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물만두 > [퍼온글] 아름다운 순 우리말

아름다운 순우리말

 

마루 : 하늘의 우리말

아라 : 바다의 우리말

희나리 : 마른장작 의 우리말

벗 : 친구의 순수 우리말

숯 : 신선한 힘

한울 : 한은 바른, 진실한, 가득하다는 뜻이고 울은 울타리 우리 터전의 의미

볼우물 : 보조개를 뜻함

여우별 : 궂은 날 잠깐 났다가 사라지는 별

매지구름 : 비를 머금은 검은 조각구름

아람 : 탐스러운 가을 햇살을 받아서 저절로 충분히 익어 벌어진 그 과실

아람치 : 자기의 차지가 된것.

느루 : 한번에 몰아치지 않고 시간을 길게 늦추어 잡아서

가시버시 : 부부를 낮추어 이르는 말

애오라지 : 마음에 부족하나마, 그저 그런 대로 넉넉히,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좀

닻별 : 카시오페아 자리


가람 : 강

미리내 : 은하수

뫼 : 산

도투락 : 어린아이의 머리댕기

다솜 : 사랑

알범 : 주인

가우리 : 고구려(중앙)

구다라 : 백제(큰 나라)

시나브로 : 모르는 새 조금씩 조금씩

타래 : 실이나 노끈 등을 사려 뭉친 것

단미 : 달콤한 여자, 사랑스러운 여자

그린비 : 그리운 선비, 그리운 남자

산마루 : 정상(산의)

아미 : 눈썹과 눈썹사이(=미간)

언저리 : 부근, 둘레

이든 : 착한, 어진

 

아띠 : 사랑

소담하다 : 생김새가 탐스럽다

오릇하다 : 모자람이 없이 완전하다

성금 : 말한 것이나 일한 것의 보람

미르 : 용

더기 : 고원의 평평한 땅

아라 : 바다

너울 : 바다의 사나운 큰 물결

희나리 : 마른 장작  

너비 : 널리

벗 : 친구

미쁘다 : 진실하다

노루막이 : 산의 막다른 꼭대기

샛별 : 금성

소젖 : 우유

바오 : 보기 좋게

 

볼우물 : 보조개

아람 : 탐스러운 가을 햇살을 받아서 저절로 충분히 익어 벌어 진 그 ? 享?

아람치 : 자기의 차지가 된 것.

새암 : 샘

느루 ! : 한번에 몰아치지 않고 시간을 길게 늦추어 잡아서

마수걸이 : 첫번째로 물건을 파는 일

애오라지 : 마음에 부족하나마, 그저 그런 대로 넉넉히, 넉넉하

지는 못하지만 좀

내 : 처음부터 끝까지

닻별 : 카시오페아 자리

베리, 벼리: 벼루

나룻 : 수염

노고지리 : 종달새

 

노녘 : 북쪽

높새바람 : 북동풍

높바람 : 북풍. 된바람

달소수 : 한 달이 좀 지나는 동안

닷곱 : 다섯 홉. 곧 한 되의 반

덧두리 : 정한 값보다 더 받은 돈 (비슷한말 ; 웃돈)

덧물 : 얼음위에 괸 물

도래샘 :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

마녘 : 남쪽. 남쪽편

마장 : 십리가 못되는 거리를 이를 때 "리"대신 쓰는 말

마파람 : 남풍.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하늬바람: 서풍

메 : 산. 옛말의 "뫼"가 변한 말

몽구리 : 바짝 깎은 머리

묏채 : 산덩이

버금 : 다음가는 차례

부룩소 : 작은 수소

살밑 : 화살촉

새녘 : 동쪽. 동편

새벽동자 : 새벽밥 짓는! 일

샛바람 : "동풍"을 뱃사람들이 이르는 말

서리담다 : 서리가 내린 이른 아침

 

혜윰 : 생각

도투락 : 리본

햇귀 : 해가 떠오르기전에 나타나는 노을 같은 분위기

나르샤 : 날다

벌 : 아주넓은 들판, 벌판

한 : 아주 큰

온누리 : 온세상

아사 : 아침

달 : 땅,대지,벌판

시밝 : 새벽

샛별 : 새벽에 동쪽 하능에서 반짝이는 금성 어둠별

꼬리별, 살별 : 혜성

별똥별 : 유성

붙박이별 : 북극성

닻별 : 카시오페아 별

여우별 : 궂은날에 잠깐 떴다가 숨는 별

잔별 : 작은별

 

가늠 : 목표나 기준에 맞고 안 맞음을 헤아리는 기준, 일이 되어 가는 형편

가래톳 : 허벅다리의 임파선이 부어 아프게 된 멍울

노량 : 천천히, 느릿느릿

가라사니 :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지각이나 실마리

갈무리 : 물건을 잘 정돈하여 간수함, 일을 끝맺음

개골창 : 수챗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

개구멍받이 : 남이 밖에 버리고 간 것을 거두어 기른 아이(=업둥이)

개맹이 : 똘똘한 기운이나 정신

개어귀 : 강물이나 냇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

나릿물 : 냇물

고샅 : 마을의 좁은 골목길. 좁은 골짜기의 사이

고수련 : 병자에게 불편이 없도록 시중을 들어줌

 

골갱이 : 물질 속에 있는 단단한 부분

눈꽃 : 나뭇가지에 얹힌 눈

곰살궂다 : 성질이 부드럽고 다정하다

곰비임비 : 물건이 거듭 쌓이거나 일이 겹치는 모양

구성지다 : 천연덕스럽고 구수하다

구순하다 : 말썽 없이 의좋게 잘 지내다

구완 : 아픈 사람이나 해산한 사람의 시중을 드는 일

굽바자 : 작은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얕은 울타리

그느르다 : 보호하여 보살펴 주다

그루잠 : 깨었다가 다시 든 잠

그루터기 : 나무나 풀 따위를 베어 낸 뒤의 남은 뿌리 쪽의 부분

기이다 :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다

기를 : 일의 가장 중요한 고비

 

길라잡이 :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사람

길섶 : 길의 가장자리

길제 :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구석진자리, 한모퉁이

길품 : 남이 갈 길을 대신 가 주고 삯을 받는 일

겨끔내기 : 서로 번갈아 하기

고빗사위 : 고비 중에서도 가장 아슬아슬한 순간

까막까치 : 까마귀와 까치

깔죽없다 : 조금도 축내거나 버릴 것이 없다

깜냥 : 어름 가늠해 보아 해낼 ? 맨?능력

깨단하다 : 오래 생각나지 않다가 어떤 실마리로 말미암아 환하게 깨닫다

꺼병이 : 꿩의 어린 새끼

꼲다 : 잘잘못이나 좋고 나쁨을 살피어 정하다

꽃샘 : 봄철 꽃이 필 무렵의 추위

꿰미 : 구멍 뚫린 물건을 꿰어 묶는 노끈

끄나풀 : 끈의 길지 않은 토막

끌끌하다 : 마음이 맑고 바르며 깨끗하다

 

 

나린 : 하늘에서 내려온 아이
깜냥 : 지니고 있는 힘의 정도. 일을 해낼 만한 능력
다솜 :예틋한사랑.
가탈 :일을 방해하는것..
맘매김: 약속하는것..
녈비: 지나가는비
라온: 즐거운

 

라온후제 ; '즐거운 내일'

뉘누리:소용돌이
토로레:땅강아지

 

출처 - 엽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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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에서 마음을 닦는다고 얘기하는데,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적절한 표현은 마음을 쓴다, 즉 용심(用心)입니다. 용심이 곧 수행입니다.

 

전 길상사 회주 법정 스님이 12일 오전 서울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에서 마음 씀씀이의 중요성을 화두로 삼아 동안거 해제 법문을 했다.

안거는 일년 중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스님들이 선원에 한데 모여 수행하는 한국 불교의 전통으로, 이날은 석달 간의 겨울 안거를 마친 스님들이 산문 밖으로 나서는 날이었다.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15년 가까이 생활하고 있는 스님은 자신의 오두막 생활을 소개하는 것으로 법문을 시작했다.

이번 겨울에는 어느 때보다도 추워 온 개울과 폭포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도끼로 얼음을 깨도 물을 얻을 수 없어서 얼음을 녹여야 겨우 식수를 얻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스님은 우리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모진 마음을 먹게 되면 누가 무슨 얘기를 해도 듣지 않게 된다면서 마음은 물과 같아서 흘러야 자신도 살고 만나는 대상도 살리게 되지, 고여있게 되면 생명을 잃고 썩고 만다고 설했다.

스님은 나아가 내가 한 생각 일으켜서 마음을 옹졸하게 쓸 수도 있고 너그럽고 훈훈하게 쓸 수도 있다면서 내 마음이 천국을 이룰 수도 지옥을 이룰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마음을 쓰는 일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한다면서 대인관계를 통해서 현재의 자신을 헤아릴 수 있으며, 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살펴보라고 법회에 모인 대중에게 충고의 말을 던졌다.

스님은 마음이 굳어져 닫혀 있다면 오늘부터라도 다 풀어버려라. 그래야 내 인생에 새 봄을 맞이할 수 있다면서 법문을 마무리했다.                                                         (연합뉴스)

 

겨울 산행을 하면서 계곡에 꽁꽁 얼어붙은 얼음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을 보곤 한다. 그런데 정말로 올핸 유독 그 졸졸졸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물도 흐르지 못할 때가 있구나 라고 생각해봤다. 스님은 그 멈추어진 물을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을 확장시켰다. 봄이 마음으로부터 찾아올 수 있기를 기원하며, 누군가 내 마음을 녹여줄 것을 기대하기 보다 스스로 녹여야 될 일임을 깨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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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5-08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법정 스님을 참 좋아합니다.
귀한 글 잘 읽었어요.

하루살이 2006-05-2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 님 덕분에 마음 공부 다시 하네요. ^^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박상훈 후마니타스 편집주간이 프레시안에 쓴 파시즘의 대중심리(빌헬름 라이히 저)라는 서평 중 마지막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사회적 관점을 강조하는 참에 새로운 발전모델로 신봉되는 '생명공학론' 혹은 '생명과학 산업화론'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생명과학기술이나 의학기술이 덜 발달해서 인간 사회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기존의 의료기술의 혜택을 폭넓게 받을 수 없는 사회구조의 불평등이다. 신용불량자의 불행한 처지로 떨어진 사람들의 상당수가 의료비 부담 때문인 현실에서, 인간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은 평등의 문제이다. 평등하지 않으면 가난한 자가 자유로울 수 없고, 자유로울 수 없으면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은 약해지며, 결국 사회는 병들게 된다. 의료산업화, 생명과학 산업화에 엄청난 국가예산을 쏟아 설령 뭔가 엄청난 기술이 개발된다 한들 산업화 논리의 귀결은 가난한 다수를 여전히 혜택에서 배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의 문제에 대한 접근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좋은 사회라면 장애인이나 난치병 환자 문제를 그들만의 불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의 문제로 보고, 이들이 인간으로서 필요한 여러 조건을 향유하게 하면서 사회 속에서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것에 더 많은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떤 위대한 기술을 발전시켜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를 모두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반사회적이고, 반자연적이며, 위험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를 포함해 인간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커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기술 개발에 인간과 사회의 구원을 의탁하려는 도구적 관점이 더 커져버린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속에서 자극되는 것은 반대자나 비판자에 대한 복수의식 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비극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관에 의해 대중의 심성 구조가 반사회적인 방향으로 파괴되면서 만들어진 문제가 아닌가 싶다. 모두가 경제와 기술 발전의 혜택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에서 불안과 소외는 일상화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는 사이 인간의 내면과 자아가 황폐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조건에서 자신의 문제를 자기 외부의 누군가에게 전가하려는 사회심리적 조건은 커지게 되고, 탁월함이라고 하는 귀족주의적 가치가 숭상되고, 그러한 능력을 갖는 영웅의 출현으로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병리적 현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집권 개혁파의 신자유주의적 타락이 우리사회의 불행을 심화시키는 현실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태의 기원이 이처럼 사회적이고 정치적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가 검찰의 조사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더 참담하다.
  
  이런 고통과 참담은 라이히의 이 책을 읽을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인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개선해야 할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대가를 얻게 된다면 그야말로 좋은 거래가 아니겠는가? 언제나 그렇듯, 좋은 서평보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수천 배 더 나은 일이다.

 

 

지난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 연설을 듣다가 화가 나 꺼버린 이유도 아마 이와 비슷한 것인듯 하여 퍼왔습니다. 교육, 의료, 토지에 대해서는 자유스러운 경쟁이라는 것이 성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사회라는 공공의 재산이어야 할 위의 3가지 분야에 대해서 사적인 자유로운 소유가 가능하다면 불평등의 해소는 끝이 날리 없을 것입니다. 사적 소유 자체를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적 견제가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이죠. 공익이 아닌 기업의 논리로 3가지 토대가 변해버릴때, 세상은 밀림보다 못한 생존의 전쟁터가 되버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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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탁! 석산의 실용적인 글쓰기]

 

[탁! 석산의 실용적인 글쓰기] 아름다운 문장보다 논

리가 중요하다

주장에 대한 근거 대는 ‘논증’ 연습 또 연습
특정사건에 대해 ‘왜’라고 물으며 일기 써야

▲ 탁석산
지금은 글을 써야만 통하는 시대다. 원인은 사회발전에 따르는 합리성 요구의 증가와 사회의 시스템화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제 사회는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글쓰기를 요구하고 있다. 합리성이나 시스템은 논리를 토대로 하는 것이며 논리는 말이 아닌 글에서 더 잘 구현되기 때문이다. 그럼 일생을 통해 수행해야만 하는 글쓰기는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1문학적 글쓰기와 실용적 글쓰기를 구분해야 한다. 흔히 글쓰기라고 하면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미문(美文)은 묘사를 본업으로 하는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에서 추구하는 것이지 실용적인 글에서는 요구되지 않는다. 즉, 실용적 글쓰기는 자신의 주장을 남에게 설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미문이 아니라 논리인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실용적인 글을 쓰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려고 한다. 이것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

교통방송에서 정보를 전하는 리포터가 아름답고 수식이 화려한 문장을 구사하려고 애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정보는 사라지고 수식만 남게 된다. 이런 식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2실용적 글쓰기의 핵심인 논증을 익히고 또 익혀야 한다. 우리가 쓸 수밖에 없는 실용적 글들을 보자. 감상문, 논술, 보고서, 자기소개서, 기획안, 프레젠테이션 등등. 이 많은 실용적 글쓰기를 무슨 재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실용적 글쓰기에는 매뉴얼이 존재한다. 즉, 전제와 결론 혹은 근거와 주장으로 구성되는 논증이라는 것이 모든 실용적 글쓰기의 핵심이다. 이 논증만 자기 것으로 만든다면 모든 실용적 글쓰기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논증이란 단순히 말하자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대는 형식이다. 그런데 자신의 주장을 결론으로 삼고 근거를 전제로 삼는 논증이라는 것을 습득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논증이란 개념 자체가 생소할 뿐 아니라, 막상 배워서 시도를 해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전거 타기를 생각해보라.

처음에는 넘어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던가! 하지만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면 나중에는 두 손을 놓고도 탈 수 있게 된다. 논증 습득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학문이나 이론이 아니라 기술에 해당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두렵지만 연습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3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글쓰기에 마음이 급한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 중 하나는 많이 써봐야 한다는 충고를 받아들여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쌓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많이 써본다는 것이다.

즉, 일기를 쓰라고 강요받으며 책을 읽으면 반드시 감상문을 쓰라는 과제를 받게 된다. 하지만 실용적 글쓰기를 잘 하려면 쓰기 전에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즉 논증을 만드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인데 일상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즉, ‘왜?’라고 묻는 것이다.

일기를 사건 순으로 건조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건에 대해 ‘왜?’ 라고 묻고 그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학 선생님이 싫다면 왜 싫은지 그 이유에 대해 써본다는 것이다.

4독서는 글쓰기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흔히 많이 읽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부분적으로 맞는 말일 뿐이다. 책을 아주 많이 읽었는데도 글을 잘 못 쓰는 사람을 찾기는 매우 쉽다. 왜냐하면 독서는 독서 자체로 완결되는 행위이지 독서가 글쓰기를 함축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독서는 독서고 글쓰기는 글쓰기란 말이다. 그렇다면 독서를 글쓰기에 끌어들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독서를 비판적으로 하는 것이다. 즉, 책을 읽을 때 끊임없이 ‘왜?’ 라고 물으면서 책에서 제기된 문제를 논증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환경위기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면, 왜 그런 주장을 하는가를 따져서 근거를 써보는 것이다.

책을 몇 권 읽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한 권의 책일지라도 얼마나 비판적으로 깊이 읽었느냐가 중요하다.

한국외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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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6-01-16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왜?왜?를 잊지 말자!
왜냐고? ^^;;;

마늘빵 2006-01-1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왜 4,5권이 안나오는지 몰라요. 1,2,3권 다 읽고 기다리고 있는데

하루살이 2006-01-17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 이러다가 탁석산식 글쓰기가 횡행할련지도...
그럼 또 누군가가 다른 개성 만점 논술전략을 주창하겠죠.^^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과 헤게모니
최장집 (고려대, 정치학)

 


1.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어디에 서 있나?

1) 성공회대의 신년포럼 “민주주의, 여전히 희망의 언어인가?” 라는 물음은 매우 흥미있는 주제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얼마나 훼손되었기에 그래도 민주주의는 여전히 희망을 실현해 줄 수 있는 정치체제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최근년에 이르러 이른바 정치에 대한 실망(desencanto)이 얼마나 깊숙이 진행되었는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오늘 토론의 장에 진보진영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 보수진영의 그것을 오히려 능가하는 것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이다. 본 발표자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화 이후의 사회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이 크다는 사실 자체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것이 긍정적인 효과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부정적인 효과를 갖기 쉬운 것이며, 더더욱이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민주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민주주의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데 보다 중심적 역할이 기대되는 사회세력으로부터 그 체제에 대한 강도 높은 불신의 소리가 터져나온다는 것은 결코 긍정적인 사태라고 볼 수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이 전사회적으로 팽만하고 있는 가운데, 진보파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불만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커다란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2)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외부로부터 뿐만 아니라 민주화세력 내부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은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기반이 얼마나 허약해졌는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의 중요한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동안 민주파들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사회적 동력이었고, 민주정부들은 그들이 주도해오지 않았던가? 민주파들이 정부를 주도해왔다는 사실은 현재의 노무현정부만큼 그것이 사실인 경우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기패배를 실토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지 않는가? 돌이켜보면 87년 민주화 이후 선출된 정부들은, 김영삼정부로부터 노무현정부에 이르기까지 각기의 리더십과 정당의 구성 및 성격에 있어 민주적 성격을 더 강하게 포함하고 보다 민주적 역량을 강하게 갖는 방향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두루 알다시피 최초의 민간민선정부인 김영삼정부는 군부권위주의시기 집권세력인 민정당을 포함하는 3당 합당에 의해서만 집권이 가능했고, 또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의회의 다수를 확보할 수 없는 제약 하에 있었다. 김대중정부는 비록 보수세력과의 연합을 통한 것이라 하더라도 선거에서 다수를 구성하는 민주적 중심세력이 강력한 호남이라는 지역기반을 아우르면서 그 민주적 지지기반을 보다 확대하였다. 다만 의회의 대표에 있어서는 여소야대에 의한 분할정부적 상황을 면하기 어려운 커다란 제도적 제약을 가졌다. 이후 현재의 노무현정부만이 그것이 비록 대통령탄핵소추소동을 거치기는 했지만 행정부권력과 의회다수를 동시에 획득하면서 국가권력 모두를 제도적 제약없이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민주주의의 조건은, 본 발표자도 여러 기회에 말해왔듯이 신자유주의적 생산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특징될 만큼 헤게모니적 지배담론을 어떤 희생과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능동적이고도 매우 급진적으로 추진하는 민주정부를 창출하게 되었다.

3) 신자유주의적 생산체제란 구래의 박정희식 생산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접합한 새로운 한국적 성장중심 경제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이 가져온 결과는 노동의 참여없는 생산체제이며 그에 기초한 노동없는 민주주의로 나타났다. 그것이 빈부격차의 증대,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 고용의 불안정과 실업의 증대, 비정규직노동자의 대량창출, 이러한 경제적 조건들이 가져오는 사회해체 등의 사회경제적 효과를 수반하는 문제에 대해 상세히 논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민주화 이후의 사태를 통하여 커다란 민주화의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란 정치적 참여의 평등을 제도화하는 통치체제로서 이를 통해 보통사람들 스스로가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는 체제로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민주정부들은, 그것이 더 민주적인 성격을 갖는 정부일수록,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권익보다는 사회최상층의 권익을 보다 더 잘 실현하는 이념이자 가치이며, 정책독트린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 더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설은 노무현정부에 이르러 더욱 극대화된다.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매우 급진적인 신자유주의적 성장정책은, 모든 정책이 그러하듯이 그 정책에 의한 수혜층과 불이익을 받는 그룹을 창출하기 때문에 정책결정과정에서의 결과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특정의 정책을 지지하는 사회의 지지세력 내지는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정부하에서 일종의 신자유주의적 성장동맹이라고나 할 새로운 하나의 정치적 연대를 발견하게 되는데, 선출된 노무현정부―국가의 관료기구(특히 이 경우 경제행정관료기구)―수퍼 재벌기업 삼성이 그것이다. 이를 중핵으로 하여 지배적 담론이 형성되고 확산되는 헤게모니의 생산-소비구조가 형성된다. 2005년 후반 노무현대통령이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 그것은 현실로부터 나온 문제해결의 대안이 아닌 다소 허황된 전술적 발상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정당수준에서 정치연합으로 구체화되지 않았을 뿐 사회적으로는 구체적 기반을 갖는 것이었다. 과거 본 발표자는 민주화이후 한국정치의 한 특징으로서 “변형주의”(trasformismo)에 대해 논한 바 있다. 처음 이 문제를 논의할 때의 3당통합은, 민간민선정부는 탄생하였으나 집권세력을 구성하는 민주화세력은 여전히 양분되어 있었고, 구권위주의적 세력은 그 중심에 포괄되어 있었다. 변형주의는 민주주의를 지지한 다수에 의해 비판되었으나, 사태가 하나의 수수께끼로 이해될 여지는 적었다. 특히 이 시기 변형주의는 제도권 내에서의 다수형성의 요구가 수반했던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정부의 변형은 정치적 상식을 뒤엎는 사례로 이해된다. 노무현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정부를 창출했을 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은 결과였기 때문에 첫 번째의 드라마였다면, 그의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노선을 능동적이고도 공격적으로 추구하고 그와 병행하여 형성된 보수대연합은 그 두 번째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두 번째의 드라마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단히 유해하다.


2. 민주주의와 민주정부의 변형(��

1) 노무현정부의 변형을 예기치 않은 드라마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민 다수가, 적어도 민주주의를 지지했던 시민들 다수가 생각하는 정치적 가치와 정치를 이해하는 방식과의 커다란 배치 내지는 괴리를 의미한다. 노무현대통령은 어떻게 정부를 창출했나?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제도권 밖 운동의 대대적인 동원을 통한 투입(input) 없이는 불가능했다. 한 대통령의 출현이 운동의 투입에 힘입은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한국정당체제의 실패의 결과이고, 앞선 정부의 실패의 결과이기도 하다. 노무현대통령은 김대중정부 시기 집권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부터 왔다. 이를 실패라고 말하는 것은, 당의 중심으로부터의 인사는 그가 당내의 다수지지를 획득할지는 몰라도 개혁중심으로서 퇴색한 당의 이미지로 인하여 보다 많은 민주개혁을 바라는 사회전체의 투표자들의 다수를 획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변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기존 당제도의 보수성이 부여하는 제약에서 자유롭다는 점과 아울러, 개혁에 대한 커다란 자율성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반면 그것은 민주주의제도의 핵심내용을 이루는 대표성과 책임성의 연계를 애매하게 하는 문제를 갖는다. 만약 그가 투표자 다수의 요구를 위임받아 개혁의 중심추진자가 되고자 했을 때, 그것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만약 그가 책임(accountability)의 연계로부터 벗어나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움직일 때 그리고 그의 움직임이 개혁의 추진자이기보다 사회의 현상유지를 더욱 강화하는 헤게모니의 추진자가 될 때 누가 그를 민주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가? 우리가 오늘날 노무현 정부를 통하여 보게 되는 상황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 하겠다.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여러 수준에서 포착될 수 있지만, 한국정당체제의 저발전 내지는 취약함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여기에서 잠시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대의제민주주의는 현대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민중이 스스로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선출한 대표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표를 선출한 시민들은 공적영역에서 통치자의 행위가 책임성을 갖도록 구속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을 가능한 한 많이 민주적 통제하에 둘 수 있다. 그러므로 대표성과 책임성의 연계 고리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 아닐 수 없다. 선출된 통치자가 어떻게 하면 그를 선출해준 투표자들의 요구를 대변할 수 있도록 하는가하는 문제는, 민주주의체제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해결해야할 최대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선거를 경쟁적으로 만들고, 정치적 자유와 참여를 확대시키고, 사회경제적 정치의제의 범위를 확대하고, 민주적 통제의 범위를 실질적 참여를 통해 실제로 확대시킨다면, 우리는 이러한 정부를 대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고, 민주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어떤 객관적 정의를 통해 외부로부터 또는 경험외적인 것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실현코자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이 중단되거나 거부될 때 민주주의는 고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다시 오늘의 우리현실로 돌아와 볼 때, 한국 민주주의는 앞에서 말한 민주주의의 실천과는 커다란 거리가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점에서 한국에서의 변형주의적 실천은 커다란 부정적 효과를 갖는 것으로, 그것은 투표자와 선출된 정부간 대표-책임의 고리가 해체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표-책임의 고리는 통치자의 입장에서 볼 때 민주적 통제와 구속을 의미하는 부정적 효과를 갖지만, 반대로 그것은 그에게 위임된 것을 수행하기 위한 투표자의 지지를 통한 힘의 실현에 있어서는 긍정적 효과를 갖는다. 특정정부, 특정 지도자를 일컬어 국민적 또는 사회적 지지기반이 넓다고 하는 말은 이를 일컫는 말이다. 사회와 역사(와 미래)에 대한 기득세력의 비전과 현상의 유지를 재생산하는 헤게모니와 민주정부와의 관계라는 면에서 볼 때, 민주정부가 투표를 통하여 위임받은 민중의 요구는 헤게모니와 상충하기 쉽고 그것과 더 많은 갈등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헤게모니를 수용하는 정도가 클 때, 현실정치의 제도권 내에서의 권력의 안정은 쉽게 획득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노무현정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통치자의 입장에서 헤게모니와의 갈등은 너무나 힘겨운 것이고, 그것과의 안락한 관계는 매우 쉬운 선택일 것임에 분명하다. 정당/투표에 대한 대표적 이론의 하나는, 이른바 중위수투표자모델이다. 이는 좌우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에 단선적으로 배열된 선택의 구조에서 경쟁하는 정당들은 양극을 배제하고 중간을 확보하는 것이 다수표를 획득할 수 있다는 논리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다른 맥락에서 정당들이 대립적 이념성을 탈각하고 포괄정당화하는 경향을 말하는 이론과도 내용은 유사하다. 그러나 한국의 통치자들이 문제를 이런 방법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커다란 오해이다. 왜냐하면 민주화이후 한국은 제도화된 정치의 공간에 있어 이들 이론이 딛고 있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기반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 발표자가 누누이 강조해왔듯이, 이데올로기적 편협성이 가져오는 정당체제의 낙후성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최대의 장애요인이다. 성장을 유일 가치로 하는 시장중심 생산체제하에서 사회저변층의 이해관계를 대표할 정치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민노당같이 있다하더라도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제약은 크고 정치적 경험이 일천하여 그 영향력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정치적 중간이라든가, 포괄정당의 개념은 기존의 헤게모니를 대변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에서 헤게모니와의 동거는 기존질서를 그대로 수용하고, 현상유지를 재생산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입각한 스펙트럼위에서의 중간이 아니라, 제도화된 기득질서에 기반한 정당경쟁의 틀내에서의 중간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것은 가공의 중간이 아닐 수 없다. 현실의 요구들이 타협될 수 있는 중간과 보수정당의 경쟁틀 내에서의 중간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이것은 한국정치의 이중구조가 아닐 수 없다. 한국정치를 피상적으로 관찰할 때, 그것은 “즉응적 정치”(instantaneous politics)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한 수준에서는 정당간 경쟁의 치열함이 거의 생사투쟁을 벌이는 듯하고 이데올로기적 극한투쟁으로 치닫기 일쑤이고, 그런가 하면 정당간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합집산이 다반사이고, 중요한 선거가 있을 때 마다 정당이 재편성되는 등 예측불허의 변화와 아울러 파노라마의 정치를 연출하는 극심한 정치 불안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다른 한 수준에서는 이러한 북새통에서 먼지가 가라앉고 난 이후 정치에서 변화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즉 사회 기득이익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재생산하는 보수적 정당체제는 여전히 온존하고 있다. 민주화이후 한국정치가 열망-실망, 동원-탈동원의 싸이클의 반복을 드러내는 까닭도, 열망과 동원과정에서 참여의 확대, 사회적 이슈의 확대에 대한 요구들의 분출이 다시 평정을 되찾으면서 보수적 정당체제 내에서의 정치게임으로 복원되는 과정을 반복하는 현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도전에 따른 동요와 체제의 복원을 반복하는 구조를 반영한다. 본 발표자가 한국 민주주의를 여전히 불완전하고 미완의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란 사회내에 존재하는 갈등들을 억압하거나 범죄화하는 대신, 적대적인 이익들을 공식적인 대표의 체계내에 포함하여 갈등을 제도화하는 정치적 과정을 가능케 하는 것, 그 갈등을 제도화할 수 있는 자원을 발굴해낼 수 있는 과정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4) 이러한 이유들을 고려할 때, 노무현정부는 왜 약한 정부이고, 그의 리더십은 왜 약할 수밖에 없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기존의 선출된 정부가 보수적인 기득이익의 헤게모니를 수용하는 경우에서조차 그 정부의 정치적 기반이 강화될 수 없는 까닭은, 한 수준에서는 그것이 개혁의 위임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정치의 대표체계를 개혁하지 못함으로써, 선거시 다수를 형성했던 지지기반이 해체되기 때문이며, 다른 한 수준에서는 보수적 야당이 기존의 정부가 설사 그들과 커다란 차이를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대연정론 제기의 배경이 되는 가정이기도 했던 상황이지만, 그들이 직접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부에 대한 공격과 비판의 강도는 그것이 약해짐에 따라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선출된 정부가 선택하는 방법은 하락하는 지지도를 보전하고자하는 대안정책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경제정책과 노동-사회복지정책은 민주주의 하에서 하나의 정부가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정책영역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적 생산레짐을 보장할 수 있는 경제관료의 수중으로 넘겨진지 오래다. 노동-사회복지정책은 전자의 잔여범주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전자가 강력한 만큼이나, 이를 추진할 수 있는 공간은 협소해졌다. 동북아허브 건설, 지역균형 발전, 행정수도 이전, 기업도시 건설과 같은 정책영역은 한 논자가 “토건국가”라고 명명하는 것에 유사한 국가재정의 큰 규모만큼 국가의 행정기구를 가동시키고, 정부는 그에 때로는 개혁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 무언가 큰일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민주정부의 중심행위는 거대한 레토릭을 동반하면서 “지방이권배분정치”(pork-barrel)로 전환된다. 국가자원의 거대한 공간적 재배분이 엄청난 사회적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면서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이를 둘러싼 새로운 갈등을 창출한다 하더라도, 한국사회의 민중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는 별다른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에 역행한다. 이러한 정책영역의 창출이 무해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위험성을 수반한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최근의 황우석 사태는, 다른 어떤 요소보다 노무현정부의 과학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퇴행할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를 잘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다. 정부가 무언가 업적을 만들어야 된다는 강박관념과 이 정부가 한국을 세계 생명공학의 중심으로 내세우고자 했던 과학정책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의 업적을 매개로한 민족주의/애국주의의 동원은, 민주정부의 정책지원과 운동의 열정이 결합하면서 진실과 비판이 억압되는 일종의 “총화단결”(Gleichschaltung)을 실현하는 듯한 유사파시즘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상황을 통하여 우리는 민주정부를 지지하는 과거 민주화운동세력의 일부와 극우적 세력간의 연대를 목도할 수 있었다. 앞에서 변형주의를 언급했지만, 처음의 사례가 선거에서의 승리라는 다수획득전략의 일환으로 제도권 내에서의 요구로부터 발생한 것이라면, 최근의 사례는 그보다 훨씬 범위가 큰 전사회적 영역에서의 변형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이 시점에서 운동에 의한 민주주의 실천과 운동세력이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에서 과연 얼마나 긍정적 기여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 반성적으로 되짚어 보도록 한다.


3. 민주화 이후 민주화세력의 변형과 분화

1) 본 강연자는, 한국의 민주화를 운동에 의한 민주화로 특징지은 바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은, 곧 한국의 민주화운동세력의 문제와 상당정도 관련이 있다. 운동이 민주화를 주도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한국사회와 정치의 구조와 특성을 이미 상당정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상당정도 한국사회구조의 결과물이다. 해방이후 형성되고 발전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저항했던 민주화운동의 동원과 체제도전이 가라앉으면서 생기는 탈동원은 이러한 한국의 정치구조로부터 발생하였고, 체제는 이들 도전적인 운동세력을 체제내로 포섭, 흡수함으로써 새로운 엘리트층을 수혈받았다. 이를 통하여 구질서, 구제도권은 일정한 쇄신과 변화에 대한 적응이 가능하게 되었다. 현상의 유지를 가능케 했던 이러한 방식의 엘리트충원은, 민주적 계기에 있어 보다 폭넓은 변화와 제도권-비제도권의 경계를 해체하고 제도권을 전사회적인 차원에서 획기적으로 확대하는 민주적 개혁을 사전에 봉쇄하는 효과를 갖기도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80년대 민주화이후 사태에 있어 책임이 있다면, 세대라는 말로 표현되는 모든 운동들―예컨대, 4.19, 6.3, 3선개헌 반대, 민청학련, 80년대 6월항쟁세대―의 책임이기도 하다. 이점에 있어 한국사회에서 세대로 호칭되는 운동세력이란 운동이 탈동원화된 이후 기존질서내로 통합되어, 곧 새로운 엘리트층을 형성하는 동시대적 경험을 갖는 집단적 단위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앞선 세대들이 보여준 패턴을 반복할 것 이냐, 그렇지 않고 어떤 새로운 변화를 보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앞선 세대들의 통합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이다.

2) 80년대 민주화운동세대는, 70년대 유신시기로부터 90년대 초에 이르는 앞선 운동보다 장기간에 걸쳐, 그리고 대규모적으로 동원된 운동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들 운동세대는 한국사회에 커다란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가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이들 세대 역시 앞선 운동의 탈동원-체제내로의 흡수통합 과정과 크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왜 그러한가? 이것은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 문제는 민주화운동의 성격과 그 변화를 보도록 한다. 무엇보다 민주화운동을 민중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민중주의는 두 개의 구성요소를 갖는다. 첫째는 그것의 이념과 가치에 있어 민중성을 갖는데, 그 성격에 있어 급진적, 변혁적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사회저변, 소외된 노동의 현장으로부터 문제를 발견하고, 거기에 스스로를 참여시켰다는 점이다. “노학연대”라는 말이 표현하듯, 대학생들은 소외된 노동의 현장으로 달려가 그들과 연대했다. 그것은 “현장으로 간다”는 일종의 한국판 브나로드운동이었다. 민중주의의 두 구성요소, 즉 민족해방과 민중민주(NL-PD)는 해방이후 형성된 한국사회의 기존질서와 이를 정당화하는 지배적인 이념에 대항하여 혁명적 열정을 이론화하고 슬로건화하면서 그 안티테제를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회와 역사에 대해 총체적으로 해석하고 규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변혁적, 급진적인 것이었다. 이를 진정한 의미에서 급진적 이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문제를 부분적, 국지적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 비젼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의 상황에서 그것이 얼마나 낭만적, 급진적, 도식적, 추상적, 관념적, 비현실적인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낭만적, 추상적 이념은 무언가 한국사회의 커다란 진실을 포괄하고 이를 말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민족문제와 노동과 복지라는 한국사회가 안고 있었던, 즉 기존의 체제가 해결하지 못했던 두 핵심적 이슈를 집약하는 것이었다. NL이 48년체제에 맞닿아있고, 기존의 냉전반공주의가 제시하는 한미관계와 북한문제의 인식에 대한 안티테제를 제시하는 것이라면, PD는 61년체제, 즉 권위주의적 산업화에 의한 지배적 생산체제의 성격과 맞닿아있다. 민주화 이후의 사회에서는 당시의 혁명적 열정과 몇 개의 도식으로 정리되었던 것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 민주화운동의 궤적을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 볼 때, 그 드라마틱한 분출이 특징이라고 이해한다면, 그 드라마틱한 퇴조는 더욱 큰 특징이 아닐 수 없다. 민중주의의 소멸과 더불어, 기존의 사회질서를 총체적인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이해하고자하는 시도나 관심도, 소외된 노동, 민중적 삶의 현장에서 문제를 끌어내고자하는 민중적 관심이나 그에 대한 참여도 함께 사라졌다. 운동의 폭발적 분출과 빠른 소멸은 한국사회의 변화과정에서 운동이 갖는 성격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시 성찰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이 현상은 분명 한국에서의 민주화운동이 노동자나 농민과 같은 생산자집단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대학생, 지식인과 같은 도시의 교육받은 중산층이 중심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 저변층의 삶의 현실로부터 발생하는 민중문제는 이들 지식인 중심세력 스스로의 문제는 아니다. 대규모의 민주화운동이 탈동원화, 탈급진화되면서, 운동으로부터 민중성이 탈각했다. 그 탈동원화과정에서 여러형태의 다양한 시민운동들의 분화가 이를 대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헤게모니에 의해 표상되는 새로운 현실을 맞게 되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서 때이른 민중주의적 성격의 소멸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운동이란 빠르든 늦든 탈동원화의 과정을 거치도록 되어있고, 일상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란 시민사회로부터 운동의 투입을 필요로 하지만 항구적인 운동의 동원에 의존할 수는 없다. 이것은 정당을 매개로 한 현실정치세력으로의 발전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운동세력은 현실의 요구에 따라 분화되고 그에 흡수되는 경로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3)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민중주의 운동의 중요한 약점은, 또한 그것이 운동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그 이념이 민주주의이론을 함축하지 못했고 이를 추동했던 세력들로 하여금 대의제민주주의의 제도적 작동이 창출하는 다이나믹스를 시의적절하게 이해하기 어렵게 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의 이념과 가치는, 자유, 평등, 연대를 핵심적 구성요소로 한다. 이는 권위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었던 강력한 집단적 열정과 에너지를 창출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가치이면서 동시에 제도적 실천이다. 그리고 그 제도 작동의 중심 메카니즘은 선거와 정당이다. 그것은 헤게모니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헤게모니의 제약이라는 조건하에서 민주적 제도를 운용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는 문제는 비상한 지적, 정치적 리더십을 요구한다. 권위주의를 붕괴시키는 능력과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 이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은 질적으로 다른 수준의 문제이다. 그것은 민주주의 특성이며, 또한 민주주의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 전환에서 핵심적 연결고리는 좋은 정당의 창출이며, 이를 통한 정당체제 전체의 변화이다. 이는 정치학자이며 대표적인 정당이론가이기도 한 샤츠쉬나이더의 논리로 표현하면, 정치의 갈등축을 새로이 규정함으로써 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당체제를 형성하는 일이며, 반대로 그  c도 성립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최근 많이 논의되고 있는 이른바 “87년 체제”를 언급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본 발표자는 이를 사실적 서술개념이 아닌 사태의 평가를 위한 가치함축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것은 민주화로의 전환점에서 어떤 제도화의 응결이 이 사태를 규정하는 틀로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구조주의적인 설명으로 이후 민주화의 잘못된 경로는 80년대 민주화이후 제도화의 효과에 기인하는 것으로 평가하면서, 이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본다는 문제 때문이다. 구태여 이를 구조적으로 본다면, 민주화이후에 형성된 정치적 경쟁의 틀, 즉 정당체제가 협애한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 내에 갖혀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50년대에 형성된 전후 냉전질서의 그것과 높은 연속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다만 80년대 지역정당구조로의 경쟁축의 변화는,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 시기 IMF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에 따라, 성장과 노동문제를 정의하는 방법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공간이 열려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4) 운동의 변형과 관련하여 노무현정부의 상황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노무현정부에 들어와 386세대라는 저널리스틱한 유행어가 생긴 것도 최근년에 발생한 새로운 현상을 일정하게 반영한다. 민주정부의 수행능력, 그럼으로써 한국의 민주주의가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던 이들 386세대에게 매우 부당하게도 역사적 책임이 부과되었다. 세대를 말한다면 그것은 386세대가 아니라 민주화세대라는 호명이 정확할 것이다. 더욱이 386세대라는 말은 민주화를 극히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사회의 보수파들이 민주주의를 공격할 때, 그 표적으로 설정하는 인위적으로 설정된 가상적 집단에 대한 호칭이 됨으로써 80년대 민주화운동세대들은 부당하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확하든 부정확하든 이 386세대라는 호칭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현상을 일정하게 반영하는 측면도 있다. 무엇이 새로운 현상인가? 위에서도 말했지만 노무현정부의 출현은 앞선 그 어떤 민주정부보다 민주화이후 운동이 쇠퇴한 시점에서 운동의 재점화에 의한 동원의 싸이클에 힘입은 바 크다. 첫째의 주요 변화는 운동세대의 집권세력화이다. 80년대 운동을 주도했던 학생세대들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정치와 사회 각 부문에 대거 참여하는 연령층, 이른바 386세대로 성장했다. 이 시점에서 사법부, 대학, 기업, 언론 등 사회의 중요부문에 진입한 것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들 세대가 노무현정부의 출현을 계기로 청와대, 행정부, 2004년 4월 총선을 통해 17대 국회에 대거 진입했다. 사실상 노무현정부의 구성자체가 거의 운동권으로 이루어졌고, 이점에서 정치적 리더십이 거의 민주화운동세대 이전의 세대들로 구성된 앞선 민주정부들과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 현정부의 상층지도부가 70년대의 운동 그룹이라면, 그 아래층은 곧바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그룹들이다. 그렇다면 노무현정부는 앞선 정부들에 비해 확실한 차이를 보여줄 모든 조건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노무현정부가 커다란 문제를 갖는다면, 이들 운동세력에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될 수 있다. 둘째의 변화는 시민사회역시 이들 운동세대들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이다. 시민운동과 공론의 장에서 이들은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 결과 선출된 정부와 여러 사회 부문과 수준, 여러 정책영역, 여러 운동영역을 포함하는 시민사회사이의 밀접한 네트워크가 발전했고, 그에 따라 국가-시민사회의 융합현상이 발생했다. 우리는 그동안 국가와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 시민사회가 국가에 대해 갖는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국가를 민주화하는 수원이 됨으로써 그 활성화와 성장을 강조해왔다. 이럴 경우, 국가와 시민사회 두 영역 모두에서 정치적 민주화뿐 아니라, 사회적 민주화도 강화하는 힘의 증강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에서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큰 문제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는 민주화 운동세력의 뚜렷한 하나의 분화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노무현정부에 참여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간의 분화이다. 운동세력의 분화라는 면에서 볼 때, 그것은 87년 민주화이후 운동세력의 정치참여를 놓고, 지역적 균열라인을 따라 후보단일화, 비판적지지, 독자후보라는 세 방향으로의 정치적 분화에 뒤이은, 두 번째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현 정부에 참여한 개혁파와 참여하지 않고 시민사회에 머물러있으면서 전자를 비판하는 진보파들 사이의 괴리와 갈등관계는 최근에 들어와 노무현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성장체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보수대연합적 상황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2003년 말 대통령선거과정에서 스스로를 “노사모”라고 호칭하는 운동의 후원회화 현상에서 그 징후적 변화는 발견된다.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이념과 가치, 대의와 원칙을 준봉하는 민중주의운동의 중심적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특정의 인물을 지지하는 현상은 지역균열라인을 따라 분기된 YS냐, DJ파냐 하는 분기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점에서 최근의 노사모현상은 그 최종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는 가치와 대의가 아닌, 특정의 리더를 추수하는 운동은 그 리더의 행적에 따라 운동의 성격과 궤적이 쉽게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민주적 이념과 가치와 얼마나 부합하든, 하나의 결과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즉 민주화운동의 탈동원화와 그 이후는 이들 운동세력들의 해체와 기존질서내로의 분자적 흡수를 촉진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또한 변형주의의 효과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화가 아무리 엄청난 파괴력과 에너지를 수반하는 대규모적 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정치적 민주화가 사회적 민주화로 발전하지 못하고, 사회의 소외집단과 저변을 구성하는 사회집단의 정치참여를 획기적으로 확대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앞선 운동의 경우들과 같이 엘리트참여의 내용과 폭을 부분적으로 확대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최근 운동권의 분화와 갈등은, 현 정부의 지지를 둘러싼 것이다. 현 정부의 정책성격과 리더십, 그리고 그 수행능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때, 정부 밖의 진보파들은 민주주의의 이념과 가치로부터 일탈하는 현 정부에 대해 대표-책임의 연계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면서 비판의 강도를 높인다. 반대로 현 정부의 지지그룹은, 그 비판의 성격이 어떠한 방향에 근거하든―친부르조아적 비판이든, 친노동적 비판이든― 현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강력한 기득이익세력에 포위되어 개혁에 저항하는 반개혁세력을 이롭게 하고, 민주정부를 약화시키는, 그럼으로써 민주주의를 약화시킨다고 그에 대응한다. 그러나 이 양자사이의 괴리와 갈등은, 최근년에 발생한 황우석 사태를 통하여 볼 수 있는 운동의 퇴영적 전개과정에서 더욱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현 정부의 중심세력이 된 참여적 운동의 분파는, 중심적 생산자집단인 노동운동, 농민운동과 적대하는 동안, 민족주의/애국주의의 동원을 매개로 그 이념적 그리고 민주적 가치의 스펙트럼에 있어 정반대에 입지하는 사회세력과 기꺼이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무현정부하에서 국가-시민사회네트워크의 확대가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아도 운동의 탈동원화로 쇠퇴한 운동의 자원을 크게 고갈시키고 시민사회의 진보적 운동부문의 성격을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 세미나의 주제인 “민주주의는 여전히 희망인가”라는 물음은, 현 정부에 참여하거나 지지하지 않은 운동의 진보파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다. 운동에 가장 크게 빚지고 있는 현 정부가 운동의 자원을 고갈시키면서 실패를 거듭한다면, 그것은 현 정부의 실패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실패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리고 그 대안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 민중운동의 활성화, 즉 민중운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올바른 문제제기인가?


4. 헤게모니와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사이에서

1) 한국사회/한국정치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이데올로기가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다. 본 발표자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한국사회의 억압과 소외의 구조, 그리고 그 정도의 크기를 반영한다. 바꿔 말하면, 현상유지를 재생산하는 지배적 질서가 여전히 비민주적, 권위주의적 구조를 가지며, 삶의 현실로부터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갈등이 제대로 폭넓게 표출되지 못하고 그 해결을 위한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사회현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해방이후 분단체제하에서 냉전반공주의를 통하여 구축되고, 권위주의산업화를 통하여 그 물질적 기반을 공고히 한 사회의 지배적 구조가 갖는 정당성의 불완전함 내지는 결핍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을 유발하면서 현실을 인지,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제약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는 문제는 이데올로기를 불러들여 문제를 제기하는 측과, 역시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그에 대응하는 측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만, 기득이익을 유지하고자 하는 측의 역할이 더 크기 때문에 일차적 원인을 보수적 기득세력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최근  사학개혁법안을 둘러싼 갈등에서 보듯, 그것은 우리당의 제안으로 국회를 통과했고, 한나라당은 이에 반대하는 거리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 반대운동의 한 한나라당 책임자는 “청와대와 국회 등에 침투한 친북, 좌경 핵심세력”이 이 법안을 주도하여 “전교조출신이나 친북좌경세력을 개방형이사로 침투시켜”, “학교를 접수해 정치사상과 혁명투쟁집단으로 만들어 사학을 무기화하려는 음모”라고 말했다(한겨레, 2005년 12월 19일자). 무엇보다 이 주장은 소수의 극우인사들을 제외하고는 다수의 이성적인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학개혁문제는 오늘의 민주주의 하에서 개혁사안으로서 찬반이 있을 수 있고, 민주주의적으로 논의할 문제이지만, 여기에서는 냉전반공주의의 극한적 갈등을 불러들이는 이데올로기적 대결로 문제를 전치시키고 이를 통해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고 왜곡한다. 여기에서 이데올로기의 불러들임이 개혁이라는 도전을 억압하고 좌절시키고자 하는 시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극단적인 사례라 하더라도 이데올로기의 정치, 이슈의 이데올로기화는 우리사회의 도처에, 모든 갈등적 사안에 미만되어 있다. 모두 그렇지는 않다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이데올로기의 연원은 우리의 삶의 현실을 이해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련의 개념틀이나 믿음의 체계를 발전시키는 결과로서 나타나는 내생적인 현상으로서 보다는, 외생적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냉전반공주의나 신자유주의적 경제독트린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해방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냉전반공주의는 한국사회와 정치의 제도화를 주형한 이데올로기적 하부기반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경제적, 사회적 갈등을 이해하는 방법, 그리고 특정의 갈등은 그 표출과 대표가 허용되는 동안, 특정의 것은 허용하지 않는 힘을 통하여 갈등의 표출과 그 제도화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상의 유지를 가져오는 보수의 스펙트럼에서만이 정당의 조직과 경쟁이 허용되는 정당체제의 제도화는 그 직접적인 결과이다. 노동을 대표하는 정당이나 사회민주주의와 같이 서구에서 보편적인 이익대표의 체계는 한국사회에서는 발붙일 여지가 없었다. 자본주의생산체제, 시장경쟁체제가 창출하는 노동문제, 사회보장문제, 분배의 가치, 사회적 양극화와 계급화가 발생시키는 갈등을 정치적으로 해소하고 사회를 통합할 정치의 대표체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한국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러한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데올로기가 창출하는 가장 부정적 효과는 그것이 삶의 현실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보지 못하도록 한다는데 있다. 헤게모니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능력 내지는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학법의 사례에서 보듯, 냉전반공주의는 탈냉전과 더불어 그 효능이 크게 약화되는 헤게모니의 약화를 볼 수 있다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임에 분명하다. 한국의 민주화가 폭넓은 민주개혁과 사회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제약하는 여러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민중주의적, 진보적 요소가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하는 풍토, 노동을 천시하고 불온시하면서 제도권에 통합하지 못하는 조건, 분배의 형평과 사회복지를 희생하고 성장지상주의를 추구하는 추동력이 강력한 헤게모니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갖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분명 이를 믿도록 하는 역사적 경험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두려움의 정조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 가지 역사적 경험을 말하는 것인데, 피지배로 이어진 근대화의 실패의 경험, 전쟁과 분단을 통하여 내면화된 미국에 대한 의존성, 스스로 만들어낸 희귀한 성공사례로서 인식되는 박정희신화가 그것이다. 이들 경험은 한국사회에서 전체주의적 속성을 강화하는 경향을 부추기고, 그럼으로써 비판과 경쟁적 대안의 조직화를 어렵게 하고, 가치의 다원주의화를 가로막는 효과를 갖는다. 어떻게 하든지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하든지 경제발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경쟁에서 이겨야한다, 어떻게 하든지 미국에 밉보이면 안 된다는 두려움은 그러한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80년대 운동과정에서 운동세력들이 담지했던 민중주의적 이념은, 이들 중심적인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와 한국민의 심성 깊숙이 내면화되어있는 두려움의 의식에 반기를 들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민중주의운동의 소멸과 더불어 그 참여자들은 이러한 헤게모니와 대면하고, 그에 흡인되는 입지에 섰다.

2)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해 갖는 효과는, 국가의 역할과 정치를 이해하는 특정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일련의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통하여 부정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국가의 실패-시장의 효능이라는 말로 집약되듯이, 그것은 만약 경기순환, 성장, 자본의 이윤, 노동시장, 고용, 실업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어떠한 문제에 봉착할 때, 시장개입을 중심역할로 삼는 국가는 만병의 근원이고, 사적영역에서의 시장의 자율적 작동은 만능의 해결책이라는 국가부정의 시장근본주의를 핵심 독트린으로 한다. 일종의 국가없는 시장무정부주의의 이데올로기이다. 국가는 괴물이고 이 “괴물을 죽이는 것”(kill the beast)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가 행위하지 못하도록 국가의 재정자원을 최소화해야 한다. 세금감축, 균형예산, 국가로부터의 시장자율성 확보는 그 중심내용이 된다. 국가를 운영하고, 시장을 규율하고, 분배의 형평과 사회복지를 도모하는 것이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의 역할이고, 이를 민주주의의 정치적 역할이라고 할 때, 신자유주의는 곧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발표자의 생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독트린이 무역자유화, 민영화, 시장효율성, 조세감축 등을 통하여 경제에 미치는 효과보다도,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사익의 실현과 사정영역의 극대화를 강조하고, 공적영역을 부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존립기반을 해체하는 정치에 대한 부정적 효과가 더 크다고 하겠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장 역시 사회조직의 한 형태에 불과하며, 그 자체가 국가의 규제정책과 국가의 역할을 통하여 조직되고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시장효율성이 자율적으로 창출된다는 주장이 시장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논의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신자유주의의 독트린이 강조하는 것처럼 국가의 역할, 국가의 경제행위가 축소되고 있다는 주장자체가 반드시 진실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제이콥 핵커와 폴 피어슨이 미국정치에 대해 말하고 있듯이, 세금의 감축은 그 자체가 일차적으로 부유층에 혜택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 효과는 사회복지정책과 공공정책을 위한 재정 감축으로 인해 일반국민과 저소득층에 해악적 효과를 갖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부유층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역할전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국방비 지출과 아울러 정부 재정지출의 불균형이 오히려 확대됨으로써 균형예산원리를 말처럼 실현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와 시장효율성의 가치가 정치에 대해 갖는 부정적 효과는, 민주화이후 민주정부들의 성립시기와 타이밍을 같이한다. 실제로 한국사회에서의 민주주의가 소수의 기득이익을 실현하기보다 다수민중의 이익실현을 가능케 하는 민중권력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든 되지 않든, 보수파들이 그들의 언론매체들을 통하여 시장효율성, 정치의 다운사이징을 강조하고, 민중적 요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색칠하기를 통하여 정치폄하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켜왔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신자유주의의 효과가 두 가지 내용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시장과 국가, 정치, 민주주의와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설정하면서, 전자의 영역이 확대되어야 한다는데 대한 강조이다. 이는 외적 영역의 크기에 있어 서로 다른 사회구성 원리가 작동하는 공간의 크기의 우선순위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구성의 내부적 작동원리에 있어 가치의 우선순위를 말한다. 첫 번째의 경우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은 각각 뚜렷한 자율성과 작동원리를 가지며, 양자의 경계를 인지하기가 쉽다는 점에서 시장의 효과는 상당정도 제한된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경우에서는, 시장의 가치와 원리를 사회의 모든 하위구성단위와 수준과 영역에 일반적으로 적용, 즉 사회전체에 확대 적용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갖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전면적이다. 이는 전 사회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시장제국주의의 관철이다. 그동안 민주주의 하에서 신자유주의의 정치영역에 대한 효과는 첫 번째 경우로부터 두 번째 경우로 확대되고 심화되어왔다. 청와대와 정부조직의 구성, 그리고 그 운영원리 자체를 시장효율성의 원리를 따라 개혁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정책과 그 결정과정을 시장효율성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정치와 정당에 대한 이해에 있어 시장효율성의 원리와 가치를 실현코자 한다는 점에서 노무현정부 만큼 그 영향력의 확대를 잘 보여 주는 사례는 없다. 정부안팎의 운동권출신인사들이나 개혁적 인사들 가운데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공적영역과 민주정치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국가의 민주적 역할을 통하여 시장의 폭주가 견제되고, 사회양극화가 해소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시장원리가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 정치제도의 작동, 정치개혁의 전제적 가치내로 은밀하게 구체적으로 삼투되는 영향들을 포착해 내기란 쉬운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헤게모니를 말할 때, 그것은 특정의 효과 때문에 그로부터 혜택을 보는 이데올로기담지가가 지니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의미하기보다, 그럴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담지하는 경우에 적용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이데올로기를 갖는 것은 합리적이 아닌 헤게모니의 결과이다. 민주화이후 정치개혁을 추동했던 원리와 전제들에 있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개혁의 전제적 가치들의 많은 부분에서 신자유주의적 시장효율성의 가치는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치는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선거와 정치과정은 통제되고 제한될수록 좋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민주화이후 최초의 정치개혁은 국회의 규모를 줄이는 데서부터 시작되었고, 선거자금과 선거기간축소, 중앙당/인원축소, 지구당폐지와 같은 개혁들이 가능할 수 있었다. 저효율-고비용정치를 척결하겠다는 슬로건은 이를 잘 집약한다. 그것은 정치의 다운사이징, 후보자-투표자대중사이의 접촉과 연계를 제한하고, 중앙당과 지구당조직을 축소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적 가치와 원리들은, 반부패와 정책경쟁을 모토로 한 당의 전문성화에 대한 지향들과 결합하였다 하더라도 그 근저의 가장 중요한 헤게모니적 위력을 갖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 방향에서의 이런 종류의 개혁들이 전혀 무용한 것은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있어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대체로 사회기층의 대중적 삶의 현실로부터 나오는 요구들이 어떻게 폭넓게 참여/대표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운동권출신이나 개혁적, 진보적 인사, 그리고 시민운동들이 민주화이후 정치개혁의 의제형성과 심의과정에서 보여주는 것은, 이들이 또한 헤게모니의 담지자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

3) 경제성장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가치가 지배할 때, 그리고 경제성장이 그 넘쳐흐르는 효과를 통하여 부의 재분배, 경기회복, 고용증대를 실현한다고 믿을 때,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전일적으로 관철되는 경향은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시장효율성의 가치는 이러한 성장이데올로기와 접맥되면서 더 큰 효과를 만들어왔다. 또한 성장과 시장효율성의 원리를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기술관료적 경영주의나 전문기술주의 가치의 강화를 수반하게 될 것임도 분명하다. 성장-시장-기술관료적 경영주의가 박정희정부시기 권위주의적으로 실현되었다는 인식은 우리사회에 널리 팽만해있고, 많은 사람들의 잠재의식에서 수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성장-효율성-전문성과 민주주의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권위주의와 더 친화성을 갖는 등식인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민주주의보다 권위주의가 더 우월한 가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장-기술경영주의의 등식이 민주주의를 통하여 구현되어야할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이를 자연스럽게 수용한다. 이 등식은 민주주의와 정면으로 배치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가치는 반민중적 가치이며, 민중주의와는 분명히 배치된다. 정치개혁의 의제를 지배하는 시장효율성의 가치는, 대중의 정치참여에 대한 불신과 아울러 이를 대신하여 전문적 지식이라는 덕목을 갖는 엘리트들의 역할과 참여를 확대하는 전제나 지향을 배면에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이후 정치개혁의 내용들은, 그리고 그 개혁이 가져오는 효과들은 민중참여를 제약하고 엘리트지향성을 강하게 갖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1996년 15대 총선, 2000년 16대 총선,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한 의원선출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높은 교체율을 시현하면서 초선국회의원 비율이 60%에 이르는 문자 그대로 엄청난 물갈이를 했다. 미국의 정치학자들은 선거시 의원교체율이 떨어지는 상황, 즉 선거경쟁이 적어지는 상황을 미국정치에 있어 경쟁의 소멸이라는 위기로 이해한다. 이점에서 치열한 경쟁을 보여주는 한국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당체제는 여전히 보수독점의 구조를 탈각하지 못하고, 사회경제적 이익과 갈등을 대변하지 못하고, 정책경쟁과는 거리가 먼 구태의연한 쟁투를 계속하고 있다. 무엇이 현상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높은 연속성을 유지하도록 하는가? 민주정부하의 정책결정과정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발견한다. 청와대와 정부의 주요정책결정부서의 정책형성과 심의과정에서 사회적 투입은 과거에 비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정부의 최고정책결정자들과 중간층 인사들의 다수는 과거 운동권출신이며, 개혁적 인사들이고, 이들과 시민사회의 소통 채널들은 전에 없이 확대되어 정책결정과정에 있어 시민사회 운동단체들의 참여와 그로 인한 투입 또한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하에서의 정책의 내용과 결정의 스타일은 실제 사회현실과 사회갈등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문제로부터 크게 괴리되어있다. 정책결정과정에서 대대적으로 참여가 확대되고, 역할이 비약적으로 커진 집단은, 제도권내의, 대학의 지식인들과 전문가들, 국가영역과 민간영역에 있는 연구기관에서 활동하는 많은 전문가집단들이다. 최근년에 이르러 광범하게 확대되고 설립된 각종 정부위원회나 자문위원회, 그리고 국책연구기관을 통해 이들 전문가 지식인집단의 참여는 민주화와 더불어 변화된 정책결정과정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로 나타났다. 지난 어떤 민주정부보다 노무현정부는 정부의 효율적 운영과 생산적 정책결정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면서, 연구소 프로젝트형 기술관료적 결정스타일로 발전시키는데 열성적이었다. 이것은 정책결정과정에서 전문적 지식인의 참여와 투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의제의 설정, 정책의 형성과 결정은 사회현실로부터 발생하는 삶의 문제와 민중적 요구가 중심적 동력이 되어야하며, 이들을 대표하는 정치적 참여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민주정부의 정책과 그 결정과정은, 이러한 사회적 현실이나 정치경제적 문제와는 매우 거리가 먼 기술관료적 이슈로 변질되었다. 그것은, 기술관료적 정책 산출 중심의 사고와 정향으로 특징되는 것으로 전문가 엘리트의 비전에 의해 창출되는 사회를 지향하고 이를 성취하고자 한다. 이러한 정책내용과 스타일은 특히 노무현정부에 들어와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가운영과 정책결정의 이러한 기술관료적 스타일은 정치를 효율적 정책을 산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비생산적인 이전투구의 장이며, 정치집단들의 난투장으로 이해하는 듯한 대통령의 정치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4) 도덕주의는 한국사회에서 정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또 다른 가치이며 요소이다. 정치개혁을 추동하는 담론은 이 도덕주의를 중요한 구성요소로 한다. 김영삼정부로부터 노무현정부에 이르기까지 정치개혁을 주도한 가치와 수사들, 깨끗한 정치, 청정정치라는 모토가 표현하듯이, 모두 정치부패를 부정하고 혐오하는 깨끗한 정치에 대한 구호와 반부패담론은 이 도덕주의의 파생논리이고 파생언어이다. 일찍이 도덕주의의 가치와 담론은, 그것이 비록 쿠데타를 합리화하는 슬로건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1960년대초 군부엘리트들에 의해 제시된바 있었다. 그들은 부패한 기성정치인과 이들이 정쟁을 일삼는 정치판을 군인들이 청산하고 국가발전을 위해 깨끗하고 능력있는 새로운 체제를 확립하겠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그러나 정치를 도덕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정치를 통하여 도덕, 사회윤리를 확립하고 최근의 사회적 언어로서 “신뢰”를 창출하는 것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는 도덕주의의 가치를 통하여서는 도덕적 가치도 신뢰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와 도덕은 다른 수준, 다른 영역에 위치한다. 정치에서 도덕주의적 가치가 강한 이유에 대해, 혹자는 도덕과 명분을 중시했던 조선조 유교적 전통의 산물이라는 정치문화적 요소를 강조할는지 모른다. 본 발표자의 관점에서,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적 이해는 사회경제적 갈등의 표출이 억압되어 그것이 갈등의 제도화로 귀결되지 않은, 즉 갈등이 팽만한 사회에서 갈등을 정치적이고 제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데 따른 사회심리적 보상작용의 결과물이다. 도덕주의에 대한 강조와 현실에서 도덕의 실현은 분명 반비례관계에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만큼 도덕주의적 담론이 풍성하고, 위력적인 사회는 없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팽만한 사회도 많지 않을 것이다. 풀어 말하면, 도덕주의는 민주적 과정의 실패의 산물로서, 민주정치의 과정 내에서, 정치 안에서 제도화의 방법을 통하여 갈등을 해소하는 제도의 효능을 경험하지 않고, 그에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서 문제를 혁명적 방법으로 분명하게 일거에 해소하고자 하는 일종의 청산주의적 심리, 그것이 수반하는 성급함의 심성에 그 연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이점에 있어서 정치의 도덕주의는 정치와 정치갈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하고, 엘리티즘과 내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민주주의의 과정 및 절차와 갈등관계를 갖는다.

민주화 이후 도덕주의의 정치 가치는 진보파와 보수파 양방향으로부터 추동되어왔다. 먼저 민주화운동권에 있어 민중주의와 도덕주의는 운동을 추동했던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었다. 변혁적 이념과 도덕적 열정은, 민주주의의 두 요소, 즉 민주주의의 가치와 제도적 실천가운데서 규범과 대의를 강조하는 ���대한 일방적인 헌신으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혁명에 헌신했던 사람들이 도덕적 열정이 불러일으키는 혁명적 공화주의를 현실에서 실현코자하는 대의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동안 이를 민주주의 제도에 담으려는 관심과 노력이 없었던 프랑스혁명시의 자코뱅 공화주의와 도덕적 열정에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른다. 운동권은, 기존의 보수적 기득이익과 정치세력을 도덕적으로 부패한 집단으로 거부하였고, 스스로를 변혁의 수행을 위한 도덕의 담지자로서 그 실천을 위한 행위자로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민주화운동시기에서나 민주화이후 사회에서 운동권에 있어 도덕적 가치와 민주적 가치는 거의 동일한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보수파들은, 도덕적 덕목과 담론을 통하여 이웃사랑이라든가, 인정이라든가, 전통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덕목들을 사회화한다. 예컨대 노약자, 사회적 빈곤층, 결손가정의 아이들은 언제나 온정주의를 통하여 사회적 관심과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한다는 도덕적 담론을 일상화한다. 이 측면에서 도덕주의는, 기존의 권위구조나 위계구조, 사회의 공동체적 결속을 떠받치는 여러 형태의 덕목들을 사회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덕주의는 보수파든, 진보파든 서로 다른 정향과 맥락, 서로 다른 의미내용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와 담론에 있어 서로 합치된다. 그러나 도덕주의에 대한 운동권의 의미내용은 훨씬 더 치열하다. 운동에 진정으로 헌신하는 자는 도덕적 인간이 되어야하고,  c으로 도덕적 인간이 진정한 운동가라고 인식은, 자연스럽게 도덕적 인간이 또한 민주주의자이며, 민주주의를 잘 발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제도와 매개된 정치적 실천으로 보기보다 가치와 규범으로 수용하는 태도이자 자세이다. 물론 민주주의는 가치와 이상, 그에 헌신하는 도덕적 열정없이는 진전될 수 없고, 이럴 경우 그것은 생명력을 갖지 못한 민주주의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현실 제도의 메카니즘을 통하여 실천되고 작동되지 않으면 안 되고, 갈등과 권력이 충돌하는 정치과정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할 때만이 운동이 지향하는 민중적 가치와 대의를 실현할 수 있다. 즉 현실의 갈등 속으로 뛰어들고 권력을 창출하여 대의를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도덕주의가 가져오는 민주적 과정에 대한 부정적 효과는, 그것이 현실을 현실자체로서 접근하기보다 규범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사회경제적 이슈에 무감하게 되고, 갈등과 권력에 대해, 그럼으로써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도록 한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갈등의 표출과 정당을 매개로한 권력 창출을 핵심요소로 하며, 이 과정에서 민중적 참여의 확대와 민중적 요구의 확대를 통해 기존의 제도에 대해 끊임없이 개혁을 압박하면서 민중권력을 창출하는 과정을 체제의 중심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민중적 요소의 투입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상당정도의 갈등과 부패, 무질서와 소란스러움에 대해, 본 발표자가 “민주주의의 비용”이라고 말했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화이후시기 운동권 또는 개혁적 인사들은 반부패라든가, 깨끗한 정치에 대한 강조와 같은 모토를 통하여 민주주의와 도덕주의적 이상을 일치시키면서 정치개혁을 이러한 방향으로 주도하는데 앞장섰다. 운동권이나 개혁파들의 도덕주의는 깨끗하고 조용하고 질서정연한 정치과정, 그럼으로써 이를 통해 민중적 투입과 정치가 오히려 축소되는 그들이 결코 의도했다고 볼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기여했다. 갈등과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지배담론이 갖는 효과와 쉽게 접맥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들은, 권력이 충돌하는 정치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정당정치를 중심으로 한 정치영역내부에서보다는 정치영역외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하여 그 해결을 정치가 아닌 그 외부의, 또는 그에 초월하여 있는 것으로 상정되는 전문가라든가, 사법부라든가, 시민사회의 운동이라든가 하는 어떤 제3의 해결자를 불러들이는 방법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모습을 보인다.

민주주의의 현실정치가 진전되면서 민중운동의 중심영역이라 할 노동운동부문에서 만큼 운동권의 도덕주의가 만들어내는 딜레마를 잘 보여주는 곳은 없다. 운동이 도덕성의 구현과 실천을 통하여 정당화될 수 있다면, 그 정당화를 위하여 운동은 지속적으로 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본주의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의 중심에는 사적, 경제적, 물질적 이익과 그 이익을 공유하는 집단들의 이익갈등이 위치한다. 민주화운동시기 노동운동을 추동했던 도덕주의는 국가와 생산현장에서의 노동자들에 대한 권위주의적 억압과 배제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광범한 단결을 가능케 했고, 이를 정당화했던 정신적 지주였다. IMF금융위기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와 한국의 경제발전과 산업구조의 급속한 변화가 초래한 노동시장의 분화는 모든 노동운동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동의 이익기반을 해체했다. 이러한 변화는 재벌대기업과 중소기업, 이들 사업장에서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피용된 노동자와 실업자들간의 이익갈등을 첨예한 대립관계로 몰아넣었다.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공동의 이익을 제공함으로써 이들을 조직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도덕주의적 방법으로 접근되거나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전혀 아니다. 노동운동은 지금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의 활동가들이 노동운동의 대의를 저버리고 사적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사회학에 있어 “집합행위의 이론”은, 노동운동을 포함하여 이익집단적 성격을 갖는 조직들은, 개인의 이익을 만족시킬 수 있는 비정치적 “배타적 유인”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 그것이 정치적 성격을 갖는 공공재를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무임승차현상으로 인하여 조직동원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오늘의 한국노동운동도 이 집합행위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독립운동, 혁명적 변화, 민주화운동과 같은 사회적 변혁기, 즉 동원의 시기에서 이 집합행위의 문제는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원이 평상시로 되돌아가는 탈동원의 시기, 광범위한 연대를 가능케 하는 도덕주의는 물질적 이익추구 앞에서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오늘날 노동운동에 있어 “노동운동은 이익집단운동으로 전락했다”라든가, “초심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하면서 과거의 도덕적 가치를 불러들이면서 이 사태에 대해 도덕적으로 개탄하고, 민주화운동당시의 대의와 연대를 강조한다고해서 이들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이들 운동이 더 이상 과거의 도덕성을 견지할 수 없는 것은, 거시적으로는 민주주의로의 정치적 조건의 변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경제발전에 의한 노동시장조건의 변화가 이를 허용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미시적으로는 운동에 헌신하는 개인이 자기이익에 반해 그리고 인간의 행복감의 내용변화에 반하여 지속적으로 도덕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도덕주의적 운동은 네메시스의 제물이 되는 처지에 놓인다. 운동의 도덕성화와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현실간의 괴리가 커지면서 운동의 도덕성의 위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도덕성의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는 순간, 이 도덕주의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노동운동이 노동자를 이롭게 하는 무언가의 수행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순간, 그것은 반드시 반노동적인 보수파들만이 아니라, 일반시민들로부터 가혹한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도덕주의를 다시 불러들이는 방법을 통하여서는 노동운동은 아무런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힘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도덕주의의 딜레마는 노동운동에 국한되지 않고 민주화운동 전반에 해당된다. 도덕성의 정당성화는 그것이 실현하고 만들어내는 행위의 성과, 또는 결과물과 직결된다. 도덕성을 민주화투쟁을 통해 실제로 구현했던 운동의 시기가 지난, 민주화이후 정치에 있어 운동권인사나 개혁적 인사들이 현실 정부와 정치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를 창출하지 못했을 때, 그들도 그들이 비판했던 기득이익의 패턴과 다른 면을 보여주지 못했을 때, 개혁, 진보, 민주화는 아무런 도덕적 위력을 갖지 못하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오늘의 현실이고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위기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부도덕한 사회를 도덕적으로 만드는 일과 시민이 도덕적 인간이 되어야하고, 운동이 도덕성을 가져야한다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5. 다시 민주주의인가? 다시 운동인가?

1) 이제 “민주주의, 여전히 희망의 언어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때가 되었다.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민주주의의 정의, 성격,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과 같이 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실천을 어렵게 하는 것은, 민주화를 위해 요구되었던 운동의 논리와 이론들이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이다. 또 그 연장선상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제도인 선거경쟁의 장에서 집권을 위해 선거에서 승리하는 일과 투표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유능하고 좋은 정부를 창출하는 것은 또한 다른 종류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그 제도적 실천사이의 괴리가 그리고 이   ����다이나믹스가 민주주의의 본질을 사뭇 포착하기 어렵게 하고, 실천을 어렵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경험은,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전환과정에서 운동은 이론의 여지없이 괄목할만한 것이었고, 세계에 자랑할 만한 성공사례를 제시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실천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고 보편적인 시민권을 증진하는 데는 많은 트러블을 보여주고 있다. 운동세력이 민주정부를 창출하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그 민주정부가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삶을 향상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가져온 중심세력들이 담지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는 운동의 열정을 통하여 분출된바 있었지만, 제도를 만들고 제도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사회변화를 가져오는 데는 엄청나게 미숙함을 보여준다.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기존의 강력한 권위주의적 변화라는 목표를 가지며, 기존의 국가기구에 대한 공격을 위한 엄청난 대중적 동원에 의한 집합적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이 상황에서는 국면적 힘의 변화를 끌어낼 운동은 극히 효과적이다. 또한 최대한의 대중적 연대를 가능케 하는 민주화라는 목표와 대의 역시 분명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 문제는 체제전환에서 요구되는 논리와는 상이하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참여의 평등을 부여와 이를 통한 대중의 폭넓은 정치참여를 통한 민중권력의 창출이라는 그 어느 체제보다 민중적 요소를 부여하는 체제이지만, 이 참여하는 민중이 또한 자각되고 이슈에 대한 계몽적 이해를 갖지 않을 때 그리고 이 참여를 통한 그들의 힘의 창출이 제도의 작동원리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이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을 실천을 통해 습득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체제에 내재된 민중적 요소는 다른 종류의 엘리트지배적 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 참여하는 민중은 각기의 상이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며, 그들이 실현하고자하는 목표역시 매우 다양하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실천은 매우 복잡하고 복합적이다. 그럼으로 민주주의의 가치와 제도적 실천사이의 괴리는 한국사회에서만의 현상이 아니라 서구의 구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은 민주주의 그 자체의 모순적 성격이기도 하다. 어쨌든 한국사회에서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실현은, 민주주의에 내재된 모순적 요소를 과소평가하는 가운데 운동의 효능을 과대평가하는 인식을 키운다. 현재의 실패는 자주 과거의 성공사례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고, 그것을 오늘의 현실에 불러들이고자 하는 충동을 갖게 한다. 보수파들이 오늘의 민주정부의 “실패”를 지난날 권위주의적 박정희신화를 다시 불러드리는 것을 통하여 대체하려고 하듯, 개혁파들은 오늘의 민주정부와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을 지난날 운동의 신화를 통하여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람시의 개념을 빌려 말한다면, "기동전“에서는 큰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운동이란 방법을 복원함으로써 ”진지전“이 필요한 상황 자체를 회피하는 접근은 자칫 역효과를 가질 수 있다.

2)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나? 그것은 세단계로 구성된다. ① 민주주의의 시민사회적 기반이 강화되고 건강하게 발전하는 것 ② 정치의 중심조직으로서 정당과 정당체제가 사회에 폭넓게 기반을 두고, 선출된 정부가 대표-책임의 연계에 의해 구속되는 것 ③ 선출된 정부의 정책의 효과가 경제적 부와 자원의 분배구조를 향상시켜 민주주의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여 정치적 평등을 실현하는데 제약적 조건을 최소화 하는 것. 위의 세 단계를 좀 더 풀어 말하면 이렇다. 첫째, 시민사회는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이 접합되는 이다. 삶의 현실이 조성되는 사적영역의 문제들이 얼마나 잘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리고 민중적으로 표출되고, 대표되고, 독해되느냐 하는 것이 시민사회가 해야 할 일이며, 그 건강성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이는 공론의 장도 이 사적-공적영역이 접합하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정당의 조직과 정당체제의 형성은 바로 이 사적이익갈등-공적영역의 접점에 위치한다. 이 수준에서는 무엇보다도 정당의 제도화, 잘 발달된 정당체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샤츠쉬나이더의 주장과 같이 사회적 갈등과 요구를 폭넓게 대표하고, 경쟁되는 갈등축이 어떻게 형성되느냐 하는 문제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선출된 정부, 선출된 통치자가 대표-책임성을 실현토록 하는 것이다. 정당을 떠나서는 대의제민주주의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그것 없이는 선출된 민주정부가 그 자체가 대표적이 되도록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선출된 정부가 선출되지 않은 국가관료기구를 얼마나 민주화하고, 민주적으로 잘 통괄하느냐하는 능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 정치적 평등의 원리를 실현하고 하나의 통치체제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데 있어서, 그리고 사회경제적 이슈에 대한 계몽적 이해와 더불어 민주적 시민들이 정치적 평등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사회경제적 평등의 실현이 요구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만들어 내야 할 좋은 정책의 단기적, 장기적 효과이다. 민주주의는 이 세 단계 모두를 포괄한다. 그러할 때 운동의 효과가 실제로 가장 직접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영역은 그 첫 번째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첫 번째 단계에서조차 민주화이후 한국현실에서 운동이 기여한 것은 크지 않다. 사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강화하는 방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와 제도, 그리고 국가의 구조와 작용원리를 이해하고 습득하여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만이 민주주의의 장점을 풍부하게 살리는 길일 것이다. 운동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기술을 습득하고 실천하는 일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3)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은, 사전에 마련된 어떤 이념이나 합리적 설계, 또는 이상적 제도개혁을 통한 것이 아니고,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의 집적을,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적 지속성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외국의 어떤 사례를 모델로 삼는다 하더라도 한국적 토양에서 원래의 효과를 결과하지 못하기 일쑤이고, 효과가 있다하더라도 부분적일 것일 뿐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우리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기여한다. 민주주의는 총체적 비전을 담는 이념이나 어떤 통일적인 도식 내지는 규범과는 본질적으로 병존하기 어려운 체제이다. 공동체가 지향하는 목표와 결정은 가능한 많은 참여자들이 논의의 결과로서 획득되고,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그것이 작동되는 과정으로부터 그리고 이 과정 내부로부터 문제를 끌어내고 결정하는 이 실천적 경험이 가져다주는 민중들의 자각적 성장을 가능케 하는 체제이다. 운동은 위기나 특정의 국면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평상시 장기간 병행하기 어렵다. 운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오늘의 토론주제이기도 하지만, 운동에 진정으로 헌신하는 진보파들은 과거 그러했듯이 지금 다시 운동으로 돌아가 민주주의를 재활성화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민주화운동시기 운동의 자원들은 거의 고갈되었다. 그러할 때 운동을 재활성화하는 것이 오늘의 변화된 현실에서 얼마나 가능할지도 회의적이거니와,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민주화운동으로부터 현재의 트러블에 이르기까지 퇴행의 사이클이 다시 반복될 것이다. 축구경기를 예를 들어 보자. 사회경제적 개혁을 포함하여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축구경기에서 꼴을 넣는 것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사회경제적 개혁을 원치 않는 보수파, 기득이익들은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수비에 전념하고, 개혁자들은 공격수를 앞세워 공격을 강화한다고 하자. 이 경기에서 헤게모니라는 기득이익을 이롭게 하는 조건이 가세함으로 수비를 증강하는 효과를 갖는다. 홈그라운드, 심판, 경기규칙, 운동장조건, 기후조건 등이 헤게모니일 수 있고 그러한 요소들은 수비측에 커다란 이점을 부여한다. 개혁자팀의 공격수들의 공격은 상대방 수비수들에 의해 저지되고 차단되기 일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대수비의 방어가 강하다고 해서 공격수들이 공을 후방으로 패스하기를 되풀이하면, 꼴을 넣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상대의 페널티지역에 접근도 못하고, 슛할 기회를 갖지도 못할 것이다. 어려운 방어망을 뚫기 위해 어떻게 하든지 전진패스를 해서 골문에 접근하지 않고서는 골을 넣을 기회를 갖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골 결정력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를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 논리는, 결국 백패스만을 일삼게 되는 공격수에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른다. 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민주화로부터 시작된 사이클에 지금 보다  더 빨리 봉착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정부나 제도권에 진출했던 하지 않았던 운동권인사들, 지난날 운동의 경험을 갖는 진보파, 또는 개혁파, 또는 개혁적인 지식인전문가들은 헤게모니에 대응하여 어떤 정치적 힘의 중심을 건설하는 문제에 실패했고, 제도권내 세력들과 구분되는 어떤 비전이나, 프로그람을 발전시키지도 못했다. 운동, 개혁, 진보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민중참여의 정치적 실천은 자각된 대중의 전위부대가 운동을 통해 외부로부터 자극을 불어넣는 방법으로서 보다는, 민중들 스스로가 일상적 정치과정 내부에서 이를 실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자극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 그 힘들을 조직하여 새로운 힘을 창출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제 권력의 작동과 민주주의의 제도와 작동원리를 학습하고 실천하는  노력이 개인적으로 또 집합적으로 요구된다.

4) 오늘의 현실에서 운동으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해결의 방법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운동에 헌신하고 참여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과거 민주화시기보다 더 큰 운동가 개인의 자기희생과 실존적 문제가 제기된다. 말할 것도 없이 운동은 투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지금 운동은, 과거 민주화운동 시기에서와 같이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정치적 조건, 삶의 환경을 부정의하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닌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상적인 정치와 전 사회를 개혁의 대상으로 설정할 때 운동가는 그에 대응하는 이념과 가치, 규범과 신념을 스스로 다짐하고 단련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운동은 피할 수 없이 사회에 대해 갈등적이 되고, 이념적이 되며, 또 이러한 운동가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는 사회를 향하여 어떤 효과를 갖기 이전에 자신 스스로에 대해 엄청난 압력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보만이 말하듯이, 민주주의는 개인생활의 삶의 조건과 공적 과업을 일상성속에서 결합하는 것을 통하여 실현되어야 하고, 그러한 태도와 실천을 지향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오늘의 일상적 조건에서 운동가는 사적 생활과 공적 대의를 위한 행위간의 커다란 괴리와 양자 간의 긴장으로 고통받게 된다. 이것은 그의 행위가 사회를 개선하기 이전에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그 자신의 삶, 개인적 행복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킨다.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요구를 스스로 강하게 설정할수록, 강한 이념을 스스로 발견해야 하고, 이념과 가치로 행위를 정당화해야 하기 때문에 개혁된 사회의 모습과 비전은 더 이상주의적이 될 수밖에 없다. 본 발표자는 앞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변화의 다이나믹스를 열망-실망의 사이클로 특징지었다. 많은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 가능했던 운동이 전망하는 개혁이후 사회에 대한 열망은 클 수밖에 없고, 민주주의의 현실은 이를 감당할 수 없는 격차를 느끼도록 하고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을 초래하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거의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일반법칙과 같은 것이다. 운동을 통한 사회에 대한 이상주의적  비전은 먼저 운동가를 스스로에 대해 소외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은 반대로 행위의 결과가 만들어낸 실망에 대한 자기환멸을 만들 것임이 또한 분명하다. 이것은 스스로뿐만 아니라, 그 자신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많은 대중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거리감을 갖도록 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자기소외는 그의 사고와 행위가 지향하는 이상적으로 민주화된 사회의 모습과 비전은 실제의 사회에서 현존하는 공적생활과 가치와도 충돌하면서 공적으로도 소외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곧 허무주의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정치권과 운동권, 그리고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어있는 허무주의는 우리사회의 병리적 정신상황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원인들은 여러 연원을 갖겠지만, 운동에 의한 민주화와 그것이 가져온 실망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사회심리적 현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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