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 도대체 이를 어쩐단 말인가요. 정말 난감한 고백을 들은것 같네요.봄방학 종업식날 담임인 유코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우유' 마시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습니다. 한참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물론 우유는 중요하죠.그런데 반 아이들이 방금 마셨던 우유에 깊은 뜻이 숨어 있었네요.그녀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갑니다. 연초 그녀의 4살된 딸인 마나미가 학교 수영장에 빠져 죽는 사고가 일어났고 단순한 사고사로 결론이 났지만 엄마이며 과학선생님인 유코는 딸의 죽음에 대하여 의문점을 가지게 파헤쳐 들어가다가 단순사고가 아닌 타살이란 것을 알아냅니다. 그 마나미는 정말 귀하게 태어난, 남편이 될 뻔한 남자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 때문에 포기하려다 낳은 아이라 더욱 소중했지요.그런 아이를 맡아줄 곳이 없어 어찌하다보니 어린이집이 끝나는 시간에 학교에 데려오게 되었는데 그사이 사고가 나고 만것입니다. 그로 인해 담인은 종업식과 함께 자신은 그만 일을 접는다고 합니다. 자신은 이제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이죠.

왜 그녀가 사표를 내야만 했을까? 자신이 선생님이라면 학생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은 이젠 선생님이 아니니 아이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직접 하겠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해 나갔던 것이죠. 그런데 우유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 우유는 다른 우유가 아닌 남편의 에이즈피가 들어가 있었던 것, 자신의 딸을 죽인 살인자 두명이 그 반에 있었던 것.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하려고 남편의 피를 가져다 그 학생들의 우유에 넣었다는 것인데, 그럼 방금 그 우유를 마신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그녀는 그 살인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나갑니다. 아이들은 13살, 형법에서 벗어나는 나이,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그들은 엄연한 살인자, 그것도 자신들보다 어린 아이를 죽였으니 마땅히 죄값을 받아야 하는데 13살 살인자들은 너무도 당당하다는 것이 문제, 자신들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에 대한 양심도 없는듯 어제와 똑같이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것.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래서 유코샘은 직접 복수를 하겠다며 나선 것인데 선생의 말을 듣던 아이들은 점점 굳어갑니다. 자신들이 살인자와 함께 있고 친구가 살인자라는 것에 대해.

유코는 A, B라고 살인자를 지칭했지만 모두가 알만한 아이들, 유코샘은 일에서 물러나고 살인자라고 지목된 아이들은 그럼 어떻게 될까. 살인자인 나오키와 슈야는 한명은 학교에 나오고 한명은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고 생각하여 학교에 나오지 않고 집에서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은 독특하게 유코가 살인자를 지목하여 우유에 에이즈 피를 넣었다고 하고 사라졌지만 나머지 살인자에 대한 처분은 주위사람들에 의해 또 다른 사건으로 변질된다. 학교에 나온 아이는 모두가 왕따를 시킨다. 그가 에이즈에 걸렸을지도 모르지만 살인자라는 이유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그를 처단한다. 집에 갇혀 지내게된 또 다른 살인자는 스스로 이겨내지도 못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자신을 법으로 처벌하려는 것이 아닌 감싸고 돌자 엄마와 전쟁을 치르듯 하지만 그 엄마도 그런 아들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누가 죽인것인지 모르게 엄마는 존속살인으로 인정이 된다. 하지만 발견된 그녀의 일기장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학교생활을 당당하게 했던 슈야 또한 죄가 사라진 것일까. 그 또한 불우한 삶을 살았던 것.엄마에게 버림받고 엄마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그의 명석함이 암흑을 걷고 있었던 것, 하지만 끝까지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고 엄마를 찾아가도 엄마를 제대로 못 보는 슈야 또한 모든 행동들이 엄마의 주목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 드러나면서 그 또한 불행한 사고를 또 자행하고 만다. 죄의식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 부모의 삐뚫어진 사랑법이 아니 교육이 아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소설은 무섭게 숙주에서 변이된 듯한 사고들로 그 끝을 보여준다. 엄마의 삐뚫어진 사랑법과 관심이 결국 살인자 아들을 만들었고 엄마의 냉대와 자신을 위한 길을 찾아 나선 이기심이 또 한명의 어린 살인자를 낳고 말았다. 마나미의 살인에서 파생된 사건들은 정말 끔찍하고 무서울 정도로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렇다면 유코는 정말 아이들이 마신 우유에 '에이즈피' 를 섞었을까. 그 진실을 반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일이 일어나고 바로 우유팩을 가져다 시약검사를 해 보아서 우유에 피가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입을 다물고 사건을 지켜본다. 우유에 에이지피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유코도 나중에 남편으로 들어 알게 되지만 사건을 조정하듯 한다. 어떻게 복수가 이렇게 변이하여 또 다른 괴생물체를 낳은것처럼 또 다른 복수를 낳고 점점 발전을 해 나가는지. 우리 모두에게는 숨겨진 음이 자리하고 있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드나보다. 그것을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살인자와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으로 나뉘게 되지만 이 소설은 아이들이 13살이라는 것에 주목을 한다. 그들이 양심에 대하여,아니 죄의식에 대하여 깊은 생각이 있을까.죄의식이나 양심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면 그런 장난과 같은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법의 처벌도 받지 않는 나이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살인자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처벌을 해야 할까. 아이취급하여 부모들도 그들을 살인자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을 감싸고 돈다는 것이 문제다. 아직은 어리지만 그들은 살인을 저질렀고 양심도 없는 아이들처럼 자신들이 저지른 살인에 대하여 당당하다. 한낱 장난을 저지른 것처럼 여기도 있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나. 

일본 소설을 읽다보면 '13살 살인자' 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있다. 그것은 그 나이의 살인자가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살인을 저질렀는데 나이가 문제가 될까. 법에서 심판하는 나이가 문제가 되어 살인자이며 살인자를 벗어나는 비살인자가 되는 아이들, 그들을 그렇다면 누가 처벌할 것인가. 그들의 죄를 그냥 놔둔다면 갱생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무엇으로라도 13살 살인자들을 처벌할 수 없어 스스로 복수를 하려고 나선 유코, 하지만 그녀가 하기 이전에 스스로가 됐든 주위 사람들이 되었든 그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의 그물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사회에서 그들을 받아주고 인정해준다면 더 많은 살인이 일어날 것이다. 누군가는 아니 진실은 꼭 심판대에 올라 그 값을 치룬다는 것이다.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으로 처음엔 시시하게 시작되는 듯 하다가 점점 끝을 알 수 없는 재미에 빠져들게 한다. 누가 처벌을 내리든 점점 죄어오는 숨통, '저는 두 사람이 생명의 무게와 소중함을 알았으면 합니다. 그것을 안 후에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깨닫고, 그 죄를 지고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난처럼 시작된 살인은 걷잡을 수 없는 결말로 치달아 스스로 목을 조르듯 죄값을 받는 살인자들, 한사람의 고백은 복수를 낳고 그 복수가 또 잔인한 살인을 불러오는 연쇄사건의 이야기는 숨막히게 한다. 영화로도 나왔으니 영화 또한 원작과는 다르게 어떤 재미를 줄지 보고 싶다. '처음부터 친구라고 생각한 적 없으니까.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센,그런 놈들이 제일 싫거든. 발명가인 내 입장에서 보면 너는 어디로 보나 인간 실패작이야.' 라고 하던 슈야의 냉혈한 말이 자꾸 뇌리에 남는다. 정말 섬짓하다. 어린 아이가 이런 말을 하다니.13살이 아닌 그 이상의 나이처럼 아이가 아이 같지 않았던 것은 부모와 사회가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이 책 제목만 보고 선택한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내겐 너무 먼 책이다. 인문쪽의 책은 손에 꼽을 만큼밖에 보지 않는 내게 '생각의 접붙이기' 에 대한 책이나 정말 방대하고도 그 깊이를 따라가지 못해 몇 번을 헛발을 디디듯 하면서도 읽어나가려 했지만 멈춤 멈춤 그리고 또 멈춤 아직 다 읽지 못했다. 다음에 정말 내게 진정한 시간이 허락하고 저자에게 약간 미안하지 않을때 다시 빼서 읽고 싶은 어찌보면 한없이 밉고 어찌보면 정말 매력덩어리인 책이다.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진주내지 보물이라고 해야 할 듯 하다.한번에 모두를 보기는 아까운 책이다.

'사유의 악보' 제목만 보면 무슨 음악에 대한 이야기인가, 혹은 음악가들에 대한 아니 예술에 대한 이야기인가 하겠는데 정말 모든 방면을 총망라한다고 해야하나 어느 한부분 건드리지 않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의 사유는 정말 대단한 잡식성처럼 음악 영화 문학 인문 예술 철학 모든 방면을 다 아우르면서 '생각 접붙이기' 를 하니 그 스피드를 따라 잡기도 힘들지만 열 살에 서점 한귀퉁에서 호기심에 무심코 뽑아 읽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어떤 '오독' 으로 인하여 인문학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니 정말 대단하다. 그 세월도 세월이지만 열 살때부터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양의 인문학 책을 접했을까 짐작도 가지 않지만 나름의 그만의 철학 또한 방대한 양으로 가지치기를 하고 있으리라. 그런 그에 비해 겨우 손에 꼽을 정도의 인문책을 보고 거기에 <군주론>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니 처음부터 이 책을 이해한다는 것은 격이 안맞고 너무 힘에 부친다.

베토벤이나 모짜르트 그외 쟁쟁한 음악가들만 자신의 악보에 비밀을 숨겨 놓은 것은 아닌듯 하다. 그 또한 그만이 해석할 수 있는 악보를 만들어 놓은 듯 하다. 십여년에 걸쳐 쓴 글들이라 하는데 어찌 내겐 이중 한단락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지,동시대를 살고 있었나 싶다. 보는 방향이 다르고 관심이 달라서라고도 하겠지만 그가 보는 텍스트의 사유는 책에서 뿐만이 아니라 문학 음악 그림 영화등 글에 갇혀 있던 텍스트를 영화속에서도 끄집에 내는가 하면 소설 속에서도 혹은 철학 속에서 끄집어 내어 그만의 새로운 또 다른 가지를 쳐 나간다. 철학이나 그외 지식은 예전 학창시절에 머무르고 있는 수준에 그가 쏟아내는 방대한 양의 지식을 한꺼번에 넙죽 받아 소화를 시킨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소화불량. 이래서 점점 독자에게서 인문책이 멀어지고 기피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좀더 쉽게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접근성이 용이하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공감성을 갖춘다면 좀더 많이 읽게 되고 많이 찾게 될 터인데 나부터 힘들다고 자꾸 놓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하니 정말 아쉽다. 하지만 읽어 나갈수록 빠져드는 알 수 없는 마력이 있다. 어찌보면 읽으면서 사유의 폭이 자신도 모르게 확장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유란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곳 저곳에서 알맞은 음표를 찾아 접붙이기를 하다보면 하나의 교향곡이 될 수 있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사유,새로운 글쓰기.
요즘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쓰다보면 처음과는 다르게 변질되고 새로운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가끔 발견하게 된다. 생각의 가지치기,접붙이기를 하고 있는 자신 말이다. 그런 모습은 내가 읽거나 혹은 보거나 듣거나 모든 것들이 그 이야기에 맞게 접붙이기를 할 수 있는, 어떤 잡학에 가까운 것들을 흡입했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모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점점 새로운 접붙이기가 되고 처음엔 짧게 끝나던 리뷰가 점점 길어지고 자신이 조금 더 잘 알고 있는 종류의 이야기라면 더없이 길어지고 할 말도 쓸 말도 많다는 것이다. 이 책 또한 그런 맥락으로 보고 싶다. 그가 인문과 함께 한 세월과 양이 남과 다르기에 생각의 접붙이기 또한 남과 다르게 특별난 것이다. 그 생각을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책을 모두 이해할 필요도 그의 생각이 모두 옳다고는 보지 않지만 '사유' 란 꼭 필요한 것임을, 중요성 정당성을 읽을 수 있다.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보지 못했지만 크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그랜 토리노>에서 ' 복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러한 지연과 그에 대한 자연스러운 불안의 감정, 곧 법치에 대한 일종의 '뒤틀린' 믿음 그 자체 때문이었을 것.' 이라 표현해 놓았다. 어찌보면 그는 영상이나 그외 정형화되지 않은 텍스트를 어찌보면 글이란 그만의 텍스트로 너무 매력있게 정형화 시키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나싶다. 그만큼 지식의 양도 다양하고 방대하겠지만 말이다. 

좀더 나의 지식의 깊이가 있었다면 정말 재밌게 읽었을 책이다. 아니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 다시 읽게 된다면 좀더 재밋게 있을 수 있으려나.아직은 내겐 너무 어려운 책이다. 어렵다고 책장 한 켠에 모셔두고 싶지도 않은 책이다. 그의 생각을 뒤쫒을 수 있을 때까지 몇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인문책을 좀더 많이 읽어봐야겠다는 것,나의 독서 편식이 이 책에서 드러난다. 그동안 잘 사용하지 않던,흔히 쓰지 않던 용어들을 만나면서 내 사유의 폭은 얼마나 넓어졌을까. 아니 '사유의 악보' 앞에서 움츠러든것은 아닌가 걱정도 된다. 내가 소화는 하지 못한 책이지만 정말 매력적인 책이라는 것은 알만하다. 누군가 정말 맛잇게 읽어줄 이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이 분야를 좋아한다면 그와 난형난제하듯 재밌게 읽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나의 반성, 너무 깊이 없는 책읽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뒤돌아 보는 자신을 본다. 어찌보면 나의 책읽기에 일침이 될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세계는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성해 나가는 것이었다.' 라는 말처럼 구성된 것을 따라가기 보다는 만들어 가야할 듯 하다. 사유라는 것 또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람혼 2011-04-15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중하고 섬세한 서평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사유라는 것'의 길이 제게 또 다른 길을 안내하는 것 같습니다.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서란 2011-04-17 23:04   좋아요 0 | URL
리뷰가 부족한데 흔적 남겨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책인데 제가 인문을 멀리해서 조금 거리감은 있었지만
재밌게 읽었고 다음에 한번 더 기회를 만들어볼까 한답니다.
 
반성 - 되돌아보고 나를 찾다
김용택.박완서.이순원 외 지음 / 더숲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살면서 뒤돌아보면 후회되거나 반성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있을까. 우린 모두가 크거나 작거나 혹은 계속되는 일이라도 한가지는 가지고 산다.나 또한 지난해 연말에 아버지를 보내 드리며 아버지 살아생전에 너무 못해드리고 안해드린 것들이 많아 후회되어 엄마께는 잘해드려야지 했던 것이 어제일 같은데 전화도 자주 않하고 찾아뵙지도 못하고 살고 있다. 반성은 그때뿐이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산다는 것이 힘들다. 날마다 새로운 일과 새로운 것에 적응하며 살다보면 날마다 후회와 반성으로 점철되는 하루가 되다보니 지난 반성거리는 잊기마련이다.

여기 그런 이야기들이 모여 있다. 부모님에 대한 반성이라든가 친구에 대한 반성이라든다 혹은 이웃에 대한 혹은 내 행동에 대한 한가지 문제에 대하여 들려주는 이야기마다 '그래,맞아..' 하고 공감을 한다는것은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고 고치려고 하지만 고쳐보겠다고 하지만 잠간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것에 대한 반성보다 부모님에 대한 반성이 유독 가슴을 울린다. 눈물이 난다. 나 또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고 나와 비슷한 공감을 자아내어 내가 못한 부분을 후회하듯 울컥했다. 산다는게 어찌보면 다 비슷비슷 한듯 하다.

어찌보면 '반성' 하고 산다는게 참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도 분간을 못하며 살고 있는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잘하고만 사는 줄 알지만 주위의 이야기를 들어보다보면 내가 못하고 사는구나 느낄때가 있고 나이가 들어가다 보면 그땐 정말 잘못했다는 것을 느낄때가 있다. 그런다고 그 모두를 고쳐 앞으로 아무 잘못없이 후회없이 산다는 보장은 없다. 반성문은 반성문일 뿐이다. 어제 잠깐 티비를 보다보니 각서와 반성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오락프로였지만 각서를 쓰라는 그말이 좋다는, 그것은 일이 종결되었다는 말이라는 것에서 웃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초등시절 선생님들은 반성문을 쓰라는 말을 참 많이 하셨다. 그런데 반성문을 쓰는 사람은 정해져있다. 반성문을 썼다고 하여 그의 행동에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쳐진것도 아니고 늘 단골 반성문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성은 반성으로 끝난다는 것일까.그렇게 반성을 한다는 것 자체를 높이 사야 하나.

어머니의 문안전화,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가 아침 정해진 시간에 딸에게 한번씩 전화를 해오다가 안하면 그날은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이틀 전화가 없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인데 작가는 전화를 선뜻 먼저 하지 못하고 기다린다. 그러다 받게 된 전화,어머님이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는.. 왜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일까. 먼저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면, 자신밖에 없는 혼자인데 왜 망설였을까. 아마도 무서웠을 것이다. 그러면서 보게된 어머니의 통화내역엔 온통 딸의 이름뿐이지만 자신의 핸펀은 그렇지가 않다. 어머니와 나의 핸드폰의 무게가 다른것처럼 느껴진다,다행히 어머님은 차도를 보여 퇴원하시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셨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던 순간이다. 돌이켜보면 이런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잘해야지 하면서도 안되는 것이 부모님이고 자식에게 이다. 내 주위에 있기에 더 안되고 맘뿐인것이 피붙이인듯 하다. 나 또한 친정엄마께 전화라도 적적하지 않게 자주 해야지 하던 것이 이젠 수화기도 잘 들지 않는다. 엄마가 잘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님 집에 안계실거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다보니 계절이 바뀌고 있다.부모님은 결코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늘 곁에서 영원할거라 생각하는 부모님은 하루가 다르게 에너지가 빠져나가고 있다. 젊을때하고는 다르게 하루가 정말 빠른 속도로 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내 일상이 바쁘다고 뒤로 미루어 두게 되는 우선순위가 부모님이다. 아쉽다. 

반성이 부모님께 혹은 자식에게만 있을까 김용택의 '태환이 형,진짜 미안해' 을 읽으니 뭉클하다. 돌보지 못했던 분들이 아쉽게 떠나고 나니 그의 삶의 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지나고 이제 와서 그의 속살을 들여다보듯 한다고 죽은자가 살아 돌아올리 없고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자식과 아내와 떨어져 홀로 외롭게 술로 살아간 사람, 그가 큰소리로 외치며 동네를 떠들썩 하게 했는데 그가 없으니 동네가 조용하다. 그의 메아리는 어디선가 울리고 있겠지만 그게 이승이 아니란것이 슬프다. 무언가 소중한 것은 곁에 있을때는 모른다. 그것이 옆에서 사라지고 나면 그때서야 비로소 그 값어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때늦은 후회만 남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듯 하다.잘해주고 싶었지만 잘해주어야 했어지만 그때는 몰랐던 형, 그곳에서나 행복하길 바랄뿐.

남에게 자신의 치부를 내보이는 것 같아 소설을 쓰지 못하는 글쟁이, 그것을 바쁘다는 핑계속에 묻어 놓으며 자꾸만 뒤로 미루고 있다. 그러다 듣게 되는 한마디 '너 왜 책 안내냐?' '잘 써지지 않고...... 마음에 안 드는데 그대로 내면 욕먹을 것 같아서요.' '그럼 욕먹어. 욕먹고 나면 더 잘 쓰게 돼.' 그렇다. 욕을 먹기 싫다고 자신을 핑계속에 묻어두고 포장하고 했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의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못은 망치로 자꾸 두둘겨 맞아야 들어가듯 자신의 잘못된 곳을 자꾸 독자에게 지적을 받고 욕을 먹어야 고쳐지고 발전이 있지 쓰지도 않고 출판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능력이 어느정도인지 어떤 상태인지 모르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욕을 먹기 싫어서 망치질 당하기 싫다면 왜 못이고 글쟁이겠는가. 두드려 맞을수록 단단해질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따끔한 충고를 해주면 우린 그런 사람을 몹시 경계하거나 싫어한다. 자신에게 나뿐말을 해준다는 것으로, 하지만 난 다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그 자신을 제대로 보고 평가를 내린 사람이다. 그런 말은 가슴에 잘 새겨두어야 자신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딸에게 따끔한 충고를 잘한다. 엄마만큼 딸을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그러면 딸은 늘 하는 말이 '엄마만 내게 그런 말을 해.남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엄마도 좋은 말좀 해봐.' 그런데 어쩌랴 딸의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 엄마인데. 딸의 발전을 위해서는 엄마가 나서야지 남이 결코 나서주는 것은 아니다. 친구나 그외 사람들은 적일수도 있다. 적에게 충고를 하는 법은 없다. 길지 않은 삶이지만 돌아보면 정말 반성할 일과 행동이 많다. 그렇다고 그 일들을 모두 고친다고 삶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모두 고칠수도 없지만.. 삶은 인생은 어쩌면 반성과 후회로 그렇게 흘러가는 듯 하다. 그게 삶이고 인생이지 완벽한 사람은 없다. 좀더 예전보다 좋게 고쳐질 수는 있지만.그런 의미로 친정엄마께 전화좀 해야겠다. 잘 계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슴이 시키는 일 - 꿈과 행복을 완성시켜주는 마음의 명령 가슴이 시키는 일 1
김이율 지음 / 판테온하우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에서 제일 거리가 먼 것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라는 말이 있다. 가슴은 시키지만 머리가 받아 들이지 않는 일이나 머리는 하자고 하는데 가슴에서는 우러나지 않는 일, 정말 가까우면서도 거리가 제일 먼 것 같다. 그런데 '가슴이 시키는 일' 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열정을 다 바치며 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과연 몇 %나 될까? 그렇게 사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이다.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려고 한다면 그만큼의 그 일을 위해 '포기' 해야 하는 것들이 있을 듯 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슴이 시키는 일' 을 하지 못하고 살기에 그런 말도 나오지 않았을까. 평범한 사람들은 가슴이 시키는 일이 아닌 자신이 해야만 되는 일, 어쩔 수 없어서 해야만 되는 일을 하며 사는 경우가 더 많을 듯 하다. 꼭 하고 싶은데 딸린 식구가 있어서, 꼭 하고 싶은데 나이 때문에.. 하며 후회하거나 아쉬워 하는 경우가 더 많고 그냥 꿈으로 간직하거나 예전에는 나도 하며 한번쯤 간직했던 일로 가슴에 묻어 두고 사는 경우가 더 많다. 나 또한 하고 싶었지만 나이 때문에 혹은 애들 때문에 접어 두거나 묻어 두고 사는 일들이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런 일을 실행한다는 것은 더 큰 위험이고 많은 것을 포기할 것을 감수해야만 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그렇게 살고 있다.몰라서가 아닌 어쩔 수 없으니 지금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은 참 좋다. '가슴이 시키는 일' 을 하며 산 사람들, 그들이라고 포기하지 않고 얻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가슴 뛰는 삶을 우해 故 이태석 신부는 어머님이 원하던 의사의 길이 아닌 신부가 되어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수단의 톤즈에 가서 버려지듯 했던 행려자들인 한센인들을 돌보기도 하고 내전으로 황폐해진 그곳사람들과 함께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꿈을 이루기도 전에 그는 자신이 싸워야 하는 암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이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행복의 완성' 이란 플서스 메시지의 글에 이런 글이 있다. '행복이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도움이 필요한 법이죠. 누군가는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주면 됩니다.' 행복이란 나를 필요한 하는 곳에 도움이 되면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간단한 것인가. 하지만 우린 세잎클로버 속에 숨은 '네잎의 행운' 을 찾기 위하여 무수히 많은 행복을 저버린다. 단 하나의 행운만 잡으려고. 세잎클러버의 말은 '행복' 이다. 행복은 널려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네잎클로버의 행운이 아닌 지금부터는 세잎클로버의 행복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요즘 여행기로 우리에게 다가온 K본부의 전 아나 '손미나' 씨. 그녀의 여행기 <태양의 여행자> <스페인 너는 자유다>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 책들은 그녀가 아나운서로 머물러 있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책들이다. 과감하게 아나운서는 '지금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에요. 언젠가는 해야지 수십 번 다짐하고 또 다짐하거늘 늘 그 자리에요. 그리고 지금 제 가슴이 그 일을 하라고 해요.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또 제자리가 될 것 같아요.' 라는 말과 함께 사표를 던지고 떠났기에 이런 책들을 쓸 수 있었고 새로운 세상과 만날 수 있었다. 모두가 부러워 하는 아나운서라고 하여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런 가슴 뜨거운 일도 그리고 책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감하게 지금 사표를 던질 수 잇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면 몇이나 될까? 취업도 어려운데 사표를 과연 던질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진짜 삶이란 플러스 메세지에 '커다란 가짜보다 작지만 진짜 삶을 키워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머무를 필요는 없다. 망설임과 두려움과 손익분기점은 모두 불살라 버려라. 바로 가슴만이 답을 줄 것이다.' 모두가 그런 삶을 한번쯤은 살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가슴에서 밖으로 머리까지 전달되어 행동에 옮기며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있을까. 있기야 하겠지만 '작지만 진짜 삶' 을 위하여 과감하게 고인물에서 뛰쳐 나가 새로운 오아시스를 찾아 떠날 자가, 그가 부러운 세상이고 현실이다. 꼭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고 있어야 하는 세상이지만 우린 우리도 모르는새 남의 눈치를 보며 살고 있다. 남편은 아내의 눈치를 부부는 아이들의 눈치를 자식은 부모의 눈치를 그렇다보니 고인물에서 새로운 오아시스를 찾아 떠난다는 것은 언제 실행될지 모르는 미래지향적 꿈인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나도 한번쯤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것 또한 그 사람들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았기에 그렇게 판단할수 있는 것이고 또 '가슴이 시키는 일' 을 하고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이 들겠지만 그들에게도 위기와 실패가 왜 없겠는가. 사람인데.. 사람이란 시행착오를 거쳐 비로소 현재에 이르는 오류의 학습의 달인들이다. 잘못되고 있는 것을 알고 느끼고 있지만 생각만큼 잘 고쳐지지 않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기 보다는 남의 삶이나 인생을 들여다보고는 간접적으로 판단을 하기도 한다. 나에게 비추어서 말이다. 김연아가 피겨의 여왕이 되었다고 하여 모두가 김연아가 될 수는 없다. 김연아 한명이기에 '김연아' 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여러명이라면 김연아가 될 수 없다. 가슴이 시키는 일도 모두 다르겠고 자신에게 가슴 뛰는 일도 다 다르겠지만 왜 자꾸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약해져 가는지. 본의 아니게 두루두루 눈치를 보면서 낑겨 살아야 하는 삶, 비단 나 혼자 느끼는 삶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개중에는 정말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가슴 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가 가끔 가슴을 울리기도 하고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한다. 한번쯤 나도 도전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 나이 가족 가정 모든것을 뒤로하고 말이다.'습관의 고리는 너무 작아서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뜨려 버리기에는 너무 강해진 후에야 발견됩니다. 처음에는 거미줄이지만 결국에는 강철줄이 되는 것이 습관입니다.' 

내가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지 못하고 가슴 뛰는 삶을 살지 못해도 그런 이야기들을 읽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는 것으로 족하다. 무언가 잔잔한 가슴에 돌이 하나 떨어져 멀리 파문을 일으킨것처럼 그 여운이 가시지 않고 가슴에 깊게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만족에서 벗어나 실행에 옮기길 바란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꼭 있으리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세계 최고령 마라톤 완주자 '파우자 싱' 할아버지 이야기도 가슴이 뜨거웠고 그외 많은 이야기들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타인의 삶이고 타인의 이야기라 더 대리만족을 주는 가슴이 시키는 일, 하지만 얻는 것도 있다. 목표가 없는 삶과 있는 삶은 완전히 다르며 노력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생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 크지만 않지만 난 내 나름대로 작지만 가슴 뛰는 삶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해봐야겠다. 봄, 시작과 출발의 계절에 맞추어 안성맞춤이었던 책이다. 지금 무언가 망설이고 있다면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구려 1 - 미천왕, 도망자 을불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고구려,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졌던 나라지만 고구려의 역사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한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도 주로 다루어지는 것이 조선의 역사와 왕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고 고구려는 많이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라 더 관심이 간다. 작가의 역사소설은 손에 잡으면 스피드하면서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생각을 하기 이전에 소설에 빠져 들어 읽다보면 금받 다음 권을 잡아야 할 정도로 흡입력이 있다. 그의 전작들인 <천년의 금서> 도 그랬고 <1026> 도 재밌게 읽었는데 이 <고구려>는 연작으로 13권까지인가 나온다고 하니 그때까지 기다려볼 수 밖에. 

요즘은 드라마에서도 그렇고 소설에서도 그렇고 역사가 많이 등장을 한다. 이 소설에 나온 부분도 드라마에서 본 듯도 한데 겹쳐 생각하며 읽으니 재밌다. 소설은 고구려 주변정세와 더불어 도망자 신분이 되어야만 했던 을불, 미천왕에 대한 이야기다. 고구려 주변정세도 시끄럽지만 안에서도 무척 혼돈의 시대인듯 하다. 조카 을불을 지키기 위하여 안국군은 사약을 마시고 죽는가 하면 을불의 아버지는 형인 상부에게서 을불을 지키기 위하여 바보와 같은 낮은 자세로 임한다. 하지만 을불의 가슴속에는 안국군과 함께 하던 어린시절이 남아 있어 그런 아버지도 못마땅하고 자신의 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신도 못마땅하기만 하다. 

고구려는 위로는 오랑캐들이 넘보는 나라였지만 밑에서는 또 치고 올라오려는 그런 중간적 입장에서 내정 또한 이렇게 시끄러웠으니 백성들의 원성 또한 자자했을 듯 하다. 소설은 미천왕은 왕이 운명을 타고 났지만 시대가 아니기에 잠시 피해있어야 할 운명임을 설화적인 기법으로 풀어낸다. 상부의 눈을 피해 아들을 살리기 위해 피신을 시킨 을불의 아버지는 형이 내린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을불은 겨우 죽음의 손아귀를 벗어나 떠돌아야만 했다. 이곳저곳 떠돌며 소금장수를 하며 주변정세를 읽은 을불, 그러다 낙랑에 도착하여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쳤으나 직접적인 칼싸움을 해보지 않아 몰리게 된 그를 구해낸 양운거와 소청에 의해 무술을 배우게 되는 그지만 그곳에서 적은 있었다. 소청을 좋아했던 방정균 때문에 그곳을 떠나야 했던 을불,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씀씀이가 남과  달라던 그다. 

그러다 저가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잡입을 하며 기회를 보다가 시월 동맹제에 무술대회에 참가를 하게 되면서 마지막 경합까지 남게 된, 하지만 그 자리에서 뜻하지 않게 상부를 만나게 되면서 다시 도망자가 되지만 이제 힘은 그의 편이 된다. 한사람 한사람 친구를 얻게 되고 힘을 얻게 되고, 저가의 도움으로 낙랑에 들어가 힘의 원천인 '철' 을 구할 방도를 찾아 떠나는 그들, 과연 그들은 철을 구할 수 있을까. 철을 구한다면 그 철을 무기로 하여 상부에게서 힘을 빼앗아 고구려의 왕이 될 수 있을까. 왕손이었지만 미천한 소금장수로 전락하여 주변국을 떠돌아야 했던 그에겐 오히려 떠돌이 생활이 그에게 힘이 되었고 주변정세를 더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그에게서 안국군을 보았던 이들은 그에게 하나 둘 돌아오게 되고 그에게 힘을 실어준다.

천운은 어찌할 수 없나보다. 피할 수 없는 천운덕에 어디를 가도 지혜를 발휘하여 멀리 그리고 더 넓게 보았던 그, 이제 고구려는 서서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권력은 아무리 굳건해 보여도 언제나 넘보는 자가 있기 마련이고, 그 장본인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그는 금과옥조처럼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상부가 안국군에게 빼앗은 자리라면 상부 또한 누군가에게 그렇게 빼앗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백성을 얼마나 편안하게 다스리느냐가 중요할 터, 미천한 소금장수로 떠돌이 생활을 해 보았고 최고의 무술지도자에게 무술도 연마했고 주변을 떠돌며 상단에도 휩쓸려 보았으니 주변정세를 남보다 더 세세하게 알게 되었으니 을불은 어쩌면 준비된 왕인지도 모른다. 낙랑이며 위로 오랑캐들이 주변이 시끄런운 속에 고구려가 있었으니 나라는 힘있고 지혜로운 왕을 원했을 것이다. 

'친구란 신분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닐터, 마음이 통하면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으면 목숨처럼 소중한 친구가 되는 게 아니겠는가.' 을불, 비록 미천하게 떠돌고 있지만 그가 만나는 인연마다 소중하게 여기고 믿음을 중요시 했기에 그의 힘의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 소설은 대화체로 빨리 읽을 수 있으면서 현실과 허구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재밌다. 역사소설을 읽다보면 허구가 실제인줄 알고 오류에 빠질 수 있는데 이렇게라도 고구려를 좀더 가깝게 느낄 수 있고 알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한것 아닐까. 오래전 역사시간에 배운 역사지식이 전부다이니 미천왕이 있었던가 하는 물음표를 가지게 되는데 을불 그가 미천왕이었구나 하는 것을 하나 알게 된 소설이다. 정조 드라마 덕에 그의 이름이 '이산' 임을 알게 되는것처럼 말이다. 1권을 후다닥 읽었는데 2권이 궁금하다. 이렇게 어떻게 끝까지 기다릴지 모르겠다. 국운이 을불에게 어떻게 쏠릴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가 소청을 택할지 아영을 택할지도 궁금하다. 일제가 만든 한반도에 갇힌 역사에서 더 넓게 밖으로 나가 마음껏 만주벌판을 호령하듯 했던 소설속 그들을 만나니 기분 좋다. 이제 시작이지만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더 넓은 벌판을 향해 나아갔던 그들의 기상을 빨리 만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