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개의 시선>은 국가인권위원회가 후원한 인권에 관한 단편 영화 5개를 묶은 옴니버스 영화다. 인권에 관한 영화라고 하니 굉장히 따분하고, 재미없을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박경희 감독의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나 김동원 감독의 '종로, 겨울'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니 다분히 따분할 수도 있겠다. 더군다나 다운증후군 학생의 일상을 찬찬히 바라보는 카메라와 외국인 노동자, 특히 조선족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인터뷰를 듣다보면, 굉장히 힘이 든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죄인마냥 느껴야 하는 중압감이 생각보다 크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때론 익숙하게 대함으로써 차별을 없애야 하며, 때론 낯설게 생각함으로써 일상 속에 감추어진 폭력을 깨달아야 한다는 압박감.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한 개인을 넘어 사회적 편견까지 깨뜨려야 하는 삶이란 얼마나 고단할 것인가? 그러나 어쩌랴, 그게 바로 행복의 나라로 가는 길임을...

음,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이 영화가 너무 딱딱해 보인다. 조금 화제를 돌려 장진 감독의 <고마운 사람>을 보면,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지한 주제나 소재를 이토록 웃음이 폭발하도록 재기발랄하게 표현할 줄 아는 감독이 과연 누가 있을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정말 <다섯 개의 시선>중에 발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장진 감독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을 공안시절의 고문기술자들을 통해 보여준다.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가 서로 교류하고, 그 위치가 뒤바뀌는 상황을 통해서 풍자와 해학을 마음껏 펼쳐보인다. 지금, 이렇게 고문하고 있는 나는 비정규직이라 보너스도 없고 정시 출퇴근도 없으며, 근무 환경 또한 최악이다. 하지만 지금 고문받고 있는 너는 서울대를 나왔으니, 의료보험에 보너스에 성과금에 정시 출퇴근을 할 것이며, 퇴직금도 두둑할 것이다. 너는 우리같은 비정규직을 위해서도 데모를 할 것이냐? 네, 하죠. 둘의 관계는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진다. 언론매체도 정부도 다들 양극화에 대해 두려워하며, 해결 방책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생색내기거나 탁상공론에 그칠뿐이다.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 양극화의 당사자들의 설움을 이토록 유쾌하게 그려내는 장진 감독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음으로 또 주목할만한 것은 정지우 감독의<베낭 맨 소년>이다. 탈북 소년과 소녀의 남한 적응기를 보여주는 이 단편은 오토바이 질주 장면의 긴장감이 그들의 삶의 위험천만함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또 마지막 소녀가 내뱉는 유일한 말이 주는 감동과 자막의 충격성이 영화적 재미를 그대로 보여준다. 천국으로 알고 찾아온 남한이 어떻게 지옥으로 변하는지를 진지하면서도 경쾌하게 그녀내고 있다.

류승완 감독의 <남자니까 아시잖아요?>는 조금 과장되어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원신 원컷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술주정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 술 주정 속에 드러나는 대사들이 전부 차별적 발언이다. 성, 학력, 섹슈얼리티, 직위 등등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차별적 언사로 꾸며져 과장되어 보이지만 또 이만큼 효율적으로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차별을 이야기할수도 없다고 보여진다. 다만 말로만 가득 차 있다보니, 차분한 성찰을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섯 개의 시선>은 정말 색깔 다른 감독들의, 색안경 낀 사회에 대한 때론 진진한, 때론 유쾌한 해부도다. 두시간 가까이 지켜보는 것이 조금은 지루할지도, 조금은 거북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을 깨우치는 데는 큰 도움이 되리라 본다.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 때론 웃으며, 때론 울며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다. 극장밖을 나선 순간, 우연히 차별받는 그들과 마주치게 됐을때, 낯선 이방인 취급을 그만두고, 똑같은 인간임을 한번만 더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의 시선은 따뜻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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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3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3
키류 미사오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19세 딱지가 붙어 있는 동화책이라는게 도대체 뭘까?  궁금했다. 혹시 굉장히 야한 책일지도 모른다 (^^ )는 흥분된 속내를 감추고 책을 폈다. 그런데 이 책의 19세 딱지는 아무래도 잔인함에서 비롯된 것 같다. 동화책이라고 하기에는 섬뜩한 폭력과 핏내가 진하게 풍겨 나온다. 물론 이 장치는 동화책이 보여주는 파라다이스의 뒷면에 감추어진, 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기존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3권에는 빨간 모자, 빨간 구두, 돼지 죽이기 놀이, 성냥팔이 소녀, 살인의 성 이렇게 5편이 나와 있다. 빨간 모자의 경우에는 늑대가 바람둥이로 그려져 있고, 빨간 모자는 사생아로, 할머니는 고려장과 같은 내팽겨쳐진 노인으로 나타난다. 성냥팔이 소녀의 경우엔 원래의 캐릭터 그대로 순진하게 그려져 있으나, 그 반대의 악덕한 캐릭터 사드 후작을 만난다는 설정이 다르다. 이 책에선 통쾌한 여자들의 복수가 그려져 있는가 하면, 또한 여성들의 참을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장면도 그려져 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는, 실상 전복적인 사고보다는 굉장히 보수적 사고체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3권 속에 있는 5편의 동화 주인공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니, 이들 모두가 결손가정이었다. 물론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일지도 모르고, 또는 오히려 자신의 무의식을 은연중에 드러낸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읽어가면서 계속 나를 괴롭히게 만든 생각은 이들이 행하는 행동들이 마치 어렸을적 행복하지 못했던 시절에 대한 복수심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여지는 연쇄살인범들의 가정 마냥, 불행했던 아동기로 폭력적 행위의 근원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말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는,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가족이야기로 들리고,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맹목적 복종에서 한 발 벗어날 수 있는 깨달음 보다는, 행복한 가족을 그 해법으로 찾아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알고보지 않아도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았나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나의 오독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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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갔다 오기 전과 후에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깨우쳐 준것이 <어퓨 굿 맨>이었다면,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군대 그 자체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번 내 몸 속에 잠재해 있는 폭력을 일깨운다. <어 퓨 굿 맨>이 폭력에 대한 동의를 가져왔다면 <용서받지 못한 자>는 폭력에 대한 체념과 저항을 함께 일깨운다. 지금까지 나온 어떤 군대에 관한 영화보다도 <용서받지 못한 자>는 사실에 가깝다. 그리고 그 사실은 대한민국 예비군들 몸 속에 숨어있는 폭력의 씨앗을 보여준다.

 태정은 군기반장이다. 나름대로 군대 생활을 잘 해왔다고 생각한 그에게 부사수로 승영이 들어온다. 그런데 아들뻘(아버지와 아들은 군대에서 또 다른 의미로 쓰인다)도 안되는 그가 중학교 동창인 관계로 태정의 말년 군 생활이 조금 꼬인다. 그러나 태정은 승영을 최대한 감싸주려 하고- 하지만 또 그 뒤에선 승영의 고참들에게 얼차려를 가하며, 제대로 가르치라고 호통친다 - 승영은 태정의 보호아래 자신의 의지를 꺾이지 않고 군생활을 해나간다. 불합리한 명령에 따르지않고, 솔선수범하며, 자신의 위치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군대에 들어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내가 고참이 되면 다 바꾸겠다며 버텨낸다. 시간이 흘러, 태정은 제대를 하고, 승영 밑으로 지훈이라는 부사수가 들어온다. 지훈은 조금 어리버리하다. 승영은 지훈으로 인해 군생활이 힘들어지고, 태정 또한 이미 자신을 보호할 수 없게 되자, 점차 변해간다. 바로 군대 생활 잘 한다는 모범 군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고참들에게 장교들 물품을 선물하기도 하고, 마음에 꼭 들어맞는 이야기도 하면서. 고참들은 승영에게 지훈을 잘 가르치라고 훈계한다. 승영은 지훈때문에 힘든 자신의 처지와, 물리적 폭력에 서툰 개인적 특성 사이에서 점차 지훈에게 모질게 대하기 시작한다. 지훈은 승영에게 의지하고자 하나, 점차 변해가는 그로부터 아무것도 위안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게다가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라, 극도의 참담함을 느끼다 결국 군화끈으로 목을 맨다. 승영은 혼란에 싸이고, 휴가인지 탈영인지 모르겠지만, 밖에서 태정을 만나 위로를 받으려 한다. 하지만 태정은 승영이 아직도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모습에 짜증이 난다.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밝히진 않으려 한다.

영화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법한 군대 생활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다만 주위에 자살한 부대원이 흔한 것은 아니니까 그 충격의 정도가 다르다고 하겠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 제일 괴로웠던 것은 불합리한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군의 특성이라는 것이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라지만, 불합리한 명령은 거부할 권리 또한 주어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거부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기 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기 위해 자신을 굽히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를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난, 고참이 되면 다르겠다는 생각은, 본전 생각이 나서 (내가 당한 것이 있는데 라는 생각말이다) 쉽게 바꾸지 못한다. 즉, 고참이 되는 순간 그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고 있는 자기자신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군대니까 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승영의 말이 고참이 되는 순간 무너진 것과 똑같다. 군대는 개개인의 힘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물론 군대 참 좋아졌어 라고 다들 말하지만, 그리고 나 또한 고참이 되면서 많이 바꾸었다고 다들 생각하지만, 폭력은 어느 새 몸에 깊이 각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 폭력은 군에서 나오는 순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어는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뛰쳐나온다.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자는 결국 자신의 피를 모두 쏟아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피 속에 감추어진 폭력의 씨앗을 뱉어내고 싶다고... 아마 온 몸이 다 마르도록 피를 쏟아야만 할 것이다. 폭력의 구조는 그렇게 여전히 나의 영혼을 감싸고 있다. 이 영화는 그 영혼을 돌아보도록 만든다. 참혹하고도 슬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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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첫 사랑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여자는 현재의 사랑에 전념한다고 그러던데... 이 영화는 이런 속설과는 달리 여자에게도 첫 사랑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환희며 통증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또 하나의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김정은이 첫 사랑에 대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자 역을 맡고 있는데, 그저 사랑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혼란스러운 미스터리적 요소가 있다.(나의 이해 능력이 떨어져서 일지도 모르겠으니, 미스터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스터리로 장르가 탈바꿈 되어 다가온 것일지도) 과거에 대한 회상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것이 현실 속에 끼어들어 현재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고, 그것이 현실의 또 다른 인물이라고 이해하는 순간, 영화는 그것이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로 끝을 맺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차분히 영화를 한번 더듬어 보도록 하겠다.

김정은은 친구와 함께 사설학원을 운영하는 강사다. 어느날 학생 중에 하나가 눈에 띤다.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사랑했던 아이와 이름도 똑같고 생김새도 똑같다. 그리고 갑자기 회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장면이 나타난다. 김정은과 이름이 같은 여학생이 고등학교 시절 처음 사랑했던 아이가 바로 학원의 학생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사고로 죽었다. 그런데 병원 장례식장에서 그와 똑같이 생긴 아이와 마주친다. 화를 내고 영정을 부수고 난리를 치는소녀, 알고 보니 쌍둥이 동생이다. 소녀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 여자 옆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아이는 따로 있다. 그 아이는 현재 김은정과 동거하고 있는 남자와 이름이 같다. 동거라고 하지만 말 그대로 그냥 집을 함께 나눠 쓰고만 있다. 애인이 아닌 친구다. (누군가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라고도 보던데)

김정은은 고등학생과 사랑에 빠진다. 주위에선 불온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어느날 외국에 나가 있던 그녀의 첫사랑이 돌아온다.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지만 그 만남은 그다지 기쁘지않았다.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남자. 다군다나 첫 사랑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지금의 학생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첫 사랑보다는 지금의 사랑에 빠져있던 여자, 힘들지만 행복하다. 그러다 동거남과 고등학생, 첫사랑 남자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그녀를 잘 알고 배려할 줄 아는 동거남, 과거의 추억을 함께하는 남자, 자신의 감정을 빼앗아간 학생. 이들의 묘한 만남은 사랑니에 아파하는 김정은의 모습 속에서 아릇한 아픔과 함께 은은한 따뜻함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는 소녀와 동거남과 이름이 같은 학생의 병원신. 현재 김정은의 배에 남아있는 흉터와 똑같은 자리에 맹장 수술을 한 그녀의 상처를 동거남과 이름이 같은 아이가 바라보고 있다.  

음,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더 헷갈릴듯 싶다. 그냥 내 마음대로 해석해보면 현재에 개입하고 있는 학원생과 소녀, 그리고 그 소녀 옆의 학생은 모두 과거의 인물들이다. 지금 현재 동거남이며, 외국에서 돌아온 첫 사랑들의 과거가 현재에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 김정은은 여전히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과거는 실은 첫사랑이 돌아온다는 소식때문일지도 모른다.(영화 속에선 중간에 그 소식을 알게 되는 것으로 처리되지만) 그리고 돌아온 첫사랑과의 첫 만남의 섭섭함이 사라지고, 집에서 추억을 되씹는 과정에서 과거와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름이 같은 두 남자의 접촉으로 가능해진다.

첫사랑은 언제든지 현재로 재생되는,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아픔이자, 성장통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것 같다. 마치 사랑니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는 사랑니가 아직까지 나지 않은 걸로 보아서, 첫 사랑에 대한 아련한 아픔은 모두 가짜라고 말하고 싶다. 그저 하나씩 들춰보고 싶은 추억의 장면일뿐이지만, 잃어버려서 안타까움이 더한 것일뿐, 뭔가 더 특별한 어떤 것은 아닌것 같다. 무엇이든 처음 경험하는 것이 오래 각인되는 것처럼,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품게 만든것은 아닐까. 가슴까지 아파해본 첫사랑의 경험이 없으니, 현실 속에서 언제까지나 재등장하며, 지울 수 없는 첫사랑의 위력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처음이 주는 강렬함과 그 깊이만큼 가득한 아픔을 영화를 통해 조금은 알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추억이란 조금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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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1-01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이 영화 봤어요. 뭐랄까, 환타지를 집어 넣은걸까. 하고 봤더랬지요. 게다가 마지막 장면은 뭘 말하는걸까요? 정우와의 추억이 마지막에 나온 이유가 뭘까 한참을 생각했더랬어요.

하루살이 2006-01-0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환타지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바로 그 마지막 장면때문에, 아! 모든게 다 과거였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답니다. 과거는 항상 끊임없이 현재에 끼어들어오지 않나요? 특히 술 먹을때면^^ 과거는 그래서 그냥 과거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늘빵 2006-01-0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니는 났지만 아프지는 않았어요. 뽑을 필요도 없다고 그래요. 그런데 사랑은 너무 아픕니다.

하루살이 2006-01-01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으니... 아프락사스 님의 사랑이야기도 듣고 싶군요^^;;;
 

지난 토요일이었던가, 일요일이었던가. 카톨릭 신학대학교의 학과일정이 TV를 통해서 드러났다. 150년만에 처음으로 공개된 신학생들의 삶은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영원과 하루>라는 제목으로 KBS 스페셜로 방송됐는데, 삶의 경건함을 느끼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만 30세 이전의 학생들에게 입학이 허용되고, 같은 해에 입학하면 군대를 같이 가거나, 그 기간동안 봉사활동을 함으로써 전체가 함께 같은 일정을 가도록 짜여져 있는 그들의 모습이 한편으로 숨이 막힐듯하다. 하지만 이런 하나됨이 남다른 일체감을 주리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불필요한 생각일듯 싶지만, 이것이 카톨릭 조직이라는 곳에서 권력싸움의 밑바탕이 되지않을까 불손한 상상을 해본다.

가족과 친구들의 우려, 걱정 속에서 들어간 신학대학교의 삶이 그들이 무엇때문에 이 길을 택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게 만드는 것 같았다. 동년배들이 느끼는 생각, 욕구와 동떨어진 삶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일지 차분히 보여주는 속에서, 나 또한 명상에 잠긴다. 특히 그들이 대답하기를 꺼려했던 이성과의 관계를 큰 의미의 사랑으로써 이해하는 것을 넘어, 과연 어떻게 그 유혹을 이겨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 과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 탈락한 학생들의 이야기였다. 프로그램 속에서도 탈락율이 35%에 이른다고 알려주고 있지만, 무엇이 이들에게 그토록 단단했던 신념을 깨뜨리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데는 다소 소홀한듯 싶다.

다만 졸업반, 성직자의 길을 택하기전 휴학한 학생의 입을 빌려 이야기해보면 그들의 갈등을 조금이나마 엿볼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함으로써 이루려고 하는것, 그것으로 가느 것에 일말에 후회가 없을 것인지에 대한 회의. 그것은 단지 신학도로서만의 문제는 아닐듯 싶다. 믿음이라는 것은 오직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꿈을 향해 걸어가는 길. 그것에 대한 믿음 역시 이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지금 내가 이토록 고민하고 있는 것도, 그 휴학생의 고민과 많이 닮아 있는 듯하여,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TV가 보여준 65%의 신학도들보다 35%의 탈락자들이 지금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지 정말 궁금했다.

믿음, 그리고 흔들림, 선택, 그리고 후회.

삶은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다만 한발 한발 내딛는 내 발자국만이, 비록 비틀거리고, 주춤댈지라도, 온화하기만을 바랄뿐이다. 질질 끌려가지않고, 더디더라도 힘차게 내 딛어지기만을 바랄뿐이다. 무지개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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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5-12-2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셔요?
저도 이 프로그램 봤어요. 서류상 심정상 천주교 신자로서 35%에 든 사람들도, 65%에 들었으면서도 나중에 탈락해버리는 사람들도 보아왔지요. 점점 사제지망생이 줄어든다고 걱정하면서도, 역시 주위에서 한다고 하면 잘 생각해보라고 일단 말려보고 싶어요. 그래도 그 분들은 일생을 걸 무엇을 발견했다는 거겠지요. 그리고 그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한 어느 신학생이 '남들이 다 하는 일 못하기도 하지만, 남들이 못하는 일을 하는 기쁨'을 얘기하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런 확신과 정열, 실천력이 있다는 게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답니다.

하루살이 2006-01-01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제 지망생이 줄어드는 걱정보다는 진정한 사제가 줄어들고 있지 않는가가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신과 정열, 실천력을 죽는 날까지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정말 존경스러워할만한 일이겠죠. 님께서도 새해에는 그런 정열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