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백양, 가을 내장이란 말이 있다. 그러나 봄이 갖는 산의 매력은 눈에 쉬이 들어오지 않기에 너무 큰 기대를 갖어서는 안될듯 싶다. 그럼에도 백양이 주는 봄의 기운은 활기차다.

백양사를 죽 휘둘러보고 그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절벽같은 바위를 보며 정말 저 곳으로 오르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백학봉. 그곳으로 가는 길은 다행히도 사람의 손이 많이 탄 계단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간간히 길을 가로지르는 우리 토산 다람쥐들의 귀여움에 자꾸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청설모를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은...)또 하늘을 쳐다보면 어느새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새들. 그리고 단풍나무들의 연두색 새잎들을 보고 있으면 봄은 어느새 마음까지 들어와 있었다. 깔딱고개라 불리는 많은 산들을 올라보았지만 정말 힘든 오르막이다. 잠 한숨 못자고 오르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힘든 것은 아닐거라고 자위해보지만 자꾸 발걸음이 무겁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중간중간에 쉬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나무 의자들. 잠깐 앉아 되돌아보니 저 아래 절간마저도 세상사는 사람들 속에 파묻혀 진정 피안의 세상이 그곳에서 찾아질 지 궁금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피안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아, 꿀맛 같은 약수. 약사암의 물은 치료에 효험이 있다 한다. 약수물이 모여 있는 바위 속에 약사불이 놓여있다. 합장. 제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질병없이 살아 갈 수 있기를...

백학봉을 넘어 백암산의 최고봉인 상왕봉(741m)으로.  상왕봉은 이곳 백암산에서 가장 기운이 좋은 곳이란다. 15분쯤 휴식. 그곳에서 사람을 만난다. 인사를 나누고 잠깐 한마디씩. 사람을 피해 올라온 산이지만 사람이 반갑다.

사자봉을 올라서 다시 운문암을 거쳐 내려왔다. 그리고 잠깐 들른곳이 비구니들의 도량 천진암. 왼쪽엔 대나무 숲이요, 오른쪽엔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 군락이 있어 고즈넉했다. 이제야 정말 숨통이 트인다. 환한 공기에 고즈넉함이 있어 나의 폐가 자신의 깊은 곳까지 어서어서 그곳의 분위기에 묻혀달라 한다. 심호흡 두세번에 만사형통.

욕심과 욕정의 찌꺼기를 털어버리고 하산한다. 벚꽃은 다시 춘정을 돋우지만 이내 마음은 이미 가라앉아 있다. 여름날씨같은 더위에 땀을 바가지로 흘렸지만 단지 땀뿐이랴. 몸 속의 다른 것들도 함께 흘렀으리라. 조금은 비워진 몸과 마음으로 다시 도시로 향한다. 난 이 도시에서 또 무엇을 채워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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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1 - 한국만화대표선
박흥용 글 그림 / 바다출판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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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조선 선조. 주인공 견자는 서자로 태어났다. 벼슬을 꿈꾸지도 못하는 삶. 신분의 벽은 너무나도 높다. 그래서 맹인 검객 황정학을 따라 길을 나선다. 이 길은 자신을 찾는 길이기도 하다. 길을 떠나는 와중에 만난 도포를 찬 검객, 이몽학. 견자는 검법을 익혀가면서 그를 질시한다. 자신 앞에 선 또 하나의 벽이다. 열반으로 태어났으니 그 열함으로 인해 무엇인가 우등한 것을 만들고픈 오기, 견자는 점차 검술의 최고 경지에 오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 길의 끝은 어디인가?

휘둘림없는 자유.

자유는 한계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자유는 두가지 모습을 띤다. 견자는 한계에 다다랐을때 자신 속에서 자유를 찾고 이몽학은 세상을 뒤집어 엎어 자유를 꿈꾼다. 저자는 견자의 입을 통해 이몽학의 마음 속에 개인적 욕심이 하나도 없이 정말로 만인의 자유를 얻고자 혁명을 꾀하는지를 묻는다. 인간의 저 마음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판도라. 그러기에 자유란 결국 나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리라 한다. 그래도 난 세상을 바꾸는 자유 또한 목숨을 걸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몽학이 혁명에 성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역사는 끝내 이를 외면했다.

광대는 자유롭다. 얼굴에 탈을 쓰는 순간 그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단지 탈 하나만으로도, 얼굴을 가린 것 만으로도 그는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난 어떤 탈을 갖을 수 있을까? 나를 자유롭게 해 줄 그 탈을 찾아 나도 길을 떠나야 하지 않을까? 그 탈 뒤에 숨어 끝없는 자유를 누릴 순 없을까? 영화 '마스크'의 짐 캐리처럼 괴력을 얻을 수는 없지만 자유는 그 괴력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다. 그 힘이 부르고 있다. 나도 떠나련다. 나의 탈을 찾아서. 그리고 어디가 나의 한계임을 깨달아 그 안에서 그 한계를 뛰어넘는 자유를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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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톨
와타야 리사 지음, 김난주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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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 3학년 입시생,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과 너무나 똑같음을 알아차린다. 학교에 가서 똑같은 수업을 듣고 집에 와서 똑같은 텔레비젼이나 라디오 방송을 듣고 또 똑같은 시간에 학교를 향하는 쳇바퀴 같은 나날. 남들과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돌아보면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음에 실망하게 된다.

그래서 결심하게 된 것이 엄마 몰래 학교를 나가지 않는 것. 자신의 방 안을 모두 치워버리고 쓰레기 장에서 마치 쓸모 없어진 자신의 가구들 마냥 눕는다. 남들과 다르지 않는 삶이란 그렇게 쓸모없는 삶이라 생각되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타난 초등학생 꼬마 녀석. 그 꼬마에게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고장난 컴퓨터를 줘 버린다.

그리고 우연한 만남으로 꼬마의 엄마를 찾아간 집에서 고장난 줄로만 알았던 컴퓨터가 인스톨만으로 생명을 얻어 작동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도 그렇게 새 생명을 얻은 컴퓨터 마냥 인스톨 되어 새 삶을 살 수 있기를. 그래서 꼬마의 얼토당토 않은 채팅 알바를 허락한다. 남자들과 섹스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역할. 아침엔 그녀가, 오후엔 꼬마가, 그리고 현실에선 술집의 실제 작부가. 세 사람이 모여 한 사람의 역할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채팅을 하고 있는 사람들 또한 그다지 색다른 사람들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세상 사람들, 정말 이런 세상도 있구나 생각하는 그런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그저 평범함을 지닌채 살아가고 있다. 남들과 다르게를 꿈꾸지만 실은 평상의 삶 속에서야 그것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학교를 나가지 않는 생활이 남들과 다를지라도 그것은 그저 일탈일 뿐이다.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틀어져 존재할 뿐이다. 틀어졌을땐 인스톨시켜 다시 평상으로 복귀한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전진>이라고!

이크크! 열일곱에 삶의 비밀을 알아채버린 것은 너무하다. 열일곱엔 평상을 알아채기 보단 모험의 세상을 겪어야 하지 않을까? 하기야 세상이 모험을 허락하지 않으니 쉽지 않으리라. 그렇다고 열일곱의 나이에 인스톨시킨 삶이라는 건 가혹하다. 서른, 마흔이 넘어도 모험이 가득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래도 열일곱엔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과 일본의 많은 입시생들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그들에게 평상은 여전히 지옥일테니까. 인스톨이 아니라 딜리트해버리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깔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꿀 수 있기를. 평상의 삶은 그 이후에도 늦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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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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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글을 읽다보면 점점 내 몸이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이런 제기랄. 자신을 B급이라 표현하는 저자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난 C급이나 되려나? 자신의 양심에 거스르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부단히도 고달픈 삶인가? '양심의 가책, 흥 조금만 참으면 되지 않겠어' 라며 저지른 수많은 위선들. 그리고 조금만 참으면 될 줄 알았지만 끝끝내 마음 한 귀퉁이에 남아 어느 순간 고개를 치켜드는 부끄러움. 그러나 그 부끄러움마저 잠시 나의 양심을 마스터베이션 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지리한 일상.

지적 허황에 헤매이다, 결국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는 가난한 삶.

적십자 공익광고의 박수홍이 사랑은 동사라고 말하는 것을 새삼 내 삶의 전체에 대입하고 싶어진다. 내 삶은 언제나 접속어에 그치고 말았으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 같이 얼마나 많은 핑계를 대며 살아왔던가. 그리고 그 수많은 핑계들을 위해 머리속에 기억해둔 글과 말들. 그건 정말 마스터베이션이었을 뿐이다. 내 양심에 내 이성에 들이미는 칼들을 무디게 만드는 마스터베이션의 순간순간들.

난 김규항의 말대로라면 좌파로 살기엔 힘든 사람이다. 나 혼자만의 양심마저도 쉽게 지켜내지 못하는 삶이 다른 사람의 양심까지 지켜내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난 C급 좌파도 못 되기에 그저 나 혼자만의 양심이라도 지켜낼 줄 아는 삶을 살기위해 무단히 노력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나도 저자처럼 아이들이 있게 된다면 좌파로 돌아설지 모르겠다. 우리 아이들에게 지금과 같은 교육환경과 천민 자본주의의 정신을 그대로 물려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김규항의 B급 정신은 A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속에서 정말로 자신의 마음 속까지 비춰주는 소중한 거울임을 책을 읽으면서 확인한다. 이런 B급이라면 A+가 무에 필요하겠는가? 세상이 B급의 양심이라고 갖길 바라며 C도 못되는 난 눈뜬 삶을 살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 제발 이 마음, 변치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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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NOT? - 불온한 자유주의자 유시민의 세상 읽기
유시민 지음 / 개마고원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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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을 선택할 것이라는 합리성을 전제로 한다. 물론 이 합리성엔 도덕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인간이 이기적임을 가정하고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세상은 자신을 희생하고서 남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라 꼭 이론대로 세상을 재단할 수 없게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인간이 손익계산을 정확히 할 수 있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는 바탕아래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정의를 선택함으로써 감수해야 하는 희생을 줄이고 그 댓가를 사회가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불편부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합의나 제도가 제대로 정착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들은 그 후손까지 떵떵거리며 살고 독립운동을 한 후손들은 고등교육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삶. 또 군사정권 시절 자유화 운동에 앞장섰던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에 몸이 망가지고 정신이 피폐해졌음에도 보상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것. 자본주의적 삶이 합리적이라면 누가 이런 고난의 길을 택할것인가? 소수 희생정신과 정의감이 충만한 사람들을 빼고서 말이다. 사회가 이런 사람들을 우대하는 모습을 비춰줄 때 이성적 인간은 분명 정의를 택할 것이다.

경제학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은 결코 인간 자체의 심성을 바꾸는, 즉 모두가 성인이 되자고 했던 공자의 말씀이나 자비를 사랑을 베풀라는 불교, 기독교의 종교적 교리를 들먹이지 않고서도 시스템의 변경으로 참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밑바탕엔 분명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이익을 해하지 못한다는 기본적인 도덕성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는 것은 명심해야 한다. 하기야 이런 전제마저 없는 합리성이란 이미 합리적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타인을 해하고서 자신의 이익을 챙길 수 있다면 나 또한 다른 사람이 해하는 타인이 될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이익의 정도를 어느 정도까지 하느냐는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더러 어느 정도의 이익에 사람들이 움직일 것인지도 예측할 수 없는데 원인이 있을성 싶다.

아무튼 자신의 기득권을 절대 포기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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