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시를 따로 공부한 건 아니지만, 독서의 영향으로 세상을 저절로 시인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뜻인가요?

어느 날 보니 내가 시를 쓰고 있더군요. 처음에는 ‘이게 시일까?’ 의심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게 ‘시’냐고 어디 물어볼 데가 있나. 어쨌건 그때는 그냥 계속 써지더라고요. 나중에야 이게 ‘시’인가보다 싶어 다시 읽어보니까 감동이 ‘딱’ 생기는 거라…. 시는 자기 감동이 가장 중요해요. 그 후에 스스로 완성도가 있다고 생각한 시를 골라 잡지사에 보냈더니 나중에 연락이 왔어요, 시집에 실어주겠다는 거예요.

Q 스스로 시에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잘사는 방법은 자기가 잘사는 길을 가는 것이겠죠. 그러고 보면 지금 이게 내가 잘사는 길이다 싶으니, 책 읽고 글 쓰는 재주가 어디에 숨어 있었겠죠? 문학을 배운 적은 없어요, 자연에서 배웠죠, 자연은 시시때때로 주는 말이 많아요.

Q ‘자연이 주는 말은 어떤 말’인지요?

음…. 뭐랄까. 젊을 때는 자연이 너무 많은 말을 주니까 헤맸어요. 이 시기가 자연과의 갈등 시기지. 소쩍새가 울어도 왜 우나 싶고, 물소리가 들려도 가슴을 흔들어 버리는 그런 시기야. 그러다가 자연이 자연으로 돌아가고 편안해지는 시기가 오는 거야. 그냥 소쩍새는 소쩍새로, 강은 강으로 보이고 들리는 거지. 이 순간이 아마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얻은 순간이었을 거야.

Q 선생님의 시는 비판을 하되 ‘익명 비판’을 한다는 폄훼도 있어요. 예를 들면 ‘몹쓸 정치인들’이라고 하지 ‘몹쓸 ○○○’와 같은 비판을 피해 서정성의 그림자 뒤에서 그저 박수만 받으려 한다는 거죠.

사사로운 비판은 시인의 몫이 아니야. 정치인들이 할 일이지. 나는 사적으로 좌·우, 진보·보수의 대립도 정권을 잡기 위해 자기 주장을 하는 정치인들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해요. 시대착오적이지. 21세기적 사고는 문화·환경에 대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요구하는데, 시인의 역할은 고치고 대안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지. 거기까지가 시인의 역할이야.

Q.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통제 불능이야.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통제를 못하는 것은 위험한데, 파탄으로 가는 거지. 이미 위험한 길로 들어섰어. 새로운 시대정신이 도래했는데 우리만 외면하고 무시하고 짓밟고 있는 거지.

Q 새로운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생명정신이지. 예를 들면 기후 변화, 생태 순환, 환경 지향과 같은 거예요. 세계가 그렇게 변하는데 우리는 기껏 토목공사나 하려고 들지요. 나는 우리가 뒤처지고 있다는 것을 실체적 위협으로 느껴요.
Q 일생을 한 지역에서 일선 교사로 근무하다가 퇴임하셨는데, 우리의 교육은 어떻습니까.

심각한 문제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 학생·부모·교사 간의 갈등은 조절하지 못할 만큼 커지고 파탄 상태지. 특히 교사 집단은 자기 개혁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어. 세상에 무심한 거지. 사회와 세계에 일어난 일에 가장 반응하지 않는 집단이 교사들이지. 교장 중심의 교육이 교사 집단을 가장 민주화가 안 된 후진 집단으로 만든 것이고. 시키는 대로 잘하는 교사들이 교육을 맡고 있으면 교육에 처방이 없어.

Q 교사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교육’, 그건 주입식 교육 같은 것인가요?

성과 중심이지, 성적 지상이고. 창의성 교육과는 거리가 멀어. 요즘 학생들이 시험은 잘 봐. 혼자는 무지 똑똑해. 그러니 나중에 회사에서 일은 잘할 거야, 그런데 문제는 살 줄을 몰라. 인간이 없어. 더불어 살지를 못해. 그러면 인생이 없어지지. 지금 봐, 아이들이 모두 사라졌어. 전부 공부하러 가고 없어. 놀이터에도 없고 운동장에도 없고 전부 학원에만 있어.

Q 그렇다고 섬진강 아이들처럼 그런 아이들과 달리 자라면, 그 아이들의 미래는 행복해 질까요? 경쟁에서 도태될 게 뻔한데, 그래도 ‘행복하다, 행복하다’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가요?

그 아이들은 자기 선택과는 무관하게 여기 있는 아이들이야. 사회에서 힘들겠지. 하지만 사람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 받는 영향이 있어. 어떤 선생으로부터 받았건 나름의 영향이 잠재돼 있을 테지. 경쟁하며 힘들더라도 혹은 경쟁에서 지더라도, 감성적인 부분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 믿어.

Q 시상이 그냥 ‘딱’ 하고 떠오를 때만 시를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쓰겠다고 생각하고 쓰면 말장난이지. 시란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형식으로 가져온 것이거든. 안 살아보면 쓸 수가 없어. 안 살아보고도 아주 시를 척척 쓰는 시인을 보면 신기해. 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 현상을 종합한 내용을 시의 형식으로 형상화해낼 따름이거든.

Q 그럼 시인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면을 보고, 그것을 시를 통해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건가요?

시는 세상을 종합하는 일이고, 시인이 시를 배우는 일이 세상을 배우는 일이에요. 시인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해석하지. 세상이 썩어도 시만 정신을 차리면 세상은 안 썩어. 그래서 시인이 현상을 제시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하는 게 가능하지. 그러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시인의 역할이 아니야. 철학자나 정치가가 할 일이지. 그런데 시인까지 안 본 것을 가지고 시를 쓰고, 시인이 대안을 내세우기 시작하고…. 그러고 다니면 큰일 나.

Q 선생님에게 독서는 어떤 의미입니까.

요즘은 독서하는 사람이 드물어. 특히 대학생들이 책을 놔 버렸어. 하지만 나중에는 책을 읽는 사람만 살아남을 거야. 책은 정신작용에 영향을 미쳐서 새로운 것을 찾도록 충동질하거든. 그러면 사람이 변하지. 독서로 정신이 풍요로우면 당당하고 자신만만해져. 비루해지거나 저자세일 필요가 없지.

[출처] 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9> 교사 정년 퇴임한 시인 김용택|작성자 시골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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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물들고 싶다. 저 단풍처럼 빨갛게. 저 하늘처럼 파랗게.-오대산 소금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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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주문진해수욕장.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 덕분에 바다가 한껏 푸르름을 더하고 있다. 그런데 모래사장에서 낯선 풍경이 보였다. 젊은 남녀들의 낭만이 아니라 중년의 건강함?이라고 해야할까. 마치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 윌 스미스가 바다를 향해 골프공을 날려버리듯, 이들은 골프연습에 한창이었다.

당구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잠자리에 누울 때면 천장이 당구대로 보인다는데, 그렇다면 이들에게 모래사장은 벙커인 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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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분짜리 동물의 왕국이라고 하면 제격인 다큐멘터리 영화 <지구>는 서럽도록 아름답다는 말을 넘어 서글프기까지 하다.

  

북극에서 남극까지 지구의 생명과 자연을 훑고 지나가는 카메라는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관계가 때론 잔인하게도 비치지만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상어가 물개를 잡아채며 하늘로 붕 떠오르는 모습이라거나 표범.치타의 먹이를 쫓는 질주장면은 그야말로 예술이다. 잡아먹혀야만 하는 동물들의 서글픔도 잡아먹어야 살 수 있는 동물들의 치열함도 과장되지 않고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주는 파장은 생각보다 크다.

   


어쨋든 이 다큐영화는 북극곰이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동면에서 깨어난 북극곰은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나타나 가슴을 싸늘하게 만드는 장면을 연출한다. 몸뚱아리가 절반이나 줄어들어 자신보다 덩치가 큰 바다사자를 잡아먹기 위해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장면은 눈물을 떨구게 만든다.

누가 저 북극곰을 도박으로 몰게 했을까. 

영화는 우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행동하라고 말한다. 무엇무엇을 하면 지구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찾아보라는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거창한 무엇을 찾기 보다  물한방울 아껴쓰고 전기를 허투로 쓰지 않는 것 하나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식을 줄인다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멸종 위기에 처한 생명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사자들 사이에서 잠자듯 조용히 드러누운 북극곰의 모습이 눈동자에 아련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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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는 아이가 떼를 쓰면 엄마가 다가가서 손을 펼쳐보인다. 그리고 아이에게 손바닥을 깨물어보라고 한다. 손바닥을 깨물면 떼쓰는 것을 들어주겠다면서. 그러면 아이는 열심히 입을 벌려 손바닥을 깨물려 한다. 그러나 손바닥은 쉽게 깨물어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바로 이루어질 것 같지만 잘 안되는 것들이 있다. 아이에게 손바닥 깨물기를 시키는 것은 바로 그런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원한다고 해서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럼 어른들은 뭘 해봐야 이런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을까. 팔꿈치를 혀로 핥기 같은 아예 불가능한 것을 해보는 것도 자신의 욕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어쩃든 내가 지금 바라고 있는 것이 손바닥 깨물기와 같은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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