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이름은 유괴 - g@me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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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똑똑하다고 느낀다.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지 간파하고 있다는 자만감으로 가득찬다. 하지만 알고보면 어디선가 보았던 영화나 드라마와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이 책은 영화로 이미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니 이미 해답을 알고서 책을 읽었던 셈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는 전혀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또는 정말로 내가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것이 아니라, 추측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의 재미는 이 트릭과 결과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유쾌하다. 시선의 변화. 바로 그 부분에 이 소설의 매력이 숨어 있다.

소설은 유능한 광고기획사 직원이 자신이 맡고 있던 프로젝트에서 제외되면서 시작한다. 임무에서 빠진 것은 순전히 광고주의 입김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게임으로 바라보고, 그와의 게임에서 꼭 승리하리라 생각한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광고주의 배다른 딸과 함께 계획하는 유괴. 소설은 바로 유괴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범인의 입장에서 진행된다. 범인을 찾는 탐정의 시선이 아니라, 범인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는 점이 특이한데, 완전범죄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는지 살펴볼 수 있어 흥미진진하다. 그것은 마치 평상시 걷던 길을 다른 방향으로 걸을때 느끼는 색다른 느낌과 비슷할련지도 모른다.

또하나, 소설 속에서 부록처럼 나오는 범인이 개발한 게임에 대한 설명이 시선을 끈다. 청춘의 가면으로 기억되는데, 사회 생활을 하면서, 또는 가족을 대하든, 친구를 대하든 누군가와의 대면에서 서로 다른 얼굴을 한다는 것, 즉 그 사람에 맞는 가면을 써야지만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게임의 시놉시스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보여진다. 유괴를 계획하고 범행을 저지르면서도 태연하게 회사에 출근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그것을 역이용하는 광고주의 모습 등은 소위 말하는 2차적 관계의 가식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인공들을 통해 마치 중국의 가면탈 묘기를 하듯 가면을 바꿔쓰는 현대인의 모습과 함께, 쓸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이 소설이 조금 씁쓸한 것은 도대체 희생자는 어떻게 위로받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현실이 그러하니, 희생은 마땅히 그냥 넘겨야 할 것인가? 어차피 게임 같은 인생인데, 희생이야 그냥 무시하거나 잊어버려야 하나? 그런데 권선징악이 현실과 떨어져있듯, 차라리 소설 속의 결과가 진짜 현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는 없을듯하다. 세상 곳곳을 돌아보건데, 해피엔딩에 가려진 희생자들은 얼마나 많던가? 소설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공상 속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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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3-0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주인공이 아닌 자들의 삶이 가려져 있듯이요.

하루살이 2006-03-02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빛쪼가리 하나라도 마음 한 켠에 간직할 수 있다면...
 
희망 나침반
기타가와 야스시 지음, 황소연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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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꾸준하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아왔다.

그래, 너는 미래에 무엇이 되고 싶냐?

으례 그렇듯이라고 말하기엔 무엇하지만, 대부분 과학자니 의사니, 대통령이니 장군이니 하는 직업을 말하곤 한다. 그 희망 직업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인기 직종이라거나, 전문 직종이라거나 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가령 2,30년 전엔 과학자가 대세더니 최근엔 탤런트가 희망 직종으로 떠오르듯이 말이다. 그런데, 과학자가 되면, 또는 연예인이 되면 그 인생은 행복한 것일까? 대통령을 꿈꾸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행복을 보장받을까?

매너리즘에 빠졌든 실패를 맛보았든 힘들고 지쳐 있다면, 한번쯤 이 책을 들쳐보는 것도 괜찮을듯 싶다. 당신이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거나, 어떤 직업만을 가지고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면 말이다.

책은 14세 생일을 맞은 사이드라는 아이가, 9명의 현자를 만나면서 깨우치게 되는 배움을 이야기한다. 그 배움은 책의 또다른 주인공인 알렉스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알렉스는 직장에서 더이상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한직으로 쫓겨난데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쌓여있다. 또한 집에서도 아내나 아이들과 이렇다할 교감을 나누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그는 사이드와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 전환점의 계기가 된 9가지 지혜는 다음과 같다.

행동하라.

가능성을 믿어라.

자존심만큼 타존심을 소중히 여겨라.

어떤 직업을 목표로 하기에 앞서, 어떤 인간이 될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라.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에 최선을 다하라.

가장 귀한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가진 시간을 투자하라.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라.

자신에게 끊임없이 긍정적인 언어를 들려주어라.

이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하라. 자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먼저 베풀어라. 오늘을 성공의 첫날로 만들어라.

 

개인적으로 생각건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3번째로 보인다. 서두에서 이야기했듯, 무엇이 될 것인가에 치중한 삶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될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의 해답은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에 있다. 그것은 나를 존경하는 것 만큼 타인을 존중하는 자세로부터 나올수 있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돈만 있으면 당장 현재 일을 그만두고 어떤 일을 하고 싶다거나 하는 따위의 꿈은 도대체 무엇때문이었는가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행복한 삶의 전제조건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가는게 행복할지를,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보다 더 진중하게, 성심껏 고민하며 살아왔던가 반성해본다.

명함으로 자신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명성으로 자신을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그렇다고 명예를 쫓는 부나비가 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님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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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노랫소리 - 제6회 일본추리서스펜스대상 수상작
텐도 아라타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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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혹 스포일러라고 할만한 부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 소설은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를 잠시 떠올리게 만든다. 범인의 정신병으로 말미암아 사건이 진행되고, 그 정신병은 그 어머니의 잘못된 사랑과 집착으로 말미암았다는 점에서 사뭇 유사하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사이코보다는 오히려 최근 뉴스 속에 비쳐지고 있는 일종의 '발바리'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범인의 대상자들이 원룸에 거주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이고 보면, 마치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성범죄를 미리 예견하고 있는듯하다.

하지만 소설은 "그러니 여자들이여, 늦은 밤 홀로 다니지 말거라" 따위의 뉴스속에 감추어진 우회적인 훈시(비록 피해자들을 마치 걱정하는듯 하지만 폭력이 감추어진)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심도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장점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크게 3명이다. 여형사 아사야마와 편의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준페이(그러고 보니 최근 편의점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 또한 이 소설 속에서 이미 예견하고 있는듯하니, 작가의 현실을 꿰뚫는 눈은 가히 매서운 정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범인 마쓰다 다카시. 이 3명의 공통점은 혼자서 산다는 것이다. 아사야마는 과거 친구의 행방불명 사건에 대한 죄책감으로 형사가 되었고, 준페이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남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오히려 마쓰다의 바깥에 비쳐진 삶이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보인다.

소설은 연쇄 살인사건을 큰 축으로 편의점 강도 사건을 배치하면서 이 3명이 어떻게 조우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범인이 누구일까나 어떤 트릭이 쓰였을까 보다는 주인공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독신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이들의 감추어진 목소리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넘어 마음의 울림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내면의 소리가 결국 나의 감추어진 속내와 닮아 있음을 고백하며, 가슴 속에 새겨진 느낌을 적어보겠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과연 간섭과 이해는 어디가 그  경계선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필수다. 하지만 그 정보를 얻는 과정은 어디까지 용납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정보가 타인의 비밀까지 깊숙히 들어간다면 이들의 관계는 행복할까? 비밀의 공개로 마음이 통한다는 것이 정말로 행복을 위한 전제인 것인지, 불행을 가져올지 모르는 무서운 일인지 혼란 스럽다. 반대로 타인의 세계를 존중해주는 것과 무관심의 경계는 어디일까? 나와 너의 독자적인 세계를 인정하고, 서로 존중해준다는 것이, 타인의 눈에는 무관심으로 비쳐줄 수 있고, 그것은 관계의 친밀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도대체 나와 너는 얼마만큼 가까이, 또는 떨어져 있어야 한단 말인가?

소설 속에서는 준페이의 릴레이 경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바통을 제대로 받을줄 몰랐던 준페이에게 그의 믿음직스러웠던 친구(준페이는 자신이 신뢰했던 친구로부터 배신당한 경험이 있다. 이것이 그를 혼자이게 만든 큰 요인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론 어떠한 이유가 됐든 이별이 주는 충격을 어떻게 해소하는냐가 그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한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혼자인 나를 분석해보자면 말이다. 준페이의 경우도 배신으로 인한 이별이 타인과의 밀접한 관계를 방해하는 심적 요인으로 작용했을듯 싶다)는 자신이 제2주자로 나설테니 바통만 그저 넘기라고 말한다. 바통을 넘기기만 하는 사람과, 바통을 받기만 해야 하는 사람의 다른 입장을 소설 속에서는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읽는 이는 애잔하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바통이 있다. 너와 나라는 독립적 인격체간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화학적 작용 또는 같은 자석마냥 밀어내는 물리적 작용이 존재하더라도 내 손에서 건네지는 바통을 받아쥐는 타인의 손이 있다. 또는 그 반대로 타인이 건네주는 바통을 넘겨받아야 할 나의 손이 있는 것이다. 관계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바통을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깨진다면 릴레이를 완주할 순 없다. 혼자서 그 거리를 뛰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바통은 독립적이면서도 함께다. 외로우면서도 힘이 되어준다. 마치 준페이의 성문(聲紋)이 그러하듯이. 고독한 자들이여, 서로 힘이 되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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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하루
마르탱 파주 지음, 이승재 옮김, 정택영 그림 / 문이당 / 2005년 10월
품절


우아함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한 우리의 삶을 바라보며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웃음을 잃지 않는 태도를 수식할 수 도 있는 것이다.

저자 서문 중
나의 단상-그래 웃자. 우아하게 살아보자. 하하하. -9쪽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이라는 게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더라

나의 단상-눈치 볼 필요있나, 코치가 필요한가. 당당해보자-56쪽

인생은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난 단지 아가미가 달린 인간일뿐이다.

나의 단상-인생이 내가 만드는 것이다. ㅋㅋㅋ-102쪽

나는 사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인생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나의 단상-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잘 살아보자. 어떻게?
서문에서 말했잖아~ 우아하게.-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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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을 그리는 영화는 현재 굉장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듯 싶다. 리얼 액션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리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할지라도, K -1이나 프라이드와 같은 종합 격투기의 실재감을 쫓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각본없는 드라마라고 하는 스포츠가 갖는 매력 그 자체를 뛰어넘기 위해, 각본을 써야만 하는 숙명이 주는 어려움일 터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실적 몸놀림 위에 양념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을 터인데, 그것 또한 만만치 않다. 보다 더 새로운 것을 찾는 관객의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이 그리 쉽겠는가? 와호장룡의 경공술 이후 영웅, 연인 등에서 보여주는 특수효과는 과연 지금보다 더 새로운 무술을 보여줄 영화가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낳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축소해서 이연걸 개인으로만 한번 살펴보자.(이 영화의 주인공 곽원갑 역을 맡고 있으니까) 소림사라는 정통적인 방법에서 시작해 황비홍이라는 살짝 가미된 특수효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할리우드로 날아간 이연걸은 자신의 몸뚱아리보다는 기계적 효과에 보다 많이 의존하게 된다. 나이 탓인지, 아니면 제작 방식의 변화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눈에 뜨이는 부분은 시원한 발차기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대련에서 발을 높이 치켜드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동작이긴 하지만, 영화 속에선 큰 동작이 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연걸의 변화에 다소 실망했지만, 그래도 영웅 속에서 한가닥 희망을 보았다. 아직도 그에게는 무술의 힘이 넘쳐 흐른다는 것을. 그리고 이번 <무인 곽원갑>에선 황비홍 류의 자신에게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이 부활 또는 복귀는 순전히 원화평이라는 무술 감독의 역량 덕분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갖는 장점은 단순히 현란한 대련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 광고 카피에선 마치 K-1을 100년 전으로 끌어다 놓은 것 같이 보여지지만, 오히려 곽원갑이라는 실제 인물이 어떻게 정무체조회를 창설하게 됐는가에 대한 개인적 드라마에 눈길이 간다. 정무체조회는 이소룡의 정무문을 떠올리면 된다 외세에 맞서 자주적 힘을 가져야 함을 역설하면서도 폐쇄적이지 않고, 예를 갖추며, 상대에게 두려움 보다는 존경심으로 우러러받을 수 있는 사람, 집단을  지향했던 단체 말이다. (두려움과 존경심에 대한 이야기는 과잉해석해 보면 중국과 미국을 빗댄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강압적 폭력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중국은 결코 그런 제국적 모습이 아닌, 존경의 대상이 될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으로 부풀린 상상임에 불과하지만, 중국이 정말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주변국가들로부터 존경받는 대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 한국 또한 자본의 힘으로 남을 깔보지 않고, 존중할 줄 아는 나라이기를 희망해본다.)

곽원갑은 천진이라는 고장에서 제일가는 무술인이 되기 위해 매일 목숨을 걸고 싸우고 또 싸운다. 대의명분같은 것은 없다. 오직 1인자만이 최종 목표다. 마지막 진대인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앗아간 혈투를 벌이고, 그로 인해 자신의 가족이 몰살당한다. 충격을 받은 곽원갑은 고향을 떠나 방랑의 길을 나선다. 그리고 쓰러져버린 한 깡촌 산간 마을. 그곳에서 그는 몇 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참된 武란 무엇인가를 깨우친다. 그 깨우침의 과정은 모내기 장면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백미는 바로 이 부분이다. 시골마을의 첫 해, 모내기를 도우러 나선 곽원갑은 같이 모내기를 하던 청년들보다 속도가 뒤진 것을 보고 서두른다. 그들을 추월해 정신없이 모를 심는데, 어디선가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하고 있던 청년들은 모두 허리를 펴고 그 바람을 만끽한다. 하지만 곽원갑은 어리둥절한 채 계속 모를 심을뿐이다. 하지만 다음날 그를 살려낸 맹인의 처녀가 그가 심었던 모를 다시 심는 것을 보게 된다. 모와 모 사이가 일정하지 않고 빽빽한 것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천천히 다시 심고 있었던 것이다. "모와 모가 너무 붙어있으면 싸우느라 서로 자라지 못해요. 모 사이에도 존경하는 마음이 필요하죠. 사람과 같이 " 다음해 모내기때는 어떤 모습일까 가히 짐작할 것이다. 바람이 불면 허리를 펴고 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고 바람을 받아들이는 그의 얼굴엔 평온한 미소가 깃든다.

다시 돌아온 천진, 그곳은 외세에 의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중국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 벌어진 무술 대회. 곽원갑은 그 대회를 통해 진정한 무란 무엇인가를 설파한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않고 물러섰던 아버지의 뜻도 이해한다. 무릇 진정한 무란 타인을 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이겨내는 것이다. 싸움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요, 진정한 승리는 자신의 성장이다. 4대 1의 싸움에서 마지막 상대인 일본인 무인과 차를 두고 벌이는 대화는 가슴이 찡하다. 마시는 차의 등급은 인간이 정한 것이지, 차가 스스로 정한 것은 없다. 더 낫고 낫지 않고간에 모두가 함께일 수 있다는 생각은, 1등급만을 고집하는 현대인에게 큰 감명으로 다가온다. <정무문>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소룡이 죽음을 알면서도 이단 옆차기를 감행하듯, 곽원갑 또한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세상에 알린다.

무인이란 피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그림자를 찾는 사람이란 것을 <곽원갑>은 잘 말해주고 있는것 같다. (이종 격투기가 끝나면 선수 모두가 포옹하고 위로하고 축하해주는 모습 속에서 언뜻 이런 무도의 자세가 스며 있음을 느낀다) 복수의 끝없는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 영화 <뮌헨>이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를 마치 '동화처럼' 이야기한다. (실제로야 그게 가능할지와는 상관없이 감동을 준다) 영화 <무인 곽원갑>은 예기치 못한 드라마적 감동을 지니고 있어 그 재미가 솔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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