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의 맹점은 무언가를 내가 한다,는 느낌이 별로 없다는 거다. 특히 절제와 수긍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두 돌 반의 아이를 종일토록 상대한다는 것은 직장을 다녀서 종일토록 고되지만 그래도 하루를 마감한다는 개념과는 사뭇 다른 것 같다. 어느 것이 더 힘들다,는 경중의 문제가 아니라 하루 하루가 줄줄 늘어져서 뚝뚝 끊어지는 맛이 없으니 시간아 어서 가라, 어서 커라, 이런 식이 된다는 문제가 있다. 

예전에 온라인 카페에서 어떤 이가 아이 키우는 게 너무 힘들고 무료하다,고 하자 하루하루를 그냥 때우지 말고 직장을 다니듯 계획을 세우고 어떻게 함께 해줄까를 고민해 보라는 조언이 본 기억이 남는다. 머리로는 그래, 바로 그거야! 해놓고 또다시 나는 시계를 본다. 회사에 다닐 때는 다섯 시 이후 부터 이십 분 간격 정도로 시계를 슬쩍 슬쩍 보긴 했는데 이건 아침 열 시부터 시계를 보게 된다.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버티나. 직장에 다녀도 아이를 키워도 하루는 여하튼 고달픈 것이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는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거야, 라는 도피처를 아예 불신하게 되었다. 어떻게 해도 하루는 곤곤하다. 그러니 되도록 지금이 전성시대라고 생각하고 사는 수밖에 없다고 혼자 다독이기로 했다. 

어제 밤에 인터넷 항해에 빠져 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극성이 아니라 성의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감이 깨어 있을 지금 어떻게 책좀 보고 글좀 써볼 시간만 호시탐탐 노리며 아이를 방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과 함께. 

오늘. 지하철을 삼십 분을 타고 어린이 대공원에 갔다. 즉흥적으로.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물론 지하철 안에서 <백년의 고독>을 읽기는 했다.--;; 아이는 으레 엄마는 그러려니 하며 사람 없어 좋다고 에어콘 바람 쐬며 나름 즐거워했다. 

흐릴 거라 생각했던 날씨는 폭염에 햇빛 정조준이었다. 일단 식물원에 들어가 식물공부를 좀 하다 너무 예쁜 덩굴꽃을 봐서 이름을 기억해 두려고 이름표가 보이게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이 지경이다. 리아. 아...이젠 내가 무언가를 한다고 했는데 뒤돌아 보니 그것도 아닌 시점까지 와버렸다.

 

널따란  놀이터에서 줄서서 타지 않아도 되는 그네를 독식하며 즐거워 하던 따님은 맹수류에 잔뜩 호기심을 보이시며 내내 안고 관람하기를 주장해 주셨다. 극기 훈련의 시작이었다. 비오듯 하는 땀과 안기에는 큰 아이를 안고 표범과 퓨마우리를 지날 때마다 이게 호랑이냐! 호랑이를 보여달라고 주장해 대는 그 분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 큰 맹수 우리를 맴돌아야 했던 엄마를, 표범 보고 호랑이라 눙치려고 벼르던 그 엄마를, 한 큐에 나가떨어지게 해주시는 분. 그거 표범이다!라고 외치는 옆에 아주머니. 360도 돌고 오니 호랑이는 하늘로 올라간 것인지 코끼리가 맞아 주신다.  

호랑이는 없네.  

인공 냇가와 분수로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그곳에 가보겠냐고 하니 시큰둥하다 막상 들어가니 재미있는 모양인지 목욕하듯 온 몸을 담그고 흐뭇해한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이제는 엎드려서 헤엄치는 시늉을 한다. 어떤 또래 아이가 재미로 한 번 밟고 지나가 주신다. 그 아이의 엄마가 혼비백산하여 뛰어온다. 정작 내 아이는 시큰둥하니 그냥 일어난다.  

지하철 타고 돌아오는 길, 그저 몸으로 때운 시간들이 괜히 흐뭇하다. 내가 뭔가를 한 것 같고 해 준 것 같다. 그러니 또 <백년의 고독>의 그 허랑방탕하고 기묘한 저 세계로 들어간다. 스리슬쩍. 건너편에 아주머니가 아이를 쳐다 보는 것 같다. <백년의 고독>에서 아홉살의 소녀에게 반해 각시로 맞으려고 머리를 굴리는 남자 얘기에 빠져 있는 동안 아이는 사탕을 물고 옆 할머니에게로 쓰러져 잠들어 있다. 미안시러웠다. 그러니 또 그 땡볕 더위에 아이를 들쳐 안고는 그 끝이 안보이는 계단들을 오르락 내리락 한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폭풍의 언덕 위로 도저히 또 올라갈 엄두가 안나 맞춤하게 오는 택시를 타버렸다.

꿈꾸는 섬님 서재에 갔다 우연히 어린이 대공원 탐방기를 읽고 작성하다. 뵐 수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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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7-26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에게도 동물원에서 엄마를 극기훈련시키는 따님이 있으시군요..전혀 생각을 못했다지요.

blanca 2010-07-27 18:57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시간은 정말 잘 가더라구요...그리고 저도 조금 재미있었답니다.^^

꿈꾸는섬 2010-07-27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기훈련...맞아요. 전 낙타타는 곳에서부터 주차장까지 현수를 안고 업고 땀을 줄줄 흘리며 갔다지요.ㅎㅎ
그래도 아이가 즐거우니 우리도 행복하잖아요.^^
코끼리 옆에 사자, 사자 옆에 호랑이가 있는데 그걸 못 보셨군요. 아쉬워라. 다음엔 꼭 볼 수 있을거에요. 또 가셔야하는거 아시죠?

blanca 2010-07-27 18:59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아,,거기 가셨군요. 상상이 되서 또 갑자기 ㅋㅋㅋ 아이궁. 꿈꾸는 섬님도 힘드셨겠어요. 더위에 아이 데리고 야외 나가기 참 힘들지만 또 지금 아니면 언제 이렇게 함께 할 수 할 수 있을까 싶어 자주 나가려고 해요.

물놀이 그게 참 잼나서 또 가보려구요...이번에 꼭 수건도 가져가려구요. 여벌옷만 입고 수건이 없어서 대략 낭패였답니다.--;;

비로그인 2010-07-27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하필이면 서재 대문 사진의 괴테의 말이 어찌나 의미심장한지요. 그럼요, 그럼요. 감각은 우리를 속이지 않아요. 하지만 판단이 속일 뿐이지요. 때로는 친밀한 타인들(표범이다!), 때로는 냉정한 타인들(밟고 지나가 주신다) 사이에서 나를 온전히 알아내어야 할 존재를 책임지는 일은 얼마나 저릿한가요.

무얼 한다고 했는데 뒤돌아 보니 그것도 아닌 시점이라는 말과 사진에서 저 blanca님에게 반해 버렸어요!(제가 왜 이런 것에 반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만 저를 반하게 하는 순간은 늘 이런 순간이어요)

blanca 2010-07-27 19:01   좋아요 0 | URL
쥬드님!! 그저 반해만 주신다면 감사하지요^^ 그 아주머니는 가르쳐 주신다고 하신 건데 그게 그만 저한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고 만거지요--;; 타인한테 대체 어디까지 개입해야 적절할까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대문글은...가끔 되뇌어도 고개를 그 때마다 끄덕이게 되어서요..사실 그게 아닌 걸 알면서 내 판단을 밀고 나가는 경우가 꽤 많은 것 같아요. 더운데 건강 유의하세요^^

무해한모리군 2010-07-27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또 읽어보아요.
내가 경험한 적이 없는 아이와의 세계를.
온전히 어떤 생명을 책임지는 것은 얼마나 고단한 일일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쨌거나 꼬맹이는 즐거운 하루였겠네요.

blanca 2010-07-27 19:02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제 여동생은 신혼인데 벌써 육아의 고통을 저를 통해 대리체험하고 있답니다. 그래도 분명 의미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휘모리님이 참 부러운 것도 사실이네요^^ 휘모리님은 제가 늦게야 깨달은 사회에의 책임감에 관한 의식도 가지고 계시니 더욱 부럽습니다.

2010-07-27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7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극곰 2010-07-2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가끔 님의 글을 읽으면서 아이가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나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했답니다. 저도 3, 5살 아이가 있어서 그 맘을 잘 알아요. 퇴근하고 집에서 시간이 나면 너무 아까워서 짬짬이 책을 들여다보고 했더니.. 어느 날 큰녀석이 그러드라구요. "엄마는 맨날맨날 책만 보고, 나랑은 놀아주지도 않고, 힝~!" 애들이 다 알고 있드라구요. 그래서 요즘엔 회사 점심시간에 책을 보는 진상?이 되어버렸어요. ㅠ..ㅠ

blanca 2010-07-27 19:05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 반갑습니다. 맞아요....물론 안그러려고 하지만 책을 읽으며 건성으로 놀아주는 것도 엄연한 방치에 해당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독서하는 부모가 독서하는 아이들을 만든다지만 그건 분위기 조성 정도인 것 같아요. 점심 시간에 우아...저는 점심시간을 그런 식으로 활용하지 못했는데 대단하세요. 더위 조심하세요. 정말 너무 더워요^^

마녀고양이 2010-07-27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더운날 하필이면 동물원을 갔답니까.. 이긍이긍.
블랑카님 집에서는 강남쪽으로 휙 돌아서 LT 놀이공원도 있고, 삼성 어린이 박물관도 있고, LT 놀이공원 지하에 사람 모형 해놓은 장소도 있고.. 그제 뉴스 보니 아이들 위한 전시회가 또 있던데....
여하간 블랑카님 성격이 무모하단 말예여,, 에어컨 빵빵한 곳에서 나른한 한나절 보내삼~ ^^

고생하셨어여,,,,, 근데 웃긴건 아이 데리고 극기 훈련하는데 살두 안 빠지더란... 블랑카님은 어때여?

아 맞다.... 울 딸두 내가 시험 공부하는거 싫대여, 꼼짝않고 책 들여다본다구,, 아주 싫대여. ^^

blanca 2010-07-27 19:07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 제대로 극한 체험하고 이상스런 쾌감도 느끼고 왔습니다. ㅋㅋㅋ 너무 덥고 힘드니까 멍한 상태라고나 할까요. 삼성 어린이 박물관 너무 가보고 싶은데 지금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해서요. 지하철 타고 고고 해볼까요? 살이요? 오늘 엘리베티어에 비쳐 보니 참....팔뚝이 건장하더군요^^;; 아, 코알라 정도 커도 그러나요? 그렇군요...

stella.K 2010-07-27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극작가 누구더라? 그 사람은 자기 글 쓰려고 아들한테 피아노를 배우게 했답니다.
정작 본인은 글쓰는데 방해 된다고 음악은 듣지도 않고.
그래도 그 아들이 잘 자라 유명 피아니스트가 됐다지요.
그러니 너무 아이들 눈동자같이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블랑카님 책읽을 때 분홍 공주는 자기 나름의 일을 찾아 하잖아요.ㅋ

blanca 2010-07-27 19:08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저도 벤치마킹좀 해야겠네요. 이게 참 딜레마에요. 스텔라님 댓글로 위안좀 받고 갑니다. 예. 자기 나름의 일을 뭔가 사고를 항상 치기는 해요 ㅋㅋ

pjy 2010-07-27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감질맛나는 리아는 뭘까요?ㅋㅋ

blanca 2010-07-27 21:43   좋아요 0 | URL
piy님 도통도통 기억이 단서도 없습니다. 아주 어렵고 긴 이름이었던 것만은 분명한데...방법은 다시 가 보는 수밖에 없는 걸까요--;;

gimssim 2010-07-27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아, 살림, 독서, 글쓰기...정말 대단하세요.
지금은 젊으시니 최대한 일할 수 있는 분량을 늘려서 마음것 하는 것도 좋답니다.
어느 새 세월은 흘러 자꾸만 자꾸만 행동반경을 줄이고픈 때가 곧 온답니다.

blanca 2010-07-28 20:18   좋아요 0 | URL
중전님. 예..욕심과 의욕을 줄여나가는 것도 아름답게 나이들어 가는 과정임을 명심하겠습니다.

비로그인 2010-07-2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동네 가까이에 오셨었군요?

blanca 2010-07-28 20:20   좋아요 0 | URL
마기님! 제가 부러워하는 바로 어린이 대공원 근처에 유모차 끌고 나올 수 있는 엄마가 마기님이었군요? 막내도련님은 이제 괜찮은 거죠? 물놀이하게 되어 있는 곳에 데려가면 좋아할 것 같아요.

순오기 2010-07-2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보이는 꽃이름은 부켄베리아에요.
마치 종이로 만든 꽃같죠? 분홍 다홍 색깔도 예뻐요!^^

blanca 2010-07-28 20:21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갑니다. 부켄베리아!! 안그래도 저 사진 올린 건 누군가가 저 꽃 이름을 알려 주기를 바랐기 때문인데..역시 순오기님입니다.!!

pjy 2010-07-28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역시 순오기님이닷^^

blanca 2010-07-29 15:12   좋아요 0 | URL
pjy님 저 꽃이름 안 잊으려고 칠판에 써놓았어요^^

아시마 2010-07-29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똑같은 고민을 하시네요. 저도 매달 초입에, 매주 초입에, 매일 아침마다, 이번달은 이번주는 오늘은 책 좀 적당히 보자고 맹세에 맹세를 거듭하는데도 그게 잘 안되요. 책의 유혹은 너무나 막강하고,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긍정되는 행위라는 것이 오히려 더 치명적인 것 같아요. 책 읽는 엄마라니, 이건 모르는 사람이 봐서는 너무나 근사하고 모범적인 모습이잖아요? 진실은. 음.

저도 맨날 그래요. 맨날맨날맨날. 책만 읽고 있는 내가 짜증나고, 맨날 저녁에 애들 재우고 나면 아, 오늘도 애를 방치해뒀구나, 하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달력에 오늘 내가 무슨 책 봤나 쓰는 거 서너달전부터 관뒀어요. 한달이면 서른권에 육박하는 책들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아이들을 방치했나 느끼는 거 싫어서요.

전 때때로 제가 책 중독이라고, 진심으로. 느껴요.

blanca 2010-07-29 23:03   좋아요 0 | URL
사회적으로 긍정되는 행위...정곡을 콕 찌르셨어요. 맞아요....예전에 제가 자주 가는 까페에 자아실현과 육아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신랄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나요. 자아실현욕구가 강한 엄마일수록 아이를 방치한다는...너무 극단적이고 편협한 글이었지만 일말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어서 찔리더라구요. 저는 어린 시절 하도 책에 집착해서 외할머니한테 욕도 먹고 그랬어요. --;; 그런데 이게 말이에요, 아시마님. 저는 책이 없음 살 수가 없어요. 제가 외국에 갈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앞에서 제일 두려운 게 책 공수 문제랍니다. 친구가 베네수엘라로 갔는데 결국 원서로 돌아서더라구요. 어쩔 수 없이. 그것도 너무 어렵고 구하는 문제도 그렇고 가격도 그렇고.

저도 매일 밤 반성해요. 그래서 요새는 아예 밖에 나가요. 야외 활동을 막 시키는 그 순간에도 책을 안 가져왔음을 아쉬워하니 병이지요. 흑흑...갑자기 우울해질라고 해요, 아시마님. 그래도 또 담주에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랑 박완서샘 책 주문할 거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어요^^;;

아시마 2010-07-30 12:12   좋아요 0 | URL
김영하 오빠가 돌아왔다는 정말 근사한 책이예요. 그 책은 그 책 단독으로 읽어도 재미있지만, 그 이전의 작품들을 읽고나서 읽으면 그야말로 '오빠'가 돌아와서 아빠가 되었구나 싶었다니까요. 전 진짜로, 김영하가 그 책 이후에 아빠가 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마눌님하고 고양인지 강아지님을 데리고 살더군요. 흠. 하루키가 되려고 그러나. 자식을 기르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블링크가 하루키에게서는 분명히 느껴지는데 말이죠.

전 남편 발령 받았을 때 제일먼저 확인한게 알라딘의 해외 배송 정책이랑 가격이었어요. 요즘도 매일매일 시달리고 있죠. 해외배송 시켜 말어... 출장자 고생시키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흠...
 

진지함과 가벼움이 조화를 이루기란, 몸매는 섹시하고 얼굴은 청순하며 지적인 여성을 앞에 두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이나 
곤란하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 잡탕의 미학을 실현한 작가를 결국 너무 늦지 않게 만나고야 말았다. 깔깔대고는 웃다가 지나치게 야한 장면에서는 괜히 응큼하게 심호흡을 해보다가 결국 질질 짜는 자신을 발견할 때의 당혹감이란. 독자를 이렇게 무장해제시키고 괜히 민망해서 얼굴을 쓰다듬게 만드는 작가가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해졌다.

최후의 자지러지는 소리가 끝을 맺자 온 밤이 질퍽해졌고...  p.135

유물론자가 뭐요? 코스메가 입게 거품을 물고 말했다.
"장미와 통닭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때 항상 통닭을 집는 사람이죠." p.103  

그 순간 잔잔하던 바다에 반짝이는 고기 떼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언할 수 없이 거대한 달이
마리오를 환하게 비추었다. 베아트리스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순간 '영원'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p.91

검은 물이 바다를 바라보는 네루다의 집과.  역시 물로 화해 버린 유리창 너머로 지금 떠오르는 물의 집과, 사물의 집이었던
시인의 눈과, 말의 집이었던 시인의 입술을 복되게 적시고 있었다. p.157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인 이 작품은 칠레의 작은 어촌에 있는 단출한 우체국에서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받을 편지만을 배달하게 된 한 젊은 집배원이 사랑에 빠지고 시를 알아가고 마침내 시인이 투신한 사회적 가치에 발을 담그게 되는 얘기다. 새벽이 다하고 포도주가 바닥날 때까지 휘어 감고 탱고를 추고픈 허리의 소녀에게 대시인의 훈수를 받아 사랑의 작전을 펴나가는 청년의 무모한 열정과 그 열정을 적절하게 밀고 당기며 세상을 보는 프리즘에 대어 주는 시인의 사랑스러운 노련함은 작가의 재기발랄하고 걸쭉한 입담으로 투명하고 끈적끈적하고 반짝거린다.  

실제 노벨 문학상을 받고 칠레의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오마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이 작품은 잡탕의 미학을 실현한 것으로 자평했던 작가의 익살스런 눈으로 또다른 유머러스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비틀즈의 <우체부>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노시인의 모습을 묘사한 풍경은 절경이다. 문자 텍스트로 영상의 애드벌룬을 띄우는 비법을 작가에게 전수받고 싶을 정도로 그의 문장들은 살아서 꿈틀대며 냄새를, 소리를, 이미지를 뿜어낸다. 그러니 인내심을 손톱 만큼도 발휘하지 않아도 이 소설은 무난하게 읽어내려 가게 된다.  

집배원 마리오가 프랑스의 대사로 떠난 네루다를 위하여 바람에 울리는 작은 종들의 소리부터 사랑의 결실이 태어나는 소리까지 작은 포구 마을의 모든 소리를 세심하게 녹음하는 장면의 서정적 아름다움과 군부 쿠데타로 감금되다시피 한 노시인의 죽음을 지키는 장면의 처절한 진지함은 안토니오 스메르타가 실현한 문학적 성취를 방증한다. 결국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는 눈물을 닦으며 문을 닫고 나오게 만든다. 시는 읽는 사람의 것이라며 세상 모든 사물을 메타포로 이해하는 그 거대한 은유의 미학까지 넌지시 찔러 준 후 결국은 인간의 잔인한 권력욕에 스러지고 마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농밀한 응시까지를 체험하게 되면 또다른 그의 작품을 찾아 헤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책은 아름다운 지구별 볕뉘에서 몸을 데우는 소외된 자들이 꿈을 꾸고 마침내 이루었다 생각하고 그러다 스러져 가는 이야기이다. 감옥에서 사면되어 나온 미소년 좀도둑이 삼류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발레를 사랑하는 소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의 꿈의 실현을 몰래 기획하고 조력하고 또 함께 출소한 소위 기품있는 대도인 베르가라 그레이와 멋지게 한탕하고 '한탕은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는데 대체 난 왜 죽는 거지?' 자문하며 죽어가는 얘기다.^^ 

신파적 요소와 누와르적 분위기가 물씬한 이 소설의 특별한 지점은 시원하고 드넓은 태평양을 지척에 두고도 스모그에 둘러싸여 득시글거리는 가낭뱅이들과 독재에 반대하다 머리를 잘린 아빠를 둔 소녀의 절망과 독재시절 기업가들로부터 받은 검은돈을 금고에 보관하고 떵떵거리는 파렴치한 인간에 대한 분노가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고도 정작 소외된 이들의 체념과 맞물려 형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카르메타는 언제나 진지하고자 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언제나 자신이 텍스트의 빗장을 열고 사회적 현안을 치열하게 응시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책임감을 등에 지고 다니는 것 같다. 이런 그의 윤리의식은 그의 이야기를 지루하고 건조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되레 생동감 있고 적당히 달콤한 슬픔의 독특한 기류를 흐르게 한다. 

마지막 젊은 앙헬과 나이 든 베르가라가 금고의 돈을 터는 장면에서 등장한 레이먼드 카버의 <노란 장미 세 송이>의 체호프의 임종을 그린 작품에 대하여 주고받는 얘기들은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독특한 잔상이 남는다. 인생이란 마치 이런 것이라는 듯한. 또 예술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듯한. 도둑질하며 위대한 체호프를 연호하고 죽으며 난 잘했는데 왜 죽는 거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 지구별에 대한 시원한 조망이 가능한 그런 얘기다. 

지구는 수많은 행성들 사이에서 저만의 꿈을 꾸며 자전하는 미친, 그러나 다정한 별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지나치는 것들 하나하나는 모두 위대하고 바꿀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p.449 

자전하는 미친, 그러나 다정한 별에서 이런 작가의 얘기를 듣는 행복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그는 독자를 존중하고 추어줄 줄 아는 정말 드문 작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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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24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눈으로 읽으니 이렇게 아름다운 감상이 흘러나오나 봅니다.
내 블랑카님의 눈을 직접 봐야겠어!

blanca 2010-07-25 16:26   좋아요 0 | URL
마기님~그 날 너무 실망마세용 ㅋㅋㅋ

굿바이 2010-07-25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짝작!!!!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작정하지 않아도 작가의 호흡과 리듬을 따라갈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쿵쾅쿵쾅거리다 털썩 주저앉게 하는 이 책은 살덩어리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어요. 제 책장에 꽂혀 있었던 것을 잊고 있었는데, 너무 반가워요~^^

blanca 2010-07-25 16:27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읽으셨군요. 살덩어리로 태어나다, 이 표현 넘 와닿습니다. 정말 흥겨운 음악을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굿바이님과 그 느낌을 공유하게 되어 기뻐요^^

비로그인 2010-07-25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글이 마치 잘 짜여진 광주리 같아 너무 좋습니다.

시적 은유, 삶이 가져다 주는 또 다른 의미의 선물인 아이러니. 이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나봅니다.

더 많이, 보았던 것을 다시 보게 하는 시선, 오늘 아침을 풍요롭게 하는 생각들. 오늘은 이런것들을 담아 갑니다.

blanca 2010-07-25 16:28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안그래도 저 오늘 이쁜 담양 광주리 사가지고 들어왔어요^^;; 감사합니다. 이 책 한 번 꼭 읽어 보셨으면 좋겠어요. 바람결님도 분명 아주 좋아하실 것 같아요. 참, 그런데 혹시 유진 프리즌이란는 첼로리스트 아세요? 뉴에이지로 가긴 한 것 같은데...완전 뜬금없는 댓글들이지요^^;;

비로그인 2010-07-25 19:39   좋아요 0 | URL
네 꼭 말씀처럼 잊지 않고 다시, 전해주신 얘기생각하면서.. 깊게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유진 프리즌.. 지금 검색해서 그의 곡 하나 듣고 왔습니다.
퍽이나 짧아진 여름 저녁만큼 아련하니 좋네요. 오늘은 이곳 저곳에서 첼로 소리나 많이 나는 날이네요.

주말 잘 마감하세요 ^^

후애(厚愛) 2010-07-2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캡쳐 이벤트>하는데 참여하세요~ ^^
알라딘 마을에 소문내고 다녔더니 부끄럽고 재밌고.. ㅎㅎㅎ

blanca 2010-07-25 16:28   좋아요 0 | URL
옙! 후애님 갈게요. ^^

순오기 2010-07-25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전하는 미친, 그러나 다정한 별... 제목만 보곤 뭔가 했어요.^^
같은 책을 읽고도, 이렇게 멋진 글로 풀어내는 걸 보면 정말 감동스러워요!

blanca 2010-07-26 21:3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의 리뷰 읽고 구입한 겁니다. 순오기님이 좋다고 한다면 그건 확실하다 싶어서요.^^ 고마워요. 이 책을 읽게 해주셔서....

마녀고양이 2010-07-2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일 포스티노가 그리 좋다면서요... 아직도 못 봤어요.

진지함과 가벼움의 조화,,, 블랑카님. 양파처럼 그렇게 다양한 면을 가진 사람이 되고픈 생각을 해여.
항상 "저건 양파다...." 하고 알 정도의 일관성을 가지면서도, 또한 다이내믹하고픈 맘은 너무 큰 욕심일까요?

blanca 2010-07-26 21:33   좋아요 0 | URL
마녀 고양이님, 양파 같은 사람. 진짜 매력적이에요. 마녀 고양이님 양파 같은 여인 아니었어요? 이미 그런 걸로 알고 있는데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열세 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일관되게 뚫고 지나가는 섬뜩한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을 직설적으로 뱉어 낸 대목에서
멈칫했다. 

노골적이고도 머뭇거리지 않는 그 문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한 십 초 정지했나 보다.
허리에 실린 <조>라는 이야기의
첫문장이다. 

김연수와 김영하를 무심코 비교하게 된 적이 있다. 두 작가는 동성임에도 성적으로 대척점에 배열되는 것 같다.
김연수는 여성적 섬세함과 뭉클함의 외피를 입었다면 김영하에게는 근원적인 남성성에 대한 희구가 있다.
김연수가 잃어버린 낭만과 서정에 대한 향수에 천착한다면 김영하는 우리가 지금 잃어가고 있는 것들을 응시한다.
두 작가 아직 완전한 지향에 도달하지 못한 설익은 지점이 분명 있다.
하지만 그 지점을 돌파해 나갈 것을 기대하고
또 점점 그것을 향해 밀고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독자로서 분명 즐거운 일이다. 

김연수가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 갈망했던 소통의 화두는 김영하 앞에서 친밀감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변주된다.
그런데 김연수가 그 소통에 희망적이었다면, 김영하는 조금 회의적이고 멈칫하는 것 같다.
<소통>에서 여자 앞에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읊어대던 남자가 막상 관계의 진전 앞에서 도망가는 모습이나
<밀회>에서 죽음으로 그 여자를 떠나고 마는 남자의 슬픈 독백, <조>에서는 한층 더해 관계의 형성 자체가 유실되는
모습들이 그러하다.  

김영하의 시선은 이제 물질적으로 소외되어 카드회사의 소유가 된 그녀들에게로 향한다.  

황사는 평등했다. 황사는 어디에나 있었고 그것 때문에 모두가 함께 고통을 겪었다. 실로 공평한 재난이었다. 먼지는 일억원이 넘는 고급 승용차의 보닛 위에도, 오십만원짜리 스쿠터 위에도 모두 내려앉았다.<중략> 타클라마칸 사막 같은 데에는 가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수경 같은 이에겐 이것만이 사막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었다. 
-<로봇> 중 

타락한 경찰이 좀도둑들을 얼러 전리품들을 챙기는 <조>에 이러한 그녀들의 거대한 은유가 백화점 판매직으로 나온다.  백화점에 근무하는 그녀들의 신산한 삶과 타락과의 타협을 그의 시선으로 들여다 본 이 작품은 냉소적이면서도 서글프다. 허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시대의 보고서 같아 영 불편하고 선뜩하다. 연봉, 남자친구의 차, 들고 다니는 가방들은 이제 그녀들의 장식품이라기 보다는 그녀들 자체로 녹아내리고 있다. 허영이나 자기기만에서 나온 물질에의 집착이 아니라 극도의 궁핍과 소외에서 초래된 자연발생적 투항은 더 비극적이다. 김영하는 그런 모습들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그려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타락은 역설적으로 이유없는 타락인 것처럼 가장되고 있지만 우리는 알아차리게 된다. 타락이 처절한 생에의 투항임을. 

우울한 얘기들, 그러나 실재를 치열하게 파고 들어가는 얘기들 속에 김영하 특유의 유머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마코토>와 <아이스크림>은 낯이 익다. 발표되었었던 작품이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읽어도 일본인 유학생에 들이대다 굴욕을 맛보는 씩씩하고 밉지 않은 그녀의 고백과 우연히 아이스크림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아 제과점에 제보한 젊은 부부와 소비자 상담실에서 나온 나이 지긋한 남자 직원과의 에피소드는 유쾌하고 재미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소재에서 지나치게 진지한 성찰을 건져 올리려 오버하지 않는 작가의 모습이 쿨하다. 김영하는 내도록 쿨한 것 같다. 

가족이 강도에 의해 몰살당하고 유산을 물려 받아 홀로 커다란 아파트에서 아줌마를 부리며 사는 소시적 동네 친구와 퀴즈쇼에서 조우하게 되는 <퀴즈쇼>는 결론이 약간 허무했다. 사실 이런 결론 자체가 타인과의 소통이나 친밀감에 대한 회의적인 작가의 생각과 맞불리는 지점일 수도 있겠지만 나,와 너, 는 스치지만 함께 할 수는 없다,고 되풀이 말하는 것은 어쩐지 영 불편한다. 우울한 진실을 대면하는 것보다는 허망한 기대를 슬쩍 남겨 놓는 것에 더 매료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말미에 실린 <약속>에서처럼 마시는 커피이름으로 대유된다면 나는 <카라멜 마키아또>가 되고 그나 그녀는 <아메리카노>가 되겠지만 결국 그 둘은 한 탁자에서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마침내 시선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피어오르는 하나의 희망과 공감, 기대가 떠받치는 삶의 매혹이 있기 때문이다.  착각하고 사는 것도 때로는 괜찮다. 가끔은 이런 참혹한 진실을 대면하게 해 줄 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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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07-23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책을 다 읽어보려고 차곡차곡 쌓아만 놓고 아직 제대로 읽어보질 못했어요. 신작도 꽤 괜찮군요. 이 글 읽고나니 더 읽고 싶어지네요.^^

2010-07-23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10-07-24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와 너, 는 스치지만 함께 할 수는 없다,"
아 이 구절, 슬로우 모션의 한 영상과 함께 아련히 흐르네요.

blanca 2010-07-24 21:24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그런 것을 깨달아 가고 수긍해 가는 게 나이들어 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요즘 들어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 가지는 의미에 대해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stella.K 2010-07-24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를 아직 읽어보지 않아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김영하와 비교하시는 브랑카님의 안목이 대단하군요.
퀴즈쇼 나름 재밌게 읽긴 했는데 제 취향은 아닌지라
이 책은 또 어떨지 모르겠어요. 기회되면 한번...!^^

blanca 2010-07-24 21:2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저도 퀴즈쇼는 취향이 좀 안맞더라구요. 제대로 다 읽어 보진 못했고 조선일보에 연재할 때 드문드문 읽었어요. 뮤지컬로도 아마 만들어진 것 같던데...기회되면 한 번 읽어 보세요. 분량도 적으니 시간도 많이 안잡아 먹을 것 같아요. 김영하라는 작가가 조금 과대평가되어 있지 않나 싶었는데 이 책 읽고 앞으로 발전할 역량이 많은 작가라 여겨졌어요.

stillyours 2010-07-2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읽고 있는데 -
미리 읽는 리뷰도, 너무 좋아요 블랑카 님.
특히,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말이죠.
헉- 하게 만들었던 이 문장을 나는 그의 목소리로 먼저 들었어요.
http://me2day.net/kimyoungha
17일자 북테일러, 혹시 아직 못 보셨다면!
MOT의 이언 작품인데,
멋지답니다.
목소리도 세련된 그,
어떠한 감동도 없는 그의 목소리로 듣는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blanca 2010-07-24 21:27   좋아요 0 | URL
moon님...댓글 달고 꼭 들어볼게요. 문동까페에 제목으로 올라와 있는 걸 보긴 했는데 들어보지 않았거든요. 다 읽고 moon님의 리뷰도 기다리겠습니다.

아시마 2010-07-24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아직 이 책은 안 읽어봤지만요, 전 예전에 김영하와 이만교를 비교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 얼마전부터 김연수랑 같은 선에 놔두고 요모조모 생각중이었죠.
그래서 이번엔, 제가 깜짝 놀랄 차례예요.
저 역시,
블랑카님과 제가 비슷한 것들을 느낄때가 많은 것 같아서 놀라워요.
이 책을 배송받으려면 적어도 2달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다른 물건들이 줄을 서 있어요. ㅠ.ㅠ)
이 책이 오면, 읽고, 반드시 이 글에 먼댓글로 리뷰를 쓰겠사와요.

ps. 마코토는 김영하의 여행자 시리즈 도쿄편에 실려있는 소설이구요, 아이스크림은 30회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이예요. 그해 대상은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 였구요. 아마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읽으시면서 읽으셨을 거예요. 은희경이 <아이스크림>에 대해 평하기를 "새삼 작가의 서사감각과 솜씨를 느끼게 해 준다. 미련없이 끊어내 버리는 산뜻함이 이작가의 매력인데 이 작품 역시 강약 조절과 취사 선택이 매우 노련하다. 사소한 에피소드를 한편의 소설로 빚어내는 역량에서 또 한번 문학적 재능을 엿보게 된다"고 찬탄했죠. 은희경을 원래 좋아하기도 하지만, 김영하에 대한 저러한 평가에는 100%의 싱크로율로 동의하는지라, 기억하고 있어요. ^^

blanca 2010-07-24 21:29   좋아요 0 | URL
아시마님!! 속이 다 시원합니다. 맞아요. 분명 어디선과 분명 읽었는데 가물가물한 기억. 그런데 아시마님 기억력 완전 놀랐습니다. 저도 그런 기억력을 좀 지녔으면 좋겠어요. 두 달. 아시마님의 감상도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연수와 김영하. 저는 이 두 작가가 참 부러워요...비슷한 연배에 비슷한 인지도에 나이들어가며 어떻게 바뀔 지도 참 기대되구요.

아시마 2010-07-25 02:34   좋아요 0 | URL
전 김연수 보다는 김영하 쪽에 좀 더 높은 점수를 줘요. 김영하와 김연수를 보면, 김영하는 얄미울 정도로 재능을 타고났다는 느낌이고(사실 김영하 소설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들이 바로 이 "타고난 소설적 재능"에 관해 말을 하고 있기도 하구요.) 김연수는 재능도 물론 있지만 노력과 성실함으로 일구는 작가같거든요. 결국 엉덩이 무거운 놈이 이기는 게 세상 이치라고는 하는데... 음, 예술은 그런 이치에서 약간은 벗어나 있지 않나요? ㅎㅎ

김영하는 아직은 단편쪽이 나은 것 같아요. 그렇다고 장편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 장편도 좋은데 둘 중에서 굳이 고르라면 단편쪽이라는 거죠. 반면에 김훈 선생은 단편보다는 장편에 강하신 것 같고요. 김연수는 장편과 단편이 고루고루 평이한데 그래도 굳이 고르라면 장편쪽이요.

전 김연수를 보면 아직은 뭔가가 좀 아슬아슬하거든요. 뭐랄까 재미와 지루함의 경계에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지루하진 않지만 재미있지도 않은 그런 경지라는 게 아니구요, 되게 재미있기는 한데, 한발만 삐긋하면 지루함으로 풍덩~ 해 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요.
근데 또 김영하를 보고있으면, 이 친구가 재능을 낭비해 버릴까봐 두렵기도 해요. 김연수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문제로 아슬아슬함을 느끼는 거죠.

결국 , 제게는 둘다 비등비등하지만 그래도 김영하쪽이 포인트가 좀 더 높은데요,
블랑카님은 김연수 쪽이 좀 더 포인트가 높죠? ㅎㅎㅎ 왠지 그럴 것 같아요.

ps. 두 작가의 인지도가 꼭 비슷하진 않아요. 초판 발행 부수가 완전 다르다는... ^^

blanca 2010-07-25 16:31   좋아요 0 | URL
아시마님! 저는 사실 김영하를 안다고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장편은 검은꽃 한 편 읽어 봤어요. 그러니 90프로 정도 읽은 김연수를 조금 더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해요. 타고난 소설적 재능...김연수는 안그래도 스스로를 타고난 작가가 아니라고 단정짓더라구요. 김영하가 그런 행운아로군요. 초판 발행 부수. 저는 김연수가 4만부가 젤 많이 팔린 거라고 해서 참 놀랐어요--;;

아시마님에게 많이 배워요.. 참, 그런데 빛의 제국은 어때요? 궁금해서요. 추천해 주시면 읽어 보겠습니다.^^
 

어젯밤에 아이가 아빠, 너무해! 그건 얼굴하는 거야! 라고 소리지르길래
화장실에 가보니 내 클렌징오일을 바디샴푸로
쓰고 있는 그분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껴서 구입해서 단 두 번씩만 펌프질해서 쓰고 있는 그 오일을
안경 벗으면 눈앞 얼굴도 잘 식별못하시는 터라
눈을 찡그리며 그 오일을 바디샴푸로 생각하고
온몸에 칠하고 안헹궈진다고 불평하는
그 분.  내가 비난해 대니 뭐 그런 걸 가지고, 하며 겸연쩍어 하는 그 모습-..-

오늘 화장실에서 김남희의 <걷고 싶은 길:훗카이도>를 보며
연필로 가고 싶은 곳 줄치고 있다
연필을....변기에....그만....
참고로 작은 거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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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21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구아구~~~~
둘다 아구아구~~~~ㅍㅍㅍ

blanca 2010-07-21 21:30   좋아요 0 | URL
마기님...어제 오늘 참 그렇죠? ㅋㅋㅋ 이런 상황에서 마기님의 시 한수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ㅋㅋ

stella.K 2010-07-21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연필 막히지 않고 잘 내려갔을까 모르겠어요.
지극히 웃겨욧!ㅎㅎㅎㅎㅎㅎ

blanca 2010-07-21 21:30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죄송합니다. 건졌습니다.--;;

gimssim 2010-07-21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오늘도 어제처럼 만만치 않은 무더운 여름날~~~
복지관에 운동하러 와서 잠깐 컴퓨터실에 들러 페이퍼 읽고 있는데,
웃음이 터졌습니다.
아, 행복한 이 기분!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니까!(해량하소서!)

blanca 2010-07-21 21:30   좋아요 0 | URL
중전님~ 저 식겁했습니다. 순간...배도 엄청 아팠는데.. 더이상 말씀 안드리겠습니다.

꿈꾸는섬 2010-07-2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어째요. 그나마 연필이니 다행이죠. 전 책을 읽고 물을 내리려다 옆구리에 끼워둔 책을 빠뜨린 적이 있어요.ㅠ.ㅠ(저도 그때 작은 거 아니였어요. 딱 죽을 맛이었어요. 어째 이리 더러운 기억을 들춰내시는가요? 너무하셔요.ㅠ.ㅠ)

blanca 2010-07-21 21:31   좋아요 0 | URL
책이요!! 연필은 껌이네요 ㅋㅋ

순오기 2010-07-21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변기에 빠졌다고 그냥 보내요?
이 정도는 돼야 지저분한 얘기죠.ㅋㅋ

blanca 2010-07-21 21:31   좋아요 0 | URL
당연 그냥 안보냈습니다. 보내면 더 큰 사단이 날 터라...^^;;

2010-07-21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2 1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1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1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7-22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옷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그런 순간들이죠ㅠㅠ

blanca 2010-07-22 21:11   좋아요 0 | URL
쥬드님~이젠 화장실에 연필은 안가지고 들어가려구요^^;;

노이에자이트 2010-07-22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생에 경험 못해본 일인데...

blanca 2010-07-23 20:24   좋아요 0 | URL
노자님 앞으로 경험하실 수 있어요^^;;;

전호인 2010-07-2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남자들이 원래 세제류나 화장품류에 둔감합니다.
글쎄요, 민감한 피부가 아니라서 그렇겠지요?
연필이 꽂히지는 않았겠지요, 뭐 ㅋㅋ

blanca 2010-07-23 20:25   좋아요 0 | URL
전호인님...그래도 기름을 바디 샴푸로 알고 온 몸에 문지르는 행위는 좀^^;; 며칠 동안 계속 몸이 미끄덩거린다고 하더라구요 ㅋㅋㅋ

마녀고양이 2010-07-25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분홍공주님이 "아빠, 너무해!"라고 외칠 정도의 나이군요.
곧 같이 박물관 가겠는데요... ㅋㄷㅋㄷ

blanca 2010-07-26 21:13   좋아요 0 | URL
저게 다 사실 제 화법이라 남편이 불만이 많아요. 너무한다,를 너무 많이 써서요^^;; 박물관...미술관도 가보고 싶은데 민폐 끼칠까봐 고민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박지연 씨의 어머니는 삼성에서 합의금을 받는 조건으로 산재 소송 포기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치료비로 큰 빚을 진 그는 소송을 포기하지만 뒤늦게 후회했다고 한다. 아이의 죽음을 땅에 묻고 진실을 숨기려는 그들에게 이용당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겨레21 819호 참조> 

인간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으니, 물건 취급 받아서는 안 되며,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존중받아야 한다.
-p.139  

인간의 존엄에 관한 응시가 특별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성취가 개인의 미덕을 실증하는 것 같은 환각에 너도나도 취해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중시하는 가치를 분배하는 기준에 대하여 묻는 것은 지극히 도발적이고 원론적인 문제로 회귀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존재하는 방식이 곧 그래야만 하는 방식으로 오도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숨이 막힐 때마다 나의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를 돌아보아야 함을 강요받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극장식 강의실에서 천여 명의 학생들 앞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그도 사실은 이 사회에서는 혜택받은 소수에 해당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례적으로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은 사실 정의가 무엇인가가 진심으로 궁금해서라기보다는 하버드 대학의 뜨르르한 강의를 나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하나의 허영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도 그랬다. 그리고 내용이 명성보다 빈약할 거라 지레 짐작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가는 길은 칸트식으로 말하면 전혀 주체적이지 않은 욕망에 반응하는 행위였다.

아리스토텔레스,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칸트,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들어도 버석거리고 하품부터 나오는 인물들의 사상에서 정의에 관련된 핵심만을 추출하여 착착 들러붙게 설명해 주는 그의 입담은 명불허전이다. 고등학생 때 이런 책을 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다. 깊이 그 자체를 놓고 본다면 이론이 있을 테지만 이 책이 강의에 기반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만족스럽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체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질문을 던질 때 짚고 넘어가는 대목들에 대한 이정표다. 특히 개인의 절대적 자유와 정부의 윤리적 가치적 중립을 지지하는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의 정체성과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열린 토론에 대한 주목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흘려보낸 것들을 뒤늦게 챙겨 보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요컨대 그는 정의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을 좋은 삶에 대한 논의를 간과하고는 거의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좋은 삶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여 그것에서 끝마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리주의 그것의 허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지향하는 공리주의의 약점은 알려진 바와 같다.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행복을 계량화했다는 점이다.  이 공리주의를 주창한 벤담의 죽음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교수가 강의 시간에 우스갯 소리를 해서 조는 학생들을 깨워주려는 시도처럼 마이클 센델의 얘기는 독자들을 유머로 오히려 바짝 조인다. 벤담은 자신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보존 전시하라고 유언했다. 그래서 현재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가면 그의 사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1980년 국제벤담학회 창설 모임에서는 이 방부 시신이 참석했다. 엽기적인 대목은 그의 두 발 사이에 놓여 있었던 진짜 머리를 학생들이 훔쳐 가 자신들의 요구 관철을 위해 이용했다는 점이다.  

 

인간 간에 사고 팔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다음으로 등장하는 자유지상주의는 사실 오늘날까지도 진행중이다. 이는 최소국가론을 지지하고 자유시장을 떠받든다.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는 둘다 자유시장의 홍위병들로 이용된다. 여기에서는 주목해야 할 사례가 제시된다. 미국의 군대가 경제적 교육적 혜택을 받기 위한 하류층 젊은이들로 채워진다는 대목이다. 시장을 이용하여 군 복무를 할당하게 되면 정책 입안자들의 자녀가 연결될 확률은 극히 미미해지고 점점 전쟁을 더 쉽게 일으키고 인명살상을 더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수의 시민과 그들 이름으로 싸우게 되는 군인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지점에서는 평화 대신 호전적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게 되는 경향이 있다. 예리한 지적이다. 자유로운 계약 관계에 의하여 돈이 오고 가는 관계가 그 자체로 정의로울 수는 없다는 방증 같다. 초입에 거론했던 삼성의 행태도 이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돈이 오고 가고 박씨의 죽음이 산업재해가 아닌 것으로 묻힌다는 가정은 그녀를 위시한 투병중인 나머지 직원들의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거대기업의 대우가 정의롭지 못하고 부당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칸트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란

자, 이제 우리는 주민들이 그가 산책나오는 모습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는 그 유명한 에피소드를 가진 칸트로 돌아가 볼 차례다. 그의 인간 존엄에 대한 통찰은 가슴벅차다. 칸트가 인간이 그 자체로 숭고하고 존중받을 귀중한 존재임을 역설한 대목도 보편적 인권 개념의 태동을 알리는 장중한 서막이지만 그보다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을 재정의한 부분은 꼭 유념해서 들어 둘 필요가 있다. 그가 얘기한 자유로운 인간은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다. 욕구에 반응하여 행동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내가 오늘부터 믹스커피를 끊기로 했다면 그것을 안마시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지 욕구에 반응하여 벌써 두 잔째를 들이키고 있다면 지극히 타율적인 인간이란 얘기다.(내얘기다) 동정심에서 나온 선행도 그의 눈으로 보면 불순하다.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수단으로서의 행동과 다른 인간에 대한 특별한 애착, 공감에서 나오는 행동들도 칸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다. 그는 특정하다,는 어휘를 경멸한다. 엄격한 도덕주의자가 지향하는 절대 보편의 세계는 불가능하고 이상적일 것 같으면서도 지극히 매혹적이다.   

 

노력하면 다 된다고?

 이제 존 롤스가 나온다. 평등한 출발선 그 자체마저도 불신하는 그는 재능있는 사람도 기실은 그것이 도덕적 우연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노력을 한다고? 그 노력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최선을 다했으니 그것을 받아도 온당하는 말은 그에게 넌센스다. 저자는 한 몫 더 거든다. 성공을 우리 노력의 결실로 여길수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줄어든다,는 그의 지적.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현사회에서 능력위주 시스템이 가지는 맹점에 대하여 직시하게 만드는 그의 지적은 결국 인간의 존엄 그 자체에 대한 응시로 귀환한다. 그러니 칸트와 롤스는 만난다.   

 

자유로운 개인을 붙잡는 지점 

이제 결국 마이클이 강의실에서 천 명을 불러모은 위력을 실감해야 하는 대단원이 오른다. 다 좋다. 개인의 자유를 지지하고 인간의 존엄을 응시하고 그런데 이게 과연 공동체의 선과 어떻게 연결된단 말인가? 상충하는 대목 아닌가? 공동체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누리게 해 줄 생각인가 우리는 궁금해진다. 답변은 몽환적이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하고 물렁거리기도 한다. 

그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서사의 탐색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그 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먼저 답변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에 가깝다는 통찰은 역사 속 공통체의 일원으로서의 현재의 후손들이 과거의 잘못을 배상하고 사죄해야 하는 근거가 되어 준다. 연결된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개인의 절대적 자유만을 주창하다 보면 우리는 왜 일본이 과거사에 대하여 우리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거를 찾아 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이기 위하여 우리가 우리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통과의례다.   

 

좋은 삶 그 막연하고 아리송한...그러나 의미있는...

우리가 존경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더 큰 삶의 일부로 이해하고 감당하는 기질이다.<중략>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여러 부담을 인식하며 사는 것이다.
-p.330 

결국 마지막은 다시 처음과 맞물린다. 우리는 좋은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공론화해야 한다. 그 좋은 삶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더 큰 삶의 일부로서이다.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결론일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다시 물음표를 찍으며 마친다. 수많은 질문들을 촉발하는 불온하고 혼란스러운 책으로서 이 책을 권할 수밖에 없다. 딛고 선 땅이 흔들리고 삶의 좌표가 요동치는 경험은 그 자체로 특별한 것일테니.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현재의 틀을 부수고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의 점화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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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0-07-21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한창 회자되는 책이라서 관심이 있었지만, 근거없는 편견때문에 미뤄두었던 책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명확한 답을 기대하는 저로서는, 좋은 삶을 먼저 짚어야 한다는 말이 김빠진 맥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매우 현실적인 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좋은 삶이 어떤 것이냐?라는 물음으로 돌아오는데, 아마 개인의 문제가 공동체 안에서 고민되고 해결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의 비판> 서문에 쓰인 "인간은 언제나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스스로 부과한다..."라는 말이 그러하듯이, 좋은 삶이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뭔가 현안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0-07-21 21:39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저도 내용 완전 빈약할 거라 단정짓고 원래 안읽으려고 했는데 하도 난리들이라 궁금해서 읽어 봤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일단 재미있고 정치철학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쏙쏙 들어오게 해주더라구요. 그리고 아무래도 사례를 아주 적절하고 재미있게 들어주니 딱 강의실에 앉아 있는 느낌이더라구요. 결론은 질문을 던지다 김빠지는 부분도 없지 않아요. 저는 이 쪽 책을 많이 안읽어서 그런지 부담 안가지고 생각 안해 봤던 문제들을 한번 되돌아 보는 기회가 되어 좋더라구요.

herenow 2010-07-22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책을 다시 집어들도록 자극하는 서평인데요.
도입부분 완전 공감했습니다.
평소엔 대충 넘어가는 것들에 대해 의미를 되짚어보게 하는 책이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 ^*

blanca 2010-07-22 21:13   좋아요 0 | URL
herenow님, 아, 네임이 너무 좋네요. 사진도. 반갑습니다. 소문 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무색해질 정도로 저한테는 참 괜찮게 느껴지더라구요. 아무 생각없이 지나가는 것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갈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대학생 때 이런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 같아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