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 제인 오스틴의 책이 이렇게 재미있을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제인 오스틴의 책이 내 취향이 아닐것이라는 게 나의 '오만한 편견'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인 오스틴은 정말로 뛰어난 위대한 작가님이시다.
스토리상으로 볼 때 별볼일 없는 이 소설이 왜 고전으로 추앙받고 오래도록 회자되는지 깨달았닸고나 할까?
이 소설의 어떤 점이 나를 이렇게 열광하게 만들었을까?
이 소설의 배경은 19세기 초반쯤의 영국 지방 사회쯤으로 예상된다.
1689년의 명예혁명으로 영국사회는 가장 일찍 구세력인 국왕, 귀족 세력과 신흥세력인 부르조아 세력의 타협이 이루어진다.
솔직히 명예혁명은 혁명이라기 보다는 명예타협으로 읽어줘야 맞지 않을까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러나 아직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기 전이다보니 이 신흥 부르조아 세력 역시 상공업이 주가 되기 보다는 땅을 주요 재산으로 하는 지주계층이 주를 이루게 된다.(이들이 귀족과 다른 점은 자신이 직접 토지의 경영을 관리하고 운영한다는데 있다)
이 신흥 지주계층이 바로 영국의 신사계층이라고 불리는 젠트리들이다.
이 책에서 나오다시피 젠트리 역시 동질적인 집단은 아니라서 다아시처럼 대지주이면서 귀족에 살짝 한 발을 걸친 경우도 있고, 빙리처럼 그냥 중상규모의 지주라든가, 베넷씨네처럼 소규모의 지주계층인 경우 등 다양하다.
아직은 상업이나 산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르조아,젠트리들은 지주계층에 비해 미약하고 사회적 대우 역시 낮은 편이다.
이렇게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는데 양측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서 균형이 어느정도 이루어지며 서로를 인정하고는 있으나 서로 감정이 좋을리가 없다.
귀족은 당연히 젠트리들을 무시하고 싶어하고, 젠트리들 역시 귀족에 대한 동경은 있으나 자신들이 가진 부에 대한 자신감 역시 만만치 않아 기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걸 잘 보여주는게 바로 이 책에 잠시 등장하는 제임스 포다이스 목사가 쓴 <포다이스 설교집>같은 품행지침서의 등장이다.
교양있는 행동 , 교육, 살림등 전방에서 여성의 미덕을 가르치는 생활교본인데 이 시대의이런 지침서는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의 것도 당연히 있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우아한 생활습관을 유지하고 드높임으로서 젠트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싶어했을 테고 따라서 이런 책으로 젠트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신분상승을 꿈꾸던 젠트리들은 이런 지침서를 통해 귀족의 생활태도를 모방함으로써 자신들의 낮은 신분을 상쇄하고 생활과 태도만은 귀족과 다를 바 없음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국의 중상류층 사이에 굉장히 기묘한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이 등장하는데 바로 예절 교본에 따른 생각, 말, 행동을 마치 자신의 것인양 그대로 재현하는, 어떻게 보면 생활 전체가 연극같은 그런 생활방식이 정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경험이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을 제인 오스틴은 이 연극적 삶의 다양한 군상과 면모를 거의 완벽하게 묘사해낸다.
그리고 따로 비판하거나 말하지 않고서도 소설속에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것들이 얼마나 허영에 차있고, 기만적이며 위선적인지를 독자 스스로 알아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먼저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 다아시는 오만하다.
왜 오만할까? 오만한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대지주이고 귀족작위를 받지는 못햇지만 어머니가 백작의 딸이다. 그가 오만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어느정도냐고?
다아시가 여자 주인공에게 청혼하면서 하는 말이 <조건이 이렇게 저렇게 나쁘고, 가족들도 형편없는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어, 심지어 이렇게 훌륭한 내가 너를 좋아해서 온갖 손해를 감수해야 해. 그래서 나는 너무 괴로워, 하지만 너를 사랑해>다.
어느 미친 여자가 이런 청혼에 예스라고 할까?
당연히 우리의 엘리자베스 역시 바로 노우를 날려주신다.
그런데 책을 끝까지 읽어도 이런 다아시의 근본적인 생각은 달라지는 부분이 없다.
그저 엘리자벳을 사랑하기에 감수하기로 하는 것 뿐이다.
이들이 결혼 이후 영원히 해피할지는 알 수없지만 그 전망이 그리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중상지주인 빙리의 여자 형제들은 우아하게 가식을 뜨는 전형이다. (그에 반해 빙리는 어리버리 줏대없는 바보의 전형, 그러므로 딱히 할말도 없는.....)
그래봤자 같은 평민 출신에 돈이 조금 더 많을 뿐인데 그들의 상류층 지향 긍지는 하늘을 찌른다.
이런 경우 나를 높이는 최고의 방법은 역시 상태를 무시하고 짓밟는 것이다.
앞에서는 우정을 얘기하고, 우아하게 대하지만 뒤에서 대놓고 비웃으며 낄낄거린다.
"제인 베넷이 아주 마음에 들고 정말로 착한 아가씨라서 시집을 잘 갔으면 좋겠어요. 그런 부모에다가 지체가 낮은 집안이니까 잘 될 리가 없겠지만."..... 친구의 초라한 친척들을 흉보면서 한참이나 웃고 떠들었다. (41쪽)
지금 이런 모습의 사람을 본다면 나야 바로 손절 들어가겠지만 지금은 19세기.
저들의 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흉보고 비웃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찮은 제인에게도 우아하게 손님대접을 해주고, 감기에 걸린 제인에게 방을 내주고 보살펴주는 그들의 매너다.
본심과 나타나는 행동을 이렇게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이들은 진정한 삶을 무대에서 열연하는 배우다.
일상이 연극이라니..... 19세기 영국사회의 매너열풍의 본질이 아닐까?
흥미로운 인물은 너무 많다.
나를 빵 터지게 한 또 하나의 인물은 아들이 없는 베넷 집안에서 아버지가 죽고나면 남은 장원을 상속할 먼 친척 콜린스다.
(이 부분도 정말 분통터지는 부분인데 이 시대의 여자들이 결혼에 목을 매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당시의 집안의 재산은 대부분 토지에서 나오는데 그 토지를 상속할 수 없다는 것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실제 상속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럼 직업도 못가지는데 뭘 먹고 살라고??? 그래 결혼을 잘해야 해 이렇게 되는거다.)
콜린스!
이 가진 재산이 없어 누군가의 자비에 기대야 하는 불쌍한 젊은이는 운 좋게도 귀족 후원자를 만나 교구목사가 된다.
따라서 그에게 신은 바로 그의 후원자인 캐서린 드 버그 여사다.
입만 열면 어찌나 여사님을 찬양해대는지 역시 밥벌이는 진정 소중한 것이야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거기다가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 어찌나 솔직해주시는지....
앞뒤가 똑같은 일관된 속물주의자, 어떻게 보면 빙리집안의 여자들과 완전히 대비되는 인물이랄까?
그리고 캐서린 드 버그 여사
이 여성은 진정한 귀족이시다.
오만의 결정체.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의 삶에 간섭하고, 지시하는 것이 삶의 낙이다.
그가 베푸는 친절은 모두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간섭하고 지시하고 싶어서이다.
이들의 삶은 모두 화련한 한판의 연극부대 같다.
주인공 엘리자벳은 어떨까?
재치있고 영리한 우리의 주인공 말이다.
그녀에 대해서는 뭐랄까?
똑똑하여 사람들의 위선을 꿰뚤어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졌고, 재산이 아니라 성품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는 올곧음과 능력도 가지고 있고.....
그러나 그녀가 다아시에 대해 마음이 변해가는 과정을 잘 살펴보자.
다아시과 청혼할 때만 해도 그녀는 다아시같이 오만한 사람은 아무리 부자라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마음은 다아시의 긴 장문의 변명 편지에 의해 흔들리고, 그 흔들리는 마음은 다아시가 그녀의 여동생의 불명예를 구해줌으로써 완전히 무너진다.
다아시의 품으로 직진 항복이다.
엘리자벳이 사랑에 빠지게 된건 그녀가 다아시의 저택을 통해 그의 부를 직접 본것, 다아시가 자신의 오만을 사과하고 엘리자벳에게 변명의 편지를 날린 것, 그리고 그가 그의 재력으로 엘리자벳의 가족을 도운 것.
이 중 어느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을까?
물론 이 모든게 복합적으로 작용하는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가장 결정적인게 있었을거다.
그걸 판단하는건 결국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다.
내 생각으로는 엘리자벳 역시 결혼 이외에는 장래 대책이 없다.
그러므로 엘리자벳은 이 시대의 위선적인 무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나 실제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경계에서 어정거리다가 결국은 그 위선의 무대에 빨려가는 인물쯤으로 해석되어졌다.
하지만 이런 19세기 영국의 위선의 무대에서도 독특하게 이 무대를 비켜가며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고 꾸려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먼저 콜린스와 결혼하는 샬럿
콜린스를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나쁘지 않은 남편감이라는걸 인정하고 재빠르게 그의 낙심을 위로해주며 결혼에 성공하는 엘리자벳의 친구.
걱정하는 엘리자벳에게 자신에게는 이것이 최선의 취업임을 당당히 얘기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꾸려나가는 이 여성에게서 나는 오히려 당대의 이 위선적인 무대에서 벗어난 현실적이고 건강한 삶을 본다.
또 하나!
베넷 집안의 셋째 딸 메리.
책만 보는 아주 현학적인 이 소녀는 우아하게 매너를 지켜야 하는 대화법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녀는 자신이 본대로 아는대로 읽은대로 직격타를 날리면서 분위기를 깨는데 선수다.
당대의 기준으로 무례함의 표본이랄까?
물론 그녀의 말들은 너무나 현학적이어서 누구에게도 울림이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건 그녀가 아직 10대의 소녀라는거다.
이 소녀는 앞으로 제인 오스틴이 될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지 처음에는 이름을 외운다고 정신이 없었는데,
대단한건 이렇게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도 그 모든 인물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표현된다는 것이다.
19세기 영국 젠트리 사회의 생활양식과 인간군상이 내 앞에 펼쳐져 거대한 연극의 무대를 생생하게 보는 듯한 느낌이다.
제인 오스틴은 진정 천재였을까?
그녀가 이렇게 당대의 사람들에 대한 통찰을 가질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앞으로 읽을 제인 오스틴의 책들에 대한 기대가 엄청나게 높아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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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영화도 다시 보고 있는데 와우 진짜 이 영화는 여자주인공이 다하는구나.
엘리자베스 역의 키이라 나이틀리,
다아시가 처음 엘리자베스에 대한 감정을 표현할 때
"어여쁜 아가씨의 아름다운 두 눈이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생각하고 있거든요."(32쪽)라고 말하는데,
키이라 나이틀리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저 눈에 첫눈에 반할 수밖에 없겠구나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 엘리자베스의 캐릭터에 그것이 잘 표현되었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작가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거겠지라는 느낌.
이 책을 읽는 내내 솔직히 로맨스에 대해서는 미적지근한 느낌이다.
아니 얘들은 뭘 했다고 사랑을 느껴?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뭔가를 느낄 만큼 함께 한 시간이 있는것도 아니고?
뒤에 나오는 사건들을 보면 있던 애정도 달아나겟구만......
로맨스는 별로인데 여자주인공은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영화도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