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박상훈 후마니타스 편집주간이 프레시안에 쓴 파시즘의 대중심리(빌헬름 라이히 저)라는 서평 중 마지막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사회적 관점을 강조하는 참에 새로운 발전모델로 신봉되는 '생명공학론' 혹은 '생명과학 산업화론'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생명과학기술이나 의학기술이 덜 발달해서 인간 사회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기존의 의료기술의 혜택을 폭넓게 받을 수 없는 사회구조의 불평등이다. 신용불량자의 불행한 처지로 떨어진 사람들의 상당수가 의료비 부담 때문인 현실에서, 인간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은 평등의 문제이다. 평등하지 않으면 가난한 자가 자유로울 수 없고, 자유로울 수 없으면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은 약해지며, 결국 사회는 병들게 된다. 의료산업화, 생명과학 산업화에 엄청난 국가예산을 쏟아 설령 뭔가 엄청난 기술이 개발된다 한들 산업화 논리의 귀결은 가난한 다수를 여전히 혜택에서 배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의 문제에 대한 접근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좋은 사회라면 장애인이나 난치병 환자 문제를 그들만의 불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의 문제로 보고, 이들이 인간으로서 필요한 여러 조건을 향유하게 하면서 사회 속에서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것에 더 많은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떤 위대한 기술을 발전시켜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를 모두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반사회적이고, 반자연적이며, 위험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를 포함해 인간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커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기술 개발에 인간과 사회의 구원을 의탁하려는 도구적 관점이 더 커져버린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속에서 자극되는 것은 반대자나 비판자에 대한 복수의식 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비극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관에 의해 대중의 심성 구조가 반사회적인 방향으로 파괴되면서 만들어진 문제가 아닌가 싶다. 모두가 경제와 기술 발전의 혜택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에서 불안과 소외는 일상화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는 사이 인간의 내면과 자아가 황폐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조건에서 자신의 문제를 자기 외부의 누군가에게 전가하려는 사회심리적 조건은 커지게 되고, 탁월함이라고 하는 귀족주의적 가치가 숭상되고, 그러한 능력을 갖는 영웅의 출현으로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병리적 현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집권 개혁파의 신자유주의적 타락이 우리사회의 불행을 심화시키는 현실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태의 기원이 이처럼 사회적이고 정치적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가 검찰의 조사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더 참담하다.
이런 고통과 참담은 라이히의 이 책을 읽을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인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개선해야 할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대가를 얻게 된다면 그야말로 좋은 거래가 아니겠는가? 언제나 그렇듯, 좋은 서평보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수천 배 더 나은 일이다.
지난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 연설을 듣다가 화가 나 꺼버린 이유도 아마 이와 비슷한 것인듯 하여 퍼왔습니다. 교육, 의료, 토지에 대해서는 자유스러운 경쟁이라는 것이 성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사회라는 공공의 재산이어야 할 위의 3가지 분야에 대해서 사적인 자유로운 소유가 가능하다면 불평등의 해소는 끝이 날리 없을 것입니다. 사적 소유 자체를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적 견제가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이죠. 공익이 아닌 기업의 논리로 3가지 토대가 변해버릴때, 세상은 밀림보다 못한 생존의 전쟁터가 되버리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