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SBS TV 스페셜 '나는 산다 김성근, 9회말까지 인생이다' 에서 고양 원더스 감독을 맡고 있는 김성근 감독을 다루었다. 만년 꼴찌팀을 우승팀으로 바꾸어 놓았던 그의 리더십이 주된 내용이다. 1%의 희망이라도 찾아내고, 절대 선수들을 버리지 않는 마음. 앞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방을 보는 잠자리의 눈을 가진 그는 한마디로 야구에 미친 사람이다. 그의 별명 야신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의 승리 야구가 재미없다고 비판한다. 벌떼 같이 투수들을 바꾸고 희생번트가 많은 경기는 지루해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선 승리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하일성씨가 "김성근식 야구가 싫다면 그의 야구를 이기면 돼요. 간단한 거죠."라고 표현한 것은 그야말로 한국야구가 김성근의 색깔을 닮아가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김성근 감독의 어떤 점이 그의 야구를 강하게 만들었을까. 김성근 감독은 "살기위해 일하면 안되요. 일하기 위해 살아야죠"라고 말한다. 아뿔싸. 그가 야구에 미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깜빡했다. 그의 열정은 선수들에게도 그대로 전염된다.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방망이를 휘둘러대다 보면 어느새 그것에 중독되어 버린다. 50이 한계였던 사람이 100으로 그 한계치를 늘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그 과정에 중독되어 버리지 않을까. 김성근 감독은 "사람은 천성적으로 게을러요. 그래서 자기 한계를 만들죠. 그 한계 안에 있으면 편하니까"라고 말한다. 게으름을 거부하고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찌보면 희열을 맛볼 수도 있을 법하다. 그래서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에게 존경받는 멘토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열정과 끈근함이 그의 팀을 강팀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속한 팀이 꼭 강팀이 되어서 우승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지더라도 재미있는 야구를 해선 안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은 아마추어에겐 어떨지 몰라도 프로의 세계에선 절대 통할 수 없는 일일까. 만약 팬들이 팀의 우승보다도 야구의 재미-물론 승리가 주는 재미도 크지만, 경기 자체가 주는 재미도 있지 않겠는가-에 손을 들어준다면 꼴찌라도 박수받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건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마치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미쳐야 미친다>를 모토로 삼고 한 분야에서 정상에 서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겐 얼토당토 않은 일일 것이다. 그정도 까진 아니더라도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죽어라 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시간낭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의 리더론이 나의 온몸의 세포를 자극하면서도 섬뜩하도록 경계가 되는 것은 최근 읽은 <피로 사회>라는 책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 속에서는 성취를 위한 끊임없는 발걸음보다는 잠깐의 멈춤, 그리고 돌아봄, 명상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기에 김성근 감독처럼 살아가는 일은 정말로 피곤한 인생이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 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인생이 멋지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실은 자본주의의 생산력 증대라는 시스템에 기름칠을 해준 것은 아닐까. 모두가 김성근 감독처럼 살아가려고 한다면 말이다.

 

물론 쉬엄쉬엄 살아간다는 것은 먹고 살만했을 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반대로 김성근 감독처럼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 때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고, 그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처럼 야구를 못해도 그냥 즐길 수는 없는 것일까. 메이저가 되려고 내 온몸을 불사르며 살아가는 길과 반대로 마이너로 살면서도 유쾌하게 살 수 있다면(물론 마이너가 유쾌하게 살아가는 일은 현실에서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처럼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질지 또한 누가 알겠는가), 당신은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우리는 정상-리더에 너무 목말라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김성근 감독의 말씀을 들으며 생각해본다. 목표를 향해 정찰하듯 똑바로 나아가기 보단 때론 해찰을 하며 비틀비틀 걷는 것도 행복한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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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다. 갑자기 총에 맞아 죽다니. SBS월화드라마 <패션왕>의 결말 얘기다. 강영걸이 죽는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누가 죽인건지 가늠할 수도 없으니 이유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래도 곰곰히 생각해봤다. 단순히 비극을 위해 치닫은 결말이 아니라면 무슨 의도라도 있을텐데.

 

그때 문득 떠올랐다. 1960년 알랑 드롱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가. 혹시 강영걸은 리플리 증후군-상류 사회를 꿈꾸다 현실과 상상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 상태.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주인공 톰 리플리의 이름에서 따왔다-에 걸린 불나방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정재혁을 꿈꾸다 그를 흉내내고 결국 파멸로 끝을 맺은 것은 아닐까.

 

패션왕이 초반에 매력적으로 다가왔던건 개인적으로 자수성가라는 주제 때문이었다. 홍대 앞 노점상에서 시작해 동대문을 거쳐 세계 4대 패션쇼에 이름을 올린 최범석 디자이너라는 '기적같은' 이야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중반 드라마는 대기업을 상징하는 정재혁과 강영걸의 싸움으로 진로를 바꾼듯 싶었다. 그래, 뭐 이런 이야기도 괜찮을 것 같았다. 대기업 프렌들리 대한민국에서 중소기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보여주는 것도 말이다. 그런데 잠깐의 성공이라는 달콤함을 맛본 강영걸이 갑자기 바뀐다. 욕망과 복수에만 사로잡힌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 후반 강영걸을 연기한 유아인의 얼굴은 내내 찡그리는 표정 뿐이다. 알 수 없는 사이 리플리가 된 것이다.

 

10%가 아니라 단 1%로 치닫는 상류층과 대다수의 하류층으로 나뉘어 버린 현재의 대한민국. 그 1%에 대한 욕망이 대한민국을 굴러가게 만드는 힘일지도 모른다. '대박'이라는 단어가 일상에서 뒤틀린 언어가 되어버린 것도 혹시 이것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 욕망은 끝내 불발이 되고 만다. 강영걸의 죽음처럼. 난데없는 드라마의 결말은 혹시 이런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허망한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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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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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카피로도 쓰인 "YES WE CAN"은 이제 너무 자주 들어 식상할 정도다. 하지만 난관에 부딪히거나 힘겨울때면 주먹을 쥐고 외친다. "난 할 수 있어." 일종의 자기 최면인 셈이다. 때론 스스로에게 칭찬을 하기도 한다. "그래 잘 했어. 거봐, 넌 할 수 있다니까"라면서. 그러다 보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과연 그 고래는 진심으로 춤추고 싶었을까.

 

<피로 사회> 저자는 현재 우리 사회를 후기근대사회로 보며 성과사회라고 명명한다. 규율이나 지시, 명령을 통해 이루어지던 생산성 향상이라는 자본주의적 목표가 스스로의 성과를 목표로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타율에 의한 강제보다는 스스로  일에 임했을 때 생산성 향상은 배가 된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는 더욱 발전하고 있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개인은 자유를 느끼지만 또한 그 자유로 인해 강제가 발생한다. 바로 성과라는 수갑이 두 손을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현대 사회에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과 같은 '질병'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것으로 방증된다.

 

즉 자유로운 개인들은 스스로가 설정한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실패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며, 자신이 열등하다는 느낌을 갖는 자책과 자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소진시킨다. 때론 그 목표를 위해 약물을 이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인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노예가 되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얻는 성공이란 자기 착취에 불과할 수도 있다.

 

'뭐, 그 정도까지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생존을 위해 야근을 밥먹듯 해야하는, 또는 승진을 위해 가족을 잊고 사는 피곤한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라. 물론 아직도 야근을 강제로 해야만 하거나 굶지 않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일해야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성과사회라고 명명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된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성공을 위해 스스로 택한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피곤한, 피로 인생이다.

 

그런데 이맇게 자신의 목표를 위해 매진하며 살아가는 것이 '보다' 나은 삶일까라고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있는가. 또한 좋은 삶이란 혼자서만 목표에 도달한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일까. 행복은 모두가 함께 해야 그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생존을 위해 또는 성공을 위해 혼자서만 줄기차게 달려가고 있진 않은가.

 

그러니 제발 앞만 보고 달리기를 멈추고 뒤돌아보고 둘러볼 필요가 있다. 명상과 같은 깊은 심심함에 빠져 보아야 한다. 모든 일에 즉각 즉각 대응하기를 멈춰야 한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무언가 마땅치 않다면 새로운 상황을 가져올 수 있도록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한다. 천천히 가더라도 어깨동무의 즐거움을 누려보아야 한다. 더이상 피곤하고 피로한 삶이 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스스로 정한(또는 스스로 정했다고 생각하는) 그 목표가 과연 나의 행복을 위한, 더 나은 삶을 위한 종착지인지 이젠 나에게 소리내어 물어보아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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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49쪽

 

자신이 부족하다든가 열등하다는 느낌, 실패에 대한 불안은 바틀비의 감정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끝없는 자책과 자학은 그에게 낯선 것이다. 그저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후기 근대적 성과사회의 특유한 명령에 부딪힌 적이 없다.  57쪽

 

후기근대의 성과 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복종, 법, 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 쾌락, 선호가 그의 원칙이다. 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 그의 노동은 향유적 노동이다....그런데 이러한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해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유에서 새로운 강제가 발생한다는 데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86쪽

 

탈진과 우울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95쪽

 

개성을 확장하고 변형하고 새로 발명해야 한다는 명령이 그 이면에서 우울증을 초래하는데, 그러한 명령의 원천은 정체성과 관련된 상품이다. 사람들이 정체성을 자주 바꾸면 바꿀 수록 생산은 더욱 큰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산업적 규율사회가 변함없는 정체성에 의존했다면, 성과주의적 후산업사회는 생산의 증대를 위해 유연한 개인을 필요로 한다.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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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도 못한다. 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개미와 베짱이>에서 베짱이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새로운 롤모델이 되기도 한다. 노래를 잘 부르는 엔터테이너로 성공한다는 뒷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라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하거나 기획사 연습생으로 몇년씩 땀을 흘려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베짱이가 되려고 해도 그냥 놀고 먹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길인 것이다. 휴일도 없는 연습과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나를 불사르는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어찌 연예계만의 일일 것인가. 정치인들도 경제인들도 학자들도 성공을 위해서는 쉼없이 달려야 한다. 보통사람들은 또 어떤가. 살기 위해서, 올라서기 위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발버둥쳐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 조금씩 나를 잃어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함은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덕목인 셈이다.

 

아~, 그러니 얼마나 피곤한 일인 것인가. 게으름도 부리지 못하는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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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피로사회> 한병철 49쪽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빨리 빨리, 뛰는 것이 더 낫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면 무엇이 기다릴까. 또다른 목적지가 우리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는 건 어떨까. 일단 멈춤. 그리고 춤을 추는 것이다. 흥겹게. 뭐 급하지만 않는다면 춤을 추며 목적지까지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난 왜 그 목적지를 향해 가는 걸까'하고 말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인가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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