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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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배워야지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걷는 법부터 시작해서 숟가락, 젖가락질, 그리고 수많은 교과서들 속에 들어가 있는 지식. 문명은 이런 배움을 밑거름으로 해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또 배웁니다. 자연에서 말이죠. 아~ 그러고 보니 자연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군요. 그러니 자연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인가요?

간신히 살아가는 소나무가 오색으로 빛나고 푸른 잎을 가지지만 비료와 약에 치여 사는 사과나무는 껍질이 벗겨지는 아픔을 당하죠. 그거 참 이상하죠. 가난한 삶이 풍요롭고 풍요로운 삶이 가난하니 말이죠. 그러니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게 아니라 정상인 사람들이 이상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잘 사는데 치중하지 말고 옳게 사는데 힘쓰라고 가르칩니다. 옳게 사는 사람이 자유인인 게죠. 권위나 유혹에 허물어지지 않고 끝까지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P85) 이 바로 자유인이랍니다. 자연은 이 자유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자유인은 자연인인 셈이죠.

수많은 유혹으로 가득찬 문명세계, 수많은 권위로 가득찬 사회조직들,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곳은 바로 그런 곳이지만 그건 내 자신이 아니라 그저 나를 둘러싼 환경일 뿐입니다. 우리는 환경의 노예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죠. 그 길은 결코 아스팔트가 깔린 평탄한 길은 아닐테지만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을 실어주는 오솔길이 아닐까요. 자, 우리 한번 터벅터벅 그 길을 걸어보자구요. 빨리 가려고 서둘 필요도 없이 한가하게 흙을 밟아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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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의 술 12 - 완결
오제 아키라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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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남자 주인공 유지태가 여자 주인공 이영애에게 하는 말이다. 어떤 논리나 설명도 없는채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 '사랑이~'는 한동안 영화를 좋아한 사람들 입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남자에게 그것은 어떤 설명도 필요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사랑은 변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지 않던가?

<명가의 술>을 읽다보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가 떠오른다. 물론 이런 말은 만화 어디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 그 자체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대신 사람이란 말을 대입해야지만 정확한 나의 느낌일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그렇다. 이 만화는 사람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준다. 농약으로 죽어가는 땅, 알코올을 섞어놓은 보통주와 삼증주 따위의 싸구려 술. 그것은 대중적이라는 의미에서 경제적이라는 의미에서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래서 주인공인 나츠코는 사람들을 계속 설득해 나가야만 한다. 왜 땅이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고다와 함께 왜 일본 제일의 음양주를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나츠코의 뜻을 이해하는 동창생은 시련이 닥칠때마다 회의에 빠진다. 무기력하고 무능하고 무관심한 이 농촌사람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츠코 또한 몇번이나 실의에 빠지고 포기하려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일어선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사람들을 변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동조하는 과정은 정말 감격이다. 슬퍼서가 아니라 감격에 겨워 눈물이 글썽인다. 변해가는 사람들. 이것이 바로 희망이다. 그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터이니 말이다. 아, 난 이 만화속에서 세상의 희망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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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자 the Closer 1
유시진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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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 봅시다. 넓디넓은 들판에 나홀로 서 있는 장면을. 세상엔 나 말고 아무것도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악을 써도 메아리조차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천상천하 유아독존.나는 살아있는 것인 걸까요? 자, 이번엔 조금 더 나은 상황으로 나가봅시다. 제 옆에 사람들이 있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말을 건네봅니다. 하지만 묵묵부답.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마치 바위에게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소통이 단절된 삶. 아~, 나는 살아있는 것인 걸까요?

가끔씩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몇일 살다왔으면 하는 꿈을 꿉니다. 휴대폰도 꺼두고 텔레비젼이나 라디오도 없는 곳. 오직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살랑살랑 머릿결을 흔드는 바람과 피부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햇살만이 존재하는 곳. 소통 자체가 전무한 이곳. 타인과의 소통은 때론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삶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꿈꾸는 그곳.

키퍼는 괴로워합니다. 쿤이라는 자아와 키퍼라는 직위사이에서 갈팡질팡. 그 둘은 둘일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로서만의 삶이 있을뿐입니다. 그는 쿤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행하는 그의 능력은 키퍼로서의 행위입니다. 결국 둘은 떨어질 수 없는 동일인물인게죠.

사랑의 감정은 소통의 극치입니다. 나와 타인의 구분조차를 불가능하게 만들죠. 하지만 이런 사랑이 떠나가면 그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요. 오직 죽음만이 소원이겠죠. 그래서 그는 세상을 닫아버립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을 닫아버리는 것이겠죠. 사랑은 이렇게도 지극히 위험한 것인가 봅니다. 그래서 중독이라는 말을 쓰겠죠. 시기와 질투를 그림자로 둔 사랑.

소통은 항상 괴로움을 동반합니다. 때론 떠나보세요. 소통이 없는 삶으로. 그러면 그 괴로움마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소중한 요소임을 깨우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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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 X 1
CLAMP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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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 신화에서부터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다. 야누스의 두 얼굴이 그렇고 프랑켄슈타인이나 최근의 TV시리즈 두얼굴의 사나이, 그리고 투명인간 등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이중적 경향은 서로 엇비슷한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라 극과 극의 상반된 성격을 가짐으로써 비극성을 갖게 된다. 만화 <X>또한 주인공이 천룡을 택하는 순간 가장 절친했던 그의 친구가 지룡이 됨으로써 비극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천룡과 지룡의 싸움은 얼핏보면 선과 악의 싸움으로 비쳐지며 당연히 선이 이기길 바라는 권선징악적 결말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만화가 진행되면서 이것은 정말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우치게 된다. 천룡과 지룡은 결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과정은 아니다. 물론 이 선택에선 인류문명의 발달이 환경오염을 과속화시켜 지구멸망을 가져올 것이라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지만 말이다.

즉 인류의 생존을 택할 것이냐 지구의 생존을 택할 것이냐의 선택에서 당신은 무엇을 택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내세우는 작가는 그 질문을 받고 독자가 당황해하는 것을 즐기는 듯싶다. 그러나 작가는 착하게도 왜 주인공이 천룡을 택할 수밖에 없는 지를 가르쳐준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인류는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 그 지키고 싶은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생명체 모두로 확장이 된다면 결코 이 싸움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으로 반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무엇인가를 소중히 지키고 싶은 감정,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 인간이란 바로 이런 존재이지 않는냐고 작가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 의해 아직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듯이. 우울했던 마음 한편이 따스해져옴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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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2010-01-15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 오래전부터 후기를 쓰셨네요. 제가 소장한 만화책만 보면 반갑습니다.
 
화두 1
최인훈 지음 / 문이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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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아니면 공동체의 규범, 또 좀 내려오면 역사의 법칙 그런 것으로 풀이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길흉화복과 조화를 한손에 쥐고 있는 존재거나, 법칙이거나, 어떤 소식이 발하는 목소리,그것이 뒤돌아보지 말라의 세계다. 그런데 그런 존재나 법칙이나 소식이 모두 희미해졌거나 이미 간곳 없어 보이는 시간을 사는 시대 인간은 어쩌면 좋은가 -p530

<과거는 묻지 마세요>라는 유행가 가사가 오히려 얼마나 인간이 과거에 집착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즉 과거에의 <기억>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존재는 비단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이 결코 망상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기억에 대해 뒤돌아봄으로써 만이 다시 과거로의 퇴행을 막을 수 있을뿐더러 보다 나은 앞으로의 세상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의 작가 자신의 뒤돌아보기이며 20세기의 뒤돌아보기의 시도라고 여겨진다. 일제시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역사의 회오리속에서 살아간 자신의 운명이 해방후 개인적 상반된 두 경험에 의해 전 생애가 지배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이것은 단순히 자신만의 일이 아니라 인류공동체의 삶 자체의 두 흐름이 아닐까 회상하는, 그의 개인사는 지금도 우리 모두의 개인사에 그대로 투영되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공동체적 감정>과 <공동체적 이성>사이에서 자신의 정체를 확립함으로써만이 사회적 공동체로서의 자기동일성을 지닌다는 생각(p357)은 그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역사적이다. 그러나 이 감정과 이성사이의 통합이 무너짐으로써 정체성의 혼돈을 느끼고 있는 현실의 나로서는 과거로의 퇴행을 막기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아야만 한다.

도대체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이 길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나는 그 길 위에서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를 검토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동물이 먹이를 사냥하고 새끼를 낳고 죽음에 이르는 것과 아무것도 다른 게 없음을 몸서리치도록 자각하게 만든다, 이 책은. 정녕 나에게 주어진 이 화두를 짊어지고 나 또한 내 자신의 삶과 이 세상을 한번쯤 뒤돌아본 후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절대 조급해하지 말고 조그마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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