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화성 남자…’ 저자 존 그레이 VS. 배유정 이대교수

 

[조선 인터뷰] ˝남편이여, 하루 20분씩 아내말을 들

어라˝

‘화성 남자…’ 저자 존 그레이 VS. 배유정 이대교수
˝남편을 너무 몰아붙이는 건 심장에 총질하는 것과 같아˝

도대체 남자와 여자는 왜 끊임없이 싸울까. “당신과 결혼하지 못하면 죽어도 좋아!” 외치던 열정은 어디로 가고 서로 티격태격하게 될까.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이 질문에 대해 누구도 명쾌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던 중 1992년 미국에서 출간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충격 그 자체였다. 남자와 여자는 ‘인종’이 다른 것도 아니고, 아예 출신 행성이 다르다니? 싸우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놀라운 건 이 도깨비 같은 책이 이후 4천만 부나 팔렸다는 사실이다.

그 저자 존 그레이(55)가 한국에 왔다. 21일 서울 코엑스, 22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그의 특별 강연에는 2000여명이 몰려와 성황을 이뤘다. 연극배우이자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인 배유정(42)씨가 그레이 박사를 만났다. 배 교수는 “일과 연애문제로 머리가 지끈지끈했던 30대 중반 ‘화성 남자 금성 여자’를 읽고 맛본 쾌감이 아직 생생하다”고 말했다.

▲ 21일 서울에 온 존 그레이 박사가 배유정 교수와 인터뷰하고 있다. 배 교수가 “남자들은 왜 그렇게 게으른가?”라고 묻자 박사는“여자를 위해 요리를 하고 그녀의 말을 잠시 들어주는 작은 노력들이 얼마나 큰 효과를 불러오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허영한기자 younghan@chosun.com
▲배유정(이하 배)=‘화성에서 온 남자…’는 지난 10여년 한국의 20·30대 여성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의 최초 아이디어는 어디서 왔나.

▲존 그레이(이하 존)=1980년대만해도 부부관계 상담의 전제는 ‘남녀가 동등하다’는 것이었다. ‘남녀가 다르다’고 하면 차별주의자로 오해받았다. 그런데 정작 해결되는 문제는 많지 않았다. 나는 ‘남녀는 다르다’는 전제로 해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제를 안고 살던 수많은 커플이 사랑을 되찾았다. 남녀의 권리는 동등하지만, 생리적 차이와 행동 양식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배=당신이 말하는 ‘남녀의 차이’를 한마디로 설명해달라.

▲존=함께 영화를 본 뒤 여자가 “정말 좋았어”라고 말하면 남자는 마치 자신이 감독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내가 이 여자를 행복하게 했다’는 성취감 때문이다. 반면 출장에서 돌아온 남자가 “아, 이번 출장 정말 좋았어”라고 말하면 여자는 자기가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혼자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결코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보여줘야 한다. 꽃 한 다발을 주는 것보다 한 송이씩 매일 주는 것이다. 반대로 여자는 남자를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돈이 다인 줄 알아? 나한테는 관심도 없지”라는 말은 남자의 심장에 총질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배=현재 한국의 이혼율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젊은 여성들은 결혼하려 하지 않는다. 결혼하고 아이 낳아봤자 여자만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존=여성들이 부부관계에 불만을 갖게 되는 큰 요인 중 하나가 남편이 가사 분담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다. 만일 남편이 설거지도 해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청소까지 해주면 과연 당신은 행복해질 것 같은가?

▲배=당연하다.

▲존=스웨덴 남자들은 세계에서 집안일과 육아를 가장 열심히 하는 남자들이다. 그런데 스웨덴의 이혼율도 최고 수준이다. 왜? 남자의 가사 분담이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해법은 로맨스다. 여성은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아야만 여성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되고 그것이 스트레스를 완전히 풀어준다.

▲배=여자가 사랑에 목숨 거는 존재란 말인가?

▲존=최근 남녀 간의 생리적 차이를 조사한 연구가 나왔다. 남성의 스트레스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돼야 낮아진다. 이 호르몬은 뭔가를 성취했을 때 분비된다. 여성의 스트레스 해소제는 옥시토신인데, 이건 성취감이 아니라 로맨스를 느낄 때 분비된다. 여성들이 멜로 드라마를 넋 놓고 바라보는 풍경을 어느 나라 안방에서든 볼 수 있지 않은가.

▲배=남자는 낭만적인 분위기만 열심히 만들면 여자를 실컷 부려먹을 수 있겠다.

▲존=나는 남자들에게 일주일에 하루를 ‘로맨스의 날’로 정해서 그날만은 아내를 결혼 전 연애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라고 충고한다. 그러면 아내들의 잔소리가 멈추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콧노래가 흘러나오게 만들 수 있다.

▲배=여자들이 그렇게 순진무구하지만은 않다.

▲존=물론 남자가 더 노력해야 한다. 로맨스의 비결은 ‘마법의 20분’이다. 신은 남자에게 100단어를 내렸지만, 여자에게는 수천 단어를 내렸다. 남녀의 대화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단 20분만 대화하라. 마법이 일어날 것이다.

▲배=당신의 부부생활이 궁금하다.

▲존=완전하진 않지만 우리는 여전히 부부생활이 왕성한 연인이자 친구다.

▲배=한국의 몇몇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부부관계가 전혀 없이 부부로서의 삶을 지속하는 커플들이 상당수다.

▲존=1주일에 적어도 3번은 해야 하는데(웃음)? 섹스리스 커플은 섹스 자체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무드가 생겨도 표현하지 않고, 그게 오해를 부르는 거다. 그럴 땐 양초·편지 같은‘사랑의 상징물’을 활용해라. 말의 위험성을 최소화하면서 열정의 불을 붙여준다.

▲배=우리는 학교에서는 이런 남녀관계를 배우지 못한다. 실전에 돌입, 싸우고 부닥치다가 패잔병이 되기 십상이다. 당신은 세 딸들을 어떻게 교육시켰는가.

▲존=남녀관계는 말로 가르치는 게 아니다. 자녀를 위해 아름다운 남녀관계가 무엇인지 보여주려면 스스로 배우자를 존중하고 아끼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보다 쉽고 이상적인 방법이 또 있겠는가.



존 그레이는 누구

아내, 세 명의 딸을 포함해 4명의 ‘금성인’과 함께 살고 있는 ‘화성인’이다. 고교 시절 선(禪)과 명상, 요가에 심취했던 그는 미국 컬럼비아 퍼시픽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6년째 남녀관계를 상담하고 있다. 그를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발돋움시킨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1992년 출간)는 150여개 국에서 팔리며 남녀관계서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화성·금성 카운슬링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을 돌며 대중 강연을 하고 있다.

정리=김윤덕기자 sion@chosun.com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루살이 2006-09-24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이를 인식하고,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 그런데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면? 화성인이 금성을 정복하려 한다거나 금성인이 화성을 정복하려 한다면?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배유정의 질문이 날카롭군요. 아무래도 경험치에서 나온 예리함이 아닐까요. 핵심을 향해 질문하는 것.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전출처 : stella.K > [퍼온글] 중국계 프랑스 작가, 샨사

오늘자 조간신문들의 문학란은 대부분 중국계 프랑스 작가 샨사의 방한기사로 채워져 있다.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방한소식을 기사를 통해 처음 접하고 나는 두번 놀랐다. 나이가 나보다 많이 어리다는 사실에 한번 놀라고, 그럼에도 외모는 나이가 더 들어보인다는 사실에 한번 더 놀랐다. '놀랐다'고 적었지만 그냥 '의외였다'고 해야 맞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의외인 것은 이 '중국 여성'이 불어를 배운 지 4년만에 쓰기 시작한 소설들로 프랑스 문단을 뒤흔들고 있다는 사실. 이게 사실은 가장 '놀라운' 일이다! 비록 당분간은 그녀의 소설을 읽을 일이 없을 듯하지만, 안면 정도는 터둔다는 의미에서 관련기사 몇 편을 옮겨둔다(일부 중복되는 내용은 조정했다).   

세계일보(06. 07. 03) "천안문 사태가 내 인생 전환점"

-감각적인 문체와 진중한 서사로 국내에도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한 중국계 프랑스 작가 샨사(34·사진)가 지난 1일 ‘현대문학’ 초청으로 방한했다. 1972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나 천안문사태를 겪은 후 17세에 파리로 건너가 불어를 배운 지 불과 4년 만에 불어 소설을 집필, <천안문> <바둑 두는 여자> <측천무후> 등을 잇달아 펴내면서 프랑스 고교생들이 선정하는 ‘공쿠르 데 리세앙’상 수상을 비롯해 뜨거운 호응을 얻어낸 작가. 입국 당일 기자와 만난 작가는 일본에서 다양한 매체와 인터뷰를 하고 난 직후여서인지 다소 피로한 듯했지만 맑은 눈동자에 빛나는 투지를 담고 있었다.

 

 

 



―불어로 쓴 첫 소설이 <천안문>인데, 천안문사태는 당신에게 어떤 경험이었나?

당시 고교생이었기에 적극적으로 낄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시위대에게 물을 가져다 주고 여러 가지 물품을 공급하는 정도의 일은 했다. 나는 그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건너갔는데,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는 파리지앵들을 보면서 비극적인 사태로 인한 심리적 내상까지 지니고 있던 나는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듯한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도 천안문사태를 매체를 통해 접했겠지만 고통이란 공유되기 힘든 것이었다.”

―왜 중국어가 아닌 불어로 소설을 썼는가.

“프랑스에 가기 전까지 따로 불어를 배운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는 걸 좋아한다. 틀리건 맞건 간에 ‘쓰겠다’는 용기를 냈던 게 주효했던 것 같다.”

―독자들이 당신 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는?

좋은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다른 인터뷰에서도 드러나지만 그녀의 자신감과 도도함은 하늘을 찌른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이란 자기 만족을 위한 에고이스트 소설이 아니라, 보편적인 주제를 통해 감동과 함께 작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공유하는 소설이다. 내 소설은 공간이 특별하고 오감을 건드리는 심포닉한 불어를 쓰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당신 소설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배경은?

내 소설은 꿈꾸게 하는 소설과 공포나 잔인함, 생의 막다른 골목을 드러내는 소설로 나뉜다. <측천무후>나 <버드나무의 네 번째 삶>이 전자이고, <바둑 두는 여자> <천안문> <음모자들>이 후자일 것이다. 이 두 부류의 작품들을 번갈아 쓰면서 내 안의 균형을 유지하는 편이다.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흔히 성공한 여자들을 ‘악마’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런 여자들이야말로 ‘불꽃 위를 나는 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불꽃을 건너 날아가는 새다.”

-그림도 병행하고 있는 샨사는 소설을 쓸 때는 하루에 15시간씩 매달리며 수도자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단문을 전략적으로 구사하는 그는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해 단칼에 문장을 요리하는 스타일을 선호한다. 단어를 사람처럼 대한다는 그는 “단어마다 각기 다른 기질과 관능이 배어 있는데 주방장이 향신료를 적절히 활용해 좋은 요리를 만들어내듯 내가 애정을 가지는 그 단어들로 소설을 완성해낸다”고 말한다.

-프랑스에서 한국인들도 많이 접했다는 샨사는 “한국인은 다이내믹하고 창의적인 민족 같다”며 “한국영화는 셀 수도 없이 많이 봐서 제목조차 기억 못할 정도”라고 한국과의 친연성을 드러냈다. 한국에서는 낭송회(4일 오후 7시 교보문고 잠실점)와 사인회(5일 오후 3시 교보문고 광화문점)를 비롯해 각종 매체와의 바쁜 인터뷰 스케줄로 꽉 차 있다. 1주일 후에는 부모가 사는 베이징으로 날아가 영화 계약을 해야 한다. 이렇게 바쁜 생활 속에서 사랑은 언제 하나.(*소설은 언제 쓰나, 라고 질문했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우리 각자의 가장 훌륭한 부분, 서로 만나기로 되어 있는 두 존재의 완전한 융합입니다. 그러나 삶은 그 존재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랑은 짧은 순간들 속에서만 존재합니다.”(글·사진 조용호 기자)

동아일보(06. 07. 03) "‘베이징의 별’…중국계 프랑스인 작가 샨사 내한"

-소녀는 작가가 되리라는 걸 알았다. 여덟 살 때 시를 쓰기 시작해 10대 시절 이미 세 권의 시집을 냈고 ‘베이징의 별’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베이징대 진학을 앞둔 17세에 소녀는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맞는다. 도저히 공부할 상황이 아님을 알고는 프랑스행을 결심했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얀니(閻c)라는 원래의 이름 대신 샨사(山颯)라는 이름을 쓰기로 한다. 아들을 낳으면 이름에 ‘사(颯·바람소리를 뜻함)’를 쓰려고 했다는 아버지의 얘기를 일찍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국계 프랑스인 소설가 샨사(34)가 1일 처음 내한했다. 국내에선 2002년 소설 <바둑 두는 여자>가 처음 소개된 뒤 대표작 <측천무후> 한 종만 8만 부가 팔린 인기작가다. <바둑 두는 여자>는 고등학생들이 가장 읽고 싶은 책으로 뽑혀 공쿠르 데 리세앙 상을 받았으며 <측천무후>는 프랑스 출판사 두 곳이 판권을 놓고 법정 분쟁까지 벌였다.

-놀라운 것은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는 사실. 그랬던 그가 파리 생활 7년 만인 1997년 프랑스어로 쓴 첫 소설 <천안문의 여자>를 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창작을 감행한 이유를 묻자 샨사는 “나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 희열을 느낀다”고 답했다.

-샨사 소설의 문체는 아름답지만 단문으로 쓰여 속도감 있게 읽힌다. 그는 “(소설을 쓸 때) 사전 속 단어를 찾아보면서 ‘언어의 관능’을 느낀다”고 했다. 단어를 정교하게 직조하되 “단칼에 치듯” 문장을 쓴다고도 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여성이지만 전쟁, 음모 같은 남성적인 주제를 다룬다. 샨사는 “권력, 두뇌의 힘, 사상의 대립과 충돌을 지켜보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프랑스로 귀화한 그는 “서양인, 동양인 중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나”라는 물음에 “나는 중국이 벼려내고 서양의 불 속에 담금질된 칼”이라고 답했다.



-순식간에 스타덤에 오른 만큼 질시도 따랐다. 공쿠르상 등 각종 문학상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심사위원들에게 ‘샨사는 중국 스파이’라는 투서가 잇따랐을 정도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얘길 들려줬지만 이내 “거기서 소설 <음모자들>의 모티브를 얻었다”며 웃었다(<음모자들>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중국 스파이와 미국 CIA 요원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그는 아침마다 태극권으로 몸을 단련하고 서예를 하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창작에 매진할 때면 하루 15시간씩 소설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그는 개인전을 수차례 연 화가이기도 하다). 일하느라 바빠 연애할 시간이 없다면서도 샨사는 “사랑은 운명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지만 <형사> <태극기 휘날리며> 등 한국 영화를 많이 봤으며 임권택 감독을 좋아한다고 했다. 수년 전 임 감독 등 한국 영화 제작진과 우연히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한 적이 있는데 ‘보드카 폭탄주’를 만드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며 웃었다.(김지영 기자)

한국일보(06. 07. 03) 中 태생 佛작가 샨사 방한 "동서고금 아우른 세계문학 추구"

-"단어는 하나하나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저는 그 영혼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 존경과 사랑이 단어와 저를 매개합니다." 중국 태생의 프랑스 작가 샨사(34)는 앙가슴이 드러나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리 크지않은 키에 둥근 몽골리언 골격, 서글서글한 눈매와 푸근한 웃음은 그의 문장이 지닌 섬세한 힘과 언뜻 조화되지 않는 듯했지만, 소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대목에 이르자 측천무후의 위의(威儀)처럼 도도하고 당당했다.

-베이징에서 나서 문학 신동이라 불리며 8살 때부터 시를 썼고, 18살에 프랑스 정부 장학금으로 파리 유학, 7년 만에 불어로 장편소설 <천안문의 여자>(원제 <천안문>)를 써낸 작가. 이후 <바둑 두는 여자> <측천무후'>등 그의 작품은 발표될 때마다 프랑스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고, 미국과 일본에도 번역 출간됐다. 이번 한국 방문은 책 출간 홍보와 <측천무후> 등의 영화 제작 협의차 중국과 일본을 들르는 김에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저는 완벽주의자예요. 문장이 마음에 안 들면 10번이고 20번이고 고쳐 씁니다." 그 노력이 2차 언어로 직조한 그의 문학을 토종 프랑스문학에 꿀리지 않게 한(때로는 압도하게 한) 힘일 것이다.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유러피언의 산문은 복싱입니다. 그만큼 몸과 발과 팔동작이 복잡하다는 의미지요. 반면 저의 글은 검도예요. 머뭇거림 없이 단칼에 내려치는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문학이 지닌 장점을 "독창적인 문장과 강렬한(강력한) 인물 설정, 그리고 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현실을 벗어나게 하는 묘사의 힘"이라고 말했다.

-부모는 중국에 있고 매년 한두 차례 고향을 방문한다. 6년 전 중국 국적을 포기하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지만 그의 소설은 다분히 중국적이다. 작품 소재로서의 역사가 그러하고, 문화적 맥락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는 "나의 문학은 세계 문학"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9월쯤 출간될 신작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는 중국 역사와 무관한 작품이죠. 전 보편적인 문학을 추구합니다." 그는 근작의 내용을 잠깐 소개했다.

-"스키타이 일족 가운데 여전사 부족이 있었고, 그 부족 여왕과 알렉산더가 만났다는 기록이 그리스 문헌에 등장합니다. 물론 사료적 근거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그 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알렉산더를 선택했냐는 질문에, 사뭇 진지하게 "알렉산더가 나를 택한 것"이라고 말할 만큼 당당한 이 작가는 독자사인회와 인터뷰 등 일정을 마친 뒤 7일 출국한다.(최윤필기자)

06. 07. 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물만두 > [퍼온글]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을 말한다.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을 말한다.

글 : 자유기고가 김우진


드라마와 영화를 앞세운 한류가 동아시아를 휩쓸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뉴스거리도 못 될 만큼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출판 시장에서는 여전히 '일류(日流)'가 무시하지 못할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일본 소설은 트렌디한 러브 스토리나 젊은 감각의 신변소설을 내세워 독자들의 손길을 꾸준히 유혹한다. 하지만 장기적인 잠재력을 가진 일본 소설 분야로는 역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미스터리 장르를 관통하는 두 가지 코드는 '환상'과 '현실'이다. 환상이라는 말만 듣고 섣부르게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해리 포터 류의 판타지를 연상해서는 안된다. 이 '환상'이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이고도 낭만적인 추리를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아직도 수많은 일본 작가들이 동경을 담아 재생산해 내고 있는 장르이며, '본격파'라는 이름으로 미스터리의 본류이자 정수로 추앙받고 있는 분파이기도 하다.

'본격'이란 본디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논리와 진실을 밝히는 과정 자체에 집중한다는 의미다. 본격 미스터리를 표방한 소설 중에서도 무수한 변종과 시도를 찾아볼 수 있지만, 한결같은 특징은 주인공 탐정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인물로 일본 추리 소설계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를 빼놓을 수 없다. 이름 자체가 애드거 앨런 포에 대한 오마주인 그는 시조, 효시라는 명성과는 안 어울리게도 아웃사이더적인 시선과 기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그가 창조한 일본의 대표적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는 호방하고 소탈한 성품의 소유자지만, 그가 맡은 사건에는 언제나 음습하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최근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인 교고쿠 나쓰히코는 일본 미스터리 전통의 계승자라고 할 만하다. <백귀야행>,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 등을 차례로 히트시키며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 그는 이제 갓 마흔을 넘긴 젊은 작가다. 특히 <우부메의 여름>은 냉철한 회의론자 탐정 교고쿠와 요괴와 악령이 출몰하는 기이한 스토리를 결합시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요괴 소설의 일인자에서 환상 미스터리 작가로 자리매김을 했다.

일본 미스터리는 이처럼 기묘한 환상의 세계예 속한 동시에 냉엄하고도 굳건한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도 하다. 1950년대 후반 마쓰모토 세이초로 시작되어 모미무라 세이이치가 확고한 위치를 다진 일군의 '사회파' 소설들이 대표적인 예다.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해서 반드시 사회 문제나 시사적인 소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본격 추리'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낭만적이거나 환상적인 작품을 지양하고 냉정한 필치로 개연성 있는 사건을 다루는 미스터리의 새 경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점과 선>, <모래그릇>등 마쓰모토 세이초의 이름을 널리 알린 대작들은 부패, 불륜, 비리와 같은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여과 없이 드러낸 혁신적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뒤이어 1970년대를 풍미한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세속적인 욕망에 물든 인간 군상의 명멸을 그리는 데 능해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손꼽혔다. 특유의 노골적인 묘사와 이분법적인 시각, 정형적인 인물들은 이제 통속적인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전형이 되었지만 말이다.

현대의 일본 미스터리 소설은 현실에 기반한 내용을 다루더라도 더이상 사회파란 이름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대신 (SF적 요소를 포함한) 과학과 사회학, 심리학적 요소들을 접목한 '이과적'인 미스터리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앞서의 낭만적 본격 소설들이 '문과적'인 면을 가진 것과는 뚜렷이 대비되는 특성이다.

이과적이라고 해서 모든 작품이 방대한 설정과 과학적 지식을 담아내는 마이클 클라이튼식 소설인 것은 아니다. 단지 문과적인 과거 소설들에 비하여 소재와 시각의 저변을 넓혀 미스터리의 외양을 확장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예컨대 오늘의 유명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기리노 나쓰오는 '여성', 히가시노 게이고는 '인간', 기시 유스케는 '공포', 이사카 코다로는 '죽음' 등으로, 각각의 분야를 특화하여 삶 속의 미스터리를 해부해 나가는 전공의에 비유할 수 있겠다. 소설적 재미와 함께 몰랐던 지식을 알아 가는 즐거움까지 만족시켜 주는 이들은 지금도 나날이 새로운 변신을 통해 독자들을 놀라게 할 준비에 힘쓰는 중이다.

환상과 현실. 이것은 일본 추리소설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들 삶을 떠받치는 두 중심축이기도 하다. 인간은 현실에 발을 디딘 채 머리로는 끝없이 환상을 꿈꾼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 바라볼 수도 없고, 하염없이 하늘만 동경할 수도 없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일본 미스터리는 우리가 둘 중 어느 한쪽을 소홀히 할세라, 여기에 다른 한 쪽도 존재한다는 것을 수시로 일깨워준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기이도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디지털카메라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멋진 풍경사진을 찍어 보려고 노력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몇 번 찍다 보면 풍경사진을 찍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풍경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을까.

누리꾼들 사이에 ‘풍경사진의 달인’으로 널리 알려진 사진작가 박동철(38) 씨에게 그 비법을 들어봤다. 그동안 자신의 홈페이지(cheori.com)를 통해 작품을 발표해 온 박 씨는 최근 ‘여행이 즐거워지는 사진 찍기’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황금분할
1. 황금분할로 구성하라.

예부터 가장 아름답고 안정된 구도로 여겨지던 것이 바로 황금분할이다. 이는 한 개의 선을 a와 b로 분할(a>b)할 때 b : a = a : (a+b)가 되도록 분할하는 것을 뜻하는데, 대략 3 : 2 정도다. 조각이나 건축에는 이 황금비율이 자주 사용된다. 사진에서도 필름이나 인화지 등이 황금비를 따르고 있다.

황금비는 사진 찍을 때도 적용할 수 있다. 프레임 속의 화면 분포를 대략 1/3씩이 되도록 구성하는 것이다. 즉 가로로 3등분, 세로로 3등분이 되는 직선을 그어 그 선과 점이 있는 위치에 주 피사체, 부 피사체, 수평선 등을 배치해야 한다.

위 사진을 보면 황금분할이 된 사진과 그렇지 않은 사진의 차이점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황금분할이 된 사진이 훨씬 더 안정감이 있게 느껴진다.

구도와 위치
2. 좋은 각도를 잡은 뒤 최대한 접근하라.

사진을 찍기 전에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피사체의 특징을 알아내는 것이다. 특징을 파악한 뒤에는 그 특징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줄 수 있는 구도를 잡는다. 구도를 잡은 뒤에는 피사체를 적절한 각도와 위치로 이동시킨다.

적절한 각도로 피사체를 이동시킨 뒤에야 감상하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한 사진이 나온다. 피사체가 사물이라 움직일 수 없다면 촬영자가 움직여야 한다.

인상적인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좋은 위치를 잡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주제에 최대한 접근해 가까이서 찍는 것도 주제를 돋보이게 한다. 위가 좋은 예다. 위 사진은 평범한 위치에서 촬영한 것이지만 아래 사진은 구도를 잡은 뒤 최대한 접근해서 찍은 사진이다.
 
조연 찾기
3. 주연을 빛나게 할 조연을 찾아라.

주가 되는 피사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나면 그 주인공을 보조해줄 조연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커다란 태양을 강조하고 싶어 초망원 렌즈를 가지고 태양을 찍었지만 태양의 크기를 가늠해줄 다른 보조 피사체가 없다면 보기에 심심한 사진이 될 수밖에 없다.

꽃 사진 역시 마찬가지다. 꽃만 접사로 크게 확대하여 찍는 것보다는 나비가 날아와서 앉았을 때 촬영하는 것이 더욱 눈길을 끈다. 위 사진을 봐도, 태양만 있는 사진보다 배가 등장하는 사진이 더욱 인상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경
4. 전경을 채워라.

아웃 포커싱(Out of Focusing)이란 앞쪽에 초점을 맞춘 피사체만 선명하게 하고 뒤쪽 배경을 흐리게 해서 원근감을 나타내는 기법이다. 반대로 앞쪽을 흐리게 하고 뒤쪽을 선명하게 하는 것을 인 포커싱(In Focusing)이라고 한다.

풍경을 찍을 때는 사진 전체가 선명하게(Pan Focusing) 나오도록 하는 것이 좋다. 원근감을 나타내려면 프레임 전체에 전경, 중경, 원경을 구별해서 피사체를 배치하는 것이 좋다.

특히 화면 앞쪽에 무언가를 채워서 멀고 가까움을 표시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위 사진을 보면 늪 사진을 찍었을 때 앞쪽에 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앞쪽에 무언가를 배치하면 원근감과 입체감이 살아난다는 것을 명심하자.
 
역광
5. 역광으로 사물을 관찰하라.

사진의 ‘정석’은 피사체가 해를 바라보는 상태(순광)에서 찍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순광으로 사진을 찍으면 피사체의 형상이 깨끗하고 정확하게 나온다. 그러나 음영에 의한 질감이나 입체감이 없기 때문에 평면적인 사진이 나온다.

질감과 입체감을 잘 나타내려면 순광으로 형태를 잘 나타내고 후광(뒤에서 비추는 광선)을 비춰서 피사체의 윤곽이 살아나게 해야 한다. 또 사광(비껴 비추는 광선)으로 입체감을 살리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태양에 의존해 사진을 찍어야 하는 상황에서 여러 각도의 빛을 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때문에 생각을 바꿔 역광으로 피사체를 찍어보면 예상치 않게 아름다운 사진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역광으로 찍을 때는 강렬한 태양빛으로 인한 플레어나 고스트(눈으로 봤을 때는 없었던 테두리가 나타나거나 도깨비불과 같은 동그란 모양의 빛이 촬영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 사진들은 거의 동일한 시간에 촬영한 것이지만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위 사진은 편광필터를 장착하고 순광으로, 아래 사진은 역광으로 촬영했다.

박 씨는 이 같은 방식들은 비싼 수동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도 위 방식들을 잘 적용한다면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 씨는 이어 “사진을 찍으려고 피사체를 보다 보면 어색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도 인위적으로 풀을 뽑거나 돌을 치워 화면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며 “자연은 원래 모습 그대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풍경사진을 잘 찍는 첫 걸음”이라고 덧붙였다.

내용출처 : [기타] http://blog.empas.com/wisdom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화보기가 아니라 읽기가 얼마나 가능한지를 알 수 있을듯 하여, <씨네 21> 기사 긁어왔습니다. 나의 무의식적 행동도 그 저변에 깔린 양식이 숨어져 있으며, 그것을 해석하는 능력이 바로 평론가와 같은 집단이라는 것, 그리고 그 해석이 행동의 변화, 또는 사고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그 소기의 목적을 다한 것이라고도 보여집니다. 인상비평에 그치지 않고, 그 속사정까지 파헤치는 작업이 갖는 재미를 이 글이 잘 보여주고 있는것 같아 재미있었습니다.

 

<씨네21> 549호 이종도 기자의 반론 덕분에 지면관계상 충분히 설명치 못한 내용을, 재반론의 기회를 통해 설명할 수 있게 된 데 감사한다. 아울러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의 이름을 신성시하는 지식인 남성의 반론으로 말미암아, <달콤, 살벌한 연인>과 나의 ‘읽기’가 얼마나 남성 중심주의와 지식인의 자의식을 건드리는지 저절로 입증된 듯하여 기쁘다.

1.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어린 그녀는 “남성 중심 성관계를 역이용하는 영리한 여자”가 아니다. 남자친구는 그녀를 놓고, “한번 하게 해주겠다”며, 가방모찌와 동생을 싸움 붙이고, 동생이 우세하자 “1학년한테도 지냐?”라 한다. 남자친구는 그녀의 포주 역할을 하면서, 남자들을 줄세우기한다. 그녀도 그것을 알면서 은근히 즐긴다. “네가 이겼다며?”란 말은, 슬쩍 상대의 우위를 승인해주며 ‘사실 난 너랑 하고 싶다’는 말을 건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관계 속에서 꼬리를 치든 말든, 그건 ‘이미 분배된 뒤 교환되는’ 정도의 문제이다. 남자친구의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동침은 언제나 그의 권력의 장 안에서 훤하게 드러난다(“했냐?”). 영리한 여자는 그런 관계를 즐기지 않는다.

2. <달콤, 살벌한 연인>의 그녀는 연애에 바람직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어렵게 데이트를 청하는 소심남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흔쾌히 수락하고, 연락처를 주고받는다. 자신의 말에 집중하지 않는 것과 반말하는 것, 혼자서 즐거웠다 선언하는 것에 단호하게 “노”라 말한다. 남자가 자신을 무시하고 의심하는 것 같자, 과단성있게 철수한다. 그녀가 살인자로 도피하는 것이 ‘자기 긍정’이 아니라, 살인자로 도피 중임에도 적극적으로 행복해지고자 하며, 내숭과 집착이 없는 솔직담백한 연애의 태도를 지닌 것을 ‘자기 긍정’으로 보았다.

3. 이종도가 “본명도 사연도 다 숨기고 오로지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책임감이 없다”고 평한 그녀를 영화와 황대우는 ‘용서’한다. 왜? 사랑하니까. 이 영화의 재밌는 점은 로맨틱코미디의 외피 속에 연애의 ‘살벌’함을 담아냈다는 것이다. 연애의 시작은 언제나 달콤하다. 그러나 상대를 알아갈수록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상처받는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그 진실이 영화에선 강도 높게 살인이다(“사람만 안 죽였으면 돼”). 그러나 이는 정도의 문제일 뿐 투명한 연애는 없다. 하지만 사랑이 시험대에 오르는 고비들을 넘어 상대를 어렵게 이해하게 되면서, 기존의 잣대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달콤…>은 소심한 지식인 남자가 살인자 여자를 만나 엄청나게 자아가 부서지는 영화이다. ‘혈액형 설’의 계보학을 읊던 그가 “A형이라서 그래”라 말할 때, 그는 이전의 그와 같다고 볼 수 없다. 사랑은 그의 인식체계와 가치관을 (부분적이나마) 바꾼다. 본명과 사연을 몰라도 그들이 사랑한 게 모두 거짓이었을까?

4. 살인자가 되는 전 과정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렸다’고 말할 수 없고, 대사로 처리되는 사연들은 영화적 사실이 아니며, <달콤…>에서 살인자 설정은 “미미한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이종도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그녀의 네번의 살인이 “짤막한 전언과 누가 현장에 있더라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정당방위의 순간이 전부”라는 말로 요약되지 않는다. 왜 행간을 읽지 않는가? 첫 번째 ‘가정폭력에 의한 정당방위’도 적극적인 법정투쟁을 거쳐야만 인정될 수 있는 유의미한 ‘사건’이다(현재 수감 중인 133명의 남편살해범 중 82.9%가 가정폭력을 경험했지만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두 번째 노인의 죽음도 혐의점을 남기지 않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세 번째, 맥주캔을 던지는 옛 애인(옛 애인이 행패 부리는 장면들은 많다. <파란 대문> <너는 내 운명> 등. 여자는 불행을 내면화하며 항거하지 못하고, 자해를 하거나 도망친다)을 그녀는 죽여버린다. 이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가 현장에 있더라도 똑같은 실수”에 비슷하게라도 맞는 사건은 네 번째인데, 그것도 “누구나”는 아니다. 어찌나 굉장했던지, 그녀를 질시하던 장미도 단번에 꼬리를 내려버린다(“말로 들을 땐 몰랐는데… 어쩜 그렇게 빨라?”). 네번의 살인 중 만만한 것은 한건도 없었다. 그녀가 운이 나빠서 “실수로” 살인을 하게 된 게 아니라, 그녀가 강하기 때문에 넷을 죽이고도 사법체계와 계동이, 장미, 변호사 등 앞길을 방해하는 이들을 제압하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녀는 살인의 과정에서 점점 능력이 많아진다. 첫 번째는 우발적인 살인을 하고 사체유기도 하지 않은 채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두 번째는 살인을 위장하고 기소받지 않는다. 세 번째는 남의 차와 힘을 빌려 사체유기도 감행한다. 네 번째는 부하를 만들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사체를 유기한다. 그녀의 실력이 점점 느는 이유는 누구를 만나든 꼭 뭔가를 배우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말하는 그녀에게 책은 책만이 아니라, 사람도 포함된다. 계동에게선 땅파는 법을, ‘가방끈’에게선 <죄와 벌>을 배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주목하고픈 ‘자기 긍정’이다. 이종도가 그녀의 살인이 풍문이거나 정당방위 혹은 실수에 불과하다며 애써 그녀의 죄목을 축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가 넘어선 금기를 차마 인정할 수 없기 때문 아닌가?

5.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나 죄의식없는 살인은 트렌디한 장르적 실천으로 보는 게 온당하다”는 말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과연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나 죄의식없는 살인이 트렌드가 되느냐’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마초이즘과 순결이데올로기가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가 트렌드가 되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창작자와 관객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각성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이를 우리 시대의 트렌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잘 드러난 작품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죄의식없는 살인’이 아직 트렌드인지는 모르겠다. <친절한 금자씨> <오로라 공주> <6월의 일기> 모두 죄의식이 넘치는 살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장차 트렌드를 선도하는 영화가 되리란 예감은 든다.

6. <몬스터>가 “그녀를 하소연이나 늘어놓는 멍청하고 추한 몬스터로 그렸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에일린 워노스의 실제 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공판기록만큼도 그녀를 변호하지 못한다. 김경욱의 지적처럼(<씨네21> 460호 ‘멜로드라마의 틀로 포획된 괴물’) 그녀는 현실적인 판단능력을 상실한 여자로 그려져 있다. 연쇄살인범을 옹호하려니 살인을 정당화해야 하는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멜로드라마로 도망친 결과 (착취-피착취의) 기괴한 레즈비언 커플만 남았다. 대사로는 그녀를 이해해달라 말하면서도, 화면으로는 그녀를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태로 내모는 역설의 영화가 된 것이다. 성판매여성으로 7명의 남자를 죽이고, 남자들의 성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킨 정당방위였다는 주장을 펴는 그녀에게 법정은 ‘그녀가 창녀이기 때문에 성폭행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녀의 무죄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법적 논리는 ‘그녀가 성판매여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성구매남성들의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많았다’가 되어야 한다. 성판매자의 영업행위와 성폭력을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가 영업행위를 빌미로 남자들을 유인해서 죽였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의 부당함을 고발했어야 옳다. 그러나 영화는 쟁점을 놓치고, 신파와 멜로 사이를 헤맸다.

7. <망종>은 아주 훌륭한 영화라 생각한다. ‘너무 유별나다’는 말도 맞다. 몇년에 하나 나올까 한 걸작이기 때문이다. <복수의 립스틱> <성냥공장 소녀>는 과문한 탓에 보지 못했지만, 이종도의 식견으로 보건대 필적할 만한 걸작일 것이다(나도 걸작 여성살인자 영화 한편을 추천한다면, <시리얼 맘>을 꼽고 싶다). 그러나 언급한 영화들이 ‘주류’ 상업영화는 아닐 것이다. 내가 여성살인자를 그리는 방식을 유형화한 것은 “트렌디한 장르적 실천”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대중 상업영화에 한한 것이다.

8. “그녀가 살인을 하게 되는 배경도 라스콜리니코프적 상황과 전혀 연관이 없다”는 말이 왜 중요한지 모를 일이다. 영화 속 <죄와 벌>의 인용이 적확하다는 나의 말은, 그녀의 상황이 라스콜라니프적 상황에 합치된다는 뜻이 아니라, ‘관념과 실천의 차이’를 절묘하게 보여준다는 뜻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굉장히 위험한 도덕관념을 지녔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대단할 것도 위험할 것도 없는 인물이다. 19세기엔 그것이 신의 율법에 도전하는 금기의 상상이었지만, 20세기엔 실제로 떡 벌어진 역사이다. 생각이 무서운 게 아니라, 힘, 의지, 조직이 무서운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 뒤후 신열에 시달리다가 죄의식에 자수한다. 그러나 그녀는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가치한 자’의 ‘유가치한 유산’을 잘 쓸 생각이다. 누가 그 관념을 끝까지 실천(체현)했는가? 그녀는 <죄와 벌>을 읽은 사람보다 <죄와 벌>이 제기한 문제의식에 더 가깝다.

9. “그녀가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어지럽히기 위해 다 알고서 저지른 일처럼 과도한 사후 해석”을 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다. 그녀는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의 해체’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다 알고서 저지른 일”이 당연히 아니다. 그녀에게 앎은 사후적이다(반면 황대우에겐 행동이 사후적이다. 데이트 뒤에 “아까… 라 말하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통해 행동할 뿐이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관객(평론가)의 몫이다. <죄와 벌>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니체 역시 알지 못하지만, 니체 책도 꽤나 읽었을 법한 황대우보다 니체적인 정신과 태도에 훨씬 근접해 있다.

10. <달콤…>에서 “신경질적이고 괴팍하고 고고하며 허약한 남자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종도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른바 ‘정상적인’ 독법이요, 특히 지식인 남성관객이라면 자연스럽게 그에게 눈이 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영화읽기의 정답은 아니다. 누군가는 장미나 계동이 캐릭터에 열광할 수도 있다. ‘소수적 읽기’가 가능한 것이다.

언제나 대중 상업영화들 속에서 사회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발언하려는 나의 노력이 어쩌면 “줄없는 줄넘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줄이 있어도 보고자 하지 않는 이에겐 안 보이는 법이요, 설사 줄없는 줄넘기라 할지라도 운동의 효과는 거의 같다(그리고 “니코틴 없는 담배” 등 지젝의 비유는 ‘위험성을 제거한 수용’의 의미로, 그 용법이 틀렸다).

글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