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를 돌리다 물이 끊겼다. 느닷없는 단수다. 세탁기는 물을 토해내고 그 빈 공간에 다시 물을 담아내지 못해 멈춰 섰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선 후 문을 닫으면 세상과 멀어지는 느낌이다. 갑작스런 단절이다. 바깥 세상의 공기를 다 뱉어내고 방 안에 홀로 누우면 나만의 세상이다. 고립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생존하기 위해서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스트레스로부터의 탈출이다. 즉 자발적 고립이자 기꺼운 고립이다.

하지만 돌지 못하는 세탁기가 알려준다. 고립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어딘가에 잇닿아 있다는 것을. 예고되지 않은 단수는 어디에선가 상수관이 파손되면서 긴급 복구를 위해 급수관을 잠가 벌어진 일이다. 문 밖의 갑작스런 사태 하나가 집 안의 세탁기를 멈춰 세운 것이다. 절대 고립은 없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물을 채운 세탁기가 돌기 시작한다. 세상은 그 어느 순간에도 서로 이어져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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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물통에서 작은 물통으로 물을 옮길 때면 살짝 긴장한다. 혹시나 물을 흘릴까봐 조심스럽다. 너무 조심스러워서 살짝 물통을 기울이면 물이 힘없이 흘러나온다. 작은 물통의 입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물통을 적셔버린다. 그렇다고 벌컥 쏟으면 물은 입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흘러넘친다. 적절한 힘의 분배가 필요하다.

작은 물통이 투명하지 못할 때는 언제 물이 찼는지를 알지 못한다. 대충 가득 찰 거라 예상되는 부분에서는 점차 물을 따르는 속도를 줄였다가 넘치기 직전 멈춰야 한다. 즉 예의주시하고 있지 않으면 물은 넘쳐버리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애정을 쏟아붓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너무 조심스러우면 애정이 담기지 못하고 너무 과하면 마음에 담기지 못하고 넘쳐흘러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아 항상 예의주시해야 한다. 마음을 읽으려 노력하지 않고 애정만 쏟아붓다가는 넘쳐흘러버린 애정 탓에 눈살만 찌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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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다보니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더라. 싸워 물리쳐야 하는 적과는 조금 다른 미운 사람. 적 보다도 더 증오할 때도 있지만.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은 화사단의 초영을 향해 이런 말을 한다. “적을 누구로 삼을 것인가? 인생에 있어서 적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일종의 협박같은 협상을 제안한다. 삼한 제일검을 적으로 두지 말라고 말이다.

웹툰 <송곳>에서는 구고신 소장이 “세상에 아군이랑 적군만 있는게 아뇨.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이 우리 편이 아닌 건 문제 없지만 적이 되면 힘들어져.”

 

누구를 적으로 둘 것인가가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워하는 사람이 생겨 마치 죽일 듯이 미워해보니 알겠더라. 누구를 미워하는냐 보다는 그저 미워하는 그 마음이 괴로움이 된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예의를 다하고,

많은 사람에게 붙임성 있게 대하고,

몇 사람에게 친밀하고,

한 사람에게 벗이 되고,

아무에게도 적이 되지 말라"

-도종환의《사람은 누구나 꽃이다》중에서

 

 

‘미움받을 용기’를 말하지만, 누군가의 적이 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미워하고 미움받는 거.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라 지나가는 바람으로 여길 꾳같은 마음이 필요한 일이 아닐까. 미워하는 마음이 옅어질수록 괴로운 마음도 희미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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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이 되었다. 훈련하고 노역하고. 그래도 보릿고개에 먹을 걱정 안하고 사는 게 어디인가. 힘들지만 그래도 견딜만하다.

벌써 1년이 됐다. 이제 군졸로 사는 것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어떻게든 버텨내야 하는 게다. 훈련이야 하던 데로 하면 되는 거고, 노역도 요령이 생겨 가끔 게으름도 핀다.

어느덧 2년이 흘렀다. 밑에 신참들도 좀 있고 마음에 여유도 생겼다. 산적이나 도적떼들과의 격투, 가끔 벌어지는 사병들과의 전투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 그래, 살아남는 거다. 근데 조금 생긴 이 여유를 어떻게 보내야할까. 남들처럼 이바구를 까거나 노름이나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할련지... 아유, 잠깐 바람이나 쇠어볼까. 어, 저기 누구야. 개똥이 아니야. 저 녀석 나랑 같이 들어온 녀석인데... “어이, 개똥이. 자네 지금 뭐 하는갠가?”

“어... 어, 그냥, 무술 훈련 중이야.”

“우리같은 졸따구들이 무술 연습해봐야 무에 소용있다고?”

“아니, 뭐. 그냥 살아남아야지. 내 자신은 내가 지켜야 하는 것 아니겠나.”

“언제부터 훈련해온거야?”

“글세. 들어오고 나서 얼마지나지 않아서부터 시작했으니 2년이 돼 가는군.”

“그래, 고생많네” 누가 알아주지도 않은데, 쩝. 개똥이 녀석 참...

 

오늘은 분위기가 심상치않다. 어라. 저건 길태미. 이런, 제길.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을까. 삼한제일검을 우리 같은 졸따구들이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어? 도망가버릴까. 그럼, 남은 우리 가족까지 모두 죽겠지. 젠장. 재수에 옴 붙었군. 제발, 제발, 길태미. 이쪽으로만 오지 말아줘.

“내 길을 가로막는 자는 그 누구라도 목을 칠 것이다!”

길태미의 목소리가 섬뜩하군. 으.... 드디어. 이쪽으로 오느구나.

 

“어라. 너 일개 군졸이 어찌 내 일합을 막았느냐?”

“그냥... 엉겁결에.”

“그래, 네가 비록 일합을 막아냈지만 네 목숨을 구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이, 이인겸 따깔이. 나랑 상대하지”

“뭐, 이..... 이놈!”

길태미가 다른 쪽으로 갔다. 휴 목숨만은 건졌구나.

다른 군졸들의 떼죽음 속에서 개똥이는 무릎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는다.

 

※ <육룡이 나르샤>를 보다 길태미와 맞서야 하는 군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는 괜한 상상이 들어 끄적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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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 감독, 조정석, 이미숙, 이하나 출연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가 조작되고, 누군가 잘못 올린 글이 진짜인 양 퍼 날라지는 세상에서 뉴스는 정말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일까? 의심해볼 만 하다. 흔히들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쓴다’라고 표현하듯 뉴스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의 진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대부분 묵묵히 수용한다. 그리고 그런 수동적 수용이 여론인 양 힘을 발휘할 때도 있다.

영화 <특종-량첸살인기>는 ‘사실여부를 떠나버린 뉴스’라는 생각을 블랙코미디로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 허무혁 기자는 광고주와 연관이 있는 줄도 모르고 비판기사를 썼다가 해고 위기에 처한다. -사실 여부라는 주제보다 실은 이게 현실적으로 더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신문이나 방송이 자생할 수 있는 기반이 없고 광고료가 대부분의 수입을 차지하는 경우 광고주 눈치보기는 극에 달한다.- 이때 연쇄살인범을 알고 있다는 한 통의 제보전화가 걸려온다. 허 기자는 이 제보를 믿고 특종을 터뜨린다. 그런데 이 제보는 사실이 아니었다. 허 기자는 거짓이 들통날까봐 다시 거짓으로 무마시키려 한다. 사건은 이제 일파만파로 커졌다. 그런데 웬걸. 연쇄살인범이 허 기자의 이야기대로 살인을 저질러버린다.

한편 허 기자는 사적으로는 이혼 위기에 처해 있다. 아내는 임신을 하고 있지만 헤어질 태세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합치려하는데 출산한 아이의 아빠가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내는 허 기자의 아이라고 믿어달라 한다. 허 기자는 친자확인을 해보지만 그 결과를 끝내 보지않고 자신의 아이라 믿는다.

블랙코미디인 이 영화의 핵심 장면은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친자확인 결과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 뉴스 보도된 내용의 반론을 들어볼 것인가, 말 것인가. 허 기자는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이 자신의 삶에 하등 도움을 주지 않는다 생각한다. 그냥 믿고 살자. 그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겠나. 그러니 허 기자가 자신의 잘못을 실토할 것이라 생각하지 말자. 보도된 뉴스가 잘못됐다고 말할 것이라 생각하지 말자.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다. 백국장이 말하듯 그것을 믿는냐 믿지 않느냐가 중요할 뿐.

그래서 사실은 누군가 애써 드러내지 않으면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우리는 사실이 숨바꼭질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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