교육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교사들조차 자신이 가르쳐야 하는 수능이 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그때도, 지금도 한다. 수학능력시험이라는 말을 처음들은 사람들은 수학數學실력 만으로 입시를 한다는 이야기냐고 물었고, 그 수학數學이 아니라 이 수학修學 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멍해졌다. 언어 그 자체로만 따졌을 때, 수학능력시험은 과거의 학력을 테스트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테스트하는 거니까. 잘 배웠느냐를 묻는 게 아니라, 잘 배울 수 있느냐를 묻는 시험. 도대체 뭘로 기준을 잡아야 하나.

 

나는 그 한가운데 학생으로 앉아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3월엔 지금도 그러하듯 모의고사를 보았고, 그때의 모의고사는 학력고사 형태였다. 그러니까 나는 실은, 학력고사라는 형태도 수능이라는 형태도 모두 교육현장에서 경험한 세대인지도.

 

6-7월경, 수능형 모의고사를 처음 보았을 때, 학교는 완전히 뒤집어 졌다. 말도 안 되는 성적 역전현상이 쏟아진 거다. 내신 1-2등급을 받던 아이가 수능모고는 550명중 400등 밖으로 밀려나고 내신이 엉망인 아이가 수능모고 등수는 전교 30등을 하는 식으로. 그 중 아이들을 가장 경악하게 만든 건 언어영역(지금의 국어영역)이었다. 시험에 출제된 모든 지문이 처음 보는 지문이었던 거다.

 

어쩌면 맞는 말이다. 수학능력이라는 건, 앞으로 뭔가를 배울 수 있는 능력을 보겠다는 이야기고, 뭔가를 배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텍스트 해석능력, 요즘 유행하는 문해력이니까. 최초 수능 언어영역의 기조는 교과서 외 출제였다. 그러니까, 문학으로 한정 지어 이야기하자면, 학교에서 문학 독해능력을 배워 새로운 문학작품을 제대로 해석해 내봐라, 하는 거다. 이론은 좋지.

 

입시에 특화된 지역(우리 지역은 고등학교 입시가 있었다.)에 입시에 특화된 학교(그랬다, 내가 나온 고등학교를 포함한 그 지역 인문계고등학교는 4년제에 90%가 진학했다. 내 또래의 대학진학률을 생각할 때 이건 말도 안 되는 수치다)는 빠르게 적응했다. ‘수능도 학력고사를 가르친 방법으로 정복해 주지. 교과서 외 지문 출제가 기조야? 그렇다면 교과서 외의 지문을 전부 가르치겠다는 게 그들의 목표가 되었다. 이 무슨 6.25 중공군 인해전술도 아니고.

 

학교 앞 문구점을 겸하는 서점에 바로 각종 참고서와 문제집이 깔렸다. 현대시만 300편이 실린 문제집이 우리 앞에 등장했다. 교과서에 실릴 일이 없었던, 원래대로라면 대학 국문과에 가서나 배웠음직한 온갖 고전 시가와 가사와 산문이 몽땅 수록된 문제집도 나왔다. 나 현전하는 향가 25수에 정철이 쓴 모든 가사를 고등학교 때 배운 여자. 하하하하하하. (도대체 저 많은 작품을 다 읽고 해석할 시간이 어떻게 났냐고 묻지 마라.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다만 우리는 7시까지 등교해서 저녁 6시까지 꽉 채워 정규수업과 보충수업을 했고 밤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했으며 토요일엔 5시 하교, 방학 땐 오전엔 보충수업 오후엔 자율학습을 했다. 뭐 이쯤 하면 90%4년제 진학률이 납득이 되지 않나. 미친 세월이었다.)

 

그래. 시는 짧으니까 그렇다 치자. 고전이건 현대건 소설은 어쩔 건데? 심지어 해외 문학도 있는데? 중장편 소설이나 장편서사시는 어쩔 거야. 신동엽 <금강>이나 김동환 <국경의 밤>을 모두 문제집에 실을 거야? 입시와 돈에 관련되자 출판사들의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갔다. 중요작가의 주요작품을 모아놓은 단편집은 기본, 장편 소설의 다이제스트 판과 작품해설 모음집들이 즐비하게 깔렸다. 고전문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뒤돌아 생각해 보건대, 저작권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해적판이었음이 분명하다.

 

출간과정이야 어쨌건 전문가들에 의해 선별되어 최고의 작품성이 보장된 시에 최고의 평론가들이 요점정리를 해서 떠 먹여주는 해설집이라니. 10대 후반의 말랑한 뇌는 이해의 과정 없이도 그 모든 글귀를 전두엽에 때려 박았다. 이해가 없으니 감동이 있을 리가. 그러나 앎과 감동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고, 나는 그것들을 그냥 알았다’. 이미 최고의 평론가가 얌전하게 해체해 가지런히 정리해 둔 글이니 나의 견해 따위는 무관했다. 문자는 그대로 뇌에 박혀 이것이 나의 해석인지 타인의 해석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지 않았는데 누군가의 작품 해설에 내가 토를 달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냥 받아들이는 거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야심한 시간,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온갖 문학작품의 다이제스트판과 작품해설집을 읽던 시기가. (‘자율학습이라고 해 놓고는 실은 강제여서 우리는 3년 내내 모든 학생들이 별 보고 나와 별 보고 들어가는 생활을 했다. 그때 우리는 야자가 없다던, 머리를 기를 수 있다던 서울의 여학생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 그 끔찍한 귀밑 3센치.) 미친 세월임에도 축복받은 시절이었다. 수능 언어영역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선생님들의 고육책은 많은, 실은 대부분의 아이들을 미치게 만들었지만(그리고 실제로 미친짓이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미셀 트루니에 식의 교양인이 아닌 교육인이 될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그 미친 현대시 300(만 배웠겠나요...) 문제집이 아니었다면 교과서 외의 시를 절대 읽지 않았을 것이고, 선생님이 읽으라고 해서 읽었던 그 많은 다이제스트판과 작품해설 모음집에서 본 대부분의 작품은 작가 낯가림이 심하고 독서 편식이 심한 나에게 그나마 작은 문이 되어주었다. 그때 열린 그 작은 문으로 나는 더듬더듬 문학의 세계를 헤쳐나가는 중이다.

 

이 책은 내가 그때 열었던 그 문보다 훨씬 아름답고, 그 문 너머의 세계를 궁금해지게 만든다. 이 문을 열고 나와보세요, 문 너머의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고 흥미롭답니다, 같이 걷지 않으실래요? 라고 유혹하는 아름다운 책이다.

 

우리 다 같이, 문을 열어 보아요. ^^

 

2025.5.19.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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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유전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강화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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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정한 유전by 강화길

 

읽은 날 : 2025.4.18.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까지의 5-6년간, 나는 거의 매년 한 번 씩 병원에 입원을 했다. 병명은 매번 동일해서 편도선염이었고, 대학을 다니고 있을 무렵의 겨울 방학이 끝날 무렵이었기에 입원하는 병원도 매번 동일했다. 지금은 없어진 창원 주택가 모퉁이의 자그만 종합병원.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약속한 듯 물었다. 편도선 제거 수술을 하지 그랬니.

 

매번 같은 병원에서 매번 같은 의사에게 진료를 보니 의사는 내가 왜 아픈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았다. 편도선이 약한 것은 엄마 쪽의 유전이요, 그럼에도 무려 입원씩이나 하게 될만큼 심하게 앓는 것은 내 탓이었다. 몸은 쉬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성실하게 전달하는데 그 컨디션 난조를 뚫고도 내 하고 싶은 일들을 해버리는 성격이라 못 버틴 몸땡이가 강제 셧다운을 시켜버리는 게 나의 편도선염이라는 게 그분의 판정이었다. 이 편도선염조차 없다면 너는 크게 앓게 되리니 제거 수술 대신 그냥 일년에 한번쯤 병원 입원하는 걸 택하라고. 그분의 말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너도 철들면 나아지겠지.”

 

편도선염은 말 그대로 염증이라 통증과 고열이 기본인데 사람이 열에 들뜨면, 세상이 몽롱해지기 시작한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허공을 둥둥 떠 다니는 느낌, 체감되는 입김의 뜨거움. 그 중 제일 재미있는 건 약물의 효과로 실시간으로 열이 떨어지는 것을 체감하는 것과, 역시나 그 약물의 효과가 떨어질 때쯤 실시간으로 열이 오르는 것을 실험 관찰하듯 보는것이었다. 그럴 때 내 몸은 투명 실린더 같이 느껴졌다.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이라니. 드래곤 브레쓰를 내뿜으며 오한과 더위를 오고가는 3-4,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돌아가고 그렇게 한바탕 앓고 나면 봄이 왔다. 병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샛노란 산수유 꽃을 보며 김종길의 <성탄제>를 중얼거리던 날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 그 붉은 산수유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의사의 말대로 내가 철든것인지, 20대 중후반부터는 편도선염의 횟수가 줄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심각한 고열이 오지도 않았다. 더는 편도선염으로 입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왔어, 왔어. 왔다고. 그분이 강림하셨어.

 

몸과 정신이 분열했다. 통증을 견디면서도 그 목젖 너머의 염증과 고열이 연락 끊어진 옛친구를 다시 만난 듯 반가웠다. 그 몽롱함과 세상에서 유리된 느낌은 기꺼울 정도.

 

침대에 누워 이 책을 읽었다. 눈에 띄는 책 중에 가장 작고 가벼워 보였기에 골랐고 오르내리는 열 사이사이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잠들었다 깨면 다시 읽고. 눈은 글자를 읽는데 내용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 책을 끝냈을 때 내게 강림하셨던 그분도 퇴각을 알렸다.

 

처음 읽은 강화길의 작품은 다른 사람이었고, 2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이었기에 읽었다. 작가에 낯가림이 심한 내가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문학상이다. , 나는 권위에 순순히 복종하는 소시민일 뿐이니까, 라고 이야기 하기엔, 이 문학상에도 낯가림을 좀 하는 편이긴 해서. 내가 믿고 보는 문학상보다 믿고 거르는 문학상이 더 많긴 하다. 하여튼 한겨레 문학상은 믿고 보는 문학상이라 강화길이라는 낯선 작가를 만났는데 그녀의 글은 내가 한겨레 문학상에 대한 신뢰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 이어서 괜찮은 사람을 읽었고 이후 출간한 작품들도 모두 따라 읽었다. 특히 대불호텔의 유령은 심윤경의 책 영원한 유산과 붙여 읽은 탓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비슷한 시대, 건물을 중심으로 한 서사, 남성 화자와 여성 화자의 차이. , 이런 대조 대비 너무 재미있는 거 있지. 읽은 직후엔 두 글을 가지고 리뷰 써야지 해 놓고는 이러고 있다, 내가.

 

강화길은 오컬트 요소를 글에 잘 끌어들인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해체하는데 서사가 강한 작가라 그 해체된 이야기와 환상과 오컬트 요소들이 하나의 강력한 서사에 묶여 단단한 구조를 이룬다. 강화길의 환상은 오해에서 시작해 인지부조화로 끝난다. 오해라는 요소를 가장 잘 다룬 작품이 다른 사람이었고, 여기서 오해는 타인이 나를 오해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내가 나를 오해하는 인지부조화까지를 포함한다. 강화길은 그 오해를 교정하는 대신 오해를 오해 그 자체로 인정하고 끝까지 밀고 나간다. 바로 이 시점에서 강화길의 강력한 서사가 힘을 발한다. , 이 작가 글 참 잘 쓰네.

 

그리고, 이번에 강림하신 그분과 함께 하는 동안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앞에 안 읽고 넘어간 페이지, 또는 챕터가 있었나.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아 이 장면 왜 이렇게 낯설지 않고 좋지. 하며 읽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중편 한권을 읽었는데, 읽긴 읽었는데 서사는 서로 연결되지 않고 이 인물이 앞에 나왔던 그 인물인가, 앞에 나왔던 그 인물은 대체 어찌된 거지. 이러면서. 느슨하고 성긴 소설이었는데 장면 장면의 서사가 하도 강력하고 매력있어서 그냥 글을 읽는 것만으로 좋았다. 이야기가 하나로 온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편인데, 이 소설은, , 그래서 무슨 이야기냐? 라고 묻는다면 글쎄, 내가 읽기는 읽었는데, 무슨 이야긴지는 모르겠어.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아. 참 좋았다. 강화길의 여성서사는.

 

ps. 개인적으로 여성서사이런 류의 분류,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화길에게는 쓰게 된다.

 

2025.4.28.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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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책장 2025-05-03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0대 때부터 앓고 있는 잔병들이 지금까지 절 괴롭히는 중인데 의사선생님이 오히려 안쓰러워할 정도였어요.
우스갯소리로 실손보험 없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고 ㅎㅎ
편도선염으로 일 년에 한 번씩 입원할 정도였으면 엄청 고생하셨겠어요ㅜ
아픈 와중에도 책 한 권 뚝딱 읽으시다니 • ᵕ •
아프지마시고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ෆ
 
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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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by 한강

 

읽은 날 : 2025.4.27.

 

1. 매년의 노벨문학상 발표날이 되면 온갖 언론사와 문학단체에서 시인 고은의 집 앞을 찾아가 지랄 발광 난장판을 벌여대던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 난장판에 지친 고은은 발표날 즈음이면 집을 비우기 시작했다 한다.


2. 김혼비, 박태하의 전국 축제 자랑에는 웃지도 차마 울지도 못할 장면이 하나 기록된다. 벌교 꼬막축제에서 펼쳐진 작가 조정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위한 발대식’. 심지어 조정래 작가를 모셔다 놓고 한 행사였다. 맙소사.

 

강소국 반열에 들어섰지만 한국인들 스스로도 너무 잘 인지하고 있는 사회 각 분야의 빈약한 기초를 단박에 덮어 줄 외부의 권위로 지나치게 자주 소환되는 노벨상, K-노벨상-집착의 한쪽 끝이 이곳 벌교까지 닿아있었다. 세상에 노벨 문학상을 받자고 발대식을 한다는 발상이 가능하다니!

김혼비, 박태하 전국 축제 자랑, 민음사, 2021, p.247

 

3. 그래서 2024년 한강의 수상 소식은 많은 사람들의 앞통수와 뒤통수를 동시에 쳤다. 그 중 제일 억울할 사람은 언론과 문학계의 호들갑에 매번 이름이 오르내리던 그 작가들일 게다. ‘억울할거란 무심한 언사조차 억울할 것을 알고 있지만, 대체 어찌 설명해야 하지. 작가님들의 무고함을 제가 압니다. 라고 해야하나.

 

4. 2024년 노벨상 수상 이후, 한강의 첫 책이 나왔다. 이 책이 15,000원이다. 페이지수를 세는 정도가 아니라 글자의 갯수를 세어야겠다. 문지, 너무하지 않습니까.

 

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문장은 여전히 아름다운 울림이 있다. ‘한국문학에 벼락같이 쏟아진 축복이라는 찬사는 2001년 김훈의 칼의 노래에 동인문학상을 수여하며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박완서, 유종호, 이청준, 김주영, 김화영, 이문열, 정과리)이 한 찬사인데, 슬쩍 빌려다 써 본다. ‘한국문장에 벼락같이 쏟아진 축복이라고.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한국어 문장이라니.

 

6.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의 한 구절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p.20)라는 구절을 읽었다. 한강은 그 죽은 자들에게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드리는 것으로 그들의 언어를 기록한다. 이미 너무나 유명해져 버린 한강의 경구 역시 그 언어에서 답을 찾는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p.19)

 

7. 아마도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에, 작가가 쓴 일기에 가까운 글 출간 후에첫 장은 한강이 이 소설을 얼마나 힘들게 썼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거라면 이렇게 못하지 싶게. 그 모든 고통과 인내 속에서도 작가는 쓰고 싶었기에 썼을 것이고, 써야만 했었기에 썼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

 

더 이상 이 소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p.41)

 

울면서 장편을 완성한 한강은 더 이상 눈물로 세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축한다.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죽은 자들에게 빌려드려 언어로 기록하는 일은 참혹했다. 과연 가능할까 회의하며 포기하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하고, 그럼에도 끝내 포기하지 못하여 다시 시작하는 나날들. ‘더이상 이 소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축하게 되는 그 심정. 그 노력의 결과가 노벨상이다.

 

8. ‘어쩌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p.74)에 기대어 가이없어 보이는 노력을 하게 되는 일. 그것이 언어를 사용하는 일이다. 박경리가 말하듯,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 해도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 치도 헤어 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박경리, 거리의 악사, 민음사, 1977, p.10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이 산문은 토지의 자서自序로 쓰였다.)이다.

 

9. 작가의 희망 찾기에 무한 감사를.

 

2025.4.27.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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