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레이]는 [프레데터]의 프리퀼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의외로 디즈니+에서 만나볼 수 있다.

 

디즈니에서도 19금 액션영화를 만드는 구나. 첫번째 놀라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액션 연출에 두 번 놀라고

그럼에도 여전사의 성장기라는 디즈니적 요소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세번 놀란다. 


[프레이]는 우주선에서 외계 생명체(프레데터) 1명이 스텔스 기능으로 아메리카에 내려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지막 결투에선 함정을 만들고 늪을 활용하며, 재래식 무기로 상대와 겨룬다. 마치 1987년 첫 [프레데터] 영화를 오마주하는 듯 여겨진다. 



다만 달라진 것은 1987년 첫 [프레데터] 영화는 중남미를 배경으로 근육 투성이의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주인공이라면 [프레이는] 아메리카를 배경으로 300년 전 코만치 부족의 소녀전사가 주인공이라는 것이다.즉 외계 생명체 사냥꾼 프레데터를 대적하는 주인공이 근육의 성인 남자에서 원주민 부족의 소녀로 바뀐 것이다. 다분히 디즈니적인 설정이다. 그리고 부족으로부터 아직 어린 여전사이기에 인정받지 못하던 주인공 나루가 주위의 냉대와 시련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치 [뮬란]과 [모아나]처럼 말이다. 


이런 디즈니적 설정을 이해하고 영화의 액션을 즐긴다면 꽤나 즐겁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을 듯하다. 초반 토끼도 사냥하지 못하던 나루가 어떻게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외계 사냥꾼 프레데터를 대적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지 말라는 것이다. ^^;  이런 전제하에 영화를 본다면 곰과의 싸움을 포함해 몇몇 액션 장면이 기억에 남을만큼 잘 연출된 것을 만끽할 수 있을 듯하다. 게다가 중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소중한 사냥감이던 버팔로를 무자비하게 대량학살한 백인들의 모습 등을 통해 나루가 코만치 부족에게 이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한다는 말의 무게가 육중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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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 [6번 칸]은 핀란드, 러시아, 독일, 에스토니아 등의 합작 영화다.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은 마치 박찬욱 감독처럼 칸이 사랑하는 감독인 듯하다. 2016년 데뷔작인 <올리 마키 생애 가장 행복한 날>로 주목할 만한 시선 상을 수상한 이후 두번째 작품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으니 말이다. 영화 [6번 칸]은 핀란드의 여류작가 Rosa Liksom이 2011년에 발표한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6번 칸]은 마치 <비포 선라이즈>의 북유럽판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비포 선라이즈>가 사랑의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화사한 반면, <6번 칸>은 사랑일지 알 수 없는 따스한 감정과 한겨울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차가움이 교차하고 있어 닮은 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마도 기차가 가지고 있는 낭만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 [6번 칸]은 러시아에서 학업을 마치게 된 핀란드 유학생 라우라가 자신의 동성 연인이자 룸메이트가 꿈꾸었던 무르만스크의 고대 암각화를 보러 떠나는 여행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원래 룸메이트와 함께 하려던 여행은 룸메이트가 갑자기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면서 라우라 혼자서 무르만스크행 기차를 타게 된다. 라우라는 자신의 연인을 사랑하기에 그 주위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싶어 하지만, 어쩐지 잘 섞이질 못한다. 실제 이번 여행은 암각화를 본다는 목적보다는 그의 연인과 함께라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암각화를 보는 게 목적이었던 연인은 여행을 취소하고, 라우라만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무르만스크행 기차의 6번 칸에 동행을 하게 된 러시아 노동자 료하가 그녀와의 첫 대면에서 매춘녀 취급하자, 당장 여행을 취소하려 했다. 하지만 연인과의 통화에서 연인은 라우라에게 무심하고, 오직 암각화 여행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만을 말한다. 연인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모스크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시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라우라. 연인과의 인연은 이미 끊어져가고 있는 것 같지만 라우라는 그 사실을 일부러 직시하지 않는 것 같다. 라우라는 료하와의 만남이 싫어 좌석을 바꿔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결국 료하와 무르만스키까지 동행하여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점차 라우라와 료하는 서로의 마음을 열고 순수한 끌림으로 다가간다. 라우라는 여행이 끝나갈 무렵 료하에게 키스를 하고, 주소를 교환하고 싶어하지만, 료하는 어쩐 일인지 키스도 주소 교환도 거부한 채 떠나버린다. 하지만 라우라가 날씨로 인해 암각화를 볼 수 없게 되자, 료하는 헌신적으로 암각화를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암각화 여행을 함께 한다. 암각화는 실제 보잘것 없었지만, 그 둘의 인연은 암각화보다 더 오래 지속될 듯하다. 암각화를 보고 난 후 거센 눈보라 속에서 둘이 함께 눈 속을 뒹구는 모습은 마치 영화 [러브 스토리]를 연상시킨다.

  

이 둘의 감정이 [비포 선라이즈]나 [러브 스토리]처럼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기차칸이 주는 좁은 공간에서 낯선 이와의 만남이 불편함에서 끌림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흥미롭다. 어찌보면 지적 허영심과 외로움에 갇혀 있던 라우라가 거칠지만 순박한 료하를 만나며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이 기분을 묘하게 푸근하게 만든다. 특히 료하의 헌신적인 순박함은 우리가 무엇에 끌리는지를 곰곰히 생각하도록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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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랙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강추! 하지만 슬랩스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비추! 마냥 웃고 싶다면 다른 영화를 보시길.... ★★★☆


2. 천문학과 대학원생과 담당 교수가 새롭게 발견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았다. 이 무시무시한 종말론적 사실을 세상에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먼저 찾아간 곳은 백악관. 하지만 혜성과의 충돌이라는 예견된 사실은 진영 논리에 의해 진실과 거짓의 논쟁으로 바뀐다. 정치가 아닌 언론을 통해 널리 알리고자 하지만, 방송은 무거운 주제마저도 가벼운 농담처럼 다룬다. 사실이 주는 무게감은 사라지고, 출연자들의 이미지만이 소비된다. 이들의 외모와 행동은 밈이 되어 SNS로 퍼져간다. 


3. 정치와 언론이 사실을 다루는 방식을 블랙코미디로 표현했지만, 진짜 현실에서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왜일까? 현실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을 수없이 목격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과학적 발견이 소재로 쓰였지만, 현실에서는 단일한 사건을 둘러싸고 사실이 진실과 거짓의 싸움으로 변질되고, 핵심을 벗어난 가벼운 즐길거리로 둔갑한다. 사실이 사실인지를 점검하는 팩트체크마저도 진영 간의 논리에 의해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을 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실은 그 모습도 영향력도 달라진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4. 뭐, 이런 정도의 비판은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말 그대로 너무나 자주 접해온 일이었기에, 블랙코미디를 통한 웃음이 유발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어처구니가 없다라기엔 우리 현실이 이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경우도 많은 탓이다.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대목은 어찌됐든 혜성과의 충돌이라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이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애초의 핵무기를 발사시켜 혜성을 폭파시키려던 계획은 거대 IT기업 배시의 CEO가 혜성에 수 조 가치의 희토류가 포함되어 있어, 혜성을 파괴하는 대신 드론을 이용해 채굴한다는 계획으로 변경된다. 하지만 드론을 보내기 위한 우주선은 모두 폭파되어 버리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5. 실제 우리에게도 지구온난화라는 종말론적 사실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진영에 따라 달라진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입장차는 커보인다. 아니, 지구온난화는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가로막기 위한 음모라는 주장까지 떠돈다.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은 인간의 탓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라는 주장도 있다. 

입장차도 입장차이지만 이를 해결하는 자세도 큰 차이가 있다. 화석연료를 비롯해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해결책 대신 결국 인간의 과학기술, 첨단기술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주위를 떠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인류가 눈앞에 닥친 위기 앞에서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무도 변하지 않는다면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자명한데도 말이다. 

[돈룩업]의 지구를 향한 혜성은 현실의 지구온난화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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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윅을 1990년대 홍콩영화 식으로 만든다면 노바디가 되지 않을까. 볼거리★ 생각거리★ 마음거리


2. 건들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들였다. 그냥 놔두었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분노로 들끓은 주인공의 가공할만한 복수가 시작됐다.영화 <존 윅>을 떠올리는 통쾌한 액션과 이야기의 흐름. 하지만 액션의 결이 존 윅과는 사뭇 다르다. 


3. 존 윅은 과장된 듯 하지만 절대무적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반면, <노바디>의 허치는 존 윅과 닮은 듯 다르다. 맨 몸 액션은 비슷해 보이지만 총격씬은 마치 1990년대 홍콩영화를 보는 듯하다. 주인공은 총알이 알아서 피해가고, 상대방은 총을 쏘는 대신 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다만 이런 모습이 통쾌함을 안겨주기에 눈에 거스르지 않는다. 


4. 감독은 러시아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인 일리야 나이슐러라고 한다. 이 감독이 오우삼 감독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근거없는 추측도 해본다. 존 윅 식의 액션과 오우삼식 액션(영화 <첩혈쌍웅> 같은)을 좋아한다면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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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장생의 약을 찾기 위해 떠난 서복처럼 영화의 의도는 결국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 볼거리★★ 생각거리★ 마음거리


2. 시한부 인생인 전직 요원 민기헌(공유 분)은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복제인간 서복(박보검 분)을 옮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기헌이 서복과 함께 이동 중 급습을 받고, 둘은 살아남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3. 영화<서복>은 얼핏 기헌과 서복의 로드무비처럼 보인다. 도망다니는 길목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이 신기한 서복과, 오직 자신의 임무만을 빨리 완수하려는 기헌의 갈등이 소소한 재미를 준다. 기헌과 서복의 대화는 마땅히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왜?라는 질문이 갖는 힘을 보여준다. 서복을 빼앗으려는 집단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기헌에게 "왜 당신을 따라가야하죠?"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죠?"라는 식의 질문은 우리가 마주하는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엄청난 에너지 낭비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린 서복처럼 왜 그래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왜?라는 질문없이 살아가는 것은 프로그래밍된 로봇과 다르지 않아서다. 그 대답엔 과학적 이유가 아닌 가치가 숨겨져 있다. 


4. 사람이 영원한 삶을 꿈꾸는 것은 왜일까?(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 아마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즉 죽음을 알지 못하기에 두려운 것이다. 죽음 이후 우리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고 있다면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죽음을 알 수 있을까. 공자는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삶도 알지 못하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답한다. 즉 알수 없는 죽음을 알기 위해 애쓰기 보다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현재에 충실하자는 의미일 터이다. 천상병 시인이 <귀천>에서 이 세상을 소풍왔다 가듯 생각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 그리고 욕망하는 것을 계속해서 이어가고자 하는 욕심의 발로가 불멸의 존재를 꿈꾸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욕망의 충족은 끝이 없고, 욕망의 크기는 더욱 커지며, 결국 욕망을 좇는 그림자로 영원히 살아갈 수도 있다. 물론 불멸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에 불멸의 삶이 축복일지, 재앙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 불멸의 삶을 다룬 소설, 드라마, 영화들은 작품 속 주인공들이 죽음을 꿈꾸는 것으로 묘사한다. 특히나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보내는 고통을 끝도 없이 반복해야 하는 것에 치를 떤다. 그렇다면 모두가 영원한 삶을 누기게 된다면 이런 고통도 없을테니 괜찮을까. 문득 친구의 어머니께서 돌아기시 전에 했던 말씀이 떠오른다. "사는게 지겹다"

영화 <서복>에서도 서복을 제거하려는 이유는 모두가 불멸의 삶을 살게된다면 재앙이라 여기기 때문인듯하다. 


5. 영화 <서복>은 영원한 삶이라는 소재와 함께, 인간의 목적을 위해 태어난 복제인간이나 유전자 조작 인간이 과연 인간일 것인지, 도구일 것인지 묻는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굉장히 많다. 그리고 대부분 답이 정해져 있다. 그들도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 그런데 우리는 장기 이식을 위해 유전자 조작으로 동물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동물은 그저 인간이 아니기에, 마치 우리가 고기를 먹듯, 생명체라기 보다는 수단과 도구로 여기는 사고에 익숙해져 있다. 반려동물로 애정을 쏟는 대상과, 고기를 제공하는 대상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 의도와 목적이 기준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것도 의도와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까. 영화 <서복>에서는 이런 질문을 넌지시 내뱉지만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를 수단으로 여길 때 그 존재의 분노가 우리를 집어삼킬 수 있음을 액션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영화 마지막 10여 분 간 서복의 분노가 터지는 액션은 공을 들인만큼의 특수효과가 빛을 발하지 못한다. 너무 낯익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낯익은 액션 만큼이나 우리 영화에 등장한 유전자 조작 및 복제 인간 '서복' 또한 신선하기 보다 낯익게 다가온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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